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즉문즉설의 원리와 취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후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인간관계, 사회문제, 마음공부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남자 친구가 아이를 지우기 원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마음을 이야기했습니다.임신을 하고 나서 남자 친구와 헤어졌어요
“저는 남자 친구와 교제 중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기를 원했지만 남자 친구를 아이를 지우는 걸 원했습니다. 지금은 그 남자 친구에게 아이를 지웠다고 거짓말하고 헤어진 상태입니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여쭙고 싶습니다.”
질문자는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데 왜 눈물이 나요?”
“잘 모르겠어요.”
“어제 즉문즉설에서는 미국에 계신 45세 여성이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구입해서 아기를 낳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느냐는 질문을 했어요. 나이가 45세인 데다 이번이 첫 출산이면 20대나 30대에 비해 산모의 위험이 높잖아요? 아기 건강 상태도 나빠질 확률이 높죠. 또 45세에 임신을 해서 46세에 아기를 낳으면, 아이가 성년이 될 때 산모의 나이는 66세가 됩니다. 거의 은퇴할 나이가 되니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비교적 많은 사람이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정자를 받아서 많은 돈을 지불하고 인공수정을 통해 아기를 낳고 싶어 했습니다. 그 사람과 질문자를 비교해보면 질문자는 그 사람보다 조건이 좋아요, 안 좋아요?”
“좋아요.”
“우선 나이가 25세이니까 젊다는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에 있어요. 산모가 건강하니까 아기도 건강할 확률이 높아요. 정자를 구하는데 돈이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인공수정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어요, 필요 없었어요?”
“돈이 필요 없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정자를 받아서 아기를 낳는 게 좋아요? 지금은 헤어졌더라도 한 때 내가 좋아했던 사람의 아기를 낳는 게 좋아요?”
“제가 좋아했던 사람의 아기를 낳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울어요?”
“울 필요가 없네요.” (웃음)
“물론 아이를 낳아서 혼자 키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또 따져봐야겠지만, 우선 울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질문자는 현재 아무런 나쁜 조건이 아니에요. 그런데 뭐가 그리 슬퍼서 울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서 우선 왜 우는지 물어본 거예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일어난 일은 울 일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고, 전생의 죄도 아니고, 궁합이 안 맞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벌을 준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선택했고 그 결과가 나온 거예요. 이제는 다음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만 남아 있어요.
길을 가다가 옥상에 있던 간판이 떨어져서 다쳤다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간판을 맞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돼요? 병원에 가서 얼른 치료를 받아야 해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래요. 우선 치료를 받고 나서 그 간판이 또 떨어지지 않도록 주변 점검을 해야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피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지금 질문자가 임신을 한 건 이미 일어난 일이고,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것도 이미 일어난 일이에요. 지금 남은 건 ‘이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아기를 낳아서 혼자 키운다고 하더라도 정자은행을 통해 아기를 가지려는 사람에 비하면 지금 질문자의 조건이 훨씬 좋다고 할 수 있겠죠?”
“네.”
“지금 임신 14주가 넘었어요, 안 넘었어요?”
“안 넘었어요.”
“그렇다면 한국의 법률로는 임신 14주까지는 중절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윤리나 도덕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 그건 차치하고서라도, 만약 혼자서 키우기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이 들면 중절 수술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임신 중절 수술을 선택해도 현재는 사회 통념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질문자가 특정 종교를 갖고 있어서 중절 수술을 하기 어렵다면, 그 역시도 개인의 신념이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천주교 신자라면 신앙적 가치를 선택해서 아이를 낳아서 키워도 좋고, 불교 신자라면 불살생 계율에 따른 자신의 가치관을 선택해도 좋습니다.
지금은 어떠한 선택을 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각각의 선택에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이 부여될 뿐입니다. 한 예로 조선조 말엽에 천주교인들은 ‘나는 내가 섬기는 하느님 외에는 절을 하지 않겠다’ 하는 믿음으로 조상들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했고, 그 대가로 목숨까지 내놓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는 길을 선택한 거예요. 지금 질문자는 자기 신념이든 믿음이든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일단 혼자서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하더라도 그건 죽는 일까지는 아니잖아요?”
“네.”
“죽음을 앞에 두고 자기 신념이나 믿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일은 죽는 것에 비하면 쉬워요, 안 쉬워요?”
“쉬워요.”
“그런데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아이를 낳고 혼자서 키우기로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아이를 키우다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과 같이 사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고, 여러 가지 조건을 감안했을 때 중절 수술을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에요.
요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다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가능해요, 안 가능해요?”
“가능해요.”
“그래요. 그러니 그 길도 열려있어요. 이런 선택지를 두고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만 남아있어요. 질문자가 선택한 길에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마땅히 받아들여야겠죠.
