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A. Hoffmann의 {Der Sandmann} 연구*
― 눈-모티브 Augen-Motiv를 중심으로 ―
권 진 숙
I. 들어가는 말
에.테.아. 호프만 E.T.A. Hoffmann의 소설 {모래유령 Der Sandmann}은 1816년 {밤을 그린 소설 Nachtst cke}이란 제목으로 된 두 권의 책 중 첫번째에 들어있는 것이다. '밤을 그린 소설'이란 문학용어는 원래 미술쟝르에서 사용되던 개념인데, 호프만은 이것을 그의 시문학에 도입시키고 있다. 음악가이면서 또한 화가이기도 한 시인 호프만은 이미 {깔로風의 환상적 작품들 Fantasiest cke in Callots Manier}에서 문학과 조형예술과의 관계를 밝힌 바 있다. 그는 렘브란트 Rembrandt 식의 밝음/어두움의 기법을 통해 장면을 배열하며, 밤의 불빛에 나타난 대상들이 갖는 특성과 기괴함, 그 빛의 반사작용을 문학 속에 그렸다. 낮익은 대상이라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주변 전체는 은닉된 채 어느 한 부분만이 불빛에 비추어질 때, 그것은 갑자기 낮설고 무시무시하게 작용한다. 시각적 요소를 부각시킨 이 '밤을 그린 소설'은 호프만에게 있어 시각적 조명효과를 언어로써 그림그리는 것이다. 밤의 불빛과 그 반영은 살아있지 않은 것을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체계는 우리가 지금까지 신뢰했던 확고부동한 세계질서 Ordo를 불현듯 마적인 모습을 띤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모래유령}에서 다음의 지문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원 세상에 - 이제 나의 늙으신 아버지가 화덕불을 향해 몸을 굽히시자 그는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보였다. 심하게 경련을 일으킨 고통이 그의 부드럽고 정직했던 얼굴을 흉하고 끔찍스런 악마의 상으로 일그려뜨린 것 같이 보였다. Ach Gott - wie sich nun mein alter Vater zum Feuer herabb ckte, da sah er ganz anders aus. Ein gr licher krampfhafter Schmerz schien seine sanften ehrlichen Z ge zum h lichen widerw rtigen Teufelsbilde verzogen zu haben.
선한 아버지의 상은 은밀한 연금술 작업의 불빛으로 인해 갑자기 코펠리우스와 비슷한 악한 상으로 변한다. 이 시각적 현상을 통해 호프만은 '시각적 인지의 양립성 Ambivalenz der Wahrnehmung'과 '감각의 기만적 성질 Sinnest uschung'을 우리에게 예고해 준다. 명암의 대비,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대비는 현실적인 외적 상과 인간의 내적 상의 대비로서, 그 시각적 인지의 허와 실을 한 눈에 보여준다. 호프만 소설이 가진 시각적 분야에 대한 풍부한 용어를 보면 얼마나 그 프로그램이 폭넓게 펼쳐져 있나를 느낄 수 있다. 소설문예학에서는 특히 {모래유령}에 나타난 호프만의 '시각적 소설의 탁월한 세련미 au erordentliches Raffinement perspektivischen Erz hlens'에 주목하였는데, 이는 호프만이 이 소설에서 밝음/어둠을 언어에서 뿐만 아니라 소설 구조적으로도(장면배치, 인물배치, 화자 등) '밤을 그린 소설 Nachtst cke' 기법에 충실히 따르기 때문이다. 밝은 장면과 어두운 장면은 서로 번갈아 배열되어 있다. 첫 장면인 나타나엘 Nathanael의 편지에서 그는 일인칭 화자로서 눈을 빼앗기는 데 대한 공포를 토로한다. 그의 視界는 어둡고 섬뜻하다. 두번째 장면은 이 편지에 대해 그의 약혼녀 클라라 Clara가 일인칭 화자로서 그에게 보내는 격려가 담긴 편지이다. 그녀의 視界는 밝고 이성적이다. 세번째 장면은 다시 나타나엘의 편지인데 역시 모래유령과 동일시된 코펠리우스 또는 코폴라에게 심리적으로 쫒기며, 괴기한 올림피아와의 관계를 언급함으로써 어둡고 무서운 분위기를 갖는다. 밝음과 어둠의 직접적 대비는 또한 인물에서도 볼 수 있다(로타르 Lothar/나타나엘, 클라라/올림피아 Olympia, 아버지/모래유령, 코펠리우스, 코폴라 Copolla).
