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어린 고양이 >
김영주 2023.1.9
기억은 늘 흩어져버린 구름처럼 형체가없다.
어린 고양이 한 마리와 맞닥뜨린 일이 장마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긴가민가 신뢰감 떨어지는 실마리를 붙잡고 병목에서 와인을 쏟아내듯 붉은 기억을 털어내어본다.1년치 휴대폰 메모장을 뒤져보니
짧게 그날의 기록이 있었다.작년 9월 초였다.
여름지나고 억수로 몇날며칠 개천이 범람할만큼 비가 내렸다. 늦장마라고들했다.성깔 사나운 계절의 독살스러움이 들판의 초목을 눕혔고 도심에는 지하방
에 살던 장애인 가족이 숨졌다. 서울에서 반지하
살이가 곧 사라질듯 뉴스는 시끄러웠다. 세상살이에 소심한 나는 화초화분들이 직사각형 TV 테두리를
덮어 자막이 헷갈릴만큼 대강 되는대로 코로나로 어수선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던 때였다. 찰나에 스친 어린 고양이 한 마리에 대한 아주 짧은 기억하나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왜 내가 늦은 오후에 출근을 했는지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원래하던 업이 아닌 일을 일시적으로 해야만해서 매일 출근하던 일이 매우 큰 중압감으로 견딘고 있다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며칠 폭우가 내리고 결국 하늘이 개었다. 인적드문 보행길 난간에 평소와 달리 보송한 갈빛 물체 한 덩어리가 말려있었다.
놀랍게도 시선을 내리꽂고 내려다본 곳에 어린 고양이 크고 깊은 검은 수정체가 요동도없이 박혀있었다. 흡사 유년의 시골집 벽에 걸린 할매의 낡은 족제비 목도리같았다. 스텐레스 난간에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걸려있었다. 몸통은 척추를 제거한 빈 털목도리로 착각할 정도였다. 난간 금속이 햇살받은 차가운 반사광은 이상야릇하게 두루뭉실한 형체와 대비를 이루어 매우 이질감을 갖게했다. 정체를 뚜렷히 내려다보니 놀랍게도 아사 직전의 척추뼈를 가진 생명체 하나였다. 살과 기름을 다 날리고 가죽이 되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명히 살아있는 눈망울이었다. 몹시도 지친 기색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귀찮다는듯 고개를 고가아래 개천쪽으로 다시 떨구었다. 사람따위 관심없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이 다가와도 모처럼 햇살드는 대서 털을 말리니 너는 조용히 지나가란 뜻이였을지도 모른다. 숨조리조차 내지 못하고 도망갈 기력도 없어 보였다. 가끔 숨쉬는 허파운동이 말라가는 고양이 털들을 들썩거리게 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순간, 뭔가 해야할 것 같은 당혹감이 들었다. 가방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급히 까서 난간이 인프란트처럼 꽂힌 잇몸에 내려 놓았다. 먹이인 줄 알았을 터였다.어린 고양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섣불리 직접 소고기를 볶아 넣어 만든 인간의 반찬 냄새를 풍겨 먹게할 참으로 속을 갈라 펼쳐 놓았다. 시간에 쫓겼다. 반차를 내고 출근 길에 더 지체할 수 없었다. 고양이 시선이 닿는 곳에 밀어 두며
"야! 먹어"하고 돌아서 가려던 찰나였다.
날카로운 외마디 저항의 소리와 함께 고양이는 허공으로 날았다. 심장이 굳는 듯했다.
난간에 둘둘 말려있던 몸을 풀어 10미터 아래 개천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버렸다. "오~마이갓! 오~마이갓!" 나도 고양이처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지가 논개도 아니고 내가 외적도 아니고...메달려 떨어진 자리에 거친 물살이 갈라지고 철퍽 물소리가 났다. 파문이 번진 소용돌이 같은 거친 물살 속에서 고양이가 살아서 모래섬을 둘러 엎어진 수초를 헤치고 무사히 사악한 인간의 땅(도망친 고양이 생각)에서 해방된 게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양이 먹이로 벌려 놓은 삼각김밥의 쇠고기 속살이 불필요한 음식물 쓰레기처럼 어지러웠다. 괜한 짓을 했다싶었다. 그냥 먹고 편히 쉬었으면 좋잖아. 바보 고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나는 지치고 어린 고양이에게 의도치도 않았으나 방해자이거나 위협자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출근후에도 다음 날 다시 나선 같은 출근 길에도나는
어린 고양이의 잔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을이 지났다. 겨울이 한바탕 매서운 추위로 기세를 떨치고 지나갔다. 1월인데 1주일씩이나 낮기온 영상인 오늘도 그길을 지났다. 그때마다 고양이 몸이 얽혀있던 난간 한 칸을 자꾸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지친고 어린 고양이는 거처인 수로 어디쯤인가 홍수로
돌아갈 수 없어져 길을 찾다 며칠이고 어미와 자신의 영역을 못 벗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초록원피스를 입은 이상한 인간이 고양이 앞에 나타났다. 그게 출근길 나였다. 어쨌든 고양이는 죽을힘을 다해 나를 거부하며, 내장이 터질 충격을 감내했을 것이다. 물속으로 낙하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편이 더 좋은 결단이라고 작은 생명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 갔다.
