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머니와 염낭주머니
귀주머니 : 조그만 소지품·돈 등을 넣고 입술에 주름을 잡아 졸라매어 허리에 차거나 손에 들고 다니는 장신구.
비단 헝겊으로 만들어 수를 놓거나 금박을 박기도 하는데, 옛날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지녔다. 특히 한복에는 조끼를 제외하고는 물건을 넣을 만한 호주머니가 없어 실용적인 면에서 더욱 필요하였다.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유사』 경덕왕조(景德王條)에 “왕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婦女)의 행동을 좋아하여 비단주머니를 즐겨 차고 다녔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 여인들이 주머니를 많이 찬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 귀가(貴家)의 부녀자들은…중략…감람륵건(橄欖勒巾)에 채조금탁(采條金鐸)을 달고 금향낭(錦香囊)을 찼는데…”라고 적혀 있어 고려시대에도 주머니를 애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후기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데 발기[件記]의 일종인 낭발기(囊撥記) 등에 십장생줌치 · 오복꽃광주리낭 · 오방낭자 · 십장생자낭 · 수(繡)낭 · 고목수줌치 · 오방염낭 · 황룡자낭 · 봉자낭 · 부금낭(付金囊) · 자라줌치 등 많은 종류가 있었다. 임금은 용무늬의 황룡자낭, 왕비 · 공주 · 옹주는 봉황무늬의 봉자낭을 지녔다. 부금낭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나타내는 주머니이고, 오방낭(五方囊)은 청 · 황 · 적 · 백 · 흑의 5색 비단을 모아서 만든 5행론을 상징하는 것이며, 수(繡)주머니인 십장생줌
치는 매사에 길상(吉祥)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주머니다.
귀주머니 또는 줌치의 꾸밈새는 남녀용이 같은데 가장 닳기 쉬운 양쪽 귀와 중앙부 아래쪽 배꼽 부분을 따로 감싸듯 한 겹 더 대고, 가장자리는 곱게 상침해 주머니 원형에 부착시켰다. 주머니 입술에도 상침을 놓고 폭을 3등분하여 양 솔기를 중앙을 향해 접어 오므려 육모주름을 잡고 안단을 댄 목 위치에 2개의 송곳자리를 내어 주머니끈을 꿰었다. 끈을 뒤에서 앞으로 꿰고 매듭을 맺어 주머니의 앞면을 장식하였다.
염낭주머니 : 주머니는 돈이나 소지품을 넣기 위하여 헝겊으로 만들어 입구를 졸라매도록 만든 물건이다. 삼국시대부터 허리춤이나 가슴부근에 찼는데 실용성과 장식용을 겸한 것이었다. <삼국유사> 경덕왕조에 “혜공대왕이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한 것을 보면 삼국시대 이후로 계속 착용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에 “고려 귀족집의 부녀자들은 감람늑건을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을 달고 비단으로 만든 향낭을 찼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려 때에도 주머니를 애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후기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는데 기록으로는 주로 궁중이나 민간에서 기록한 건기(사람이나 물건이름을 죽 적은 글발)인 <낭발기>등에 많이 나타나다. 주머니는 비단이나 무명을 재료로 하며 끈은 당팔사(중국에서 만든 8가닥의 실로 꼰 노끈)를 사용했고 나비, 매화매듭, 등을 맺으며 주머니 겉에는 부귀, 장생을 상징하는 길상문을 장식하였다. 주머니의 형태는 크게 나누어서 둥근 모양의 두루주머니(염낭)와 각이 진 귀주머니(줌치)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문양이나 쓰임에 따라 황낭, 궁낭, 산수낭, 매화낭, 계지낭, 오복낭, 등이 있었다.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주머니는 주로 궁중이나 민간에서 기록한 [건기]인 ‘낭발기’에 나타나 있는데 특히 순종황제의 첫 번째 결혼인 임오가례때 모든 물목이 양적으로 가장 많아 인조 이후의 의궤를 뒤져보아도 유례 없이 호화판을 이룬 것을 볼 수 있다. 가례때 소용되는 패물이나 낭은 막대한 수이고 따라서 ‘낭발기’가 많으며 평상시 내인들에게 하사하시거나 정월에 모든 종친들에게 보낸 ‘낭발기’가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주머니는 남녀를 막론하고 찼으며 그 신분에 따라 천과 색과 그 부금 여부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발기에 나타난 주머니의 명칭은 많은데 '황룡자낭', '봉자낭', '부금낭' 등은 지배계급의 권위를 나타내주는 주머니라 하겠고 오행론에서 나온 '오방낭'은 청, 황, 적, 백, 흑의 오색비단을 모아 만든 주머니이며 '수주머니', '십장생 줌치', 등은 길상사상에서 나온 주머니라 하겠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이들 '낭발기'는 가례 때나 5월 첫 해일에 때에나 왕비의 친정, 기타 종친들에게 '염낭' 또는 '줌치'를 보냈다. 궁중에서도 경사스러운 탄일에 입는 대례복에는 다홍색 바탕에 진주를 단 진주주머니를 찼으며 특히 정월 첫 해일에는 볶은 콩 한 알씩을 홍지에 싸서 주머니에 넣고 종친들에게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것은 해일에 주머니를 차면 일년 내내 귀신을 물리치고 만복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민층에서도 돌잔치나 환갑잔치 등에 주머니를 선물하는 것이 통례였다. 이 밖에 각종 문양을 수놓아 화려하게 만든 향주머니나 바늘 집은 장식의 의미도 있어 노리개로 패용 하기도 했다.
우리 옷에는 주머니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하였던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옷에는 남자의 조끼를 제외하고는 물건을 넣을 수 있는 ‘포켓’역할을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실용적인 면에서도 따로 만들어 사용해야 되며 장식품으로서도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주머니는 주로 밝은 색 계통의 천을 사용하여 아름다운 수를 놓아 장식하였으며 미적인 장신구로도 큰 역할을 하였다. 주머니는 남녀를 막론하고 찼으며 신분에 따라 천과 색과 부금 여부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