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백성을 인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
1.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조사가 출애굽 2년 1월 1일에 실시되었고, 2주 후 출애굽 2년 1월 14일에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족 중에 누가 죽었지 않았을까 합니다. 시체로 인하여 부정함을 얻은 자들이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이들은 모세에게 물었고, 모세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2.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음 달 14일에 이들이 정결함을 얻은 후에 유월절을 별도로 지키도록 하셨습니다(10~12; 레 7:20). 2차 유월절을 다시 열어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배려하여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의 은혜에서 제외되었다가 다시 은혜로 절기를 지키게 되었을 때, 이들은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했을까요? 이것이 또한 구원이며 은혜입니다.
3. 이만큼 유월절은 구원과 관계된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얻은 백성은 반드시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부정한 자들에게도 별도의 기회를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고의로 지키지 않는 자는 끊어질 것입니다(13).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4. 이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의 방법을 보여줍니다(15~23). 성막을 세운 날부터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이것이 밤에는 불 모양 같이 나타나서 덮었고, 낮에는 구름이 되어 백성들을 앞서 인도하였습니다. 구름이 머물면 백성도 머물렀고, 구름이 떠오르면 백성도 행진하였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는 것은 규칙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머무르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떠오르기도 하였고, 그 기간은 이틀, 한 달, 혹 일 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백성의 시간 계획이나 지도자인 모세의 시간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이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명을 순종하는’ 행위였고 순종을 훈련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5. 유월절을 통하여 과거에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통하여 현재에 날마다 구원하시며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없이 인도하시고 동행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침반 하나없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 길을 가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 땅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6. 십자가를 지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신약의 성도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구름기둥처럼, 불기둥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갈 바를 알게 하십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우리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를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도 변함없이 알려주고 이끌고 계십니다. 이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바라보십시오. 여전히 오늘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불 말과 불 병거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비록 미지의 나라일지라도, 그 나라로의 행진을 오늘도 주님 안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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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일 년 쯤 머물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을 지키도록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이미 이전에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여 그것을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에 이미 유월절을 제정해 주셨고, 또한 대대로 그것을 지킬 것을 명하셨다(출12:1-14).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비록 광야에 머무르고 있었을지라도 유월절을 지켜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환경을 초월하여 언제나 순종해야 한다. 유월절은 정월 십사일 저녁부터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다. 물론 여기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다”는 것은 출애굽기 12장에서 명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당시는 애굽에 있었고 지금은 광야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어떻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좇아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어떻게 지켰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의미다. 다만 그들이 “모세에게 명한 모든 것을 다 좇아 행하였다”라고 말했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리”라는 면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그 원리를 지키는 방식에 대해서는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서 애굽이라는 환경과 광야라는 환경이 서로 다르고 또한 시점(時點)도 다르기 때문에 “재연”이라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시체를 만짐으로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월절 당일에 모세와 아론에게 와서 자신들을 금하여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게 한 이유에 대하여 듣기 원했다. 그들의 질문 내용으로 볼 때, 그들이 시체를 만진 것은 공적 일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추측케 한다. 즉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자신들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시체를 만진 것은 공적 일이므로 사적인 일로 인한 것과는 다르게 생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그들이 만진 시체는 다른 불로 제사 드림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나답과 아비후를 장사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F.R. Fay, 랑게 주석 민수기)
모세는 그들의 물음이 타당성이 있음을 알고 잠시 기다리게 한 후, 하나님께 나가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해 주기를 청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의 물음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해 주셨다.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9:9-12)”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은 그들 외에도 이후에도 불가피한 문제로 인하여 정해진 유월절 절기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 달을 연기해 주셨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었지만(출12:26,27,43-45), 그러나 그것을 잘못 지키거나, 정당한 사유 없이 지키지 않을 때는 오히려 저주가 되어 백성들 가운데 끊어졌다(출12:15, 민9:13).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이처럼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한 사유로 인하여 정한 날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한 달을 연기해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예외적인 규정으로 인하여 본래의 유월절을 가벼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정당한 사유 없이 정해 진 날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의 말씀을 주셨다(9:13).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킬 때 규례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정월 십사일 해질 무렵 유월절을 지켜야 했는데 그 저녁에 그들은 어린 양과 무교병 그리고 쓴 나물을 먹어야 했다. 여기 어린 양은 대속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장자를 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살려 주신 것은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에 먹어야 하는 무교병은 애굽을 떠날 때 급히 떠나서 아직 부풀지 않은 반죽을 가지고 갔던 일을 회상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킬 때마다 무교병을 먹음으로 그들이 거할 곳은 애굽(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想起)하는 것이다. 이런 상기를 통하여 그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속화됨으로부터 다시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어야 했다. 여기 쓴 나물이란 애굽에서 그들이 받았던 고통을 상징한다. 