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시조 산책 -표현 내용상 갈래에 따라 유 준 호
1. 시조문학이란 무엇인가. 창(唱)의 가사(歌詞)였던 시조가 전통문학의 줄기로 분화되어 문학 장르로 자리 잡은 지도 어언 80여년이 된 듯하다. 그럼 시조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대체로 많은 이들은 우리 민족이 천년을 넘어 다듬고 가꾼 민족시가로 3장 6구 12음보, 45자 내외로 이루어지는 정형성을 가진 짧은 형태의 정형시라 말하고 있다. 이것이 평시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또한 현대시조는 신구문학(新舊文學)의 분수령인 갑오개혁을 맞아 고시조의 탈을 벗고 서서히 새 모습으로 이행하였는데 그 향도역(嚮導役)을 맡은 이는 육당(六堂)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시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형태미와 내용미가 조화를 이루고, 어투가 ‘무엇이’ ‘무엇 무엇’ ‘하노라’등 진부한 상투어를 사용하여 다만 자수나 맞추는 태도는 버려야 하며, 감탄사(아, 야호 등)도 될 수 있으면 버려야 한다. 또한 시조는 형식이 맞아야 함은 기본이고, 상(想)이 보이고 주제 의식이 뚜렷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이 융화된 독창적, 개성적 표현이 구상어로 살아 움직여야 한다. 부분 구나 행, 비유적 표현 등은 신선하고 아름다우나 전체적으로는 풀린 나사처럼 나뒹굴어 있으면 아무 짝에도 못 쓰는 작품이 된다. 그리고 추상어의 나열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아리송한 표현도 피해야 한다. 현대시조의 시어는 자연스럽고, 주제 표현에 알맞으며, 진실함이 들어나는 말을 찾아 쓰고, 그를 통한 이미지 연결의 끈이 끈끈이 이어져야 한다. 또한 시조 작품이 운치와 맛, 격(格)이 느껴져야 한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표현된 시조가 자수율에 “끌려 다닌다.”는 인상을 주기보다는 “잘 다스린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는 박재삼, 이근배의 말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시조에서의 경계대상은 서술이나 직설로 자기주장을 그대로 표출하는 일이다. 시조는 시보다 더 함축성이 강한 운문이다. 시조는 이런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완벽한 모습의 작품을 창작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런 작품도 흔ㅎ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노력할 숙제가 아닐는지. 2. 시조의 표현 내용상 갈래 E. 파운드는 시를 음악시, 회화시, 논리시로 구분하고 있는데, 음악적 성질을 통하여 직접 호소력을 지닌 시를 음악시(melopoeia)로, 시각적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를 회화시(phanopoeia)로, 시어가 이지적 용법으로 이루어지는 아이러니컬한 특성을 지닌 시를 논리시(logopoeia)라 하고 있다. 한밭들에 펼쳐진 현대시조도 그 표현 내용상으로 볼 때 이와 유사하게 주정적(主情的) 서정(抒情) 시조, 주의적(主意的) 관념(觀念) 시조, 모사적(模寫的) 회화(繪畵) 시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한밭시조』에 실린 작품 가운데 변격변형 작품이나 기획 특집에 실린 작품은 제외 하고, 회원 신작을 중심으로 한 사람에 한편 씩 선별하여 이를 위의 세 유형의 시조 형태로 가름하여 그 동안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던 회원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주정적(主情的) 서정(抒情) 시조 주정적 서정 시조로는 황진이 시조와 월산대군의 시조를 꼽을 수 있다. 황진이의 “冬至(동지)ㅅ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春風(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라고 한 시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서정 시조이다. 또한 월산대군의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라 한 자연 서정도 우리의 귀에 익은 주정적 서정 시조이다.
