▣ 후에 안 즉 ▣(행 28:1-10)
2002년 5월 12일
주일예배(성찬주일)
선교학자들에 의하면 국민소득이 $5,000이 될 때까지는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다가 $5,000이 넘으면서 그 증가율은 점점 완만해 지고, 그러다가 $10,000이 넘으면 하강곡선을 긋는다고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도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기독교의 증가가 정체가 되기 시작하다가 95년부터 약간 준 것으로 통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 실제로는 많이 줄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모든 교계의 대표가 모여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사람을 한 사람 뽑는다면 어떤 사람을 뽑겠습니까? 건강하고, 머리 좋고, 신앙내력이 훌륭하고 등등 가장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뽑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어떤 훈련을 시켰겠습니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 철학, 심리학을 가르치고, 언어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 고대어는 물론이고, 영어, 불어, 독어 등도 가르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잘 마친 후에야 "한국교회의 지도자가 되어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을 두 사람 들라하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인데,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시작할 정도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 모든 왕들을 평가하는데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신앙인으로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를 보면 그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훈련을 시키신 적이 없습니다. 골리앗에게서 이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도망을 다니는 것이 주요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도(王道)를 가르치지도 않으셨고, 전쟁을 하는 병법훈련도 시키시지 않으셨습니다.
삼상 30:1-4절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본문의 앞의 내용을 설명 드리면 이러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잡으러 다니고, 다윗은 도망을 다녔습니다. 다윗은 결국 더 피할 데가 없어서 적국인 블레셋으로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블레셋에 있는 방백 중에 아기스라는 사람이 다윗을 비호해 주고 블레셋으로 귀화하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미움을 받아서 블레셋으로 들어온 사람이니까 귀화한 사람이라 믿고 비호해 주지만, 다른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아기스는 이 때야 말로 다윗이 이스라엘을 외면하고 블레셋 사람이 된 증거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함께 나가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을 왔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숨어 다니던 처지라 안나갈 수도 없고, 나가서 싸우자니 답답하고,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따라나갔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데리고 싸움터에 나갔더니 전쟁하러온 다른 방백들 사이에서 '다윗은 과거에 우리의 골리앗 장군을 죽인 사람인데 어떻게 같이 싸울 수 있다는 말이냐? 싸우다가 뒤에서 우리를 치면 어떻하느냐?"며 "안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아기스는 "이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편이다"라고 변호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궁지를 모면한 셈이지만 얼마나 그 마음이 아슬아슬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거주하면서 성을 쌓고 있던 시글락에 돌아와 보니까, 자신의 가족들, 함께 따랐던 부하 장수들의 가족들이 모두 아말렉 사람들에게 잡혀가고 가축도 다 빼앗기고, 재산을 모두 약탈당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훈련시킨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울며 도망만 다닌 것 같은데, 지나고 보니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존경하는 성군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예기치 못했던 환경이 올 때, 우리는 당황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나님께 항변이 섞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왜 나는 이런 일만 해야 하나?"고 문득 의문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이 상황이 나를 훈련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최선의 환경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유라굴로 태풍으로 인해서 바울이 타고 있던 배는 천신만고 끝에 멜리데란 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섬에서 두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사건은 지난주에 살핀 바와 같이 바울이 그 섬의 지도자였던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안수하여 치유해 주자, 각종 질병을 가진 많은 섬 주민들이 찾아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한 사건은 그 섬 주민들이 불을 피워서 배에 탔던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주었는데, 불을 지피기 위해서 바울이 나뭇가지를 주워 넣다가 독사에게 손이 물리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여기서 말하는 토인은 식인종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에 헬라 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야만인이라 불렸습니다. 영어로 '야만인'을 'barbarian'이라 합니다. 이것은 당시 멜리데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페니키아어(Phoenician)를 사용했는데, 그 말이 'bar' 'bar'하게 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어렸을 때에 외국사람이 영어로 말하는 것을 '쏼라 쏼라'한다고 했습니다. 그것과 동일합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내가 헬라인이나 야만인에게나 빚진 자라(롬 1:14)"고 했는데 이 의미 역시 헬라 말을 할 줄 아는 사람과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헬라중심의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하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
또 바울이 뱀에게 물린 것은 불에 넣으려고 했던 나무에 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바울이 천벌을 받아 마땅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제 19일 후에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됩니다. 지난 98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에 들 확률은 8%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주최국으로서 톱시드를 받았기 때문에 그 때보다는 더 높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들은 그 확률에다 앞에 9자를 하나 붙여서 98%나 되는 것처럼 떠들었습니다. 가전제품 회사에서는 자사의 가전제품을 산 후, 한국이 16강에 들면 하나 더 준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 분위기는 하석주 선수가 멕시코 전에서 첫 골을 넣을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에 출전해서 먼저 골을 넣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환희는 채 1분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석주 선수는 백태클을 하다가 퇴장을 당했고, 경기는 결국 3-1로 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비난은 하석주 선수에게 쏟아졌습니다. "하석주는 뭐가 하석주냐?" "하나 넣고 석점 주는 것이 하석주다"라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그 다음 경기인 네덜란드 전에서는 5-0으로 졌습니다. 그러자 당시 감독이었던 차범근씨를 그 자리에서 경질했습니다.
