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선 비행기재 2. 울진 십이령 3. 승주 굴목이재 4. 인제 북암령 5. 정선 성마령 6. 문경 말구리재~하늘재
▒ “아흔아홉구비 정선 사람 나들이길이래요” ▒ 정선 비행기재
마침내 비행기재 가는 길목에 섰다. 정선 광하리 광석교 옆 슬레이트지붕의 외딴집 앞. 얼음 머금은 조양강 칼바람에 손이 자꾸만 옷깃에 가 닿는다. 나흘 전 대설이 지났지만 도무지 눈 올 가망 없는 메마른 날.
“이런 날씨에 그 험한 델 뭐 볼 거 있다고 가-”외딴집 할머니의 말이 귀에 쏙 박힌다. 비행기재(618m). 정선군 정선읍 광하리와 평창군 미탄면 백운리를 잇는 비행기재 하면 42번 국도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험한 곳으로 손꼽힌다. 평창·제천·서울 방면으로 나들이 가는 정선사람들을 위해 처음으로 찻길이 열린 고개다.
오죽하면 타향에서 온 운전사는 죄다 “울고 왔다 울고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일까. 뜨락에 거꾸로 처박힌 ‘담배’ 간판은 조양강을 등진 이 허름한 집이 비행기재 가는 길목을 지키던 옛 가겟집임을 단박에 말해준다. “아무것도 생각 안나”만 연발하던 할머니는 버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국수를 말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무의식중에 흘린다. 주인도 바뀌지 않았다. 건물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여주인 나이가 일흔세살이나 들었고 이젠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집 옆에 선 ‘광하지구 현장사무실 태흥건설’ 안내판을 지나 망하로 향한다. 석회암지대라 물이 부족해 광석나루 건너 모평 도깨비굴에서 물을 떠다 먹었다는 동네 망하(望河). 그 망하로 드는 아스팔트길은 활주로인 양 탄탄대로고 근래 저리도 파란 하늘은 처음 본다는 김부래기자의 감탄사에 고개를 들어보니 정말로 오늘 비행은 ‘오케이’란 예감이다. 망하 뒷산 상산(443m) 줄기의 나지막한 빈지막재에 도착한다. 직진하는 길은 비행기재길이고 오른쪽의 내리막길은 마을로 드는 길이다.
삼거리 버스승차장 앞 구멍가게에서 과일사탕 한 봉지를 사 주머니에 나눠넣고 신나게 비행기재를 향해 이륙한다. 온전한 옛길은 빈지막재에서 멀찌감치 보이던 솔숲부터 시작되었다. 그냥 신작로다. 망하와 작별하기 위해 잠시 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가 엎드린 모양이라는 상산과 콕 찍은 듯 여물통 자리에 들어앉았다는 마을 앉음새 등 어제 저녁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비로소 수긍이 간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망하가 인근에서 가장 큰 마을인 것은 이런 풍수 덕분인가. 생각을 멈추고 지상과 결별하듯 한구비를 돌아드니 고요한 응달길이 기다리고 있다.
전부 몇 구빈지 세는 사람에게 맥주 사겠습니다.” 첫 구비를 돌며 동행한 임대수씨(50세·태백 한마음산악회), 오은선씨(34세·수원대산악부OB), 김부래기자에게 숙제를 줬다. 지형도에 표시된 옛 42번 국도는 눈으로 훑기만해도 어지럼증이 날 정도로 구불거린다. 억새가 많은 큰새덕산(756.9m)·작은새덕산(722m) 허리에 난 이 옛길은 망하의 이희규옹(89세)에 의하면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길이 좁고 험해 ‘제무시(GMC)’라는 산판 트럭만 줄곧 오갔다. 그러다 강릉에 본사를 두고있던 30인승 강원여객 완행버스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54년부터. 그때까지 고개 아래 사람들은 트럭이라도 얻어타지 못하면 미탄까지 20릿길을 걸어다녔다. 그 후 71년 8월에 국도로 승격되었지만 여전히 비포장의 세월이었다. 고개까지는 정선쪽이 미탄쪽보다 두 배 가량 멀다. 망하에서 어질머리나게 산허리 돌고 돌아 고갯마루에 이르면 숨 돌릴 틈은 잠깐. 다시 백운리 백골마을까지 구불텅 구불텅 내려가면 꼬박 12킬로미터. 버스는 하루 한번 다녔다.
버스도 사람도 몸을 가누기 힘든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이었지만 정선사람들에게는 그래도 버스 타고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신작로, 신나는 나들이길이었다. 사실 비행기재는 ‘예명(藝名)’이고 본명은 마전치(麻田峙)다. 마 농사가 잘되었다는 재 아랫마을 마전(麻田)에서 따왔다. 정선의 관문 하면 단연 군수 행차 길목 성마령(星麻嶺)이었다. 그러던 것이 마전치로 버스가 다니게 되면서 이 고개는 일약 정선 제일 관문으로 비상하게 된다. 비행기재란 이름 역시 이때 생겼다.
아흔아홉 구비 아찔한 벼랑을 곡예하는 버스 속에서 1시간여를 견디노라면 오죽 오금이 저렸을까. 걔중에는 더러 바지가랑이를 적신 조무래기들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비행기재란 이름은 필경 정선사람들이 붙였을 성싶다.
그러나 88년 12월 비행기재 아래로 터널이 뚫리고 마전-벽골 골짜기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개통되면서 50여년 넘은 이 길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다. 오롯한 옛길을 간직한 비행기재길은 그 후 까맣게 잊혀졌다. 마치 전성기라도 도중하차 하고 나면 금새 까맣게 잊혀지고 마는 인기 가수의 이름처럼.
망하 사람들은 이제 비행기재 갈 일이 없다고 했다. 사람도 살지 않을 뿐더러 고개에 있었다던 주막집도 사라진 마당이니 우리 일행은 그저 묵묵히 걷게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몇 구비 돌지 않아 갑자기 벙커형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듣지 못한 ‘물건’이었다. 4명은 좋게 들어앉을 만한 공간이었다. 비를 피하기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조물은 몇 구비마다 규칙적으로 나타났다. 천장 모양도 반듯한 것과 아치형이 번갈아 나왔다.
구조물의 용도는 자갈이나 모래를 넣어두는 저장고였다. 눈 많은 정선땅. 동지 지나 눈 한 번 내리면 이삼일 버스가 두절되기를 밥먹듯이 했다. 여름철 폭우에 길이 패이거나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망하에 사는 최봉오씨(65세)의 기억으로는, 마을사람들이 제설작업에 나선 것은 1년에 적어도 서너 번. 발이 묶이지 않기 위해 광하리는 물론 귤암리, 용탄리, 가수리, 백운리 등 근처 동네사람들은 죄다 자진해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오직 한마음이었다.
텅 빈 옛길에서는 의외의 길동무들을 만났다. 길 위로 빗금치는 미류나무 행렬. 울퉁불퉁 밟히는 둥글납작한 조약돌에서는 조양강 물내음이 전해왔다. 까칠해진 나무껍질, 손끝만 닿아도 아린 차가운 바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훅 불면 민들레 홀씨처럼 한 번에 흩어지고 말 할미밀빵, 사위밀빵의 꼿꼿한 모습을 보니 움츠린 어깨가 활짝 펴진다.
정오가 지난 시각. 굽이를 돌 때마다 햇살은 심심한 듯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한다. 햇볕이 이리도 고맙고 따스한 길동무가 될 줄이야. 길은 뱀장어처럼 부드러운 직선이다가 화난 듯 지그재그로 달리기도 했다. 볼이 얼얼해져 고개를 푹 숙이고 모롱이를 돌던 일행은 동시에 엇! 하고 소리치며 걸음을 멈췄다. “제동장치 점검 정선경찰서”라 적힌 청색 안내판 앞에서였다. 비행기재 넘던 가장 큰 차는 2.5톤의 제무시였다.
급회전이 많아 차는 시속 20킬로미터 이상 속력을 내지 못했는데 그 제무시가 종종 벼랑으로 날았다. 사람 실은 버스도 두세 번 떨어졌다. 80년대 정선경찰서 교통계에 근무했던 전재근씨(49세·정선경찰서 경무과)에 따르면 비행기재에서의 추락 원인은 대개 빙판에 미끄러지는 것이거나 브레이크 파열이었으니 이런 경고판이 붙을 만했다. 이 오지에서 비행기 타본 이가 있을 리 만무한 당시 하필 비행기재라 부르게 되었을까. 트럭을 몰고 고개를 자주 넘어다녔던 임대수씨는 이런 사고 때문에 비행기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반면 버스를 타고 넘어봤다는 김부래기자는, 차창으로 내다보면 공중에 둥둥 떠가는 듯해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라고 엇갈린 의견을 낸다. 망하 사람들 역시 두 가지 이유를 놓고 결론을 내리지 못했었다. 차들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벼랑 가장자리에 이따금씩 무릎 높이의 콘크리트 연석(沿石)이 박혀있다. 마주 오는 차를 피할 수 있도록 모롱이마다 ‘양보차로’가 있다. 이런 급커브길은 운전자에게는 악명 높았겠지만 걷는 이에게는 오히려 설레임마저 불러일으킨다.