이와 같이 주정적 서정시조는 객관적 현실에서 환기되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정서적으로 노래하는 시조이다. 여기엔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해석이 전혀 깃들여 있지 않고 오직 사물의 미적 이미지만 구사되는 순수시조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엔 수많은 형상들이 만들어지고 지워지는데 그런 마음 속 형상을 주정성을 가지고 시적언어로 표현해낸 시조가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개인의 감정이나 사상에 호응하는 운율 양식의 표출, 형상화와 리듬 효과를 중시한다. 세등선원 목탁소리 뉘 잠을 깨우는가 간밤에 쏟뜨리던 우레는 어디 가고 무념의 그믐달 쪽배 강 건너는 신새벽 -이건영, 그믐 단상 전수- ‘선원(禪院)’은 참선(參禪)을 통하여 마음을 닦는 도량(道場)이기에 산속 깊숙이 고요가 숨 쉬는 장소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세등선원(世燈禪院)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전 시내 탄방동 한복판에 떡 버티고 있는 선원으로, 1972년도에 설립된 대표적 비구니(比丘尼) 선원이라고 한다. 여인네의 수선스러운 마음을 오히려 소란스런 곳에서 갈고 닦아 말갛게 씻어내라고 이런 곳에 세웠나 보다. 도심에 있는 선원이지만 이 시조를 통하여 보면 고요란 고요는 다 모아놓은 정적 속에 번뇌를 태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하다. 이 시조에서 ‘목탁소리’는 속세를 깨우고, 지난날의 무성하던 잡념을 어디론가 날려주는 역할을 하는 시어이고 ‘우레’는 바로 이 세상의 요란스러운 그 잡념, 번뇌이다. 중장에서의 ‘간밤에 쏟뜨리던 우레’라고 한 표현은 지난 세월 왈칵 쏟던 세상의 번뇌를 표현한 말로 ‘쏟뜨리던’이란 시어는 일찍이 플로베르(Gustave Flaubert)가 말한 일물일어(一物一語)에 가장 알맞은 역동적 시어인 듯하다. 그리고 종장 ‘무념의 그믐달 쪽배/ 강 건너는 신새벽’은 이 시조의 절정점으로 세사(世事)를 다 털어내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일생이 마무리되는 지점을 향해 마음의 배를 저어 신세계인 불심의 세계에 들어서는 모습이다. 청정심(淸淨心)이 물씬 느껴지는 한편의 단시조이다. 늦가을 단풍 길은 오순도순 정다운 길 손잡고 가다보면 코스모스 한들한들 나를 좀 보고 가라네. 애교 떠는 고갯짓 싸늘한 가을바람 큰 산서 내려오면 마을로 어서 가자 서두는 가을 찬비 어느새 흠뻑 젖은 몸 색동옷이 감긴다. -배정태, 단풍길 전수- ‘가을 정경을 있는 그대로, 느낌이 가는 대로 순수하게 표현해 주고 있는 동시조 작품이다. 마치 유치원 소풍 가는 느낌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시어 ‘코스모스’ ‘가을바람’ ‘가을 찬비’는 어느 유소년 소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전편에 동심의 세계가 여과 없이 나타나 있다. 특히 ‘오손도손’ ‘애교 떠는’ ‘마을로 어서 가자 서두는 가을 찬비’등 여기 사용된 아기자기한 의태, 의인화 기법의 시어들은 읽는 이의 정감을 자극한다. 단풍의 울긋불긋함을 색동옷의 그것에 연결시켜 은유로 표현한 점도 새롭다. 순수한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이 이루어진 시조이다. 크게 발전을 이룬 배 시인의 시적 성과에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동심의 시심이 고매한 시심으로 발전하기를…. 딱딱한 네 속에도 꽃 피던 얘기 있었구나. 뜨거운 한여름을 햇빛으로 닦아서 한 생애 불태운 소망 꼬옥 안고 자잔다. -송영자, 씨앗 전수- 생물학적 생성과정에 감성을 투여하여 의인화 표현 수법으로 꽃에서 씨가 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딱딱한 씨’속엔 ‘꽃 피던 이야기’가 숨어 있고, 그 꽃 피던 이야기를 햇빛으로 맑게 닦아 소망을 안고 씨 속에 꿈으로 웅크려 넣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적인 섬세한 직관으로 꽃이 가진 종족 번식의 원초적 본능을 붙잡아 한편의 시조 작품으로 빚어냈다. 어조가 자장가를 연상하게 할 만큼 상당히 고요하고 자애로우며 곱다. 다른 작품 “대둔산의 아침”도 그 어조는 한결같다. 특히 “대둔산의 아침”에서 ‘사래 긴 갈증들이 고이는 이른 새벽’ ‘한 서린 물안개가 침묵하는 깊은 산’ 같은 시구가 눈길을 끄는 가구(佳句)였다. 시골길 어딜 가나 채이던 그 쇠비듬 이리저리 밟히며 나뒹굴던 쇠비듬이 시한부 폐암 환자를 보란 듯이 살렸네. 하찮은 들풀 하나 사람도 살리더니 버려진 듯 모르는 듯 다 함께 어울려서 사랑을 함께 부비니 사람을 살렸다네. -이강철, 쇠비듬, 전수- 객관적 현실에 나타난 자연 현상과 기능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쇠비듬』은 우리 농가 주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풀로 그 번식력이 어찌나 강한지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는 여간 귀찮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약성(藥性)이 있다는 TV 전파를 타고 나서 갑자기 귀염둥이가 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야생초이다. 이 작품은 『쇠비듬』이 귀염둥이가 된 다음 쓴 시조인 듯하다. 서정성보다는 서사성이 강한 작품이다. 그래서 작품 묘사도 서술이 되었는데 좀 서정이 깃든 함축적인 표현 작품이 되었으면 싶다. ‘사랑을 함께 부비니’가 나름 함축성이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쇠비듬은 여드름, 당뇨, 관절염, 장 기능, 고혈압, 대장암, 위암 등에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참말로 하찮게 여기던 길가의 쇠비듬이 인간을 살리는 요긴한 약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시조이다. 