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글이니, 그냥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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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남자들 ]
*세상풍경.24.2.15
2시간 기준으로 그녀는 소주 2병, 나는 생맥주 1잔이 주량이다. 그녀는 직장의 유일한 술친구다. 그녀는 주로 자신의 남자들 얘기를 남과 공유하고 조언을 얻는 걸 좋아한다. 그 해소의 대상으로 인연이 길지 않은 나를 그녀가 택했다. 프리랜서인 그녀는 한 직종에서 최소 30년 경력의 베테랑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돈도 없이 불쌍한 남자들만 잘 꼬시는 찌질한 연애대장이라 칭했다. 내가 보기엔 아니다. 그녀는 일도 연애도 거침없는 전문가다. 때문에 그녀는 개원이래로 병원을 자유로이 들락거리면서 이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청소이모 다음으로 최고 연장자이다.
63세인 그녀는 현재 59세 한국인 베트남 사업가와 사귀는 중이다. 그 외 오빠라고 부르는 한두 살 많은 유럽 쪽 투어 가이드와 썸 타고 있다. 가이드 오빠하고는 카톡 합이 잘 맞아서 수다만으로도 재미지다고 한다. 애인이 있다는 것도 그에게 밝혔다고 했다. 그녀의 가이드 오빠는 시차가 다른 유럽 출장 중에도 새벽부터 톡이 온다고 한다. 가칭 ‘대표’ 베트남 사장하고는 실제 연애가 진행 중이다. 그 외에도, 그녀 말로 정말 보고 싶지도 않은 남자가 1명 더 있다. 수년전 이미 끝났는데도 월 30만원씩 용돈을 보내오는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한번인가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대형 커피숍 책임자하라고 말했다는,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70대를 만나러 가며 ‘나 어때. 괜찮아’를 물어 온 적도 있다. 그녀는 반만 은퇴한 프리랜서 코디네이터라 언제 병원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일단 오면, 업무를 보며 틈틈이 내게 온다. 주로 그 주에 대표 혹은 가이드와 밀당(밀고 당기는)하며 겪는 정서적인 혼란에 대한 상담이나 쓸쓸함에 대한 하소연이다. 오래된 직원들은 그녀를 외부인이라고 경계를 놓지 않고 있다. 그녀를 어떤 이는 먹잇감을 물고 오는 어미 새처럼 여긴다. 그 나이에 품위가 없지 않은 존재라 했다. 경계심이 없는 내게는 유일하게 할 말, 안 할 말없이 다 털어 놓은 사이라고 그녀가 내게 말했다.
처음부터 친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를 강렬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건 어느 날 점심때였다. 밥 먹는 테이블에서 한 주먹 약을 꺼냈다. 입자가 작은 알약 하나를 톡 깨서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여성호르몬이야!
이거 없으면 구실을 못해. 선생님 남자하고 한 번에 몇 번씩 위에서 뻑뻑
갈 수 있어. 대표가 그래서 나한테 간 거야. 네가 가슴이 커서 너무 좋대.”
그녀는 참으로 외향적이다. 자신감이 넘쳤다. 거침없는 성품을 타고난 것처럼 보였다. 대략 10살 가까이 어린 나한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말하곤 한다.