스물다섯번째쯤 될 모롱이에서 수준점(531m)을 확인하고 보니 일행이 세고 있는 굽이수가 지형도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발 아래의 아스팔트 국도변의 마전을 내려다보며 마흔번째쯤 굽이를 돌았을 때 마침내 그리던 비행기재 마루가 눈앞에 있다. 철탑이 높다랗게 세워진 흉칙한 몰골로.
오롯하게 잘 보존된 옛길을 지금껏, 세 시간이 넘도록 좋아라 내리 걸었는데 정점에서 저렇듯 흉칙한 물건을 만나다니… 배반감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맥이 풀린 우리 일행은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엎어진 김에 싸온 도시락이나 먹고 갈 작정으로.
버스가 일단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잠시 숨을 돌렸다. 마전이나 동무지에서 올라와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였다. 고개에는 주막집이 두 채 있었다. 정선쪽과 미탄쪽으로 한 채씩 마주보며 서있었다. 정선쪽 주막집의 마지막 주인은 권씨였는데 방은 두세 칸, 일대에 흔한 억새로 지붕을 이은 이 집을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냥 ‘투전집’이라고 불렀다. 철탑은 정확히 주막집 터로 짐작되는 자리에 세워졌다.
한국통신프리텔과 신세기통신이 세운, 016·017 무선통신 공용기지국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전화기 화면에는 안테나 막대 여섯 개가 선명히 표시된다. 일행 네 명 중 세 사람이나 무선전화기를 가지고 있으니 앞서 느낀 배반감이란 결국 스스로가 돌려받은 셈이 아닌가. 하산길은 서남향. 일몰까지는 두어 시간 전. 저녁볕이 길 위로 쏟아져 올라올 때보다 한결 따뜻했다.
길가엔 우아하게 드라이플라워된 각시취가 지천이고 계절을 잊어버린 억새가 새하얀 손으로 배웅을 한다. 국도로 내려서니 산등성이에는 미열만한 석양이 남아있다. 건너편 백골마을에 가로등이 켜진다. 버스가 고장나 사람들이 오도가도 못할 때면 이 동네 첫집 임씨네 안방 아랫목에 발 넣고 뜬눈으로 밤 새운 일이 비일비재했다는데…. 임씨는 여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옛얘기를 들려주지만 자동차들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비행기재터널로 바삐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출발점은 정선 광하리 광석교(혹은 광하파출소) 앞이다. 거기서 신작로를 따라 망하 버스정류장과 구멍가게 하나가 있는 빈지막재 삼거리까지 간 다음 왼쪽길로 접어든다. 고개 마루까지는 외길이다. 비행기재 마루에는 무선통신 기지국이 있고 삼거리다. 올라가던 쪽에서 직진하는 내리막길이 미탄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남동 방면)의 오르막길은 동무지로 가는 길이다. 미탄쪽 42번 국도에 거의 가까워져 쓰레기매립장을 지난 다음 국도 바로 옆 ‘한일종합대리석 광석사업부 5km’란 표지판 있는 곳까지 오면 옛길 걸어넘기는 끝난다. 광하리 광석교∼비행기재∼백운리 백골앞까지 걸어서 4시간. 눈이 없으면 4륜구동차는 넘을 수 있다.
▒ 경북 울진군 북면·서면 ▒ 울진 십이령 ▒ 미역 소금 지고 넘던 꼬불꼬불 열두고개
구정을 하루 앞두고 간신히 취재 종점 광회리 외광비에 도착한 것은 밤중이 되어서였다. 이틀 낮동안 내리 걷고도 모자라 헤드랜턴까지 켜고 걸음을 재촉했던 십이령길의 강행군. 이번 호에 소개되는 취재 전반부인 새재까지는 아름다운 옛길의 정취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후반부 여정은 도배되다시피한 임도 사이에서 잘리고 남은 옛길을 찾느라 열 걸음 후퇴와 스무 걸음 돌아가기를 반복하는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후반부의 여정을 생각하면 다시 못 갈 듯싶었다. 적어도 취재 직후에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임도에 잠식돼가는 십이령의 현실이 오히려 옛길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름답고 걷기 편한 옛길만 기대하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옛길도 찾아내어 걸어넘기. 아무래도 옛길 걸어넘기에도 새로운 방식 하나를 추가해야 하리라. 십이령에 관해 귀띔한 이는 울진 부구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김경하씨(42세·백두대간식물탐사회)였다. 울진의 유일한 내륙 통로. 군수도, 과거 보러 가는 양반도, 보부상들도 모두 하나같이 넘던 곳. 그 중 십이령의 단골은 울진과 봉화 장을 오간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은 행상, 선질꾼이란 이름 외에도 다리가 없는 ‘바지게’를 메고 다녀 이 지역에서는 주로 ‘바지게꾼’으로 불렸다. 바지게에는 소금, 미역, 생선 등 소박한 생필품들이 가득했고. 5만분의 1 지형도 〈죽변〉을 꺼내보았다. 그런데 ‘十二領’ 글자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엉뚱한 곳에 박혀 있었다. 그후 십이령에 관해 수소문하는 동안 아리송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십이령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십이령에는 정작 ‘십이령’이란 이름의 고개는 없었다.
십이령은 울진과 봉화 사이를 왕래하는 동안 넘어야 했던 열두 고개를 말한다. 열두 고개를 넘어야 울진이든 봉화든 닿을 수 있었으니 이 고장 사람들에게 십이령 그 자체가 울진과 봉화를 잇는 옛길 이름으로 정착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지도 제작자들이 십이령을 지형도에 제대로 표기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울진 울진장·흥부장, 봉화 내성장·춘양장을 오간 바지게꾼들이 3일 낮밤을 꼬박 걸어야 넘을 수 있었다는 십이령은 대략 150리길.
울진에서 줄곧 서남방면으로 달리는 십이령은 울진쪽에서 바릿재→새재→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에 이른 다음 봉화땅에 들어 고채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 등으로 이어졌다. 36번 국도가 훼방놓는 봉화쪽과는 달리 울진의 십이령 옛길은 지금도 호젓하게 남아 있다.
새재나 낙동정맥의 한나무재 등 예나 지금이나 근접하기 힘든 높고 험한 고개들 덕분이었다. 보부상들의 집결지였다는 울진군 북면 두천 1리의 바깥말래에서 취재일행도 집결했다. 구정이 내일 모레인데도 옛길에 매료되어 이번 취재에 동행한 권택경씨(40세·태백 한마음산악회 등반대장)·김경하씨와 합류한 후 이 마을에 있다는 보부상 우두머리 반수(班首) 권재만(權在萬)과 접장(接長) 정한조(鄭韓祚)의 불망비(不忘碑)부터 찾아나섰다.
입춘 하루 앞둔 따뜻한 날. 때마침 내의 차림으로 툇마루에 나와 앉아 있던 민가의 노인은 아이들이 썰매 타며 노는 계곡 건너편의 비각이 일행이 찾던 곳임을 알려준다. 노인은 올해 예순일곱살인 박장성씨였다. 박노인은 보부상들이 집결하던 이곳 바깥말래에 주막집이 세 곳 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그 중 하나라며 십이령 얘기를 풀어놓는다. “(바지게꾼은) 미역 소금을 사서 싣고 내성장까지 가는데 한 열명 스무명씩 모여 출발했지요. 해방 후부터 안 다녔어요.
저기 비각 앞으로 난 길이 십이령 가는 길입니다. 너블한재 넘으면 발현동(發現洞)인데 폐가 한 채가 있고 바린재(발재)가 바로 보입니다. 재에는 당집도 있고요. 그후로 계속 무인지경이지요. 요즘 성황당 보수공사중인 곳이 나오면 거기가 새재인데 여기서 새재 넘어 대광천까지는 족히 세 시간은 걸어야 해요.” 길을 자세하게 알려준 박노인과의 조우로 취재는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오후 3시가 다 돼 가고 있었다. 우선 하루를 접게 될 서면 소광리 대광천까지를 취재 전반부로 잡고 이후로는 다음날 걱정하기로 했다. 비각 안에 선 두 개의 철비를 훑어내린다.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韓祚不忘碑)’. 철비의 주인공은 보부상 회장격인 반수와 부회장격의 접장이고 모두 내성 출신이다. 새재 조령성황사 연대기록을 발굴한 임경희씨(영남대학교 한국정치사 교수)에 의하면 이들은 1910년대에 살던 사람이다.