그런데 이 작품 두 수는 종장에 똑같이 사람을 살렸다는 말로 마무리 되고 있고, 특히 둘째 수는 초장에서 사람을 살렸다고 하고 종장에서 다시 사람을 살렸다고 겹치기 표현을 하고 있다. 강조하기 위하여 그랬다면 할 말은 없지만 구태여 그리 할 필요가 있었는지. 차라리 이 두 수를 한 수로 압축하면 더 시적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도화 숲 얼비치어 붉은 해 떠오르면 북으로 가자던 물 더는 못 가 안타까워 우뚝 서 기다린 괴석 피눈물 밴 적벽강 남풍은 절벽강산 이화 불러 놀자 해 달빛에 띄운 노래 구름 안개 걷혀지네. 신선이 추는 춤사위 일어나는 불립문자. 봉황천 품에 안고 동해로 들자던가. 금빛 날개 퍼득이며 비상하는 저 용 용 난세의 어초은인 깨어나 천년만년 살잔다. -이정남, 장금정에 올라 1, 2, 5 수- 이 작품은 금산군 부리면 수통마을 적벽강을 배경으로 한 대장금 촬영지 장금정을 보고 쓴 작품인데, 다분히 선교적(仙敎的)이다. ‘적벽강’이란 배경어가 들어 있어서도 그렇지만 그 시어들의 배열과 진행 이미지의 과정이 마치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를 번안(飜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적벽부 첫머리 부분에 보면 “이윽고 동녘 산자락 위로 달이 떠올라,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고 있으니, 흰 이슬의 안개는 강을 가로지르고 물위로 비춘 달빛은 하늘과 맞닿았어라. 일엽 같은 배 하나는 그와 같이 따르고 만경창파 망망한 수면에 맡겨두었다. 오호라! 장강이 어찌나 넓은지 허공에서 바람을 거느리고 가는 듯하니, 어디에서 멈출지 모르겠고 훨훨 나부끼며 마치 속세 떠나 홀로 서서 날아가는 듯하니, 이미 깃이 돋아 신선이 되었어라.”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유유자적하는 시상의 전개가 이를 빼닮았다. 아마도 말이 필요 없는 절경의 모습에 작자는 그 감흥을 이렇게 표현했나 보다. 첫째 수에서는 ‘도화’ ‘붉은 해’ ‘피눈물 밴 적벽강’등 적색(赤色)의 이미지를 배치하고, 둘째 수에서는 ‘이화’ ‘달빛’ ‘안개’등 백색(白色)이미지를 배치하여 대조의 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수 ‘봉황천 품에 안고, 〜난세의 어초은인(漁樵隱人) 깨어나 천년만년 살잔다.’하는 표현은 ‘봉황’ ‘용’등 상상 속의 영물(靈物)을 통하여 속념(俗念)을 버린 모습으로 적벽가의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하는 선경(仙境)의 심경을 느끼게 한다.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낭만적 감정이 흘러넘치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적벽강, 봉황천은 결국 금강이 될 텐데, 서해 아닌 “봉황천 품에 안고 동해로 들자”했을까. 어쩜 햇살에 의한 기화(氣化)과정을 거쳐 동쪽으로 날아가 비가 되어 동해에 내리리라 상상한 것일까. 시상이 탁 트여 활달하다. 첫 새벽 움튼 새싹 춘삼월 황제였네. 출수된 이파리들 사월 앞을 물러서니 칠월에 수줍어 핀 꽃 잎 그리운 상사화 -홍윤표, 상사화 전수- 홍 시인은 국제펜한국본부 충남지회장을 맡아 충남지방 시조시인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분이다. 상사화는 일명 꽃무릇으로도 불리고 있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꽃이다. 그러나 엄밀하게는 다르다고 한다. 상사화 꽃말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으로 개화기는 6 ~ 7월이며 잎이 지고난 뒤 연보라 꽃을 피우기에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해 늘 그리워하는 꽃으로 원산지는 한국이라고 하며, 꽃무릇은 석산(石蒜)이라고도 부르는데 꽃말은 ‘슬픈 사랑’이며, 개화기는 9 ~ 10월로 진한 선홍빛 꽃이 피었다 진 뒤 잎이 나와 이 또한 잎이 꽃을 그리워하는 모양새라 하며, 원산지는 일본이란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기에 이 둘을 그냥 상사화로 부른다고 한다. 위 작품은 이런 생태학적 원리를 모티브로 하여 쓴 단시조이다. 상사화는 열매를 맺지 못하여 구근(알뿌리)로 번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홍 시인은 ‘출수’란 말을 중장에 배치하였을까. 물이 갑자기 불어난 출수(出水)는 아닐 테고, 이삭이 나온다는 뜻의 출수(出穗)일 텐데, 줄기를 이삭으로 본 것일까. 어쩠든 이 작품은 상사화의 잎과 줄기, 꽃이 피는 순서에 따라 그 과정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초장의 ‘황제’란 시어와 종장 ‘수줍어 핀 꽃’은 잎과 꽃의 대칭으로 초장이 남성적이라면 종장은 여성적이다. 일반적으로 상사화는 여성적 이미지를 가진 시적 소재인데 이를 꽃이 아닌 줄기는 ‘황제’로 은유하여 남성화하고 있다. 아마도 남녀 대비로 시조를 짜고 싶어 시어를 그리 배치한 모양이다. ‘갑천 돌다리(김창현)’, ‘디디올 나루(리헌석)’, ‘가을(신미경)’, ‘수정봉 NO 1237(신익현)’, ‘사인암(우제선)’, ‘편지(이기동)’, ‘가을달(이상덕)’, ‘달빛(이한식)’, ‘궁남지 국화 전시회(이흥우)’, ‘피스모[Pismo]해변에서(조근호)’, ‘망향의 숲(최한구)’ 등이 표현의 묘를 살려 쓴 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2) 주의적(主意的) 관념(觀念) 시조
