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이티 혹은 사이코 혹은 천재 ]
*24.2.7 세상풍경(김영주)
주말이면 구정이다. 2월 중순에 내려도 쌓이지 않고 눈꽃을 피우지 못하는 아쉬운 눈처럼 그를 보낸다. 그가 즐기던 유튜브 영역 무한대의 탐구세계로 놔두기로 한다. 또한, 그가 유년의 친구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강아지 누렁이, 인스턴트 믹스커피를 뜨건 물에 탄 색깔의 몸에 몇몇 커피 알갱이가 귀 끝에 묻어 갈색 빛인 누렁이와 머물도록 노텃치다. 그의 머릿속에 누렁이 강아지가 인이 박혀 있는지 나는 구체적으로는 모른다. 그가 퇴사하고 현재 두달째다. 한달쯤 됐을 때, 카프(카톡프로필 사진)가 수술실 초록 가운으로 바뀌었다. 이하 사진에 개복을 해 놓은 환자 사진과 대조적으로 그의 바가지머리 유년의 사진과 누렁이 강아지 사진이 추가 되었다. 그는 다소 엉뚱했지만 순박함이 있는 직진형 소년이었다. 나처럼 이 땅에서는 드문 사람의 유형으로 다소 정서적 안정감이 없는 44살인 소년 동료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와 단 한 달간 옆자리 동료로 지냈던 얘기와 오늘까지의 일을 적어본다. 그가 멈춰버린 유년의 세계에서 자신을 깨고 나와서, 자신을 가꾸고 그의 뇌 속에서 성장을 멈춘 채 끼고 있는 누렁이를 성견으로 키워나가기를 빌어본다.
지난 2달간의 시간을 거슬러 가면, 늘 그가 내 주변에 있었다.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다. 결국 9시 뉴스를 보면서 그에게 카톡으로 콜을 했다. 안 받는다.
일반전화를 했다. 사실 나는 음성전화를 즐기지 않는 콜포비아에 가깝다.
눈으로는 뉴스 자막을 쫓아가며 벨소리가 누적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뉴스에는 눈 내린 후에 타이어자국이 난 겨울의 질벅한 골목이 나온다.
폐지 줍는 할머니의 리어커 옆으로 눈길의 골목에서 갑자기 쓰러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음 장면은 카멜색 외투를 입은 동사무소 간호직원의 인터뷰가 나온다.
"출근길이었어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빨리 심장 기능을 회복시킬 심폐소생술을 해야 했기에..."
20대일까, 앳된 모습의 아가씨였다.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옷을 버리는데도 노인을 구했습니다! "
이제 심폐소생술이 일반화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도 독서실에서
옆에 취준생이 갑자기 의자 밑으로 스스로 떨어진 것을 옆 사람이 심폐소생술로 구했다.
그 사이 벨이 울리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그의 음성이 들렸다. 나중에 든 생각이지만 그도 나도 할까 말까 받을까 말까를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가 그만둔 지 벌써 2달째 접어든다. 나중에 알았다. 오늘 그는 하루 내내, 인간관계도 없던 병원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점심을 늘 같이 먹는 수술실 간호조무사 이 샘이 모르는 번호가 떠서 받았더니 P원장이었다고 했다. 부원장에게도 3번 전화가 왔다고 한다. 2달 전 퇴사 당일 그는 급하게 통보하고, 병원 관계자들의 전화를 차단한 것 같았다. 후에 옆자리였던 나에게는 몇 번인가 안부전화가 왔다. 일종의 자신이 떠난 후의 상황에 대한 탐색전 혹은 하소연이었다. 한동안 뜸해지더니 뜻밖에 지난 토요일, 생일축하 전화를 받았다. 3번 부재중인 그의 전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는 대단한 인간관계에 있지 않다. 그가 한 달 동안 옆에 있으면서 도가 지나치게 업무 외의 일로 말을 걸어 왔다. 그중에 홀연 고개를 떨구는가 싶더니, ‘저는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야 해요’라는 말을 말꼬리를 흐리며 한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먹성 좋은 다소 비만인 Y대 출신의 노총각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를 무시할 수 없는 어떤 시소처럼 흔들거리는 인간관계로 빠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는 현재 44세에 100키로 가까운 거구이다. 그의 생채기가 작은 볼류감은 아닌 듯 했다. 영혼에 난 상처는 대개 4살 이전의 친밀해야할 가족 간의 인간관계에서 형성된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주목해주고 눈을 맞춰 얘기를 들어주는 존재를 갈구하고 있구나 대번에 느껴 버렸다. 그가 숱하게 걸어오는 대부분은 업무와 무관했다. 다소 쓸데없는 얘기이거나 화제거리도 아닌데 너무 간헐천과 같이 갑자기 뜨거운 물줄기가 쏟구쳐서, 진흙뻘 속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가 마그마에 닿아 녹아 없어질 태세로 저돌적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으며 그가 전직 동료들에게 전화를 한 이유를 이 샘에게 들었다. 부원장한테 그가 취직을 못했으니 다시 가면 안되는 지를 물었다고 했다. 의외였다. 지난주 토요일 뜻밖의 생축 전화에서 나는 분명히 물었다.
“샘 지금어디세요?”
"네. 병원이요. 계속 놀 수만은 없어서...“
그만 모르는 은밀한 사실이 있다. 병원의 실권자인 부원장이 어느 날 수술직 후 급박하게 방으로 내려왔다. 들어오자마자 높은 톤으로 심상찮은 거친 어조로 내게 말했다.
" 샘! P원장하고 친하시죠? P는 사이코패스여요!
