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위
- 문정희
나는 더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인 것 같다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를 보고
왝왝 거위처럼 울 뻔했다
내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 있었다
구멍 난 신발 속으로 스며들어오는
차갑고 더러운 물을 숨기며
시멘트 숲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순간순간 태어나는 고요하고 돌연한 보석은
사라진 지 오래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다
오직 황금알을 낳기 위해
녹슨 철사처럼 가는 다리로 뒤뚱거리는
나는 과식한 거위였다
- 계간 <창작과비평> 2016년 봄호
* 문정희 :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서울에서 성장. 진명여고 재학 중 한국 여고생 최초로 시집 『꽃숨』 발간.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펴낸 책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다산의 처녀』, 『카르마의 바다』, 『응』 등 다수의 시집과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 외 장시집, 시극, 산문집 등. 그의 작품은 해외에도 소개되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등 9개 국어로 출판된 12권의 번역 시집이 있다. 고려대학교 문창과 교수를 역임하고, 2016년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
이번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최근 읽었던 이 시 ‘거위’가 생각났다. 국정조사 청문회에 불려나온 전직 고위 관료들과 총장을 비롯한 이화여대 교수들은 시종일관 '모르쇠'였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퍼’입은 세간의 화제가 된지 오래고, 어제는 김종덕 전 문체부장관의 위증을 뒷받침하는 녹취파일이 공개되었다. 교육부가 이미 지난달 이화여대에 대한 감사를 통해 정유라에 대한 특혜를 확인하고 정씨의 입학이 취소된 상황임에도 증인들은 "부당한 지시나 청탁, 대가는 없었다"고 한 입으로 주장했다.
지난 주 4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최경희 전 이대 총장은 "총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낀다"면서도 "조직적으로 특혜를 준 일은 없다"고 의혹을 부인했다. 이대 측 증인들은 교육부의 특별감사 결과로 드러난 사실마저 강하게 부인했다. 그들의 진술 태도가 워낙 애절하고 단호해서 까닥하면 ‘정말 그런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는데’라며 속아 넘어갈 뻔 했다. 실은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 배우’들이고, ‘분장만 능하고 연기는 그대로인 채 수렁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그들인데도 말이다.
가금류 농장에 가보면 거위란 놈은 닭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낯선 것들이 가까이 갈라치면 괙괙 소리를 질러대며 달려든다. 먼 산 쳐다보는 게으른 개보다 집을 더 잘 지킨다. 이 거위가 유명해진 건 ‘거위의 꿈’이란 노래 때문이다. 날 수 없는 운명으로 태어난 새이기에 고니처럼 날고 싶어 하는 꿈을 인생에 빗댄 대목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것이다. 뒤뚱거리는 거위가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황금알’을 낳는 이솝이야기 속의 거위도 알고 있다.
그들의 ‘몸 곳곳에 억압처럼 꿰맨 자국 뱀 같은 욕망과 흉터가 무의식의 주름 사이로 싸구려 화장품처럼 떠밀리고’있는 모습도 보았다. 최경희 전 총장에게서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포착했다. 진술 중에 가끔 손가락으로 펜을 돌리고 있었다. 연필을 돌리는 기술을 미국에선 펜 스피닝(pen spinning)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이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77학번 이후’세대다. ‘얄개시대’의 장난 습관이 대학에 가서도 하고 직장인이 돼서도 계속된다.
선생도 돌리고 의사당에서 국회의원도 돌린다. 'K팝스타' 심사평을 말하며 양현석도 단상에서 볼펜을 돌렸다. 법정에서 판사가 돌리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이전 세대는 펜을 돌릴 수 없고 흉내 내기도 쉽지 않다. 이들은 고교 입시가 없어지면서 볼펜을 돌려댔다. 펜 돌리기는 그래서 일종의 구획 기준이며 세대 표지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이들은 체제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체제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위선적이다. 즉 이들은 모든 불운을 사회와 구조의 탓으로 돌리는 데 매우 익숙하다.
노무현 정부시절 교육문화비서관을 지낸 바 있고, 미혼인 최 전 총장은 정유라 부정입학을 오로지 학교 발전을 위한 충정이라 믿는 듯하며, 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잘못을 구조적 시스템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에게 ‘다 들켜버렸다’ ‘빈틈과 굴절 사이’ ‘기교만 무성한 깃털로 상처만 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병우 전 수석이 청문회 출석을 예고했다. 그 역시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과식한 거위’일 뿐 결코 날아오르지는 못하리라.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