보부상의 우두머리가 내성 사람으로 자기 고장의 바지게꾼들을 보호하려 한 것이니 그당시 소금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생필품이었나를 짐작케 한다. 비각 앞을 지나자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언덕으로 길이 이어졌다. 효자각이 자리한 이 언덕에서 옛길은 등성이를 타고 희미하게 이어지다 버스도 다닐 만큼 넓은 임도와 합쳐졌다. 멀리 고갯마루에 선 당나무와 당집이 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단박에 ‘저것이 발재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발현동에 온 것이다. 발재에서 임도로 10여분 내려가니 간이창고가 놓여진 곳에서 십이령골이 합류하고 있었다. 옛길은 이제 십이령골 상류를 따라간다. 버들강아지에 물이 올라 살결이 보드라운 은빛이다. 계곡에는 눈과 얼음이 걸쳐져 있었지만 물살에서는 무거운 옷을 벗어버린 뒤의 가뿐함처럼 쾌활한 기운이 마구 전해져 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봄이 오고 있구나!’라는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온다. 모두들 외투를 벗어 배낭 속에 집어넣는다. 십이령골은 평화로웠다. 계곡과 옛길은 어느 쪽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사이좋게 이어졌다. 길은 평탄했고 간혹 나타나는 굴곡은 순하고 부드러워 걷는 이를 조금도 성가시게 하는 일이 없었다. 이런 십이령골과 십이령 옛길이 어울린 아름답고도 적막한 여정은 무려 1시간 반 가량 계속됐다. 찬물내기를 지날 즈음 석양이 비쳐들었다. 발걸음을 서두른다.
곧게 이어지던 길이 갑자기 U자형으로 홱 굽돌았다. 옛길과 이별하고 가파른 임도길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고도가 순식간에 높아져 어느새 골짜기가 까마득하게 보였다. 이대로 가면 임도 따라 일행은 대광천 상류까지 내려갈 것이었다. “이 놈의 임도는 도무지 재미가 없어요. 골짜기나 능선의 자연스런 선을 뻔히 놔두고 제멋대로 길을 내서 여기에 한번 붙잡히면 마냥 따라 걷게 되고 말아요”라며 수년간 호젓한 오지산행만 즐기고 있는 김부래기자가 싫증난 듯 한마디 한다.
다행히 일행은 그쯤에서 왼쪽 새재로 오르는 옛길을 발견했다. 작년 10월부터 70일 동안 울진 군청에서 새재의 성황당 복원공사를 했는데 목재를 나르기 위해 이 길목에 걸쳐둔 나무다리 덕분이었다. 새재 오르는 길은 점점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새재까지는 불과 10분 거리였지만 길이 가파르고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데다 눈까지 얼어 있어 조심스레 오르니 족히 30분은 걸린 느낌이다. 그렇게 오르는 동안 울진 사람들이 새재를 왜 십이령의 중심고개로 여기는지 저절로 수긍이 갔다. 보부상들이 한숨 지며 즐겨 부르던 노동요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 역시 이 대목에서 더욱 애절하게 불려졌을 듯하고.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후렴)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넘고/꼬불 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 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꼬불 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노.” 성황당에는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새재에 당도한 일행은 그 옛날 나그네들도 그랬을 것처럼 인사를 올린다. 새재의 역사만큼이나 운명을 같이해 왔을 조령성황사. 성황사 기록을 발굴해 낸 임경희교수는 1868년 보수했다는 기록에 근거해 이 성황사의 역사를 1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장구한 역사를 지닌 성황사는 불과 넉달 전 복원공사를 한다고 허물어졌다.
옛 향기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눈 앞에는 새기와와 콘크리트로 단장된(?) 건물 한 채가 서 있을 뿐이다. 기막힐 노릇이다. 160년 역사도 한순간 깡그리 사라질 수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라면. 대광천을 따라 후곡동 민박집인 남의석씨 댁에 든 것은 8시가 다 되어서였다.
취재 일행에게 “좋은 일 하십니다”며 말문을 연 남씨의 고무신 신고 새재 넘던 경험담과 춘양목 원산지로 유명한 이곳 소광리의 500년생 황장소나무 얘기 등으로 밤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운다. 남의석씨는 일행이 걸어야 할 십이령길을 마치 어제 다녀온 것처럼 낱낱이 설명해주고 있는데, 왜 눈앞에는 어둠 속에서 보았던 성황사가 자꾸 어른거리는지….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울진 십이령길의 답사 코스는 울진군 북면 두천 1리 바깥말래에서 시작하여 발재(두천리)∼새재(서면 소광리)∼대광천(소광리 후곡동에서 1박)∼느삼밭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서면 광회리)∼외광비에 이르는 1박2일 거리. 이 중 발재∼새재 구간이 옛길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십이령의 백미다. 반면 새재 이후로는 대부분의 옛길이 임도로 대체되고 남아있는 옛길도 찾기가 쉽지 않아 초행자에게는 옛길 걷기의 즐거움이 다소 반감될 수 있는 것이 흠. 따라서 추천 구간은 두천리∼발재∼새재∼대광천까지 9.2km 약 3시간 30분 가량, 여기서 버스가 다니는 후곡동까지 5킬로미터를 걷는 시간을 감안하면 당일산행으로 가능하다.
십이령 들머리는 두천 1리 바깥말래 내성행상 불망비 비각앞. 비각을 지나 왼쪽 언덕에 오르면 효자각이 있고 이곳에서 등성이를 따라간다. 대형버스가 다닐만한 임도에 도착하면 이곳이 발현동. 당집이 선 발재가 훤히 보이고 마을에는 폐가 한 채가 있다. 발재 마루에서 10여분 내려가다 간이창고가 서있는 십이령골 합수점에서 약 1시간 30분 가량이 십이령 옛길의 백미 구간. 길이 U자로 급회전 하는 곳에서 10여분 오르면 왼쪽으로 새재 성황사로 오르는 옛길을 만난다. 새재 성황사까지 10여분. 새재에서 소광리 대광천 마을길까지 약 40여분, 길이 넓고 좋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송광면 ▒ 승주 굴목이재 ▒ 선암·송광 그 비무장지대를 가르는 곧은 길
선암사 집단시설지구 한켠에선 관광버스를 대절하고 온 촌부들의 어깨춤이 한창이었다. 촌부들이 연신 흥얼거리는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가락 속으로 “인생은 짧아∼”라는 탄식조의 읊조림이 나즈막히 끼어 들려왔다. 모처럼 가사에서 탈출한 자유로움. 그러나 한순간, 여인들은 흐드러진 꽃잎에 취하자마자 반짝했다 지고마는 봄꽃의 생명과도 같은 인생을 떠올리고 만 것일까.
봄을 즐기면서 봄 햇살 아래서 그들은 또 순간 안타까움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선암사엘 꼭 한번 가보라. 그리고 기왕이면 봄에 가라”며 선암사 얘기를 해온 이가 있었다. 그래서 가게 되면 선암사를 닮은 민박집을 꼭 찾아내어 하룻밤 묵어보리라 생각하곤 했다. 바로 그 상상속의 민박집을 찾아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중에 뒤통수를 치는 촌부의 탄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때 풀빛 번지는 비탈 끝으로 집채보다 큰 아름드리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선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만개한 목련꽃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투두둑 소리내며 곧 떨어질 듯한 숨막히는 광경도. 요거 한번 먹어 보시요잉.” 밥상에 올린 갓김치며 젓갈을 가리키며 민박집 여주인이 한 마디 던질 때마다 새삼 ‘맞아 여기가 남도지’를 되뇌인다. 목련나무 아래서 남도 여인과 작별을 하고 선암사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먼빛으로 보이는 조계산은 아직 갈색이다. 그러나 1주일 뒤면 철쭉이 만발할 거라는 매표소 직원의 얘기를 증명하듯 갈색의 나뭇가지들은 부드럽게 부풀어 올라 머지않은 연두빛 신록을 예고하고 있다. 태백에서 먼길을 달려온 권택경씨(40세·태백한마음산악회), 김부래 기자와 함께 매표소 앞에 설치된 조계산 조감도를 훑어본다. 산의 동서 끝에 자리한 선암사와 송광사를 곧장 잇는 옛길은 정상 남쪽으로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져 나 있다. 사이 거리는 6.8킬로미터. 옛길 역시 등산로의 일부다. 그러나 산꾼들은 정상이나 주능선을 즐겨 오르니 이 길은 좀체 북적이는 일이 없다.
