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은 모양이 아니라 능력이다.
1. 예수님께서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묻는 대제사장,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 악한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1~12). 주인이 정성껏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소작을 맡기고 타국으로 갔다가, 소출을 받기 위해서 종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번번이 종을 때리고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리라 생각하여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면 유업이 자기들 것이 되리라는 망상으로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에 던졌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포도원 주인이 직접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주님께서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하심으로, 당신의 죽으심으로 세워질 교회를 암시하셨습니다. 포도원은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사 5).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종인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지만,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거절하고 죽였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오셨는데 그들은 그 아들도 잡아 죽일 것입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바르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지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정치 종교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는 유대 사회의 두 집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은 빌라도와 헤롯이 친구가 된 것처럼 하나가 됩니다. 이들은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이슈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셨고(15) 데나리온을 보이라 하시고 동전에 주조된 가이사의 형상을 확인하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로써 이 함정을 빠져나가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4.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의 문제로 도전합니다. 예수님은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면서, 부활 때에는 사람이 결혼관계에 매이지 않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은 모든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시나무 떨기에서 나타나셨을 때, 당신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은 죽었으나, 계속해서 존재하며 영원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한 서기관이 구약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는 이것이 어떤 제사보다 낫다고 지혜롭게 말함으로써, 그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는 칭찬을 주님으로부터 듣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지는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6. 예수님은 계속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서기관들이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는지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임을 부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어도, 다윗이 성령의 영감으로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향하여 '주'(여호와의 호칭과 동일한 아도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시키심으로써, 당신이 하나님이신 메시아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시 110:1). 이 모든 말씀을 백성들이 즐겁게 들었다는 것은 놀라운데(37) 이것이 곧 구원의 증거는 아닙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칠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즐겁게 들었다는 것으로 구원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성경을 모두 알아도, 말씀듣기를 즐거워해도, 예수님을 영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들의 구원은 달라집니다.
7.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들이 백성 앞에서 하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고, 시장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것을 즐겼으며,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잔칫집에서 상석을 먼저 차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이런 목사나, 이런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여 힘없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함으로 길고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들인데,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판결은 엄중하다고 말씀하십니다.
8. 반면, 성전 헌금함에 전 재산인 두 렙돈(한 고드란트)을 넣는 과부는 가장 헌금을 많이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많은 부자들이 헌금함에 많은 돈을 넣는 것을 보셨지만, 주님은 가진 전부를 넣은 이 과부를 더 높이 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자는 경건의 모양을 갖춘 외식하는 서기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위선과 거짓은 다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한 이 과부의 경건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입니다.
9.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만, 그 기회는 언젠가 지나갑니다. 지금이라는 살아있는 순간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이 기회는 내게서 영영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보라 지금이 은혜 받을 때다." 예수님의 말씀에 지혜롭게 반응한 서기관처럼 주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백성이 주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어도 그들이 다 구원 얻는 신앙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잘 살펴보면,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가깝다 한 자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에게 지극히 먼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삼가고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이들보다 차라리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의 헌금을 통해 참 신앙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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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의 주인(1-9절)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1:27부터 시작된, 예수님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과의 논쟁에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일명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인데, 이사야 5:1-7의 포도원의 노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문제였던 토지 주인과 농부(토지 관리인)들의 갈등문제를, 예수님께서 비유로 다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 비유가 전혀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주인은 1절에 포도원을 만든 후 정성스럽게 포도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두르고 모든 기구를 예비하고 망대까지 세웠습니다. 이후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니, 정한 때가 되자, 비유 속의 주인은 농부들에게 소출을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냅니다. 당시 농부들은 결실기가 되면 주인과 계약한 대로 소출의 얼마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비유 속의 농부들은 주인의 말에 따르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기 위해 주인이 보낸 모든 종들을 심히 때리고,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며, 급기야 죽이기까지 합니다.
