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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과 보광사, 그리고 영조와 숙빈 최씨
소령원昭寧園은 수백 년이 족히 되었을 침엽수들의 수림 속에 있었다. 황룡黃龍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누런 잔디 위로 커다란 봉분이 보였다. 콧속으로 스미는 청신한 침엽수의 향이 청록색을 띤 것처럼 느껴졌다. 5월, 그곳의 신록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무색하게 하리만치 계절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소령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는 묘소. 조선 19대왕 숙종肅宗의 후궁이며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소이다.
하급 나인, 무수리에서 정1품 빈嬪에 오른 숙빈 최씨
숙빈 최씨는 1670년(현종 11년) 11월에 최효원의 딸로 태어나 7살에 궁에 들어가게 된다. 궁에서 왕족의 사생활에 종사하는 여관女官을 총칭해 나인이라 하는데 숙빈 최씨는 그 중에서도 궁중의 청소를 도맡고 궁녀의 세숫물을 떠 나르는 계집종 무수리였다.
7, 8세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상궁에까지 오르기까지 보통 30여년의 세월이 지나야 하는데 유례없이 특별한 경우가 있었으니 바로 승은承恩을 입는 경우이다. 지존의 총애, 왕의 눈에 든다는 것은 별을 따는 것 이상의 벼락출세요, 당대의 최대축복이다.
승은을 입은 나인은 일약 위계를 무너뜨리고 상궁으로 격상하며 이에 더해 왕의 후손을 낳으면 왕의 총애에 따라 종2품 숙의淑儀에서 종1품 귀인貴人까지 상승하기도 한다. 금상첨화로 왕자가 세자에 책봉되면 내명부內命婦 최고인 정1품의 빈嬪까지 오른다.
숙종의 승은을 입고 아들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가 궁녀의 말단직인 무수리에서 내명부 최고의 빈으로 그 신분이 수직상승하였고, 아들이 조선 역대 왕 중 최장 52년간이나 재위한 기록을 남겼으니 어찌 보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일생을 보낸 여인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영조의 효심에 의해 묘에서 원으로 승격,
친필로 비문을 쓰다
조선시대 왕족의 묘소 중 왕세자와 왕세자 비, 왕의 가까운 일가의 묘소가 원園이다. 원은 왕릉 보다 규모가 작고 간소한 편이다.
숙빈 최씨는 1694년(숙종 20년) 24세에 훗날의 영조를 낳았고 1718년 3월, 49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면서 파주 광탄면 영장리에 장사지낸 바, 이곳을 소령묘昭寧墓라 칭했다. 그 후 1753년(영조 29년) 6월, 효심 지극한 아들 영조에 의해 소령묘를 소령원으로 승격시키게 된다. 고령산 안쪽 내령이 뻗어나가는 자리에 위치한 소령원은 비공개 유적인 탓일까. 마치 속세와 단절된 또 다른 공간이란 느낌을 준다.
소령원에 들어서면 사초지 앞에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이 있으며, 묘역 진입로에 신도비각神都碑閣이 보인다. 정자각 동쪽 비의 전면에는 ‘조선국화경숙빈소령원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이라는 비명이 있고, 묘소의 동쪽 비명은 ‘숙빈해주최씨소령원淑嬪海州崔氏昭寧園’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묘비명은 1744년 그녀의 아들 영조가 친히 쓴 것이다.
재위기간 중 영조가 소령원을 찾은 기록이 곳곳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그의 효심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영조 36년(1760)에는 ‘소령원에 충재蟲災가 있어 사초가 모두 말라 영조가 친히 사초를 고쳐 입혔는데 직접 융복戎服(철릭과 주립으로 된 옛 군복의 일종)을 갖춰 입고 원소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대신과 예조·호조·공조판서로 하여금 일을 감독케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소령원 곳곳에도 남아 있다.
소령원 정자각 우측 산자락에 여막지廬幕址가 남아 있다. 영조가 어머니를 장사지내고 여막을 짓게 하여 신하로 하여금 시묘를 하도록 했던 곳이다. 또한 원소 앞에 세운 비碑의 비문을 직접 써 그 정성을 다했으며 소령원에 대한 관리에 많은 신경을 쓴 사실들 또한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이 밖에도 1740년(영조 16년)에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를 위해 인근의 보광사普光寺를 소령원의 기복사祈福寺로 삼았다. 신라 진성왕 8년인 894년에 도선대사에 의해 창건된 보광사는 1215년(고려 고종 2년)에 원진국사가 중창을 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폐허화된 것을 1622년(광해군 14년)에 중건했으며 그 후로도 계속 당대의 명승들에 의해 재건, 중수가 이루어진 명찰 중 한 곳이다.
지금도 보광사 대웅보전 뒤에는 어실각御室閣이 남아있어 숙빈 최씨의 명복을 기원하고 있다.