밝음/어둠의 대비 관계는 모래유령 신화의 해석에도 있다. 어머니는 '아가야, 모래유령이란 없단다. 내가 모래유령 온다라고 말한 것은 네가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어 마치 모래유령이 너희들 눈에 모래를 뿌린 것 같이 된다는 말이다. Es gibt keinen Sandmann mein liebes Kind, wenn ich sage, der Sandmann kommt, so will das nur hei en ihr seid schl frig und k nnt die Augen nicht offen behalten, als h tte man euch Sand hineingestreut'라고 한다. 반면 유모는 '유령은 아주 나쁜 남자란다. 그는 아이들이 잠자러 들어가려 하지 않을 때, 그 아이들에게 찾아와서 한 주먹의 모래를 눈에다 뿌린단다. 그러면 눈들은 피를 흘리며 머리에서 튀어 나온단다. Das ist ein b ser Mann, der kommt zu den Kindern, wenn sie nicht zu Bett gehen wollen und wirft ihnen H ndevoll Sand in die Augen, da sie blutig zum Kopf herausspringen'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에.테.아. 호프만의 {모래유령}은 그 '특색있는 소설기교의 시각성 ausgepr gter erz hltechnischer Perspektivismus'와 함께 안경, 망원경, 거울 등의 광학기기, 다시 말해 인공적 눈까지도 총동원한 일종의 눈-모티브의 집합체라고도 하겠다. 볼프강 카이져 Wolfgang Kayser는 이 작품에서 눈-모티브를 기계인형-모티브 Automaten-Motiv와 나란히 소설의 주도모티브 Leitmotiv로 놓았으며 지그문트 프로이드도 아이들의 눈을 빼는 모래유령 모티브가 이 소설의 중점이라고 했다. 이제 본 논문은 이 {모래유령} 작품에서 눈 Augen과 봄 Sehen 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그 시각적 다양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본다.
II. 감각기관으로서의 눈
눈이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먼저 이를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 작품에서 눈은 크게 세가지 범주에서 활용되는데, 첫째는 감각기관으로서의 눈 Augen이고, 둘째는 보고 느끼는 감정표현체로서의 눈(눈빛 Blick, 시각적 조망 Perspektive)이며, 셋째는 인공적인 눈 k nstliche Augen, 말하자면 안경, 망원경 등으로 구분된다.
이야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나타나엘이 어린시절 잠 잘 시간이 되면 그의 어머니는 항상 모래유령이 온다는 경고를 하며 그를 침대로 보냈다. 그리고 정말 그는 잠시 후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층계를 올라와 아버지의 방으로 사라지는 소리를 매번 듣는다. 그는 유모로부터 이 모래유령이 나쁜 어린이의 눈을 앗아가는 무서운 유령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조금 더 커서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나이에도 항상 잠자기 전 그 모래유령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그 괴상한 발걸음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몰래 아버지의 작업실에 숨는다. 그리고 그는 그 모래유령이 다름아닌 아버지의 친구며 변호사인 코펠리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코펠리우스는 나타나엘을 비롯해 모든 식구들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코펠리우스는 함께 기계인간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 비밀 작업실에는 눈 구멍이 꺼멓게 뚫린 인형들이 있었다. 코펠리우스가 '눈을 가져와, 눈을 Augen her, Augen her'라고 말했을 때 나타나엘은 비명을 지르게 되고 코펠리우스에게 들키고 만다. 그는 작업중이던 불덩이 알맹이를 그의 눈에 뿌릴려고 하며 '이제 우리 눈을 갖게 됐군 - 아름다운 어린이 눈인걸 Nun haben wir Augen - ein sch n Paar Kinderaugen'이라 말하고 이 공포로 인해 그는 깊은 혼절상태에 빠지며 오랫동안 병석에 있게 된다. 그 얼마 후에 아버지는 작업실에서 폭발로 인해 목숨을 잃고 함께 있던 코펠리우스는 종적을 감춘다.
이제 나타나엘이 대학생으로 성장하여 스팔란짜니 Spalanzani 교수 집 맞은 편에 이사왔을 때 떠돌이 안경장수인 코폴라 Coppola가 그의 집에 온도계, 안경 등을 팔기 위해 그를 찾는다. 나타나엘은 그가 코펠리우스와 모습이 똑같은 사실을 알고 놀란다. 그가 물건사기를 거절하자 코폴라는 말하기를, '저, 온도계가 아닙니다. 온도계 말고요, 아름다운 눈도 있읍지요. 아름다운 눈요. Ei nix Wetterglas, nix Wetterglas. hab auch sk ne Oke. sk ne Oke'라고 해서 나타나엘의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팔려고 내놓은 눈은 그러나 평범한 안경이었다. 나타나엘은 작은 망원경 하나를 사고,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해 망원경으로 앞 건물의 창문을 향해 본다. 거기서 그는 스팔란짜니 교수의 딸, 그러나 이상하게도 움직이지 않은 채 죽은 사람의 굳어 있는 눈빛을 하고 앉아 있는 아름다운 올림피아를 보게 된다. 그는 곧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죽은 시력은 그가 사랑의 눈길로 바라볼 때 살아나는 것 같고, 그는 그 기계인형을 생명이 있는 인간으로 착각한다. 그는 이제 현명한 약혼녀인 클라라도 잊는다. 나타나엘은 어느날 교수집을 방문하려다 스팔란짜니 교수와 코폴라가 기계인형인 올림피아를 두고 서로 싸우는 장면을 목격한다. 