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도라도라고 믿었다! ]
*글&사진: 김영주(세상풍경)
철쭉이 지고 피는 이때쯤일 것이다. 이 글은 코로나가 들이닥친 첫봄인 21년 4월말의 이야기다. 산이고 강가고 철쭉이 피었고 아카시아 향이 바람타고 날라 왔다. 망설임 끝에 억눌림으로부터 탈출해서 닿은 그곳을 나는 지금도 엘도라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무래도 너무 힘들거나 행복하거나 한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습성을 지닌 사람 같다. 늘 어떤 일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떤 계기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떠올리고 비로소 정리를 하게 된다.
그날이 문뜩 떠오르면, 나는 어느새 원시 강물소리가 나는 세찬 강가에 앉아 있다. 고막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암석을 치고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곳의 자연 상태는 음식으로 비유하면, 젊은 날은 양념범벅이 좋다가 나이 들수록 슴슴하고 재료가 좋은 것을 잘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언제부턴가 세상일이 오래 묵혀 발효된 것처럼, 극히 슬픈 기록도 매우 행복한 기억도 대개는 없다. 잊고 지내다가 유사한 계절이 오면 또 가고 싶다거나, 좋지 않았던 기억은 아련히 쓰리면서 스쳐 지나게 되는 정도의 흔적만이 남게 된다. 그러다보니 집착할 일도 점점 없어진다. 반면 남는 것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가깝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주어진 만큼 보고 겪은 일들이 마음의 창고에 착착 쌓이다가 자연 소멸되는 식이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기억조차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삶이라는 자신의 밭에 이미 밑거름이 되어 어떤 식으로라도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이 내 유전자의 일부를 물려받은 생명체에게든, 내가 사라진 이후의 탄소의 원자이든 어딘가의 순환의 에너지로 남을 것이다. 나는 내 몫을 채우는데 힘써 왔을 뿐이다.
다음은 재료가 좋았던 당시의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코로나 전까지 가끔 캠핑을 갔었다. 이야기 속 땅을 알게 된 계기는, 밤하늘의 별을 찍은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밤새 셔터를 열어 놓고 새까만 천장에 동그랗게 별자리를 그려놓은 사진이었다.
나 살고 있는 작은 나라에 불빛 없는 광활한 땅이 어딜까 몹시도 궁금했다. 한탄강 언저리였다. 같은 뜻을 가진 사진기 있는 사람끼리 움직이기로 했다.
한탄강이나 임진강의 용암지형은 물 길 따라 깎아 지르는 주상절리 절벽이 특징이다. 세계 유산이 된 지질공원 외곽의 지류는 사람손이 덜 탄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 의외로 많다. 물길을 거슬러 조금 상류로 가면, 원시 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잘 가꾼 유명 호텔의 언저리보다는 빗물에 갓 씻고 나온 듯 순박한 대자연이 늘 좋았던 기억에 멈춰있다.
시절 상, 사람들은 저마다 제 속이 적막했을 터였다. 그러던 중 그 땅은 봄에 만난 뜻밖의 행운이었다. 이후로 나조차도 수년간 캠핑은 사라졌다.
<그 날의 기억>
강 한 가운데는 물때가 켜켜이 낀 마치 섬 같은 현무암 덩어리가 있었다. 큰 바위 사이로는 물 흐름이 굽어 지고, 아래로는 무지개 송어가 지난다.
실컷 배불리고 높이 날던 가마우지의 날개 짓이 눈꺼풀을 막았다. 검은 그림자가 바람타고 눈두덩이 불은 실핏줄 빛을 거뭇하게 만드는 것만 같은 순간 경험을 하곤 한다.
대개 그런 환영은 몹시도 업무에 넌더리가 나는 한 낮에 발생한다. 심장이 조여 오는 듯 위화감이 들거나, 어깨가 움츠려들어 근육 수축으로 얕은 통증이 콕콕 올 때다. 나도 모르게 태초의 강가로 의식을 보낸다. 그런 정신적 휴식이 일상을 다시 살게끔 했다.