탕평책 실시! 영조대왕,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숙종이 아버지이며, 앞서 말한 것처럼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가 그의 어머니이다. 정성왕후貞聖王后를 정비로 두었으며, 계비는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년)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숙종의 뒤를 이어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아들, 경종이 33세로 즉위했으나 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에 1721년, 노론측이 소론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힘을 얻은 노론은 경종의 유약함을 들어 왕세제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 시킬 것을 주장했다.
이후 거듭되는 당파 갈등에 신축옥사, 임인옥사 등 수많은 위기를 거치면서 연잉군은 신변의 위협까지 받았으나 1724년에 경종이 승하하자 노론편인 인원왕후의 강력한 비호로 조선 2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 직후 김일경을 필두로 신임사화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고 조태억 등 소론대신을 파직시켰으며, 민진원, 정호 등을 불러들여 노론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노론 4대신을 신원해 복관시켰다. 그러나 영조는 더 이상 살육의 보복을 중단하고, 노론의 독주를 막아야 왕권 강화와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노론 측의 강경론을 누르고 당쟁의 폐해를 제거하려는 탕평책을 펴게 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를 겪었던 노론은 이에 불만일 뿐 아니라 소론의 재등장을 꺼려하여 노·소론의 파당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불행한 역사는 시대를 넘어서도 되풀이 되는가?
명분이나 이유가 어떠했건 필자는 영조와 영조 시대의 정치상에서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반추하게 되며, 아직도 그 흔적이 확연한 3김 시대를 보는 듯하다. 권력의 맛에 중독된 이들은 그걸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 거리고 상대는 발전적 동반자가 아니라 걸림돌이요, 역적이다.
이런 원시적 정치역정을 볼 때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대원칙 중 하나인 양당제 혹은 다당제는 실로 그 특장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영조가 말년에 애지중지하던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죽이고 마는 비극도 근본적으로는 정쟁政爭에 그 원인이 있었다. 1749년부터 대리청정을 맡았던 장헌세자莊獻世子는 내심 노론의 전제정치에 비판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소론이나 그 밖의 반대세력의 정견에 더 관심이 있었고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노론은 장헌세자가 장차 왕위에 오르면 노론이 위기에 몰릴 수 있다고 보아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를 제거하려 했다. 또한 노론의 의리와 명분론에 근거하여 왕위에 오른 영조로서도 정통성 고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론의 입장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영조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어머니 숙빈 최씨에게는 지극한 효심을 베풀었음에도 세자인 아들을 죽게 한 아버지…. 그에게는 내리사랑이란 말이 전혀 가당치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한참이 지나서였지만 영조는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시키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장헌세자의 아들인 세손(정조)을 요절한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왕통을 잇게 한다.
영조의 효심이 그득 깃든 곳, 소령원.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에 4개의 비를 세웠는데 정자각 동쪽에 있는 비각과 무덤 동편 비각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비석이 있다.
왕릉 정자각에 비해 다소 낮게 지은 소령원 정자각 위에는 원숭이 모습을 한 손오공과 저팔계 그리고 사오정 등의 석상이 얹혀있다.
다시 숙빈 최씨의 무덤 뒤로 보면 잉이 솟아 있고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적송赤松들이 주변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수호동물이 여덟 마리가 있는 왕릉과는 달리 양쪽에 두 마리씩 모두 네 마리가 있는데 이것까지도 최대한 원園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려 애쓴 흔적처럼 보인다.
더구나 무덤의 묘비는 대궐의 지붕문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영조가 어머니의 신분을 극복해보려는 몸짓으로 보여 딱하기조차 했다. 이런 영조의 열등감 만회 몸부림은 신도비를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존도 바꾸지 못하는 신분의 벽
영조 즉위 이듬해에‘숙빈 최씨 신도비’가 소령원 초입에 세워졌는데, 화강암을 곱게 다듬어 만든 비각 8개가 보인다. 그 거대한 주춧돌만 보더라도 성큼 영조의 효심이 헤아려지고도 남는다.
소령묘에서 소령원으로 격상시키는 데만 10년이 넘게 걸렸던지라 그 동안 영조는 끊임없이 갈등했으리라. 당대의 지존으로서 자신의 어머니를 왕비로 추존하고픈 마음이 어찌 생기지 않았으리.
원에 그치지 않고 능陵으로 격상시켜 최고의 안식처로 꾸미고 싶은 마음이 왜 아니 들겠는가. 그러나 묘로서 묻혔던 숙빈 최씨의 무덤은 원으로 승격하는 데까지가 한계였다.
영조는 어머니인 숙빈 최씨가 왕비의 신분이 될 수 없었던 탓에 종묘 신위神位에 올라가지 못하자 눈에 띄게 실의에 젖었었던 것 같다.
