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딸의 아버지 ]
* 김영주(세상풍경) 23.12.7
조금 이른 시각에 귀가한 딸이 전화기를 주물럭거리더니 왠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테이블에 왕족 색인 흑장미색 길쭉한 박스 하나를 내려 놓고는 쇼파 팔걸이에
궁딩이를 끼고 아슬히 앉는다.
"오~빵! "
"누가 다 먹냐?"
둘다 소식자이다. 식생활 태도가 가족의 몸매를 만든다. 밥상에 일반인의 밥공기를 쓰지 못한다.
종재기나 직경 5cm이하의 작은 접시에 밥 2스푼을 담는 게 일상이다. 더군다나 딸은 비건이다.
무엇로도 포만감있게 배를 채우지 않는다.
나 또한 식탐이 없다. 딱봐도 열랑높은 파운드나 롤
케익이다. 빵의 소멸을 생각해본다.
아까워 못버리고 3일쯤 테이블에 놓고 쳐다본다. 늦은 밤에 가장자리를 조금 뜯어 먹는다.
그후 조각내어 냉동실로 들어간다. 몇개월 혹은 1년이상 잊고 지낸다. 그러다가 냉동실에
과부하가 걸리는 어느날이 온다. 성애낀채 마른 빵의 정체가 모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얼린 것을 후회하게 만든다.결국 버려진다. 그렇다고 아직 음식이 맛과 섭취가능한
싯점에 버릴 수도 없다. 지구촌에 전쟁으로 기아로 죽는 이들이 너무 많다. 아직 효용성이
있을 때 버리는 것은 차마 못한다. 가끔은 옆집에 어린아이 둘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지금은 먹거리에 대한 걱정이 없는 시절이다. 먹거리가 궁하던 시절처럼 먹거리를
남에게 나눠준다고 좋아할 사람이 이제는 없다. 출처에 대한 꺼림직함과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선호하는 식재료의 종류도 제각각인 시절인 것이다. 이웃끼리 아무도 서로 주고 받지 않는다.
무계획적인 식재료의 과잉은 민폐를 불러온다. 노란봉투도 사야한다.
딸은 묻지 않아도 파운드 케익의 출처를 스스로 밝혔다.
"선생님!"
"고2 담임샘...책 빌려 달래서..."
"야, 너 보고 싶어서 오시는 것 같따야.
교사가 국회도서관이나 어디서 책 빌릴 줄 모르겠니. "
"울 선생님은 선비야!!"
어김없이 딸려오는 방어의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전 고2 담임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당시 내 딸은 회장을 하고 있었다. 오라가라는 아무 말이 딸로 부터도 담임으로부터도 없었다.
내 딸도 담임과의 인간관계를 묻는 게 아님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다.
담임은 수험이 끝나고 제자 2-3명을 데리고 역사탐구여행을 다녀왔다.
봄이면 왕벚꽃 명소인 서산 개심사로 직접운전해서 데려갔다왔다. 소위 역사탐방.풍경사진 찍으러
나도 두어번 가본 곳이다. 모두에게 밥도 사줬고 제 집앞까지 귀가 시켜주고 일정이 끝났다고 했다.
그때부터인가 문득 몰려오는 한가지 생각을 갖게 됐다. 내 딸에게는 아버지 역할 같은 인물이라고.
생물학적인 부친도 중요하다. 부득이 첫번째 부친으로부터 결핍감을 갖게 되는 인생도 꽤 있다.
삶의 과정에서 본받아 마땅한 선한 영향력을 주는 장년의 존경할만한 남성이 있다면 결핍감은
얼마간 대체되어 줄 것이다. 살아갈 원동력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것이 핏줄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시 사과 얘기로 돌아간다.
사과가 온 것은 코로나 팬데믹 첫해 가을이었다.
세상이 폐쇄적일 때였다. 고2담임 이후 공립교사라 남고로 전근했다고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때문에 사과의 존재감이 크게 기억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외국어로 먹고 살았다. 외국인이 오가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
외국어 전공은 무용지물이었다. 처음으로 실업자가 되었다. 수업도 다른 일도 끝을 알 수 없는 때까지
잠재적으로 사라졌다. 그해, 이른 가을은 유난히도 덧없었다. 유학나가 있는 큰 딸은 코로나 후유증으로
죽다살기를 반복했다. 아무 치료를 받지 못한채 통증을 안고 살았다. 불안한 나날들이었으나 국가마다
공항를 폐쇄했다. 혼자 견디고 살아남아야 하는 이상한 세상이었다. 하지만 가을 하늘 빛은 인간들이 겪는
고난과 무관하게 파랗고 온화했다. 내가 좋아하는 코발트 블루 빛 하늘이 연일 이어졌다.