비유 속의 농부들이 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농부들의 착각 때문입니다. 종인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포도원의 주인이 자기들 것이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분명 농부들도, 처음에는 포도원이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마음에 욕심이 들어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소출을 주기 싫다가, 점점 그들의 마음에는 소출이 아닌 포도원을 갖고 싶은 마음이 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포도원을 움켜잡기 위해, 추악한 죄를 저지르게 저질렀습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나님, 악한 농부들은 이스라엘 지도자들,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긴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각자의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그 포도원은 우리 자녀일수도 있고, 물질일 수도 있고, 혹은 현재 우리가 삶에서 애를 쓰는 그 무언가 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우리가 편하게 보냈던 일상도 포도원 일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포도원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는 주신 포도원을 잘 가꾸고 보살펴서 좋은 소출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농부들처럼 포도원에 집착하는 욕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이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순간,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를 지키기 위해, 농부들처럼 여러 죄들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를 내 소유물로 여기는 순간, 성경적인 양육과 교육의 원리는 사라지고, 과거 방영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세상의 성공만을 추구하는 부모의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시작되며, 자녀들은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내 물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또 내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농부들처럼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능욕하는 등 여러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신 포도원이, 우리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농부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시선이 포도원과 소출에만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포도원을 맡긴 그 주인에게 있었더라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언제나 우리의 시선은 포도원이 아니라, 포도원을 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창세기의 야곱을 보면 그 이름의 뜻은 ‘잡는 자’입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는 것을 시작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붙잡기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장자권을 잡기 위해,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잡기 위해, 재력을 잡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지려는 삶은, 당연히 죄가 동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 역시 세상을 잡기 위해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살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던 야곱이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창세기 32장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는데, 여기 나온 ’씨름하다‘의 히브리어 원어적 의미(아바크)는 ‘붙잡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붙잡는 인생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변경하여 부르십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이 주도하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 통치하시는 삶.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할 진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포도원이 아닌 오직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은혜를 바라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6절에서, 주인은 최후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냅니다. 혹여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이니 존대할 것이란 기대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파렴치한 농부들은 그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 던져버립니다. 아주 극에 달한 포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은 이미 농부들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보내는 모습에서, 아들을 이 죄악의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농부들의 잔인함과 포악함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버린 돌에서 모퉁이 돌로(10-12절)
예수님은 9절에 비유 속의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주신 은혜를 진멸하고 거두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시편118:22을 인용하십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당시 건축자들은 건축물을 지을 때, 쓸모없다고 버리는 돌이 있었습니다. 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대단한 사건입니다. 모퉁이 돌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건축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석이라,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요한 역할을,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어 큰 영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농부들이 죽인 주인의 아들이 너희가 ‘버린 돌’이었는데, 그 ‘버린 돌’이 건물을 지탱하는 ‘모퉁이 돌’, 즉 세상을 지탱하고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닌, 오직 “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도 ‘버린 돌’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각자의 인생에서 누군가를 지탱하는 ‘모퉁이 돌’의 인생을 살게 해주신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그러나 12절에 그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듣고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잡으려는 목적이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은 자신들이 ‘포도원의 통치자’가 되길 원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지만, 그 목적은 이들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는 목적은, 예수님이 우리 ‘포도원의 통치자’임을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의 삶이, 내가 통치하는 포도원이 아닌,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통치하시는 포도원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여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납세에 관한 논쟁(13-17)
본문은 고난주간 셋째 날(화요일)에 연속된 사건(11:20-14:11)의 일부로, 바리새인과 헤롯당, 사두개인들의 납세와 부활에 관해 묻는 가시 돋친 질문에 이어진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앞서 성전에서 논쟁을 벌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그들’이라 총칭하며,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낸 이가 누구이며,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또렷이 기록합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말문이 막혔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기 위해 바리새인과 헤롯당 소속 된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보낸 양 집단의 배경은 그들의 불의한 의도를 분명한 의도를 똑똑히 보여줍니다.