환자얼굴을 손으로 세게 밀치더니 아무 말도 없이 거칠게 매스를 대는 거예요. "
부원장의 메시지는 병원의 모든 사람이 알아들었다. 그 뒤 모두 그를 대할 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타업종에서 온 나는 다소 낯설었지만 이미 그들은 암시적인 메시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옆자리 M원장이 그만두고 그가 오기 전 2명의 의사가 지나갔다. 나 또한 피로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의외로 이직률이 높은 것과 큰 조직에만 있던 나로서는 동종 업계 내, 통상 1-2개월인 수습기간이 여기서는 최장 3개월이라는 옵션도 사뭇 낯설었다. 성형외과 원장치고 나이가 많은 편인 대표원장과 합이 맞는 부리기 쉬운 젊은 닥터를 구하기가 몹시도 어렵다는 것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이쪽은 빠른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첨단 장비를 갖추어야하면서도 인적 자원 중심의 업인 것이다. 이직의 결심은 대개 사람때문인 직종이다. 그를 다들 한 달짜리 페이 닥터로 짐작했다. 점점 아무도 정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보낼 사람이라고 흔적도 안만들 생각이것 같았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부원장이 외친, 사이코패스의 어원을 검색해봤다.
‘싸이코패스는 반복적인 반사회적 행동과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충동성, 자기중심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성격 장애 분류군입니다. 즉 감정 중에서 공감이나 죄책감이 결여된 겁니다. 출처: 네어버 (좀더햄복)’
그와 딱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감이나 죄책감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공감을 너무해서 과할지경이었다. 충동성과 자기중심성은 맞아 떨어졌다. 이런 식이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일본에서 지진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자, 지구에서 발생한 심한 지진 사례와 뉴스에서 보았을 법한 사진들을 수도 없이 검색해서 캡처해 내게 보내온다. 덧붙여 종일 지진관련 영화, 동영상, 전문가 해설, 그 외 재난영화 지구의 종말까지 과거 사례들을 유튜브 URL 주소를 수십개 보내온다. 신입 의사가 수술실에서 가능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열심히 찾아냈어요’라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소년의 얼굴로 그것을 보았느냐고 되묻곤 했다.
생축 전화를 해왔을 때, 그는 분명히 병원이라고 했다.
그 말은 타병원으로 취직을 했다는 의미이다. 그는 누가 봐도 고도의 비만상태였다. 성형외과가 아니더라도 건강해 보이지 않는 의사의 모습은 환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찬바람이 불자, 실권자인 부원장은 대표원장에게 Y대 전문의라는 이력만보고 급히 독촉하여 오도록 했다. 아마도 의사협회같은데 모집 공고를 냈는가 싶다. 부원장의 사이코패스 운운하는 것을 듣고 또 새로운 인물이 오는 게 피곤해진 나는 그에게 조언이랍시고 넌지시 말을 붙였다.
“샘, 건강이 우선인거 아시죠! 실력과는 상관없으나 성형외과다보니 외모를 문제시 하는 부분도 있어요. 저도 보톡스도 안 맞는다고 맨날 눈총 받잖아요.
저는 한국인 상대도 아니고, 재취업이라 아직 그만한 급료가 안돼서 못해요.
샘은 휘트니스 가서 PT도 받으시고, 꽁치통조림, 스팸같은 영어 잘하시니 정크프드인 거 알잖아요. 조리도 안 한 채 따서 컵라면 먹지 마세요. 우리 잘먹고 살려고 애써 일하잖아요. 와이프 생활비 준다 생각하시고 가사도우미라도 불러서 주2회 야채 반찬 잡곡밥만 드셔도 꽤 효과가 있을 거예요. 제 선배 중에도 원장님보다 수입이 훨씬 적어도 그리 사는 분들 있어요.“
그는 웃으며 듣고 있었지만, 실천할 기미는 없어 보였다. 그의 반응은 조리 안한
꽁치 통조림을 그냥 따고 햇반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으면 얼마나 저녁식사를 빨리
끝낼 수 있는지를 되려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가 별난 것은 숨겨질 수는 없다. 특히 식탐이 좀 별났다. 맛은 무관한 듯 했다. 양적인 포만감만을 철저히 추구했다. 또 한 가지는 스피드였다. 집에 도착해서 밥을 먹고 끝내는 데까지 채 10분이 안걸린다고 했다. 물론 나의 대답은
“컵라면, 통조림 그런 거 말고 급하지 않을 때는 잘 드세요. 운동이 힘드시면
하다못해, 쇼파에 앉아 복식호흡이라도 수십번하면 뱃살과 소화에 도움에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효과본 방법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는 입사 당일부터 택배를 시켰다. 패턴은 그가 유튜브를 캡처해 보내는 방식처럼 저절적이었다. 늦가을 귤이 막 나오던 시기였다. 몇 개 그의 자리에 놔주었다. 그 다음 날은 어김없이 제주산 귤이 박스채로 병원으로 배달되어왔다. 그리고 수십개를 책상에도 놓고 종일 먹었다. 눈 마주칠 때마다 ‘왜 안 먹느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편식도 심했다. 반찬 배달업체로부터 계란말이가 온 날이었다. 김치는 따로 주문하고 밥은 오전에 청소 이모가 해놓는다. 몇 종류의 반찬만 업체에 시켜 먹는 게 병원 밥이다. 한통(3인분)어치가 그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오후 3시경 갑자기 수술실에서 내려와 나에게 물어왔다.
“샘, 계란 말이 남았을까요?”
“맛있었어요? 그럼, 제가 곧 한번 해올께요! 반찬을 인원수대로 시키지 않아요.
산반찬 안먹는 이들도 있어서 6인분만 반찬으로 와요. 계란말이가 6개였으면 인당 1개씩도 안되니 더 드시면 아마 안 될 거예요.”