옛길에는 단조로움을 보완하기라도 한 듯 고개가 두 개 있다. 각각의 절 이름을 딴 선암굴목이재와 송광굴목이재. 높이는 640∼660미터로 어깨를 견줄 만한데, 어떤 이는 송광굴목이재가 더 높다고 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선암굴목이재가 조금 더 높은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아마도 출발 지점에 따라 누구에게나 먼저 넘는 고개가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본다. 조계산에 관해 얘기하다보면 자연 선암사와 송광사 두 사찰 사이의 균형과 대립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조계종과 태고종의 본산, 비구와 대처. 혹자는 이를 두고 ‘승주의 비무장지대’라는 절묘한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떠하랴. 그 무시무시한(?) 비무장지대에 두 명찰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안전하고도 아름다운 옛길이 있으니. 선암사로 드는 숲길에서는 걸음 걸음을 아꼈다.
계곡의 맑은 물살에 노니는 물고기들이 손에 잡힐 듯하다. 7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켜온 선암사 명물 나무장승을 절안으로 거두고 그것을 재현해 만든 한쌍의 나무장승, 동백꽃잎 뿌려진 부도밭, 우리나라에서도 으뜸 조형미를 자랑한다는 보물 400호 승선교, 강선루 등을 짚어가다 보니 어느새 일주문이 눈앞에 다가선다. 꽃잔치가 한창인 선암사에서 발걸음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머물고 싶은 생각으로 절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다보니 두어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벚꽃, 홍매화, 동백, 산수유, 목련, 수양벚나무꽃…. 저 혼자의 화려함을 뽐내는 장미 따위로 채워졌더라면 선암사의 빛바랜 단청도 제멋을 내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선암사는 곳곳에 시선을 잡아당기는 장치가 있는 듯하다. 심지어는 뒤깐에서 조차도. 뒤깐 빗살창 사이로 보이는 마당 위로 정오의 강렬한 봄햇살이 부서진다. 송광사로 가기 위해 선각당 찻집 뒤 비탈길을 오른다.
계곡가 숲속에는 분홍점을 찍은 듯 진달래가 만개했고, 계곡가 벤취에 앉아 듣는 계곡물 소리에도 봄이 와 있다. 비스듬히 오르는 등산로 주변이 온통 보랏빛이다. 얼레지 군락이다. 진달래보다 먼저 피어 등산로를 화사하게 단장해주는 얼레지는 수줍음 때문에 얼굴을 한사코 땅으로만 박고 있는 곳이다. 얼레지를 접사하던 김부래기자가 한 마디 던진다. “이 얼레지는 잎이 두 장인데 둘중 하나를 잃게 되면 5년 동안 꽃을 피우지 못해요. 잎이 다시 생기는데 5년이 걸린다는 얘깁니다.” 일행은 그런 얼레지를 다치지 않게 하느라 조심조심 오른다.
멀리 움푹 꺼져 보이는 곳이 분명 선암굴목이재일텐데… 가파른 돌길이 한동안 계속된다. 선듯 선듯 부는 바람에 시누댓잎 서걱이는 숲속의 고요를 때마침 딱따구리가 깨놓는다. “스님이 아무리 목탁을 잘 두드려도 저 딱따구리만 못하지.” 그런 농담을 주고 받는 사이 시누대 울창한 선암굴목이재에 올라선다.
우측 등산로가 정상 1.5킬로미터라니 정상이 지척이지만 일행이 갈 곳은 직진하는 내리막길이다. 시누대 사이로 산수유 나무에도 꽃이 피었다. 산책로처럼 편안한 내리막길을 따라가니 계곡에는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른 다리공사중이다. 옛길은 이곳에서 징검다리로 건너 반대편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오른 다음 왼쪽으로 트래버스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다리가 완공되면 옛길의 이 구간은 사라질 것이다.
산비탈을 돌아드니 그곳에 평상을 늘어놓은 민가 한 채가 기다리고 있다. 평상이 여기저기 놓인 집은 순천사람 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유명한 ‘선암굴목이재 보리밥집’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오는지 이 산중 보리밥집 벽에는 “셀프”라 적혀 있을 정도니 유명세를 짐작할 만하다. 시장기도 있던 탓인지라 보리밥에 된장국, 젖갈, 산나물이 곁들여 나오는 보리밥 정식은 후에 두고두고 생각날 것처럼 맛났다.
선암굴목이재에 있는 이 동네 이름은 맴산골, 과거 주막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직영터’라고도 불린다. 조계산 아래 여러 마을을 이어주는 길목에 자리한 맴산골은 한때 일곱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리밥집만 남았다. 선암굴목이재로는 선암사와 송광사를 찾는 불자들이 쉼없이 오갔다. 불심을 구하는 불자들의 발걸음은 어쩌면 신라와 통일신라 때 창건연대를 가진 두 사찰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또 여주인에 의하면 고갯길로는 자신도 그랫듯이 장안과 낙안읍성에서 올라온 새신랑, 새신부를 실은 가마들이 넘어다녔다. 또 맴산골 바로 아래 장안리 사람들은 약초니 산나물을 뜯어 이 길로 송광사로 가져가 팔아 생계에 보탰는데 우리 옛길이 그렇듯 이곳에도 소박한 삶의 흔적이 배어있다. 오후 2시 반이 다 되어 송광굴목이재로 향한다. ‘굴목이재’를 읊조려보지만 이름의 정확한 유래를 알아내지 못했다. 마을사람 중 누군가가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길목의 뜻이라는 힌트를 줄 뿐.
보리밥집에서 송광굴목이재까지는 대피소만 한 채뿐인 고요한 길이다. 선암굴목이재와 쏙 빼닮은 송광굴목이재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일행은 이제 송광사까지 한달음에 가기 위해 재 아래 옹달샘에서 목을 축인다.
송광사는 또 어떤 모습일까. 불사를 많이 해 예전 모습이 싹 사라졌다지만 송광사는 국보 1점에 보물 4점을 지닌 우리나라 3대 승보사찰의 하나이다. 송광사로 드는 대숲을 통과하는 순간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선암사와 대별되는 거찰 송광사를 만나는 통과의례처럼 잠시 빗방울 세례를 받은 일행이 걸음을 빨리하는 사이 어느새 땅 한조각도 보이지 않을 만큼 당우 지붕으로 빽빽히 들어찬 송광사가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선암굴목이재∼송광굴목이재∼송광사에 이르는 옛길은 4∼5월에 가장 아름답다. 특히 벚꽃, 동백, 홍매화, 수양벚나무, 산수유, 진달래, 철쭉 등 봄꽃의 소박함과 고색창연한 단청이 조화를 이룬 선암사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인상을 남겨준다. 조계산 등산로의 일부이기도 한 선암사∼송광사 옛길은 6.8km 남짓, 4시간 거리. 그러나 두 개의 고개를 넘는 옛길은 여간한 산행만큼의 걸음품을 팔아야 하므로 만만히 여길 코스는 아니다.
산행시간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둘러보는 시간을 감안해 총 6시간이면 무리가 없겠다. 옛길 산행은 옛 절집의 소박함을 간직한 선암사쪽에서 시작해 송광사로 넘어가는 것이 여행의 맛을 더하고 산행도 수월하다. 선암굴목이재에 보리밥집에서 보리밥과 산나물로 시장기를 해결해보는 것도 굴목이재 옛길 산행에서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 귀둔리∼곰배령∼북암령∼북암리 양양장길 ▒ 강원도 인제 북암령 ▒ 점봉산과 백두대간을 관통하는 심원한 숲길
조그마한 시골 현리에서 451번 지방도를 따라 필례약수, 한계령에 이르는 동안의 한가로움. 그 중간쯤에 자리한 귀둔(貴屯)은 심원하고 거대한 숲의 보고 점봉산에 기대온 오래된 산간마을이다. 양양장 옛길 취재의 들머리 귀둔은 마을길이 포장되고 개량지붕도 들어섰지만 여직 오래된 마을의 정취가 흘러넘친다.
그런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이는 가칠봉, 작은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산줄기에서도 아득한 과거가 느껴졌다. 귀둔에는 돌배나무가 한창 꽃망울을 터뜨리는 중이었다. 가지가 뻗친 모양이 돌배처럼 동그스럼한 데다 가득 피어난 아이보리색 꽃뭉치.
소박한 돌배나무꽃은 여느 화사한 꽃보다 이 오래된 마을 귀둔과 퍽이나 잘 어울렸다. 다음날 예정된 옛길 취재를 앞두고 해거름에 귀둔마을을 둘러보던 일행은 돌배나무 한 그루가 담벼락에 기대선 곰배골 맨끝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양양장 옛길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안다는 주인 조대원씨(76세)는 한창 소 여물을 먹이는 중이었다.
소도 몰고 다니던 북암령 옛길
고향이 하진부였던 조씨가 곰배골에 터를 잡은 것은 스물여덟살 때. 백골부대 수색대원으로 6.25 전쟁으로 두 번의 군대생활을 했다는 조씨는 백골부대 있을 때 우연히 들렀던 곰배골을 점 찍어두었던 것인데, 전쟁이 끝나자 그는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조씨는 양양장 다니던 시절이 엊그제인양 얘기를 풀어놓는다. “귀둔이나 하답 이쪽은 인제(장)도 70리 양양(장)도 70리였지만 대부분 양양으로 장을 다녔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서 곰배령 넘고 진동리 지나 북음령(북암령)을 넘으면 저녁 무렵 양양에 도착했습니다. 이튿날 양양장을 보고 점심 먹고 출발하면 밤중이 되어 집에 도착했지요.