교수는 땅바닥에 놓여있는 올림피아의 피묻은 눈을 타다나엘의 가슴에 던지며 말하기를, '이 눈들은 나타나엘에게서 훔쳐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다시 그의 정신착란증을 유발시킨다. 그 후 클라라의 도움으로 심한 정신착란증에서 다시 회복한 나타나엘은 마침내 정상생활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이 두 남녀는 결혼을 앞두고 어느날 시내에 있는 시청 탑 위로 바람쏘이려 올라간다. 클라라가 무엇인가 밑에서 이상한 현상이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고, 나타나엘은 주머니에 있던 망원경으로 그 물체를 관찰한다. 그리고는 다시 정신착란증을 일으킨다. 그는 약혼녀를 '나무인형아, 돌아라 Holzp pchen dreh dich'고 하며 그녀를 탑에서 밑으로 떨어뜨리려 한다. 다행히 그녀는 오빠인 로타르에 의해 구조된다. 탑 밑에 군중들 가운데 코펠리우스가 우뚝 서 있다. 나타나엘은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눈 sk ne Oke, sk ne Oke'이라고 비명을 지르며 밑으로 떨어져 죽는다. 코펠리우스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함 속에서 사라진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일련의 모티브가 줄곧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視界 Sehweise, 시각 Perspektive, 눈 Augen, 눈빛 Blick, 안경 Glas, 망원경 및 온도계와 같은 광학기기 Perspektiv 등의 범례적 언어이다. 또한 주인공의 정신착란증과 기계인형을 사랑하는 점도 모두 눈-모티프를 형성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주인공 나타나엘이 느끼고 있는 눈에 대한 공포의 심각성은 일찌기 지그문트 프로이드 Siegmund Freud가 그의 논문 {무서움 Das Unheimliche}에서 해설한 바 있다. 그는 단적으로 지적하기를, 겉보기에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인형 올림피아 장면은 분명 어느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효과를 가져오고 또 그럴 목적으로 작가가 썼음이 분명하나, 이 이야기의 중심은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요소, 즉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모래유령 모티브가 중점을 이룬다고 하였다. 눈은 인간이 현실을 감지하는 가장 중요한 신체기관이다. 이 눈이 위협받는다는 것은 곧 그 개체가 위협을 받음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나타나엘의 눈에 대한 공포를 곧 거세공포로 연결하고 이 거세공포증을 주인공의 정신착란증과 비정상적인 여성관계의 원인으로 보았다. 실제로 주인공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눈에 대한 위협이 어린시절의 모래유령 신화에 기인함을 첫번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보는 것과 인지는 세계로 들어가는 기초적 통로이기 때문에 눈을 잃음은 그만큼 높은 손실을 말한다. 눈의 파괴나 위협은 그래서 그 인물의 가장 끔찍한 경험이 되고, 그 결과로 정신착란이나 자살에 이르게 된다.
{모래유령} 작품에서 주인공이 그의 중요한 신체적 기관인 눈에 대해 느끼는 공포의 경험은 구체적으로 5회에 달한다: 1. 유모의 동화, 2. 아버지 실험실에서의 에피소드, 3. 나타나엘의 시 속에 담긴 그의 섬뜩한 예감, 4. 코폴라에게서 망원경을 살 때의 에피소드, 5. 스팔란짜니 교수 실험실에서 찢겨진 올림피아를 보는 장면들이다. 이 중에서 1과 2는 화자인 나타나엘이 직접 얘기한 것으로서 어린시절의 경험이다. 반면 3, 4, 5는 전지적 화자가 말하는 것으로서 그의 청년시절의 불행한 경험을 다룬 것이며, 특징은 이것이 어린시절 눈에 대한 공포체험의 연장이라는 점이다. 어머니가 '모래유령이 온다'라고 어린 아들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버지의 비밀작업(연금술로 기계인형을 제작하는 일)을 볼 수 없게 금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17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자연에 도전하여 신비를 벗기는 연금술은 아직도 금기시된 상태었다. 그러나 그는 커튼 뒤에 숨어 악마와 닮은 코펠리우스와 아버지가 함께 인조인간을 만드는 것을 본 것이다. 금기된 것을 봄 Sehen은 큰 대가를 치루었다: 코펠리우스에게 들켜서 모래유령 신화와 비슷한 악몽을 실제로 겪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 나타니엘이 행한 금기된 봄은 스팔란짜니가 감추어 둔 그의 인조인간 올림피아를 커튼의 틈 사이로 본 것이다. 여기서도 인조인간과의 기괴한 사랑의 결과는 정신착란증으로 끝난다. 그리고 마침내 시청 탑위에서 망원경이라는 인위적 눈을 통해 봄은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받은 건전한 신체기관인 눈이 보지 말았어야 될 것을 볼 때, 그리고 눈이 쾌락적으로 쓰일 때, 이 봄은 내적시각에 그릇되게 작용하여 패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래유령}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드가 눈이 빼앗기는데 대한 공포를 거세공포와 연결 했듯이 보는 것은 또한 성적 쾌락과 연관된다. 프로이드는 정신병적 시력장애자에게서 그 심리과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너는 너의 감각적 기관을 너의 감각적 쾌락에 잘못 사용한 것이다. 네가 도대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면 네겐 그것이 훨씬 낫다'.