가던 날은 다소 흐렸다. 팬데믹이 봄의 한가운데에서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꽃은 날이 궂으나 맑으나 피어 있을 터였다. 호기심에 이끌려 숲으로 들어갔다. 막 거친 껍질을 뚫고 나온 손가락 한마디 길이의 두릅 싹이 높은 가지에 나와 있었다. 굳이 배부르지도 않을 그것을 땄다. 수렵채취의 본능, 시골서 나고 자란 동행인이 유년의 봄마다 어디선가 보고 배웠을 일을 잽싸게 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몸을 움직여 한 일에 대한 가치를 실제보다 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먹을 만큼 자라지도 않은 두릅 순 두어 개를 저녁에 데쳐 초고추장도 없이 소중히 먹었다.
늘 언젠가 돈벌이 안하고도 살 수 있는 날이 얼마간 주어지기를 50이 넘도록 기다려 오고 있었다. 그때 복이 터진 것인 지, 때마침 2년 계약직으로 방송국을 다니다 퇴사 했다. 귀한 휴식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늘 희망해온 여벌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글도 쓰고 찍어둔 사진도 정리해보면서 그 시간들을 맛깔나게 써야지 내심 신나 있었다. 무엇을 할지, 머뭇거리던 터였다. 코로나로 쑥떡거리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같은 믿을 수 없는 일로 세상이 시끄러워졌다. 연일 뉴스에 집중해야했다. ‘서로 경계하고 멀리하라’고 촌마을 이장님이 확성기로 알리듯 집안에는 온종일 뉴스가 메아리쳤다. 가족 말고는 얼굴도 마스크로 싸매고 봐야했다. 서로 감시하고 여차하면 자신을 보건소에 신고해야하는 망측한 일이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었다.
먼저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세상 속에서 죄인 같은 멸시를 받는 듯했다. 그 사람의 행적이 만천하에 까발려졌다. 당시의 분위기상, 숨기고 다닌 이는 행정 관리 체제를 붕괴시킨 국가 모독죄 격이었다. 인천의 모 강사는 순식간에 국내에서 가장 몹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싸스도 메르스도 겪었었다. 차원이 달랐다.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은 21C에 공항을 통해 전 세계를 순식간에 덮쳤다. 나는 최악을 염두에 두는 습성을 가진 사람 같다. 어느 순간부터 한국전쟁과 일제 강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는 선조들의 고난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버렸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안보면 되는 일정도가 발생한 것이다. 인명과 문화를 파괴하는 전쟁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에 머물렀다. 팬데믹 종결 후 코로나19는 역사를 바꾼 다섯 가지 전염병에 들게 되었다. 중세 흑사병, 아메리카 대륙의 천연두, 프랑스의 황열병, 아프리카의 우역(牛疫) 다음을 잇는 초강력 바이러스 폭풍이 되었다.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인도나 남미에서는 벌판에 끝없이 무덤이 만들어 졌다. 이탈리아 같은 북유럽이나 미국조차도 시체를 처리할 여력이 부족해 냉동차에 임시 보관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한국은 공항을 끝까지 폐쇄하지 않았다. 얼마의 거리에 코로나 환자가 거쳐 갔다는 동선이 공유되었다. 바이러스 보균자가 들러 간 식당은 금 새 전염병으로 금단의 공간으로 버림받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다.
2월 말에 퇴사 후 꿈꿨던 금쪽같던 시간은 뉴스에 홀려 방심한 사이 사라져갔다. 평생 돈벌이로 종종거렸다. 약간의 퇴직금과 실업급여를 받으며 평생 처음 유급휴가 같은 시간일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빗나갔다. 이 희한한 세상일에 심장이 멎은 듯 했다. 가끔 심장의 곁가지에서 핏줄이 막히는 듯 자잘한 통증이 왔다. 자주 복식호흡으로 숨을 조절했다. 흉 막에 공기를 가득 채워 부풀렸다가 뱉었다가를 반복하며 가라앉혔다. 안구는 건조 증을 느낄 정도로 TV만 바라보도록 설계된 붙박이 인형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밖을 보았다. 베란다 창밖의 학교 운동장의 화단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 희뿌옇고 멀건 꽃이 핀 게 언뜻 보였다. 긴가민가 코로나로 묻혀 버렸던 새 봄의 꽃소식이었다. 아침나절 울던 새소리도 몇 번인가 큰 새소리 작은 새 소리로 바뀌었다. 나중에 그것이 참새과인 텃새 직박구리와 그 외의 새가 또 있다고 짐작했다. 마음에도 한발 늦게 봄이 왔다. 이미 산과 들녘에도 산수유와 진달래는 피었다 졌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돈벌이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던 봄날은 서서히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시절은 이미 4월 막바지였다.