쌀 한가마라도 지면 하루, 없으면 반나절이니 하루만에도 다녔어요.” 조씨가 ‘북암령’을 넘었다고 말하자 일행은 당황스러웠다. 양양장길로 일행은 거리가 짧은 귀둔∼단목령 취재 코스로 잡아놓고 벌써 오색초등학교 쪽에 차 한 대까지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었다. 조씨는 “왜 북암령이냐”는 일행의 반문에 신이 나 설명한다.
“단목령 쪽이 거리는 짧지만 오색까지 길이 너무 가팔라 소를 몰고 다닐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좀 멀더라도 대부분 걷기 수월한 북음령 쪽으로 다녔습니다. 북음령을 넘어 일단 송천에 도착하면 양양이 아주 가깝거든요. 또 그곳에는 사람 마방 소 마방도 있었습니다.” 하산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북암령으로 취재 코스를 변경할 수밖에.
아침 햇살을 받은 귀둔은 풀과 꽃에서 번져나오는 파스텔톤빛으로 화사했다. 삼척 모르쇠농원의 엄기학씨(43세), 태백 한마음산악회 등반대장인 권택경씨(40세, 태백 한마음산악회), 서울서 온 한화정씨(36세, 외대산악회), 영남대로를 직접 답사했다는 허대찬씨(32세) 등 총 6명의 일행은 입산통제소 김홍남씨(54세)의 안내를 받고 곰배골에 첫발을 내딛는다. 통제소에서 모퉁이를 돌자마자 몇 발자국 직전에서도 보이지 않던 옛길이 돌연 눈앞으로 나타났다.
“새순들아 커서 무엇이 될래”
아! 하는 탄성만 내뱉고 잠시 멈춰섰다. 그림으로만 말한다면 정말로 아름다운 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연록색 숲터널 사이로 오솔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비지정등산로로 사람 발길이 뜸해서인지 오솔길은 풀이 돋아나 폭신폭신했고 길 가장자리 땅을 막 비집고 나온 새순에는 채 털어내지 못한 흙이 묻어 있다. 그런 새순들을 향해 한마디 던진다. “커서 무엇이 될래?” 숲 속은 나무의 표피를 뚫고 빠져나온 새순들이 햇살을 받아 환한 연두빛 세상이다.
곰배골 숲길의 주인은 단연 눈에 제일 많이 띄는 홀아비꽃대와 쇠뜨기 군락이다. 키가 30센티미터 어림되는 홀아비꽃대는 특이한 꽃이름과 함께 모양도 독특해 자꾸만 눈길을 붙잡는다. 오솔길이다.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이런 오솔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색에 빠져들고야 만다.
이 곰배골에도 한때는 서른 가구나 살았다는데 이따금 만나는 허물어진 옛집 터를 보며 사람들로 흥청거렸을 주막집을 상상해본다. 또 조씨가 곰배골을 가리켜 우스개 소리로 말하던 ‘도둑놈의 집골’이란 말도 떠오른다. 밭 면적이 적어 주로 산나물과 약초를 뜯어 팔아 살던 어렵던 시절, 주인 없는 사이 빈 집을 털어 곰배골로 가져가 살 수 밖에 없었다는 시절에 붙여졌다는 골짜기 이름. 조씨는 “지금은 막아놔 사는 게 매련없어요”라고 말한다.
국립공원제가 생긴후 현지 주민들조차 산나물을 뜯으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 현재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통제소를 출발한 지 2시간, 골짜기 합수점에 다다르자 왼쪽 비탈로 곰배령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온다. 얼레지 노란양지꽃 현호색 노랑제비꽃이 뒤섞여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는 곰배골의 봄꽃 군락의 서곡에 불과했다. 갈림길에서 40분이면 오른다는 곰배령까지 꽃구경으로 해찰을 부리느라 시간이 두 배도 더 걸렸으니.
곰배령에 오르니 대청봉이 보이고
빽빽이 돋아난 풀숲 사이로 한가닥 실 같은 길이 곰배령으로 이어진다. 그 길 끝에 나타난 곰배령의 광활함, 그리고 눈 앞의 백두대간 넘어 듬직한 대청봉의 모습은 가히 감격스러웠다. 곰배령에 오른 첫인상은 몇 년 전 아부오름에서 콜롯세움처럼 거대한 굼부리를 처음 대면했을 때의 숨막히던 감동과 얼핏 비슷했다.
또 감동의 여운이 두려워 오래 머무를 자신이 없는 그런 곳이기도 했다. 진동2리로 가기 위해 강선골로 내려간다. 한때 사람이 많이 살아 강선리란 별개 행정구역으로 구분되었지만 지금은 진동2리에 포함되어 있다. 계곡 오른쪽으로 난 부드러운 숲길을 따라가다 징검다리를 건너니 한창 불사중인 ‘서래굴’ 앞이다. 서래굴부터 계곡은 강선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듯 아름다웠다.
진동2리 삼거리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삼거리는 공허했다. 확장공사를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 혹은 공간을 채우고 있던 것을 갑자기 치워버리고 난 직후의 그런 공허함이 삼거리 한가운데에 맴돌았다. 집은 두세 군 데 띄엄띄엄 보이지만 승용차 지프만 마당에 들어서 있고 드나드는 사람도 없어 시간조차 정지된 듯하다. 북암령 가는 길이 ‘하늘찻집’ 앞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다.
북암령 계곡길은 처음 만나는 민가 뒤편으로 이어졌다. 계곡 오른쪽을 따르던 길은 10여분도 채 가지 않아 계곡 왼쪽으로 건너간다. 길은 강선골과 흡사할 정도로 완만하고 부드러웠다. 이번에는 해찰을 자제하고 부지런히오른다. 곰배골에서도 본 보라색, 남보라색, 노랑색 들꽃들이 석양을 받아 꽃잎에 얼룩이 진다. 북암령의 서쪽 하늘에는 오렌지빛 기운만 조금 남아있다. 고개에 선 당나무에 돌 하나씩을 얹고는 북암리로 내려간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10여분 내려왔을 때 ‘북암’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동굴바위를 지나자 다시 완만한 계곡길이 이어진다. 마침내 북암리에 도착했을 때 반기는 것은 공사건물 한 채뿐. 사위는 이미 흙빛으로 변해버렸다. 공사로 파헤쳐놓은 송천리 본동까지 이어질 계곡 옛길을 찾기도 무리인지라 일행은 할 수 없이 임도길을 따르기로 한다. 빠져나갈 듯 하다가 다시 더 깊이 산속으로 파고 들며 산굽이를 수없이 굽어도는 임도길.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걷다보니 일행 앞으로 어느새 눈썹 같은 상현달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글·이정숙 기자(silencelee@thrunet.com) 사진·김부래 기자>
귀둔리~곰배령~북암령~북암리 13km
귀둔삼거리에서 귀둔초등학교, 양지말 지나 군부대 앞에서 귀둔심신수양원 표지판 쪽으로 우회전해 콘크리트 다리인 양지교를 건너간다. 이후 첫 갈림길에서 왼쪽 ‘귀둔심신수양원 500m’라고 씌어진 표지판이 선 비포장길로 가야 곰배골이다. 곰배골 마지막 민가(조대원씨 집)를 지나 귀둔리 입산통제소가 본격 산행 들머리다. 통제소에서 계곡 왼쪽으로 계속되는 호젓한 소로길을 약 2시간 가면 갈림길. 여기서 주계곡을 버리고 왼쪽의 오르막길을 따르면 40여분만에 곰배령에 도착한다. 곰배령에서 진동2리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던 쪽에서 직진하는 내리막길.
왼쪽 능선길은 점봉산으로 가게 된다. 곰배령에서 강선골로 1시간 15분을 내려가 물을 건너면 한창 불사 중인 서래굴이 나오고, 다시 35분을 내려가면 진동2리 삼거리다. 삼거리에는 하늘찻집이 있고 계곡 건너편으로 통나무 민박집 한 채도 보인다. 하늘찻집 앞 갈림길에서 북암령 가는 길은 오른쪽길(왼쪽은 단목령 가는 길이다). 물 건너편 민가(마지막 집) 뒤로 10여분을 가면 이내 계곡을 건너고 이후 북암령까지 계곡 왼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민가에서 북암령까지 1시간 30분. 북암령에서 직진하는 내리막길이 북암리로 가는 길.