이러한 면모는 특히 신화에서 뚜렷하다. 외디프스는 근친상간의 죄를 자신의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는 벌로 상쇄한다. 신체기관인 눈과 똑 같은 단어를 가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우게 Auye 여사제와 그녀의 아들 텔레포스와의 근친상간 관계도 벙어리가 되는 벌로 끝난다. 이 신화의 이름들에서 나타나는 은유는 눈과 성과의 관계를 일깨워 주고 있다. 또 다른 문헌에서는 눈과 성과의 관계를 달의 은유로 나타낸다. '달은 자기의 빛을 통해 자신을 보며 또 세상을 비추이는 눈 Der Mond ist ein Auge, welches selbst durch seine Strahlen sehe und die Welt erleuchte'이라 하였다. 호프만의 소설 {모래유령}은 그 제목이 말하듯이 민속적인 속설과 미신에 그 뿌리를 두고 씌여진 작품이다. 눈이 신체기관으로서 중요한 만큼 이 눈을 보호하고자 생긴 신화 및 민속적 속설도 많이 있다: '눈썹이 짙은 것은 악한 시선을 갖는다는 의심을 받게 한다. 그런 사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에게 면사포를 얼굴 위에 씌운다', '악한 시선을 덴마크어로 uglese( = 부엉이 시선)이라 한다. 부엉이는 마적인 동물로써 마녀새이다. 나쁜 행동을 한 사람들은 부엉이로 변신된다', '눈의 잔인성은 다른 사람에게 감염되며 그 눈을 보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 '유령과 마귀들은 하나의 눈을 강하게 만들고 다른 눈은 멀게 만드는 힘을 가져서 사람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마귀의 짖을 본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두개로 되어 있는 것은 분명 그 사람이 마귀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마귀는 도대체 눈으로 보지 않고 미래 속에서 본다' 등이 이에 속한다. 이와같은 속설은 눈의 중요성과 더불어 마성을 표현한 말로서, 모두 눈의 역기능, 즉 금기된 것을 보는 것이나 눈의 쾌락적 기능에 대해 경고한다. 호프만은 분명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호프만의 소설은 바로 이 시각적 모티브를 문학작품에서 가시화한 것이라 하겠다.
III. 감정표현체로서의 눈
보기 위한 신체기관인 눈은 눈빛 Blick과 동일하지 않다. 인간은 사물을 바라보고, 눈동자 뒤의 망막에서 뇌의 도움으로 본 것을 정리한다. 그것은 통찰의 눈빛이다. 사실 시각의 인지는 그 대상의 외적, 객관적 사실을 지나, 보는 이의 내적 주관적 심상이 작용함으로써 그 때의 눈은 감정표현체로서의 눈이 된다. 어린 시절 모래유령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정신적 압박을 받았던 나타나엘의 눈은 아버지의 연금술 장면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눈 구멍이 뻥 뚫린 사람 형체를 보고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버지 친구인 변호사 코펠리우스는 그에게 있어 모래유령과 같았다. 외적 사실이 내적 시각을 통해 환타지로 형상화된 것이다. 이는 호프만이 그의 시문학 개념을 논술한 [쎄라피온적 원칙 Serapiontischen Prinzip]의 기본요소가 되는 것인데, '실제로 바깥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본 것을 오로지 자기만의 정신적 산물로, 자기 판타지로서 im u ern Leben wirklich sich ereignen zu sehen was sich nur als Geburt meines Geistes, meiner Fantasie' 형상화한 것이다.
{모래유령} 작품은 주인공의 내적 시각 하나로 분석되기는 어렵다. 다양한 시각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타나엘과 클라라의 편지에는 각기 다른 화자의 주관적 시각이 나타나 있다. 또 그들과 대조적으로 소설 후반부의 삼인칭 화자 시각은 객관적 시각에 따른다. 이와 같은 다양한 시각들이 나타내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정황이다: 인간들에 대한 사실성은 이런 것이다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여러 다른 인지방법과 표상방법에 의해 주어질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러 다른 인지방법과 표상방법 속에 한 개체의 여러 다른 시각 Sichtweise이 주어진다.
