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학사(history of mathematics, 数学史) ***
1. 요약 : 수학의 발전에 대해 고대문명의 뿌리까지 추적하는 연구.
기호(記號)와 기본적인 계산과정에서부터 오늘날의 추상적 형식주의까지 복잡한 경로로 발전한 수학적 방법의 체계화는 놀랄 만한 이야기인데, 2개의 주요분야, 즉 대수학(代數學)과 기하학(幾何學)을 포함하는 비확률적 수학과 확률적 수학으로 나누어진다.
이집트와 로마 문명에서 수학이 초등 실용산술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은 수학이 어려운 분야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실제적인 진보는 바빌로니아와 그리스에서 유래했다. 고대의 수치적·대수적·기하학적 방법은 BC 1700년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러한 방법은 기원전 수세기 동안 그리스가 바빌로니아를 지배하는 동안에도 계속 존속되었다.
바빌로니아의 수학적 체계의 힘은 BC 3000년 동안 서서히 출현한 자리값 기수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기수법(numeral system , 記數法) (요약) 숫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기호들의 집합과 규칙. 주어진 집합에 얼마나 많은 개체들이 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하나'에 대한 개념은 로마 숫자 I, 숫자로 사용하는 그리스 문자의 첫 글자인 알파(α), 숫자로 사용하는 히브리 문자의 첫 글자인 알레프(χ), 또는 원래 힌디아랍어인 현대숫자 1로 표현된다. 현대 기수법은 자리값 체계이다. 즉 기호의 값은 숫자를 표현할 때 기호의 자리나 위치로 결정된다. 예를 들면 20과 200에서의 2는 각각 2개의 10과 2개의 100을 나타낸다. 이집트·로마·히브리·그리스의 기수법과 같은 고대의 체계는 이러한 위치 특성이 없어서 산술계산이 어려웠다. 가장 널리 사용하는 기수법은 10진법인데, 모든 수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10개의 기호, 즉 0, 1, 2, 3, 4, 5, 6, 7, 8, 9가 사용된다. * 10진법(decimal number system , 十進法, 열올림법) (요약) 기수로 10을 사용하고 10개의 서로 다른 수 0, 1, 2, 3, 4, 5, 6, 7, 8, 9와 소수점을 쓰는 자리수 체계. 이런 수 체계에서 수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숫자는 위치에 따라 다른 값을 갖는다. 543.21은 (5×102)+(4×101)+(3×100)+(2×10-1)+(1×10-2)을 나타낸다. |
바빌로니아의 자리값 수치는 오늘날 2.40과 40.2가 구별되는 것처럼 숫자들의 배열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자리값 체계는 1부터 10까지 사용하는 오늘날의 10진법과 달리 1부터 60까지 사용하는 60진법이었다. 오늘날 학생들이 9×9까지 정수들의 모든 곱에 대한 표를 배우는 것처럼, 바빌로니아인들은 59×59의 모든 곱을 표로 작성했다.
15세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산술연산, 즉 덧셈·뺄셈·곱셈·나눗셈·제곱·제곱근이 메소포타미아·그리스·인도·이슬람 사회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스 수학의 독자적인 발전은 BC 5세기 후반과 BC 4세기 초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철학이 과학적인 수학의 기원에 매우 중요했지만 플라톤은 수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고대 수학에서 중요한 인물은 분명히 에우클레이데스(BC 300)이다.
그의 명저인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서 그는 정의(定義)·공준(公準)·공리(公理)로 시작하여 기하학과 관련된 여러 정리들을 연역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또다른 업적은 오늘날 무리수(無理數)라고 하는 것에 대한 기하학적 이론의 개발이었다. 파이(π=3.1415926……)와 같은 무리수는 두 정수의 분수꼴로 표현할 수 없다. 3가지 주요관심 분야로는 원뿔곡선(원뿔의 단면에 의해 만들어지는 곡선들), 기계적 방법에 의한 곡선의 자취에 대한 연구, 선의 무한분할성에 대한 의미를 다루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탐구 등이었다.
이론수학은 고대에 아르키메데스와 아폴로니오스의 연구로 그 정점에 달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원뿔곡선에 대한 이론을 매우 완벽하게 이끌었으며, 아폴로니오스는 이 곡선에 대한 기본적인 성질을 체계화시켰다. 그 이후로 계속된 발전의 방향은 천문학적 문제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AD 4세기까지 이러한 과학은 알렉산드리아의 파포스, 알렉산드리아의 테온, 히파티아의 업적이 증명하듯이 강의와 해설의 주제가 되었다.
이슬람 과학이 시작된 9세기까지 고대 과학이 존재했었는지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인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는데, 특히 3각법(三角法)에 대한 공헌은 크다. 인도 수학자들은 단위원(單位圓 : 반지름이 1인 원)에서 측정되는 각의 사인(sine)과 같은 기본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6세기 인도에서는 디오판토스의 방정식(2개 또는 그 이상의 변수를 갖는 방정식으로 그 해는 반드시 정수값을 가짐)에 관한 이론이 발전했다.
* 디오판토스(Diophantos of Alexandria) 대수학 연구로 유명하다.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11세기 비잔틴 학자 미카엘 프셀로스의 편지로 추측할 수 있는 정도이다. 그밖에 불확실하기는 하나 유일한 정보로서 산술 풍자시의 해설이 있는데, 이것에 따르면 그는 33세에 결혼하여 84세에 죽었고, 그가 죽기 4년 전에 42세의 나이로 죽은 아들이 1명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저작인 〈산학 算學 Arithmetica〉은 13권인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필사본은 같은 내용을 7권에 담고 있으나 남아 있는 그리스어 필사본은 6권 이상으로 된 것이 없다. 그의 책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던 아랍인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책 이외의 것을 보았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분실된 책들은 아마도 초기에 잃어버린 것 같다. 다각수(多角數)에 관해 다룬 것의 일부가 〈산학〉에 있다. 이 저작에 있는 세 보조정리(lemma)는 부정설제(不定設題:정리의 계)에 대한 연구를 일부 언급하고 있다. 이 보조정리들은 정수론에 관한 명제들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두 유리수의 세제곱의 차는 어떤 두 유리수의 세제곱의 합과 같다'(a3-b3=c3+d3)이다.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문제에는 4변수까지 가질 수 있는 1차 정방정식, 2차 정방정식, 1변수 이상인 1차 부정방정식 등이 있다. 부정방정식은 변수들 가운데 하나를 임의의 값으로 놓아 정방정식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항상 정수해로 제한하지 않고 유리해로 만족했다. 그의 업적은 주로 2차 부정방정식으로 귀착되는 것인데, 이런 문제들은 대개 1변수 x에 대한 1개나 2개(그 이상은 아님)의 선형 또는 2차 함수에 적당한 x값을 찾아 넣으면 유리제곱수가 되는 형식을 가진다. 몇몇 문제들은 3차와 4차 부정방정식으로 이끄는 것이고, 이밖에 쉬운 6차 부정방정식으로 이끄는 문제도 있다. 문제는 1차, 2차 때로는 3차로 표현된 여러 식들에 넣으면 제곱·세제곱·부분제곱·부분세제곱 …… 등이 되는 2, 3, 4의 수를 찾는 것이다. 제6권에는 요소(면과 면적들)에 대한 여러 함수들의 제곱이 되는, 변의 길이가 유리수인 직각삼각형을 구하는 문제들이 있다. 디오판토스 이전에는 연산과 논리, 그리고 해를 포함한 모든 대수학 문제를 기호없이 표현했으나, 그는 그리스 대수학에 최초로 기호를 사용했다. 미지량(未知量)에 대해서는 아리트모스라는 오직 한가지 기호를 사용했는데, 그 기호는 정의되지 않은 수를 가지는 단위의 특징을 나타낸다. 하나 이상의 미지항이 있는 문제에서는 가능하면 그들 가운데 하나로 모든 미지항들을 표현하여 혼동을 피했다. 그가 사용한 오직 하나의 대수기호는 뺄셈기호이며, 이 기호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인 헤론(1세기에 활동)도 사용했다. 또한 〈산학〉은 그곳에 진술되거나 가정된 부정설제 이외에 정수론의 명제들에 대해서도 가치가 있다. 그는 8n+7(n은 음이 아닌 정수)꼴의 수는 3개의 제곱수의 합이 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한 2n+1이 2개의 제곱수들의 합이 되려면 'n은 홀수가 아니어야 한다'(즉 4n+3이나 4n-1 꼴의 수는 두 제곱수들의 합이 될 수 없음)라고 기술했고,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드 페르마가 제시한 조건인 '(그것을 측정하는 가장 큰 제곱으로 나눌 때) 1이 증가된 n의 2배는 4n-1 꼴의 소수로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가운데 괄호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밝혔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된 고도로 발달된 대수적 방법의 발견에 비추어보면, 그의 연구는 그리스 수학의 퇴보한 모습을 더이상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에 영향을 받았음이 명백하다. 그에 관한 권위있는 전기로는 히스가 쓴 〈알렉산드리아의 디오판토스:그리스 대수학사 연구 Diophantus of Alexandria:A Study in the History of Greek Algebra〉(1885)가 있다. 디오판토스(Diophantos) 의 1621판 제목 페이지 |
이러한 방정식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행성궤도의 주기성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에서 발생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기법 중 많은 것이 서양으로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것들은 17세기 들어 수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때 다시 연구되었다. 이슬람의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이룬 대부분의 진보는 계산을 위한 수단을 완성한 것이었다. 사인이나 탄젠트와 같은 3각함수표들이 편집되었으며, 행성궤도 중심에 대한 방정식을 표로 작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이 고안되었다.
한 수의 제n제곱근을 반복 과정으로 구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π는 80억 개 이상의 변을 가진 내접(內接) 및 외접(外接)하는 정다각형(正多角形)을 비교함으로써 60진법으로는 소수점 아래 9자리까지, 10진법으로는 16자리까지 계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드러진 업적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BC 300~AD 200년 고대 그리스 과학의 수학사조가 900~1400년 이슬람 과학의 수학사조보다 더 번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 수학의 기원은 몇몇 이탈리아의 대수학자들이 3차 방정식(한 변수가 3차인 방정식)의 해를 발견한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차방정식과 2차방정식(한 변수가 각각 1차와 2차인 방정식)의 해는 수천 년 동안 알려져왔지만, 3차방정식에 대한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위대한 기술'인 대수학에 대한 갈망은 다른 나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프랑스의 앙리 4세 궁정에서 프랑수아 비에트는 미지량(未知量)을 모음으로, 기지량(旣知量)은 자음으로 표시함으로써 사실상 변수(여러 가지 값이 가능한 수)와 매개변수(주어진 상황에 대해 고정값을 갖는 변수)에 대한 개념을 도입했다.
17세기에는 창조와 성취가 급증했다.
스코틀랜드의 존 네이피어는 1614년에 로그의 발견을 발표했다. 로그는 주어진 수를 만드는 이른바 밑(base)이라고 하는 고정된 수에 대한 누승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예를 들면 10을 밑으로 하는 100의 로그는 100=102이기 때문에 2이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타원과 같은 기하도형의 면적을 계산할 수 있는 무한소산법(無限小算法)을 고안했다.
