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면극
양반탈, 은율탈춤(중요무형무화재 제61호) ☞ 탈춤이란 한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된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조선 인종 12년(1634)에 궁중에서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은율탈춤(殷栗-)은 단오에 2∼3일 동안 행해지고 그 밖에 석가탄신일과 7월 백중놀이로도 행해진다.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사자춤ㆍ상좌춤ㆍ8목중춤ㆍ노승춤ㆍ영감과 할미광대춤의 6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숲에 모여 탈에 제사를 지내고 공연장소까지 탈과 의상을 갖추고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상좌ㆍ목중ㆍ말뚝이ㆍ맏양반ㆍ둘째양반ㆍ새맥시ㆍ셋째양반ㆍ원숭이ㆍ노승ㆍ최괄이ㆍ영감ㆍ할미ㆍ무당ㆍ사자ㆍ최괄이 아들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상을 보여준다. 다른 탈춤에 비해 호색적인 표현이 심하며, 파계승보다 양반을 모욕하는 대목을 강조하고 있다. 팔목중춤 다음으로 양반춤이 나오는 것은 강령탈춤과 은율탈춤 뿐이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무당과 신할미, 송파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송파산대놀이(松坡山臺놀이)는 서울ㆍ경기 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과 단오ㆍ백중ㆍ추석에 명절놀이로 공연되었다.
송파마을은 경기일원의 상업근거지로, 약 200년전 송파장이 가장 번성하던 때에 산대놀이가 성행하여 오늘날까지 전하는 놀이형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송파산대놀이는 전체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하고, 가면을 배열해 놓고 고사를 지낸다. 놀이내용의 구성이나 과장ㆍ춤ㆍ탈 등이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몇 개의 탈과 춤, 배역이 옛 형태를 지닌 것이 특징이다. 즉 양주별산대놀이에서는 이미 사라진 화장무 춤사위가 남아 있고, 해산어멈ㆍ신할미ㆍ무당의 탈이 남아 있어 이들 탈들이 맡은 역이 따로 있다. 바가지, 소나무껍질, 종이 등으로 만든 탈 33개가 사용되며, 놀이형태는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동작이 곁들여진다.
송파산대놀이는 옛 형태를 지닌 민중놀이로 중요무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각시탈, 하회별신굿 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 ☞ 별신굿이란 3ㆍ5년 혹은 10년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서낭)님에게 마을의 평화와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을 말한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는 약 500년 전부터 10년에 한번 섣달 보름날(12월 15일) 내지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무진생(戊辰生) 성황님에게 별신굿을 해왔으며 굿과 더불어 성황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는 각시의 무동마당ㆍ주지마당ㆍ백정마당ㆍ할미마당ㆍ파계승마당ㆍ양반과 선비마당ㆍ혼례마당ㆍ신방마당의 8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를 시작하기 전 대내림을 하는데, 정월 초이튿날 아침 성황당에 올라가 당방울이 달린 내림대를 잡고 성황신을 내리면 당방울을 성황대에 옮겨 달고 산에서 내려온다. 성황대와 내림대를 동사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비로소 놀이가 시작된다. 등장인물로는 주지승ㆍ각시ㆍ중ㆍ양반ㆍ선비ㆍ초랭이ㆍ이매ㆍ부네ㆍ백정ㆍ할미 등이 있다. 파계승에 대한 비웃음과 양반에 대한 신랄한 풍자ㆍ해학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제사의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각시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 외에는 볼 수 없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한다. 또한 탈을 태우며 즐기는 뒷풀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탈은 주지탈 등을 포함하여 모두 10종 11개로 오리나무로 만들었으며 옻칠과 안료를 두세겹 칠하여 색조의 강도를 높였는데, 원본은 1964년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탈놀이의 반주는 꽹과리가 중심이 되는 풍물꾼이 하며 즉흥적이고 일상적인 동작에 약간의 율동을 섞은 춤사위로 이루어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우리나라 가면극의 발생이나 기원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면극, 단오제, 서울 ☞ ‘단오굿’이라고도 하며, 대표적인 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제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이다. 《동국세시기》등을 보면 “안변 풍속에 상음신사(霜陰神詞)에 선위대왕(宣威大王)과 부인이 있다고 전하는데, 매년 단오에 선위대왕 부부를 모셔다가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경북 군위에서는 “단오에 서악(西岳)의 김유신 사당에서 신을 맞이하여 고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옛날에는 여러 지방에서 단오제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전승되고 있는 단오제로는 대관령 국사선황(大關嶺國師城隍)과 대관령 여성황을 대관령 산꼭대기에서 맞아 시내 성황당에서 모시는 강릉 단오굿과 문호장(文戶長)이라는 신령한 인물에게 올리는 경남 창녕군 영산 지방의 ‘문호장굿놀이’가 있다.