“덧없음...!”
아무리 뉴스를 시청하고 주목해도 코로나는 제 갈길 간다는 것을 깨달을 즈음이었다. 헤픈 냉이는 종자 번식을 위해 북쪽 연천과 개안마루 콩밭 일대에 천지로 흰 꽃 노랑꽃을 피워대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시간만은 내게도 공평히 주어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통째로 봄의 시간이 도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중국 발 미세먼지가 없었다. 봄날의 맑고 파란 하늘이 연일 이어졌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렇다고 이미 경험해버린 봄날의 연초록 숲이 뇌리에서 사라질 리가 없었다. 적막한 봄이 신기했다. 한 발자국도 세상으로 나서지 못했다. 바람만은 자유로이 창밖의 세상과 안을 오갔다. 팬데믹의 고요를 비웃듯, 아무데고 아무 때나 강약으로 쳐들어왔다. 산천에 피었을 온갖 봄꽃들만 코로나와 무관했다. 바람이 실어온 꽃향기로부터 봄을 상상했다. 어느 날인가는 라일락 향기가 홀연 코끝에 퍼지고 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뜩 서울의 봄에 사라졌던(일제 잔재라고 베어져 나간 탓에) 아카시아 향마저 유년처럼 아련히 스칠 때도 있었다. 꼼짝 않고 그저 멈춰 있는 이상한 일상이었다.
그때였다. 스멀스멀 의식 한가운데서 자연에 대한 동경이 저절로 살아났다. 그리고는 발아한 작은 초록 잎이 거대 숲이 되어 바람에 소용돌이쳤다. 무협지의 손바닥 강풍처럼, 돌덩이 같이 무거운 심장을 봄이라는 세상 밖으로 떠밀어댔다.
“우주적 에너지의 기동...! ”
시간의 사이클에 따라 반응하는 생명 순환표가 자동으로 발동한 것이다. 나 또한 지구 생명의 시각표에 따라 살아야하는 세포뭉치일 것임에 틀림없다. 공생하며 오감을 주도하는 세포들이 경험 치로부터 꿈틀거렸다. 세포의 집합체인 나는 어쩔 수 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이치인 것이다. 내 안의 다른 자아가 스스로에게 외쳐대고 있었다. 펌프질이 시작되었다.
"니가 제일 남 주기 싫어하는 귀한 시간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쓸모 있게 써라."
코로나가 시작된 날부터 내 몸은 낡은 소파에 누워 있는 생미이라에 불과했다. 뉴스만 보던 자신에게 뇌의 깊은 골짜기로부터의 울림이 멈추질 않았다. 내 삶도 궁극에는 별것 없이 생명유지와 순환일 것이다. 생명의 의무에 충실히 살아온 인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뒤 꼭지를 치받아 올랐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별 것 없이 태어나 꼼지락거리며 살아왔다. 내게도 생명체로서의 사명은 있다. 그것은 멈춤 없이 어떤 방식으로든 나 살고 있는 세상을 돌아보는 일과 배움뿐이었다. 비록, 코로나로 세상이 어수선해도 개인적인 소소한 일조차 멈출 이유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연일 뉴스에 집중해도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는 것이다. 코로나는 빗발치는 총알과 같아서 누구에게 박힐지 예측불가였다.