* 로그(logarithm, 대수, 對數) 로그 예를 들어 bx=N에서 b가 10이고 N이 100이면 x는 2이다. 이를 밑 10에 대한 100의 로그라 하며, log100=2로 쓴다(log는 밑이 10인 로그이며 상용로그라고 함). e =2.71828……을 밑으로 사용하는 로그는 자연로그, 또는 로그의 발견자인 영국의 네이피어의 이름을 따라 네이피어 로그(Napierian logarithm)라고 하며, 상용로그(log)와 구별하기 위해 ln으로 쓴다. 네이피어가 로그를 발견한 후에 영국의 H. 브리그스는 10을 밑으로 하는 상용로그를 생각해 냈다. 로그는 발견된 이후에 천문학과 같이 큰 수를 계산하는 분야에 많이 이용되었다. 어떤 수의 상용로그가 2.3147과 같이 정수와 양의 소수의 합으로 되어 있다면, 지표인 정수는 그 수의 소수점의 위치를 나타내고, 가수인 소수는 1보다 크거나 같고 10보다 작은 로그 값 가운데 하나를 나타내며 가수와 수를 연관시킨 로그 표에서 찾는다. 로그 표는 스위스의 J. 뷔르기가 작성했는데, 예를 들어 1보다 크거나 같은 수의 지표는 소수점 왼쪽에 있는 수의 자릿수보다 1개가 더 적다. 그리고 1보다 작은 수의 지표는 음수이고 그 절대값은 소수점 아래에 있는 '0'의 개수보다 1개가 더 많다. 예를 들면 수 365.0은 지표가 2이고 0.005의 지표는 -3이다. |
그뒤 1637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르네 데카르트는 "한 점은 축(軸)이라고 하는 두 직선으로부터 그 점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1쌍의 수로 표현될 수 있다"는 해석기하학에 대한 이론을 발표했다.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은 2개의 미지량을 갖는 방정식이 한 곡선을 나타낸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 해석기하학(analytic geometry , 解析幾何學) 중요한 점은 해석기하학이 기하곡선과 대수방정식을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이 관계로 기하문제를 동등한 대수문제로 다시 만들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즉 한쪽 방법이 다른 쪽 문제를 푸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고대의 많은 수학자들은 도형의 기하학이 수의 대수학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조차 발달된 대수기호 및 과정 때문에 제한을 받았고 수학에 대한 시야가 실제 세계의 표현에 묶여 있었다. 예를들면 그리스인들은 수를 선분으로, 두 수의 곱을 면적으로, 세 수의 곱을 부피로 생각했다. 길이·면적·부피는 물리세계가 갖는 유일한 3가지 기하 측정량이므로 그들은 y=x4 같은 대수관계식과 동등한 기하 표현을 생각할 수 없었다. 대수학이 더 복잡하고 유용한 과목이 되고 수학이 물리세계의 관계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대수와 기하 사이에 다양한 조화의 가능성이 생겼다. 해석기하학은 17세기 프랑스의 R. 데카르트와 P. 드 페르마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실수의 순서쌍과 평면의 교차하는 두 직선, 즉 좌표축으로부터 한 점까지 이르는 거리들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축이 정해지면 모든 점은 실수 순서쌍 (x, y)로 유일하게 표현되고, 거꾸로 실수의 모든 순서쌍은 오직 한 점을 나타낸다. 근대 해석기하학은 서로 직교하는 축을 택한다. 이 좌표계와 좌표 (x, y)를 데카르트의 이름을 빌려 데카르트 좌표라고 한다. 평면 위의 점과 실수의 순서쌍 사이에 갖는 관계는 쉽게 3차원 공간의 점과 3차원 데카르트 좌표계를 이용한 실수의 3개로 된 순서쌍 (x, y, z)로 확장할 수 있다. 이로써 원하는 크기의 실수 순서집합을 이용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수학자들은 3차원 이상의 공간이 실제 세계에 존재하지는 않아도 해석기하학적 방법으로 그런 공간의 이론 특성을 연구할 수 있다. 데카르트와 페르마에 의해 발달한 좌표계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다른 것으로 가장 유용한 것은 I. 뉴턴 경이 개발한 극좌표계이다. 이 좌표계에서 평면 안의 한 점 A는 기준점 O로부터 떨어진 거리 r과 사선 OA와 기준방향선 사이의 각 θ, 즉 순서쌍 (r, θ)가 극좌표의 한 점을 나타낸다. 어떤 곡선은 데카르트 좌표계에서보다 극좌표계에서 훨씬 더 간단하게 표현된다. 로그나 사선이 한 예이다. 데카르트 좌표에서 이 곡선의 식은 임의의 상수 a에 대해 이지만, 극좌표에서는 훨씬 간단한 r=aθ이다. |
이 새로운 기하학으로 인해 연구의 대상이 되는 곡선의 종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곡선을 점점 더 많이 연구하여 이루어진 발전 중의 하나는 접선에 대한 더욱 정확한 정의였다. 이전까지 접선은 오직 한 점에서 곡선과 접하는 직선으로 생각되었는데, 프랑스의 변호사이자 아마추어 수학자 피에르 드 페르마는 이 정의를 더욱 확고한 토대 위에 놓았다.
그는 주어진 한 점에서 기울기를 구하기 위해 곡선 위에 두 점을 잡고 이들을 연결한 선의 기울기를 구한 뒤 구하고자 하는 점과 일치할 때까지 두 점을 함께 움직였다. 물론 서로 겹쳐지는 두 점에서의 기울기가 구하고자 하는 기울기이다. 이러한 방법은 그를 한 함수의 변화율을 결정하는 미분학의 고안자로서 알려지게 했다.
그는 확률·곡선의 구적(求積)에 대한 이해, 귀납론·정수론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2보다 큰 정수 n과 0이 아닌 x, y, z에 대해 방정식 xn+yn=zn의 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최후정리를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책의 여백에 이 정리를 기술했고 그 증명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여백에 비해 너무 길어 그 증명을 여백에 다 쓸 수 없다고 기술했다.
대수기하학의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는 자신의 제자였던 리처드 테일러의 도움을 받아 페르마의 최후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것은 1995년 〈수학연보 Annals of Mathematics〉에 발표되었다.
* 페르마의 최후정리(Fermat's last theorem) (요약) n이 2보다 큰 자연수일 때 xn+yn〓zn을 만족하는 자연수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리. 페르마의 대정리라고도 함. 17세기 수학자 페르마는 클로드 가스파 바셰가 번역한 디오판토스의 〈산학 Arith-metica〉 복사본에서 이에 관해 "나는 진실로 굉장한 증명을 발견했지만 이 여백은 이 증명을 쓰기에 너무 작다"라고 썼다. 수학자들은 이 표현에 당황해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많은 특정한 n에 대해서는 사실임이 증명되었으나 이 주장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수기하학의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여 영국의 수학자 앤드루 와일스(Andrew Wiles)는 자신의 제자였던 리처드 테일러(Richard Taylor)의 도움을 받아 페르마의 최후정리를 증명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것은 1995년 〈수학연보 Annals of Mathematics〉에 발표되었다. |
17세기의 업적들 중 아이작 뉴턴의 연구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그가 가장 초기에 발견한 것 중에 하나인 이항정리(二項定理)는 (x+y)n꼴의 식을 여러 개의 항으로 전개시킬 수 있다. 뉴턴은 n이 정수가 아닐 경우 항들의 급수(級數)는 무한하며 몇몇 경우에 있어서는 항들의 합이 유한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무한급수의 합 1+1/2+1/4+1/8+……은 값이 2이다.
무한급수에 대한 그의 연구는 독립변수의 변화에 따른 함수의 변화를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인 미적분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적분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또다른 공헌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에 의해서 동시에 이루어졌다.
* 무한급수(infinite series , 無限級數) (요약) 일정한 규칙과 순서로 나열된 무한히 많은 수들의 합. 가법은 유한개의 수를 더할 때만 정의되므로 무한급수 개념은 초등산술 범주에서 벗어난다. 무한급수는 수학의 여러 분야와 물리·화학·생물·공학과 같은 학문에서 상당히 유용하다. 무한급수 a1+a2+a3+……에서 유한개의 항을 더한Sn=a1+a2+……+an(n은 임의로 선택한 자연수)을 급수의 부분합(部分合)이라 한다. n이 점점 커짐에 따라 Sn이 일정한 수 S에 접근하면 이 급수는 수렴한다고 하며, S를 급수의 합이라 한다. 수렴하지 않는 무한급수는 발산한다고 하며, 합 S는 값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한급수 1+1+1+……에서 처음부터 n번째 항까지 더한 제n부분합은 Sn=n이다. 더 많은 항을 더할수록 부분합은 유한값으로 접근하지 않으므로(실제로 한없이 커짐)이 급수는 발산한다. 수렴급수에 대한 기본적인 예로서 Sn=2-1/2n-1인 1+1/2+1/4+……+1/2n의 경우에는 n이 커질수록 Sn은 이 무한급수의 합인 2에 접근한다. 급수 1+r+r2+r3+……은 0<r<1이면 합 1/(1-r)로 수렴하고, r≥1이면 발산한다. 이런 급수는 공비가 r인 등비급수라 하는데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주어진 급수에 대한 수렴·발산을 판정할 때 특정한 표준판정법을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런 판정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급수 a1+a2+……가 수렴하면, n이 커질수록 an이 0에 접근해야 한다. 더구나 유한개 항을 급수에 더하거나 빼도 급수의 수렴·발산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급수 a1+a2+……에서 an이 모두 양(陽)이면, 부분합은 유한값으로 접근하거나 무한히 커지면서 증가한다. 이것이 비교판정법(比較判定法)의 원리이다. 즉 모든 n에 대해 0≤an≤bn이고 b1+b2+……가 수렴하면, a1+a2+……도 수렴한다. 등비급수에 비교판정법을 사용해 형태를 약간 변형하면 비판정법(比判定法)이 된다. 즉, r<1이고 모든 n에 대해 an>0이고 an+1/an≤r이면, a1+a2+……은 수렴한다. 예를 들면 급수 1+1/2+1/(3·2)+1/(4·3·2)+…… 은 모든 n에 대해 an+1/an=1/(n+1)≤1/2이 되기 때문에 비판정법에 의해 수렴함을 알 수 있다. 다른 판정법은 항들이 양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은 급수의 수렴·발산을 판정한다. 급수의 가장 중요한 응용 가운데 하나는 함수의 전개이다. 삼각함수 f1(x)=cos x, f2(x)=cos 2x,……, fk(x)=cos kx와 g1(x)=sin x, g2(x)=sin 2x,……, gk(x)=sin kx는 2π마다 주기적인(2π-periodic), 즉 모든 x에 대해 fk(x+2π)=fk(x)와 gk(x+2π)=gk(x)인 함수이다. 상수 a0, a1, ……과 b1, b2,……이 주어질 때 방정식 f(x)=a0+(a1 cos x+b1 sin x)+(a2 cos 2x+b2 sin 2x)+……로 주어진 식에서 모든 x에 대해 무한급수가 주어진 상황에서 수렴한다면, 위의 식의 함수 f(x)가 잘 정의된다. 2π마다 주기적인 함수라면 언제든지 sin과 cos의 무한합으로 쓸 수 있다. 주어진 함수가 sin이나 cos 함수이면 주어진 함수에 관련된 많은 수학문제들은 직접 쉽게 풀 수 있다. 임의의 함수를 f(x)와 같은 급수로 나누는 과정을 푸리에 해석이라 하며, 여러 가지 파동현상을 연구하는 데 널리 이용한다. |
그러나 그의 많은 공헌은 2세기 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턴의 목적은 자연을 이해하는 데 있는 반면, 라이프니츠는 지식에 대한 일반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접근은 더 추상적이었으며, 1854년 영국의 수학자 조지 불의 〈사고의 법칙 연구 Investigation into the Laws of Thought〉가 출판된 후에야 지지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이 책자가 나오기 이전에도 라이프니츠의 영향력은 베르누이가(家)나 레온하르트 오일러와 같은 18세기의 유명한 인물들에게 영감을 줄 정도로 널리 전파되어 있었다.