대신들 일부가 그런 대왕의 심경을 알아차리고 능으로의 승격을 건의하지만 영조는 이를 물리친다. 아무리 왕일지라도 오랜 전통과 서열을 파괴하면서 숙빈 최씨를 왕비로 추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즉위했을 때 설사 최씨가 생존했더라도 그녀를 왕비로 추존하긴 어렵다. 후궁인 빈의 신분으로는 그 아들이 제 아무리 대왕일지라도 추존왕비가 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신분제도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이 장희빈 사건 이후 후궁을 왕비로 올리는 일을 국법으로 금지해 버렸으니 영조로서도 육상궁이라는 사당을 짓는 것 외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노비제를 해체하고 인권확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다
영조집권기는 중세사회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로 전환되는 과도기적 시점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모순된 제도를 개혁시키고 신문화를 창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신분제도의 측면에서는 1731년 남자 노비가 양인의 여자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을 양인으로 인정하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확립함으로써 노비제 해체의 중요한 단초를 이룬다. 1772년에는 그동안 사회 진출이 막혀 있던 서자庶子들이 관리로 등용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으며, 1774년 첩자손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경제면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제도는 균역법均役法이다. 영조는 당시 농민경제를 위협하던 양역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더니 결국 1751년에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나, 인두세人頭稅의 성격이 강했던 군포 일부를 결역미結役米로 1결당 2말씩 토지에서 거두는 토지세로 전환시킴으로써 신분간의 조세불균등을 어느 만큼은 시정시켰던 것이다.
또한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 대한 추가 형벌을 금지했으며, 전옥典獄 이외에서의 인신구류를 금지함으로써 인권확립에도 힘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인다. 다시 1761년, 죄인의 부모·형제 또는 처를 잡아가두는 법을 폐지하고,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私刑을 금했다.
1771년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국방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1725년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대신 그 원료로 무기를 만들게 했으며, 군사에게 조총을 복습시키고, 1730년에는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총을 만들게 했다. 그 외에도 해군력을 강화시키고 국경지역에 토성을 쌓게 하는 등 국방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문화적으로도 전성기를 이룰 만큼 각종 도서의 편찬과 간행 및 보급에 애썼는데 영조 스스로 학문을 좋아했던 이유가 많이 작용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영조 대에 이르러 당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실학이 발전했으며, 어사 박문수를 통해 암행 사찰을 하게 함으로써 두루 민심을 보살펴 한때 태평성대를 이루게 하였다.]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만 달랑인 임금의 침전
소령원에서 나와 앞을 내다보니 안산인 고령산이 훤히 들어온다. 고령산 아래 있는 보광사, 영조가 숙빈 최씨의 제사를 봉향하는 원찰로 지정하고 어필을 내린 사찰. 소령원과 보광사와 곳곳에 자국처럼 남아 있는 영조의 자취는 거개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모곡이다.
궁녀의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하녀에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의 숨어 있는 눈물에 그 아들은 젖어들고 또 젖어들었으리라.
영조는 검약을 몸소 실천한 군주였다. 그의 침전에는 명주 이불 한 채와 요 하나만 달랑 있을 뿐 병풍조차 없었다고 전해진다.
갑자기 영조의 면모를 우리 시대에 재임했던 실패한 대통령들과 비교하면서 경외감이 생겼다.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는커녕 부패와 치부致富에 급급하여 끝내 국회 청문회에 끌려나오는 역대 대통령들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또 수치스러워 했던가.
보광사의 향내가 저만치 사라질 때쯤,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영조의 생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개었다.
영조가 천인賤人 출신의 친모로 인해 평생 떨쳐내기 힘든 자괴감에 빠져있었다면, 박정희는 친족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었다는 아킬레스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시달려야 했다.
영조는 즉위한 후 어머니의 묘호를 승격시켜 수시로 배알함으로써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 했고, 박정희도 대통령이 된 후 유별나게 공산주의를 배척했다는 사실史實이 두 사람을 흡사하게 대비시키는 것이었다.
숙종의 2남이자 왕세제王世弟인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는 임금이 되고 싶은 야망에 노론이 제의한 택군擇君을 받아들임으로써 형인 경종으로부터의 왕권 탈취를 위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에 목숨을 걸게 된다.
육사 8기의 후원에 힘입어 5. 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군사정권을 태동시킨 박정희 역시 성공적으로 정권을 손아귀에 쥐게 되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본질은 이기적 탐심으로 제도를 뒤엎고 역사를 다시 쓰게끔 한 장본인들이었다.
과연 엉뚱한 비유일까. 박정희는 아마도 영조에게서 성공한 쿠데타를 스스로 합당화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고령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지존의 실루엣이 나란히 보인다. 그들의 애민사상愛民思想만큼은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대통령들이 본받아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 중 가장 긴 52년간 재위했다가 83세에 생을 마감했다. 경기도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에 안장했다.
처음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쳤다. 역시 역사는 정통과 쿠데타를 엄격히 구분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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