‘사회적 동물’이 사람을 피해야 했다. 의외로 이 땅에서 쉰을 넘도록 살았어도 가보지 않은 곳이 참 많다. 인적 드문 미지의 땅을 찾아나서는 일은 취미의 한 장르이다. 지난 몇 년의 경험으로부터 안전한 땅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유목민처럼 때론 개척자처럼 코로나를 피해 다니면 되는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사진기 들고 캠핑 가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안 미칠 길 없는 여정을 찾는 일로 살만했었다. 팬데믹으로 인해 억압받는 의식 속에 갇혀버렸다. 달라진 일상이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자 나는 취미인 사진도 찍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멈췄다. 글 하나를 어디에도 적지 못했다. 집에서도 뉴스만 종일 보도록 조작된 인형처럼 눈동자만 굴렸다. 몇 개월을 아침부터 잠들 때까지 뉴스만 보고 있었다. 채널마다 같은 기사가 시간차로 나왔다. 저절로 뉴스가 몽땅 외워졌다. 일단, 6개월 치 실업급여도 중반이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시간이 그저 아깝기 그지없었다. 생계도 답답해져 가고 있었다.
망설임 끝에 드디어 행동에 나섰다. 몇 해를 한탄강 임진강 철원 일대를 쏘다녔다. 그 땅을 터전으로 사는 이들보다 더 다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곳이다. 자연그대로의 인위적 시설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그런 캠핑 처는 경험 치로부터 대개는 두 물이 만나는 합수부였다. 하천의 자갈이나 토사가 평탄하게 언덕을 이룬 곳이다. 대개 교통이 아주 불편한 곳이다.
한탄강과 임진강 주상절리 주변은 절벽이 가로 막아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번거롭다. 퇴적물이 긴 세월동안 쌓여 높아진 삼각주에는 흐르는 물이 범람해도 물막이를 이루어 안정감이 있었다. 탁 트여 가치 있는 풍경을 파노라마로의 긴 시선으로 훑어도 지루할 곳 없었다. 그런 지형은 영락없이 낙원처럼 여겨졌고 쉴 곳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앞에서만 무념무상이 되었다.
늘 한적하기 그지없던 곳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코로나가 닥친 후 막상 가보니 이름 모를 강가와 지류에는 무척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대책 없이 나온 젊은 캠핑 족들이 많아 졌다. 마스크 없이 봄나들이와 자유로운 숨을 들이킬 곳이 누구나에게 간절했던 모양이다. 연천 일대의 강가에는 있어 뵈는 캠핑카를 필두로 일회성 나들이 족이 몰려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좀 늦은 꽃구경 갈 시기였다. 강가는 전쟁 중의 피난처 같았다. 다만, 울긋불긋한 다채로운 캠핑 장비들의 색상과 아웃도어용 SUV 챠량만이 전시중이 아님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폐단도 발생했다. 쓰레기다.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아무데나 버리고 떠났다. 초보자들의 특징이다. 캠퍼들에게 숙영지는 자신의 안방과도 같은 곳이다. 다시 올 기약이 있는 사람들은 되가져가는 습관이 이미 몸에 배어있다. 때문에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을 찾아서 더 달려달려 탐험을 해야 했다.
그날 가다 멈춘 곳의 강은 흐르다가 돌무더기에 막혀 깊이 있는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오프로드 주행자들은 그 길을 엉거주춤 차로 넘었다. 주섬주섬 대강 쌓인 검은 돌길이 아슬아슬했다. 차가 갈 수 있는 길은 깊지 않은 물을 넘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곳은 그런 곳 밖에 없다. 곧 길이 나려는지 어떤 포인트에서는 강의 한 쪽은 포크레인이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길을 정비 중이라는 뜻이다. 4월의 강물은 사람에게는 아직 차다. 몸집이 큰 가마우지들이 자맥질을 하고 있는 떼를 만나게 된다. 자연이 계절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고 있는 풍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후 캠핑이 중단되고 몇 년이 지났다. 요즘 뉴스에서는 가마우지에 대해 강의 물고기를 싹쓸이해서 유해조류가 되었다고 한다.