18세기에는 놀랄 만한 발견이 거의 없었지만, 창조성의 본원(本源)으로서 공헌한 오일러의 연구를 비롯하여 그 이전의 어느 기간보다 새로운 수학이 생성되었다. 오일러는 수학의 모든 해석학적인 측면에 공헌했는데, 그의 미적분학에 대한 논문들은 현대의 저자들이 소재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되고 있다.
오일러는 또한 페르마 이후 정수론의 대부분에 공헌했다. 다른 주목할 만한 공헌은 프랑스의 수학자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대수학·해석학·정수론· 역학 등의 분야를 발전시켰다.
그의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인 〈해석역학 Mécanique analytique〉(1788)은 역학을 수리해석학의 한 분야로 확립했으며, 적은 수의 공준을 가지고 시작하여 연역논리만으로 이 주제에 대한 원리들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는 너무 탁월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이성시대의 극치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18세기말 프랑스의 수학자들이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설립일 것이다. 이 학교에서 라그랑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가스파르 몽주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가르쳤다.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이 본질적으로 해석학의 한 분야임을 보이는 데 공헌했으며, 라플라스 변환, 라플라스 방정식과 같은 현대적 도구를 만들었다.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많은 학생들에게 위대한 교사로 존경을 받은 몽주는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라자르 카르노의 연구는 19세기 기하학 연구의 선구가 되었다.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도 푸리에 변환을 발견했을 뿐 아니라 기하학에서 몇몇 두드러진 발전을 이룩했다. 푸리에는 19세기의 엄격하지는 않지만 전형적인 독창성을 보여주면서 임의의 함수를 사인과 코사인의 푸리에 급수로 전개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법은 오늘날 수학자와 물리학자가 함께 사용하는 기본 도구이다. 그러나 19세기 수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의 발견일 것이다.
*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요약) 그리스의 수학자 에우클레이데스(BC 3세기경 활동)가 선택한 10개의 공리 및 공준, 또는 이 체계를 수정(평행선 공준의 대치)한 것을 바탕으로 한 점·선·각·표면·입체 등의 연구.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 유클리드 기하학은 그것에 내포된 실제의 수학보다는 에우클레이데스가 그 수학을 소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체계적인 방법에 그 중요성이 있다. 공리-연역법이라고 하는 이 방법은 약 2,000년 동안 다른 많은 수학적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기 위한 모형으로 사용되었다. 총 13권인 에우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본 Stoicheia〉은 평면과 입체 기하도형의 여러 가지 측면과 그들의 측정 및 상호관계를 다루었다. 〈기하학 원본〉에 있는 수학은, 비록 몇몇 결과와 증명은 명백히 그가 한 것이지만 그외 대부분은 그가 직접 한 것은 아니다. 그는 10개의 공리와 공준에서 465개의 정리 또는 명제들을 연역했다. 이것은 '유도된 정리에 대한 참(truth)은 공리 및 공준이 참인 것에서 나온다'는 공리적 방법의 위력을 최초로 입증한 것이다. 또한 공리 및 공준이 자명하게 참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에우클레이데스 시대의 사람들은 유도된 정리들이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이를 연구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느꼈다. 그의 평행선 공준은 〈기하학 원본〉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많은 관심을 끌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다른 것들보다 덜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 공준은 다음과 같다. '직선 밖의 한 점 P를 지나고 그 직선과 만나지 않는 직선은 점 P와 주어진 직선을 포함하는 평면에서 오직 하나이다'. 다른 공준에서 평행선 공준을 유도하여 그것을 정리로 바꾸려는 시도에서 이것을 2개의 대안, 곧 '그런 직선은 없다'와 '2개 이상이다'로 대치하게 되었고 모순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 각각의 결론은 모순되지 않았고,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처럼 타당하고 모순이 없다고 판명된 2개의 새로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얻게 되었다. 곧이어 이 3가지 기하학 중 어느 것이 실제 세계를 수학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지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다. 수학자들은 단 하나의 기하학만이 옳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똑같이 모순이 없고 타당한 다른 기하학들이 있음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또 수학적 체계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모순이 없는 공리와 공준을 선택하여 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리들을 연구하여 이러한 수학적 체계를 창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에우클레이데스의 지적인 유산 중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한 부분일 것이다. |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편평한 공간을 논할 뿐 구부러진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인식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굽은 공간에 대한 가능성은 에우클레이데스의 평행선 공준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 공준은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고 그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오직 하나밖에 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에우클레이데스의 평행선 공준이 다른 정리들에 비해 기초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19세기초가 되어서야 러시아의 수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로바체프스키와 헝가리의 수학자 야노슈 보요이가 이 원리를 사용하지 않고 일관적인 기하학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즉 그들은 굽은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설명했다. 그들의 연구는 독일의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에 의해 더욱 확장·발전되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또다른 사람은 독일의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가우스가 매우 뛰어난 수학천재 중 한 사람이며, 뉴턴이나 아르키메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정수론과 기하학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를 발표했을 뿐 아니라 증명에도 세심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통계학과 응용수학에 커다란 공헌을 했으며, 특히 천문학·측지학(測地學)·자기학(磁氣學) 분야에 대한 공헌이 크다.
20세기 기하학의 발전은 위상수학에 집중되었는데, 통일된 접근법은 1911년경 네덜란드의 수학자 L.E.J.브로우웨르가 몇몇 중요한 공헌을 이룩하기 전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뒤 이 주제는 현대 대수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위상수학은 연속사상에 의한 변환에 의해 변하지 않는 기하도형의 성질과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감자는 구(球)와 위상동치이며, 도넛은 커피잔과 위상동치이다. 그러나 구는 도넛과 위상동치가 아니다. 구는 연속사상을 통해서 도넛으로 변환시킬 수 없고, 단지 쪼개거나 찢는 동작을 통해서만 변환시킬 수 있다.
또다른 커다란 관심분야는 확률적 수학이다.
르네상스 수학자들은 성공한 적이 적었지만 도박을 연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이 분야를 연구했다. 영국의 통계학자 존 그론트는 사망기록부에서 얻어진 통계급수의 안정성을 보였다. 그뒤 곧바로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는 사망표로부터 연금을 계산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러한 확률연구는 소송절차에 대한 증거를 평가한다는 면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18세기 들어 수학자들의 확률연구는 라플라스의 연구로 절정에 달했는데, 그는 우주에 대한 엄격한 결정론(決定論)을 옹호했다.
그가 보급시키고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킨 관점에서 확률은 단지 하나의 오차론(誤差論)으로서 자연과학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확률은 이론에 대한 하나의 합당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1860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제임스 클럭 맥스웰은 분자들의 위치와 속도의 분포에 대한 확률을 바탕으로 하여 기체법칙(氣體法則)을 추론했다.
1877년 독일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적 과정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을 분자들의 최빈(最頻) 에너지 분포를 향하는 경향으로 해석했다.
양자물리가 발전함에 따라 확률론은 원자와 관련된 기본적인 과정을 기술할 때 사용되었다. 20세기 중반 라플라스의 결정론적 관점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최근에는 간단한 반응규칙에 따르는 단순한 계(系)도 매우 무질서한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혼돈과 비(非)선형 역학분야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결과 확률·통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확률'이라는 말은 사실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① 주사위를 던져서 '4'가 나올 확률은 1/6이다. ② 셰익스피어가 그가 썼다고 알려진 희곡을 썼을 확률은 압도적으로 높다. ③ 프레넬의 실험은 빛의 파동설(波動說)에 대한 확률을 증가시켰다. 확률론의 현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한스 라이헨바흐는 이 3가지 경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과학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오로지 첫번째 예이고, 개인적인 사건의 확률과 관계된 2번째 예는 의미가 없으며, 반면 3번째 문장은 성공적인 예측에 대한 비율로 간주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확률에 대한 통합된 견해는 J.M. 케인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확률은 합리적인 신뢰도이지만 반드시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케인스에 따르면 2번째와 3번째 예에 있는 어려움은 확률이 생각보다 더 광범위하게 해석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 위상수학(topology , 位相數學) (요약) 집합이 변형되어도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는 성질을 주로 다룬다. 진흙덩어리는 위상적으로는 변함이 없이 공이나 긴 막대 등으로 변형될 수 있는 물질적인 점들의 집합으로 간주된다. 위상수학은 기호논리학과 관계가 있으며, 기계장치, 지도, 배전망, 복잡한 기능을 계획·제어하는 조직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위상수학은 기하학의 한 분야로 분류되다가 칸토르의 정수론과 집합론 연구의 영향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었다. 이 분야의 잘 알려진 예는 1635년경 데카르트가 처음 언급했고 1752년 오일러가 다시 발견한 공식이다. 두 사람은 구멍이 없는 다면체에서 꼭지점의 수와 면의 수를 더해 변의 수를 빼면 항상 2가 됨을 발견했다. 이 수들은 위상적인 변형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대수량으로 물체의 위상적 성질에만 의존한다. 집합이 변형될 때에도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는 성질을 주로 다룬다. 예를 들어 진흙덩어리는 위상적으로는 변함이 없이 공이나 가늘고 긴 막대 등으로 변형될 수 있는 물질적인 점들의 집합으로 간주된다. 위상수학은 수학의 거의 모든 분야는 물론 예전에는 수학적 방법으로 처리할 수 없다고 여겼던 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위상수학은 여러 면에서 기호논리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기계장치, 지도, 배전망, 복잡한 기능을 계획·제어하는 조직 설계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에는 주로 18세기 레온하르트 오일러, 19세기 베른하르트 리만과 앙리 푸앵카레의 기하학 분야 연구에서 발달되었기 때문에 기하학의 한 분야로 분류되었으나 게오르크 칸토르의 정수론과 집합론 연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그 범위가 확장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수학자 L. E. J. 브로우웨르가 위상수학의 영역을 다시 정의하고 20세기초에 일반성을 확립한 이후 수학적 연구에서 옛 기하학의 개념이 아닌 명백한 위상수학의 개념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푸엥카레의 저술은 대수적 방법 및 개념을 위상적인 문제 해결에 적용하는 대수적 위상기하학이라는 분야를 처음으로 체계있게 다룬 것으로 여겨진다. 이 분야의 잘 알려진 예는 1635년경 르네 데카르트가 처음 언급했고 1752년 오일러가 다시 발견한 공식이다. 이 두 사람은 구멍이 없는 다면체에서 꼭지점의 수와 면의 수를 더해 변의 수를 빼면 항상 2가 됨을 알아냈다. 1개의 구멍이 있는 다면체의 경우에는 0이 된다. 이 수들은 위상적인 변형에 의해 영향받지 않는 대수량으로 물체의 위상적 성질에만 의존한다. 쾨니히스베르크 다리 문제나 4색지도 정리(定理) 같은 그래프 이론의 많은 문제들이 대수적 위상기하학의 주제이다. |
확률·통계에 대한 수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라플라스는 통계적 가설을 최초로 시험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시험에 대한 그의 판단기준은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직관적이었다. 수리통계학이 독립된 분야로 등장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이었으며, 영국·프랑스·독일의 수학자들인 아돌프 케이틀레, 구스타프 세도르 페시네르, 칼 피어슨, 그리고 체크의 수학자 에마누엘 추베르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이들 개개인은 수리통계학에 대한 개념을 인구의 집단적인 특성과 관련시켜 수학의 한 분야로서 확고한 토대를 세웠다.