일반적인 페이 닥터와 직원간의 대화 소재는 딱히 아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계란말이 해왔느냐고 물었다. 내일이라고 못박은 게 아니였다. 쫓기듯 다음날 계란에 명란을 풀고, 파와 양배추, 버섯을 짠뜩 썰어놓고 해왔다. 아침에 창가에 둘 테니 드시라고 전했다. 점심시간에 보니 먹지 않았다. 왜 안먹었는지를 물었더니 까먹었다고 했다. 설마 그가 잊었을까싶다. 식탐이 많은 사람인데 그 후로 굳이 그의 말을 다 따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욜은 김밥을 먹는 날이다. 국물로 컵라면도 같이 먹으라고 했다. 당일 아침에 컵라면 한 박스가 배달왔다. 그답다고 생각했다. 리셉션 데스크에서는 사적인 것을 절대 못들이게 사사건건 참견이 많은 편이다. 원장이라고 많이 참아내고 있다고 느꼈다. 김밥을 2줄을 먹고 컵라면도 먹었다. 채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컵라면을 먹어야겠다며 내려왔다. 먹는 것을 생각할 때 그의 낯빛은 애처럼 환해진다. 행복해보였다. 그도 모자라 공복기용 철제통에 든 대용량 과자가 이어왔다. 그것을 먹으라고 둘 사이의 빈 책상위로 통을 종일 열어 놓고 한 주먹씩 먹어댔다. 자신이 먹을 때마다 내게도 먹으라고 채촉했다. 못이기는 채하고 1개만 집었다. 한 박스는 2,3일이면 바닥을 보였다. 직원들 배려용으로 1박스 추가 구매한 것은 아무도 손도대지 않는 채 탕비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차피 버려질 것 그라도 마저 먹으라고 옮겨놓았다. 청소이모님은 한마디 했다.
“ 샘, 부원장이 살 빼야 한다고 난리인데, 그걸 주면 어떻해요.”
안준다고 안먹을 그가 아니였다. 결국 입사 3주째 그의 수술복 허벅지는 터져버렸다. 대표원장이 그가 수술실에 있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바지가 터진 날 득달같이 내려와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있죠, 나한테 수술을 안 맡기고 자기가 다해요. 벌써 몇 번째예요.”
대표원장과 14년차 연령차로 그의 기술이 속도감에서는 더 최신일 수도 있다. 수술 장비는 7년이 노후 수명이다. 그의 눈에는 다소 낡은 장비들로 보였던 것 같다. 뭣이 좋고 뭣이 안 좋고를 가끔씩 내게 와서 말하곤 했다. 그때마다 지금은 샘의 의견을 반영하는 시기라기보다 여기 시스템을 지켜보다가 서서히 의견을 내고 바꾸어 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달래듯 돌려 보내야했다. 그도 내가 의료관련해서 많이 아는 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들어 줄 대상이 필요했다. 그것이 옆자리 나였을 것이다. 대표원장의 수술을 참관한 후에는 더 말이 많아졌다. 그것을 유튜브 캡처해 내게 보내듯, 소수의견까지 다소 보수적인 대표원장에게 하염없이 쏟아냈을 것이다. 뭔가 아니다싶으면, 풀 죽어 내려와 귓속말로 던져놓고 자리에 앉곤 했다. 걱정되어 쳐다보면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작은 방에 코고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거구의 배둘레 햄과 상하복이 만나는 접점에서는 얼마간 의 허연 살집이 삐져나와 자유롭게 숨을 옷 밖깥의 공기를 들이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그의 허벅지가 터져버린 수술복은 대체할 사이즈의 의복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낮 근무시간에 벤츠를 몰고 수선 집으로 향했다. 다녀와서는 짜집기를 해 준 세탁소 사장을 검색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건성으로 ‘장인처럼 보인다’고 말해 주었다. 그가 내게 도움을 준 것도 있다. 의학서적이라는 낯선 분야를 읽어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100여권의 PDF파일 전자 의학서적을 넘겨 주었다. 그가 준 서적 중에는 블로그에 쓸 만한 내용과 사진이 있을 거라 했다. 그리고 실제 나는 테마나 자료가 딸릴 때 눈을 씻고 찾아보고 자료를 만들고 있다.
그가 온 후로 심심치는 않았다. 집중을 해도 눈에 들어올까 말까하는 수술 장면의 핏덩어리 사진을 보며 걸리지 않는 낚싯바늘에 지식을 걷어 올리려고 바둥대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숱하게 말 걸어오는 그의 방대한 관심사에 영혼없이 댓구하면 금새 알아차렸다. 바로 옆자리로 쫓아와 내 마우스를 뺏는다. 굳이 수선 집을 검색해서 자기 터진 바지를 수선해준 곳이라며 네이버 지도를 켜 놓고 수선집 사장의 얼굴을 다시 보라고 곁에 지켜 서 있는다.
