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 나는 외로워요! ]
*세상풍경(김영주). 2024-3-12
"언니 나는 외로워요!“
그 때 그녀의 목소리는 모래폭풍 속의 바람이 갈기갈기 찢어져 흩어지는 것 같았다.
이 글은 3년 전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서정문학에 게시했던 시 ' 비엔나 소시지와 귀리밥'이라는 시를 쓰게 된 계기를 준 그녀에 대한 회상이다. 이후 그녀는 스스로 잠적했다. 아주 적막한 곳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방식으로 스스를 존재시키고 보호하는 것만 같다. 지금도 안타깝지만 그녀에게 닿을 방법이 없다.
“언니는 인본주의고 나는 신본주의라 우리가 너무 달라 공통점이 없어요.
지금은 언니를 놓을 수 없어요."
그런 그녀를 떠나왔다. 그 후에도 한동안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나는 외로워요’라고 SOS를 했고, 누군가 손잡아 줄 때 한 번쯤 끌려와야 한다.
그녀는 죽어라 스스로 친 울타리를 붙잡고 나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비혼족이다. 결혼이 외로움의 피신처는 아니다. ‘언니 나는 외로워요‘라는 말은 한국의 중위 연령대 46.1세('24년)의 비혼 족 인구의 급증과,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지천일 것으로 예측된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을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중장년에 돌입하다보니 생긴, 정서적 상태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배우자가 있어도 외로움은 떨쳐지지 않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는 지인들도 많다.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대처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분위기 속에서 덩그러니 놓여있는 성인들이 많다는 얘기가 된다.
그녀의 가느다란 외침이 잠자려고 누우면 비 오는 날의 찻소리가 이중창을 넘어오듯 파도소리처럼 고막을 울려왔다. 그녀의 유년으로부터의 상처는 폐가의 먼지처럼 심장에 켜켜이 쌓여 있었다.
“열아홉에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당뇨병으로 오래 투병했는데 줄곧 아버지와는 싸우는 모습만 보고 자랐어요.”
날숨이 성대를 긁고 나오는 너무나 쉰 목소리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어서 병원을 다닌다고 했다.
밖으로 내어지를 힘이 없는 듯했다. 온 몸의 힘을 몰아서, 한 모금의 소리를 외부로 내고는 다시 끝없이 가라앉았다.
"그 후부터 나는 사람을 가슴 속에 두지 않았어요. 네 속엔 하느님만 있어요. "
그녀의 ‘그 후부터’란 그녀의 아버지가 새장가 간 후를 말한다.
"나를 버렸어요. 아버지가...“
그녀는 산사태로 도로로 굴러 떨어진 돌덩이처럼 그렇게 50년의 역사를 내게 띄엄띄엄 굴려 놓았다. 응어리진 심정을 품고 화석이 된 마그마덩어리를 한 덩이씩 고체로 풀어 놓았다.
아버지가 살림을 차린 평창으로 어느 날 갔다고 한다. 그날 사단이 났다.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새어머니가 ‘그녀’인지 ‘새엄마 자신’인지를 선택하라며 아버지에게 악을 썼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손을 내저으며 ‘다시는 오지마라’했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그 일로 그녀는 더욱 움추러들고 외부로부터 자신을 차단할 성을 쌓았다. 자신의 여린 살을 다치지 않기 위해서 굴 껍질처럼 스스로의 체액으로 단단히 굳혀 가고 있었다. 그녀는 여태 자신의 얘기를 타인에게 꺼낸 적이 없다고 했다. 동시에 언젠가는 운명적으로 자신을 꺼내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단지, 지금은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고 스스로 마련한 자신의 신인 것이다.
“언니도 여기를 그만두면, 다른 곳으로 떠나서 곧 멀어질 거예요.
언니는 나와 다른 넓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낯설어요."
때는 11월이었다. 21년 2월부터 닥쳐온 코로나가 어느새 겨울 문턱까지 점점 몸집을 불려대며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도 외국어가 전공이었다. 외국어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어졌다. 설마 설마하며 어영부영 봄, 여름, 가을을 보냈다. 가장 노릇 때문에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벌이를 찾아 나온 참이었다.
"남들이 하지 않던 얘기를 나에게 해 주는 언니를 아직은 놓을 수 없어요."