이들이 유월절에 쓴 나물을 먹으며 노예로서 살았던 고통스런 삶을 회상한다면 지금 은혜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아 세속화됨으로부터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또한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즉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의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그릇 지키거나 또는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고 엄중히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서 이와 같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신앙의 고백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않는다면 세속화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율법으로 정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신앙의 고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셨다(출13:21,22). 이와 같은 인도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성막이 완성 되었을 때 성막 위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성막 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시는 징조에 따라 인도함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볼 때 처음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을 때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특정한 장소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다만 “그들 앞에”라는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불특정 장소에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 성막이 지어진 후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성막 위라는 특정한 장소에 나타났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결코 우연으로 돌릴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계시의 발전을 본다. 처음에는 불특정 또는 막연한 어떤 것으로 시작 할지라도 그것은 점진적으로 보다 더 확실한 것으로 발전 한다. 그래서 결국은 그 계시를 받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즉 이스라엘은 출애굽 했을 때 그들 앞에 나타난 징조보다는 그것이 성막 위에 나타났을 때 그것을 보다 더 하나님께로부터 온 징조로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할 때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그런데 이런 인도하심은 그들이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다. 여기 “항상 그러하여(9:16)”라는 말이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언제나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 앞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피어오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일상(日常) 가운데 피어오른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아야 할 것을 말해 준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일상으로 돌리기 때문에 일상 가운데 피어오른 인도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 가운데 이와 같은 인도하심의 징조들을 보기 위해서는 인도하심에 대한 관심과 지혜 그리고 분별력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영적 관심을 가질 때 누구나 분별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인도하심을 받고자 할 때마다 성막 위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영적 관심을 가지고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징조가 무엇인지 주의할 때 그것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랐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9:22,23)” 이스라엘이 언제나 이처럼 행하였더라면 약속의 땅을 향하는 여정은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렇게 하지 않은 듯하다. 약속의 땅을 향하는 여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많은 원망과 불평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추측하게 한다. 즉 그들에게 처음에는 특별했던 인도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도 후에는 그들 가운데 또 하나의 일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일상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특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일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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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온 후에 처음으로 지킨 유월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으로 지킨 유월절
(1-5)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월절을 그 정한 기일에 지키게 하라 그 정한 기일 곧 이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너희는 그것을 지키되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킬지니라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그들이 첫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다 따라 행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한지 일 년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으로 유월절을 그 정한 기일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은 광야의 길을 가고 있었으므로 유월절을 지키기에 매우 열악한 환경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그 정해진 날에 지키도록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합니다. 정한 때 뿐만 아니라, 3절에서는 ‘해질 때’ 라는 특정한 시점을 제시합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하면 ‘그 저녁들 사이에’라고 번역함이 더욱 원문에 가깝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해가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질 때를 첫 저녁으로 보았고 완전히 어두워지는 때를 둘째 저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저녁 사이의 시간을 가리키는 3절의 ‘해질 때’는 ‘해진 뒤 어두움이 몰려오는 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4절과 5절은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고,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지켰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미디어를 통해서 살며, 소셜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신을 홍보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사실 그대로를 전하지 않고 마음대로 편집해서 우리의 일상을 공유하거나 숨기는 것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했던 일을 감추거나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숨기거나 드러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편집할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행하기보다, 편집하여 행동하거나 선택적으로 행동하는 부분들은 없는지 돌이켜 보길 소원합니다.
유월절의 규례
(6-8) 그 때에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어서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날에 모세와 아론 앞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었거니와 우리를 금지하여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못하게 하심은 어찌함이니이까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매우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성결함을 항상 유지해야 하는 대제사장의 경우는 심지어 자기 부모가 죽었을 때라도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고 레위기 21장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시체를 접촉하게 되면 그 접촉한 자도 당연히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무덤과 접촉하는 것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6절부터 8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날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부정하게 된 자들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결정을 모세는 하나님께 여쭤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여겨볼 만한 점은 7절에서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이유를 묻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에게는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억지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자신들의 종교 활동을 억압하느냐고 강력한 탄원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본문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들을 다뤘다기보다는 자신들도 하나님께 유월절 예물을 드릴 수 있게 해달라는 탄원에 가깝습니다. 7절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과 공동체에 가까이 가려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예배는 어떤지 돌아보게 합니다.
