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1. 칠일동안의 제사장 위임식에 이어 팔일 째, 첫 번째 제사 때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아론의 두 아들의 죽음으로 얼룩지게 됩니다. 이렇듯이 영광과 비극은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도 흔히 함께 나타납니다. 아론이 대제사장으로 사역을 시작한 바로 그날에,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법을 범함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그 날에, 넘어질까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교만한 인간인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이들이 넘어진 이유는,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문제, 아주 작은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소해 보인다는 것은 인간의 평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인간의 평가와 다릅니다. 내 기준에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3.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번제단의 불을 취해서 향로에 불을 붙여야 했습니다(레 16:12).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잘못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심판하셨습니다.
4. 하나님의 징계의 신속함과 엄중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지시를 가벼이 여기는 모든 이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우리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과 절차를 성경 속에서 찾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과 절차와 자세로 드려야 합니다. 인본주의적인 형식을 분별하여 배격해야 합니다.
5. 이 사건에 대해서 모세는 제사장들이 시신을 처리하지 못하게 막았고(4), 아론과 다른 두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형제의 죽음의 슬픔을 공적으로 표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여야 함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지도자들인 아론과 남은 두 아들에게 어려운 일이었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공적인 의무는 개인적인 문제보다 우선되는 것입니다.
6. 이 사건 이후, 모세는 제사장이 직무를 행할 때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여 죽임을 당치 말라고 했습니다(9). 이 규정이 왜 갑자기 주어졌을까요? 나답과 아비후의 범죄에 술이 연관되었기 때문일까요? 성경이 정확하게 그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맥으로 보아 그럴 수 있다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모세가 내린 이 경고는 어느 시대에나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분별력이 요구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술취함, 세상에 취함으로 영광스러운 예배를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7. 제사장들에게는 제사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 규례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명했지만, 회중의 죄를 위한 제사의 고기를 아론과 두 아들들은 먹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일로 인하여 노했지만, 이 제사에는 자신들의 죄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해서 속죄제물을 먹지 않았다고 한 아론의 대답을 모세는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8. 어떻게 보면 나답과 아비후의 불순종과,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불순종은, 모두 동일한 불순종이지만, 질적인 차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서야 하는 것을 알고, 더욱 더 거룩하고자 한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말은 모세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막무가내로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마음을 주님께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이러한 융통성은 발휘됩니다.
9.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바울 사도의 언어로 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갈 1). 사람들은 자기의 방법, 자기의 불,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옛 방식이나 인기 없는 방법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이런 것은 언뜻 보기에 대수롭지 않아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와 같이 심각한 일입니다. 자기의 방법과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모든 헛된 시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예배와 삶과 행동과 모든 판단의 기준은, 나의 판단과 경험과 생각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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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에게 이르시되(8-11)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아론에게 말씀하실 내용이 있을 때마다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레위기에서 아론에게만 말씀하신 대목은 오늘 본문이 유일합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바로 다음에,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아론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은 우연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 비극적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아론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힘주어 말씀하신다고 봐야 합니다.
(8-9)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회막에 들어갈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이 규례는 제사장 가문이 대대로 지켜야 할 영원한 규례라고 합니다. 이유가 10절, 11절입니다.
(10-11)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제사장들은 단순히 회막 앞을 지키는 문지기가 아니었습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일을 위해 존재했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게다가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를 잘 알도록 가르쳐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답과 아비후 사건 이후에 바로 서술된다는 점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최종 죽음의 원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된 제사장 역할과 관련이 있다고 쉽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드릴 불과 “다른 불”을 구별해야 했던 나답과 아비후의 판단이 흐려졌던 원인이 포도주와 독주 때문일 가능성입니다. 구약에서 포도주와 독주는 늘 짝처럼 함께 사용됩니다. 게다가 무조건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전제에 포도주와 독주를 사용합니다. 신명기 14장에서는 그해 수확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모여서 중앙성소에서 잔치를 벌일 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잠언 20장 1절에서 포도주와 독주는 사람을 미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표현되기도 했고, 백성을 공의로 다스려야 하는 왕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잠31:4-9). 일정 기간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했던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는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본연의 일마저 못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바른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균형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때, 하나님 앞에서 성과 속, 정과 부정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던 때에는 엄정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술이 아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권한 바 있습니다.
술에 취해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도 없고, 자칫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포도주와 독주를 삼가라는 말은, 그 자구대로 지켜야 하지만 동시에 제사장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그 어떤 것들도 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중에 남북왕국으로 갈라진 유다에서, 그릇된 성전 신학에 빠져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거짓선지자 노릇했던 많은 제사장들이 바로 포도주와 독주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번영과 웅장함, 그 기름짐에 취해서 제사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렸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때 선지자가 북이스라엘을 고발할 때 술 취했다고 고발한 바 있습니다(사28: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감당하려면, 바른 과정을 통해 바른 결과를 얻기까지 우리는 포도주와 독주로 표상되는 우리의 분별력을 어지럽히는 요소로부터 독립하여 정돈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수많은 변수들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삶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을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고 여긴다면, 그 일을 방해할 만한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일을 행하기 위해 분별력과 지혜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을 제물(12-15)
12절부터 15절까지는 화제물 중에서 제사장들에게 주어지는 몫에 대한 규례입니다.
