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 최고의 우선순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중심에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이사하고, 직장을 결정하고, 기타 모든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우리는 과연 신앙과 예배와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있습니까? 역대기 기자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본질이요, 특징이며 은혜를 받고 사는 비결이라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반드시 대가를 치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죄인은 없고 숨길 수 있는 죄악도 없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을 바르게 듣고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역대상 10장은 사무엘상 31장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을 염두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대상 9장 말미에 사울의 족보가 등장한 후 사울에 대한 분량은 한 장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8장을 살펴보면 블레셋과의 전투가 있기 전 사울이 했던 잘못된 행보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엔돌의 신접한 자를 찾아가 죽은 사무엘을 불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죽은 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주실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또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의 아들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비교적 짧고 간단하게 등장한 사울과 그의 집안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길 원하셨겠습니까?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사울의 시체가 빼앗기고 되찾아지다 10:7-12
(7) 골짜기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다 죽은 것을 보고 그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거기에 거주하니라
길보아 산에서 패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을 목도한 골짜기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읍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역대상 10장 7절과 사무엘상 31장에서 서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도망한 사람을 골짜기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만 이야기하는데, 사무엘상 31장은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더불어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 갔다고 전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역대기 기자가 확보했던 사무엘상의 사본이 훼손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의도적으로 요단 건너편 즉, 길르앗 야베스를 생략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에 따르면 길르앗 야베스는 사울을 장례하고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지지함으로 사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며 ‘사울 왕조’를 지속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역대기 기자는 길르앗 야베스에 대한 언급을 최소한으로 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왕이었던 다윗 왕조를 더욱 부각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8-10) 이틑날에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죽임을 당한 자의 옷을 벗기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길보아 산에 엎드러졌음을 보고 곧 사울의 옷을 벗기고 그의 머리와 갑옷을 가져다가 사람을 블레셋 땅 사방에 보내 모든 이방 신전과 그 백성에게 소식을 전하고 사울의 갑옷을 그들의 신전에 두고 그의 머리를 다곤의 신전에 단지라
전투가 끝난 다음 날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죽은 시체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이 사용했던 갑옷과 무기와 더불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블레셋 영토 곳곳에 자신들의 승전 소식을 전합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국가 간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부족 혹은 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전투에 임했다는 것이고, 승패는 곧 신의 승패로 직결되었습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시체와 갑옷을 가져다가 자신들이 섬기던 다곤 신전에 달아 놓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시체와 갑옷이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에 넘겨졌습니다. 마치 끝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넘겨진 것처럼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의 삶을 재건하려 했던 유다 백성들에게 사울이 당한 수치는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은 여기서 맺어지지가 않고 다음 장면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11-12)길르앗야베스 모든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듣고 용사들이 다 일어나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야베스로 가져다가 그 곳 상수리 나무 아래에 그 해골을 장사하고 칠 일간 금식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시체를 훼손하며 그의 목과 갑옷을 다곤 신전에 달아 놓았다는 소식을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길르앗 야베스 모든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용사들이 일어나게 되고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어 야베스로 가져옵니다. 이후 장례를 치루고 일주일간 금식하게 됩니다.
이 부분의 평행 본문인 사무엘상 31장을 살펴보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울의 시체를 수습한 사람들에 대해 밤새도록 말을 타고 달려온 길르앗 야베스 모든 장사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사울 왕조를 지지했던 길르앗 야베스를 부각하여 다윗과 경쟁했던 것을 심화하여 보여줍니다. 하지만 역대기 기자는 같은 내용을 다소 소극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사울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연민조차 보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은 이제 곧 마주할 다윗 왕조만이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이 깃든 왕조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사울이 죽은 이유와 하나님의 계획 10:13-14
(13-14)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
사울과 그의 가문이 멸망당한 이유를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줍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께 범죄 하였고 야훼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는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사울과 그의 가문이 멸망당한 이유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 불성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오히려 여호와께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범죄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불성실했음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렸고,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짐승의 일부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신탁을 얻으려고 한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13절과 14절에 두 번째 이유를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신접한 여인에게 가르치기를 청하다는 것과 여호와께 묻지 아니했다는 동사가 ‘다라쉬’로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다라쉬’는 ‘추구하다, 관심을 갖다, 말씀을 구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나라를 다스려야 했던 사울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지도 않고, 말씀을 구하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울과 그의 왕조가 멸망한 이유입니다.