그녀와의 두 번째 치맥은 1월 마지막 불금이었다. 새빨간 앙고라스웨터에 뽕이 불룩한 베레모를 쓴 자신의 사진이 이쁘지 않냐고 휴대폰을 들이댔다. 카프 사진으로 뽀얀 사진과 빨간 스웨터 사진 중 뭣이 좋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아들이 한 집 살땐 뽀샵으로 가끔 수정해준다고 했다. 내 컴퓨터는 늘 포토샵 프로그램이 켜져 있다. 사진을 보내보라고 했다. 환하고 활기차고 맑게 그녀의 사진을 수정해 주었다. 성형한 불규칙한 쌍꺼풀 라인도 자연스럽게 바꾸니, 그녀는 ‘너무 완벽하다’며 아주 좋아했다. 그리스 신화의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처럼 자신의 이미지에 반한듯했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주었다. 퇴근 전 그녀가 치맥하자며 꼬셔왔다. 일부러 빠른 퇴근을 위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방 밖에서 ‘샘, 뭐해 같이 그만 갑시다.’라고 소리를 내었다. 나는 나서지 못했다. 근속 1년도 안되어서 다른 직원들 눈치 때문이다. 톡으로 먼저 가 계시라고 보냈다. 7시 딱 되자마자 그녀에게로 갔다. 나는 술을 잘 못하는 편이다. 억울하게도 한 달 전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위험으로 ALT 33(40이 최고치)이 나왔다. 평소 영양 보조제를 그 닥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어지럽고 때론 아주 미세한 울림이 심장 언저리부터 갑상선에 걸쳐 감지될 때가 있다. 방송에서 끌리듯 글루타치온을 샀다. 술도 못하는 내가 간경화나 간암으로 간다면 참 어이없는 꼴이 되는 격이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입천장에 붙여 녹여서 복용하고 있는 지 며칠 되었다. 나중에 들으니, 청소 이모 말에 의하면 그녀는 소주5병까지는 아무 변화가 없다고 했다. 주량이 최강인 것이다.
엊그제 부원장은 나를 두고 말했다. 샘은 대기업에서 대학에서 다져지고 다져져 겉으론 온유해보이나 속은 차돌같이 단단한 사람일거라고 했다. 그냥 태생일거라고 해뒀다. 이쯤해서 내 MBTI를 밝혀둔다. 친구가 보내온 톡으로 해보았다.
중재자라고 나왔다.
‘ 중재자(INFP)는 언뜻 보기에 조용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마음을 지닌 성격입니다. 이들은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뛰어나며 몽상을 즐기는 성격으로, 머리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합니다. 또한 음식과 예술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나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빠르게 알아차리곤 합니다.
중재자는 이상주의적이고 공감 능력이 높으며,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원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전체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성격이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거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때가 있으며, 자신의 독특한 강점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방황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혈액형으로 아침형 저녘형으로 사람 유형을 분석하는 게 유행이었다. 그나마 몇 년 전부터 유행인 MBTI가 와 닿는다. 특히 마지막 줄 '자신의 독특한 강점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방황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에 상당히 공감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과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연륜 때문인지 방황은 나만큼 보이지 않는다. 돈과 남자 두 가지로 압축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대로 본다(’어쩌다어른‘/정신건강의학과. 양재진)’고 한다. 그녀의 남자들이 그녀의 마음 상태에 따라 이래 보이고 저래 보이는 것은 그녀가 기대한대로 그들이 움직이지 않아서 인 것 같다. 사실은 그녀는 까막눈이다. 그녀의 남자들도 그녀를 통해 일상에서 채우지 못하는 결핍을 채울 셈으로 그녀
곁에 있을 뿐이다. 그녀 때문에 달라지거나 할 사람들은 첨부터 아닌 것이다.
최근 그녀는 거침없이 상태를 탈탈 털어 놓았다.
"샘, 나 요새 풀이 확 죽었어. 안돼. “
나는 입가에 미소만 띠면서 듣고 있었다.
“베트남 출장 간 대표랑 몇 번씩도 배위에서 몇 번씩 뿅뿅간다 그랬잖아.
근데 아예 안 돼. 거짓말 같은데 정말 안돼.“
정말일까 그녀의 자신감이 온데간데없이 풀이 확 죽은 채로 말했다.
“근데, 대표가 몰라. 처음에 내가 막 잘해서 믿고 있는 거 같애.
근데 인제 못하겠어. "
그녀가 시선을 기울여 뜨며 대표와의 자신감 넘치는 얘기를 한 지 반년도 안 됐다. 마치 정력을 자랑하며 여성 몇 명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사내의 여성버전처럼 보였다. 그녀를 통해 이성에 대한 욕망이 삶의 에너지라는 것을 그 때 실감했었다. 60이 진작 넘은 장년여성이 성욕을 대놓고 말하는 이는 사실 드문 게 현실이다.