마음이 억압받는 시절이었다. 비포장도로를 흔들리며 달릴 수록 이 곳은 엘도라도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낯설고 이국적인 딴 세상 풍경이 펼쳐졌다. 그런 우연을 만나면 최애 시청프로그램인 EBS 세계테마여행이나 동물의 왕국의 어딘가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중국 변방의 고산지대절개지의 강가의 가마우지 사냥터 풍경을 만난 것 같았다.
“아직 이런 강의 모습이 있다니! ”
우연히 재난을 피난 나온 나그네의 기쁨치곤 타임세일로 얻은 행운보다 곱절 이상의 득템이었다. 먼 시야에 집들도 보였다. 주상절리 위 평평한 대지에 그림처럼 드문드문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경치 좋은 곳이니 대개는 펜션인 경우가 많다.
성장기에 사람은 어떤 요인으로 부터든 자유를 방해받은 경험을 갖는다.
세상에는 많은 가치로운 일들이 있다. 다만, 유년부터 자연스레 믿어 온 그 무엇을 쫒는 일이 인생후반에 다다를수록 더 강렬해지는 것은 시간의 섭리일 것이다. 사회 문화적 강압이든 가족공동체의 내림하는 습성이든 그로부터 개인은 나름의 결핍과 고충을 겪는다. 그로부터 얻은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대상이 생기는 법이다. '꿈꾸는 자유인'이 되고자했다. 누군가에는 그것이 돈이다. 많이 억눌린 스프링 효과가 간혹 허세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나처럼 세상을 돌아보는 일과 자기 마음에 소리에 빗겨 가면 잠 못 이루는 소심인들은 대개 경제적으로 소외계층이 되기 십상이다. 그로 인한 저항심으로부터 터득한 것이, 스스로 웃기, 꾸임 없는 자연으로 나아가기로 보상을 노려보는 것으로 변환되었다.
< 연천이야기>
한탄강 변이라는 별 사진 한 장이 계기가 되어 3년을 다녔다. 카메라 조리개를 밤새 열어 별자리를 찍지는 못했다. 다만, 비가와도 홍수가 나도 익숙해서 두려움이 없는 땅이 되어 있었다.
22년 3월부터 봄이 막바지에 이르도록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너의 소소한 자유는 공공의 안전을 위하여 제재대상이다'라는 의식에 갇혔다. 날이 갈수록 얼굴에선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더는 안 되겠다’ 라는 감정이 반복적으로 뇌리에 몰아쳤다. 나는 그렇게 휘몰리면 무언가 행동하는 습성이 있는 사람 같다. 매일 가늠했다. 언제 밖으로 나아가야할지를... 일상이 막히니, 해오던 일도 시도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움과 희망이 되었다. 때마침 떠난 날에 하늘은 푸르기라도 하고 파도 소리라도 심장으로 몰아치면 나는 살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북녘에 가까워 개발이 보류된 연천, 철원 땅은 내게 몇 년간 그런 대상이었다. 군사접경 지역으로 지도에도 상세하지 않은 자연이 남아 있는 땅이다. 반면 접근이 어렵거나 비포장도로가 많다.
"아니, 3년째 연천 철원 일대를 지역민보다 더 쏘다녔는데도 첨 오는 곳이 다 있네!
새롭고 좋은 곳은 알려지면 오염되니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다. 오지의 땅은개척자들의 땅이다. 일단 나선 길은 그 길의 끝에 닿지 않으면 돌아서지 않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탄 차들이 확률이 높다. 개중에는 전문 오프로드 매니아들도 많다. 뿌연 흙먼지와 강자갈이 바퀴에 밟혀 거친 소리를 낸다. 길 없는 길을 거침없이 또 내달린다. 더 나아갈 수 없는 끝에 다다라야 멈추게 되는 흐름이다.
화산폭발로 용암이 흘러 굳었다가 식기를 반복한 지형은 육각형 주상절리의 병풍을 이루고 한탕강과 임진강으로 이어진다.
오감이 ‘여기다’라고 점지해 준 곳에 멈춰야 비로소 몸도 마음도 평안하다.