“아! 잘 하시게 생겼네요. 잘 수선되어서 이제 안심이겠어요.”라고 길게 댓구해야
비로소 제 자리로부터 물러나 돌아간다. 그리곤 다시 코고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병원은 심상치 않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병원은 닥터가 코골고 낮잠을 청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사실 있을 수 도 없는 일이다. 마치 폭풍전야에 잔 바람들을 무시하듯 그렇게들 그를 방치하는 듯 생각되었다. 데스크의 10년차 권력자들이 문 열어 놓고 있는 방안의 사정을 알 듯 도 한데 왠 일인지 간섭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그랬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어차피 몸담았으니 상담실장, 코디네이더 자격증을 땄다. 병원이라는 곳은 어느 조직보다 폐쇄적이고 명달 하달식이고 이직이 많은 곳임을 알았다. 더구나 권력1인자의 보좌관쯤으로 서울로 연고를 옮겨 재직중인 부원장의 절친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속속들이 모든 것을 꿰고 보고자로서 권력1인자 못지않은 강한 어조와 폼 새가 만만찮은 살벌한 인물이다. 그녀는 나보다 5살 연하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 닿을 때마다 나는 거꾸로 살고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나는 나름 자유로운 영혼이다. 비록 생계로 시간과 공간을 억압당하고 있으나 머릿속은 늘 광야를 달리고 있다. 창의력을 발휘하는 타인의 간섭이 적은 일은 집중력이 높다. 반면 단순작업에는 실수가 간혹 발생 있다. 살다보니 목숨유지 기간은 길어지고 자녀양육비는 증가하여 억압의 댓가로 월급을 받는 55세의 타 업종에 재취업해 있다. 여기 와서 제일 싫은 실은 살벌한 그녀들이 찍어 놓은 사진을 성명별로 정리해 하드디스크에 차곡차곡 보관해 놓는 일이다. 큰 병원이라면 이미 전자기록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아직 수기 챠트를 쓰고 있다. 수년만에 손님이 오면 권력 서열 2인자 그녀는 이방 저방에서 먼지를 털며 차트를 찾느라 바빠진다. 나의 단순 업무는 가끔 나를 그들과 부딪치게 만든다. 고객의 차트를 찍고 사진을 찍어야 그 사람과 수술명을 알 수 있다. 매번 챠트 없이, 한 줄 메모없이 찍힌 사진이 30명에 육박한다. 수술 타임테이블을 찾고 사진 속성으로 찍힌 시간을 맞춰도 보톡스 필러 등 대단치 않은 시술은 환자 사진이 절대 없다. 사진만 있는 유령인물들의 이름을 반드시 찾아내야 사진이 연옥을 떠돌지 않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그녀들은 간단히 말한다. ‘차트 찾아 보세요.’ 그런 식이라 나는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이유로 떠안은 업무 중에 이 일을 해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속이 뒤집어 지고 전두엽에서 아침 눈떠서부터 전율 느낄 때가 있다.
물론 그들이 할 수 없는 업무 영역인 외국인 접객과 상담, SNS마케팅 자료 제자 관리는 엉뚱한 것을 하고 있어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늘 뭔가 견제가 등 뒤에 따라다닌다. 텃새라고 해야 할까... 영어권이나 중국어권 손님을 떠넘기며 ‘능력자야’라고 한다든가, 그들이 당연히 해왔던 진료확인서 외국어 버전을 단지 자기들보다 타이핑이 빠르다는 이유로 내게 넘긴다. 방법은 없다. 해주는 수밖에... 사소한 일들로 부딪치면 결국 화살은 내게 꽃히고 그들은 서로를 호위한다.
그 외 마땅히 해야할 것도 하려하지 않고 ‘직접 하세요, 혹은 못해요’라고 뭉개버린다. 때문에 외국어와 컴퓨터 활용능력을 갖춘 대졸자들은 그들의 폭거에 못 이기고 급하게 짐을 싸서 내빼기 일쑤였다. 때문에 내가 왔을 때에도 업무 인수인계없이 바로 투입되었다. 떠나는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수술 장면을 보기 어려워요’라든가 하는 포장을 덧씌우기도 했다고 한다. 3인방 공신녀들이 천하인 셈이다. 데스크 즉 손님을 맞이하는 리셉션에서 10여년 근무한 선임자들은 마치 내명부처럼 서로의 편과 적을 두는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업종의 특성상 폐쇄적이고 이직률이 높은 것도 작용하겠지만, 그보다는 특정인의 권력남용으로 모두 움추러든 것처럼도 보였다. 예를 들면, 출근을 시작은 첫 주 토요일 경의중앙선이 토요일은 15분-20분 간격임을 몰랐다. 다급히 들어오는 나에게 권력2인자는 대뜸 눈을 부라리고 말했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라고 했다.
“아, 죄송합니다. 차 간격이 20분인지 몰랐어요.”
라고 했더니 그녀의 응대는 ‘핑계대지 마시고...’하며 눈알을 굴리고 입술은 창끝처럼 나를 향해
돌출되어 있었다.
그런 반응은 32년 직장 생활 중에 처음이었다.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 트집이 되어 그 후에도 공격을 하였다. ‘노력하겠습니다’는 부정적인 대답이 아니다. 그리고 노력했다. 토요일에 늦은 것은 그것이 끝이었다. 그들에게는 소통이라는 것은 없어 보였다. ‘예스와 노’라는 두 가지 폐쇄적인 응답만 요구하였다.
한번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느닷없이 그녀가 쳐들어 와서는 화장실 문을 열고 소리쳤다.
“아니, 오만대 물을 튀기고 말이야. 당장 닦으세요. 다음부터도 다 닦고 나오세요.”
그녀가 나가자. 멀리서 데스크의 여인(동갑네기. 나보다 5살 연하)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 일이야! 아니, 이모가 자주 화장실 청소를 할 수 없잖아. 그래서 좀 닦고 나오라고 했어.”
그 뒤로 나는 마법에 걸린 듯 나도 모르게 손을 씻을 때마다 주변을 훔치고 나오고 있다. 그전에 정말 나 때문에 물이 튀었는지 쓰기 전에 사전 스캔을 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서로 청결을 유지하자는 예방 차원이라면 도움을 요청하는 말투로 해야 했다. 그러던 중 그가 내게 도움을 주었다. 이 병원에서 처음이었다. 그가 오기 몇 주전부터 나는 머리가 아침마다 터질 듯 전두엽에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앞서 언급한 수술환자의 전후 사진 정리 때문이었다. 어느 날 문득 부원장이 말했다.
“선생님 사진을 취미로 하셨다면서요.”