"벌써요. 음... 남녀의 끌림 지속기간은 1년 반은 호르몬분비로 유지된다든대요."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너무 매너 있고, 나한테 용돈도 100만원씩 주고 배려있고 다 좋은데...
어떻하지. 아직 대표 눈치 못 챘거든"
대표를 만나서 신나있을 무렵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방흡입으로 볼과 턱선을 갸름하게 정리한 뒤로 ‘왜 이렇게 남자들이 꼬이는지 모르겠다’며 동시다발로 꼬여든다고 했었다.
"제가 전에 친구가 제게 말해준 섹파와 연인의 차이 얘기했었죠...
연애는 똑같이 하나 섹파는 책임감이 없는 경우이고, 연인은 상대의 인생에 책임감을 갖는 경우라고요."
그녀는 끄떡거렸다.
"대표는 이사님에 대해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장점은 솔직함이다.
"그래, 나에 대한 책임감은 없을 거야. 유부남이니까..."
그녀를 보면 내가 잘 못 살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어찌 보면 현실적인 롤모델일 수도 있겠다. ‘유부남은 No! 담배피면 뽀뽀 못해 사절. 취미는 같아야해’라는 최소한의 단서를 못 버리고 있다. 내 나이 55세다. 곧 64세인 그녀 입장에서는 까마득히 젊고 좋은 때라고 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가끔 찌릿한 통증으로 안다. 노화가 닥쳐오고 있다. 한 동안 무위자연으로 캠핑 다닐 꿈을 겨울동안 잠시 꾸다 말았다. 결핍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 성장기에 결핍된 무언가를 사람은 꼭 채우고 가는 법칙이 있는 모양이다. 하다못해 ‘지랄 총량의 법칙’도 있다고들 한다. 사춘기, 청년기를 부모말대로 착하게 살아온 아이는 성년 후 혹은 중장년 기에도 바람을 피든, 사기를 당하든 꼭 그 양을 채운다고 한다. 그 탓인지 꿈에서 소리쳐도 내 안에서만 맴돌고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예전에 가끔 꾸었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나도 내가 모르는 어떤 에너지에 이끌려서, 그 힘으로 내가 스스로 움직이고 싶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버리지는 않고 있다. 아니면 세상에 대한 견문을 실컷 누리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주로 나는 TV에서 뉴스 외엔 ’한국기행, 세계테마여행, 자연인, 걸어서 세계속으로‘만 본다. 2월 늦은 눈이 강원도에서 설경을 이루었다. 어디선가 들은 듯 한, 문구인데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동백 꽃길에 너와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하지만 점점 ‘이번 생애는 포기했어.’라는 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가... 주3회 프리랜서로 나오면서 올 때마다 그녀의 남자들로 희노애락이 그녀 주위를 휘몰아친다. 들어주고 맞장구 쳐주면서도 ‘그래도 이사님은 나보다 나아요!’라고 끝을 마무리해야 한다.
설 명절 전날이었다. 퇴근시간이 1시간 전쯤 그녀가 목소리가 들렸다. 방으로 들어오더니 다급히 나를 피부실로 끌어 들였다. 거기에 대표가 누워있었다. 귓속말로 좀 있다 늘어진 쌍꺼풀 라인을 교정하는 눈매교정술을 하려고 데리고 왔다고 했다. 어서 얼굴을 보라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샘, 여기 레이저 15분 끝나면 또 연장하면 되는 거죠?“
가짜 질문을 만들었다. ‘네’라고 하고 나왔다.
따라 나온 그녀가 ‘쉿’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시늉을 했다.
“지난번 사진 보여주셨잖아요. 거의 똑같은데요.”
그녀는 들떠 있으면서도, 뭔가 그에게 고백을 해야 할 싯점이 온 듯한 예감이 들었다. 얼굴에 잿빛 안개가 끼어 있었다. 대표를 애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가이드 오빠는 알고 있었다. 그 의식으로부터 가이드 오빠는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새벽녘에 유럽으로부터의 카톡에서 한 번씩 그녀를 떠보는 모양이었다.
‘아니, 새벽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을 하고 삐지기를 반복 한다고 했다.