실체는 눈을 통해 그대로 전달해 반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른 시각방법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다. 소설 속의 사건은 나다나엘의 주관적 시각 속에, 그리고 클라라의 주관적 시각 속에 각각 굴절되어 반영되는데, 이 두가지 시각들은 모두 그 고유한 정당성을 지닌다. 작가 호프만은 이런 다양한 시각들을 제시하기 위하여 나타나엘의 기이한 생을 우선 세사람의 화자가 각각 보고하도록 한다. 도입 부분에서 작가는 먼저 편지형식 속에서 주인공 인물들이 일인칭화자로서 자기 스스로에 대해 말하도록 놔둔다. 독자는 이들 세사람의 화자가 보고하는 것을 읽고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째 클라라의 보고 및 시각은 이성적이며 이해가능하고 단선적이다. 그녀는 나타나엘의 눈에 대한 공포와 그 심리적 여파를 간파하여 '... 제 생각에는 당신이 얘기하는 그 모든 끔찍스럽고 무서운 것들은 오직 당신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고, 실제 외부세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 da wie ich meine, alles Entsetzliche und Schreckliche, wovon Du sprichst, nur in Deinem Innern vorging, die wahre wirkliche Au enwelt aber daran wohl wenig teilhatte'라고 조언한다. 또한 3인칭화자의 보고 및 시각도 클라라의 것보다는 다소 복선적이지만 대체로 합리적이며 객관적이다. 3인칭화자는 올림피아에 대한 나타나엘의 무모한 사랑 얘기를 다룰 때에도 기괴한 효과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풍자적 빛 satirisches Licht'을 띤다. 화자는 독자에게 합리적인 정보를 주기 위해 기계인형에 대한 당시의 여론을(청년들의 다과회 모임 장면) 부가하여 주인공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간접적으로 평하기도 하고, 나타나엘의 두번에 달하는 정신착란증 발작 장면을 재구성하는 데서는 의무감을 갖고 정확히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려 한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이 왜 그렇게까지 됐을까를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모래유령} 작품에서 나타나엘이 직접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은 가장 독자에게 당혹감을 주며 괴기소설의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신뢰성이 없다.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연금술 장면인데, 잠을 안자는 어린이의 눈을 빼는 전설적 악마 '모래유령'이 구체적으로 코펠리우스와 연결되는 장면이다. 이미 나타나엘의 첫번째 편지에서 그는 이 인물의 마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때는 들어가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 아버지의 실험실을 그가 엿보다 발견된 상태였으며, 코펠리우스의 무서운 태도로 그가 기절할 때까지 어린아이로서 최고로 흥분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보고로서는 의심이 갈 만하다. 이 불확실한 보고는 그의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내게는 마치 사람들의 얼굴들이 사방에 있는 것 같았다 Mir war es, als w rden Menschengesichter ringsumher sichtbar'. 이것은 '연기 Qualm' 와 '밝게 번쩍이는 덩어리 hellblinkenden Massen'를 보고난 후다. '그러나 그 얼굴에 눈이 없었고 - 끔찍스럽게도 깊고 시커먼 눈 구멍이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aber ohne Augen - scheu liche, tiefe schwarze H hlen statt ihrer.' 이는 그가 연기 속에서 물체를 뚜렷이 볼 수 없었기도 했지만, 밝은 쇳덩이를 본 후의 광학적 망막의 잔상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코펠리우스가 외친 '눈을 가져와 Augen her!'에서 아이는 비명을 지르고 쓰러져서 들키고 마는데, 이 부분도 작가 호프만이 고도의 시각적 언어 테크닉을 구사한 부분이다. 이 단어는 모래유령에 대한 나타나엘의 판타지와 일치한다. 그러나 실은 눈 Augen은 또 다른 뜻, '광산의 순수한 광석 알맹이'의 뜻을 갖고 있다. 이후 코펠리우스가 어린 나타나엘에게 한 행동들(그를 들어 올려 불에 가까이 대어 앞머리가 그슬리게 된 것, 이제 우리 예쁜 어린이의 눈을 갖게 되었다는 코펠리우스의 말, 그리고 그가 쇠알맹이를 나타나엘의 눈에 뿌리고자 했던 것)은 모두 비밀리에 해야 했던 그들의 실험을 철모르는 아이가 발설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아이에게 겁줄려고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가장 비현실적 보고는 코펠리우스가 그의 팔과 ?摸?를 이리저리 떼었다 붙였다 했다고 하는 대목인데, 이후 곧 그는 깊은 혼절상태에 빠진다. 