사실 하석주 선수는 우수합니다. 별명이 '왼발의 달인'입니다. 우리나라가 축구를 잘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선수는 대부분 오른발잡이인데, 왼발을 잘 못씁니다. 그리고 차 감독은 선수시절에도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선수들을 지도할 정도로 과학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기지 못한 것은 그 두 사람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실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 한가지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일 한가지를 보고, 앞의 것까지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했던 것과 달리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자 정반대의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사람들은 바울이 악인이기 때문에 독사에게 물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뭔가 큰 잘못을 해서 바다에서 죽이려고 신이 작정을 했었는데, 죽지 않자 결국 독사에 물려 죽게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바다에서 그 풍랑 속에서도 안 죽더니, 이제 독사에게 물려도 안 죽는구나. 그러니 신이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즉 살인범, 천벌을 받을 사람에서 신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반대의 경험도 있었습니다. 행 14장에 보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에 루스드라 지방을 들렀습니다. 거기에는 발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체장애인이 되어서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와 제우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의 Zeus는 로마의 신명(神名)으로 하면 Jupiter입니다. 그는 신들의 우두머리입니다. Hermes는 로마의 신명으로는 Mercury에 해당하는데, 제우스의 아들이자, 신들의 대변자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전해 내려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루스드라 지방의 수호신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루스드라 근처에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모양으로 변장을 하고 방문하였습니다. 날이 저물고, 피곤해서 하룻밤 머물기를 원했지만 집집마다 거절당했습니다. 마침내 짚과 갈대로 엮은 한 초라한 오두막집에 묵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는 빌레몬(Philemon)과 바우시스(Baucis)란 늙은 농부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정성껏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제우스는 농부 부부에게는 상을 내리고, 나머지 마을 전부를 물로 쓸어버렸습니다. 농부 부부가 살던 집은 신전(神殿)이 되었고, 그 부부는 사제가 되어 신전에서 봉사하다가 죽어서는 두 그루의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걷게 되자, 사람들은 "신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그 때에 바울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며 자기들 역시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14:15)'고 말했습니다. '성정'이라고 하는 말은 '인간의 연약성과 죄성'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즉 다시 표현하면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당신들처럼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입니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신이 아니라 자신들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돌로 쳐버렸습니다.