도심 속 인간 거주지 경계에서 태어나 어미로부터 이탈한 어린 고양이가 살아가는 나름의 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알았지만 고양이는 소리에
매우 민감한 특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제 습성대로 낯선 인간의 소리 "야, 먹어!" 자신을 위협으로 날카로운 공격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양이에 대해 무지로부터 나는 고양이에게 적일 뿐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맞닥뜨린 대상의 속성에 무지한 탓이었을뿐이라고 쉽게 털면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을에서 겨울로 계절이 두번 바뀌고 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어린 고양이를 잊고 못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 당시 나의 모습도 흡사 어딘가 고양이를
닮아 있던 탓아닐까싶다. 이상기후로 억수로 퍼붓던
비의 나날들이 하지 않던 일을 억지로 견뎌고 지내는
나의 나날들과 닮아있었다. 얼굴빛은 살아온 내 습성대로 웃고 있었지만, 시선은 내 좋아하는 자연의 녹음과 빛의 변화는 삶의 길에서 줄곧 눈 길을 주고 있었지만, 내 살과 몸속의 기름은 매일 조금씩 척박해져 가고 있었다. 길 위 뿌리고 다닌 경비와 보낸 시간들이 매일 반복되는 억압받는 노동에 야금야금 생기를 뺏겨가고 있었다. 스스로 상실하면 안될 것들 중 시간을 대부분 노동에 빼앗기고 나면 자신은 탈피한 매미 껍데기처럼 고목인
사회라는 벽에 붙어 비어가는 공허감을 느끼고 있던 때였다. 삶의 과정에서 내게도 분명 누군가가 소고기가든 삼각김밥을 조건없이 놓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린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물로 뛰어 내렸듯이 나나름의 몸에 밴 습성을 타인이 건들까봐 시들어가면서도 고양이처럼 낯선 끼니에 쉬이 달려들지 못했다. 어린 고양이의 야생의 행동에서 동화되지 못해 홀로서기를 어처구니없이 해 온 자화상을 엿본 탓일 거라고 떠올리곤한다.
오늘은 겨울답지 않은 영상의 월요일이었다. 아무도 직장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지독한 날은 어김없이 도돌이표처럼 현실로 오고야만다.
어린 고양이가 낯선 나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몇초만에 벌어진 일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떨치지못한 채 의식에 들어와 뇌에 꽂혀버린 것 같다. 뭐랄까 왠지 속살 깊은 곳에
닿을 수 없어 치유할 수없는 상채기처럼 후련치않게
줄곧 의식에 떠돈다. 벌이를 멈출 수도 없으니 나는 매일
같은 길을 지나야한다. 속 내도 못 풀어내고, 다시 볼 날도 없는 인연처럼 잊지못하는 허망함에 어처구니가 없다. 퇴근후에도 어떤 날은 개천길따라 한강으로 가는 산책길을 걷고 귀가할 때가 있다. 뛰어내린 고양이 그림자가 큰 물길타고 한강으로 못나간 채 물웅덩이에서 성채가 된 잉어떼에 섞여, 내 의식을 끌고 자꾸 강바닥으로 헤쳐 모였다 흩어지는 환영을 볼 때가 있다.
여기 사람의 손을 타지않고 야생에서 태어나 어떻게인가 인간이 상상못한 방법으로 도심 개천어느 수로에서 성장해가는 어린 고양이 한 마리 있다. 사람 덕분에 배불려 본 적도 없는 작은 고양이의 통찰력은 의도치 않게 내민 손길이 절대 자신을 위한 선한 손길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안다. 누군가에게 의도치않은 악이 되어 버렸다는 참담한 기억이 그 날의 일이기 때문에 강렬하게 의식에 잔영으로 남아버렸다. 고양이도 나도 어느 누구도 고의도 그렇게 되고자 한 쪽은 아무도 없었다. 품지도 먹이지도 못한 나의 어린 고양이는 지금쯤 성체가 되었을까, 어떻게든 살아있을까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상대의 속성을 모르면 다가감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미묘한 아픔 같은 게 느껴진다. 사람의 인연도 의도치 않게 나와 나의 어린 고양이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양이가 죽기살기로 날아 간 난간 아래에도 지난 연말에 새보도블럭이 하얀모래를 덮고 깔렸다.