이것은 혼절 직전 최악의 상태 속에서 아이가 공포에서 몸부림치고, 코펠리우스가 그를 심하게 붙잡는 과정에서 통증이 그에게 그렇게 느껴졌는게 아닌가 한다. 문제는 이것이 당시 나타나엘에게 입힌 정신적, 육체적 충격이라 하겠다. 그의 혼절은 나중에 그를 자살로 이끈 정신착란증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코펠리우스의 악마상은 그래서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의 영혼과 내적 시각을 지배하게 된다. 때문에 성인으로서 과거를 회상하는 그의 진술에 나타난 모순은 이와 같은 정황 하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두번째로 나타나엘의 보고에서 의심이 가는 곳은 스팔란짜니 교수의 연구실 장면이다. 스팔란짜니는 그에게 피묻은 올림피아의 눈을 그의 가슴에 던졌으며, 또 다시 나타나엘의 정신착란증이 발작을 일으킨다. 피뭍은 인형의 눈알은 분명 독자들에게도 유령같이 작용한다. 그러나 바로 전에 있었던 상황을 보면 놀랄 것이 못된다. 나타나엘이 그 방에 들어섰을 때 스팔란짜니는 '... 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며, 유리파편들이 그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팔을 찢어 피가 마치 분수처럼 치솟았다 ... sich auf der Erde, Glasscherben hatten ihm Kopf, Brust und Arm zerschnitten, wie aus Springquellen str mte das Blut empor.' 인형에서 빠져나온 눈들은 그 때 분명 피가 묻었을 것이다. 인형의 눈을 마치 사람의 눈에서 빠져나온 피묻은 눈알로 표현한 나타나엘의 보고는 그래서 그의 내적 시각에대한 이해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 작품의 세계는 화자들의 다양한 시각을 통한 끊임없는 관계 속에서, 그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하며 '시적 세계의 총체적시각 Gesamtperspektivit t der poetischen Welt'을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시각현상의 의미를 다른 Aspekt로 볼 수도 있는데, 인물들의 특성을 그들의 눈길 Blick을 통해 해설하는 것이다. 호프만은 작중 인물들의 성격도 종종 눈의 특징으로 구별짓기 때문이다. 코펠리우스와 코폴라, 그리고 스팔란짜니는 쏘는듯한 번쩍이는 눈길을 갖는다. 이 인물들의 눈은 그래서 공격적이고 섬뜩하다. 이들은 공통되게 어떤 무시무시한 마적인 힘을 발산하며, 연금술과 같은 금지된 은밀한 작업에 관련되어 있다. 호프만 작품에서 이 쏘는 눈길은 음험하고 무서운 인물들에게 붙이는 변함없는 특징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불길한 눈길과는 대조적으로 선한 눈길이 있는데, 클라라의 깊이 있고 온화하게 웃는 눈길이 이에 속한다. 인물특성에는 눈 이외에도 눈썹, 속눈썹, 비웃는 듯한 미소, 안색 등 일련의 관상학적 요소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호프만이 인간의 표정에 대한 관상학적 지식을 갖고 이를 그의 문학에 반영시킨 것이다.
일찌기 플라톤주의자들은 자연철학적 방법에서 '눈을 영혼의 거울 Auge als Spiegel der Seele'로 보았다. 플라톤은 이미 다른 감각적 인지 가운데서 보는것을 우위에 둘 것을 요구했다. 보는 것은 모든 관찰을 위한 기본이며 그러므로 모든 철학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신은 모든 다른 감각기관에 앞서 눈을 먼저 형성시켰다. 왜냐하면 눈은 빛을 이끌어들이고 그로 인해 외부세계와 내부세계가 연결되기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자들 가운데서 특히 노발리스 Novalis가 내적, 외적세계에 대한 플라톤적 유추를 계속 발전시켰다. 빛줄기 Lichtstrahl는 영혼을 불러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고 했고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에서 나타난다고 했다. 때문에 눈은 높은 언어기관으로 되며 '영혼과 영혼과의 직접적인 통신 Kommunikation von Seele zu Seele'을 가능케 한다. {모래유령}에서 기계인형 올림피아의 죽은 눈빛은 나다나엘의 사랑의 눈빛으로 인해 그 인형의 눈에 시력 (생명력)을 부여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물론 나다나엘의 내적 시각에서다. 처음에는 망원경을 통해, 그러나 나중에는 망원경 없이도 일어난다. 눈길을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 그리고 특히 올림피아와 같은 인형에 사랑의 눈길을 집중시킨 것은 나다나엘의 내면에 박혀 있는 인지의 위험을 높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허상의 탄생이며 허상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호프만의 뒤를 이어 1817년에 나온 아이헨도르프 Eichendorff의 단편소설 {대리석像 Das Marmorbild}에도 해당된다: 주인공 플로리오 Florio는 '그가 더 오랫동안 쳐다보면 볼수록, 더욱 더 영혼이 가득한 그 눈을 천천히 뜨는 것 같이 그에게 보였다 Je l nger er hinsah, je mehr schien es ihm, als schl ge es die seelenvollen Augen langsam auf.'