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은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사라지는가 ]
글&사진 : 김영주
‘바닷가 야생화 한 송이 너에게 보낸다!’
지난 3월 세째주 토요일 백혈병이 재발해 백발이 된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다.
봄에는 아무 때라도 문뜩 사표를 내고 싶다. 훌쩍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내안에서 몹시도 꿈틀거린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봄도 있었다. 코로나 시작하던 해부터였다. 1년 내내 뇌가 없는 식물인간 같았다. 눈 맞출 곳도 없어 눈동자는 늘 풀려있었던 것 같다. 다시는 절대로 그런 봄을 맞이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흔치 않은 주말 카톡이 오던 날은 첫 봄이었다.
종일 내 자신과 싸우다 지치지 않도록 토요일 첫 봄나들이로 태안으로 갔다. 기지포에서 꽃지까지의 해안 길을 걷고 있었다. 주말에 연락 올 곳이 없어 휴대폰을 꺼내지도 않았다. 이미 몇 시간이 지나있었다. 소나무 숲길에 끌려 사진 한 장 찍어볼까 휴대폰을 꺼내보니 친구의 톡이 와있었다. 은행을 다니는 남편과 있을 그녀가 주말에 톡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었다.
“ 우리 목욜 첫 주 목욜 만날 수 있는 건가 해서^^;;; ”
1월 생일축하 톡에 인사치례로 봄이 되면 보자는 말을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것임에 틀림없다. 봄날의 애잔함이 몰려온다. 그녀가 만남을 기다리는 사람이 몇 안 된다는 얘기이다. 백혈병으로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친구이다. 4월이 되면 목욜 쉬니 보자는 말에 벌써부터 의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두여리 전망대에서 남해를 닮은 바다색을 보았다. 봄 바다는 아직 찬 바다라,미생물이 번식을 안해서인지 빙하색에 더 가깝게 청량하다.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 길이었다. 사각의 바위 그늘에 에델바이스일까를 의심해 볼만한 흰 꽃의 무리가 나뭇잎 새로 떨어지는 빛에 노출되어 있었다.
지병으로 멀리 나다니지 못하는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가 보지도 못했을
봄 야생화 사진을 톡으로 보냈다. 올 봄에는 아무래도 그간 소원했던 옛 친구들을 하나씩 쉬는 날마다 보는 컨셉으로 봄을 보내야 할 듯하다.
첫 직장 동료로 만나, 30년 지기 친구이다. 소식이 끊긴 친구들과 겨우 연결하면 암이더라고 내게 매해 먼저 만남을 청하던 절친이다.
그러다가 코로나로 서로 잠수 타던 시절에 친구는 혈액 암에 걸렸다.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 나름 금수저다.
내 생일은 아무도 모른다. 호적과 생일이 다르다. 1월 친구로부터 톡이 왔다.
“추울 때 태어났구나^^
너처럼 감동이 담긴 싯귀를 보내주지 못 하는구나;;;
사랑하는 친구야 당충전하렴∼∼∼♡“
뜻밖의 케익 쿠폰이 왔다.
(2~3주후 갑자기 쿠폰이 취소 되었다. 아마 나의
친구가 생각이 나지 않아 취소했을 것이다.
나는 그냥 묻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고? 사실 그래서인지 내 인생이 늘 추워∼
하지만, 웃상이라 다행이여.“
라고 답해주었다. 친구는 독심술로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나중에 카톡이 알려준 것임을 알았다. 어쨌든 처음이다. 출생의 비밀(호적은 2월)이 늘 따라다니는 내게는 타인이 진짜 생일을 알 수가 없다. 실제와 다른 생일을 작년에 수정한 덕이다. 음력의 12간지 ‘띠’로는 또 다르다. 재수를 한 그녀는 입사동기이나 한 살이 많다. 오랜 기억 속에 내색한 적이 없었다. 친구로 지내는 것을 늘 기뻐해 주었고 내편이었다.
“그래, 웃상!!! 너의 가장 큰 장점이지∼∼∼ ♡“
두 번째 하트를 그녀가 보내왔다.
그녀는 조근 조근 톡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내면은 더 힘들 수도 있지;;;
너무 쌓아두지 말고 때로는 표출해라∼∼∼
너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
작년 9월 11일에 월차를 쓰고 그녀를 코로나 이후 몇 년 만에 만났다. 그녀는 매주 보아도 좋다고 했다. 삶의 시간은 마음과 다르게 흘러갈 때도 있다. 결국 해를 넘치고 계절이 두 번 바뀌고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녀와 30년 동안 서로 몰랐던 자기만의 얘기를 서슴없이 털어 놓았다.