어딘가 ‘노마드’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증거 같다. ( [프]nomade 철학: 들뢰즈에 의해 철학적 의미를 부여받은 말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 또는 여러 학문과 지식의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앎을 모색하는 인간형을 이르는 말. )
때문에 남들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SNS에 평을 내 놓아도 그것이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느껴지는 대로 나아가고, 머물고 싶은 대로 눈과 귀와 몸이 반응하면 비로써 멈추어진다. 그날도 달리다 길이 끝난 곳에 멈췄다.
“작은 엘도라도...!”
그런 느낌이 충만한 곳이었다. 강 상류의 모습이 생소하고 경이로웠다. 자연 상태 하천의 상류가 어떤 모습인지 이 나이에 처음 보았다고 확신했다. 다양한 크기의 작은 바위덩이가 절리 된 채로 둥글어지면서 강 한가운데 여기저기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물위에 핀 검고 푸른 꽃 같았다. 화산지대의 검은 현무암 덩어리들이 비와 물줄기로 오랜 세월 풍화되어 이끼 꽃이 피고, 바위 꽃이 피어 점점이 섬 같았다. 바위 아랫도리는 수위 변화로 잠겼다 말랐다한 수평적인 물때의 선이 나이테가 되었다. 언뜻 퇴적암 층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묵직한 유화의 색채감이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강 건너 절개지로부터 꽤 우렁찬 폭포소리가 연신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낙하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20미터 이상 되는 폭포였다. 그 정면에 터를 잡았다.
출발할 때, 서울 하늘은 흐렸다. 어쩐 일인지 우리 터 바로 위는 밀짚모자의 터진 정수리처럼 거슬거슬 구름이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해가 기울수록 새소리는 더 다양해졌다. 까만 가마우지는 제법 물고기를 낚았는지 어느새 사라졌다. 먼 거리에서도 물질 후 가마우지의 깃털은 새까맣게 윤이 났고 매끈하게 보였다. 크고 하얀 새는 해오라기였을까싶다. 정면의 폭포 아래쯤에서 몇 번인가 날개를 폈다 접았다가는 깃털 새로 대가리를 넣어보고는 높이 멀리 날아갔다. 새들이 머리를 강에 박고 먹이를 찾는 할 때마다 무지개송어의 껍질에서 반사하는 듯 물 광이 강 표면에서 떴다 사려지는 듯 희번득거렸다. 또 다른 흰 새가 날아왔다. 날개 끝에 검은 깃털이 한 줄을 이룬 것을 보니 그림엽서에서 봤던 혹시 황새일까 싶었다. 설마 황새는 겨울 새 아닌가...의심스러웠다.
"저 새 좀 봐요. 폭포 주변이 음이온이 많아
좋은 줄 아는지 다른 새가 또 왔는데 아까 것 하고 달라요.
꺽지랑 무지개 송어가 많다더니 ..."
생각지 못한 비경에 끌려 정착해 버렸다. 그 탓에 먹거리도, 마실 거리도 없었다. 자리를 잡고 몸만 징검다리를 건넜다. 주상절리로 꺼진 땅의 평지로 올라왔다. 여러 번 해도 처음 하는 것 같은 일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야영 준비다. 한 낮의 햇살은 4월말인데도 뜨거웠다. 텐트 치는 일은 늦은 오후로 미뤘다. 철쭉이 피고 지고를 매일 반복하는 봄날이었다. 노지의 더위를 피할 스케줄로 강을 건너 동네를 구경하기로 했다. 경사를 오르자 현지인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동네 노인이 뒤뜰에 나와 있었다.
"어르신 여기가 어디예요?"
“황강이요.”
"가게는 어디 있어요?"
“큰 도로 따라 가면 있소.”
아름다운 천혜의 강에 대해 묻자, 황강이라고 했다.
30여분 걸어 편의점서 캠핑 필수 템을 최소한 사러 지역 원정을 나섰다. 낯선 곳이라 주상절리 위의 펜션 하나를 돌았다. 꽤 걸어서 논둑밭둑을 지났다. 도로변 사찰에는 머지않아 부처니 오신 날이라 연등이 달려 있었다.