현대에 닥친 극심한 전염병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방송에서는 연일 호소했다. 누가 어디에서 걸려
어떻게 전염되었는지 방송에서는 주의보가 뜨면 그 사람은 참혹한 죄인이 되었다. 누구나 생명유지
정도를 위한 외부활동밖에 심적 제한을 받는 상태를 거친 지 두번째 가을이었다. 계절상 사각한 부사가
나오긴 일렀다. 사람도 물건도 서로 오가지 않다보니 왠지 우울감이 하루에도 몇번씩 쓰나미처럼
일다꺼지기를 반복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날들이었다. 설마설마하다가
실업급여 6개월 수령후에도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딸이 오늘처럼 귀가후 갑자기
나갔다. 큰 종이가방을 들여다 놓았다. 지금과 똑같이 간단명료하게 한마디만 했다.
"선생님, 선비셔!
책 보는 걸 좋아하셔.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달래서..."
정당한 댓가성이 있는 사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 혼자 먹으라고 이렇게 많이?"
그리고 사과는 이듬해에는 없었다. 사과 모양이 익숙했다. 과일가게에서 흔히 팔지는 않는 사과였다.
사과 껍질은 밝고 붉은 빛을 띤다. 영주 부석사로 사진기 들고 출사를 간길에 눈낄을 끌었던
그 사과의 모양을 닮아 있었다. 사찰 오름길에 경사면에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빠알간 사과 빛깔이 너무
탐스러워 보여 한참 쳐다 본적이 있었다.
시식용 사과 한 쪽을 맛보았다. 침샘에서 줄줄 침이 새어 나왔다. 그것과 똑같은 밝은 빨강에 흰 점이
아주 작게 박힌 모양이었다. 그 맛을 알 것 같았다. 부사보다 조금 맑고 하얀 속살의 가벼운 부사를
닮은 사과였다.
"근데 왜 올 해는 사과가 없냐? "
딸은 뜸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번인가 검은 자위를 상안검으로 올려 넣어 눈알을 하얗게 뒤집었다. 입술을 새부리처럼 입꼬리에 힘을 주어
독특한 이모티콘 표정을 2~3회 만들어댔다. 말보다 표정연출 기술이 뛰어난 딸이다. 위 3대조 사돈에 팔촌이내로
자기표현을 비언어적 행동으로 하는 이는 없는 것같다. 그정도 표현이면 매우 어이없다는 표시이다.
딸의 독특한 표정 연출 행동은 말로 인한 갈등없이 자신의 현재상태를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여고 시절 회장을 하면서 다수와 소통하는 저만의 방식이 나름 발전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딸은 정말로
갈등이 있을 때는 오히려 침묵으로 가라앉는 경향이 있다.
"원서라 잘 없어서 그래"
"글쎄다, 널 딸 같이 생각하는 거 아냐.
샘헌티 잘해라!
니가 때 되문 챙기고, 엄니도 아껴주는 이들이 있었는데,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 나서지 못해서 포기했었어.
그렇게 연락도 못하고 흘러가버린 인연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야.
근데, 그냥 문자, 톡만해도 사실은 고맙거든."
닿지않는 인연의 소식이 문뜩 떠오를 때 가끔 안부라도 물을 걸 지금에서야 그 헛헛함의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그냥 방가워하고, 가끔 안부묻고 누군가 신뢰해 주는 인연이 어딘가 있다고 가슴에
품고 사는 것만으로 나름 충만함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지속 가능한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소중한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나처럼 반백면을 살고 알면 소용이 없다. 왠지 스승과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딸이 부러웠다.
"선비야! 그냥 학문만 좋아하는..."
"장가도 안갔다며?"
"울 샘은 60넘었어"
누구나 태어나면 사는 게 그냥 의무이다.
어느 순간 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숱한 의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직업을 갖고 자식을 낳아도
해소되지 않는 삶의 불안전성이 있다. 자식도 사실 그렇다. 자유롭지 않는 시간을 자식 부양을 위해 애쓰며
욕심을 내려놓게 되는 동기부여 일뿐이다. 업과 번식이라는 큰 두가지 카테고리로 삶이 빛나고 충만할
사람은 없다. 외적으로 그렇게 보인다고 평가받아도 내면은 또 다른 얘기가 된다.