8절은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고 싶은 자들의 염원에 대한 모세의 답변입니다. 모세는 예물을 드리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기다리라고 요구합니다. ‘기다리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서 있으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것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편한 자세로 앉거나 기대어 서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경건한 자세로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기다릴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또한 그 뜻과 판단이 어떠한 것이든 순종할 각오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단순히 기다리라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어의 어법을 통해서 간곡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바르게 전달하고 그 뜻을 받아오겠다는 의지가 8절 후반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중보자 역할을 했던 모세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이 땅의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는 단순히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서서 기다리라고만 명령하며 지시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의 뜻을 파악해 주님과 사람들을 연결해 주려 하는 사람인지 돌이켜 보길 소원합니다.
(9-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9절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주제를 말씀하실 때마다 등장하는 상용구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이든지 어떠한 경우라도 그 상황으로 인해 유월절 예식에 불참하는 일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사람들의 상황만을 전달하였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먼 여행 중일 수 있는 상황까지도 대답해 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발생하게 될 문제까지도 고려하시고 그 답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눈여겨볼 점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전달하라 하신 명령의 대상입니다. 10절에는 단순히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달하라 번역되었지만, 사람이라는 히브리어가 두 번 나옵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연속된 두 번의 등장은 강조에 해당합니다. 이런 의미를 살려서 번역해 보면 ‘ 각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과 조건 환경 때문에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고, 어떤 상황에서 주님을 찾아야 하는지 묻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그 상황과 조건 환경과 상관없이 한 사람, 한사람 모두를 찾고 귀하게 여기신다고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해 드렸던 것처럼, 인간의 질문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까지도 헤아려 말씀해 주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의 답변을 생각해 볼 때, 철저한 계산 속에서 주고받는 것에 길들여진 인간이 아깜없이 주시며, 낭비처럼 쏟아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을지 우리의 삶을 돌아보길 소원합니다. 혹시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살아가는 삶의 부분은 없는지 돌이켜 보길 소원합니다.
11절과 12절의 설명은 유월절 예식 때 먹는 기본 음식은 어린 양이었고 무교병과 쓴 나물은 그와 더불어 먹는 것이라 말하며, 조금도 남겨 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처럼 남겨두지 말고 유월절 음식을 당일에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성물이기 때문에 남겨져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명령은 어린양의 몸 안에 있는 모든 뼈 가운데 단 하나도 꺾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는 결국 이 어린양이 신약에서 세상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셨으나 뼈 하나도 꺾이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13-14) 그러나 사람이 정결하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의 죄를 담당할지며 만일 타국인이 너희 중에 거류하여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유월절 율례대로 그 규례를 따라서 행할지니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는 동일할 것이니라
13절과 14절은 아무런 이유 없이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는 일을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유월절 제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으며, 유월절 예식의 준수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됨을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동참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에 풍성하시며 우리의 허물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죄를 덮어 용서하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임에는 분명하시지만 동시에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지 않고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이 그 벌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은총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과 은총을 거부한 댓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은 분리가 될 수 없는 분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13절의 엄중한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반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는 그 은총을 공급하실 것을 14절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혈연적인 폐쇄적 공동체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열려 있는 개방적인 신앙 공동체임을 증거해 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설명해 주는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분명히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으며 차별 없이 누구든지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은총은 아무에게나 비인격적으로 어떤 기준 없이 낭비되지 않음도 함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스스로 돌이켜 보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 없이 베풀어지기에 그 은혜받기를 나중으로 미뤄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늘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인간관계 그리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목적하신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지만, 때때로 무언가를 선택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거나 가야 할지 멈추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든 순간이 올 때 답답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정답을 들려주시거나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셔서 인도해주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가시는 방식이 너무나 확실하여 참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실한 인도하심인 만큼 확실한 순종으로 반응해야 하기에 이 또한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자아내게 됩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15-16)