엄격한 율법 준수를 최상을 가치로 삼았던 바리새인들은 당시 지나친 특권의식을 가지고 정죄와 비난을 일삼았습니다. 극단적인 분리주의자였던 그들은 무엇보다도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반면 헤롯 왕조와 로마법을 지지하는 헤롯당 사람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상극의 두 집단을 한자리로 불러 모은 목적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말에 책을 잡고 말겠다는 의지를 가늠하게 합니다. 곧장 사탕발림과 함께 가시 돋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14-15상)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난감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답변한다 해도 문제가 되는 교활한 질문이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 바치라 대답하면 바리새인들은 단숨에 예수님을 친로마주의자로 매도할 것이고, 이와 반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으니 바치지 말라 대답하면 헤롯당 사람은 지체 없이 예수님은 로마의 통치에 반하는 자로 고발이 예상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에 숨겨진 가시를 단숨에 꺾으시었습니다.
(15하-16)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그들의 외식(위선)을 아신 예수님은 미리 준비된 항목들 가운데서 답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그들의 폐쇄적 질문에 함몰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세금으로 사용되는 화폐, 당시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을 들어 보이시며 거기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각인되었는지를 반문하셨습니다. 일제히 가이사(로마 황제)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표면적 질문에 대한 답을 넘어, 그 이면의 불순한 의도를 꿰뚫고 초월적으로 답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는 당시 통용되던 화폐(데나리온)에 마음(중심)을 빼앗긴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분별력을 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습니다. 황제의 형상이 각인 된 데나리온이 아닌, 그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존재(생명)들이었습니다. 결코 하나님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돈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관심조차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든 돈이 아닌,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존재를 좋아하십니다. 하나님의 그 존재의 자발적 헌신을 기뻐하십니다. 저희 교회가 정관에 그 기록을 포함하면서까지 봉사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논쟁(18-27)
말문이 막힌 바리새인과 헤롯당을 뒤로하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세기 유대교는 대표적인 분파(바리새파, 에세네파, 사두개파) 중 하나인 사두개파는 마가복음에서 유일하게 본 절에서만 등장합니다. 제사장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그들에 대해, 마가는 다음과 같이 짧고 단호하게 소개합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이를 통해 부활을 부정하는 그들의 주장은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체 없이 입을 열었습니다.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사두개인들은 질문에 앞서 자신들에게 익숙했던 모세오경 중 신명기 25장 5절에서 6절의 내용을 들먹였습니다.
(신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모세가 말한 계대결혼 즉, 형사취수제의 목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가문의 대를 잇고, 둘째로 가문의 재산을 보존하고, 셋째로 자식이 없는 과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공통적으로 그 목적들은 이 땅에서의 생존에 초점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이에 빗댄 이야기를 설명한 후, 질문했습니다.
(20-23)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여기서 ‘최후에’의 원어적 개념ἔσχατος(에스카토스)은 시간적, 공간적, 실제적 죽음(종말)의 때를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은 그 시점을 분명히 했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세상의 연장의 개념으로 부활에 대해 풀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유한의 존재가 결코 무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찰나를 사는 이가 결코 영원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전히 유한과 찰나의 개념으로 무한과 영원을 해석하려는 어리석은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 채 오해하고 있다고 말씀(24)하셨습니다.
곧장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자 한 호흡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25-27)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의 때에는 천사와 같은 존재로서 세상의 제도(결혼) 아래 머물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설명함에 있어, 그들의 이해를 돕고자 그들이 익숙하게 생각했던 모세오경 중 출애굽기 3장 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시라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공통된 시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미 죽은 조상들의 개념을 바탕으로 과거형으로 ‘그의 하나님이었느니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미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고 있는 조상들의 개념을 바탕으로 현재형으로 ‘그의 하나님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집어 주시는 것까지 입니다.
