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는 눈 구경을 하면서 이 눈 속에 백화(百花)가 만발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권력자에게는 아부꾼이 따르기 마련인지라 꽃을 피우는 요정(妖精)인 백화선자(百花仙子)에게 하명하시면 못 피울 게 없다 했다.
이에 무후는 선자들을 모아놓고 ‘백화제방(百花齊放)’을 하명했고, 백화선자들은 긴급회의를 소집, 인간계의 제왕이 선계(仙界)에 내정간섭을 시작했다고 성토했지만 힘 앞에 약한 선자들인지라 유일하게 모란선자(牡丹仙子)만 반대를 고수하고 여느 백화는 꽃들을 피웠다.
모란의 항명에 분노한 무후는 장안에 자랐던 모든 모란의 잎이며 줄기 뿌리를 태워버리도록 하명한다. 이 백화제방을 두고 당시 장안에는 온실재배로 겨울에도 꽃을 피울 수 있었음을 들어 사실로 고증하기도 하고 모란이 당나라의 상징적 꽃인 데 대한 쿠데타의 장본인인 무후(武后)의 반동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당시 한 시인이 ‘꽃피어 질 때까지 스무 날/ 성안 사람을 고루 미치게 하는 모란’이라 읊었듯이 당시 마당에 모란이 피어 있지 않으면 행세를 못 했을 지경이었다. 모란의 별칭으로 양비취구(楊妃醉毬) 취옥환(醉玉環) 양비심취(楊妃深醉) 태진관(太眞冠) 등 양귀비와 동일화돼 있음은 양귀비를 미화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무후에 의해 훼손된 당(唐)왕조의 정체성과 전통성을 부활·선양시키기 위한 민중 계몽 수단이기도 했다.
곧 국화(國花)란 개념이 없었던 그 옛날부터 모란은 중국의 국화구실을 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만큼 모란은 중국사람에게 꽃 이상의 정신적 맥락을 이어 왔다. 명나라 때부터 모란의 명소로 알려진 베이징 극락사에 국화당(國花堂)이 있었다고 하지만 나라꽃이 아니라 천자부터 서민까지 한결같이 좋아했던 꽃이라 하여 국화라 불렀을 것이다.
그 중국에서 근대적 개념의 국화를 정하지 못하고 황하유역에 많이 피는 모란과 창장강(長江) 유역에 많이 피는 매화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특파원 보도가 있었다. 풍염(豊艶)과 부귀(富貴)의 상징으로 현 통제체제와는 걸맞지 않은 모란이요, 내핍과 지조의 상징으로 개방사회에 걸맞지 않은 이념갈등이 배후에 보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