업과 번식으로 분주할 때는 잠시 잊지만 사람에게 선명한 것은 죽음뿐임을 알게 되고 곧 헛헛해진다.
물론 업이든 자식 키우기이든 그마저도 이루지 못하는 가는 사람들도 많다. 업을 지속해가고 번식한
새끼를 성장시키는 과정에서도 각기 다른 욕심으로 사람은 늘 결핍감에 절름거리며 노년이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선생도 사람이다. 사람이 학문과 애들 가르치는 업만으로 삶이 충만할까, 글쎄다 싶다. 이제 20대초반인
내 딸은 아직 삶의 외로움에 대해 알 리가 없다. 업은 업일뿐이고, 학문은 학문일뿐이고, 인간의 외로움과 행복은
그와는 대략무관하다. 조금의 틈새만 생기면 바닥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외로움이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왜 태어나고 왜 성장하고 왜 늙어가야하는지 답은 없다. 생명의 순환이고 우주의 에너지가 흐르는 방식이다.
좋은 업은 조금 넉넉히 삶을 영위하고 주어진 시간을 편히 보내는 수단과 방법이다. 때문에
좀더 적성에 맞는 직업은 좋은 생명유지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스트레스의 양적인 문제다. 천직일지라도
조금 갈등이 덜해서 견디기 수월할뿐이다. 이상한 것은 일로 분주할 때는 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만 싶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뜻밖의 세상풍파가 닥쳐 왔다. 일이 사라져 버린 예측불가한경우가 나에게도 발생해 버렸다.
이 경우 그간의 고달픔은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업과 번식이 다가 아니라고 여겨왔으나 생활의 불안이 매일
엄습해온다. 점점 사고는 멈춰버린다. 어떤 사회적 인간관계도 소원해진다. 다시 할 일이 없을까 매의눈
가마우지의 눈으로 세상을 훑는다. 머무적거리는 사이, 시간이 1년이상 지나갔다. 피곤에 찌들렸던 눈동자가
어느새 풀려 멍해졌다. 화장기 없이 하루쯤 머리를 안감고도 모자를 눌러쓴채 홍제천을 따라 한강으로 갔다.
문뜩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쓸모없이 내처진 기분에 젖는 날이 늘어갔다. 사회적 동물에게 사회활동 중단은
일상과 정서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스로 상처받은 영혼이 되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풀렸다를 반복한다. 사실 업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정을 쌓기가 어렵다. 그때뿐이다.
한두번 안부를 묻다가 서로 잊혀져 가기 마련이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몇년 본적도 없는 먼 인간관계부터
차단한다. 다음은 볼까말까한 친구와 동우회등을 멀리한다. 받을 것 있었던 핏줄은 형제자매도 심적으로 멀어진다.
겨우 돌봄과 부양의 의무를 가진 동거인만 남게 된다.
예측 못한 고립의 시간이 길이지면 처절한 책임감과 의무속에서 방치된다. 해 오던 역할 때문에 고통의 수치가
올라간다. 일련의 일들을 사람들은 흔히 삶의 풍파라고 한다. 고난은 정도의 차이이지 고난없이 풍파없이 나이
들어가는 인생은 없다.
내 딸이 말한 '선비, 학문을 좋아하는 내딸의 아버지는 비혼족으로 책임과 의무가 남보다는 가볍다.
나만큼의 힘겨움을 덜할 것이라는 추측이 스쳐 지나간다. 현실의 안정감과 좋아하는 책, 덜 고난을 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내적인 헛헛함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내 딸같은 제자가 있다해도 5년전 담임이다.
개심사에 가던 날이 수험생에 대한 접대 인줄 알았다. 몇년째 변함없이 원서를 빌리고 있다.
그런 계기를 내걸지 않으면 부모자식보다 나이차이가 많은 인연끼리는 접근이 쉽지 않다. 스승의날이나 동창
모임등 간판을 내건 날이 자주 있지는 않다. 제자들이란 졸업 후 스승을 얼굴보기 어렵다. 때문에 누구든 곁에
있지 않은 존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해 헛헛하게 느껴진다는 때가 온다는 말이다.
학문도 학위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내 딸의 아버지는 다행히 노후 연금이 두둑한 교사이다.
자식도 배우자도 없다. 사람이 생명으로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어간다는 것이 행복일까. 자신이 자기자신을
돌봐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딸은 알까.무한 긍정인 것처럼 습관적으로 표정짓고 살아와도 마음은 깊은
심해바닥을 핥는다.