아이를 낳아 혼자서 키운다면 우선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해야 할 거예요. 대신 혼자서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아빠를 미워한다면 그건 질문자가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라는 반증이에요. 만약 질문자가 정자은행에서 받은 정자로 인공 수정해서 아이를 낳았다면 정자의 주인을 미워할까요, 안 할까요?”
“미워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조건이 좋은데 왜 그 남자 친구를 욕하느냐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는 여기서 딱 선택을 해야 돼요. 선택을 하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남자 친구가 잘했니, 잘못했니 따지거나 후회할 필요가 없어요. 만약 아이를 낳기로 했다면 아이를 혼자 키울 때의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해야지, 나중에 ‘낙태할 걸 그랬다’ 이렇게 후회하면 안 됩니다. 후회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낙태의 길이 열려 있으니 그걸 선택하면 됩니다.
지금 질문자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고 혼자 키우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둘째, 낙태를 하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셋째, 아이를 키우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넷째, 아이를 낳아서 바로 입양시키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입양을 보내게 되면 나의 종교적 신념도 지킬 수 있고, 나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죠. 이 세상에는 아이를 원하지만 낳지 못해서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에는 아이 한 명을 입양하려면 적어도 몇 천만 원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에게 무료로 입양을 보내면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아서 버리는 건 안 됩니다. 아이를 버리는 게 아니라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를 원하지만 갖지 못해서 고통받는 사람에게 아이를 보내는 선택을 하는 거예요. 이때 아이를 키우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건 좋지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아이에게 미련이 남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이를 혼자서 키운다고 해도 당당해야 합니다. 미혼모나 이혼녀가 과거에는 편견을 가진 말들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나쁜 말이 아닙니다. 모든 동물들은 다 암컷이 새끼를 혼자 키웁니다. 그런데 왜 토끼나 강아지한테는 미혼모라고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건 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시대에 만들어진 편견입니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어요. 아직도 남자에게 의지해서 살려고 하거나, 뭔가 잘 안 되면 남자를 욕하거나 비난하며 살아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에요. 여성 스스로 당당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질문자에게는 네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네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일이에요? 지금처럼 울어야 될 일이에요?”
“선택할 일이에요.”
“또 남자 친구를 만나서 임신을 했다는 건 내 몸이 불임이라는 거예요, 건강하다는 거예요?”
“건강하다는 거예요.”
“그렇게 내 몸이 건강하다는 테스트도 한 번 해봤잖아요.”
“네.” (웃음)
“이번 일을 통해 ‘나는 임신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도 확인하게 된 거예요. 남자 친구를 만날 때 어리석음에 빠져서 지금의 어려움에 처했듯이 이번에 선택을 할 때는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어요.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딱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걸 선택해야 합니다. 지금 선택한 것에 대해 나중에 가서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대거나 후회하지 말고요.
나중에 아이를 키우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다시 아이 아빠를 찾거나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세요. 그런 남자는 나중에 와도 쫓아버려야 해요. 나중에 찾아와서 아이를 보고 싶다고 말하면 이렇게 말하세요.
‘당신 아이 아니야! 당신 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아이야.’
이렇게 말하고 쫓아버리세요. 이런 정도로 엄마가 당당해야 아이가 커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아빠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도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엄마가 아빠 역할까지 다 하는데 아빠가 왜 필요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아이에게는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어버이’라고 부르도록 하세요. 그렇게 자기 자신한테도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세요. 미혼모가 아니라 아버지 겸 어머니라는 뜻을 담아서 ‘어버이’라고 아이가 부르게 하면 됩니다.
엄마가 당당해야 아이도 당당하게 크지, 엄마가 눈물이나 흘리고 있으면 아이는 마음속에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뭔가 잘못됐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데는 아무런 잘못이 없잖아요.
저는 아이를 낳아서 키우라거나 아이를 낳지 말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선택 중 어떤 걸 선택하든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책임질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 당당한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 일은 슬퍼할 일이에요, 슬퍼할 일이 아니에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괴로워할 일이에요, 괴로워할 일이 아니에요?”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불안해할 일이에요, 불안해할 일이 아니에요?”
“불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두려워할 일이에요, 두려워할 일이 아니에요?”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요. 그게 우리 대화의 핵심이에요.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질문자가 할 일이지 이 대화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질문자가 어떤 결정을 하든, 거기에는 슬픔도 없고, 괴로움도 없고, 불안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어야 해요. 부모님의 눈치를 볼 것도 없어요. 부모님이 걱정을 해도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제가 스무 살도 넘었고, 제가 선택했으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딸을 믿으세요.’
이렇게 당당하게 나가야 해요.”
“감사합니다.”
눈물을 쏟아내던 질문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관점을 바꾸고 나니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화상회의 방에 입장한 방청객들도 감동의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