“그건 말이에요. 합이 잘 맞는 수다 친구 같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라서 소유욕이 있을 거예요. 친구로 절대 만족 못할 거예요. 이제 꽤 시간이 지났잖아요. 그러니 ‘나’이니 ‘그 대표’니 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돌림 말 같아요.“
“남자는 자재할 뿐이지, 업무로 만나도, 친구로 만나도 결국에는 상대 이성에 대한
소유를 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는 법이거든요. 드러내냐 안드러내고 흘러가냐의 차이일 뿐이죠.“
그녀는 사실 영업이 역할이라 주장보다는 수긍도 잘한다.
“샘은, 어떻게 그렇게 사람 심리를 잘 알아. 나는 가이드랑은 얘기를 하면
너무 잼나. 근데 안쓰럽고 하니까, 자꾸 내가 돈을 내게 돼. 근데 절대 거절 안한다. 대표는 가이드처럼 내가 쉽게 연락을 못해. 연락 올 때만 만나지...왜 아무도 없다가
한꺼번에 둘이 나타난 거야. 속상해 정말.“
추측이지만, 만약 그녀의 남자들이 그녀 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녀는 곧 누군가를 또 만들 것이다.
“저는 무조건 이사님 편인 거 아시죠?
한 분은 대화상대로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으로 가고, 한 분은 연애로 가고 하면 좋은데, 한 사람이 완벽할 수 없거든요. 참 이상적이긴 한데 어느 한 쪽이 결국 균형을 깰 거예요. 그때는 ‘시절인연’ 어차피 지금껏 없던 인연들이었잖아요. 아무도 없었던 것보다는 지난 한해 뭔가 살만했잖아요. 흐르는 강물처럼 가다가 때가 돼서 마음의 소리에 집중해서 그대로 가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아요. 머리로 생각해서 섣불리 뭔가 결단을 내버리면 나중에 눈물 나요. 시간이 얼마 없잖아요. ”
한마디 덧붙였다.
“이사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가도 돼요.”
사실 그렇다. 시간이 얼마 없다. 그녀에게도 나에게도. 그녀의 남자들 이야기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뭔가 장작을 때고 있는 것 같은 불의 기운이 느껴질 때라곤, 그녀가 자신의 남자들 얘기를 할 때뿐이다. 그것이 우주의 에너지구나를 실감 한다. 나는 그녀의 가이드 오빠도 보았다. 햇살이 따스한 초겨울이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나타난 그녀가 그날도 그를 앉혀 놓고 내게로 왔다.
병원에 딱히 볼 일도 없는 날이었을 것이다.
“샘, 창가에 좀 멋 부린 남자 앉아 있어. 그 오빠야! 가서 살짝 봐.”
외국어를 하고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남자라고 했다. 그녀와 첫 번째 치맥을 하던 늦가을에 그녀는 나와 둘이 맥주 한 잔 하고 있다고
굳이 나와 치킨 접시를 사진 한 장에 담아서 그에게 보냈다. 서로 카톡만 보내도 웃음이 나던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마치 연인들이 시시각각 무엇을 하는 지 보고해도 모자르고 채워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 같았다. 그녀가 보여준 대표 사진은 수더분하면서도 소박한 쪽에 가까운 중년 남성이었다. 가이드는 유럽을 무대로 뛰는 사람이라 뒤태만으로도 중후한 멋스러움이 있어 보였다. 일단 옷을 입는 색감이 달랐다.
‘샘 봤어, 봤어’ 재촉하는 그녀의 말에 끌려 뜬금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는 가이드가 있는 창가로 향했다. 손님용 원두 기계에 괜히 컵을 놓는 척 만지작거리면서 곁눈질로 그의 측면 얼굴을 힐긋 보고는 얼른 들어왔다. 다수를 끌고 다니며 접객 이 업인 가이드는 대표와는 전혀 다른 류의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녀와 썸이 끝나가는 관계의 흐름이 닥쳐오고 있었다. 가이드의 푸념이 잦아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시차가 유럽으로부터의 카톡에서 ‘왜 자꾸 화를 내냐’고 다그쳤던 모양이다. 가이드가 그녀에게 보낸 톡을 내게 내밀었다.