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플로리오는 나중에는 (그러나 언제나 저녁이나 밤에) 이 대리석 비너스 여인상이 현금을 연주하는 여인으로, 영주로, 그리고 카니발 가면을 쓴 아름다운 여인으로 살아 있어 만난다. 역시 아이헨도르프에게도 이 물체는 오직 주인공의 눈에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 된다. 이 인물들에게 붙여진 이름들도 {모래유령}에 나오는 이름들과 유사하다: 올림피아, 비너스/클라라(깨끗한), 비앙카(하얀).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가져온 결말은 다르다. {대리석상}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도와준 비앙카와 행복한 결말을 이룬 데 반해, {모래유령}에서는 나다나엘의 자살로 끝난다. 이는 내적 인지의 문제가 아이헨도르프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데 비해 호프만에게서는 보다 엄격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IV. 인공적 눈
나타나엘이 기계인형을 살아있는 것으로 인지한 것은 소형망원경 Taschenperspektiv을 통해서이다. 이 인위적 시력보조 기구를 통해 나타나엘은 기계인형의 눈을 살아 있는 '반짝이는 눈 strahlende Augen'으로 인지하고, '그녀의 고귀한 사랑스런 눈길 ihr holder Liebesblick'에 빠져든다. 그런데 그 눈은 원래 약혼녀인 클라라가 가진 눈이었다. 이 광학도구는 그래서 시각의 위조로서 기능을 맡는데, 이와 같은 현상은 끝 장면에서 다시 한번 더 확인된다. 시청 탑 위에서 그가 소형망원경을 눈에 댄 채 클라라를 바라보았을 때 그 망원경 속에 나타난 것은 그녀 대신 찢겨진 올림피아였다. ' ... 하얗게 질려서 그는 클라라를 응시했다. 그러자 빙글빙글 도는 눈동자에서 불기둥이 튀었다; 다음에 그는 공중으로 펄쩍펄쩍 뛰면서 그리고 마치 쫓기는 짐승처럼 찢어지는 소리로 울부짖고 웃기도 하면서 '나무인형아 돌아라 - 나무인형아 돌아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그는 클라라를 붙잡아 탑 아래로 밀어뜨리려 했다... totenbleich starrte er Clara an, aber bald gl hten und spr hten Feuerstr me durch die rollenden Augen, gr lich br llte er auf, wie ein gehetztes Tier: dann sprang er hoch in die L fte und grausig dazwischen lachend schrie er in schneidendem Ton: `Holzp ppchen dreh dich - Holzp ppchen dreh dich` - und mit gewaltiger Kraft fa te er Clara und wollte sie herabschleudern.' 여기서 그의 내적 시각과 광학도구와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된다. 이때에 망원경은 그 과학적 성능을 인정받기에는 미미한 것으로서 현미경과는 차이가 난다. 그보다는 오히려 '마법의 안경 Zauberglas'이라 하겠다. 즉 심리적 내적 과정이 일종의 최면술에 걸린 것이다. 이 광학기기는 나다나엘의 視界를 변모시켜 마적으로 작용시키는 기능을 가질 뿐이다. 결국 인위적이고 고정된 소형망원경의 시계를 통해 얻은 사랑은 허위다. 이 허위기능은 비인류적 목적에 사용되는 기계도구에 대한 비판으로 봐야겠다. 호프만 시대 사람들은 광학도구의 놀라운 효과를 유령 Spuck이나 환시 Geistersehen으로 취급했다. 왜냐하면 이런 인위적 눈은 생리적, 자연적 인지를 계속 교란하고 인지 콘트롤을 상실하게 하기 때문이다. 호프만의 작품에서도 광학도구들은 그 자체가 위험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도식적 과정 속에서 주로 나타난다: 먼저 이런 광학도구를 다루는 사람은 능란한 장삿꾼들이다. 그들은 이 기구를 주로 젊은 주인공 남자들에게 보여주는데, 풍부한 판타지를 갖고있는 이 청년들은 광학기기의 멋진 효과에 쉽게 매혹되고 만다. 다음에 주인공들은 대부분 그것을 금기시된 일에 사용함으로써 심리적 인지 콘트롤에 이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광학적 위선에 빠지게 된다. (예: {Prinzessin Brambilla}, {Ciarlatano}, {Das de Haus}, {Der goldene Topf})
{모래유령}에서 안경장사 코폴라가 물품을 보여주기 위해 안경들을 그의 책상 위에 쏟아 놓았을 때 '수천개의 눈이 나다나엘을 쏘아보며 찡그렸다 Tausend Augen blickten und zuckten krampfhaft und starrten auf zum Nathanael'고 한다. {황금 항아리 Der goldene Topf}에서 린트호르스트 Lindhorst의 에메랄드 반지는 번쩍이는 빛을 쏘는데, 주인공 안젤무스 Anselmus는 거기서 이 마법사의 세 딸인 작은 꽃뱀들이 나오는 것을 본다. {벼룩의 대가 Meister Floh}에서 러이벤획크 Leuwenhoek는 많은 테크닉을 가한 현미경을 제조한다. 높은 탑에서 그는 또 다른 연금술사인 슈밤머담 Schwammerdamm과 함께 별을 관찰하였다. 한 날카로운 망원경의 빛이 정령과 함께 날아가던 벼룩의 대가를 맞혀서 떨어뜨린다.