기술 통계학은 그래프와 표에 의한 방법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구의 특성을 기술하는 수단으로서 도입되었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가설을 추정·시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피어슨은 적률법(積率法)이라고 하는 점추정법(點推定法)을 개발했는데, 1900년 적합도에 대한 카이제곱(χ2) 시험을 발표했다.
1922년 로널드 피셔는 통계학을 새로 정의했다. 또한 통계적 방법의 목적은 많은 양의 자료를 의미있는 결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서 3가지 기본 문제들, 즉 추정·분포·규격 등의 문제를 구별했다. 통계학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 수학(數學) *** 1. 요약 : 숫자와 기호를 사용하여 수량과 도형 및 그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 2. 개관 수학은 인간의 사유(思惟)에 의한 추상적인 과학으로서, 공리(公理)라고 하는 일군의 명제(命題)들을 가정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학문이다. 수학은 본질적인 것만을 파악하여 기호로 표현함으로써 ‘과학의 언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자연과학의 이론·기술의 발전에는 물론 사회·인물·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공헌하는 기초학문이다. 수학의 역사는 오래되어 고대 인도·중국·이집트·바빌로니아 등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그리스문화에서부터이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시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는 그 이전의 저서와 연구를 집대성하여 ≪기하학원본 Stoicheia≫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클리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학을 논리적으로 정리, 체계화하였다. 제1권은 수직·평행·평행사변형에서 피타고라스(Pytagoras)의 정리까지, 제2권은 2차방정식의 면적에 의한 해법, 제3권은 원과 호, 호에 관한 각, 제4권은 내·외접 정다각형, 제5권은 비례론, 제6권은 비례론의 도형에의 응용, 제7권에서 9권까지는 정수론(整數論), 제10권은 무리수론(無理數論), 제11권에서 13권까지는 입체기하학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 디오판토스(Diophantos)가 기호를 사용하여 대수문제를 풀기는 하였으나 매우 예외적이며, 그리스 수학 전반은 이론에는 뛰어나지만 수와 계산에서는 큰 진전이 없는 형편이었다. 기호를 사용하는 대수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아라비아에서 발달하여 알게브라(Algebra, 代數)라는 이름과 함께 유럽에 전해졌으며,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타르탈리아(Tartaglia,N.)와 카르다노(Cardano,G.)가 3차방정식을 해결함으로써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말경 비에트(Vi0x8045te,F.)에 의하여 대수는 미지수를 구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체계적인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는 수의 체계가 발명된 것은 7세기경 인도에서이다. 17세기에 들어와 유럽은 철학·천문학·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케플러(Kepler,J.)·네이피어(Napier,J.)·페르마(Fermat,P.)·데카르트(Descartes,R.)·파스칼(Pascal,B.)·뉴턴(Newton,I.)·라이프니츠(Leibniz,G.W.) 등에 의하여 수학의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方法序說≫은 해석기하학의 효시로서, 기하학을 대수학과 결부시키는 대수학적 방법을 창설함으로써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근세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운동의 속도나 곡선의 접선, 도형의 넓이·부피를 구하는 문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미적분학의 발달이 이의 해결을 도왔다. 18세기와 19세기는 17세기에 이루어진 수학이론의 발전시대로서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로는 베르누이(Bernoulli,J.)·오일러(Euler,L.)·라플라스(Laplace,P.S.)·가우스(Gauss,K.F.)·리만(Riemann,G.F.B.)·힐베르트(Hilbert,D.)·코시(Cauchy,A.L.)·볼리아이(Bolyai,J.) 등이 있어서, 현대수학의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대수학은 힐베르트의 ≪기하학기초론 幾何學基礎論≫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혹은 1930년대부터의 새로운 대수계(代數系) 이론의 발전에서부터라고도 하며, 또 부르바키(Bourbaki)에 의하여 대표되는 수학적 구조(數學的構造)의 명확한 등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수학의 다른 부분도 공리화되었는데, 오늘날의 대수학은 인도나 아라비아의 전통을 따르는 계산기술뿐만 아니라 군(群)·환(環)·체(體)·속(束) 등의 대수계에 대해서 논하는 추상대수학이 되었다. 각 대수계는 그 각각의 공리계에 의하여 규정되며, 무정의원소(無定義元素)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허용됨으로써 광대한 범위에 걸쳐 응용되게 되었다. 또, 그 구성의 기초수단으로는 칸토어(Cantor,G.)가 창시한 집합론(集合論)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과, 집합론이 제기한 역리(逆理)의 해결을 위해서 수학 기초론의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 수학이 도입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수학의 활용은 매우 유서 깊다. 우리 나라 전통수학은 중국 수학을 원형으로 삼은 동양수학이라는 기반 위에 있으면서도, 문화의 차이만큼이나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특색을 지녔다. 첫째, 우리 나라는 중국 수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중국 수학의 흐름에 그때마다 발맞추어 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 세종대(1419∼1450)는 수학을 비롯한 과학이 급성장한 시기였으나, 당시의 중국은 명대의 수학 쇠퇴기에 해당된다. 둘째, 우리 나라의 전통수학은 크게 나누어 사대부의 교양으로서 다분히 관념적인 수학과, 재정회계 등 행정상의 실무와 관련된 실용수학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앞의 형이상학적인 기본관념과 뒤의 실천적인 기능은 거의 이질적인 영역이었다. 또, 중국이나 일본에 있었던 민간수학 또는 민간수학자는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거의 예외없이 관료수학자였다. 따라서, 행정조직 속에서 수학 지식을 다루는 하급 기능직 관리 사이에서 차츰 일종의 길드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산사제도(算士制度)가 줄곧 이어졌던 조선시대에는 세습화된 중인 산학자들 사이에 폐쇄적인 유대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 수학과 중인 수학은 서로 병행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말기에는 합류함으로써 수학 자체의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같은 우리 나라의 전통수학의 특징은 특유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제약, 그리고 이러한 문화현상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속에서 가꾸어진 우리의 의식구조를 반영한 것임을 보여 준다. |
2. 중국 산학의 발달
중국에서 수학은 상수학(象數學)을 뜻하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수학은 수(數), 산수(算數), 수술(數術), 산술(算術), 산법(算法), 산학(算學) 등으로 불렀다.『구장산술』이래 초기 산서들은 모두 산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는데 후에 "산술"은 "산경(算經)"으로 바뀌고, 13세기경부터 산학과 수학을 혼용하였다.애리스매틱(arithmetic)의 번역을 산수, 산술이라 하는데, 위에서 사용한 용어의 영어 번역은 매스매틱스(mathematics)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산서들에서 취급하고 있는 내용은 대수학, 기하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5, 6천년 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된 도기에 원을 포함하는 도형이 나타난 것을 보면 기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였을 것이다. 컴퍼스(compass)와 직각자인 규구(規矩)는 후에 표준, 규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같은 시기에 수에 대한 것도 결승(結繩), 각목(刻木)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나타내기 시작하여 숫자를 나타내는 기호가 3, 4천년 전에 이미 나타나고, 간지(干支)가 도입된다.
주대(周代)에 들어와 노예제도와 경제문화가 진일보하므로 수학과 측량기술이 발전되어 구고술이 발전하여 산학이 한 분야로 정립되어 귀족 교육을 위한 과목으로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가 도입되었다. 이 때 수는 구수(九數 - 방전(方田), 속미(粟米), 차분(差分), 소광(少廣), 상공(商功), 균수(均輸), 영부족(盈不足), 방정(方程), 방요(旁要))를 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7세기경 이미 산대를 이용한 계산법이 일반화되었다. 묵자, 장자 등에 의하여 논리, 무한 등의 개념이 도입되었지만 진시황의 분서와 유가의 득세로 이들은 더 이상 수학의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기원전 186년에 조성된 무덤에서 죽간 산서인 『산수서』가 1983수식입니다.SIM 1984년에 출토되어 『구장산술』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전한대에 『구장산술』이 완성된다.
『구장산술』은 오랜 기간의 산학을 집대성한 것인데 전술한 구수에서 차분은 최분(衰分), 방요는 구고(句股)로 이름을 바꾸었다. 수 체계를 유리수체로 제한하여 수학을 전개한 『구장산술』은 양의 분수의 사칙연산과 순서를 「방전」에서, 반비례를 포함하는 비례와 비례배분을 「속미」, 「차분」, 「균수」에서, 평면 도형의 넓이와 입체도형의 부피를 「방전」과 「상공」에서 다룬다. 2원 연립1차방정식과 이중가정법을 「영부족」에서, 일반 연립1차방정식은 「방정」에서 다룬다. 이 때 연립방정식은 행렬로 나타내는데 현재 사용하는 방정식의 행렬의 전치행렬을 사용한다. 방정식의 해법은 가우스 조던 소거법으로 알려진 행렬의 소거를 사용하는데, 이 때 나타나는 음수와 그 연산을 도입하여 「방정」은 항상 “방정정부(方程正負)”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또 음의 유리수를 포함하는 유리수체가 확정된다.
원둘레는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를 근삿값으로 하여 원주율 수식입니다.pi 는 3이 되었다. 한 변 수식입니다.a인 정삼각형의 넓이는 수식입니다.{sqrt {3} a ^{2}} over {4}이고 수식입니다.sqrt {3}은 무리수이므로 원의 넓이는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넓이를 근삿값으로 택할 수 없었다. 원의 한 호와 현으로 이루어지는 도형을 호전(弧田)이라 하는데 이 때 현과 수직인 지름과 호전이 이루는 선분의 길이를 시(矢)라 부르고, 현을 아랫변, 시를 윗변과 높이로 하는 사다리꼴의 넓이를 호전의 넓이로 정하였다. 반원을 호전으로 보고 위의 근삿값을 택하면 지름이 수식입니다.d인 원의 넓이는 수식입니다.{3d ^{2}} over {4}이 되어 수식입니다.pi `=`3일 때 현재 원의 넓이가 된다. 지름이 수식입니다.d인 구의 부피는 수식입니다.{9d ^{3}} over {16}으로 하는데「소광」에서 다루었다. 제곱근과 세제곱근을 구하는 법은「소광」에서 다루는데 이의 확장으로 원의 넓이와 구의 부피를 주고 지름이나 둘레를 구하는 개원(開圓)과 함께 다루었다. 기본 도형의 부피를 먼저 논하고 다면체의 부피는 이들의 분할로 구한다. 직각삼각형의 풀이를 다룬 것이「구고」이다. 기하적 문제를 대수적으로 해결하고, 또 측량에 응용한다.