-후에 지도를 찾아도 황강이라는 강은 없었다. 지도를 탐색했다. 강줄기가 돌고 돌아 닿은 지방도로에 선을 그어보니 차탄천 줄기였다. 노인은 대체 왜 황강이라고 했을까 의아했다. 추측하건데, 유년시절부터 구전으로 북쪽에서 흘러 온 강의 이름이 뇌리에 박혀 있을 거라 지레짐작해 본다.
어쨌든, 나에게는 신비로운 땅이었다.
볕이 참 좋은 계절이었다. 위로는 평야 아래로는 물길이 나있다. 절개지 안쪽으로 폭포수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기이하게 풍화된 땅이다. 캠핑 터 윗 쪽, 옛 다리는 외져서, 조용한 가마우지들의 사냥터다. 신비롭고 한적한 땅에 아까부터 의식에 걸리는 게 있다. 강변에 길을 내고 있던 포크레인이다. 아무래도 한적한 강가에 둑과 길을 넓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누리길 조성사업 같다. 쉘터를 치는 중에 누군가 살갑게 다가왔다.
“쉘터 치는 것을 거들어 드려야 겠네요”
라며 건장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그는 건너편 절벽 위 끝자락의 토종닭 식당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했다. 어디로 해서 여기까지 차가 닿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내려왔다고 했다. 도움의 댓 가로 길을 물어왔다.
아마도 이런 외진 땅에 텐트 팩을 박는 이들의 취향은 인적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성향이 있다. 사전 양해의 뜻을 살피는 것 같았다. 묻지도 않는데 자기네들은 낚싯대를 싣고 다닌다고 했다. 좌상바위 가는 길에 어딘지 모를 샛길로 들어와 도강을 해서 닿았다는 정보를 도움의 삯으로 넘겨주었다.
만약 오늘 중으로 차로 여기에 오기를 성공하면 ‘꼭 인사 오겠다’는 여운을 남겼다. 남자는 큰 걸음으로 가마우지가 떼로 모여 있는 먼 상류쪽 다리 옆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그도 야생에 목마른 자로, 무지개 송어를 탐하는 사람이었을까. 아까 장보러 가는 길의 젊은 두 남자에게서 본 수렵과 채취를 갈구하는 원시적인 눈빛을 닮은 듯 했다.
"자연 낚시터를 물색하는 꾼들이 있는 걸 보니, 물이 1급수인가 봐요.
무지개송어에 꺾지도 많다니..."
“우리도 뭐 통발이라도 살까?"
동행자가 물어왔다.
" 근디, 우리가 먹겠어요..."
봄날의 물소리는 참 싱그러웠다. 일전에 동이대교 아래서 장박으로 낚시를
하던 목동에 산다는 외눈이 아저씨가 생각났다. 손맛보라고 굳이 불렀다.
돌에 매단 낚싯 줄을 당겨보라고 했다. 큰 잉어가 퍼덕거렸다.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줘도 먹지 못할 것들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굳이 훼손할 필요는 없었다.
하늘 위는 날개를 펴고 나는 큰 새들이 많았다. 이른 오후에 날던 새와 많이 바뀌었어요.
"새소리가 달라졌네."
장보러 가는 길에 강물에 떨어져 꽂힐 듯 아스라해 핀 수달래(물가에 핀 철쭉) 사진 몇 컷을 찍었다.
해는 어김없이 저물어 왔다. 햇살이 주상절리 절벽으로 깊숙이 각도를 기울여 꽂혔다. 깊고 길게 깎인 하늘의 경계를 이룬 시야에 푸르름이 측광에 돋보이고 있었다. 등받이 높은 캠핑용 의자에 잠수하듯 몸을 낮추었다. 호야등과 틸리(황동버너의 일종. 캠핑 자들은 1,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하는 옛스런
등불이나, 버너 군용품등을 선호 분야가 있다.)등 3개가 벌써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내가 너의 등불이 되어 줄께'라는 기세로 빛을 내고 있었다.
좋은 땅의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물가의 맥주 한 잔은 마치 맹물 같았다. 술을 못하는 편이다. 맥주 한잔에도 벌겋던 낯이 왠지 천혜의 강가에서는 취하지 않았다. 음이온 때문일 수도 있다.