내리막길은 10여분 간 다소 가파르나 ‘북암’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동굴바위를 지나면서부터 완만해진다. 1시간 정도 내려가면 바리케이드와 임도 표지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북암리다. 북암리는 수 년 전부터는 사람이 살지 않았지만 최근 들어 건물 공사가 한창이고 2개의 임도가 나 있다. 북암리에서 송천리까지 옛길은 공사 건물 앞으로 묘가 1기가 보이며 물을 건너 계곡 오른쪽 소로길을 따라 본동까지 2.8킬로미터로 약 40분 가량 걸린다고 한다. 송천리 이장 탁상기씨(☎033-673-4314, 011-364-4310)에게 문의하면 자세히 일러준다.
북암리 두 개의 임도 중 바리케이드 안쪽의 것은 공수전리로 가는 3.8킬로미터 임도이고, 바깥쪽의 공사 건물 뒤로 난 것은 송어리 허브농장인 아로마허브밸리(☎033-672-0462)로 도착하는 7.5킬로미터 임도이다. 취재진은 시간이 늦어 나머지 옛길 답사를 후일로 기약하고 송어리로 난 임도길로 하산했다. 북암리에서 허브농원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약 1시간 15분 걸린다. 만약 북암리∼송천리 옛길 구간을 포기할 경우 북암리에 차를 가져다 놓으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
한편, 시간이 충분치 않다면 진동2리 삼거리에서 비교적 거리가 짧은 단목령 옛길을 넘는 방법도 있다. 삼거리∼단목령∼오색초등학교는 6킬로미터로 1시간 30분∼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혹은 삼거리에서 그냥 진동리로 하산해도 되는데 약 2킬로미터 내려가면 진동분교가 있다. 최근 쇠나드리에서 진동분교까지 구간 구간이 포장이 되어 승용차도 드나들 수 있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용탄리,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 ▒ 정선 성마령 ▒ 원님도 울며 넘던 정선 제일의 관문
고개가 오죽 높고 험했으면 별을 만질 수 있다고 했을까. 정선읍 용탄리와 평창군 미탄면 경계에 있는 성마령(약 960m). 성마령은 정선으로 드는 가장 큰 길, 또 제천 원주 서울 등지로 가기 위해 누구든 넘어야 했던 고개였다.
지형의 험난함을 가리켜 앞산고 뒷산을 이어 빨랫줄을 걸 정도였다는 정선땅. 이곳으로 부임하던 오홍묵 군수 부인이 성마령을 넘으며 읊었다는 아라리 한줄.
"아질아질 성마령/야속하다 관음베류/지옥 같은 정선 읍내/십년간들 어이가리//지옥 같은 이 정선을/누구 따라 아 여기왔나." 비단 군수부인뿐이었으랴. 성마령을 넘어다니던 장꾼과 서민들이 읊었던 성마령에 관한 아라리는 원색적인 표현으로 수록 대상에서 누락된 것까지 포함하면 부지기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용탄리 행매동에는 역(驛과)과 원(院)이 있었고, 출장 가는 관원을 위한 국영 여관인 '행마원'을 두고 조선조 세종때에는 마을 사람 중에서 원주를 뽑아 관리케 하였다는데...
그런 성마령이 순전히 문헌 속의 고개로만 기억되기 시작한 것은 정선에 근대 교통이 보급되면서부터다. 버스가 비행기지로 다니기 시작한 것이 1954년, 그후 제천에서 영월 정선 사북 고한 삼척으로 이어지는 산업 횡단철도가 개통된 것이 1973년이다. 그러나 하루에 고작 한두 번 운행하는 버스편으로 문명에 혜택을 느끼긴 힘들었을 법. 평창이나 제천으로 볼일 가는 사람들은 그런 가뭄에 콩 나듯 운행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차라리 성마령이나 비행기재를 넘어 버스편이 많은 미탄까지 한동안 걸어다녔다.
정선 최대의 관문 성마령 아랫마을 용탄리에는 지금도 그 길을 기억하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성마령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오늘 엣길 산행에는 10명이나 참가, 대식구를 이룬다. 정선군청 산악회원인 나병기씨(50세)를 비룻, 고한 노두산악회의 주춘옥(43세, 부회장) 전재옥(33세, 등반대장)원미화(30세) 전영옥(28세)씨, 태백 한마음산악회의 이상본(50세), 이서규(49세)씨등. 유서 깊은 옛길을 찾아가는 취재 일행의 마음이 설렌다.
정선 읍내에서 평창 가는 42번 국도. 성마령가는 길은 에나 지금이나 조양강을 끼고 달린다. 그러나 본디 옛길은 강 건너편의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강을 한번도 건너지 않고 고개까지 갈 수 있었던 유일한 길. 국도에서 훤히 건너다보이는 옛길은 절벽 아래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조양강을 건넌 일행의 차량은 용탄 3리 버스승차장에서 가리왕산휴양림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왼쪽의 행매동 골짜기로 접어든다. 행매동 드는 길은 협곡이다.
비탈진 밭에는 배추 모종을 심던 아낙들이 오전 새참을 먹는 중이다. 한때는 가구수가 50호에 달했다는 행매동.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놀던 벽탄초교행매분교 터에는 배추 모종이 심어진 비닐하우스로 꽉 찼다. 성마령 길을 훤히 꿰고 있다는 김대옥씨(60세) 집은 행매동 맨 위쪽에 있었다. 미리 연락을 해둔지라 일행을 발견한 김씨가 일손을 멈추고 집 뒤의 응고개까지 길을 안내해준다. 응고개에 오르니 지능선을 따라 우마차길이 나 있고 김씨가 높다랗게 솟은 밋밋해보이는 능선을 가리킨다.
"저곳이 원님도 넘어다녔다는 큰성마령입니다. 어디 원님뿐입니까? 서민들도, 시집가는 가마도, 소도 말도 모두 넘던 굉장히 큰 길이었지요. 사람이 안다닌 지는 30년 가량 됩니다. 제가 어렸을 대만 해도 도회지로 나갈 대도 미탄장 보러갈 대도 전부 이 고개로 넘어다녔지요. 작은 성마령은 훨씬 남쪽인데 그곳으로도 사람이 다녔지만 원님도 그렇고 큰성마령을 더 많이 넘었지요." 김씨는 행매동을 지금도 '원골'이라 부른다. 행매동에 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에 따르면 원에는 길손들을 위해 쌀과 부식 등 비상식량과 짚신 등을 비치해두었고 이를 사용한 사람은 얼마 만큼의 노잣돈을 두고 기을 떠났다고 한다.
이런 역과 원을 관장하는 역관에게는 나라에서 하락한 땅 둔전(屯田)을 주어 농사짓게 했으며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노(驛奴), 역말(驛馬)을 거느리게 했다. 마을에는 원에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엣날 주막집 한채가 남아있다며 학교 아래에 있다는 폐가를 일러준다. 집 한 가운데에 부엌이 있고 아궁이가 여러 개 있던 함석지붕의 페가. 그러고보니 올라오면서 일행도 무심결에 문틈새로 그 빈집을 기웃거린 게 생각이 난다.
"정승구뎅이를 지나면 철탑도 도록 나오고 거기서 그대로 질러 오르면 또 임도가 나오는데 그러면 또 직진해 올라가야 합니다. 철탑 도로를 지나서부터는 나무들이 많이 넘어져 있어 길 찾기가 조 어려울텐데 임도 다음부터는 가운데 움푹 들어간 옛길이 제법 잘 남아있습니다. 혹 길을 잃더라도 이제는 '큰짐승'나올 일이 없으니 고개쪽만 주시하며 오르면 돼요. 고개에 올라 돌탑이 있으면 그곳이 성마령입니다."
김씨를 배웅한 일행들은 잠시 '큰짐승' 얘기로 꽃을 피운다. 큰짐승? 산골 사람들에겐 두말할 필요 없이 호랑이다. 호랑이가 무서워 도적이 무서워 열 사람이건 스무 사람이건 떼지어 넘던 고갯길. 옛길 가에는 잣나무 천지다. 원님들이 정선에 들어올 때 하도 한골이라 한번 울고 떠날 때는 잣죽이 뭇내 아쉬워 또 울었다는데....
얘기도 많고 사연도 만은 성마령 위로 마알갛게 개인 파란 하늘이 흐른다. 5분 남짓 걸어 길이 한번 좌회전하는 곳에 특이하게 조성된 무덤이 보였다. 움푹 꺼진 분지에 묘가 들어앉은 것인데 정선 전씨 가문에서 몇해전 발굴하여 다듬었다는 이 무덤의 정체는 고려말 공민 왕때 정승 전채명이란 사람의 것. 그는 이성계ㅔ 불복해 손자를 데리고 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여생을 보냈는데 훗날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할 보문관 대제학을 지낸 손자 전채문이 이곳에 자신의 할아버지 묘를 모셨다 한다.