“샘, 이게 무슨 뜻 같애? 헤어지자는 얘기지.”
'왜 아침부터 종일 일해야 하는 사람에게 이런 톡을 보냈냐는 투였다'는 것이다. 가칭, 가이드는 그녀가 머리를 자르고 변신을 꾀한 것에 대해 직전 만남에서 아무 언급도 아는 체도 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심 없냐고 자신이 얼마나 잘해주려고 애쓰는데 몰라준다고 그녀가 투덜댔다고 한다.
"그게, 개그맨들이 남은 웃기면서 집에서는 웃지 않고 웃기지도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가이드도 여행자들에게 친절하고 유쾌한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하는 일종의 감정절제 노동자라고 생각되어요. 때문에 친근한 사람들까지 여행지에서 하듯 어울린다고 멋지다고 비위맞추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요. 다른 방식으로 대우받고 싶은 거 아닐까요? 수당 없는 연장근무인 셈이지요. 이사님을 통해서 그냥 정서적 휴식을 원하는 것일 거예요.“
그녀는 지난여름, 절친과 떠난 유럽여행에서 세련되고 재치 있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 후로 가이드와 얼마간은 고객과 가이드로 사후 친근감을 다져 온 모양이다. 대표와 자유로운 소통이 어려운 제한된 관계로부터 가이드는 시공을 초월한 카톡 수다로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온전치 못한 상대로부터 느꼈던 결핍감을 채우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분을 섞어 반죽해서 딱 반으로 나누면 이상적인데...
그러니까, 이사님은 자기 자신에게 100% 만족하세요? 60년 생판 모르던 남은 오죽하겠어요. 얼마간 나를 쳐다봐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어서 그때만큼만 행복감이 있는 거겠지요. 사람은 평생 1%도 바뀌기 어렵대요. 지금 어렵다고 느낀 모습도 있었던 건데, 내 필요 때문에,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봐 온 것 뿐 이래요. 자신이 늘 느끼는 결핍감을 타인에게서 언뜻 보고는 확장해서 그게 그 사람의 전부인양 편리한대로 착각하고 있는 거지요. “
그녀도 대표에게 없는 살가움과 유머가 그에게 있어서 그것만 보인 것이다. 그러나,
가이드에게서 대표가 후하게 그녀에게 하듯 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다. 때문에, 가이드를 언급할 때마다, ‘불쌍하게’라는 수식어를 꼭 붙였다.
“남녀는 서로에게 존경심이 있어야 오래간대요. 이사님이 측은지심을 가이드에게 갖고 있잖아요. 그건 사랑은 아니에요. 공정하게 나와 동일한 선상에 두고 보고 있지 않은 거예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줄곧 가이드는 이사님이 애인이 있는 여자라는 의식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여행 고객으로 시작한 관계가 몇 달 수다로 이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냐 그 사람이냐’를 결정해주기를 바라면서 삐졌다 풀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분도 자신과 내적 싸움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행갈 때마다 많은 유혹이 있지 않겠어요.."
그녀는 맞다고 했다. 가이드로 유럽에 나갈 때마다, 말을 섞는 젊은 여성들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이만 나오면 그녀는 왠지 풀이 죽는다.
대표는 용돈을 주니까 이어지는 거라고 인정했다. 더 잘 안 챙겨 주면 서운함을 느낀다고 했다. 가이드는 장날 찾아 가서 국밥이나 먹자고 한다고 한다. 자기 아들은 유럽서오면 고급 레스토랑 데리고 가서 사 먹이고 해서 서운함이 크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대표와 가이드가 서로 교대로 유럽을 나가면 대표가 베트남에서 들어오는 패턴으로 겹치지 않아서 지금껏 시소타기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피아노도 잘치고, 외국어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해서 끌렸는데,
맨날 내가 팔짱 먼저 껴야하고 이쁘다고도 안 해.
마음이 점점 멀어져. 곧 정리할거야."