(15-16)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성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성막을 세운 날은 출애굽 한 지 제2년째 되는 해 1월 1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공된 성막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로 회막을 구름으로 덮어주셨고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중심에 거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구름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난’은 오늘의 본문을 포함하여 구약성경에서 80여 회 등장하며, 그중 대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대목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즉 회막을 덮은 구름은 하나님의 현현과 임재를 상징합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낮 동안에는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렀고, 저녁이 되면 불 모양이 성막 위에 나타났다고 증거합니다. 저녁에 나타난 불 또한 단순한 불이 아닌 호렙 산 떨기나무에 붙었던 불과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하는 초자연적인 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낮과 밤마다 구름과 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운 밤에도 불을 밝히신 것을 보며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칠흑 같이 어두운 광야의 한복판에서 성막 위에 임재한 불은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비춰주었을 것이며,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곁에 계심을 목도하며 안심했을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항상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이는 성막이 처음 세워지던 때에만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계속적으로 나타난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여정 중에 원망과 불평으로 죄 가운데 거할 때도 있었으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은 변함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광야와 같으며 어려운 일들이 즐비해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죄 가운데 거할 때도 있지만, 다시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회복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며 간혹 넘어질 때도 있지만, 우리가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주께서 여전히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음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삶에도 함께 계시며 구름과 같은 존재보다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친히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 주어지는 말씀을 통해 삶의 방향성을 바로 잡게 되고,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을 걷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비춰지는 순간, 어두움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에 순종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조금씩 성숙해가는 우리의 신앙을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작지만 아주 중요한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구름이 떠오를 때와 머물 때 (17-18)
(17-18)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진영에 머물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진을 쳐야 했으며, 때가 되면 성막을 거두어 가나안 땅으로 행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진을 쳐야 할 때와, 행진해야 할 때를 정확히 알려주셨는데, 알려주시는 방법은 성막 위에 임재한 구름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있던 구름이 위로 떠오르면 행진을 시작했고, 떠올랐던 구름이 성막이 쳐져야 할 곳에 내려앉게 되면 행진하던 것을 멈추고 그곳에 다시금 진을 쳤습니다.
그들이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행진과 멈춤을 반복했던 이유는 그것이 곧 여호와의 명령이었기 때문이며, 순종의 비결은 여호와를 신뢰함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에 행진과 멈춤의 기준이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가 아닌 여호와의 명령에 있었고, 그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의도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순종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눈을 들어 구름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순종하고자 하는 열의가 뜨거웠을지라도 구름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온전한 순종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 이전에,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와 여러 기도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불일 듯 올라올지라도 매일의 삶 가운데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순종만 결단할 뿐 순종의 열매는 맺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구름을 바라본 것이 아닌, 모든 일상 속에서 구름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잠에 들고 일어나는 순간에도, 밥을 차리고 식사하는 중에도, 이웃과 교제하고 있을 때에도 그들의 시선은 구름에서 멀어지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때는 특정한 어느 때가 아닌, 모든 일상입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으며,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해 머무는 날이 오랠 때와 적을 때 (19-20)
(19-20)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진하지 아니하였으며 혹시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영에 머물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으며