미천한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해석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십시다. 유한한 존재로 찰나의 순간을 사는 존재로서 감히 왈가왈부하기 보다는,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잠잠히 침묵하십시다.
진정한 웰빙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함에 그 열쇠가 있음을 잊지 않을 때, 나의 힘이신 하나님의 따듯한 손길을 느끼는 한날이 될 것입니다.
28절부터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큰 계명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셋째는 교만과 외식에 대한 경계이고 그리고 넷째는 헌금의 진실성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4부분 중 3부분에서 서기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자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서기관은 무엇을 기록하였느냐면, 율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기관은 율법을 필사하는 사람입니다. 이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기록이 사람의 손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서기관의 직책은 아무에게나 맡겨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어떤 조직체에서도 서기는 아무나 세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서기직이 단순히 기록만 하는 업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 시대에 서기관 역시 율법만을 필사하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필사와 더불어 율법을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을 달리 율법사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의 평행구인 마태복음 22장 35절에는 서기관이라는 용어 대신에 율법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율법에 정통하므로 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이 했던 일 중에 또 다른 중요한 일은 모세율법에 관한 613가지를 면밀히 분석하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부정적인 것(365항)과 긍정적인 것(248항)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또한 율법의 경중을 가리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첫 부분에는 이러한 사역을 감당했던 한 서기관이 대중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던 예수님께 한 질문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질문에 관한 대화가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입니다. 율법사인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 613항목 중에 어느 것이 최고의 계명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28절에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첫째는 하나님 사랑,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30절)이고 이웃 사랑은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의 경중의 문제를 떠나서 율법 전체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자 그 서기관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화답을 하였습니다. 이를 관찰한 마가는 이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서기관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34절에 “예수께서 그가 지혜있게 대답함을 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 나타나는 서기관은 특정인물이 아니라 집단을 가리키며 또한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언급만 되었습니다. 35절에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구약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중에 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구약에 많은 곳에서 이를 증거합니다. 대표적인 한 구절이 이사야 11장 1절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 당시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많고 많은 다윗의 후손 중에 누가 그리스도인지를 확신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서기관들의 이러한 부정적인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은 논리를 따지는 서기관들에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그것이 37절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임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36절을 보면 알게 됩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시편 110편 1절의 인용구절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라는 의미입니다.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 다윗은 미래에 오실 예수님을 가리켜 주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이런 시편 고백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인자로 오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이 말하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논쟁의 핵심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시편 고백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심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편을 인용하면서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에 이들의 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서기관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두 번째 부분에 나타나는 서기관은 부정적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서기관을 강도있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39절에 “서기관들을 삼가라”, 40절에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이 당시 서기관은 유대 최고의 법정기능을 가진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공회는 오늘날로 보면 대법원입니다. 서기관은 제사장과 장로들과 더불어 공회의 중요한 구성원이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 사회에는 양대 세력이 있었는데 하나는 사두개파의 제사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바리새파의 서기관이었습니다(마22:34-35). 이처럼 서기관은 이 당시 상당한 고위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높은 지위를 이용해서 잘 입고 다니며 회당과 잔치에서 상석을 요구하였으며, 열약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의 재산을 강탈하였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회당에서는 신앙인으로 자부하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이를 아셨던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했으며, 또한 그들이 받을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까지 세 부분에서 나타난 서기관을 통해서 배울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자는 참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첫 번째 나타난 서기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을 이해한 후 말씀에 적절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멋진 신앙고백처럼, 그리고 현재 우리들이 하고 있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처럼, 나만의 진실된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함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 나타나는 서기관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을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가 하나님의 신성과 크신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것입니다.
세 번째 부분에 나타난 서기관은 교만과 외식으로 가득찬 서기관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교인으로서 이웃의 재산을 빼앗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교회 안에서 지위가 높을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은연 중에 자신이 가진 지위로 다른 교인들과 이웃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하고 예물을 바치면 무엇하겠습니까? 하나님의 판결만 중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제물보다’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의 중심을 봅니다.