그녀도 나도 서로 몰랐던 얘기를 1도 거리 김 없이 탈탈 털었다. 나는 겪은 적이 없는 새로운 직장의 갑 질과, 그녀는 현재 치매가 진행 중인 미움의 잔상이 남아 있는 모친에 대한 원망 섞인 가족사를 얘기했다. 그녀도 나도 격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스타일은 아니다. 27살경에 언뜻 그녀는 어머니에 대해 언급했었다. 어머니는 살림을 못하는 편이었다. 아버지가 은행장이었기에 식모를 둘 수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사회적으로 식모라는 것이 없어졌다. 여고생인 언니와 자기를 집안 일을 시키는 바람에 자기는 성적이 뚝뚝 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악착같던 언니는 학창시절 어머니의 고된 가사일도 다 받아내고도 쉬는 시간마다 공부를 해서 서강대( 이대였다고 함)를 갔고 현재 서강대 강사라고 했다.
그 후 6개월 만에 다시 재회다. 약속한 4월 첫 휴가일에 6개월 전 만났던 그녀의 집 근처인 공덕역 같은 카페에서 만났다. 그 장소를 3번이나 반복으로 카톡을 보내왔다. 자꾸 뭘 잊어버리게 된 그녀의 상태 때문으로 추축된다. 벚꽃이 만개 직전으로 화려한 봄날이다. 멀리 분홍 빛 하늘거리는 경의선 숲길을 걷다가 귀가하자고 인도로 연결된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순간 그녀가 마른 나뭇잎 떨어지듯 눈앞에서 하늘을 보고 뒤집어진 채 넘어졌다.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순간 꽁지머리만 보이던 무채색의 찜빵 모자가 그녀의 얼굴로부터 이탈되었다. 계절감 떨어지는 다소 두꺼운 울 모자였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보통은 그 정도로는 다리를 접었다 중심을 잡는 정도의
결과였을 것이다. 백혈병 재발로 한동안 연락 두절이었고 그녀는 단지 깊은 잠을 잔다고만 했다. 하지만 제법 살만한 집의 안주인이라 현대의학으로 다 고친 줄 알았다. 머리는 큰 일을 겪고 미용에 관심이 없어 염색을 안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투병 탓이겠지만 그녀의 머리의 대부분은 없었다. 93세로 돌아가시기 직전이 친할머니의 머리숱정도였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팔뚝을 꼭 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남편이 넘어 진 줄 알면 외출금지령이야.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어.”
라고 단호히 말했다. 몇 주전에도 너무 사소한 일로 기절을 해서 하루 입원을 했단다. 스팸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뭔가 부족해서 떡볶이를 시켰다. 막 먹고 쇼파에 앉았는데 그만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근데, 하루인가 응급실서 의식이 없다가 돌아왔는데 아무 이상이 없대”
작은 일에도 그녀는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었다. 의학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세포가 소화에 너무 에너지를 몰 빵으로 쓰다가 그리 된 것이 아닐까싶다고 맞장구쳐 주었다. 그리고는 선배 아버지가 인절미 먹다
숨구멍이 막혀 돌아가신 떡에 관련에 생로병사를 예로 들어주었다.
앞으로 절대 떡은 먹지말자고 그녀에게 서로 다짐 했다.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 팔짱을 풀지 못했다.
경의선 숲길 공덕에서 대흥구간을 걸었다. 코로나 오던 첫해의 봄날, 혼자 산책삼아 공덕역 근처를 왔다갔다했다. 그때는 서로의 이사한 거쳐를 몰랐다. 그녀도 운동 삼아 울 집 앞에까지 왔다 간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그녀의 집은 일산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시절이 서로에게 살갑지 않던 때였다. 대흥역 키큰 벚꽃나무 터널 구간을 돌아 공덕역 방향으로 턴했다. 숲길을 바라보는 구옥을 개조한 카페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야, 저기 딸기 주스 맛있겠다. 저기서 더 쉬다 가자!”
작은 한옥을 개조해 오픈 형 카페로 사용하는 공간이 숲길 쪽으로 나있었다.
주스를 제조하는 동안 웃음기 없고, 활기도 없는 산수화 같은 그녀의 입이 움직였다.
“야, 우리 아버지가 요새 치매가 생겼어야.
그런데, 우리 엄마 알잖니. 고약한 성미 고집불통이던 어머니는 얌전히 웃고만 앉아 있어 애기처럼...“
단지 6개월이라는 시간의 경과에 새로운 정보가 발생한 것이다.