『구장산술』은 금유(今有) 형태의 문장제(文章題)를 제시하고 답과 답을 얻는 과정을 술이라 하여 설명한다. 문제의 배열을 보면 『구장산술』은 수학적 구조와 응용을 함께 연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방법은 『구장산술』 이후의 모든 산서가 택하고, 또 다루는 내용도 이 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구장산술』은 중국수학에서 서양수학의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구장산술』 이후의 산서는 『구장산술』보다 발전된 것만 언급하기로 한다. 중국의 모든 학문이 원전에 주를 다는 방법으로 발전한 것과 같이 전한대의 『구장산술』은 죽간 형태로 기술되어 답을 얻어내는 과정만 들어있는데, 이에 대한 주를 유휘가 첨가하여 완전한 수학서가 되었다. 「방전」에서 도입된 원의 넓이의 근삿값의 오차가 큰 것에 착안하여, 원에 내접하는 정수식입니다.6k각형의 넓이로 근사시켜 수식입니다.pi 의 근삿값으로 수식입니다.{157} over {50} `(수식입니다.=`3.14)을 구하고 원의 넓이를 수식입니다.{d} over {2} TIMES {l} over {2}(수식입니다.= pi r ^{2} ``,```수식입니다.d,``l은 원의 지름과 둘레)로 구한다.
유휘는 『구장산술』의 주를 마친 후에 『해도산경』을 첨가한다. 두 개의 직각삼각형과 닮은꼴을 이용한 그의 측량법은 유휘의 기하가 매우 뛰어남을 보인다. 조충지(祖冲之)는 수식입니다.pi 의 근삿값으로 3.1415926을 구하였는데 이의 근삿값으로 수식입니다.{355} over {113} ,`` {22} over {7}를 사용하였다. 산대를 이용한 계산과 도량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손자산경』은 5세기 초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한다. 연립1차합동식을 다룬 그의 해법은 서양수학에서 중국 나머지정리(Chinese Remainder Theorem)로 알려져 있다. 5세기 중엽 이후에 출판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구건산경』은 백계문제로 알려진 1차부정방정식을 다룬다. 『구장산술』은 「방정」에서 부정방정식을 다루지만 상수항이 모두 0인 경우이고 한 해만 구한 것에 반하여 장구건은 양의 해를 모두 구하였다. 수식입니다.x ^{n} `=`a 형태가 아닌 일반 2차방정식은 『구장산술』의「구고」에 한 문제가 들어있다.
3차 이상의 고차방정식을 처음 다룬 것은 7세기에 출판된 왕효통의 『집고산경』이다.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과 방정식의 해법이 생략되어 읽혀지지 못하였다. 당대에 이순풍(602수식입니다.SIM 670)은 국자감에서 사용할 교과서와 산원들을 뽑는 시험과목으로 10개의 산서를 모아 『산경십서』를 출판한다. 이미 실전된 산서도 포함되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비산경』, 『구장산술』, 『해도산경』, 『손자산경』, 『오조산경』, 『하후양산경』, 『장구건산경』, 『오경산술』, 『집고산경』을 비롯하여, 『철술』(실전) 혹은 『산술습유』(실전)가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송대에 이르러 다시 산서가 출판된다. 심괄(1031수식입니다.SIM 1095)의 『몽계필담』에 심괄의 급수의 합을 구하는 법이 들어있다. 11세기부터 13세기 초에 방정식론은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유리식 수식입니다.sum _{k=0} ^{n} a _{k} x ^{k} + sum _{l=1} ^{m} b _{l} x ^{-l}을 나타내는 방법과 연산법으로 천원술이 도입되고 이를 이용하여 방정식을 구성하고, 이의 확장으로 이원술, 삼원술도 도입되었다.
『구장산술』의 「소광」의 제곱근, 세제곱근을 구하는 법에서 다항방정식의 해법으로 조립제법을 사용하는 증승개방법이 도입되었다. 이들은 모두 실전되고, 13세기 이야의 『측원해경』, 『익고연단』, 주세걸의 『산학계몽』, 『사원옥감』 등을 통하여 천원술이 전달되고 진구소의 『수서구장』, 양휘의 『전무비류첩법』, 주세걸의 『산학계몽』 등으로 증승개방법이 전달되었다.
한편 주세걸은 『사원옥감』에서 사원술을 도입하여 4원 연립고차방정식을 구성하고, 이와 함께 유한급수론을 정립한다. 계차수열과 삼각타계열의 급수의 관계는 유작 의 황극력, 일행의 대연력, 서앙의 선명력, 왕순과 곽수경의 수시력에 들어있어서 천문학과 수학을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구소는 손자문제의 일반 경우의 해법을 다루고, 주세걸과 함께 『집고산경』의 생략된 부분을 채웠지만 이들은 명대에 크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다만 송, 원대의 산학 중에 양휘의 업적만 오경, 왕문소, 정대위 등에 의하여 전달되어 천원술은 잊히게 되고 중국의 수학이 일시적으로 퇴보된다.
명나라 말에 리치(Ricci)를 시작으로 여러 신부들이 중국에 들어와 서양 천문학을 전달한다. 이 때 필요한 서양수학도 함께 들여오는데 리치는 서광계와 함께 유클리드의 『원론』의 처음 6권을 번역하여 『기하원론』으로 출판하고, 이지조와 함께 『동문산지』를 출판하고 이어서 구면삼각법을 포함하는 삼각함수와 대수(對數), 측량법 등이 출판되고, 서양 역법과 함께 이들 산서를 종합하여『숭정역서(1634)』가 출판되고 새로운 역법인 시헌력을 사용하게 된다.
이후 서양수학은 매문정에 의하여 동서양의 수학이 함께 연구되었다. 강희제의 지휘아래 『역상고성』, 『율려정의』, 『수리정온』으로 이루어진 『율력연원』이 출판된다. 옹정(擁正)부터 서양수학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미적분을 포함하는 서양수학은 19세기 중엽까지 중국에 전달되지 않았다. 18세기 말 송, 원대의 수학이 다시 연구되고 19세기에 주세걸의 『사원옥감세초』와 함께 조선에서 중간된 『산학계몽』이 중국에 들어가면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선란과 와일리(Wylie)는 유클리드의 『원론』 7권부터 나머지를 번역하여 1857년에 출판하고 드모르간(De Morgan)의 『대수학 원론』의 번역본 『대수학』과 루미스(Loomis)의 『해석기하, 미적분학 원론』의 번역본 『대미적습급』을 출판하여 대수학과 미적분학을 최초로 동양에 전달한다.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교육 제도가 도입되어 19세기 말 중국수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3. 삼국시대의 수학
통일신라 이전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수학에 관해서 직접 알려주는 문헌은 없으며, 다만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친다.
고구려에서는 373년(소수림왕 3) 중국의 제도를 본뜬 율령정치가 성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세가 실시되었고 왕실의 출납을 관리하는 주부(主簿)라는 관직도 있었다. 또 소박하나마 과세를 위한 농지측량도 실시되었다.
중국적인 관료조직 아래서의 이러한 행정상의 실무와 관련, 계산업무에 종사하는 관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고, 이들은 중국 수학책을 통해 다소나마 체계적인 계산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사기≫ 중의 114년(태조왕 62) 이래 554년(양원왕 10)까지의 사이에 있는 11번의 일식기사는 역 계산을 포함한 조직적인 천문관측활동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따라서 역법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도 수학지식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 당시 이미 중국식의 관제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즉, 260년(고이왕 27) 봄 4월에 재정회계와 창고를 각각 담당하는 관리가 임명되었다.
이 밖에 수학지식을 필요로 하는 관서로 점성 외에 역 계산의 업무를 포함하는 일관부(日官部)와 시장의 관리 및 도량형의 통제를 관장하는 도시부(都市部)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3년(온조왕 6) 이래 592년(위덕왕 39)까지 26회에 걸쳐 백제의 일식기사를 싣고 있다. 중국의 문헌인 ≪신당서 新唐書≫와 ≪주서 周書≫에도 백제 역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백제는 서적을 갖추고 있으며, 중국인처럼 역을 엮었다.”, “송나라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1월을 연초로 삼는다.”
간접적이나마 보다 자세한 백제의 수학을 짐작할 수 있는 일본의 문헌인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의하면 일본 긴메이천황(欽明天皇) 14년(553)에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백제가 역서와 역의 천문학자를 파견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을 비롯하여 ≪일본서기≫에 실린 당시의 기사는 고대 일본의 역법과 수학이 백제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어 701년(효소왕 10)의 대보령(大寶令), 718년(성덕왕 17)의 양로령(養老令)이 반포되어 중국의 율령제도를 정식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여기에 포함된 산학제도(算學制度)가 당나라 명산과(明算科)의 내용을 반영하게 된 것은 당연하지만 수학교과서의 내용은 중국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때의 일본 산학의 교과서는 ≪손자산경 孫子算經≫·≪오조산경 五曹算經≫·≪구장산술 九章算術≫·≪육장 六章≫·≪철술 綴術≫·≪삼개중차 三開重差≫·≪주비산경 周祕算經≫·≪구사 九司≫로 되어 있으며, 이 중에는 당나라의 명산과에 없는 ≪육장≫·≪삼개≫·≪구사≫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의 수학책을 재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위의 세 교과서 중, ≪육장≫과 ≪삼개≫의 이름은 그 뒤 통일신라의 산학제도에도 나타난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왕조(大和王朝)는 산학을 국학(國學)에 소속시키고, 천문·역법을 음양료(陰陽寮)에서 교수하는 등 형식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 제도의 운영이 백제계 귀화인 및 그 후손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제도에 없는 수학교과서의 출현은 백제 수학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있는 “점해이사금 5년(251) 정월에 왕은 한지부(漢祗部)의 부도(夫道)라는 사람이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아첨함이 없고 공(工)·서(書)·산(算)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므로 아찬(阿飡)의 관직을 주어 창고직을 맡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에 관한 유일한 수학관계 문헌이다.
그러나 공물·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部)가 584년(진평왕 6), 그리고 조세와 창고를 맡는 창부(倉部)가 651년(진덕여왕 6)에 설립되었고, 이보다 일찍이 5세기 말(490)에 시장의 관리기관인 시전(市典)이 설치되었으며, 이 관서가 도량형의 제정을 비롯한 물가의 통제 및 매매에 따르는 세금징수를 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의 관료조직 속에 계산에 능한 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최근 1933년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4개 촌락에 관한 주위 사방의 거리·호수·인구·전답면적·가축수·뽕나무수 등이 기록되어 있어 회계관리의 업무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산학제도를 가지게 된 것은 한반도 통일 이후의 일이며, 원시적인 셈이 아닌 체계적인 수학지식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중국계의 율령정치와 관련된 정치산술로서였다.
따라서 고대삼국이 중국의 정치체제를 본뜬 행정조직을 도입하면서 수학지식에 관해서도 그 나름의 흡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수학책이 도입되었으며 그것들이 어떤 계층에서 어떻게 연구되었고, 또 어느 정도 보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적어도 ≪구장산술≫ 정도는 이 시기에 이미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4. 통일신라시대의 수학
≪삼국사기≫에 의하면 682년(신문왕 2)에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뜬 국학이 설치되었는데, 이 교육기관의 한 분야로서 산학이 있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 제7에 다음의 기록이 나타난다.