설이 길어졌다. 다시 사과얘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시고 달큰하고 밝은 빨간 껍질에 밤 고구마처럼 노란 속살이 일품인 홍옥은 진작 사라졌다. 아마도 맛의
유지기간이 짧아 그 풍미가 수확철 기준으로 두세달을 못넘기는 탓일 것이다.
어느해부터인가 부사를 닮아 사각함이 더해진 교잡종 홍로가 추석대목에 마춰 앞다퉈 나왔다. 생김은 흡사 부사처럼
둥근형이 아닌 위로 갈 수록 원추형이다. 첫입 베어물면 육즙이 튄다. 다만 저장성이 약하다. 홍옥처럼 이른 가을
과일가게 선두를 차지하다가 사라지는 짧은 생명력이다.
근데, 내 딸의 아버지가 준 사과는 초가을 애기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할 무렵 영주 부석사 인근서 본 듯하다.
내 딸이 머무적거리며 내려놓은 큰 종이가방에는 동글동글한 무엇이 한 가득이었다. 신문지로 하나하나 싸여있어서
정체가 뭔지를 물었다. 어지간한 사과라는 것을 듣었을 때 언뜻 보아도 한 박스 분량이었다.
"야, 이게 책 빌려 준 값이야? ~
너무하네... 놀랍지않니?
너는 이렇게 동글동글 빈틈없이 신문지로 쌀 수 있어? "
"이게 말이 돼! 남자가 이걸 하나하나 다 싸았다고?"
딱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사과 과수원집 아들로 잔뼈가 굵었거나 했지 않으면 불가능한 비쥬얼이었다.
나는 한 참을 큰 패딩이나 담겼을 법한 큰 사이즈의 사과 봉투 옆에 앉아 그 꼴을 쳐다보고
기가차서 선뜻 펼쳐볼 생각을 못했다.
내 딸이 문간방으로 자러 들어갔다. 11시 50분 마지막 연합뉴스 보며 하나를 통으로 깎아 먹었다.
매우 향이 좋았다. 모든 명절에 들어온 사과의 가치를 뛰어넘는 맛이었다. 맑고 향기롭고 순수함이...
사회적거리두기 라는 결핍속에 외로움 속에
맛본 사과라 더욱 그랬다.
그리고 다시 그 때의 사과 가방과 같은 검붉은 흑장미색 종이 백이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나는 외국어를 필요로하는 의료계에 재취업을 했다. 보수적이고 폐쇠적인 병원 벌이가 쉽지는 않다.
늘 벌어도 모자라는 삶이지만, 코로나 팬대믹 때만큼의 처절함은 덜하다. 그래서인지 내딸이 내려놓은
흑장미색 상자를 보는 시선이 편해졌을까.
오늘 온 빵은 장인이 만든 것같은 이름이 박힌 김용* 치아시드 파운드 케익이다. 포장지가 동색이라는 생각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담임은 회장을 하는 동안 단 한통의 호출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그때 내 딸이 회장을
하는 지 조차 몰랐다. 대한민국의 공립이 학부모의 치맛바람이 사라진 참 교육으로 분위기가 바뀌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딸의 성품상 담임이 우리 집 형편은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때문에, 늦은 시각 귀가길에
책을 반납하며 보답성 먹거리를 건네곤 한다. 함께 즐길 입의 숫자와 시선을 얼마간 의식하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내 딸이 바르게 큰 것은 담임이었던 내 딸의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아 보인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구청 모범생
수상등 내 딸이 담임일 때 있었던 일인게 떠올랐다. 나는 학교로 호출된 적이 없다. 고3이 되어 처음으로 입시설명회
가정통신문이 왔다. 드뎌 내 딸의 학교에 갔다. 전날 늦은 밤 집앞 쌈지 공원에서 12시 다 되야오는 내 딸을 기다렸다.
코로나 전, 수입의 일정성을 위해서 방송국에서 교대 근무를 하던 때의 일이었다. 일상을 사는 시간의 영역이
서로 달라 딸을 기다리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나도 독립문 역 앞에서 밤9시부터 10시에 자율학습 끝나고 오는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할머니를 닮고 싶었다. 사철, 눈이오나 비가오나 귀사 1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계셨다.
밀도높은 일로 귀가하면 녹초가 되었다. 오자마자 두어시간은 저녁준비로 빨래로 외출복을 입은 채 가사 일이 이어졌다.