그녀는 주술을 거는데도 탁월했다. 한 달 근무후 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50살 먹은 그녀가 내가 떠나는 날 예언처럼 내게 주절주절 한 말이다. 어떤 안타까움에 내가 묘하게 구속이 된 듯 했다. 뜻밖에 퇴사를 앞두고 내가 누군가에게 일시적으로 중심에 선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이 어떤 날은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처럼, 어떤 날은 비행기가 낮게 나는 울림이 되어 환청으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1년 가까이 코로나로 실업상태였다. 그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의 얘기다. 지금은 아무도 코로나를 얘기하지 않는다. 그 실체가 사라진 걸까 인간이 잘 막은 걸까 가끔 의아스럽다.
지금껏 지구에 닥친 여러 고난이 있었다. 그나마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 전쟁과 굶주름이 없었다. 코로나 사태는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꾀나 많았다. 단 한 달이었지만 견디다 못해 취업을 했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여대에서 외국어를 전공했다. 그녀는 좀 독특했다. 무슨 큰 일이 난 것처럼 카톡을 주기적으로 접근이 안되도록 바꾸었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게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회피하듯 ‘대화상대 없음‘이라고 리스트에서 사라지곤 했다.
나에게는 회사에서 마주칠 때 새 카톡에 연결해 주었다. 경험 치겠지만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거나 자신을 숨겨야 하는 사연이 분명히 있었다. 내게도 한 두 번은 사전에 알렸다. 고립되어 어딘가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기술이 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쳐 둔 울타리 속에서 더는 다른 것을 꿈꾸지 못하도록 세상과의 절교를 택한 사람으로 보였다.
반면, 나는 그녀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넓은 세상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했다. 일리도 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미리 무엇을 선언처럼 말하거나 정하지 않는 태도가 나에게 있다. 시간이 다가오는 대로, 그때그때 자신을 속이지 않고 오감에 충실하려는 태도로 시간을 맞이했다. 스스로에게 충실하려는 의지이다. 살아오면서 뜻밖의 높은 파도는 늘 닥쳐왔었다. 눈앞에 파도를 넘고 다음을 이어가는데 제법 익숙해져 있을 지도 모른다. 매순간 힘들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섣부른 지레짐작으로 오늘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욜로족까지는 아니다. 먹고 살고 살림을 치닥거리 하기도 내일은 내게 너무 먼 미래였다. 일단 잠들고 해가 떠야 내일이었다. 눈 앞에 버거운 일조차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하지 않는다. 그런 예가 있었다. 40대 초반에 학생들과 간 중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춥고 비 오는 날이었다. 천문(하늘문)을 오르는 계단 앞에서 너무 까마득해서 한걸음도 옮기지 않고 천문산을 내려 온 적도 있었다. 그후로 다다를 수 없는 높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 눈앞에 놓여있는 한 계단만 쳐다보며 오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양한 천문 앞에 와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철저히 오감에 충실하고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태도를 습득하게 되었다.
[ 처음 그녀를 마주친 날 ]
그녀를 처음 마주친 날이 기억난다. 퇴근길 화물용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21년 봄부터 6개월 실업급여를 다 소진했다. 코로나는 끝나지 않았다. 더더욱 폭발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엄격해졌다. 기업은 더 많은 돈을 코로나 예방에 써야했다. 먹고 살자고 업종을 바꾸었다. 겨우 구한 정규직이 영업이 아닌, 금융업 고객센터였다. 세상에는 불만이 많은 사람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중에 들으니, 목소리를 잃어가던 그녀는 특별히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가입 후, 고객 만족도 조사 업무에 배정을 받았다고 했다.
보완으로 모든 게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거기에 비대면이라는 사회적 요구가 추가되었다. 본인 업무 외에 고객 정보 항목을 열어 볼 수 없는 폐쇄성이 있었다. 자리를 뜰 때마다 컴퓨터를 잠금으로 해놓고 일어나야 했다. 그게 귀찮아서 가능한 한 화장실도 가는 횟수를 점점 줄이게 되었다. 감염 예방으로 모든 휴지통은 치워졌다. 티백을 벗긴 차 포장지 하나도 버릴 곳이 없었다. 종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퇴근길에 화물용 엘리베이터 칸에 들러 버렸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르자, 그녀가 거기 있었다. 보통은 야구공 던지듯 쓰레기만 날려 보낼 생각으로 다리 한쪽을 문에 괘고 열곤 했었다. 대개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사람이 있었다. 그녀였다. 엉겁결에 나도 좁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에는 모든 활동에 제약이 따랐다. 1인 1석 한 방향으로 놓여있는 책상은 좌우로 칸막이가 되어 있었고 한 자리씩 뜨문뜨문 비워 두었다. 점심도 한 칸씩 간격을 두고, 한 방향으로만 앉아서 먹어야 했다. 최악의 거리 두기가 연일 호소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일상을 빼앗았다. 낯선 누구와 살갑기가 쉽지 않은 때였다. 화물칸 엘리베이터 앞의 그녀는 의외로 나를 반기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엉겹결에 따라 웃었다.