“산학박사 또는 조교 한 사람을 두어 ≪철경 綴經≫·≪삼개≫·≪구장≫·≪육장≫을 교수한다. 모든 학생은 대사(大舍:중앙관서의 17위계 중 제12위)로부터 관직이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지위에 관계없으며 그 연령은 15세 이상 30세 이하까지를 원칙으로 한다.
재학연령은 9년으로 하고 만약 우둔하여 학업을 계속할 가망이 없는 자는 중도에서 퇴학시키고, 미숙한 데가 있으나 능력을 인정받은 자는 9년을 넘는 일이 있어도 계속 재학할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대나마(제10위) 또는 나마(奈麻:제11위)의 관직을 준다.”
신라의 이 산학제도를 당나라 및 일본과 비교해 보면 신라 산학의 독특한 성격을 알 수 있다.
〔표 1〕에서 신라 산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신라는 당나라나 일본과 비교하여 교과목의 수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국가행정의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관수용(官需用) 수리기술에 치중한 현실주의 편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이 사실과 관련해서 볼 때 교수요목 중에 ≪철술≫, 곧 ≪철경≫이 들어 있다는 것이 주목을 끈다. 중국의 수학자들도 외면하였던 고도로 다듬어진 이 책의 내용이 현실주의에 뿌리박은 신라의 관영과학의 하나인 산학에서 곧이곧대로 다루어졌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아마 그 중의 측량·역법 등과 관련이 있는 초등적인 산법 정도를 소개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천문학분야에서도 수학지식은 필요하다. 749년(경덕왕 8)에 누각박사(漏刻博士)와 천문박사 등을 임명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들 교수직 밑에 누각생(漏刻生)·천문역생(天文曆生)을 둔 천문제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교육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또 산경십서(算經十書) 중의 하나이며 동양천문학자들의 필독서이기도 하였던 ≪주비산경≫은 고대 일본의 수학 및 역법의 교과서로 쓰여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연히 역생의 양성과정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비산경≫ 중 구고법(勾股法), 즉 직각삼각형에 관한 피타고라스정리는 당시 천문학자들의 상식에 속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기사 중 적어도 789년(원성왕 3) 이후 911년(효공왕 15)까지의 10회의 기록은 이러한 신라 천문학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수학의 응용과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신라의 건축이 기하학적 구도의 방법을 이용하였다는 것인데, 건조물에 쓰인 수학지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망덕사지(望德寺址) : ① 격자형(格子型)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정수·분수 전개(지면 분할과 탑과의 관계에서 20:10:5:3:1),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사각형과 정삼각형.
(2)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 : ① 격자형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분수비례(지면 분할과 석탑과의 관계),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사각형과 정삼각형.
(3) 천군리사지 쌍탑 : ① 기본단위와 정수·분수, ② 등차급수적인 점차감소,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길이.
(4) 불국사의 평면도 : ① 격자형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분수비례(지면 분할과 석탑과의 관계),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삼각형과 그 높이, ④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등분, ⑥ 원.
(5) 불국사 다보탑 : ① 기본단위와 정수·분수, ② 등비급수적인 점차감소(1:2:4:8),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전개,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길이, ⑤ 정팔각형.
(6) 석굴암 평면도 : ① 기본단위, ② 분수 등분할,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전개,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분할(本尊과 臺座의 크기), ⑤ 등차급수적인 점차감소(본존의 형태), ⑥ 정육각형의 일변과 외접원(굴의 입구와 내부의 평면원의 관계), ⑦ 정팔각형과 내접원(본존 대좌의 구성관계), ⑧ 원과 원주율(窟圓과 아치형천장 구축관계), ⑨구면(아치형천장), ⑩ 타원(입구천장).
(7) 석굴암 석탑 : ①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 ② 정삼각형과 수선의 길이, ③ 정팔각형과 내접원, ④ 비례중항({{#102}}:2:{{#101}}).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사각형이나 팔각형, 또는 원의 작도 자체보다도 이러한 기법을 써서 전체적인 구성미를 어떻게 창조해 내느냐 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사실이다.
≪주비산경≫에 실려 있는 피타고라스정리의 도시〔弦圖〕는 동양인이 얼마나 훌륭한 기하학적 직관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중국·한국의 수학에서 도형이 다루어지는 것은 언제나 부피·넓이 등 도형의 측도(測度)에 관한 계산술이 고작이었고 작도의 문제는 수학책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5. 고려시대의 수학
고려의 산학교육과정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문헌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산학의 과거시험인 명산과(명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명산업은 2일 간에 걸친 시험에서 산서의 내용을 출제하여 답안을 작성하게 한다. 제1일에는 ≪구장≫ 10조, 제2일에는 ≪철술≫ 4조, ≪삼개≫ 3조, ≪사가≫ 3조를 전부 치르게 한다. 또 ≪구장≫ 10권의 내용을 암송하고 그 이치를 설명하는데, 각 시험마다 여섯 문제씩의 질의에 응하여 여섯 번을 치르고 그 중 네 가지를 통과해야 한다. ≪철술≫은 네번에 걸친 암송 중 2회는 질의를, 그리고 ≪삼개≫ 3권에서 2회의 질의를, ≪사가≫ 3회 중 2회의 질의를 각각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산학의 중심은 ≪구장산술≫이었고, 당나라의 산학제도에서는 4년의 수업연한을 필요로 하였던 ≪철술≫이 여기에서는 그 비중이 낮아졌다.
그리고 또 ≪구장≫·≪철술≫·≪삼개≫·≪사가≫ 등 명산과의 출제내용이 동시에 산학생 양성에 쓰여진 교과서의 거의 전부였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고려 명산과의 내용이 당·송의 그것과는 같지 않고 신라의 산학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과과정면에서도 신라 산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타당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암기 위주의 시험을 전제로 한 교과 지도의 과정에서 고시과목 이외의 산서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송대에는 많은 수학서적 중 상당량이 수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산생(算生)들은 과외 독서로 그 밖의 다른 산서도 물론 읽었을 것이다. 명산과의 고시에 관해서는 ≪고려사≫에 “목종 1년(998) 정월에 4인, ……같은 해 3월에 11인 급제”라는 기록이 있다.
〔표 2〕는 산사의 채용이 극히 제한되기는 하였으나 꾸준히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특히, 전국의 조세·물가 그리고 국가재정의 출납회계를 모두 관장하는 최고기관인 삼사(三司)에 가장 많은 산사가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의 천문관서인 태사국(太史局)에는 역 계산을 담당하는 보장정(保章正, 종8품) 1인과 사력(司曆, 종9품) 2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동양천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시력(授時曆)이 고려에서 시행된 것은 충선왕 때부터이며, 이에 앞서 수시력의 계산법을 먼저 익혔다.
≪고려사≫ 열전 권21의 다음 기록은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충선왕이 원에 머물렀을 때 태사원(太史院)이 역 계산에 정밀하다는 사실을 알고 천문·역술에 조예가 깊은 최성지(崔誠之)에게 돈 100근을 내주어 스승을 구하여 교수받도록 하였다. 마침내 수시력을 익힌 다음 귀국하여 그 방법을 전하였다.”
수시력에는 황도좌표와 적도좌표의 변환에 4차방정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사≫에는 역관들의 일식계산이 번번이 실패한 기사가 실려 있으나, 그런 가운데에도 1357년(공민왕 6)의 일식기록은 중국이나 일본 어느 쪽의 문헌에도 나타나 있지 않은 독자적인 기록이다.
1346년(충목왕 2)에 이미 수시력에 관한 해설서인 강보(姜保)의 ≪수시력첩법입성 授時曆捷法立成≫이 엮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고려 수학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① 산학제도가 통일신라시대의 연장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송의 문물제도를 본받았으나 산학의 내용에 관해서는 통일신라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중국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다. 신라로부터 계승된 ≪철술≫이 송대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려와 송나라의 산학제도가 서로 무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② 수학의 위치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당초에는 국자감에 소속되어 있다. 중기 이후 잡과(雜科) 중의 하나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그나마 학문적인 성격을 인정받았던 수학이 순전한 기술로 격하당했음을 뜻한다.
③ 수학이 극히 제한된 특수신분층에서만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산사(산학자)는 민간과의 접촉이 차단된 내무직이자 특수한 전문직이었으며 수적으로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폐쇄된 사회 내에 산사직의 세습화 경향은 수학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즉, 고려는 신라 이래의 산학을 이어받아 간직하였을 뿐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④ 고려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산서를 도입하였다. 산학 고시의 과목 이름 외에 고려에 어떤 수학책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송대의 많은 산서 중 적어도 ≪철술≫을 제외한 산경십서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산학계몽 算學啓蒙≫·≪양휘산법 楊輝算法≫·≪상명산법 詳明算法≫ 등이 들어온 것은 틀림없다. 이를 통해 조선의 수학을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수학의 의의를 다소나마 평가할 수 있다.
6. 조선시대의 수학
1) 조선 초기의 수학
고려가 망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양전(量田), 즉 농지측량의 제도가 문란하였다는 것이다. 세종대(1419∼1450)에는 이 제도의 확립을 꾀하였고, 이에 따라 통일신라나 고려 초기와 마찬가지로 수학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났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세종 25년 11월 17일 세종의 다음 칙유는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산학은 비록 한낱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가의 행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 최근 농지를 등급별로 측량하는 데 있어서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의 활약이 없었던들 그 셈을 능히 할 수 있었을까. 널리 산학을 익히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
수학에 관한 세종의 열의는 집현전교리 김빈(金鑌), 한성참군 우효강(禹孝剛) 등 고위의 문관들까지도 이것을 배우게 할 정도였으며(세종 13년 3월 12일), 한편으로는 총명이 뛰어난 사역원의 직원 두 사람을 골라 수학연구차 중국에 유학시켰다(같은 해 3월 2일).
1433년(세종 15)에는 경상도감사가 ≪양휘산법≫ 100권을 동활자로 인쇄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보다 일찍이 왕은 부제학 정인지(鄭麟趾)로부터 ≪산학계몽≫에 관한 강의를 받았다.
1438년에 제정된 기술분야 10개 교과, 즉 잡과십학(雜科十學)에 관한 교육과정 중에서 산학의 내용은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오조산경≫·≪지산 地算≫의 5개 교과로 되어 있으나, 이 중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 등이 나중에 산학 채용고시의 출제교과서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실렸다.
이 밖에 세종은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역산소(曆算所) 등을 설치하여 산학의 회복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조대(1455∼1468)에는 산학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세종대까지 있었던 산학박사 대신에 산학교수(算學敎授, 종6품) 1인, 별제(別提, 종6품) 2인, 산사(算士, 종7품) 1인, 계사(計士, 종8품) 2인, 산학훈도(算學訓導, 정9품) 1인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산학은 6개 중요 행정부서인 육조 중 호조에 속한다. 호조는 호구·농지·조세·부역·공납·정부미 대여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판적사(版籍司), 중앙 및 지방에 비축되어 있는 화폐·양식 등에 관한 재고조사의 임무를 맡은 회계사(會計司), 왕실 내의 여러 가지 지출을 담당하는 경비사(經費司) 등 국가재정을 다루는 부서들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30인 이상 되는 산원(算員)들이 배치되었다.