마지막 부분은 물질의 양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헌금은 그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십니다. 헌금에 있어서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헌금의 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과 외식으로 가득찬 서기관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하나님께 바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어떤 번제물과 예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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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에는 성전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외형적인 성전이 분명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데 성전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어불성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눈앞에 성전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성전은 참된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성전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실체를 비유를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1절)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포도원을 만든 농부의 비유입니다. 비유에서 포도원은 소유주가 분명합니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주인은 자신의 포도원에서 일할 농부들을 모았습니다. 이 농부들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닙니다. 소위 소작농입니다. 소작농은 그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삯을 지불받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소작농은 자신의 수고로 열매를 거두지만 반드시 주인에게는 원래 계약서에 명시된 만큼의 세를 바쳐야 했습니다. 세를 바치는 것, 이것이 주인과 소작농을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런데 다른 농작물과 달리 포도원의 경우에는 포도원을 새로 만들고 난 후 수확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4년 정도는 세를 면제해주었습니다. 2절의 ‘때’는 바로 세를 면제해주는 기간이 지났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포도원에서 나는 소출을 거두고 거기에 합당한 세를 지불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농부들과 약속한 대로 자신의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3절)
농부들은 자신들이 바쳐야 할 세 대신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심하게 때려서 빈손으로 보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계약위반이자 범죄행위입니다. 주인은 다시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기까지 했습니다. 계속해서 종들을 보내었지만 농부들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렇게까지 참고 인내하는 주인은 없습니다. 세를 받기 위해 자신이 보낸 종이 주검으로 돌아오면, 주인은 당장 농부들을 응징하기 위해 무력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종들을 보내고 또 보내었습니다. 비유의 스토리가 이렇게 전개되는 이유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이키기까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고 때리고 능욕하는 역사를 되풀이해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6절)
그러나 농부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7-8절)
주인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을 보냈다 함은 이제 주인이 등장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습니다. 아들은 포도원을 독차지하고 그 이익을 나누었던 그들의 탐욕을 이제 끝낼 시기가 되었다는 ‘종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아들의 의미를 달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신들의 차지가 될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의 소작료를 지불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의 잘못된 종말 의식에 분명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9절)
포도원 주인의 생각과 농부들의 생각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농부들에게는 처음부터 자신들의 주인이 없었습니다. 아니 주인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과 자신들의 탐욕만이 주인 노릇을 해왔습니다. 비유에 나타난 농부들의 탐욕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탐욕과 겹쳐져 있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님은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시며 그들을 통렬히 비판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비유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10-11절)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장소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던 이들에게 주님은 당신이 머릿돌이 되심과, 동시에 결코 성전의 참된 주인이 될 수 없는 그들의 한계와 허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보여주셨던 한계와 허상은 사실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 인생은 주님이 머릿돌이 되시는지요? 역사는 주님을 머릿돌로 삼지 않는 예루살렘 성전과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았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 한들 우리가 쌓는 인생의 머릿돌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 인생의 수고는 허무할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세금 문제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가 로마에 바치는 세금 문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은 당시 유대나라를 지배하는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의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유대 민족의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로마에 바치는 세금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헤롯당은 로마가 임명한 꼭두각시 왕 헤롯왕의 사람들이었기에 당연히 로마에 협조하며 세금도 로마에 바쳐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14절과 15절을 보면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라고 말씀합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은 자기들의 질문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바치지 말아야 하는 가의 두 가지로 질문을 했기에 예수님의 답변 역시 둘 중의 하나, 즉 바치던지, 바치지 말던지 라고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이 둘 중의 하나, 어떤 식으로 대답하던지간에 자기들에게 ‘딱 걸렸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로마의 앞잡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반대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신다면 헤롯당은 예수님을 반역자로 로마당국에 고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속마음을 다 알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데나리온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는 16절에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시자 사람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사람들이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17절에서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예상했던 답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바치지 말아야 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질문이었지만 예수님은 교묘한 함정이 있는 질문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답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두 가지를 책임을 다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 세상 나라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함께 잘 감당하라는 말씀이기에 그 어떤 편으로도 시비를 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 나라에 