그날은 데스크의 실장이 카자흐스탄에서 온 복부지방흡입 사진이 문제였다. SNS마케팅용으로 쓸 사진이었는데 환자 자신의 연보라 속옷을 그대로 사진에 노출했기 때문이다. 급한 대로 그 사진을 트위터 홍보용 제작물로 만들었다. 그후 나는 사진
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창의력을 발휘하는 일 도중에 바쁜 때라 하루에도 수십변씩 그들에게 불려나가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일일이 지적받고 그들은 웃고 있었다. 자신들의 일은 줄어들고 선임 노릇은 제대로 할 수 있던 터였다. 결국 나는 업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단순 작업이고 사진 찍힌 형태를 알 수 있어서 SNS 홍보용 사진을 발췌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메모리를 옮기고 나서부터 문제가 불거졌다. 챠트를 찍지 않아 누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도 모를 사진이 매번 30명분이상 나왔다. 인과관계를 따지면 데스크의 선임자들이 업무를 제대로 안한 것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려 내가 말한다면 ‘뭔 짓이에요. 똑바로 하세요!’ 라고 해야하지만, 나는 지적을 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어도 그들 내명부 여인들은 협조적이지 않은 처지였다. 작은 조직이 가족적일거라는 환상은 착각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오랜 세월 데스크와 업무 충돌로 심적 벽이 높았던 수술실 사람들이 내게 호위적이었다는 것이다. 병원사람들 모르게 대표원장과 매일 머리를 맞대고 10년 수술을 같이한 실장이 나와 회식해야한다고 카드를 갈취해서 회식을 두어번 시켜주었다. 공식적으로 1년이 다되어도 어떤 회식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들고 날 때도 찬바람이 불었고 고용했던 부원장은 일찌감치 종적을 감추었다.
그러던 중 그가 왔다. 사진을 찍은 원인 제공자들에게 한가한 틈을 타 가서 몇 명씩 물어 보고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챠트 찾으세요’로 싹뚝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중 엎친데 덮친 컴퓨터가 먹통이 되는 날이 왔다. 1500장 정도의 사진을 불러오는데 조립한 지 5년이 지난 컴퓨터를 쓰고 있었다. 포토샵 작업이 부하가 걸렸나 싶었다. 엉뚱한 사진이 해당 사진으로 로딩되거나, 두 개의 다른 사진이 겹쳐진 형태로 오버랩 되버리거나 잘려 나간 일부 조각 사진이 불러질 때도 있었다. 다른 자리로 오류를 해소하러 옮겼다. 차즘 스트레스는 고조되었다. 이런식이면 ‘못해먹겠다’ 그래도 아직 부양할 아이가 ‘너는 참아야해’를 파도타기 했다. 작업 중일 때, 부원장의 절친인 권력2인자인 그녀가 지나다 보았다.
“거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네, 컴터가 안되서 사진이 안 불러지거나 오류가 나네요.” 했더니 그녀의 말이 엉뚱한 말이 날라와 꽂혔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머리에서 화신이 폭파했다. 심장에서 흘러내린 마그마가
모든 장기를 뒤덮어 타버렸다. 그리고 나는 죽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평생 누구로부터도 들은 적이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난주 결국 나는 권력1인자인 부원장에게
다른 보고차 들어갔다가 불어버렸다. 그때는 컴터 얘기는 생각이 나지 않다. 데스크
사람들의 말투가 사뭇 낯설고 어렵다고 말문을 텄다. 그로인해 부원장은 스트레스 쌓인다며 3인이 불러 서로 해결하라고 자리를 떴다. 그 자리에서 2인자는 말했다. ‘장난이었다’고... 그녀는 내가 인사해도 받지 않는 터였고, 자신은 누구에게나 인사하지 않기 때문에 고칠 생각도 없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나와 장난할 사이는 아니라고만 생각된다. 그리고 컴터 업체를 부른 것은 업무의 어려움을 보고 있던 그가
대학때 컴터 동아리에 있었다며 그가 선뜻 컴터를 열도록 했으며 DM메모리라도 업그레드 하라는 사전조사로 사비로 샀고, 그 것을 설치하기 위해 수리업체를 불렀다고 실토했다. 그녀들의 반응은 매우 간단했다. ‘자기가 필요해서 한 거니까...’그걸로 끝이었다. 사실 그들은 모르는 뒷얘기가 있다. 옆자리로 업무 상황을 본 그가 말도 없이 DM메로리를 택배로 주문했다. 4GB를 두배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도록 8GB 정품을 2개나 샀다. 컴터동아리라더니 급히 컴터 커버를 열라고 하더니 강한 힘으로 밀어 넣고는 수술실로 가버렸다. 하루 종일 메모리를 갈고 작동되도록 고군분투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조립용 컴터 회사에 AS를 요청했다.