호프만은 그 당시에 획기적이었던 광학기기의 과학적 성능을 알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는 그의 문학에서 심리적, 마적 도구로 끌어들였다. 그는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처럼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 신화적 상을 찾기도 했으며 민족적 사고로 되돌아가고자 동화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다른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이 근원에 도달하기 위하여 멀리 떨어진 거리감을 극복하여 볼 수 있는 인지(망원경), 그리고 육안으로 채 볼 수 없던 아주 미미한 것에 대한 파악(현미경)을 그의 문학에 도입시켜 심리적으로 다룬다. 이 때에 거울, 크리스탈, 그리고 반지 같은 것이 보조로 사용된다. 이것들은 모두 설화나 미신에서 마적인 힘을 갖는 물체들이다. 호프만은 광학기도 마찬가지로 마적인 영역에 끌어들였다. {폐가 Das de Haus}나 {모래유령} 소설의 주인공들은 환각과 피해망상증에 시달린다. 게다가 그들은 또 눈이나 혹은 광학도구와 연관된 표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공포증은 모두 유모동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폐가}에서 테오도어는 회상하기를 '언젠가 한번 나는 흉악스럽게 불타오르는 두 눈이 거울 속에서 무섭게 번쩍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고는 기절해 쓰러져 버렸다 Einmal glaubte ich ein Paar gr liche gl hende Augen aus dem Spiegel f rchterlich herausfunkeln zu sehen, ich schrie auf und st rtzte dann ohnm chtig nieder'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거울 마법에 대한 미신에 근거한 것이다. 사람들이 죽은 사람 방에 있는 거울을 덮어씌우는 것은 죽은 자의 혼령이 그 거울로부터 그 방에 있는 산 사람의 영혼에 작용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모래유령}에서 나타나엘이 처음으로 망원경을 입수하게 된 것은 안경장수 코폴라에 의해서다. 여기서는 먼저 그 이름에 유의해야 되겠다. 나타나엘이 살아 있는 모래유령으로 착각하고 있는 코펠리우스 Coppelius는 라틴어로서 그 어원은 copella (연금술 실험용 남비)이다. 그리고 코폴라 Coppola는 이태리어로서 coppo는 눈구멍 Augenh hle를 뜻한다. 이들 두 사람은 이름과 외모의 유사성 때문에 아마 나타나엘에게 동일인으로 보인 것 같다. 이 점도 눈에 대한 공포와 그 피해망상증이 주인공의 내적 시각을 얼마나 변모시키는지 보여준다. 이태리인인 코폴라가 처음 안경을 팔려고 했을 때 그는 독일어를 잘 구사할 줄 몰라서 '아름다운 눈 sk ne Oke'이라며 권한다. 이 'sk ne Oke'란 말은 작품 속에서 일종의 열쇠와 같은 역할을 맡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엘은 탑에서 떨어지며 이 말을 외치기 때문이다. 광학기기가 이처럼 마적인 불길함을 상징함은 다음의 지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 코폴라는 점점 더 많이 안경을 내놓았다. 그러자 점점 더 험악하게 불타는 시선들이 뒤섞여 튀어나오고 그 핏빛과 같은 빨간 빛을 나타나엘의 가슴에 쏘아댔다
... und immer mehr Brillen legte Coppola hin, und immer wilder und wilder sprangen flammende Blicke durcheinander und schossen ihre blutrote Strahlen in Nathanaels Brust.
반면에 코폴라는 소형망원경을 '아름다운 유리 sk ne Glas'라고 소개하며 다시 그를 유혹한다. 이 소형망원경을 나타나엘은 계속 '코폴라의 유리 Coppolas Glas'라고 말함으로써 이 광학기기가 심리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타나엘은 결국 이 인위적인 눈으로 남의 집 창문을 엿보고, 그것도 어느 여성을 숨어서 관찰한다. 상대방이 눈치 못 챈 상태에서 그의 눈은 괘락적 본능을 즐긴 것이다. 때문에 그 결과는 기만일 수 밖에 없다. 그가 본 아름다운 여성 올림피아는 실은 기계인형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바라본 존재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일으킴은 자기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같은 끔찍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유의 자아, 고유의 인식을 폐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V. 맺는 말
눈 모티브는 일생동안 작가 호프만을 매료시킨 문학소재이다. 그는 이 때에 고대 신화나 수백년 전통으로 내려온 유모들의 동화, 그리고 미신과 같은 근원적인 면에 접근한다. 옛 사람들은 눈을 숭배했듯이 또한 그 눈의 마적인 힘 앞에서도 두려움도 가졌다.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은 이러한 민족적 사고에서 출발하여, 이 눈 모티브가 얼마나 인간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원초적 불안 및 심리상태와 연관이 있는지를 그의 작품 속에 반영시켰다. {모래유령}은 특히 이 작가가 가진 시각체계의 다양성을 가장 밀도있게 나타낸 작품으로서, 감각기관으로서의 눈 뿐만 아니라 감정표현체로서의 눈, 다시 말해 인간이 눈으로 감지한 인지, 그리고 시각적 조망의 작용을 서술한 작품이다. 더 나아가 호프만은 눈빛, 그리고 눈썹 등과 관련된 관상학, 그리고 광학기기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시각성을 다루고 있다. 호프만은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눈이 귀한 만큼, 이것이 그 자연적 상태를 벗어나 쾌락적 봄으로 사용될 때, 그리고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볼 때 인간의 정신에 얼마만큼 피해를 주는지 보여준다. 눈은 단순한 보는 기능을 넘어서서 인간의 인지를 콘트롤하고, 그 콘트롤 된 내적 시각에 의해 심지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허물어뜨릴 수도 있다. 눈을 빼앗는 모래유령의 환영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 나타나엘의 불행한 이야기를 일종의 싸이코 소설류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래유령}이 갖는 작품가치는 그러나 주인공의 생의 의미나 그의 운명보다 작가의 세련된 시각테크닉에 있다고 하겠다. 낭만주의 문학적 관점에서 호프만의 시각성을 고찰하는 작업이 본 논문에서는 미비되어 있는데 이는 앞으로 해야 할 과제로 고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