≪경국대전≫에는 호조에서 양성하는 산생(算生)의 수가 15인으로 정해져 있고, ≪속대전≫에서는 61인으로 대폭 늘어난 점으로 미루어 행정기구의 확대 및 복잡화에 따라서 계산기술을 요하는 업무범위가 확대된 것만은 확실하다.
관료조직 내의 기술학에 관한 조선 초기의 십학(十學)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태조 즉위년(1392)에 의학박사 3인과 조교 2인, 율학박사 2인 및 조교 2인과 함께 산학박사 2인을 두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병(兵)·율(律)·자(字)·역(譯)·의학(醫學)·산학 등의 육학(六學)을 일반 서민층 출신으로 하여금 배우게 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유학·이학(吏學)·음양풍수학·약학의 4과와 더불어 잡과십학의 교육체제가 성립되었다. 그 뒤 1430년에 이르러 십학에 관한 교육과정이 확립됨으로써 교육내용도 한층 충실해졌다.
그러나 세종대에 완성을 본 이 십학의 교육제도는 다음 대인 세조의 집권이 시작되면서부터 벌써 무너지는 징조를 보였다.
즉, 1465년(세조 11)에는 천문·풍수·율려·의학·음양학·사학·시학 등의 칠학(七學)이 적극 장려되었지만, 세종 당시 그토록 중요시되었던 산학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산학은 성종 때 다시 의·역·율·음양·산·악·화(畫)·도학(道學) 등 팔학의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경국대전≫).
이 중 의·역·율·음양학의 4과에는 정식의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산·화·도·악학의 4과에는 각 부서에서 직접 행하는 채용고시인 취재법(取材法)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관료조직 내에 있어서의 산학의 위치 격하는 끝내 개선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실린 천문제도 중 음양과(陰陽科)의 역산 분야의 채용고시과목으로 ≪칠정산내편≫·≪칠정산외편≫이 들어 있다. ≪칠정산내편≫은 수시력을 우리 사정에 맞추어 재편찬한 것이고, ≪칠정산외편≫은 명·원시대의 회회력(回回曆)을 해설한 것으로, 수리에 밝은 정초(鄭招)·정인지·정흠지(鄭欽之)·이순지·김담 등에 의하여 엮어졌다.
정인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종에게 ≪산학계몽≫을 강의한 바 있으며, 고려의 천문학자들이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조차 몰랐다고 혹평할 만큼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다. 또, 이순지와 김담은 역산의 대가로서, 특히 김담은 이 능력 하나만으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부정(副正, 종3품)의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천문학(역산) 분야에서도 상당 수준의 수학이 다루어졌음이 틀림없다.
2) 조선 중기의 수학
산학, 즉 왕도정치하의 관수용 수학은 비상 시국이나 정국의 혼란에서 오는 행정기능의 마비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일은 있었지만, 그 실학적 성격 때문에 국정이 안정되면 관리조직 속에 다시 도입되는 경향을 보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부득이 끊긴 산사의 채용이 전란의 소강상태와 함께 곧 부활한 것은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이다.
산학시험의 합격자 명단이자 인사기록부이기도 한 〈주학입격안 籌學入格案〉에 나타난 일본의 제2차침략인 정유재란을 전후한 5년간의 공백은 아마 1차침략 때의 타격이 겹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592·1597년의 임진·정유 두 차례의 참화는 산학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산생 양성의 교과서이자 산사 채용고시의 출제 근거이기도 한 ≪산학계몽≫이나 ≪양휘산법≫마저도 침략군의 약탈에 의해서 왕실의 서고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산생의 양성은 물론 산사의 채용시험조차도 거의 형식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중국 수학사에 있어서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송·원대의 수학을 흡수, 소화하였던 세종대를 거쳐서 왜란이 시작되기까지의 약 150년 동안에 조선 수학자의 손에 의해 수학책도 저술되는 등 그런 대로 독자적으로 다듬어진 전통수학이 싹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실증하는 문헌은 일체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세종대 이후부터 양란을 전후한 시기가 한국수학사상 실로 공백의 상태로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일본측의 입장에서 보면 이 침략전쟁은 한반도로부터 반입해 간 산서가 일본 전통수학의 기초를 이룩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문화사상 커다란 계기를 만들었다. 〔표 3〕은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잡과십학 중 적어도 천문학·산학·의학·역학에 관한 채용고시는 극도로 난맥을 이룬 문·무과의 경우에 비한다면 기술학의 성격상 거의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경향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꾸준히 지켜졌다. 이 중 산학은 채용인원의 수로 미루어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그 규모가 확대된다.
조선 중기는 산학의 기술관리직을 독점하는 중인(中人) 산학자의 집단이 형성되는 기틀이 굳어지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수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 조선 후기의 수학
3)-1. 제도상으로 본 산학의 위치
이른바 실학기에 접어들면서 산학제도가 정비되었는데, ≪만기요람 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는 산생이 될 자격을 다음과 같이 완화하였다.
즉, “구제도에서는 산생이 되기 위해서 국내·국외의 수학책 16종 내외십육파(內外十六派)에 모두 정통한 뒤 비로소 입학을 허락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의 건의에 따라 16종 중 12종에 통달한 자를 추천하고 시험에 세 번 실패한 자는 천거에서 제외시키도록 정하였다.”
1745년에 공포된 ≪속대전≫에서는 산생의 정원이 종전의 15인으로부터 61인으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인다. 따라서 1808년(순조 8)에 엮은 ≪만기요람≫에는 관료체제 내의 계사(計士) 60인의 업무내용을 〔표 4〕와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조대에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실질적인 산학의 팽창은 이미 숙종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3)-2. 실학자들의 계몽서 속에 나타난 수학
16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중국을 통한 서양과학과의 접촉이 첫 계기가 되어 일어난 실학파운동은 당연한 결과로 우리의 전통적 과학인 천문학·수학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자들의 계몽서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수학에 대한 그 나름의 언급이 있다.
이규경(李圭景)은 60권으로 된 ≪오주연문장전산고≫ 속에서, 이기(理氣)·성명(性命)에 치우친 중국계의 형이상적인 학문과 오직 궁리(窮理)·측량만을 다루는 서구의 형이하적인 학문을 비교한 데 이어 권9의 기하원본변증설(幾何原本辨證說)에서 기하학의 용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우주의 크기를 재고, 해와 달 기타 별들의 고도가 지구의 지름에 비하여 얼마나 되며, 또 산높이, 누각의 높이, 골짜기며 샘의 깊이,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알아보고, 토지며 성곽·궁실 등의 넓이를 헤아린다.”
전통적인 성리학의 입장을 탈피하고 경험주의를 주장한 최한기(崔漢綺)는 관리채용시 수학을 시험해야 하는 이유로 ≪인정 人政≫ 권17 선인편(選人篇)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수학에 관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식견을 재어보고 수학적 사고의 여부에 의하여 합리적 태도의 여하를 통찰할 수 있다.”
형 정약전(丁若銓)의 묘비에 “≪기하원본≫을 연구하여 심오한 조예를 지녔다.”고 적었던 정약용(丁若鏞)은 도르래〔滑車〕의 역학적 구조에 관한 설명을 스스로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황윤석(黃胤錫)과 홍대용(洪大容) 등은 그들의 전집 속에 수학에 관한 장을 따로 두고 있으며, 최석정(崔錫鼎)·최한기·남병길(南秉吉) 등은 따로 수학에 관해 저술하였다.
요컨대, 실학기라고 불리는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계몽활동기에 수학전문가가 아닌 양반지식층이 수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는 수학은 남병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종래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초보적인 단계였다.
3)-3. 수학자와 수학서
중인 출신 산학자 경선징(慶善徵)의 ≪묵사집 嘿思集≫은 ≪산학계몽≫을 본뜬 수학책이며, 내용도 그다지 독자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중인 산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의 처지로 보아, 조선 산학의 경전이라 할 ≪산학계몽≫의 해설서 이상의 저술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최석정의 ≪구수략 九數略≫ 속에서 당대 수학의 제1인자로 극찬받고 있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대부 출신 최석정의 수학저서 ≪구수략≫은 주산·격자셈〔格子算〕 등 새로운 계산법을 소개하고는 있으나, 내용은 흡사 유럽의 중세수학을 연상시키는 사대부 수학의 대표적인 예이다.
현감·군수를 역임한 임준(任濬)은 ≪신편산학계몽주해≫를 엮었는데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산학계몽≫을 해설한 것이다. ≪조선인명사전≫은 그가 수학에 뛰어났으며, 김시진(金始振)이 그의 도움으로 파본이 된 ≪산학계몽≫을 어김없이 복원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박율(朴繘)의 것으로는 ≪주학본원 籌學本原≫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원본은 볼 수 없으나, 이 책의 복사판 내지는 수정판이 황윤석의 ≪이수신편 理藪新編≫ 중에 ≪산학본원 算學本原≫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인 산학자 홍정하(洪正夏)의 ≪구일집 九一集≫은 ≪구장산술≫·≪상명산법≫·≪산학계몽≫ 등을 골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종래의 수학책과 다름이 없으나, 흔히 ‘천원술(天元術)의 책’으로 알려진 ≪산학계몽≫에 실린 내용보다도 훨씬 많은 분량의 천원술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는 것이 주목을 끈다.
≪구일집≫의 내용을 축소한 꼴로 이루어진 ≪동산 東算≫이 있으나 이러한 재편집이 홍정하 자신에 의한 것인지, 혹은 후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엮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체의 양이 겨우 27매로 된 ≪동국산서 東國算書≫는 실무용으로 엮어진 듯하다. 1718년(숙종 44)에 일어난 기사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18세기 중엽쯤의 판으로 보인다.
유학자로서 대성한 황윤석의 ≪산학입문 算學入門≫과 ≪산학본원≫은 그의 백과사전식 편저 ≪이수신편≫ 중의 일부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산학본원≫의 머리말에는 박율의 수학책 ≪주학본원≫을 근거로 삼아 그것을 수정하였다는 단서가 덧붙여져 있다.
실학파의 학자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홍대용의 ≪담헌서 湛軒書≫ 외집 권4는 수학을 다룬 〈주해수용내편 籌解需用內編〉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수학, 주로 ≪산학계몽≫에 ≪수리정온 數理精薀≫의 내용을 가미한 수학지식의 일상화·사회화를 꾀하였다.
최한기의 ≪습산진벌 習算津筏≫ 역시 ≪수리정온≫을 다분히 참조하면서도 내용은 홍대용의 ≪주학수용≫에 비하여 극히 고색이 짙고, 수학수준도 낮다.
본격적인 수학활동으로 주목을 끈 것은 남병길·이상혁(李尙爀)의 저술이다. 이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지낸 남병길은 여느 양반 지식인과는 달리 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상혁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당대 최고의 수학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옛 산서에 있는 측량술에 관해서 그림으로 설명을 붙인 ≪측량도해 測量圖解≫·≪구고술요도해 勾股述要圖解≫, 그리고 ≪구장산술≫을 해설한 ≪구장술해 九章術解≫ 이외에 그의 본격적인 저술인 ≪산학정의 算學正義≫ 상·중·하 3편과 〈무이해 無異解〉 등이 있다.
≪산학정의≫는 천원술·대연술(大衍術) 등의 전통적인 수학과 ≪수리정온≫의 새 수학을 아울러 깊이 다루었으며, 〈무이해〉는 서양의 대수방정식의 해법(借根方)과 동양전통의 천원술이 같은 내용의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 논문이다.