주의적(主意的) 관념(觀念) 시조란 이성(理性)이나 감정보다는 의지(意志)를 주요한 것으로 삼는 경향을 보여 주면서 추상세계 즉 정신세계를 상상적으로 표현하는 시조이다. 여기엔 사물의 가치, 인간세계의 가치와 윤리 의식을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는 경향이 있고 그 바탕엔 철학이 숨어 있다. 그러다 보니 주로 교술적인 면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고시조 대부분이 이에 속하는데 이는 유교의 강한 영향권에 있던 조선조의 윤리적 가치관 강조의 시대상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라고 본다. 고시조 가운데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 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평생(平生)애 곳텨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하는 정철의 훈민가,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하는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枾歌)와 같은 시조들이 여기에 속한다. 위 두 작품은 효심(孝心)을 표현하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정철의 훈민가는 직설적인데 반하여 박인로의 조홍시가는 다분히 우회적이다. 현대시조에서는 비유적 우회적인 표현으로 이를 표현하는 것이 보편적이나 때로 이에 속하는 작품 가운데는 마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한 구절을 재해석해 놓은 모습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문학은 읽는 이에게 감동과 느낌을 주는 글인데 그 본분을 잃고 가르침을 주려한다는 인상을 씻을 수 없다. 문학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 틀린 생각이란 말은 아니다. 다만 직설적으로 겉으로 드러나게 이를 표현할 것이 아니라 속으로 숨겨놓고 느껴서 그 효과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참고 힘내자 힘을 내자 비우고 내려놓고 엎드려 비는 간구 젖은 눈 무릎 사이로 차오르는 별무리 힘겨운 곡예하며 다다른 오지의 끝 돌아보면 까마득히 고난 길을 걸었구나. 저 담을 넘기만 하면 나의 행복 시작이다. -김성숙, 담쟁이 전수- 이 작품은 담쟁이의 속성과 의지의 삶을 사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접목시켰다. 담쟁이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듯 가파르고 고된 세상을 살며 간절히 바라는 기원―(좀 더 잘 살고 좀 더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고 비는 행위)-이 여기 나타나 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공통 욕망이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원형 공연장 삼아 온몸을 바쳐 줄타기하는 곡예(曲藝)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돌아보면 고난(苦難)도 즐거움이라고 하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늘 내일은 무엇이 긍정적이고 좋은 쪽으로 달라지겠지 하는 무지개 꿈속에 살아간다. 작자도 그런 일반적 심리를 담쟁이란 사물을 통하여 표현해 본 것이리라. 그래서 이 작품의 마지막 종장 ‘저 담을 넘기만 하면 나의 행복은 시작이다.’하는 표현을 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의 ‘담’은 삶의 장애물, 역경의 마지노선이 아닐까. 이 구절을 보면 문득 독일의 신 낭만파 시인 칼 붓세(Karl Busse 1872-1918)의 『산 너머 저쪽』이란 시가 떠오른다.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은 늘 짝이 되어 함께 다닌다고 한다. 행복 속에 불행이 있고 불행 속에 행복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당신 곁에 있다는 칼 붓세의 메시지가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굳이 이 작품에 사족(蛇足)을 달면 첫수 초장이 두 구가 한 구가 된 것 같고, 표현도 무슨 구호 같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조의 첫수 종장 “젖은 눈 무릎 사이로 차오르는 별무리”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담쟁이에 감성을 투여하여 우주를 포용하는 모습으로 시적 신선도를 느끼게 하였다. 하늘아 말해다오 바람이 어딨는지. 