사울은 왕으로 즉위한 이후 성과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번영을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불성실했고 말씀을 지키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성과와 번영보다 하나님께 성실함으로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 공동체의 삶을 재건해야 했던 유대 민족에게 역대기 기자는 그들의 조상 다윗을 부각시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 맺었는지,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유대 민족은 기억해야 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고, 그분의 뜻에 관심을 가졌고, 그분의 말씀을 구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었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고,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갈망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의 뜻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누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까? 뒤돌아서면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신실하고도 영원한 승리에 우리도 성실한 반응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한 방법과 다를지라도, 말씀대로 오셔서 말씀대로 승리하신 주님께 창문을 열어 함께 동행함으로 영원한 승리에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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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절에 보면 사울이 죽은 원인은, 사울이 범죄 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범죄하였음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알은 사울이 범한 죄의 종류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죄 하나하나가 갖는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울이 범한 죄는 그 경중을 막론하고 그 하나 하나가 하나님께 매우 심각한 죄임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매우 큰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아주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죄 하나하나 까지의 모든 죄가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롬 6 : 23)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는 살인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모든 죄가 다 포함됩니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가벼운 죄라도 그 결국은 사망인 것입니다. 모든 죄는 우리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죄는 죽음 후에 심판과 멸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그만큼 모든 죄는 치명적이며 심각한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사울이 죽은 이유에 대하여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임의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삼상13:8,9)과 아말렉과의 전쟁 당시 아말렉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은 다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질적인 탐욕으로 아말렉 왕 아각과 좋은 가축을 남긴 것(삼상15:1-9)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사울이 불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는 대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물은 것(삼상28:12-19)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결국 그가 신정왕국의 왕으로서 합당하게 행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아 그 왕권을 다윗에게 넘겨주고 비참하게 최후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사울은 초대 왕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실하며 책임감이 넘쳤으며, 하나님께 왕으로 택함받을 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왕으로 택함 받았을 때 그 영광을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백성들의 짐 보따리 뒤에 숨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삼상10:17-24)인내의 사람이었고, 용기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된 후, 그의 마음은 점차적으로 완고하고 교만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점차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보다는 사람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는 것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께 묻기보다는 신접한 여인에게 묻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가졌던 처음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우리가 과거에 주님을 처음 만났던 때의 그 감격과 그 기쁨을 오늘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하나님께 묻는 시간을 갖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로 가서 물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은 기도하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아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군다나 사울은 자기의 문제를 물어야할 대상까지도 잘못 선택했던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울은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였던 하나님께 묻지 않고 개인의 욕심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항상 인생의 어리석음을 들어낼 뿐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우리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기술, 물질 등에 의지하여 우리 마음대로, 그 권세를 누리려고 욕심에 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무지로 인하여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 쓰라린 실패를 맛보곤 합니다.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참된 지혜는 하나님께 묻고 그가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지헤의 왕으로 일컷는 솔로몬은 왕이되어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왕상3:9).
이 듣는 마음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복을 주셔서 전무후무한 지혜와 더불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듣는 마음이란 말씀에 귀를 귀울여 순종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하나님의 참 생명을 ‘취하기' 위해 먹고 마시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쓰임받는 그리스도인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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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서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만 임박한 죽음에 처하지 않는 이상 죽음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지라도 죽음을 동경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이지 영혼의 죽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으로 태어났지만 또한 영으로 난 자들입니다(요3:6). 영으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인간의 죽음을 육체적 죽음으로만 생각할 것이기에 죽기를 싫어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마10:28). 장차 육체적 부활이 있을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궁극적으로는 영혼의 구원입니다(히10:39, 벧전1:9).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 달려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께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하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체를 성부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육체의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육체와 영혼을 지닌 부활체로 승천하셨습니다만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는 ‘육체가 악하거나 무가치하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육체적 죽음보다도 영혼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육체적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단순히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겉으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통한 내재적 죄에 대한 인지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육체적 죽음만은 아닙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장차 부활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 15절 말씀처럼 악인이나 의인의 구분 없이 모두 부활합니다. 중요한 점은 부활 후에 어떻게 되느냐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담의 원죄로 인한 죄에 대한 결과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합니다.
비록 인간의 육체적 죽음이 아담의 원죄로부터 왔기에 그 죽음은 죄에 대한 결과이지만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은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에는 아담의 원죄 이외에도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 살아가다가 ‘어떻게 죽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사 선지자처럼 병이 들어 죽더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어 부르심을 받아 이 땅을 떠나게 되는 ‘소천’이 되어야지 단순한 ‘별세’나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땅을 떠나 죽음을 당한 한 인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기서는 포로시기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믿음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함이 기록 목적 중 하나임을 배운 바 있습니다. 역대상 10장은 역대상의 주요 인물인 다윗 왕을 소개하기 위한 전단계에 간략히 사울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0장의 내용의 핵심은 사울 왕의 사역을 소개하지 않고 오직 그의 죽음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울 왕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쁨의 부르심을 받은 소천이 아니라 죄에 대한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아담의 원죄로 인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사울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께 범한 죄의 결과였습니다. 13절 상반절입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사울이 범한 중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사울의 죄목은 제사를 가볍게 여긴 것(삼상13:8-9)과 아말렉 전투에서 순종하지 않은 것(삼상15:11)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은 추가적인 죄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3절 하반절부터 14절 상반절까지입니다.
“...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
사무엘상에서 언급된 죄에다 추가적인 죄목이 오늘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은 신접한 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운명을 점을 쳤던 것입니다(삼상28:8).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말렉 전투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사울에게 사무엘을 통해서 하셨던 말씀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하)라고 말씀하신 이후, 이어서 “이는 거역한 것은 점을 치는 것과 같고”(삼상15:23상)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가서 자신의 운명을 점치려고 했던 행동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범죄가 있었기에 역대기서 기자는 오늘 본문 14절에 “...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게 합니다. 인간의 죽음은 1차적으로는 아담의 원죄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거역과 불순종으로 인해 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이 사람에게 정해져 있지만 최소한 하나님의 노여움을 유발시키는 자신의 범죄로 인한 죽음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육체의 죽음보다 영혼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마10:28).
단순한 육체적 죽음은 부활이 있기에 죽음에도 소망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이는 영원한 사망(죽음)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소망이 사라지는 자들이 없으시기를 원합니다.
한편으로 우리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감사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내가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예수님의 피가 범죄한 인간을 육체적 죽음과 영혼의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이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겠지만 어떻게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좋을지를 깊이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나의 영혼을 죽이실 수 있는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장차 나의 육체적 죽음이 단순한 별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소천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