이 중 강릉단오제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이 35세 때인 1603년(선조 36)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이미 단오제가 거행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강릉 단오제는 강릉시의 거시적인 민속미술행사가 되어, 음력 5월 2일부터 5월 7일까지 대관령 국사성황에게 풍습과 풍어를 기원하고 줄다리기ㆍ씨름 등 각종 놀이 행사를 한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높은 날’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추강냉화(秋江冷話)』)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許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藁)』) 등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단오제를 드리지 않으면 마을에 큰 재앙이 온다고 믿어 대관령서낭당에서 서낭신을 모셔와 강릉시내의 여서낭신과 함께 제사를 드리는데, 대관령산신은 김유신 장군으로 전해지며, 단오제에서 주체가 되는 서낭신은 범일국사이고, 여서낭신은 강릉의 정씨처녀로 전해진다.
단오제는 신에게 드릴 술을 담그면서 시작된다. 대관령산신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신성시하는 나무를 모시고 내려와 국사성황당을 거쳐 홍제동에 있는 국사여성황당에 모셨다가 행사 전날 저녁 영신제를 지내고 남대천 백사장에 마련된 제단에 옮겨 모심으로 강릉단오제의 서막을 올린다. 단오장에서는 5일간 아침, 저녁으로 제를 올리고 굿을 하며 농사의 번영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제를 올린다. 이밖에 양반과 소매각시, 장자머리, 시시딱딱이가 가면을 쓰고 말없이 관노가면극놀이를 하거나, 그네뛰기, 씨름, 농악경연대회, 창포머리감기, 수리취떡먹기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된다. 단오 다음날에 신성시하는 나무를 태우고 서낭신을 대관령으로 모시면서 단오제는 막을 내린다.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는 제관의 의해 이루어지는 유교식 의례와 무당들의 굿이 함께 거행되는 동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축제로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고 난장이 크게 벌어진다. 특히 관노가면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무언극으로 대사없이 몸짓으로 관객을 웃기고 즐겁게 한다. 민간신앙이 결합된 우리나라 고유의 향토축제이며, 지역주민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협동정신을 볼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그 문화적 독창성과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2005년 11월 25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영감과 서무, 강령탈춤(중요무형문화재 제34호) ☞ 탈춤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한 후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상연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인조 12년(1634)에 궁중에서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강령탈춤(康翎탈춤)은 매년 단오에 행해지는데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밝힐만한 자료는 없으나, 늦어도 조선 후기까지는 성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놀이는 사자춤ㆍ말뚝이춤ㆍ목중춤ㆍ상좌춤ㆍ양반과 말뚝이춤ㆍ노승과 취발이춤ㆍ영감과 할미광대춤의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탈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등장인물은 마부ㆍ사자ㆍ원숭이ㆍ말뚝이ㆍ목중ㆍ상좌ㆍ맏양반ㆍ둘째양반ㆍ재물대감ㆍ도령ㆍ영감ㆍ할미ㆍ용산삼개집ㆍ취발이ㆍ노승ㆍ소무 등 모두 20명이다. 파계승에 대한 풍자와 양반계급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의 삼각관계와 서민의 생활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춤은 느린 사위로 장삼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장삼춤이 주가 되며, 장단에는 도드리, 타령, 자진굿거리가 주로 쓰이지만 소리의 사설이 30여 가지나 되고 소리마다 장단이 특이하다.
강령탈춤의 내용 중에서 양반 3형제가 나와 양반의 근본을 찾고 말뚝이를 부르거나 말뚝이가 재담하는 과장은 경남의 오광대와 비슷하고, 할미광대가 물레를 돌리는 장면은 가산오광대와 매우 유사한데, 이러한 유사점은 탈춤의 전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사실적인 얼굴 모습을 묘사한 인물탈을 쓰고 장삼춤을 추는 아담하고 부드러운 점이 같은 황해도 탈춤인 봉산탈춤과 다른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