녹음이 짙어가는 숲길은 부드러웠다. 김씨가 말하던 철탑개설용 도로가 나오자 일행은 일러준대로 곧장 직진해 옛길을 찾아간다. 길은 능선을 따라가다 남쪽의 골짜기 하나를 건너자 이번에는 능선 오른쪽 사면을 따라간다. 5여분 정도 희미하게 보이는 예길을 한 걸음 한걸음 밟아가던 일행 앞으로 정글을 연상케하는 나무더미가 막아선다. 하필이면 옛길을 따라 나무를 베어놓은 것인데 실어내지 않아 길만 막고 있었다.
한아름씩 되는 나무기둥이 통채로 넘어져 있는 그 길을 피해가느라 좀체 속도가 나지 않자 일행은 김씨가 일러준대로 성마령을 향해 나침반을 고정시키고 곧장 오르기로 한다. 비탈을 거슬러 오른 지 50분. 땀으로 범벅이 된 일행들은 마침내 임도에 올라서자 그늘 밑으로 모두들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아무리 옛길이라지만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라고 불평하는 일행에게 김부래 기자는 "그동안 다녀본 옛길 가운데서 이곳이 가장 오래된 길"이며 "이곳이야말로 진짜 옛길을 찾아가는 묘미가 느껴진다"며 오히려 예찬론을 펼친다. 임도를 이리저리 오가며 정찰한 끝에 마침내 이어지는 옛길을 찾아낸 일행은 기분좋게 성마령으로 오른다. 100미터 가량 임도와 나란히 가던 길은 서서히 임도와 멀어지더니 숲속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보물을 만난 듯 낙엽으로 덮여 움푹 패여 아름답기 그지없는 옛길이 나타났다.
성마령 가는 길이 지금도 이렇게 넓고 좋으니 옛날에는 진짜 큰 길이었겠네요." 비로소 옜길다운 옜길을 만난 일행들은 그새 즐거운 마음이 되어 감탄사를 연발한다. 옛길은 폭이 6미터쯤 되었다고 문헌에 전하지만 지금은 낙엽 덮인 곳까지 합하면 3미터쯤 될까. 쓰러져 누운 나무들이 길을 막지만 이번에는 길을 좇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길가에는 옛 집터의 흔적도 보인다.
드문드문 돌담이 쓰러진 돌무더기를 지나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가 완만하게 이어진다. 성마령이 가까워진 듯 풀이 정갱이께 높이로 가득 덮인 곳에 이르니 마침내 주능선이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저기에 돌탑이 있어요!"라며 외친다. 고개는 가슴께 높이의 돌탑과 함꼐 당나무가 지키고 있다. 돌탑 주변은 산딸기 넝쿨로 뒤덮여 있다. 빨갛게 익어 농염한 빛깔을 내는 딸기가 탑스럽지만 2시가 넘은 시각.
시장한 일행은 도시락부터 꺼내 먹는다. 고개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찾아볼 길이 없다. 또 비석돌이 많아 비석을 만들어 달구지에 실어 평안리로 실어 날랐다 하는데 정선읍에 근무하는 나병기씨는 언젠가 직접 한번 비석의 흔적을 찾으러 답사를 할 예정이라 한다. 우마차도 다녔다는 골짜기 하산길은 가시 넝쿨이 가득해 발을 내딛기가 곤혹스럽다.
그런 골짜기를 얼마간 가니 점차 왼쪽의 지능선으로 옮겨가는 동안 다시 길 폭이 2미터 가량 됨직한 좋은 옛길이 다시 나온다. 가마도 오르내릴만큼 완만한 옛길로 30분을 내려가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에 주저앉아 얼음물을 들이키던 일행중 누군가가 "고개 마루에서는 원님마님도 내려서 걸었을까 아님 타고 넜었을까"란 수수꼐끼 같은 질문을 내놓는다. 아무래도 그건 평안리 촌로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삼막골로 내려가는 길은 시원하다.
길 흔적은 보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아 발자국이 전혀 없다. 그래서 정말로 고개를 넘는 길손이 된 기분에 젖어 삼막골 농로에 도착했다. 살짝 가려 보이지 않는 성마령을 다시한번 쳐다보고 한치동으로 걸음을 옮겨놓는다. 백년 이상 나이 먹었음직한 큰 살구나무 아래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다.
아낙들은 한창 나물을 다듬는 중이고, 한켠에선 남자들이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린 살구를 주워모으로 있다. 노랗고 말랑말랑하게 익은 살구 하나를 주워먹어본다. 달고 신것이 과하지도 부족하지 않은 달짝지근한, 참 오랜만에 맛보는 살구다. 성마령 옛길이 꼭 이런 살구맛 같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성마령(星摩嶺) 길은 큰성마령(약 960m)과 작은 성마령(약 860m)길이 있다. 이중 정선 군수가 부임하고 사람들이 주로 많이 넘어다니던 길은 큰성마령, 큰성마령은 정선읍 용탄리 행매동(원골)에서 미탄면 평안리 삼막골,한치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주 길인 큰성마령을 그냥 성마령이라 불렀다. 한편, 작은 성마령은 큰성마령에서 주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949봉 전 안부로 추정된다.
성마령 옛길 답사구간은 약 9킬로미터. 2만5천분의 1지형도와 나침반을 휴대하고 고개가 있는 방향을 놓치지 않으면서 주의깊게 옛길을 밟아가면 산행에만 약 3시간. 그러나 길 찾는 시간, 휴식 시간을 감안해 5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또한 대중교통편을 이용할 경우 용탄3리 입구 마을 버스승차장에서 내려야 하므로 여기서 산행들머리인 김대옥씨 집까지 약 4.1킬로미터 가량 들어가는 시간도 고려해야 한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문경읍 ▒ 문경 말구리재~하늘재 ▒ 신라 향기 짙은 하늘로 가는길
산북면 대하리에 이른 일행은 이제 33번 지방도를 버리고 김룡사 표지판을 좇아간다. 햇살을 받은 벼포기들이 더욱 싱싱해 보인다. "올해 농사가 아주 잘 됐네요" 문경시청 김규천씨의 애기 속에 추수의 넉넉함이 예견된다. 이번 엣길은 운달산 북쪽 가좌리와 문경읍의 경게에 있는 말구리재다.
"소금 실은 말이 넘어져 굴렀다"는 소박한 이름의 내력, 또 가좌리에 이르는 길에 대가람 김룡사와 대승사가 인접해있다는 것 외에 기실 말구재가 지닌 이렇다할 만한 내력이나 자취는 전무했다. 그럼에도 이곳을 취재 대상으로 정한 것은 순전히 하늘재와의 연관 때문이었다. 본명이 계립령인 하늘재는 가는 길이 어디 여우목 뿐인가. 고개를 서남쪽으로 돌리니 그곳에 또 한 길이 있다. 말구리재다. 게다가 그곳은 다행히 포장을 면한 채 옛길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김룡사가 가까워지는 동안 말구리재 역시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하늘재를 넘는 사람들이 적잖이 많이 다녔을 거란 생각에 미친다. 충주땅 미륵리 미륵사지는 물론 고개 남쪽 관음리에도 불교문화의 흔적이 적잖은데... 말구리재 언저리에만도 신라때 창건된 대가람 김룡사가 들어앉아 있지 않은가. 김룡사는 말구리재 가는 길에서 살짝 비켜난 골짜기에 있으나 일행은 기꺼이 이 오래된 신라고찰부터 들러보기로 한다.
김룡사는 몇 넌전 경험한, 고즈넉한 사칠의 첫인상과는 딴판이었다. 절간 입구에서부터 신도들과 이들이 타고온 차량으로 복닥거렸고 한켠에선 화재후 재건축 불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하기 그지 없다. 마침 찾아간 날이 칠월칠석이어서다. 물려온 사람들을 반기기라도 하듯 때를 맞춰 화사하게 핀 백일홍과 상사화가 절간 곳곳을 적절히 장식해 주고 있어 그나마 눈길을 고정시키게 해준다.
가좌리로 드는 포장길은 엣길 산행 출발지인 가좌목에서 끝이 났다. 지형이 가재 목 같아 '가재목'으로도 불린 이 마을은 사람이 줄어든 지금도 40여 가구가 사는 제법 큰 동네. 마을에서는 요즘도 정월 초 이튿날에 동제를 지낸다. 가좌목은 윗동네 묵언터 주민들이 1948년 공비사건으로 모두 이 마을로 이주한 이후 말구리재로 가는 마지막 동네가 되었다.
말구리재는 가좌목 포장길이 끝나는 곳에 이르자 모습을 드러냈다. 939미터의 국사봉과 그와 높이가 엇비슷한 다른 봉우리가 마치 꽃잎을 벌린 듯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 푹 꺼진 곳에 말구리재가 들어앉은 것이 흡사 나팔꽃잎의 어느 한 부위를 연상시켰다. 가좌목에서 말구리재골을 끼고 한동안 지루한 뙤약볕길이 이어졌다. 계곡에서는 가족 나들이를 온 아이들의 물장구치는 장난기 어린 아이들의 외침이 간간이 들려온다.