데스크 사람들은 2인은 닥터P와 내가 방안에서 한일을 모른다. 다만 멋대로 .컴터를 해체해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물어내라고 했다. 개인용도 아니고 병원 일을 잘하자고 한 것이니 반반씩하지고 제안했다. 선뜻 내가 반반을 제안하자 까칠한 2인자 그녀가 그냥 해본 말이라며 번복했다. 물론 메모리 업그레이드 차 컴터를 열었다는 말은 당시에 하지 않았다. 수리업체가 왔을 때, 그녀는 처리속도 개선비가 30만원 든다는 소리를 듣고 오늘날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 그 일로 그는 내게는 입사이래로 처음 도움을 준 유일한 수호천사가 되어 있었다. 그 댓가로 나는 그의 무수한 쓸데없는 유튜브를 아무 말 없이 보지 않고 덮으면서 저지하지도 않았다. 상부상조라고 생각했다. 닥터는 1달 수습기간이다. 일반 직원은 3개월 수습기간을 거쳐야 정직원이 된다. 동종 업계 내에서도 여기는 최장기간 수습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고 나도 왔다. 이미 퇴사를 마음먹은 터라 돌이키지 않았다. 적어도 1년은 살아남아야 55살 나이에 입사도 어려운 정직원을 타이틀을 잃지 않을 것이었다. 그 힘으로 그가 올 때까지 존버(졸라버팀)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후에도 나는 대략 순조롭게 컴터 사용을 하고 있다. 그의 덕분이었음에 틀림없다. 때문에 이따금 그가 이직을 성공했는지를 묻지 않고, 그가 떠난 자리에 누가 왔는지를 탐색하는 질문에 내가 ‘아직 닥터 못 구했어요.’라고 응대를 해주고 건강하라고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런 연결이 이렇게 2달씩 주기적인 그이 전화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를 기억해 본다. 한번은 그의 먹부심(먹는데 욕심부리는 것)이 데스크 10년차 여인천하들은 못마땅했을 것이다. 어느 날은 변기가 막혀 사단이 났다. 목소리 큰 청소이모는 하루 종일 그에 대해 말했다. 다음날 그는 변기 뚫는 도구를 서 너개를 사비로 사다가 4층 수술실 층과 3층 리셉션 층에까지 완비했다. 휴지통이 작다며, 종일 말을 흘리더니 택배가 왔다. 내 앞에서 박스를 뜯었다. 헐, 공중화장실의 파란색 휴지통의 검정 버전이었다. 권력 2인자는 그냥 집에 갖다 두라고 했다. 절대 통과 될 리가 없는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선생님이 필요하면 갖다 쓰라고 했다. 나조차 필요없었다. 전철로 환승해서 통근하는 내가 그
크고 검은 것을 들고 갈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나면 다이소에서 작은 것을 사다 놓겠다고 그를 위로했다. 그가 나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의 휴지통을 사지 못했다. 그 때가 그가 온지 3주차였다. 한 달이면 그가 어찌 될지 모르는 터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후 출근길에 전화가 오는 경우도 있었다. 바로 받는 경우는 없다. 경의중앙선에서 4G LTE는 가끔 먹통이거나 3G로 변환되기도 한다. 그보다 대략 콜포비아인 나는 군중 속에서 출근 혼잡 속에 소음을 만드는 일을 못한다. 그가 머물던 마지막 주에 접어 들었다.
"원장님! 여기 아파서오는 환자들이 아니고 돈 쓰러오는 사람들이잖아요.“
그가 유튜브 주소를 캡처해서 보내기 시작한 후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날이었다.
10살이나 어리나, 의료핵심 인력인 신입 원장이니 출근길 부재중 전화를 못 본척할 수가 없었다. /
이태원 단골 카레집 얘기를 나에게 꺼낸 날이다. 나도 가끔 해먹는다고 하는 순간
서울에 있는 모든 인도 음식점 유튜브나 맛집, 먹방, 인도 춤까지 온 세계 정보를
캡처해서 인도 카레 댄스까지 78개쯤 보내왔다. 나는 휴대폰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2시간 간격으로 평균 수신 정보를 확인한다. SNS 마케팅 자료를 포토샵으로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창작이라 몹시도 피곤했다.
“선생님, 이리 와 보세요!”라고 몇 번인가를 불러 세웠다.
그를 상대하느라 업무의 흐름이 끊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더 띄엄띄엄 그가 보내 온 유튜브를 확인하는 식으로 그날이 저물어 갔다.
소식자인 내게 컵라면 먹으라는 선심도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감사해요. 저는 인스턴트 라면 먹으면 종일 트름해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컵라면 잘 안먹어요.“ 토욜 김밥 먹는 날은 현미국수, 보리국수 안 튀긴 컵면 가져오는데, 하나 드릴테니 드셔보세요."
의사라 원장님 직함을 붙이고 말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가 보내온 정보의 홍수를 단순한 그의 습성으로 생각할 뿐 더 이상 공감할 여력이 없었다. 그도 그에게 비호의적 분위기를 나를 통해 극복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나마 웃는 낯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그의 머물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감지할 때였다. 업무와 무관한 그의 정보 투척에 결국 어느 날은 그에게 의사표현을 했다.
"저, 원장님! 정말로 중요한 정보만 하루 하나나, 둘 정도만 보내셔도 괜찮아요."
'네'라고 하는 그의 목소리는 톤다운 되었다. 부원장은 그가 머리는 좋아서인지 눈치는 겁나 빠르다고 했다.
마치 뭔가 칭찬받으려고 벌인 일로 들떠있던 소년이 뜻밖의 거절을 당해 속상한 아이의 눈빛 같았다. 그뒤로 다행인지 유튜브 캡처해서 보내오는 건수가 70대에서 하루 20대 숫자로 떨어졌다. 나도 점점 피로감이 쌓여왔다. 왜냐하면 그가 보내온 숱한 정보를 내가 보지 않는다는 것이 카톡에 표시가 된다. 그런 날은 괴물 같은 대왕문어나 이티 같은 상상의 징그런 우주생물 유튜브를 보내 오기도 했다. 일종의 시위나 해코지같았다. 그러다가 떠나는 날의 전날이었다.
그가 몇 번인가 커피믹스를 타 마신 얼룩이 컵의 가장자리에 말라있던 컵을 불쑥
나에게 내밀었다.
“샘, 이거 청와대에서 받은 거예요. 샘 갖으세요.”