“요양보호사가 2명 들어가 있거든. 근데, 그 수발을 우리 언니가 단도리 하는데, 근데 아버지가 자신이 알던 아버지가 아닌 것 같대. 자꾸 돈이 없어진다고 언니한테 반복한대. 호주 있는 오빠 줘야하는데 딸들이 다 빼간다고 헛소리를 하신대. “
그녀는 미간에 더 깊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 얘기했잖아. 여자 사귀어서 애 낳았다고.
그 위자료도 아버지가 해줬다니까.
지금 엄마, 아부지 치매 수발을 아들이 하고 있냐고...
입주 요양보호사와 낮 동안 오는 2명의 인건비가 매달 나가잖니. ”
그녀의 말뜻은, 요양사 비용은 아버지 잔고에서, 집 관리 등 포함해 친구가 하다가 백혈병 걸린 후 언니가 이어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언니 말로는 묘하게 아버지가 이상해졌단다.
그간 자신들이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로 말하면 S대 법대 출신으로 은행장을 5번을 하신 분이다. 꼼꼼하기 그지없는 분일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사회적 처세가 있었을 것이고 접대도 있었을 것이다.
해서 자식들이 본 다른 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영역으로부터 지금 치매로 벽이
허물어지면서 생소한 아버지를 언니가 만나고 있다는 투였다.
세월은 어떤 큰 방파제로도 다가오는 인생의 후반기의 썰물을 막을 길이 없다는 생각이 몰려온다. 불과 6개월 전인 작년 89세까지 모든 가족의 관리자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하고 계셨다.
의사와 선봐서 결혼한 언니가 47살에 미망인이 되었다. 사위의 유산인 건물관리로 부터 경증 치매기를 보이던, 아버지가 평생 이겨 보지 못한 고집불통(그녀 말에 근거)인, 그녀 어머니의 치매 수발까지 하고 있었다. 그사이 그녀의 아버지는 90을 넘기셨다. 노인의 6개월은 6년 같은 것일까. 그간의 변화와 친정부모의 수발로 코로나간 온 사이에 그녀는 스트레스로 백혈병이 걸렸단다. 그 일을 바톤터치하여 언니가 보고 있는 것이다. 말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실일까. 세상은 정말로 우리가 말하는 인과관계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주역을 맞춰보고 사주팔자를 점치 듯 일정부분 예정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지난 9월의 똑같은 레파토리를 대화거리로 딸기 주스를 2차로 마시고 있었다. ‘너 지난번에도 얘기 했어!’ 라고 지적하자 그랬냐며 모든 것이 흐릿하고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자기 집은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평온해 보였지만, 호주 바람둥이 오빠가 때리기를 멈춘 것은 자신이 때린 큰 오빠의 얼굴을 본 후라고 했다. 처음 듣는 정보였다.
“뭔 소리야!
자기한테 내가 모르는 오빠가 있었어? ”
생판 금시초문이다. 그녀와 나는 24살 때의 첫 직장 입사 동기다. 사회 초년생으로 만나, 연애와 결혼의 모든 과정에 드문드문 일지언정 함께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고맙게도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사태와 사람들에게 나보다 더 증오심을 드러내 버릇해서 위로를 준 면도 있다. 그녀는 소위 금 수저로 아버지의 낙하산으로 들어왔다. 여대 출신으로 불어전공에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영어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필요치 않은 지식이었다. 영어가 주목을 받은 것은 IMF이후 부터였다. 당시에는 일본 자본이 세계를 휘둘렀다. 한국 금융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일에 앞장서야 에 했던 나를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나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듣는 가족의 애환, 큰 오빠의 존재와 두 오빠의 정신병적 질환에 대해 30년이 흘러 처음 입을 떼었다. 큰 오빠의 사망이 가족에게 너무 슬프지 않았다는 것과 이후 가족이 정서적으로 조금 긴장을 풀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늘 엄마, 오빠로 부터 맞았고 자존감이 없었어.
유년을 외국에서 보냈는데, 한국의 교육을 쫓아가겠니. 그래도 재수해서 여대 갔으면 다행인거였어. 언니는 이대라도 갔는데 나는 다른 데 가서 구박받았어. 게다가 언니는 당차고 예뻤잖아.“
나는 말을 끊었다.
“얘, 니가 더 서구적이고 예뻤고, 키도 더 컸잖아.
언니가 공부를 잘해서 심리적 평가가 작용한 거야.