(12-13)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물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에서 먹되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제사장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답과 아비후 사건 이후에도 이전처럼 계속해서 제사와 관련된 규례를 말씀하신다는 것은, 이 규례들을 잘 지키는 것이 제사장들의 생명 유지와 직결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2절부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 뿐만 아니라 아론의 아들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도 함께 말씀하십니다. 화제물 중에서 남은 소제물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므로, 누룩을 넣지 말고 제단 곁, 곧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14-15) 흔든 가슴과 들어올린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물 중에서 네 소득과 네 아들들의 소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그 들어올린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물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소득이니라
제물 중에서도 요제로 드린 가슴 부분과 거제로 드린 오른쪽 뒷다리는 정결한 곳에서 제사장과 그 가족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언급된 내용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제사를 집례할 때,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대충 안다고 생각하여 경솔하게 여겼다가는 남은 자들도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려면, 간단해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겨지더라도 실수가 없도록 그 마음에 굳게 새겨서 그 말씀대로 집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으로 위임 받은 첫날에 두 제사장이 죽어나간 상황에서, 지난번에 들었지만 또 다시 모세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기 10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는 길만이 생명을 잇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사장들은 특히나 율법의 감독자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원리와 실제를 말씀을 지킴으로 눈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말씀을 지키는 삶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모두도 말씀을 지키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삶을 사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의 영 단번의 대속의 희생으로 제사를 드리지도 않고, 말씀을 어겼다고 당장 그 자리에서 죽는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우리를 죽음이 아닌 참된 삶으로 인도한다는 말씀의 핵심을 이해하고,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고, 더불어 살아가며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가운데 주시는 말씀을 품고 살았던 지난날과 오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비추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에 걸맞는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 계열 제사장들에게 먹을 것과 먹을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를 의지하여 오늘도 말씀을 따라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하루를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미 불살랐는지라(16-20)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서 모세가 속죄제 염소를 찾았는데, 이미 불태워버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6-18)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이르되 이 속죄제물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는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는 것이었으니 그 제물은 너희가 내가 명령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했을 것이니라
모세가 화가 나서 제사장을 야단칩니다. 백성들이 드린 속죄 제물은 내장과 그 기름만 제단에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게 되어 있었는데, 아론과 아들들은 그 제물 전체를 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규례를 이야기하고, 또 일러주었는데도 그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엘르아살과 이다말도 형제들처럼 범죄한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제사장들이 속죄 제물을 먹는 것 또한 제사의 일부임을 밝힙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속죄 제물을 먹는 일과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이 어떻게 연관될 수 있겠습니까? 제사장들은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음으로써 그들의 죄를 대신 지게 되지만 그것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9-20)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제물을 먹었더라면 여호와께서 어찌 좋게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이에 아론은 왜 속죄 제물을 먹지 못했는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두 아들이 범죄하여 죽은 이 마당에, 제사장의 몫이라고 주어졌다고 해서 태연하게 먹을 수는 없었다는 것이 아론의 대답입니다. 이날만큼은 제사장에게 허락된 것조차 온전히 불태워 하나님께 드려서 백성 뿐 아니라 자신들의 죄와 허물까지도 용서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해명한 것입니다. 아론과 남은 두 아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가족의 죽음을 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계속해서 제사드려야 했던 그 슬픈 마음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도 아론의 마음에 대해 이해하셨으므로, 이 부분을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법도와 규례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친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우리는 문자에 갇혀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하게 됩니다.