멜리데 섬에서 있었던 두 사건 즉, 바울이 독사에게 물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과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서 고침을 받은 일로 말미암아 276명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3개월 동안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 본문을 보블리오의 부친의 입장에서 읽으면 어떠했겠는가를 살폈습니다. 또한 이 본문을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읽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자신들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뵈닉스로 가서 겨울을 지내자고 극구 주장을 했습니다. 그들의 소원대로 배가 뵈닉스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거기서 겨울을 보냈다면, 그들은 그러한 쾌락만이 인생의 전부인줄로 알고 살았을 것입니다. 또한 풍랑이 불었을 때에, 그 배에 바울이 없었다면 그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여기에 멜리데 섬에 도착해서도 이 두 사건이 없었다면 그들이 3개월 동안 어떻게 그 섬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3일만 있어도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음식과 잠자리 등 신경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손님으로 3개월을 머물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척 등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고서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도 병이 들어 입원을 하게되면, 처음 한달 정도는 교인들이 열심히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면 후임을 모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200명이 넘는 사람들은 섬 주민들에게는 불청객들입니다. 그러나 바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잘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배가 처음 출발할 때에는 바울에게 주목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수로서 로마에 끌려가서 검투사들의 노리개가 되거나, 맹수의 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에게 도움을 입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생명을 바울이 쥐고 있다는 사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많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나, 5년 전이나 한국의 정치는 다른 것이 거의 없습니다. 5년 전에도 대통령이 아들로 인해서 곤욕을 치렀는데, 지금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한 대통령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상설 친인척 비리 감찰기구'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사람들이 권력자나 권력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친한 척하는 것은 뭔가의 떡고물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사람에게 도움을 입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은, 자신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도움을 입을 수는 있어도 사마리아 사람에게 도움을 입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그러한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깨달음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멜리데 섬은 지금의 시실리아(Sicilia) 남쪽에 있는 몰타(Malta) 섬입니다. 이 사람들은 태풍을 만나 14일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원래 가려고 했던 목적지의 턱 밑까지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만나면 남들보다 뒤쳐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진급이 남들보다 늦게될 때, 참 많이 속상해 합니다. 또 학생들에게 있어서 고 3을 지나 바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재수나 삼수를 해야 하게 되면 많이들 어려워합니다. 사실 부모님들이 더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누가 먼저 가고, 또 어떤 삶이 더 나은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찬송가 503장 2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그리고 본문 1절에서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곳이 멜리데 섬이라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다 가리켜주시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알려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전 7:14)
오래 전, 조그만 신앙잡지의 상담코너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셨을까요?"
뇌성마비로 전신을 쓰지 못하는 아들을 둔 여자입니다. 단 한번도 땅을 밟아보지 못한 아들이지요. 단 한마디 말을 하려해도 온 몸을 비틀어대는 아들을 길러낸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힘 때문이었지요. 이 아들을 중심으로 온 가족이 단란하게 예배를 드리고 밑으로 둘이나 있는 자식들도 집에 있을 때는 언제나 그 애 곁을 맴돈답니다. 술이나 먹고 흔들어 대던 남편이 이 아들로 인해 성령을 체험했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교회에서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십 줄에 들어선 제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며느리 자랑, 결혼식 준비 이야기, 예물이 어떻고....... 이런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밤새도록 통곡을 한답니다. 내 아들도 정상이었다면 결혼할 나이가 아닌가. 아들이 불쌍하고, 내가 불쌍하고, 남편이 가엾고, 인생에 패배한 것 같고, 나중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을 주체하지 못해서 미칠 것만 같습니다. 뒤돌아보면 25년이란 세월을 잘도 벼텨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서 있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도와주세요.
아마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수도 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자녀가 몇이나 있습니까?" "셋 있어요." "뭐 해요?" "막내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둘째는 대학에 다니고, 큰애는....... 그냥 집에 있어요" "아니 왜요?" "그를 사정이 있어요."
어쩌면 남들이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두 명 밖에 없다고 대답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25년 동안 이 분은 사람들이 자녀의 '子'자나 아들의 '아'자만 들어도 피하고 싶고, 화제를 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는 정말 고독하고 힘든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 아들은 이 가정에 어쩌면 큰 약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온 가정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 뇌성마비 동생을 둔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아침 7:30분에 부모님이 1부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 여학생이 11:30분에 3부 예배와 청년부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다른 또래 학생들과 보다는 훨씬 더 성숙했습니다. 깊은 사고를 하고, 다른 사람을 정말 잘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학생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너의 이러한 성숙한 모습은 동생에 네게 준 선물이다"
때때로 우리의 계획과 다른 모습의 결과로 우리의 삶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바다 위에 있었지만, 때로 우리에게는 그 기간이 14개월이 될 수도 있고, 14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우리들의 것보다 높으십니다. 우리에게 때때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드리시겠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둘러서 가는 것 같이 보여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가는 것 같고, 나의 희망이 덧없이 사라지는 것 같이 느껴져도,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고, 너무 멀리 있어서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것이 뚜렷이 보일 것을 믿습니다.
비록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아름다운 작품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