속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세상의 나라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두 나라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가이사, 즉 세상의 권력이 다스리는 나라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동시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세상의 일도 하면서 믿음 생활도 해야 하는 두 배의 부담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시간을 오로지 세상일에만 쏟아 부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세상일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읽는 시간도 있고 기도하는 시간도 있으며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시간이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기에 신앙생활도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경쟁 속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특출나게 머리가 좋다거나 몸이 튼튼한 것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거기에는 바로 믿음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최선을 다함에도 시간과 능력의 한계로 인한 빈틈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빈틈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한계를 가장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시간은 세상 사람들에 비해 너무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나의 능력이 되어 주셔서, 내가 혼자서 악착같이 아둥바둥하는 것보다 더 완전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를 하며, 피곤한 몸을 이기고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시간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을 공급받는 시간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인 힘을 얻는 시간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바리새인과 헤롯당에 이어 사두개인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사람이 죽은 후에 부활한다던지, 천사와 사단 같은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대단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고자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20절부터 23절을 보면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라고 합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육체를 가지고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인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을 향해 24절과 25절 보면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구약 성경의 모세 오경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성경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6절을 보면 사두개인들도 성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의 책 중에서 출애굽기 3장 6절의 말씀을 예로 들으시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 이전에 벌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죽은 사람들이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데 왜 그렇게 현재형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체는 죽었으나 영혼은 살아있어 계속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이미 죽은 성도들은 잠시 육체는 없지만 영혼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면에서는 모두 살아있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어지는 2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다시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고 마지막 날에 그들의 육체 역시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을 빼버리면 시체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부활이 없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힘들게 살아갈 이유가 구태여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그토록 집착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지 죽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자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아등바등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이라고 하는 영원히 남는 것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던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을 위해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에 우리에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 삶의 모든 밑천을 걸고 던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계명을 주신 이유와 정신, 소위 가장 큰 계명이라 불리우는 계명에 대해, 서기관의 질문에 답변해 주십니다. 29절에서 31절 말씀입니다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물론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수 많은 매뉴얼을 지키느라 정작 그 큰 계명과 율법을 주신 이유와 근본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정신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하며 시작하는 서기관들이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약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신 명령과,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라고 하는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정신,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정작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의 본질은 외면한 채, 사람의 전통과 가르침을 지키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존경과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조심하라고 삼가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사람의 박수와 하나님의 점수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세상을 감동시킬만한 헌신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외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의 평가와 하나님의 판단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기대했던 메시야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메시야가 다른 것도 알려주십니다. 시편 110:1절의 다윗의 고백의 인용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여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면서 비록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나, 본질적으로 다윗보다 또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던 예수님이심을, 그래서 다윗 역시 내 주여 하고 고백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 37절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이처럼 세상이 기대했던 메시야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는 다름을, 보내심 받은 예수님께서는 지적해 주십니다.
헌금에 대한 판단 역시도 다릅니다.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에 침묵하시던 예수님은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제자들을 불러 칭찬하십니다. 많은 부유한 자들의 큰 예물은 일부였지만, 가난한 과부의 지극히 작은 예물은 전부였음을 지적하시며 세상이 무시하던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중심을 칭찬하십니다. 외형을 보는 세상의 판단과,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의 평가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구의 판단을 의식하며 사실 것인지 택해야 합니다. 어떤 동기로 살아갈 것인지, 사람의 존경을 위해서나 나의 평판을 위해 살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동기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생명을 살리고 외식을 멀리하며 자신의 전부를 중심을 다해 드리는 그와 같은 날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