날아가 예쁜 마음 가득히 품어 안고 꿈들이 활짝 핀 화단 꽃처럼 살고 싶다. -김영준, 하늘아 전수- 이 작품에서 ‘하늘’은 절대 섭리를 품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바람’은 그 섭리를 수행하는 수행자로 인식하고 쓴 것이 아닐까. 사실 바람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느낌으로 보면 분명 있고, 눈에 보이 않으니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실체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살 수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요즘 한창 문제가 되는 찌든 공기 공해는 무슨 수로 정화하여 숨을 쉬게 하겠는가. 그래서 작자는 절대자를 향하여 물어 본 것 같다. 이 작품에는 바람에 의지하여 예쁜 마음을 품고 꿈의 화단에서 꽃이 되어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시적 긴장미가 풀어지는 표현 방식이라서 이를 바꾸어 시조의 기본 진술법인 구별, 장별 호응과 대립, 종장의 전환 이미지 배치 등을 신경 써 신선하고 함축적인 작품이 되었으면 싶다. 단시조의 묘미(妙味)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표현에 있다고 하는데 쉽지는 않지만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현대시조의 숙제일 성싶다. 회자(膾炙)하는 시조를 많이 쓴 시백(詩伯) 정완영 선생은 ‘시조는 쉬운 말로 쉽게 쓰되, 지시어가 아닌 함축어로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도록 씀으로써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늙은 솔 가지 틀어 파란 하늘 괴고 있다. 애환의 풍운 세월 한 몸통에 감고 섰네. 고향 땅 두고 온 산하 그리움에 젖는고. -김영환, 수목원 노송, 전수- 이 작품에서 ‘애환의 풍운 세월’은 영욕의 세월로 어지러운 사회 환경적 변화에 따른 영광의 세월과 욕됨의 세월을 견디어 살아온 그 꿋꿋한 모습을 표현한 시조구이다. 위 시조에 나타난 노송(老松)은 본디 수목원에 태어나 자란 것이 아닌, 어느 산촌 깊은 산골짜기에서 수십 년 온갖 풍파(風波)의 부대낌을 견디며 자라났을 텐데, 엉뚱하게도 뿌리째 잡혀와 이 수목원에 둥지 틀고 살게 된 것 같다. 종장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향 땅 두고 온 산하’라 하지 않았는가. 이 시조의 제재 노송은 고향에 가족을 두고 헤어져 고향산천과 피붙이를 그리워하는 이산가족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한 마디로 수구초심(首丘初心)과 망향지정(望鄕之情)이 곁들여져 있다. 초장에서 기원의 자세로 시상을 열고, 중장에서 고난을 겪은 삶의 역정으로 시상을 이어 종장에서 한스런 그리움의 감정으로 맺음하고 있다. 지은이는 고집스럽고 철저하게 시조의 음수 율격을 고정 스타일로 가둬놓고 시조를 쓴다. 그러다 보니 이 시조 중장에서는 역동적, 구상적 시어를 자유자재로 못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같이 발표한 작품 「바람」이 약간 교술적이었다면 이 작품은 교술성보다는 서정성이 더 짙게 깃들여 있다. 하지만 인생의 해석이 스미어 있어 이 갈래에 넣어 감상하였다. 이 작품은 표현기법에서 조금 고풍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종장에 쓰인 “〜ㄴ고” 와 같은 시어사용이 그것이다. “〜ㄴ고”는 고어투(古語套)에 많이 나타나는 감탄이나 영탄이 섞인 의문형어미이다. 그러나 이 시조의 전개는 고시조와는 다르다. 고시조의 대부분이 초장의 생각을 중장이 부연 연결시키고, 종장에서 생각을 마무리 짓는 서술 형태인데, 이 작품은 초, 중 종장의 흐름을 연결형이 아닌 독립형(獨立形)으로 장(章) 배정을 하고, 이를 단정, 영탄, 의문의 닫힘 기법을 사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점이 새롭다. 기초도 모르는데 해답을 말하란다. 누군지 모르겠다. 더구나 삐딱하다. 그래도 친절해야 해 나중 아니 지인이라?! -김용현, 어떤 상담1 전수- 어떤 상담인지. 이 작품을 읽는 독자도 아리송하다. 답답한 상담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 상대가 삐딱하기조차 하다면 무슨 묘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도 친절하게 해야겠다고 작자는 다짐하고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지인(知人)이 되고 그 훗날을 위해 그리 하겠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친절해야 해’는 상담의 기본이니 그 기본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다짐이 아닐까. 시조의 음보는 철저히 정격으로 잘 지키고 있어 반갑다. 이 분은 고급관리를 지낸 분이니 아마 많은 상담이 들어와 이를 풀어 주리라 생각한다. 법조계에 있었으니 무슨 송사의 명쾌한 해답을 상담자는 듣고 싶어 재촉하는 모양인가. 대략 내용은 그러리라 짐작은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표현이 정서적이고 함축적이었으면 싶은데 일상어투를 그대로 시조화한 느낌이 든다. 