"내일은 폭포 시작이 어데인지 찾아봅시다.
아님, 아침에 폭포를 슬리퍼로 올라서 씻을 겸 확인하던가..."
내일, 탐험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천이 풍화되는 순서 그대로의 모습이 아직 우리 땅에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어두워지면서 포크레인 소리는 크게 울려 주위의 새소리를 삼켰다.
언젠가는 강 바위 들이 없어지겠지, 가마우지도 무지개송어도 사라지려나 조마조마한 불안한 입놀림으로 안주로 씹었다.
자연은 단지 공간을 채우는 형채 만은 아닐 것이다.
연천은 연고 없는 땅으로 올 계기를 주었다. 마음이 위로 받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 주변에 자연이 없는 미래가 다가온다는 불안한 마음이 밤이 되어, 의식을 가라앉게 했다.
'무위자연'...그냥 제자리에 있어오던 그대로 나둘 수는 없는 것일까...
마냥 아쉬운 마음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양면성이 늘 있다. 지구 온난화로 자연재해가 많아지면서 아쉬울 때는 개발하고, 부유해지면 다시 자연 상태로 복구하고를 반복하고 있는 추세다. 자연이 그대로인 곳에는 재해라는 개념은 없다. 사람이 가까이 없으니 해를 입을 사람도 없는 것이다. 단지, 자연의 ‘변화’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 다니다보면,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에도 쓰고 버린 물티슈 흔적이 곳곳에 있다. 썩지 않고 이질적으로 방치되는 페트병 잔해들을 국토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재료가 자연에는 더 낫다. 적어도 그 땅에 다시 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거나 이 땅에 사람이 지속적으로 거주할 것이라면 말이다.
자신이 좋아해서 쫓아 온 것들이 곧 사라질 거라는 것을 예감하는 일에 가슴이 먹먹하다.
이 땅에 왔다가면서 지켜지지 않는 것들을 '꿀 먹은 벙어리'로 지나쳐야 할까. 길이 좋아지면 너도나도 오갈 터이다. 사람이기에 사람 속에서 사람다워진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코로나가 닥쳤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자꾸 가고 그것이 더 편했다. 작고 소심한 나는 탄탄대로를 걸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인지 큰 길이 생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작고 호젓한 자연의 곁길도 숲길도 바닷길도 섬 길도 참 좋았다. 사람도 제 생긴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 때 행복하다고 느낀다. 자연도 자기 터에서 생긴 대로 존재하고 변화하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바람과 비에 자신을 내어주고 자기 나름의 모습으로 존재해온 섭리가 줄곧 있어왔기 때문이다. 개발로 인간의 접근을 쉽게 하여 다수가 누려할 것인가 그대로 놓아두고 시간이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할 것인가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한탄강 임진강 일대도 몇 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강변과 자연노지, 산자락마다 광대역으로 철조망이 쳐졌다. 그 해 전에 돼지 열병이 발생한 탓이다. 사람도 짐승들도 철조망에 막혀 오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느 쪽 욕심으로 부터 시작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기억저편 강가 바위에는 철쭉이 피고
강 상류의 물소리는 고약하게 으르렁거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섬 섬이 고운 흰색를 품고는
검은 물 때 낀 큰 바위를 섬처럼 돌아 흐른다‘
(21년 4월 말에)
첫댓글 코로나로 힘들었던 시기에
쓰신 글이군요.
작가님의 모처럼 갖고 싶었던
휴식조차 도난당하신~~
참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참담한 날들이었지요.
올 봄은 편안하게 즐긴 것
같습니다. 대단한 필력이세요
감사합니다.
어째 이 글을 이제야 봤을꼬...ㅎㅎㅎ...내내 읽으면서 빙점을 쓴 미우라 아야꼬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부디 문운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사유와 도시적 언어(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두고 어느 평론가 쓴 낱말) 그리고
번뜩이는 재치와 비유...그 문향..당신을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답니다...결코 문운이 없어도 이 땅에 살다 간 족적이
황강을 찾는 사람에게 주상절리 같으리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