뇌가 첫인상을 인지하는데 17초가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17초 만에 인연이 되었다.
우리 앞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17층이네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댓구했다.
“네, 운이 좋아요.”
바로 왔다는 뜻이다.
“새로 오신 분이신가 봐요.”
"네, 일주일이 지났어요! "
“입사 동기 있어요?”
"아들 같은 스물여덟이던가 청년이 있었는데, D센터로 옮겨 갔어요."
듣자 하니, 그녀는 이미 6개월이 지난 근무자였다. 코로나 전에는 다 한 곳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밀집도를 낮추기 위해 한자리 씩 공석을 만드느라 사무실을 얻어서 인원을 분산시킨 모양이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들어올 때 우리 앞 기수 57살 먹은 경력 많은 언니가 있었어요. 지난주 한 청년과 들어왔었는데 투입 3일 만에 그만두었어요.”
"아~ 그럼 나처럼 외롭겠다..."
처음 본 내게 그녀는 외로움을 언급했다. 코로나라는 시절때문이었을까...!
“우리 시간 맞으면 같이 밥 먹어요.”
서로 밥을 마주보고 먹어서도 안 되는 시절에 밥을 언급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년에는 종로에 연탄아궁이가 있던 개량 한옥이었다. 할머니가 학교 갈 시간에 맞춰 1인상을 4번이나 차리듯 그렇게 2021년 10월에 가족 수대로 따로 따로 밥상을 차리고 있던 때였다.
그녀의 스타일은 어딘지 익숙한 복고풍이었다. 두발자유화(81년도)이전, 언니가 했던 단정한 중학생 단발머리 같았다. 멋 부린 데라곤 단발머리에 약간 갈 빛이 도는 것 뿐이었다. 흰색 셔츠에 청바지, 겉옷은 영국식 레인코트인 가을 카멜색으로 머리색과 동색계열이었다. 간결함 그 자체였다.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화물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다. 입꼬리 각도를 유지한 사교적 미소를 접었다.
귀가를 위한 겉치례 인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집이 어디세요?"
그녀가 물어왔다. 지하철로 통근하는 경우는 빌딩 지하로 가서 연결통로로 역 개찰구까지 내려가기 마련이다.
"전철로 한 정거장 길가가 집이라 쭉 걸어가요."
의외였다. 그녀 집도 가는 길이라고 했다.
“어, 저도 연남동 쪽이라 가끔 걸어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어느새 곁에 붙어서 걷고 있었다. 다소, 기운 없는 듯한 표정인 그녀였다. 소녀같은 살가움이 있었다. 나중에 그녀의 집은 연남동이 아니란느 것을 알았다. 두정거장을 더 간 신촌역 부근임을 알았다.
“언니는, 좀 배운 사람 같아요.”
"그래요? "
고작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초면이었다.
“아까, 말투에서 느껴졌어요.”
"아~"
“저는 D여대 영문과 나왔어요. 올해 오십이에요.”
"오! 젊어 보이는데... 아무 말 안하면 30대 후반같아요"
"나는 53이에요. 애를 37에 낳았어요. 몇 해 더 벌지 않으면, 애 인생이 달라질까봐
일하는 걸 멈출 수가 없네요. 고2라...
최소 2년은 더 버텨야 해요.“
묻지도 않는 사정 얘기를 했다.
“여기, 나이 든 사람들은 고학력자들이 많아요...”
"그래요. 글찮아도 나이 들어 일자리 줄어드는데, 코로나까지 와서..."
나처럼 늦둥이로 일해야 하는 또 한 인물이 떠올랐다.
"아까 말한 3일 만에 관둔 언니도 S여대 나와서, 외국에 있었다고 했어요.
퇴직금으로 1억 받아서 통장에 넣어 두어댔어요. 애가 이제 중2라던가..."
사실 그녀는 통장의 퇴직금을 자신의 앞날을 수호하는 무사인냥 처음 본 나한테
떠들었었다.
"나도 외국어 계열이라 갑자기 코로나로 일 나갈 데가 없어졌어요.
여긴 4대 보험이 되니까, 아이 키우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은데,
국민연금이라도 받아야 덜 미안하겠다싶어서 가입 개월 수 채우러 나왔어요.“
사실 그랬다. 남들은 애써 키웠으면 됐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장례비까지 남겨 놓고 죽는 게 선진국형이래요."