또 이 시조에서 마지막 문장 부호 「?!」는 무슨 의미일까. 알쏭달쏭함과 허탈한 영탄이 범벅이 된 감정일까. 아마도 지인(知人)이 안 될까하는 희망 섞인 의문인 듯도 한데 그 열쇠는 본인만이 가지고 있을 듯. 그 외 ‘대추(김길순)’, ‘어곡교(유동삼)’, ‘능소화(조성인)’ ‘세월 앞에서(홍병선)’가 이 유형이며 ‘어머니69(신웅순)’, ‘징검다리(조경순)’도 이에 속하는 좋은 작품이다. 3) 모사적(模寫的) 회화(繪畵) 시조 모사적(模寫的) 회화(繪畵) 시조란 말은 어떠한 대상이나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떠서 언어나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언어에 의한 그림이 정신의 영상(影像)으로 떠오르는 시조의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선 주로 이미지가 강조 된다. 시와 회화의 자매성을 처음 언급한 이는 그리스 서정시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Simonides of Ceos 기원전 556년–468년 경]로 그는“그림은 말없는 시이며,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문학 장르는 서양의 풍경화나 정물화 혹은 동양의 산수화 등의 회화의 표현방식에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이 계열의 시조로는 조헌(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지당(池塘)에 비 리고 양류(楊柳)에 끼인 제/ 사공(沙工)은 어듸 가고 븬 배만 매였고./ 석양(夕陽)에 짝 일흔 갈매기 오락가락 노매.”하는 작품이 있다. 이 고시조 작품은 연못에 비가 내리고 버드나무에는 안개가 끼어 그윽한데, 사공은 빈 배만 매어놓고 어디론가 가고 없다. 아마 그도 고즈넉한 경치에 취해 그 곁 어디에서 몰아지경에 빠져 있는가 보다. 그런데 쓸쓸하고 외롭게도 석양 하늘에는 짝 잃은 갈매기만 왔다 갔다 한다. 평화로운 산촌의 저녁 풍경을 그대로 옮겨 그려 놓은 듯하다. 어찌 보면 적막감이 물씬 풍기는 한 폭의 수묵화이다. 그리고 근대시조로는 이병기의<가람文選>(1969) 에 나오는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 받아 사느니라.”하는 「난초(蘭草)4」가 있다. 밤새운 풀무질로 벌겋게 달아올라 새벽에 날을 세워 찔러보는 하늘가 동녘의 석류 알 터져 쏟아지는 시린 빛. -강임구, 여명, 전수- 이 시조를 읽으니 새삼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나오는 일출 광경이 오버랩 된다. ‘밤’을 대장간으로 환치하여 밝아오는 새날(=여명)을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일반적으로 대장간에서는 용광화로에 쇳조각이나 닳은 연장을 넣고 불을 지핀 다음 풀무질로 달구어 모루에 올려놓고, 이를 쇠메로 두드려 적당한 모양을 내 연장을 만들거나, 무디어진 연장의 날을 세우는데, 위 『여명』이란 작품은 해가 떠오르며 밝아오는 과정을 ‘풀무질’로, 달아오른 ‘연장의 날’로 ‘찔러보는’이라고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종장에서는 벌겋게 열리어 오는 ‘여명(黎明)’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떠오르는 태양을 ‘동녘의 석류 알’로 은유하고 있다. 이렇듯 이 작품은 역동적이고 감각적인 시어로 얽어 짜 놓았다. 그 신선(新鮮)한 표현 기법이 돋보인다. 더없이 깔끔한 단시조이다. 꽃등이 줄을 잡고/ 춤을 추며 손님맞이// 맑은 물 노래하며/ 꽃구름 담아놓고// 바람에/ 반야심경을/ 가슴마다 새긴다. 돌탑은/ 층층마다// 정성을/ 쌓아놓고// 국화꽃 卍자 새겨/ 곱게도 차려놓고// 향불에/ 깨우친 불심/ 두 손 모아 빕니다.// 다리 밑 맑은 물에/ 노닐던 비단잉어/ 단풍잎 고운 빛에/ 부끄러 숨었는지// 산사의/ 목탁소리에/ 흰 구름도 머문다. -김영수, 마곡사 가는 길, 전수- 산사(山寺)의 가을 정경을 맑고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조는 산사의 앞뜰에 일렬로 줄 맞춰 매달려 바람에 산들대는 연등(燃燈)의 모습으로 작품의 앞머리를 열고, 맑은 물, 꽃구름 흐르는 모습을 배경 삼아 자연의 순수자연 바람을 빌어 지혜의 빛으로 열반의 완성된 경지에 이르는 불심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 작품 첫수는 마곡사 사찰을 찾아들어갈 때의 모습과 심경을 표현 하고 있다면, 둘째 수는 사찰의 안뜰 탑의 모습과 그 탑에 합장(合掌) 배례(拜禮)하는 기원의 자세를 엿보게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수는 사찰 순례를 하며 연못에 노니는 비단잉어의 한가로운 모습과 가을 단풍의 붉음을 대비하여 잉어와 단풍이 하나의 풍경으로 합일(合一)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시조는 마무리로 ‘흰 구름’ ‘목탁소리’를 등장시켜 탈속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불교의 궁극적 세계인 ‘공(空)’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다. 