나는 가만히 웃었다. 그동안 그녀는 분주했다.
"근데, 갑자기 두 명이 사라지면, 이사님 상실감이 허전함이 크실 텐데요."
지난주, 설 전날 그녀가 왔다. 대표에게 중년 눈 수술로 눈 위아래를 싹 정리해 줄
모양인 것 같았다. 고주파 관리실에 대표를 눕혀놓고 내게 와서 말했다.
"샘, 대표는 나보고 그동안 베트남 오지를 여기저기 다니느라 연락도 못했대.
내가 머리 자른 것도 이쁘고, 핑크색 인조 펄 그 옷도 넘 잘 어울린다고 했어.
많이 보고 싶었대."
나는 계속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의자를 젖혀 듣고 있었다.
그리고, 설 연휴 마지막 날 밤늦은 시간이었다.
내가 뽀샵해 준 빨간 스웨터의 그녀로부터 톡이 와 있었다.
"쌤! 참기름 넘 감사합니다."
"긴 시간을 같이 못 했지만 나의 얘기 들어주고 아무도 모르는 나의 남자 보여 쥤고 비밀 지켜 주세용."
그리고는 줄을 바꾸어 이어졌다.
"근데 난 어제 대표와 오래 못가요
어제 얘기 했고요ㅜㅜ"
마지막에 눈물 두 줄로 끝을 맺은 문장은 곧 그녀에게 다가올 이별에 대한 예고 일 것이다. 그녀는 내게 이성에 대한 열정은 우주의 에너지임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눈앞에서 보여 준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들에 대해 얘기할 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하와 같다. '메마른 땅에서 갑자기 지하수가 터진다. 모래 먼지 풀풀 날리던 사막이 갑자기 야생화 꽃밭이 된다.
극한의 동토에서 온천이 터져 김이 난다'는 환영을 낯빛으로 사방에 뿌려대었다.
연휴가 끝나고 얼마간 그녀의 기 빠져서 풀죽어가는 모습을 마주해야한다는 불안감이 몰려온다. 2월 아직추운 겨울바다의 해무처럼 뇌리에 퍼지며 짠내가 나는 느낌이다.
"올 한해 더 행복하시고 하고자픈대로 다 하세요.
대표에게 미리 얘기할 필요는 없었는디요..
대개 남모르는 자기편이 필요해서 애인을 두고 싶은 걸 거예요.“
한 줄 더 남겼다. 내가 늘 하던 말이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냅 둬 보삼... 절대 비밀 사수!"
첫댓글 그리스인 조르바가 왜? 떠 올랐을까?
막힘 없는 흐름의 필력...그녀가 영주님이 되고 내가 되고...
이성으로 살기 보단 감성으로 살기를 원했으나 그개 더 힘들었다(헬만헷세의 데미안 서문에서)
그녀는 사람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글 쓸 때만 억압과 견제없이
온전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어디서 그렇게 말이 나오는지요
정말 대단하신 문장력입니다.
뜻은 간단명료한데 어쩜 그리 말을 만들 수 있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러시니 대통령 상까지 받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오랫만에 뵙습니다.
그렇게 봐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늘 세상에 대한 책임과 의무때문에
시간도 의식도 자유롭지 않으나,
글 쓸때는 해방된 자유감을 느낍니다.
남 눈치보는 시선 없이 혼자 쓰고
지워도 되니 그런가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요.
우와거미몸에서거미줄이나오듯줄줄입니다.엿보듯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건강하시고앞으로도좋은글부탁드립니다.
오늘의 기록이 시간이 흐른 뒤에
추억이 되지 않을까싶습니다.
다녀 가시니 감사합니다.
그녀의 남자들
끝까지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MBTI 가 저랑 똑같네요
중재자...공감하는 부분이
여러곳 있었지만
정말 대단하셔요 그녀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속으로 생각하시고
개인적으로 거침없이 멋지고 알찬 인생
후회없는 사랑 이겠지만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일때만 가능한 일
같아요...저라면 ㅎ
소설같은 한편의 수필을 만나게 돼서
감사드립니다.
긴 글에 머물다 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