사실, 방송에서는 국민연금 고갈을 가끔 언급한다. 농담처럼 흘렸지만, 사실이다. 집 팔아 유학 보냈고, 자사고 보냈더니 코로나로 2년째 인강이었다.
부모 부양과 자식 부양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 베이비붐 세대이다. 내가 속한 세대는 부모를 제 삶의 중요한 일부로 부양의 의무를 지닌 사회상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자식에 대한 교육과 부양은 더 가중되었다. 자식은 제 삶을 쪼개어 부모를 돌보지 않는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조부모는 가족이 아니라는 통계치(부양의 대상)에서도 나왔다. 한국 전쟁 후 힘든 시절을 보낸 베이비붐 세대(전후1950~1964년생)는 그래도 부동산이 호황이었다. 더러 운 좋게 빚을 내서 투자하는 것도 유행이었다. 6개월 이상 몇 년 버티면 살림이 두둑해지고 팔자피던시절도 있었다. 개인이 이룰 것이 적어지고 있다. 때문에 직업도 부모를 대물림하는 편이 월급보다 낫다고들 다시 세습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유학비로 보험 든 실비보험마저 빼고 다 해약했다. 세습할 직업도 아니다. 무엇도 자식으로부터 회수할 길은 이제 없어졌다. 그냥, 제 좋아서 낳고 제 시간을 이 땅에서 쓰고 가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미 써버린 젊은 날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곧 다가올 노후는 민폐를 끼치지 않는 혼자의 몫으로 마감되어야 한다. 딸이 귀국해도 너른 집에서 다 같이 모여 몇날 며칠이고 먹고 자고 할 공간도 없어졌다. 자식 욕심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생명에 대한 측은함이 있을 뿐이었다. 그 탓인지 나는 지금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하는 습성을 지내게 되었다. 지나간 과거를 후회도 안한다. 다가 올 미래에 대한 걱정도 안한다. 필요치 않은 것도 욕심내지 않는다. 지금 최선을 다해왔다는 자기만족에 의지하여 살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일직부터 나도 그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나름 빠른 깨달음이 온 것은 40대 중반을 넘긴 직후이다. 외국어 강사를 하고 다니던 때였다. 68세에 자아실현한다고 수업을 나오던 김여사 덕분이다. 그녀의 딸이 나와 대학동문임을 우연히 알았다. 영국에 어학연수로 나가 일본계 회사에 취직 후 시민권을 얻으니 30대중반이 되었다. 그녀는 늘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그녀의 남편은 백구두를 잘 신었다고 한다. ‘여자는 또 구하면 되지’라는 말을 흘리고 사는 남성이었단다. 보험설계사하며 딸을 외고보내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냈다. 그 후 그녀의 딸은 일본계 회사에 영어 잘하는 사람으로 알바를 얻었다. 그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보은으로 처음에는 월200만원씩 생활비를 송금해 왔다고 한다. 시민권을 얻고 서른 중반이 되어 몇년 만에 귀국했다. 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엄마 나 곧 마흔이고 이제 중년이야. 외국에서 집도 없고 배우자도 없어"
그 말에 생활보조금을 100만원으로 스스로 삭감해야 했다고 했다. 그녀는 지금 70대 중반이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예측한 속도감과 다르다. 청년기가 지나면 너무 빨리 시간이 제멋대로 흐른다.
그녀가 말을 붙여 왔다.
“샘, 직장은 60까지는 다니세요!”
그녀가 마치 회사 관계자인양 억양을 높였다.
"하긴... 할 일이 있어야 움직이죠. 아니면 소파에 놓인 방석처럼 소파 껌딱지가 되더라고요."
사실 허세다. 낮 동안 나는 생애 처음 실업급여 받고 쉬는 포상 같은 날이 왔다고 잠깐 좋아했었다. 코로나로 아무도 못 움직였다. 3끼 밥을 하느라 휴식은 없었다. 결국 어떤 세대이든 사회적 고난은 겪기 마련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불안한 날에는 한국전쟁(6・25)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식자재가 있어 끼니 걱정은 안하니 훨씬 나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인가는 코로나는 중세의 페스트 유행과 같은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침밥 해놓고 나오기를 매일 반복했다. 홍제천이 한강으로 이어지는 마포구청 그늘에서 급류가 휘돌아 가는 것을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풀 섶의 모기에게 한 참을 헌혈해야했다. 새참을 하러 들어가는 농부의 아낙처럼 점심을 하러 들어갔다. 몇 해 전 은행과 공동소유로 이사한 집은 역세권이지만, 사실 신혼부부용 넓이다. 종일 가족이 다 머물기엔 좁디좁다. 데이터는 약해서 동영상 인강이 제대로 수강이 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엄마, 인강이 끊겼어.”