대충 하고 누우면 사지는 늘어지고 몽롱하다. 내 딸의 귀가전에는 절대 잠들지 않겠다는 원칙은 있었다. 알람을 해놓고
낡은 쇼파에서 비몽사몽을 반복하면 0시가 다가온다. 0시에서 1시사이 내 딸의 늦은 귀가에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곤 했다. 채 현관까지 들리라고 소리치며 누워 손을 흔드는게 고작이었다.
"왔어!
뭣 좀 줄까?"
대답은 늘 "놉"으로 정해져 있었다.
단지, 마중 가는 엄마는 못되어도, 자지않고 기다린다는 표시가 다였다.
내일 입시설명회를 간다는 것을 알릴겸 12시가 다되어 안오는 내 딸을 집 앞 쌈지 공원에서 기다렸다.
"내일 학교 가! "
딸은 간단히 말했다.
"엄마가 왜 가!"
이미 설명회 따위는 별 진학에 의미를 주지 않는
다는 주도면밀함이 묻어 나오는 말투였다.
하지만 그 말이 왠지 쓸쓸했다.
내 귀에는 딸이 하지 않은 말이 주석으로 달리며추가 설명이 덧붙여서 들려오는 듯했다.
자격지심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좋아져서 공립여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 잘다니는 줄 알았다.
예전처럼 임원 엄마가 학교에 갈 일이 없는 시절이 왔다고 생각했다. 근데 왠지 '지금껏
관심도 없더니, 직장다니느라 시간도 없더니 왠 시간이 나서 이제 학교를 간다고 하는 거지'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뜸금없이, 빵을 내려놓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는지도 모르는 내 딸에게 말을 건넸다.
"얘, 한 사람이 완벽할순 없어!"
성장과정에서 부친의 결핍이 언젠가 쓸쓸한 무언가로 딸을 덥칠까 우려스러움을 깔고 한 말이었다.
또, 그게 누구이든 다른 곳(선배,스승, 혹은 종교,철학등...)에서 채워 진다면 사람은 나름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채워줄 무언가를 찿게 되어 있다.
내가 이제와서 철학자 '스피노자'의 뜻이 크게 와 닿는 것처럼 말이다.
"너에게 뭔가 스승과 제자 외에 인간적인 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내 딸로부터 짜증를 내거나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늘 측은한 사람들 속에서 성장해 온 탓일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욕심보다 배려를 먼저 배운 아이였다. 늘 그게 미안한 마음이다.
알바 벌이로 유네스코 회비을 내고,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못봐서 육식을 포기한 비건이 되고 만 이이였다.
'피'가 연상되는 전쟁 소식이 나오면 나도 딸도 동시에 눈을 내리깐다.
지구촌 곳곳의 전쟁 소식에 미래의 일자리를 바꾸었다. 지인의 동생이 유엔에서 일한다는 말을 딸에게 한 적이 있다.
여고시절 토요일마다 보육원 봉사활동을 갔다. 지금, 영하 15도의 북극 추위가 왔다. 제트 기류가 이상기후로 늘어진
탓이다. 혹한에 우크라이나는 미국와 EU의 지원도 약화되며 지난한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보복성 전쟁을 하며 가자지구를 폐허로 만들고 있다. 전쟁을 못막는 유엔이 이미 딸에게 무의미해진 모양이다.
유엔에서 근무하면 어떨까하는 뜻도 접었다.
"얘, 4학년인데 ... 어째?"
딸은 다시 급하게 양손을 접어 허리쭘을 받쳤다. 골난 표정 짓기로 양볼을 부풀렸다.
"전쟁도 못막는 유엔은 이제 싫어! 행정고시 볼거야"
짧고 단호히 선언했다.
속뜻은 나도 모른다. 한 달전에 타국에서 외국인과 하는 언니 약혼식을 다녀오는 길에 물어왔다.
"내가 만약 춤을 잘춰서 댄서가 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을 거야?"
"글쎄다... 내가 너의 부모노릇을 잠시 하다 먼저 갈건데, 밥만 안굶는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싶다..."
사실, 사람은 하고싶은 걸 하면서 밥은 먹고 살면 최상이지. 라고 답했다.
자식이 넉넉히 살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내 딸도 나도 무리하지 않는 성품이다.
시작이 남보다 많지 않았다. 유일한 생존방법이 애써 배우고 멈추지 않을 것뿐이다. 내 딸도
이미 그 방식을 아는 듯했다.