부모님 눈에 더 예뻐보였을 거야. “
그녀는 말을 이었다.
“하긴, 남편도 내가 더 이쁘댔어.
정말 다행인 것은, 시집와서 자존감을 회복했어. 다들 존중해 줬어.”
그렇게 자신을 못났다고 하던 완고한 어머니에 대해, 언니로 부터의 얘기를 전했다.
“언니 말이, 나는 사실 4째로 막내였잖아. 그런 엄마가 나를 막내라고 자기들보다 예뻐했다는 거야.”
그녀의 말은 묘했다.
“만석지기 집의 반반한 울 엄마가 27살 노처녀 로 그때까지 시집을 왜 못 갔겠니.
성질머리가 고약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결혼한 거지.“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출신이지만 당시라도 천재소리를 들을 S대 법대 출신이다.
“ 야, 너네 아버지 당시로는 천재야! 경기여고라도 S대 법대보다 못한 거 아냐? ”
그게 당시에는 뭔가 아직 신분 같은 분위기가 있었나보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만석지기라도 딸이라고 시집보낼 때 아무 것도 유산을 주지 않아 셋방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작년 9월 치매 걸리기 전까지 부잣집 아가씨 격인 부인을 모시고 살았다. 모친이 너무 고집불통이라 아버지가 이긴 적이 없었다고 했다. 영국서 한국으로 집 살돈을 보냈으나 이모네 계주가 갖고 날랐고, 집 한 채 값을 날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이모집에 얹혀 살다가 가족이 성산동의 셋방부터 시작했다는 얘기부터, 이모네는 기사에 식모를 두고 살고 있었으나 한 푼도 보상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몰랐던 얘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나는 그녀의 집을 가본 적 있었다. 동교동 2층집이 고집 센 어머니를 아버지가 못 이겨서 이모집 근처에 산 집이었다고했다. 나와 대학동문인 항공사 다니던 오빠가 호주가 이민 간 이유도 들었다.
“ 얘, 술만 먹으면 뜬금없이 폭력적으로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호주 대륙 옆 섬에 지인이 한명도 없는 곳으로 이민가라고 한 거야. 거기서는 술도 못 먹을테고 애는 셋이니 열심히 일 할거라는 거였지.
결국 새언니가 열심히 일했어. 빵 공장해서 건물도 샀어. 얘! 근데 살만하니까 바람을 펴서 애를 난거야. 평생 아버지 돈만 빼먹었는데, 오빠가 치매 걸린 아버지 살피겠니.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 줘야 하는데 돈이 자꾸 줄어든다고 헛소리만 해. “
그녀의 오빠의 이민은 IMF직후라 영어 조기교육이 유행하던 때였다. 해외로 가는 이민족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때문인 줄 알았다. 다만, 80대인 아버지가 아들 가족 애 셋 어른 둘인 5명의 생활비를 매달 보내고 있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생각 했다. 폭력적인 어떤 유전자가 친정어머니로 부터 2명의 오빠로 전이되어 그녀의 유년에 아픈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항암 치료로 아무 기억도 선명하지 않은 상태이다. 남은 기억의 중심에서 큰 기둥으로 남아 있는 유년과 청소년기의 자존감 상실과 주눅, 지금의 결과를 인과로 묶어 내게 설명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 시대 분들은 남아선호 사상이 정신적 안정감을 주니까, 그래.
어쩌겠니 니가 이해해.”
그녀는 넘어진 곳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혹이 생길 것 같다고 반복했다.
불안한 그녀를 그만 귀가시켜야 할 것 같아 일어섰다.
그녀는 다시 팔짱을 끼고 공덕역 건널목쪽으로 향하는 내게 말했다.
“얘, 그래도 너 만나니까 좋아. 옛날 얘기 서로 할 수 있어서...”
그녀는 조만간에 또 보자고 했다. 양지바른 곳에는 꽃비가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경의선 숲길을 다시 걸어서 집으로 가면 꽃 숲이 있다. 그녀를 공덕역 1번 출구에서 건널목 반대편으로 가라고 중간까지 데려다 주었다. 뒤돌아
그녀의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멈춰있었다. 그녀는 자기 집을 향해서 인파속에서 사라졌다.
' 또, 보자! 또, 보자! '는 말이 멀리서 환청처럼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상>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절제된 감성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필력
한 편의 심리영화를 본듯 ....그냥 파 한잔 시켜놓고 말 없이 앉아 있어도 좋을 것 같은 당신
늦은 시간 독서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친구분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셨군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픈~
친구분의 쾌유를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