라는 말에 그 수업이 결석처리 될까봐, 담임한테 사정 문자를 남겼다. 다음날 인터넷을 기가로 업그레이드 했다. 대단지 아파트가 아니다보니, K사에서 제공하는 속도에도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업그레드 하는 선에서 해결했다. 수업 듣는 사이사이 물길 따라 한강 쪽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유일한 해방이었다. 고가교 아래서 바둑 두는 동네 할배들 옆에 우두커니 풍경처럼 앉아 있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는 할배들의 비밀창고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한 할배가 나무 데크의 못이 없는 한 조각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 술도가니 감추는 비밀공간처럼 접이식 바둑판과 바둑돌이 등산방석이 있었다. 밤이 되자, 그들은 석양빛에 나는 갈매기 떼처럼 몇 번인가를 휘휘 수다로 흥을 올리다가 흩어져 둥지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들어가면 2명의 수험생의 방해자가 되어 버린다. 코로나로 따로따로 각자의 방으로 밥을 들이고 있었다. 자의로 수감된 수용소의 배급 같았다. 바람 부는 날도 비 오는 날도 나는 멍하니 할배들이 사라진 나무 데크에 앉아 있었다. 집에 있어봤자 방해자로 있느니 그게 나았다. 밤11시경 귀가 후부터는 TV볼륨은 최하로 했다. 자막글자만 읽다가 자러 들어가곤 했다.
나의 일상만 그런 상태는 아니다. 오늘내일하는 요양원에서는 가족면회도 제한되었다. 감염우려로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다. 속보처럼 학교에서 우리 반은 아니나 타 학교 학생이 학원에서 감염되었다는 문자가 전쟁 중 전보처럼 날아왔다.
같은 학원생일 경우 보고하라는 문자도 왔다. 불행 중 다행인 지, 혼란의 시간이 흐른 후에 현대의학은 빠른 셈법으로 백신을 다투어 내놓았다. 한발이라도 빠른 자가 돈줄을 잡는 것이였다.
제약사들은 임상실험도 안 한 약들을 일단 내놓았다.
마치 영웅이 선두에 서서 전쟁터에 깃발 들고 나서는 양 의기양양 했다. 방송을 믿는다면, 백신 출시후 죽어나가는 이는 전세계적으로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스크가 보배이자 방어용 첨단 무기인 시절이었다. 주민번호 짝수홀수에 따라 살 수 있는 날과 갯수가 제한되었다. 누군가 마스크를 주면 은인을 만난 듯 고마웠다. 주민번호 홀수 일에 마스크 사는 날은 일찍 밖으로 나선다. 내친김에 얼른 마스크를 사고 경의선 숲길을 따라 공덕역을 반환점으로 찍고 돌아왔다. 그날은 마치 식량배급을 타 온 듯했다. 가족의 수호자인양 업적을 달성한 듯 뿌듯했다. 반복되는 단순한 일상을 빼면 심적으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이 연일 이어졌다. 지금껏 전업주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홀로 가장인 30년이다. 그간 못한 살림살이의 총량을 채울 시기가 왔구나 생각해버렸다. 뭐든 총량을 하나씩 채우면 인생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가사의 총량을 채워놓자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 동행 ]
고3, 고1 두 아이는 인강으로 2년이라는 시간을 때웠다. 학창시절의 추억도 없어졌다. 동창이라는 소속도, 절친도 은사도 없는 시절이 되어 버렸다. 학습지 한번을 못시켜주고 사춘기가 왔다. 자사고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학비는 나갈 대로 나갔다. 일부 자퇴하고 일반고로 가는 이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원해 처음으로 무리해서 보낸 고교간판을 자퇴로 흘려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인생에서 고교동창은 포기할 수 없는 대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정서적으로는 대학동창보다 친밀감이 두텁다. 경제적으로 벌이를 쉬고 있는 동안 벌어진 팬데믹이었다. 엎친 데 덥친 격이었다. 누구나 그런 시절을 견디고 있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몇 달만 그리 보내면 해소될 줄 알았다. 시간은 어느덧 1년에 다다르고 있었다. 벌어도 쌓이는 돈은 없는 삶이었다. 안 버니 빚이 늘어만 갔다. 할 수 없이 뭐라도 해야 한다는 현실에 대한 의식이 매일 뇌의 깊숙한 곳을 채칙질 해왔다. 실내서 컴퓨터를 사용하는 일을 찾다가 금융혁신이라는 신설분야에 이력서를 냈다. 긴 벌이가 가능한 혹시나 하는 일일거라고 도전해 보았다. 어려운 시절에 인력을 확충하는 곳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도 나도 해보지도 않은 일자리에 정규직으로 계약서를 쓰게 된 것이었다.