중인 산학자인 이상혁은 ≪익산 翼算≫·≪차근방몽구 借根方蒙求≫·≪산술관견 算術管見≫ 등 독자적인 연구를 담은 저술을 하였다. 이상혁이야말로 중국계의 전통수학에 얽매였던 종래 수학자와는 달리 스스로의 경지를 개척한 유일한 우리 나라 수학자였다.
이밖에도 실학기, 특히 후기에 갈수록 많은 수학서가 저술 또는 편저된다. 현재 각 도서관의 고서목록에 있는 필사본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실학기의 수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학활동의 발전단계에 관해서는 ① 중인 산학자 사이에서의 의욕적인 수학연구 및 저술활동(예:홍정하의 구일집), ② 실학자 스스로의 수학서 저술(예:홍대용의 주학수용), ③ 이른바 사대부 수학과 중인 수학의 합류(예:남병길과 이상혁의 공동연구 및 저술활동), ④ 유럽수학에의 접근 및 한국수학의 독자적 발전의 계기(예:이상혁의 산술관견)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수학 연구태도의 변화에 관해서는 ① 수학서를 경전시하였던 전통적인 경향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대부 수학에 나타난 고전화의 경향은 기실 그 내용을 보면 옛 산서를 소재로 하여 새로운 방법을 제기한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② 백과사전적인 교양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독립과학으로서의 수학이 차츰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책의 저술이 현저히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경향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4) 개화기의 수학
1895년(고종 32)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신제도에 의한 학교교육 속의 산술(또는 수학)은 내용이 전면적으로 유럽식으로 개편되었다.
산학은 이제 한국수학사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새로 제정된 〈소학교령〉에 의하면 심상과(尋常科) 3년, 고등과 2년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 산술교육의 목표 및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일용계산을 익히고 동시에 사상을 정밀히 하고, 유익한 지식을 주는 것을 요지로 삼는다. 심상과에서는 처음에 10 이하의 수에서 시작하여 1만 이내의 범위에서 가감승제와 통상소수(通常小數)를 교수하는 것이 가하다. 심상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행하지만 그 병용은 지역의 사정에 의해서 정한다.
고등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병용하고 주산에 있어서는 가감승제의 연습, 그리고 필산에서는 도량형·화폐·시각에 관한 계산문제로부터 점진하여 간단한 비례문제와 통상의 분수 및 소수를 교수하지만 수업연한에 따라 더 복잡한 비례문제까지 취급하여도 가하다.
산술의 교수는 이해력을 정밀히 하고 운산(運算)에 익숙하여 그것을 자유로이 응용할 수 있도록 힘쓰고, 또 정확한 말로 운산의 방법과 이유를 설명하고, 겸하여 암산에도 숙달하게 함을 요한다.”
한국수학사상 이때 비로소 필산과 주산이 교육기관을 통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에 전통적인 유학교육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성균관(成均館)도 교육과정의 개편을 단행하여 이수과목 중에 산술을 두었다.
사범학교(1895년 설립)와 중학교(1899년)에서는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산술 이외에 대수와 기하를 교수하였다. 당시 쏟아져 나온 수학책(대부분이 교과서) 중 현재 남아 있는 몇 권의 책을 통해서 개화 말기의 수학을 엿볼 수 있다.
≪정선수학 精選數學≫(1900)은 일본에서 엮어진 유럽계의 ≪신수학≫을 재편집한 것이며, 계산의 사칙부터 기하·삼각법·측량 등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산술신서 算術新書≫(1900)는 세로쓰기로 된 ≪산술신서≫에 비하면, 수식을 포함하여 모두 가로쓰기 형태로 표시되었다는 점에서 그만큼 유럽형태에 접근하고 있다.
≪신정산술 新訂算術≫ 3권은 1895년의 〈소학교령〉에 의하여 엮어진 심상과(3년 과정)의 교과서이며, 아라비아식 기수법에 관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정수(자연수)의 계산사칙과 그 응용을 다루고 있다.
≪산학신편 算學新編≫ 상·하권은 대한예수교 발행인 중학교과과정용의 번역판이다. 내용은 도량형·시간·순환소수·비례산·백분율·세금·평방근·입방근·등차 및 등비급수·면적·체적계산·평면기하 등이다.
≪산학통편 算學通編≫ 상·하권도 중학교용 교과서로 분수·소수·비례·개방·급수(등차·등비)·구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증명법을 도외시하는 종래의 계산수학이 여전히 배경에 깔려 있다.
≪초등산술교과서≫ 상·하권은 일본에서 인쇄된 양장본이다. 이 책의 저자 유일선(柳一宣)은 우리 나라 최초의 수학잡지 ≪수리잡지 數理雜誌≫를 1905년 11월부터 1906년 9월까지 8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개화기 수학의 특징은 첫째, 겉으로는 유럽계의 수학을 수용하면서도 내용면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수학관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정리의 증명 따위는 외면한 채 결과에 치중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둘째, 수학의 보급이라는 점이다. 1908년 전국 5,000개 학교에서 20만의 학생을 수용하였다는 통계를 그대로 따른다면, 당시 수십만명이 수학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교육 속의 수학이었고, 앞서 말한 남병길·이상혁 등에 의한 진지한 수학연구활동은 이 신식수학에 억눌려 그 후계자를 잃게 되었다.
이상 조선 말기까지의 우리 나라 수학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① 수요면에서의 성격으로 보아 우리 나라 수학은 관영과학이었으며, 민간수학은 거의 싹트지 않았다.
② 수학자의 교양적 배경에 관해서는 다분히 유교적 사상의 지배를 받았으며, 수학을 경전시(經典視)하는 경향이 있었다.
③ 관영과학의 성격상, 전통적인 형이상적 수리사상(數理思想)이 공존하였다.
④ 수학이 중인 산학자들의 집단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으며, 따라서 학문상의 자극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⑤ 수학의 사회적 효용이 유럽적 의미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라기보다 행정조직 속의 하부관료가 맡는 기술〔雜學〕이었다는 사실은 진지한 수학연구에의 의욕을 둔화시켰다.
7. 근대의 수학
조선 후기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 수학이 잇달아 도입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어 각급 학교에서 수학과목을 교육하였고, 교과서도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 14종이 나왔다. 이 시기에는 이상설(李相卨)·이상익(李相益) 등이 유명하였고, 일제강점 후에는 최규동(崔奎東)·안일영(安一英)·유일선(柳一宣) 등이 교사로서 활약하였다.
도입단계에 지나지 않았던 수학은 민족항일기에서 학교교육을 위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일제하의 우리 나라 수학연구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에서 교육 위주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설립 정도가 기록될 뿐이다.
실제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서의 교육은 중등교원 양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이춘호(李春昊)가 첫 한국인 수학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이 때 일본에서 동경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최윤식(崔允植)이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당시에는 장기원(張起元)이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였다. 이 밖에 다수의 중등교원이 있었다.
8. 현대의 수학
1945년 경성대학에 최초로 수학과가 개설되고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하면서 문리대와 사범대에 각각 수학과가 개설되었다. 대구사대(현 경북대 사대)와 연희대학교에 수학과가 개설된 후 차례로 여러 대학에 수학과가 개설되었다. 전술한 일본 유학 출신의 학자들이 교수로 일하고 초기에는 학부를 다니는 상급생이 아래 학년을 가르쳤다.
1946년 10월 조선수물학회가 창립되고 초대회장으로 최윤식이 선출되었다. 1948년 조선수물학회는 한국수물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1952년 한국수물학회에서 분리하여 대한수학회가 발족하였다. 1955년 학회 잡지 『수학교육』을 창간하고, 1964년 『수학』, 1967년 『대한수학회지』와 『대한수학회보』로 분리하여 발간하였다. 1986년부터 『대한수학회논문집』이 추가되었다.
순수 수학 논문집으로 1958년부터 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이 출판되고 있다. 1946년 조선수물학회의 수학 부문의 회원은 20여명인데 2010년 회원수는 3,353명으로 이 중에 수학관련 학과 교수 회원은 1,893명이다. 1949년 이임학의 논문(On a problem of Max A. Zorn)이 Bull. of AMS에후 출판된 이래 과학기술논문색인(SCIE)에 들어있는 논문 수로 한국은 2008년 세계에서 11위를 차지하고 있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 각국의 논문 수의 증가는 대체로 50% 증가하는데 중국이 1,126편에서 4,624편으로 한국은 281편에서 864편으로 증가하였다.
우리나라는 1981년 국제수학연맹(IMU)의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진 마지막 등급인 그룹 1 회원으로 가입하고 1993년 그룹 2로 상향한 후 2007년 그룹 4로 국가 등급이 상향되었다. 2단계 상향은 한국이 역사상 유일하며, 이는 국제수학계가 한국 수학의 급속한 발전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매4년마다 개최되는 국제수학자대회(ICM)에서 수학의 최고 영예인 필즈메달(Fields Medal)이 수여되는데 2014년 8월 서울에서 국제수학자대회가 개최된다.
대한수학회 외에 대한수리논리학회, 대한수학교육학회, 한국산업응용수학회, 한국수학교육학회, 한국수학사학회, 한국여성수리과학회 등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40년부터 출판되는 수학 논문들의 리뷰(review)를 모아 미국수학회에서 출판하는 Mathematical Reviews는 2007년 2,200,000개 이상의 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면 20세기 후반기에 폭발적인 연구결과가 얻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수학기초론, 대수학, 기하학, 해석학, 위상수학, 확률 통계와 유한수학 정도로 구분하던 수학이 2010년 미국수학회가 대별한 분야의 수만 62개이다. 복잡한 구조의 분석에 상응하는 수학적 구조를 도입하여 컴퓨터의 도움과 함께 수학의 도구를 사용하여 이들을 풀어내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전통적인 순수 수학보다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응용수학의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9. 의의와 평가
무한을 포함하는 수학적 구조를 논리적으로 다루는 수학은 인류 문명이 발달하는 것과 함께 발전하여, 미래 문명의 발전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수학은 분야가 세분화 되어 수학자들 사이에도 소통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수학적 구조와 방법으로 얻어내는 결과와 그 과정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으로 수학은 계속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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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mathematics , 數學)
(요약)
사물의 모양을 계산·측정·기술하는 등의 기본적인 경험으로부터 발전해 그 구조·순서·관계 등을 다루는 과학.
수학(mathematics)
논리적 추론과 정량적 계산을 다루며, 그 주제가 점차 이상화·추상화되면서 발전했다. 17세기 이래로 수학은 물리과학과 기술 분야에 반드시 필요했으며, 최근 들어서는 경제학과 생명과학의 정량적 분야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여러 문화권에서 상업이나 농업과 같은 실질적인 일이 점점 필요해짐에 따라 수학도 기본적인 계산에서 벗어나 많은 발전을 했으며, 위와 같은 활동을 계속 유지하고 이전 수학자들의 업적에 새로운 것을 확립할 시간과 기회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분화된 사회에서 수학은 더욱 발달했다.
모든 수학적 체계(예를 들어 유클리드 기하학)는 공리와 그로부터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는 정리들의 집합이 조합된 것이다. 수학의 논리적·철학적 기초에 대한 연구는 주어진 체계의 공리가 완전하고 일관성이 있는지를 알 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