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이순간에 충실하고 소중히 여기며 사는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동의하는 바이다. 그래, 지금 이순간보다 더 소중한게 어디 있겠는가. 사랑하고 감사하며 사는 삶이 진짜 삶이기도 하다. 그동안 참 많이도 불평하고 징징댔다. 그럴만 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사실 내가 누리고 있는게 얼마나 큰지를 깨닫지 못해서였다. 두발로 걷고, 숨을 쉬고, 먹고 마시며 배설하며 일상을 사는게 얼마나 기적인지를 모르고 살았다. 내가 값을 지불한것도 아닌데, 당연하다고 생각해온것이다. 당연한것은 하나도 없다. 대체 어떻게 당연하다는 것인가. 부모 자식관계에서도 당연한것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그저 주고 계실뿐이다. 생명은 그저 주셨다. 때로는 온전치 못한 생명도 있는게 사실이지만, 그 온전치 못하다는 사실까지도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감사가 있을뿐이다. 나는 일반적인 장애에 대한 편견이 깊은게 사실이다. 온전한 몸으로도 살기 힘든데, 장애까지 있다면 얼마나 더 힘들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부모는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인듯 싶다. 하나님의 시각은 당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분 시각에는 장애인이나 아니나 하나도 다를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헬렌켈레만 해도 정상인 그 누구도 도달할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르지 않았던가. 그러나 헨렌켈레는 단 한사람이다. 평범한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도 애로가 많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수없이 벌어지곤 한다. 인생은 어쩌면 장애물 경주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또 어떤 하루를 살아갈까. 무탈한 하루이길 바라지만, 무익한 하루는 아니길 바라고 있다. 누구나가 그렇다. 아들은 어제 출장에서 돌아왔다. 아들 집에도 문제가 수없이 많다. 며늘은 3시가 넘어서야 나갔는데, 나하고 마주쳤다.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 다되어갔고, 큰손주는 이미 들어와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얼마후 작은손주 방과후 수업 참관을 하려갔는데 아무도 없다며 혹시 집에 왔느냐는 전화가 왔다. 장소를 잘못 찾아 갔던 모양이다.(뭐 그럴수도 있는 일 아닌가) 작은 손주는 정해진 시간을 끝내고 귀가했다. 엄마는 안왔다는게 답변이었다. 이게 이집 상황이고 실존이다. 내 생각에는,,, 꼭 할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있는것도 싫고, 밥해주는 것은 더욱 싫고, 그래서 밖으로 도는 것 같다는 오해 아닌 오해를 안할수가 없다. 나는 이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염려할 깜량은 아니다. 사실 관심을 갖어봐야 뭐하겠는가. 내 관심 같은것은 필요하지도 않을탠데. 그렇긴 하다. 내 앞가름도 못하면서 장래일이라니. 나는, 앞으로 백세시대라는데, 아니, 120세 시대란 말도 나오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장수가 재앙일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다. 아들딸에게 짐이 안되고 산다면 뭐 그리 부담일것도 없지 않겠는가. 사는대로 살다가 가면 되는것을. 그런데, 자식들의 후원으로 사는 사람들 입장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고심이 깊다. 깜량껏 살았다. 낭비 나 사치 같은것은 엄두에도 없었다. 근검절약으로 살았는데, 그것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다. 결론이 그렇다. 동사무소 공무원 말로는 나보다도 더 없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 말에 위로를 받아야 했는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이 염려가 된다.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믿음 없음을 한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순간, 내가 나일수 있음을 감사함으로 살자. 그리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나를 살펴주시면 크게 곤란한 일은 없지 않을까. 다 감사하자. 내게 오늘이 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