퇴근길에 그녀와 조근 조근 얘기하며 같이 걸었다.
심리적 거리감보다 일찍 늘 집 앞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직선으로 도보20분 거리의 도로변 역 앞이 우리 집이다. 그녀와 같이 걷기 시작한 첫날 할 수 없이 개인정보를 노출했다.
"여기가 집이에요. 길가 집이라 숨길 수도 없네요. 잘 가요!"
“언니, 우리 시간 맞으면 점심 같이 먹어요. 저는 집이 연남동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연남동 방향으로 더 나아가다 뒷모습이 사라 졌다.
그녀 집이 연남동이 아니라는 것을 안 사건이 발생했다.
코로나로 매일매일 급박하던 때였다. 어느 일요일이었다. 주말에 검사키트를 무료로 배급받았다. 같은 건물 입주자나, 다른 부서에서 감염자가 생기면 긴급 문자가 전직원에게 떴다. 급박한 회사의 요청으로 PCR검사를 의무적으로 내야 했던 날이 왔다. 일요일 오후 가장 가까운 곳인 서강대역 임시 진료소로 갔다. 옆모습이 익숙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녀였다. 단발머리에 핑크색 젤리 슈즈 같은 것을 신었다. 캡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나를 그녀도 알아보았다. 찰나의 우연을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녀의 거주지가 신촌역 인근인 것을 그날 알았다.
"있잖아요, 친구도 우연히 길가다 만나기 힘들거든요..."
검사 후 그녀는 나에게 뭔가 사주고 싶어 눈동자가 흔들렸다. 임시 진료소 바로 위, 서강대역 뒷골목에는 원두를 수입하는 창고 형 단골 원두가게가 있다. 원두를 직접 수입해 로스팅하는 창고 같은 매장이여서 제법 가성비가 높다. 운 좋게 주인 아주머니가 있을 때는 생두 한 봉에 13000원짜리를 사도, 그날의 커피 2종을 섞은 판매가 5500원짜리를 무료로 준다. 나는 산미가 있는 다양한 스페셜티를 좋아한다. 산미가 익숙치 않은 지인들 때문에, 최근에는 구수한 맛의 과테말라 안티구아 스페셜티를 자주 산다. 500g기준으로 볶은 커피는 2-5배까지 가격이 비싸진다. 나는 커피를 가끔 직접 로스팅한다. 경제적으로 이득이고 맛도 신선해서다. 결국 그날부터 커피를 볶아서 나는 매일 그녀에게 회사 탕비실에서 갓 내린 커피를 한 잔씩 갖다 주게 되었다. 그 때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원래 커피를 잘 안마셨다고 한다. 아마도 누군가 자신과 소통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호응이었을 것이다.
낮 시간이었다. 화물칸 버튼을 누렀다. 그녀가 또 거기 있었다. 화물칸이 사람이 없어 안전했다. 오후 1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엊저녁 귀갓길에 그녀는 성대가 늘어나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병이 있다고 했다. 그만두려고 했으나, 팀장이 괜찮으니 다니라고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반나절 근무를 허가해 줘서 병원에 다니며 늦게 오후에 출근하는 중이라고 했다. 굳이 자기 자리를 알려주겠다며 앞서 걸었다.
자리를 알고 돌아서며 힘내라고 다독거렸다. 자리로 돌아오는데 문득 그녀의 살가움은 여대라서 그런가, 막내라서 그런 가 잠시 생각했다.
“저는 아직 혼자예요!”
라며 외로움을 표시했던 때문이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병약해 보이는 그녀였다.
[ 그녀의 도시락 ]
시간은 가고 코로나는 더 극심했다. 거리 두기 캠페인은 사람들의 심리도 오그라들게 했다. 식당도 많이 폐쇄되었다. 상인들은 가게 세를 못내는 고난이 연속이었다. 대부분 간단히 간식이나 도시락을 싸오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입사한 회사 탕비실 온장고에는 그녀의 도시락이 있었다. 작은 스테인레스 반찬통이었다. 투명한 뚜껑이라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의외로 거뭇거뭇한 곡물 밥이 들어 있었다. 언뜻 봐도, 딱 반으로 자대고 금을 그은 듯 경계가 선명했다. 빗살무늬 토기처럼 칼집을 내지도 않은 채 구운 모양이었다. 뒤틀려 터진 붉은 비엔나소시지가 유일한 반찬이었다.