원두막용으로 지은 듯 가건물 한채를 지나서부터 산길은 정적이다. 그런 정적을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가 일순간 깨놓는다. 매미소리는 뙤약볕에 무방비로 노출된 산길의 나름함과 한가로움을 더욱 부추긴다. 더위에 시달리는 곤혹스러움은 곧 수풀이 우거진 산길이 나타나 한숨 돌리고 그러나 땀을 많이 흘리는 정이호씨(60세 태백한마음산악회)는 그세 벌써 한 바가지를 채울 정도로 웃이 땀에 푹 젖었다. 권택경씨(40세)와 김규천씨를 말구리재로 먼저 떠나보낸 일행은 유유자적.
그런 김에 잎이 부채만한 크기로 자란 오동나무 뒤로 계곡물 소리가 들려온다. 김부래 기자와 정이호씨, 문경산악주인인 이주화씨(45세) 모두 그리로 달려가 계곡물에 손을 담근다. 김부래 기자와 정이호씨는 그새 틈을 타 등목으로 더위를 식힌다. 계곡에서 땀을 식힌 일행은 다시 상쾌한 기분이 되어 말구리재를 향해 쉬엄쉬엄 오른다. 무성하게 자라난 성하의 수풀이 앞을 가로막지만 엣길은 선명하다. 굽도는 엣길 가에 산복숭아가 빨갛게 익어 마음을 사로잡는데 그때 먼저 간 일행들의 에코가 들려온다. 벌써 말구리재에 당도한 것인가?
가좌목에서 겨우 1시간 10분 정도 밖에 오지 않았는데... 생각하며 고개에 올라서니 김규천씨 일행은 고갯마루 왼쪽 언덕 성황당 앞에서 빨리 오라 손짓한다. 먼저온 일행은 벌써 성황당에 술 한잔까지 올리고 쉬고 있다. 김규천씨가 고개의 병목을 통해 보이는 먼산을 가리킨다. 주흘산과 하늘재가 거기 있었다. 문경은 명산인 주흘산과 백두대간을 향해 구불거리며 올라간 하늘재 옛길의 실루엣이란!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말구리재에서 보이는 하늘재 엣길은 실로 '하늘로 가는 길'을 연상시킬 정도로 간절함을 전해준다. 주흘산 산세와 포암산의 어깨는 함게 맞댄 하늘재는 또 가장 처음 생긴 길이라는 출신에 걸맞을 말한 태초의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말구리재만한 하늘재 전망대가 있을까. 1평 면적의 슬레이트 지붕을 인 성황당에는 고개 너무 관음리의 도공들이 구워냈을 사기 술잔이 놓여 있다. 고개에서는 갈평리와 관음리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관음리와 갈평리에는 문경도자기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 요가 네 곳이나 있다. 관음리의 조선요, 뇌암요, 묵심도요와 갈평리의 관음요다. 눈길은 또 갈평리 일대 너머 하늘재로 가 닿는다.
과거 이곳 말구리재에 다다른 길손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넘어야 할 저 오랜 역사의 하늘재를 향해 무사와 행운을 기원하는 절을 올렸을 법하지 않을까 싶다. 성황당 그늘은 쉬어가기 안성맞춤이다. 일행은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하늘재로 구름이 몰려오는 걸 먼빛으로 바라보며 걸음을 옮겨놓는다. 갈평리 하산길은 엣길다운 정취가 듬뿍 흘러넘쳤다.
무성히 자라난 잎을 단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길을 가로막을 정도로 뻗어자랐고 정갱이 높이까지 자라난 초록 풀들이 엣길을 소복하게 뒤덮고 있다. 마을을 향해 내려올수록 시야는 더 넓어져 갈평마을과 대간이 걸쳐놓은 중부 내륙의 웅장한 산세가 눈안 가득 들어왔다. 바위산 포암산은 위압적인 풍채를 드러내며 백도대간의 위용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담배 등 작물이 심어진 산비탈이 나오고 갈산마을까지는 40분 남짓. 마을까지의 엣길은 하늘재를 향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마치 담을 넘을 곳이 하늘재임을 쉼없이 일러주기라도 하는듯.
갈산에 도착할 즈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포장 옛길은 갈산마을을 눈앞에 두고 끝이 났다. 이제 영남권을 벗어나는 저 하늘재만 넘으면 한강 줄기에 가 닿는다. 엣 길손들은 이 대목에서 설렘과 동시에 긴 여정의 피곤함을 주체하기 힘들었을 법. 그들의 힘겨움이나 절박함을 덜어주기 위해서였을까. 하늘재 언저리 마을 이름 조차 관음리나 미륵리다. 하늘재가 불교 문화가 전해지는 길목임을 말해주는 증거를 하늘재 오르는 길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갈평리의 오층석탑과 관음리 석불입상은 모두 불교가 가장 화려하게 꽃핀 통일신라 때의 유물들이다. 비단 옛길은 사라지고 아스팔트 포장길이 들어섰지만 하늘재 가는 길은 여전히 즐겁고 설레는 일이다. 그것은 엣길 주변에 간직된 오래된 향기 때문일 듯한데 이곳에서는 신라의 향기가 느껴진다.
눈물이 묻어나듯 빗방울이 차창문을 타고 흘러 내린다. 마침내 하늘재다. 백두대간 이정표가 즐비하고 고개 너머 미륵리로 가는 비포장 흙길이 소리없이 비에 젖어들고 있다. 하늘재 푯말은 비포장길 입구 숲 속에 홀로 웅크리고 서서 비에 젖고 있다. 비포장길을 따라 월익산 품으로 들면 하늘재의 비밀을 간직한 미륵리 석굴사원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지만 이곳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고개에 돌려 문경땅을 바라본다. 고개 하나가 눈 앞에 화악 다가선다. 말구리재가 봐주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재를 마주보고 있었다. <글 이정숙 기자 사진 김부래 기자>
말구리재 옛길 답사 여정은 짧다. 비포장 옛길인가좌리 가좌목~말구리재~갈평리 갈산 구간만 답사하면 6.8킬로미터. 그러나 말구리재가 문경새재보다 역사가 훨씬 앞선, 신라때부터 이용되던 하늘재와 이어지는 옛길임을 감안하면, 답사는 말구리재를 내려선 다음 포장이 된 하늘재까지 연결시켜봐야 이 길의 의미와 역사를 제대로 음미해볼 수 있다.
옛길 산행 출발자는 가좌리 포장이 끝나는 가좌목, 가좌목에서 말구리재 넘어 갈평리 갈산까지는 갈림길이 없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말구리재에 올라서면 성황당이 있고 이 성황당에서 보이는 주흘산과 백두대간의 산세, 백두대간을 넘는 구불구불하게 난 하늘재 옛길이 퍽 인상적이다. 비포장 옛길은 말구리재 넘어 갈산에서 끝난다. 길산에서 갈평리, 관음리 지나 하늘재까지는 포장길로 약 6킬로미터, 걷는 것도 좋다.
볼거리 옛길 산행후 불과 20여분 거리에 있는 문경새재 도립공원에 가볼만하다. 육로교통의 길목이었던 새재는 제1,2,3관문을 비롯 문경새재박물관 등 수많은 문화유적을 만나볼 수 있는 문경제일의 관광지다. 또한 드라마 [왕건]의 촬영현장인 용수골이 주목받고 있다. 그외에도 경복제일경인 진남교반을 비롯 봉암사, 선유동계곡 등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재산인 문경에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옛길 언저리에는 김룡사와 대승사를 비롯 갈평리와 관음리에서 관음리석불입상, 갈평리 오층석탑, 관음도요지 등지가 있다.
문경시 점촌이 기점이다. 들머리 가좌리와 날머리 갈평리까지 점촌에서 시내버스(문경여객054-553-2230)가 다닌다. 점촌-가좌(들머리) 행은 흥덕동 시내버스 터미널에서 07:15, 08:40, 10:25, 14:00, 16:30, 19:10 출발. 40분 걸린다. 가좌행 버스는 점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문경 방면으로 10분 내려간 '한라유통'앞에서도 탈 수 있다.
점촌-갈평 행은 점촌에서 하루 약 20회 운행하며, 점촌을 출발해 문경과 갈평리를 거쳐 관음리가 종점이다. 갈평에서 나가는 버스 시각은 첫차 07:00 막차 18:35, 1시간 걸리고 요금은 2250원 승용차로는 점촌 읍내에서 예천 방면 34번 국도를 거쳐 반곡리에서 단양 방면 33번 지방도로 바꿔타고 가다가 대하리에서 김룡사 방면으로 꺾어 들어간다. 점촌과 김룡사 방면으로 꺾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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