시의 분위기와 이미지들이 밝고 맑은 천상지향적 묵시적 이미지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맑은 물’이 첫수와 끝수에 등장하여 시어의 변화와 신선감을 덜 느끼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맑은 물’ 하나는 다른 시어로 해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또한 시적 맺음을 첫수와 끝수는 단정적 평서형어미 ‘〜다’를 사용하였고, 둘째 수는 겸양어미‘〜ㅂ니다’를 사용하고 있다. 일관성을 위하여 겸양어미로 통일하였으면 어땠을까. 어쩠든 이 시조는 고요한 이미지의 시어들을 선경후정 패턴에 맞춰 배열함으로써 전통시조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삶도 시린 허공인데 산 하나가 더 얹힌 풀잎에도 떨리는 가슴 빛을 찾아 품었다가 눈 뜨면 파문의 상처 도로 후회할 것을 매운바람 추스르며 어둠 밑을 허적이다 미치지도 못한 발길 다시 빛은 찾아드네. 얼마나 몽환 깊어야 아픔 속에 동이 트나. -박봉주, 야간산행 둘째, 셋째 수- 깊은 밤 어둠 속을 헤매는 모습이 떠오른다. 여기서의 ‘산행’은 인생길이며, ‘빛’은 삶의 희망적 신호로 이해된다. 그 희망적 신호를 찾아 오늘도 야간산행을 하듯 보이지 않는 어둠의 인생길을 걸어 한 가닥 빛을 향하여 달려간다. 누가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했던가. 그런 시상이 여기 보인다. 헛된 꿈과 환상으로 보는 희망의 날은 어쩌면 한단지몽(邯鄲之夢)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쫓아 살아가고 있다. 시조의 생명은 종장에 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작품의 셋째 수 종장 첫 구의 전환 이미지는 이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연시조인데 둘째 수와 셋째 수 사이의 이미지의 연관성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심도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둘째 수 초장 ‘삶도 시린 허공인데 산 하나가 더 얹힌’은 텅 빈 삶에 고난이 얹힘으로써 삶의 어려움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있음을 표현하려 한 것 같다. 셋째 수는 이미지 흐름이 원활하다. 산속에서 꿈속을 헤매듯 하염없이 헤매는 모습이 선연하다. 그런데 둘째 수에서는 음보에 따른 음수율이 어느 정도 시조의 정격 흐름에 맞추어졌는지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종장의 둘째 구를 음보율로 나누어 보니 “도로/ 후회할 것을”이 되어 7음절로 이루어져 전체로는 하자가 없으나 4, 3이나 4, 4가 아닌 2, 5가 되고 있다. 옛날엔 이런 음보를 음보에 앞선 구 중심으로 본 가람 선생의 의견을 참작하여 허용되었는데, 요즘은 특별히 다른 시어로는 바꿀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기피하고 있다. 열세 마리 호랑이가 대로를 질주하오. 막다른 골목에도 뒤룽뒤룽 굴리는 눈 그 옆에 혀를 빼무는 호랑이 떼 더 있소. 무서운 호랑이와 무서워하는 호랑이와 무서워 할 호랑이와 무서웠던 호랑이가 서로가 으르렁거리며 이 거리를 활보하오. -백승수, 호환(虎患) 또는 교통사고, 1, 2수- 오랜만에 초현실주의 의식의 흐름이 주조(主潮)를 이루는 시조를 만난 것 같다. 이 작품은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를 그대로 빼닮은 작품이다. 오감도는 지금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오감도에 대하여 짐작으로 본 해설 평가는 ‘기본 질서가 무너진 세계를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백 시인의 작품도 그 정도에 기초를 두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13은 불길한 숫자이다. 그렇게 볼 때 이 시조는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를 하는 불안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본다. 여기서 ‘열세 마리’는 ‘불안한 현대인’을 표현한 말로 이해된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도 뒤룽뒤룽 굴리는 눈’은 절망의 상황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며, ‘호랑이’는 현대인의 공포 대상을 표현한 말이라 여겨진다. 현대사회에 엄습하는 비인간화된 인간들의 작태, 신종 질병과 갈수록 심해지는 대기오염, 살인무기, 빙하의 침식에 의한 이상기후와 자연 재해, 불감증에 걸린 불의의 교통사고 등 각종 불가해한 현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사는 현대인의 무능과 복잡 미묘한 심리 상태를 대응시켜 표현하고 있다. 현대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나 이에 반비례하여 인간의 윤리 의식과 삶의 환경은 파괴되고 피폐화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의식 분해에 나선 현대 이상(李箱)을 새로이 만난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시조로는 1968년 <시조문학>에 발표된 임영창(林永暢) 시인의 “어느 午後의 EGO”가 있었는데 거의 반세기만에 이와 유사한 시조를 백 시인이 다시 시도한 것 같다. 