마치 소중한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가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이미 2개의 큰 컵을 쓰고 있던 터라 웃으며 침묵으로 거절했다. 그는 다으날 끝끝내 그 컵을 주고 갔다. 컵을 씻어다 그와 나사이 빈 책상이 서랍장 위에 두었다. 데스크의 권력2인자는 그 것을 보더니 ‘당장 버리세요’라고했다. 탕비실로 갖다 놓았더니 청소이모님이 결국 버렸다. 물론 사적인 물품을 버리라마라하는 것은 권력의 남용이란 생각이 들었다. 병원의 미화와 위생이라는 면에서 봐도 구석진 방에 원장 2명과 나만 있는 공간이다. 더구나, 개인 업무자리에 놓인 물품까지 그녀의 간섭으로 치워져야 마땅한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다. 구성원들은 대부분 그녀의 까칠함에 시달리는 게 싫어서 마지못해 따른다. 그쪽이 지내기 편하기 때문이다. 부원장은 그녀가 시집을 안가서 그렇다고 치부하나 나는 태생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제는 결국 그의 카톡을 차단했다. 이글의 도입부에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하던 날의 얘기다. 그가 구성원 이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하던 날 부재중3통이 떠 있었다. 이 글의 초입에 썼던 그날이다. 한 참 전화를 안 받던 그가 받았을 때 매우 무기력한 목소리였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듯한 맥없는 소리가 상대에게서 들려왔다. 한참을 얘기한 후에야 다소 밝은 톤으로 개선이 되었다. 낮에 이 샘이 말한 재출근 여부를 물었다는 얘기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통상의 안부를 서로 아주 정중히 주고받았다. 건강 챙기고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한솥밥 먹은 식구의 마음가짐으로 마무리 했다. 그의 카톡을 차단하기 전, 그가 보내온 마지막 유튜브는 어느 술집골목의 영상이었다. 플레이해서 보지는 않았다. 타이틀은 ‘흥청망청쓰다 보니 이자 낼 돈이 없네’ 라는 영상이었다. 먹자골목에 한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그는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개업의 3년하고 페이 닥터로 일하면서 서초동에 아파트는 샀다고 했다. 선볼 여성들의 사진을 3m쯤 떨어진 옆자리에서 휴대폰 화면을 돌려가며 내게 비춰주었다.
“요즘 여성들은 다 예쁘죠”
라고 건성으로 응대하며 컴퓨터 작업을 했다.
“대표원장이 여기서 일하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했어요.”
라고 덧붙였다. 고액 벌이의 의사의 겉모습과 달리, 최고의 엘리트 들이 모인다는 강남의 성형외과중 한 곳이다. 전현직 의사 모두 이혼남이었다. 대표원장도 수년을 홀로 지내다가 얼마 전에 새살림을 차린 모양이었다. 그가 오기 전, 전임 닥터는 내가 입사 후 비수기인 6월에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40대였다. 노총각인 줄 알았다. 수술실 이 샘이 아니라고 했다. 그도 이혼남이었다. 의사 필수인력 부족으로 곧 의사단체의 대대적인 파업이 선언될 것 같다고 뉴스가 나온다. 의전출신이라도 대개 지역의사로 남지 않고 너도나도 성형외과 의사로 전환해버리는 추세이다. 3:3 여기는 임금이 많은 닥터도 3명 이혼남(2명 작년 재혼성공)이고, 급료가 1/10도 안 되는 여성 근무자들도 이혼이거나 독신녀로 삶을 중이다. 비혼족도 일반화 추세이니 이혼족도 이제 낯설지 않다. 서로 견제하고 작은 일로 방어하며, 생을 이어갈 뿐이다. 그가 보내온 마지막 유튜브처럼 ‘이자낼 돈이 없다’라고 해도 경제적으로 차원이 다른 노동자인 내가 그의 불안정한 현실(정신적, 물질적)을 언제까지 들어주기는 어렵다. 시간을 견디며 생을 이어가는 일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참 강인해져야 일이다. 온전히 자기 몫인 것이다.
그를 떠나게 했던 그들이 위에 적은 3자 대면 테이블에서 그들의 행적을 언급한 죄로 이번엔 나를 내뱉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의 비만과 엉뚱함을 꼬투리 잡던 그들은 줄곧 내 나이를 쥐고 흔들었다. 그때마다 적응기니까 하며 참아냈다. 지난주 줄근 길에 인사를 건넨 것을 튕겨 낸 여인천하 내명부 2위와 3위를 나는 끝내 최고
권력자인 2인자의 절친 부원장에게 언급했다. 그녀는 대부분 믿지 않았다. 며칠 전 에는 밥 친구 수술실 이 샘에게 업무로 극단의 감정 기복을 데스크 3위가 드러냈다. 이샘이 분해서 잠을 못자겠다고 새벽 3시에 문자를 보냈다. 수술실 이 샘은 연변출신의 중국인 가이드였다. 꼬박 이틀에 걸쳐 권력 서열 2위와 3위는 데스크에서 짬만나면 수술실 이 샘을 씹었다. 2위는 3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걸 가만히 두냐.
너두 똑같이 새벽에 분하다고 문자해버리지"
이 샘은 이렇게 말했다.
"갸들은 과정은 다 없어. 지들에게 기분 나쁜 결과만 있지"
그 이틀 후 구인 포털 ‘사람인’에는 나를 대체할 외국어 가는 자, 이 샘의 대역인 지 결원인채 1년이 흘러가는 간호조무사, 그리고 데스크 권력 서열 3위의 보조역일지 그녀의 대신일지 모를 상담코디 모집 공고가 올라왔다. 마감일로 보아, 설 명절후 법적 고지일 한 달의 여분을 채울 요량인 듯 직감할 수 있었다. 공고가 나간 이후로 여인천하 3인의 태도가 다소 나근나근해졌다.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태도와 말투였다. 입사 시에 하기로 했던 업무와 무관한 것 때문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깨지고 야단맞아도 당연히 받아들인다고 부원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1인자와 2인자는 주종관계이나 고향 절친이었다. 누가 누구를 버릴 수 없는 공존관계로 추측이나 탈세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은 서로 더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 침입자를 배척할 것이 뻔하다.