우리는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행진과 멈춤을 결정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너무나 명확한 말씀이기에 “순종하기가 참 편했겠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마냥 쉽지만은 않아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을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래되었으면 그들도 그 기간만큼 멈추었다고 하며, 혹은 머물고 있던 구름이 금세 떠오르면 그들은 미련 없이 성막을 거두고 짐을 챙겨 행진했다고 합니다. 즉, 구름이 머무는 곳이 그들이 기대한 땅과는 다른 모습과 다른 형편의 땅일지라도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그 땅에 머물러야 했고,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이 비교적 쾌적한 곳일지라도 구름이 떠오르면 그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는 결코 쉬운 순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도 눈 앞에 펼쳐진 땅을 보며 분별하는 지혜가 있었을 것이고 밟고 있는 땅이 진을 치기 좋은 땅인지, 아니면 빨리 떠나야 할 땅인지 금방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과 멈춤을 결정하는 기준은, 땅의 좋고 나쁨이 아닌 오직 구름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있었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나의 기준을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맞추는 것입니다. 내 삶을 내 기준과 계획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름을 통해 순종을 가르치신 하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순종을 가르치십니다. 구름이 눈 앞에 명확히 보였듯, 하나님의 말씀도 선명하고 명확합니다. 무엇을 계속해야하는지, 무엇을 멈추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성경은 날마다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야망이 하나님의 말씀을 흐릿하게 만들뿐이지, 성경은 분명 하나님께서 어떠한 삶을 기뻐하시는지 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21-23)
(21-23) 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행진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행진하였으며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과 멈춤은 주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며, 낮에는 행진하고 밤에는 휴식을 취하는 예상 가능한 형태도 아니었습니다. 구름이 하루 만에 떠오르든지, 한 달 만에 떠오르든지 혹은 낮에 떠오르든지 밤에 떠오르든지 관계없이 그들은 오로지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행진과 멈춤을 반복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순종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불이 어두운 밤길을 비추어주었다고 해도 낮보다는 진행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게다가 잠을 잘 시간에 온 식구와 짐승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고된 행진 후에 진을 치게 되면, 자연스레 충분한 휴식을 원했을텐데 구름이 떠오르는 즉시 휴식을 포기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직임을 지켰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과거, 그들은 모세가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아 인내를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구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고 있으며 오랜 기간을 한 곳에 머물 정도로 하나님의 군대로 다듬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 두 장만 넘기면 또다시 불평과 원망으로 범죄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오합지졸과 같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점점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인도하고 계시며 순종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가르치실 때 매우 인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름 하나로 행진을 명령하시는 것이 일방적으로 보일수도 있으나, 구름의 움직임을 보고 그 명령에 순종할지 불순종할지 선택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몫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압적으로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닌, 구름을 통해 순종의 길을 제시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그 복된 순종의 길을 선택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경험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의 삶 속에서 구름과 같이 포근한 말씀으로 순종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을 향하여 눈을 들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목적 삼고, 주신 말씀에 따라 행진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새 약속의 땅에 입성했듯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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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 땅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민수기는 크게 3단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출애굽하고 시내산에 이르기까지 1년의 시간, 둘째 시내산에서 가데스바네아로 이동하여 불순종함으로 가데스바네아 근처에서 40년을 지낸 과정, 셋째 가데스바네아를 떠나 가나안 땅의 목전인 모압평지에서 있었던 사건의 기록입니다.
지금 우리는 민수기의 첫 번째 단계인 1장부터 10장까지 시내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군대 구성을 위한 인구조사, 지파별 진영 배치와 행진 순서, 성막을 섬기는 레위인에 대한 기록, 이스라엘 진영의 정결법, 성막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았으며, 오늘 읽은 민수기 9장은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 기록으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두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민수기 10장에서 행진할 때 나팔신호에 따른 행동요령을 살펴하고, 드디어 1년간 머물렀던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는 내용을 보실 것입니다. 1절입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두 번째 유월절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유월절은 출애굽 했던 그 해 그 달에 지켰습니다. 두 번째 유월절을 맞았다는 것은 출애굽한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은 유대 종교력으로 1월 14일인데, 유대 종교력과 지금 현대인들이 지키는 태양력은 다릅니다. 유대 종교력으로 1월은 태양력으로 3~4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출애굽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지켰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6절입니다.
“그 때에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어서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 날에 모세와 아론 앞에 이르러”
사람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못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찾아와 왜 자신들은 유월절을 지키면 안되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그 즉시 대답하지 않고 기다리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듣고 대답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태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는 어느 것 하나 자기 뜻대로 결정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자기 임의대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얻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줍니다.