아론과 남은 두 아들은 이번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일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철저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사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규례들이 사람 편에서 보기에 까다로워 보이고 뭘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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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에서 첫 제사를 드린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성막에 한 죽음이 임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던 제단 위의 불이, 이번에는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를 삼키는 불이 됩니다(2절). 본문 1절은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의 명령”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으로 불을 선택하여 분향합니다. 아마도 “다른 불”로 분향을 하면 죽게 된다는 엄중한 사실을 예측 했다면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와같이 분향했던 것은, 다른 불을 가져다 분향하여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나답과 아비후의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성막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다른 불”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로 분향을 하고 제사를 드려야합니다. 제사라는 목적만큼 중요한 것이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과 방법입니다. 목적에 부합하는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만, 목적은 완수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적을 이루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또한 내게 익숙한 생각과 방법대로 목적을 이루라는 말 또한 성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그 수단과 방법 또한 거룩한 하나님을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명령”이 아닌 자신들의 생각대로 “다른 불”을 사용한 나답과 아비후의 분향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불”을 들고 하나님을 섬겨왔던 그들을 향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단지 두 사람만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존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라. 아론의 첫째아들 나답과 둘째아들 아비후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는 아버지인 아론과 동생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애곡 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하라고 말합니다. 애곡을 해야할 대상이 아론과 아들들이 아니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단지 두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말합니다. 본문 6절 후반부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야훼께서 분노하신 것은 온 회중에게 하신 것이니, 야훼께서 태워 죽이신 자들을 위하여 한 겨레인 이스라엘 온 가문이 곡해야 할 것이오. 자신의 생각대로 “다른 불”을 사용해 하나님을 섬겼던 나답과 아비후의 모습은, 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이전까지의 삶의 양식과 관습들을 버렸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애굽에서 오랜 시간 축적해온 삶의 방식과 관습인 만큼, 오랜 시간 새롭게 해 가야할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새로운 제사는 결정적이고 중요한 제도입니다. 첫 제사가 열린 그곳, 성막에서 부터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세워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르지만 아직 애굽의 삶의 방식을 가진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삶을 방식을 가진 백성들로 세워가실 것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레위기 10장은 첫 제사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다른 불”을 들고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해, 목적에 부합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9-10절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기위해 필요한 한가지를 말해줍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살기위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분별”입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익숙한 삶의 방식이나 많은 이들이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오늘 나를 향한 “여호와의 명령”을 분별할 때 우리는 “다른 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을 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우님들, 마주하시는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선택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살아가는 좁은 길 위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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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9장은 제사장 위임식이 있은 후 첫 제사의 장면을 나타내줍니다. 번제와 속죄제, 화목제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불이 나와 제단 위 제물들을 순식간에 불사르는 것을 보고는, 온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엎드려지는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비록 오늘날 그 피비린내 나는 제사가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단순한 종교행위를 넘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특징이며 삶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들 중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집전하다가 바로 성소 앞에서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되었기에 본문 외에 네 번씩이나 더 성경에 인용되고 있습니다(레 16:1; 민 3:4, 26:61; 대상 24:2). 여러 번 반복되는 언급은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에 경고 메시지가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아론의 아들들 중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1-2절 말씀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여기서 제사장 역할을 하던 나답과 아비후에게서 여러 가지 미심쩍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으로 분향을 드리는 자가 어찌하여 한 명이 아니고 둘인가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 7-8절에서 보면 아침과 저녁으로 한번씩 성소에 나가 분향하였는데 본문에는 이들이 제각기 향로를 들고 동시에 분향한 것처럼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왜 갑자기 한꺼번에 두 명 모두 각자 향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겠습니까? 9절 말씀에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가 기록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술을 마신 채로 하나님의 성막에 들어갔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면,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 한 사람이 분향해야 할 몫을 각기 자기 향로를 들고 경쟁심으로 지성소 앞에 있던 분향단에까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것도 술에 취한 채로 말입니다.
예배하는 자, 특히 예배를 인도하는 자들이야말로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지 아니할 경우 마당만 어지럽히고 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우리 마음의 태도까지 살피시는 분이시며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들의 태도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사용하여 분향하였습니다. 레위기 16장 12-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번제단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담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번제단에서 취한 불이 아니라 다른 출처에서 난 불을 갖고 나아왔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데서나 붙여온 불이면 어때’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와 예배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불이 나타나서 그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화형을 통한 즉결 심판은 민수기 16장에도 나옵니다. 레위 자손의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을 포함하여 모세를 대적하던 지휘관 250명이 향로에 불을 담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땅이 갈라져 고라 가족들을 집어삼켰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불이 나타나 나머지 250명의 지휘관들마저 태워 죽임으로써 거룩한 향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4절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사촌들로 하여금 자신의 친척의 시체를 메어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이 둘씩이나 죽었음에도 잠잠하기만 한 아론에게 또 그 가족에게 애도조차 하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제사가 여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제사나 예배는 하나님 중심으로 드려지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라는 점입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때로는 말씀이 시시하게 보이고, 원시적이라 생각되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와 우리들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상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외면적으로 보면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향로, 불, 분향 등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분향까지 했습니다. 외면적으로 보면 너무나 신앙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 예배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공동체에서 예배의 거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그와 더불어, 오늘 본문 말씀은 공동체의 순수성을 깨뜨리는 일련의 사건인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자신의 재산 가운데 얼마를 교회를 위해 내놓았는데 그 중에 얼마는 아까워서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 이 부부를 치셨고 오늘 말씀에서처럼 싸늘한 시체로 남았습니다.
베드로가 성령님의 도움 없이 어떻게 그들의 속임을 눈치 챌 수 있었겠으며 그들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넘어뜨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징계행위가 공동체 내에서 모세나 베드로 같은 사람 지도자의 사사로운 결정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나왔음을 모두가 알았기에 공동체의 순수성은 여전히 유지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대제사장인 아론이 자신의 두 아들이 잘못된 제사를 드리다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것이 모세가 행한 징계가 아니라 명백하게 하나님이 직접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에 아론과 그 가족들이 아무런 요동도 하지 않고 순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모세 시대에서 1500년이 지난 초대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그 공동체의 순수성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지켜주셨던 것이요, 초대 교회에서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교회 공동체가 그 거룩성과 순수성을 회복해나가기 시작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공동체를 날마다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하루도 주님 앞에 거룩한 신앙인의 삶이 되고 초대 교회처럼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