다음 날에도 같은 자리에 그녀의 도시락이 있었다. 거뭇한 곡물 밥은 그대로였다. 나머지 반이 청 잿빛이었다. 가만가만 온장고 유리와 반찬통 뚜껑을 들여다보았다. 고등어 등짝 같았다. 반찬의 정체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온장고 문과 반찬통을 넘어 비린내가 몰려오는 듯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곡물도 흔치 않은 귀리밥이었다.
드뎌, 점심시간이 왔다. 시차를 두고 1인 1석으로 앉았다. 밥 먹으러 가는 길에 굳이 나는 그녀 자리로 마스크를 낀 채로 들러 갔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다가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 톤으로 가라앉고 더욱 허스키해져 있었다. 그녀가 싸온 귀리밥과 거칠기가 비슷했다. 내 시선이 그녀의 도시락 안으로 꽂힌 것을 그녀도 직감했던 모양이었다.
"저는 요리할 줄 몰라요!
엄마가 당뇨를 앓다가 제가 19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거뭇한 귀리밥과 비엔나소시지를 그녀가 먹었을 날에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옷차림도 경계 또렷한 도시락처럼 정갈했다. 한 달을 퇴근 길 동행은 계속되었다. 11월이 되자 갑자기 추운 날이 왔다. 나는 패딩으로 바꿔 입었다. 그녀는 외투만 누빔 처리된 얇은 감청색으로 바뀌었다. 안에 합창대회때나 깔맞춤으로 입었을 법한 흰셔츠는 그대로였다. 국민 교복같은 오리털, 거위털 검정패킹따윈 그녀에게 없는 듯했다. 그녀의 도시락에 조상대대로 먹어온 김치가 빠지고 흔한 김이 곁드려지지 않은 것과 흡사 동일했다. 낌새를 챘는지 그녀가 말했다.
"저는 답답해서 두꺼운 거 못 입어요"
그녀는 독심술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늘 지인들로 같은 질문을 당했을 법했다. 옛날 어머니들이 즐겨 입던 반상의 누빔에 목 언저리로 작은 삼각 스카프를 맨 듯 그러하였다. 지금도 먼 읍내에 가면 있을 법한 전통복장이었다. 영문과 출신이면 적어도 입맛은 서구적이겠지 하는 것도 빗나갔다. 그녀의 반반도시락, 즉 비엔나소시지반 귀리밥 반의 내용물에는 흔한 케챱도 머스터드 소스도 없었다. 그녀와 그렇게 상암동에서 경의선 숲길까지 한 달을 거의 매일 걸어 귀가했다. 기온이 달라졌다. 사뭇 추웠다. 그녀의 다소 얇은 복장은 변치 않았다. 그녀는 변함없이 나의 퇴근을 1층 화물칸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10분이고 30분이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대기하고 있었다. 30분이나 늦은 날 그녀가 말했다.
"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친구가 생겼어요."
나를 일컫는 말로 들렸다. ‘왜 나지?’하는 생각과 50살 먹은 그녀의 첫 친구라는 것이 다소 버거웠다. 누군가의 인생에 어떤 첫 번째 존재라는 의미는 그 역할에 대한 기대 심리도 따르기 마련인 법이다. 그때까지는 그녀의 집이 연남동이라 알았을 때라 전철이나 버스가 애매했다. 운동 삼아 콧바람 쏘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동행이었다. 그녀도 나도 타업종에서의 이직이었다. 코로나로 긴급 투입된 훈련 안된 대기 선수 격이었다. 큰 조직이고 너른 공간이었다. 우리 역할은 찬바람 막는 덧댄 문풍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하곤 했었다. 결국 그녀와 한 달간의 동행 후, 용의 꼬리도 못 된 채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녀는 내가 퇴사한 후부터 걸어서 퇴근하지 않게 되었다. 예전처럼 매일 전철로 퇴근한다는 소식을 몇 번인가 카톡으로 짧게 전해왔다. 퇴사전 그녀에게 읽던 책을 빌려줬다. 내가 좋아하는 안경집 노동자로 일하며 신에서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 철학의 대가 ‘스피노자’ 오빠의 책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주고 신으로부터 신이 준 자연으로 문화속으로 나오라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그녀는 간간이 주말에는 공유주방에서 주말에 할 일이 없어 일해 보았다든가 하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직한 나의 퇴근길에 그녀를 두 번이나 만났다. 그녀가 연남교 초입에 서 있었다. 후에 그게 우연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몇 달 후 퇴사해버렸다. 일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다.
한 달간 동행하던 어느 날의 일이다.
"언니! 이런 집은 얼마면 사요?"
