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교통사고 한건이 얼마나 많을 사람들을 울리고 있는지 모른다. 피해자들이 대부분 30대에서 50대라고 했다. 퇴근후 저녁을 함께하고서 퇴근길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잘 다녀올께'하고서 집을 나갔던 아빠 혹은 남편들이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신호 대기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날아오듯 덥친 차량을 멀거니 바라보며 피할 생각도 못하고 당한 사람들은 누구에게 억울함을 하소연 할까. 삶은 억울함의 연속일까. 사고자는 급발진이라고 한다는데 목격자들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동승자가 여자라고, 부인이라고 해서 얼핏 싸우는 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더라도 얼떨결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그 가족들은 어떨까. 사실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내 아버지는 시대의 희생자셨다. 그 여파는 우리 온 가족들을 덮치지 않았던가. 연좌제는 작은 아버지를 공부와는 거리를 두게했고, 온가족들을 우물안에 가두게도 했으니까. 살면서 희생자가 되는것은 순식간이다. 어쩌면 희생자 없는 세상은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간밤의 사고 소식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몇년전 이태원 사고와는 또 다르다. 이땅에 안전지대는 없는 것일까. 비가 오고있다. 어디선가는 비 때문에 피해를 격게되겠지만, 그것도 인제가 틀림이 없겠지만, 한개인이 어떻게 할수있는게 아니어서 억울할수밖에 없는 일이긴 마찬가지다. 주님, 돌보아 주십시요. 어디도 기댈곳이 없어서 외롭고도 처량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을 지키지 못한 연약한 인생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멘트 틈세에 돋아난 채송화가 천적이 있었는지 뜯기고 사라지고 있다. 어서어서 자라나 꽃을 피우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이 무슨 난재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비질에 씻겨난게 아닐까 했는데, 뜯긴게 확실했다. 우선은 에프킬라를 뿌려보았다,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손가락 길이만끔은 자랐는데, 그보다 훨씬 약한 거들은 아직 남아있는데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다행인것은 화분속에 있는 채송화들은 여전하다. 아니, 내가 어찌할수 있는 일은 아닌게 분명하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물을 주는게 다다. 살아오는 동안, 동동거리고 분주했다. 아닌가. 열정적인 사람도 아니고, 계획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끈질긴 사람도 못되었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불평과 징징거림과 포기에 더 빠르게 반응했다. 그러니 되는일이 없는게 당연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참아주셨다. 그리고 내게 맞는 삶을 내 앞에 펼쳐놓으신게다. '너나 잘해' 어머니가 그러셨다. 그럼 정말 '너나 잘해'가 지켜졌을까. 민폐가 없었을까. 공공질서, 윤리, 도덕 등등.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악한 성품으로 가득한 내가 부들부들 떨고있음을 보게되지 않을까. 연약하고 미숙하고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나를 보고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가련한 인생입니다. 용서와 사람을 부탁드립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