살찐 비둘기들은 난간에 쪼르르 앉아 깃털을 들썩이며
쉬고 있다. 자신들보다 거대한 인간인 내가 지나가거나
소리를 내도 거들떠도 안본다. 제 가진 습성대로 보도블럭을 연신 쪼다보면 배가 불러오고 킷털에 기름기가 오른다는 것을 인간의 거처 언저리에서 성장한 비둘기들은 경험치로 알고 있다. 나의 어린 고양이만 모른다. 힘써 날아간 세상에서 무탈하기를 기원해본다.
ㅡㅡㅡ
어느 카페에서 찍은 나의 어린 고양이 비슷한 모습의 냥이
첫댓글 오랜만에 ㅎㅎㅎ 왜 가슴이 저며올끼? 한 때는 길고양이 20여 마리에게 사료를 챙겨주다
이사를 하는 바람에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기억? 그녀석들 잘 이겨냈을까?
1년만에 글 하나 써보았습니다.
먹고사느라 창작의욕이 유지가 안되네요.
올 해는 시간이 가는 게 무서워서
노력해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의도치 않은 고양이와의 만남과
이별처럼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디.
어린 고양이가 무사히 잘 지내고
있길 빕니다 ^^
네
숱한 인연과의 만남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시골 길고양이들은 먹이를 달라고 토방에서 몸을 말고 있어요. 그들은 지칠줄 몰라요. 아마도 그 고양이도 어느곳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오랫만에 뵙습니다.
냥이 특성상 산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고양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경계심이 강한 동물이죠...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타협하고 인간들의 보살핌(그들의 삶의 터전을 모조리 뺐은 것에 대해 사과하는 듯한...) 속에서 살아가는 녀석들이 많은데, 그 어린 녀석은 아직 타협할 만한 경험이 없었나 봅니다. 어쨋거나 잘 살아있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대화는 참 어려워요. 그래도 강아지나 비둘기처럼 쉬이 다가오면 참 좋을텐데. 그들 고양이와는 아주 어려운가 봅니다.
어차피 자기 힘으로 살기가 어렵다면 마음을 고쳐먹고, 인간 중에도 김영주 작가님 같은 이는 자비로운 동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참 좋겠습니다. 청도 박영환 시인이나, 공주 서문순 작가께서는 아주 오랫동안 녀석들을 보살폈지만, 여전히 한 발도 내어주지 않는다고 한탄하시더라구요. 그들의 운명이고 업이 아닌가 합니다. ^^
잘 감상했습니다.
자주 오세요. 전 아주 떠나신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사유 깊은 수필을 쓰시면서도, 우리 서정과 거리를 두시려 하시나 때론 오해도 하게 됩니다. 오해겠지요. 허 허
오랫만에 뵙습니다.
딱 1년만에 글 한편 써보았네요.
인자와서 얘기이나, 보이는 게 다는 아닙니다.
저는 사실 애3을 키워온 여성 가장입니다.
가방끈은 짧지않으나
그도 코로나에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외국어가 전공이다보니
운신의 폭이 없었습니다.
작년 참 힘든 한 해를 보내다
스트레스로 쓰러져 유선배님보다
먼저 갈뻔했습니다.
존버정신(졸라 버티는 정신)으로
겨우 생존해 있습니다.
작년 1/1 서정에 시 한 편 올린 후
글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 간의 경험도 값진 것이니 슬슬
풀어 내야 후련할까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풍경/김영주(50기) 그러셨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올해는 여러 어려움 다 털어내시고
예전처럼 씩씩하게 재도약 하시기 바랍니다.
'존버정신'... 참 재미있는 말이군요. ^^
동물과 교감하는 사람들의 내밀한 감성들이 신비로워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포악한 애완견을 길들이는 과정도 마찬가지이고요.
뒷산에 오를 때면 버려진 강아지가 조금씩 커가는 과정을 보게 되는데
어느 날은 산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데 뒷 꼭지가 서늘해지더군요.
몸을 날린 고양이는 그 순간에 그런 결심을 얼마나 숨이 막히게 했을는지...
가끔 이효리 캐나다 체크인, 해외 입양 간 강아지들을 만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다가 눈물을 흘리게 되던데
사람과 동물이 잘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글만 썼으니
효리씨와는 차원이 다르지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참 정이 많으시군요
비록 정으로 받아주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사람도 그럴때가 있어요
참 난감할 때가 참 여린 김영주님을 봅니다.
아이고 대 선배님!
참 여리게 태난듯하나
이번 생애에는 할 수없이 존버정신으로 견디느라고 남들 보기에 강인한 엄마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다녀 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