그녀가 셋집서 살고 있다는 암시였다.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월세 나오는 거 있는데, 한 채는 새 어머니가 집세 가져가고 한 채는 제가 받아쓰고 있어서 살만하거든요. 의사인 오빠도 있어요. 엄마가 어려서 부터 당뇨병 앓는 바람에, 아버지랑 매일 싸우는 것만 보고 자랐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만 믿어요.
하느님의 세계만 편안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사람 친구가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말꼬리를 이어갔다.
“곧 네 거니까, 조그만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런데, 엄마 죽고 새 어머니랑 저기 저 보이는 고층아파트 있죠."
건너편 신도시 고급형 고층 아파트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저런데 살았어요. 몇 달 전 두 분이 평창에 전원주택 짓고 들어가셨어요.
사실 지금 저는 완죤 혼자예요.“
그리고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떤 장면인가에 불현 듯 혼자 빠져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저를 버렸어요!”
“오라고해서 갔더니만, 새 어머니가 아부지랑 소리지르며 싸우더라구요.
제랑 새엄마랑 당장 어느 쪽이지 선택하라고 제가 있는데 그래서 바로 돌아서 왔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혼자가 됐어요.“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언니, 저는 하나님밖에 없어요. 이런 얘기 남에게 처음 해봐요.
언니는 인본주의이고 나는 신본주의라 우리가 너무 달라요. 곧 멀어지겠죠.
하지만 지금은 언니를 놓을 수 없어요.”
그 말을 하면서 그녀는 연남동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때 표정은 사채가 된 모친 옆에서 조용히 입 다문 19살의 먹먹한 낯빛처럼 보였다. 그녀가 경의선 숲길 입구로 들어섰다. 뒷모습은 모랫 바람에 섞여 점점 형체를 알 수 없는 노쇠한 생명체 같았다. 형체가 부서진 바람의 갈기 같아 보였다.
[ 비엔나소시지와 귀리밥 ]
-그녀의 밥에 대한 당시의 회상/서정게시 *21.11.18 김영주
오늘도 회사 온장고에는
비엔나소시지와 잿빛 귀리밥이
반에 반 경계를 이룬
너의 코로나 도시락이 있겠지
아무 양념도 꾸밈도 없이
쉰 살 아가씨가 된 꼭 너 같다
5살에 당뇨로 아프던 엄마가
줄곧 아빠와 싸우다 19살에
하늘로 가고 멈춘 마음
서럽고 불안해 사람을 못 담고
사람 사는 세상과 엄마가 간
하늘 사이에 끼어서
인본과 신본의 경계에 사는 너
'언니 외로워요! 딴 데 가지 마요.'
토라진 꼭 너 같다
어떤 날은 보리밥과
식은 고등어구이 반에 반
요리를 할 줄 모른다며
무채색 사막 같던
너의 코로나 도시락을 뒤로하고
나는 퇴사를 하고 말았다
"가끔 연락하다 곧 멀어지겠죠"
너의 목소리가 현실로 와 있다
*코로나 도시락 : 코로나19가 매섭던 시절, 매식이 어려운 때의 직장인의 도시락
ㅡㅡㅡ
그녀는 내가 그만두던 날 예언을 했다.
“우리, 가끔 연락하다 곧 멀어 지겠죠"
퇴사 후 그녀를 퇴근길에 우연히 두어번 만났다. 그 때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퇴근 시간 언저리를 자신의 집 쪽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길목에 지켜서 있었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 놓을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내가 떠났기 때문이다.
그 후 그녀가 가끔 해오던 대로 카톡을 몇 번인가 바꾸었다.
영영 시야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녀와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 괜찮은 것일까...
첫댓글 코로나가 한참이던 시절에
쓴 글이네요
지금은 무뎌져 쉽게 이야기 할
수가 있지만 그때는 암담한 시간이었죠
잘 짜여진 글 감동입니다
김영주 작가님 저하고는
서정문학 동기죠 ㅎ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멋진 글 많이 올려주세요
긴 글 읽으시는 고난을 이겨내셨네요.
감사합니다.
왜? 목이 울컥거리지? 잘 다듬어서 단편 소설로...... ...이 시대의 우리의 또 다른 모습들
그 녀...당신 ..그리고 바우...같은 화면 속 ..어느 누가 자연인에게 물었다 외롭지 않냐고? 자연인 왈 : 그 외로움마저 난 사랑합니다 그래여 견딜 수 있는 이 곳입니다
새벽에 독서를 하신 격이 되셨네요.
감사합니다.
대단한 필력이세요.
공감도 되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그녀의 안녕을 빕니다.
저도 그녀의 무탈을 빌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