모세의 기다림에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9~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사람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한 사람들, 여행 중에 있어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2월 14일 저녁에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켰으나, 사정이 있어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은 한 달이 지난 2월 14일 저녁에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달은 부정한 자들이 정결케 되는 기간이며, 여행 중에 있는 자들이 진영으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기간이었습니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유월절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되새겨야 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날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존재가 새로운 생명을 얻은 날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고 지키라는 것은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모든 것은 잊어버려도 구원받은 이 사실 만큼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잊고 산다면 영적인 의미의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5~23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23절입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
이 마지막 구절에 <여호와의 명령>이라는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강조하기 위하여 3번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했던 초기에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진을 치고, 머물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처럼’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무엇이든지 ‘처음처럼’ 행하면 절대로 잘못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처음처럼’ 행동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결심을 ‘작심삼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심한 것을 삼일 동안 지키기도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는 참으로 나약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했던 처음 행동처럼, 오늘 우리들 또한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살아가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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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째 맞이하는 유월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은 출애굽 전날 밤이었으니, 오늘 본문의 두 번째 유월절은 광야에서 성막 완성 및 봉헌 이후 시내산을 떠날 때 지킨 유월절을 의미합니다.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월절을 그 정한 기일에 지키게 하라”(1-2)
첫째 달 열넷째 날, 즉 양력으로 3월 14일 유월절이 다가오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월절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어떤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유월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실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했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고하게 정립했습니다. 따라서 이제 시내산을 떠나 이스라엘에게는 미지의 세계인 언약의 땅을 향해 출발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고하게 성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유월절을 통해 그들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과 함께 유월절의 감격, 주님을 향한 감사와 순종을 결단하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언제나 한결같이 신실하게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 유월절을 은혜롭게 지내는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의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된 사람들은 당연히 유월절을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이들은 모세에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들의 질문에 대해 모세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8)
모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이들의 질문을 물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들었습니다. 사울왕의 경우,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던 해에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게 되는데, 사무엘이 정한 기간 내에 오지 않자 자신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물론 대군인 블레셋과 대면한 이스라엘군이 겁에 질려 하루가 다르게 이탈자가 생긴 당시의 긴박한 상황도 이해가 되지만, 사울은 이제 하나님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이처럼 한번 하나님으로 멀어진 사울은 권력에 눈이 먼 악인의 모습으로 변하여, 다윗을 그토록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정점에 선 모세 역시 자신을 내 세울 수도 있었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겸손하게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시체를 만지게 되어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달을 연기해서 지키라고 답변해주심으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유월절을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참조: 역대하 30:1-3). 이뿐만이 아니라 유월절을 지키는 대상도 이스라엘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타국인이라 할지라도 함께 거주하면서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우리가 주일에 살펴보고 있는 사도행전의 이방인 전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초기 일부 지도자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의 장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5)
성막이 완성되자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저녁에는 불 모양의 구름이 성막을 덮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줌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자 늘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행동은 어떻다고 본문은 표현하고 있나요?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이동하거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자리에 머물었는데,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을 때는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는 이동했습니다. 단기간일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장기간일 때도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언약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은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상황에 닥칠 지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훈련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노아가 홍수가 그치고 방주가 땅에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고 나가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그는 동물의 오물냄새가 진동하는 방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출애굽이후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광야의 여정과도 흡사합니다. 유월절을 통해 출애굽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성막을 짓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은 구름이 성막을 덮으면 머무르고 구름이 올라가면 행진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는 용사로 변모해갑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유월절을 경험한 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로 모든 죄악을 passover한 이후 우리의 여정은 하나님 중심이었는지 아니면 내 중심이었는지 항상 생각해봐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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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 땅에서 나온 다음 해 첫째 달에’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 광야에 있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첫번째 유월절을 지켰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킬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시체에 접촉해서 부정함을 얻은 자들이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둘째 달 14일에 정결함을 얻은 후 유월절을 별도로 지키게 하셨다(10~12; 레 7:20). 유월절은 구원과 관계된 중요한 절기였다. 구원을 얻은 백성은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려야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부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도 별도의 기회를 주셨다. 유월절의 절기에 정결하고 여행 중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않는 자는 끊어질 것이다(13).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멸시하는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2. 본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 패턴을 보여준다(15~23). 성막을 세운 날부터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를 상징하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이것이 밤에는 불 모양 같이 나타났고 낮에는 구름으로 백성들을 앞서 인도하였다. 구름이 머물면 백성도 머물렀고, 구름이 떠오르면 백성도 행진하였다. 구름이 떠오르는 것은 규칙적이 아니었다. 저녁부터 아침까지 머무르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밤낮없이 떠오르기도 하였고, 그 기간은 이틀, 한 달, 혹 일 년이 되기도 하였다. 백성들이나 모세의 시간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이 이끌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명령을 따르는’ 행위였다. 이 말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18절 2회, 19절, 20절 2번, 23절 3번 도합 8회).
3. 본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될 수 없다. 신약교회로 하여금 구원을 기억하게 하신 것이 성만찬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성만찬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풍토가 만연하다. 교회는 성만찬에 분명한 피치 못할 사정이 없이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을 징계했던 때도 있었다. 십자가의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 것을 본문은 말씀한다. 또한 본문은 광야 교회의 행진 패턴을 통해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어떻게 신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교훈한다. 그것은 말씀이 인도하는 삶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하는 삶이다. 자신의 시간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계획에 따라 언제라도 일어설 수 있고, 언제까지라도 조급함을 품지 않고 머무를 수 있는 삶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