잠시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사라졌다. 그들이 존재하고 살아온 방식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유롭게 수업다니다가, 평균 수명이 길어져, 청년 1인이 노인 서너명을 부양해야하는 인구절벽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벌이른 놓는다해도 예전처럼 부모를 부양하는 청년은 사라지고 있다. 이웃 나라에서 백발의 노장이 택시기사이던 것을 의아해 생각했으나 지금은 우리도 그렇다.
어자피 일을 해도 인생역전도 안된다. 생명유지일뿐. 되려 점점 속이 편해지고 있다. 32년 벌이로 이만큼 와 있다. 여기서 밥벌이 고작 1년이 되어간다. 또한 면접시 부원장이 월2회 해외 출장, 외국인 환자 1인 재방시 추가수당도 구두로 언급하고 서류로 명문화하지 않은 채 어떤 것도 실천되지 않고 있다. 월 줄장 2회는 외국에 살고 있는 딸을 만나는 차비의 절약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선뜻 응했다. 그들은 포장하는데 기교가 뛰어나다.. 사실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것 내탓일지 모른다. 사람은 제가 원하는 것만 보고 객관적인 사실을 간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사 당시에
텃새와 갑질로 떠난 직원은 데스크 2위 3위로 고용노동부에 부친에 의해 고발이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컴터를 다룰지 모르니 타이핑을 내게 시켰다. 그 당시 내게는 그만둔 사람의 원인만을 문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100만원 보상으로 중재되었으다. 지금 돌아보면 술 주정뱅이가 결혼하면 술을 절대 안마시겠다고 꼬셔서 결혼 후 매일 술마시고 주사로 살림을 깨부순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다 어른’이란 프로에서 양재천이던가 정신과 교수가 나와서 말한 게 생각이 난다. 모든 사실은 그대로 있었다. 문제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특성 때문에
변한게 아니고 못본 거라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전임자가 짐싸서 뛰쳐나간 똑같은 이유로 갈등하고 있다. 그도 떠났고, 다시 기웃거리는 곳에서 내뱉어질 나는 탐색 전화가 달갑지 않게 되었다.
밤 10시 5분에 마지막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그도 나도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다. 그들은 돈벌이라는 한 가지 욕망의 시선으로 선과 악을 가늠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나 나보다 강력하다.
어제도 아침부터 밤까지 4통의 그로부터 발신된 부재중 전화가 떠있었다. 나는 그의 혹시 모를 우울증의 증폭이 궁금하긴 했다. 그의 전화를 받지 말라는 수술실 이 샘에게 말했었다.
“있잖아요. 뭔가 이상한대, 나한테 어머니 보다 자신이 빨리 죽어야한다고 말했을 때, 그냥 마음을 열었어요. 혹시 모를 때 전화라도 누가 받아주면 피해 갈 수도 있잖아요.“
꿈보다 해몽이었을까. 때문에 그가 알고 싶어 하는 정보를 전화가 아닌 대면으로 해소해 줄 목적으로 한번 이번주 퇴근길에 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지금 멀리 있어요.’ 라고 응대해 왔다. 그러니까 24시간 무음인 내 휴대폰에 지속적으로 부재중 전화를 만들어내고, 카톡에 유튜브를 보낸 진짜 이유는 떠난 직장의 탐색전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출근길에 마지막 문자를 남겼다. 엊저녁 10시 이후 새벽 12:24분에 ‘자요?’라는 문자가 추가로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인에 올라온 공고사진을 캡쳐했다.
그 아래에는 ‘구정에 어디 가세요?’ 라고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자를 남겼다.
“저도 요새 병원서 안좋은 상태라...그동안의 갑질과 텃새를 얼마간 부원장에게 말했거든요. 수술실 이 샘도 데스크 실장과 한판 다퉜고. 그 담날에 바로 구인 광고 띄우더라구요. 여기에 미련 갖지 마세요. 그들은 사람을 돈 버는 도구정도로 생각해요.
또 구하면 되는 물질과 동급. 내부고객만족이 업력이 된다는 경영마인드 부재.“
그가 10시 30분경 수신확인은 한 것을 보았다. 그도 나도 다시 생명유지를 위해 자기 길을 가야한다. 어디선가 또 광활하고 낯선 대지에서 유목민처럼 먹잇감을 쫓아 떠돌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 온다. 밥 친구 수술실 이 샘도 공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내게 남겨준 의학서적중 한글판 50권 수술도구 관련 책을 2권을 PDF파일로 복사해 주었다. 종일 그가 내게 남겨준 유산인, 의학서적 100권 중에 오늘은 [안와주위 미용성형 해부]라는 책을 읽으면서 블로그 게시물 자료를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오타가 난 문자가 와 있다.
24년 2월 7일 오후 4시 55분
“전환되세요!”
첫댓글 이 사회의 어둔 한 단면을 본듯 ..그 속에서 자마다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부림 ..
배설에서 오는 정화과정으로 읽고자 했다오...부디 잘 견디소서...읽는 내내 왜그리 답답했는지...ㅎㅎㅎ
감사합니다.
단편소설 읽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읽고 싶었던
것 같아요.
긴 글 쓰시느라 애쓰셨어요.
힘든 시간 끄집어 내는 일은
더 쉽지 않으셨겠지만요.
긴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일터가 바뀌니까, 발생하는 일들이
다 소설같아요.
즣은 일만 가득한 명절되세요.
이제 소설가 하셔도 되겠습니다
잘 쓰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