아무쪼록 이런 시도가 현대시조로서 성공을 거두고, 대중들이 모두 공감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생길지 지켜볼 일이다. 창공에 매달린 저 푸른 노송(老松)의 단심(丹心) 절벽인가 단풍인가 하늘을 기어오르네. 단원(檀園)도 붓을 잡다 놓친 아찔한 기암절벽 -이도현, 매달린 가을, 전수- 이 시조는 「사인암(舍人巖) 지상 관광」이란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사인암(舍人巖)’은 작자가 주(註)로 보여준 대로 단양 팔경 중 5경에 속하는 승경[勝景]이다. 70m 높이로 솟아 있는 기암절벽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데 여기엔 사인(舍人)벼슬을 한 우탁(禹倬)이 내려와 사색하던 장소라 하여 그 절벽의 이름을 사인암(舍人巖)이라 하고 우탁의 백발가도 새겨 놓았다 하니 풍경에 시정(詩情)이 얹혀 있는 곳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작품 초장은 벼랑에 기대어 뿌리를 내린 노송의 모습을 표현했는데, 벼랑이 까마득하기에 창공이라 하고, 그 끝에 매달린 노송이기에 지절(志節) 높은 이들이 품던 단심(丹心)을 느껴 “창공에 매달린/ 저 푸른/ 노송의 단심(丹心)”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계절은 가을, 아스라한 절벽도, 붉게 물든 단풍도 하늘을 기어오르는 듯 장관(壯觀)을 이루니 그 누군들 그 경치에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기에 종장에서 천하의 산수화 대가인 단원(檀園)조차 넋이 빠져 붓을 놓친 것 같다고 한 모양이다. ‘단원(檀園)도/ 붓을 잡다 놓친/ 아찔한/ 기암절벽’은 돌올(突兀)한 표현으로 시적 전환의 묘를 잘 살린 가구(佳句)이다. 이 작품은 행간(行間)이 많이 비어 있는 한 폭의 진경삼수화(眞景山水畵)이다. 표현하는 시심(詩心)이 호방(豪放)하다. 이 시적 허풍이 이백(李白)에 비견된다 하면 도(道)에 넘치는 과장(誇張)일까. ‘붉은 목도장(김광순)’, ‘봄이 오는 길목(김동민)’, ‘비자림에서(박헌오)’ 등도 이에 속하는 좋은 작품이다. 3. 마무리 지금 시조단에서는 정격 문제로 의견이 분분하고, 그 표현에 있어서도 묵수(墨守)냐, 개선(改善)이냐 말이 많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역행해서는 안 되니 시대성에 따라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시조를 써야 시조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자는“시조는 한옥(韓屋)에 비견(比肩)할 수 있다. 한옥(韓屋)엔 세월의 무게와 어머니의 품 같은 아늑한 위안(慰安)의 정서가 담겨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의 정서가 서린 주거 공간이 바로 한옥(韓屋)이다. 이는 오랜 세월을 두고 조상이 빛나는 슬기로 섬세한 손길을 놀려 고안(考案)해낸 건축양식이다. 이와 같이 시조도 멀게는 천년, 가깝게 잡아도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이 손수 갈고 닦아 만들어낸 고유 양식인 시의 틀에 민족의 호흡과 시대의 흐름을 담아온 우리의 노래이다. 마치 대목장(大木匠)이 끌로 나무에 사개를 파서 빈틈없이 들어 맞춰 기둥에 대들보, 서까래를 올린 다음 문틀과 문살의 무늬를 만들어 아름다운 한옥 한 채를 지어내듯이 시조는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 한옥(韓屋)은 한옥만이 가진 고유 양식이 있는데 그 양식에 어긋나면 한옥이 아니다. 적어도 한옥이 지닌 고유 얼개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시조도 마찬가지로 시조만의 고유 얼개가 있다. 이것이 시조의 틀이다. 이를 뭉개면 한옥이 아니듯 시조도 아니다. 일정한 틀 속에서 다양한 무늬를 놓고, 내부 구조와 가구를 배치하는 것은 집주인(시인)의 자유이다.”라고 한 적이 있다. 이는 전통을 지키며 새로운 시대 상황에 알맞은 시조를 쓰는 것이 오늘의 현대시조 주소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다. 『한밭시조』에 발표된 작품을 보면서 형식의 얼개와 내용의 신선성(新鮮性)을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고루(固陋)함 없이 격조(格調)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리라 생각한다. 시조에서의 요체(要諦)는 종장의 점층(漸層)된 이미지 전환이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흠결 없고 신선하며 감동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쓰고 싶어 한다. 우리 대전권 모든 시조시인들이 다 그런 소망을 이루어 보았으면 한다. [2015. 한밭시조 제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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