" 다들 의전가고 로스쿨간데... "
딸은 의전가고 로스쿨 갈 학비를 지원해를 부모가 없는 것을 안다. 때문에 가장 빨리
취준생을 마무리할 행정고시 쪽으로 기운 것 같다. 응시용으로, 토익과 한국사 1급을 검정을
준비해 두었다.
다시 사과얘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내 딸에게 빛깔 좋은 사과를 대량구매해 푸석해질까봐 오래두고 먹으라고 하나하나 쌓아 주지 못했다.
내 딸의 아버지는 했다. 그리고, 내 딸에게 담임으로서 해줄 있는 한도내에서 애써 준 것 같았다. '구청 모험생 표창',
학업성취 표창등 아무 옵션을 부모가 해줄 수 없는 처지의 내 딸이었다. 스승겸 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그런 이유로 여고 졸업후 4년이상이 지난 지금도 일년에 두어번은 원서를 빌려 달라며 연락을 해 온다.
학문을 좋하는 선한 선비의 모습으로 연을 이어오고 있다. 흔치 않은 인연이다. 다음 6개월쯤 후에도 또 다른 원서를
내 딸에게 빌려달래고, 무엇을 보답으로 줄까를 궁리할 것만 같다.
내 딸의 아버지는 60대다. 곧 은퇴일 것이다.
예측건데 집에서 마지막 노년을 보낼 수 없는 시대가 왔다. 노인요양원에서 책을 볼 수 없을 때까지는 반복될 것같은
예감이 든다. 가끔 찾아 와줄 자식도 없다.
"샘헌티 잘 해라. 엄마 이벤에 어깨아프잖어. "
50견 초기증상이라 아는 병이라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너 행정고시 한다고 독립한 거 접고 안들어왔으면 어깨아파 옷도 못 벗고 자는 거 몰랐잖여."
딸이 집근처로 독립을 했다가 컴백홈을 한지 2틀후의 일이다.
딸은 몇해를 독립을 꿈꾸다 지난 봄 학기부터 독립했었다. 돈이 하나도 안남았다고 했다. 행정고시 대학4년하고 1년
더 2년간 해야한다고 핑계를 달았다. 집중하기 위해서 입시학원 알바도 관뒀다. 일요일에도 7시면 집을 나선다.
"아침 많이 주지마, 알아서 먹고 나갈께"
라는 정해진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딸이지만, 다시 자식 부양이 시작되었다. 느순해진 출근전 아침이 다시 딸의 밥상을
차리느라 다시 분주해졌다. '내 딸의 아버지' 같은 정신적인 의지처는 인생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그 것을 가진 딸이 부럽기만하다. 성장과정에서 내가 줄곧 갖고 싶었으나 구할 수 없었던 것중
하나인 대상이었다. 결국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때문에 뒤늦게 책을 통해 마음의 스승을 두었다.
'스피노자!' '참된 선(善), 최고의 행복,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철학적으로 추구했던 스피노자. 그는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직관적 체험을 존중하고, 전체론적 틀을 갖고서도 개체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며,
종교적 심성을 지닌 동시에 탈종교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진정한 철학자의 삶의 표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그'네이버 지식백과의 (인물세계사, 표정훈)설명이다. 그 외엔 자연을 가까이 하는 수밖에 없는 삶이
되어가고 있다.
내 딸은 사람 속에서 나보다 보다 나은 무언가를 채워가고 있는 것 같다.
내 딸의 아버지가 늘 건강하기를 바래본다.
첫댓글 그래요 더불어 함께 살아야할 세상에 마음 기댈 수 있다는 것도 동력이 되리라
잠깐 삶을 비춰보는 시간이었답니다..^^ 늘 강건하소서..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도 삶의 등불 같은 스승
님이 계셨답니다.
따님이 올곧게 잘 자라준
느낌이 듭니다.
당연히 어머니신 작가님의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도 사람 스승은 없습니다.
그게 살아오면서 가장 쓸쓸했던 한 대목
입니다.
다만, 이미 벌써 가신 스피노자 오빠가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온몸으로 자서전을 쓰신 어머니도 스승이요.
가난한 농부이지만 자식들 공부시키기 위해 평생을 애쓰신 아버지도 스승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유아 기관에 아이들도 스승이더군요.
형제들을 먼저 보낸 저로서는
위의 답 댓글이 아프게 다가서네요. ()
글치요~
나를 지탱해준 모든 사람들의
의지가 세상을 살게 해준 스승이겠지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