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문익환 목사, 국가폭력과 이념절대주의에 저항한 신앙인
늦봄 문익환 목사 서거 30주년을 맞이하여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 승인 2024.01.19 02:31
출처 늦봄 문익환 목사, 국가폭력과 이념절대주의에 저항한 신앙인 - 에큐메니안 (ecumenian.com)
1. 본회퍼 목사보다 더 위대한 늦봄 문익환 목사 바로보기
오늘 2024년 1월 18일은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가 76세로 소천하셔서 30주기를 맞는 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신학계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다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고 배웠다. 그의 《나를 따르라!》라는 책은 1960-70년대 한국 신학도들에게 큰 영감과 울림을 주었다.
늦봄 문익환 선생님에게서 신학생 시절 구약성서신학과 문학적 비평정신이란 무엇인가를 배운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본회퍼 목사보다도 신학적으로 더 중요하거나, 신앙과 삶에서 그에 못지않은 분이 늦봄 문익환 목사라고 생각한다. 보수 정통 신학체계와 성경문자주의에 사로잡힌 신학자, 목회자, 신도들에게 늦봄 문익환 목사는 국가보안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평양을 방북하여 빨갱이의 괴수 김일성을 포옹한 ‘좌빨 목사요, 종북 성향의 통일운동 망상가’라고 평가하겠지만, 그 평가가 옳은 것인지 평가는 이다음 모두 주님 앞에 가면 판가름 날 것이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 서거 30주기를 맞이하여, 한국 사회나 특히 기독교계는 늦봄 문 목사님을 다시한번 진지하게 그분의 신앙,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언, 6차례에 걸쳐 통산 10년 3개월 동안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내면서 영글어간 늦봄의 ‘옥중신학의 내용과 의미’를 되새김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계의 진보나 보수 진영의 배타적 입장을 떠나 순수 인간적 심정으로 돌아가서 보아야 한다. 1~2년도 아니고 10년 이상 옥중생활을 각오하면서 나라와 민족과 기독교를 생각하고 고민했던 성직자를 함부로 매도하는 것은 엄청난 죄악을 범하는 일이요,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격을 짓밟는 ‘인격 살인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2. 북간도 민족주의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배경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한 계기
문익환 목사는 북간도에서 목회하시는 아버지 문재린 목사와 실천적 신앙인 김신묵 여사를 부모로 하여 1918년에 태어났다. 명동촌 민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중심으로 하고 열린 선교 정책을 편 캐나다 선교부의 신성한 신앙공기를 마시며 자랐다. 그의 성장기 북간도 지역은 평양 중심의 기독교나 서울 한양 중심의 기독교 풍조와도 다른 분위기였다. 살아 숨 쉬는 영성적 생활신앙, 민족애와 자유독립, 평등과 사랑, 불의에 저항하는 예언자 정신 등이 한데 어울려 있는 역동적 신앙의 신선한 바람이 늘 넘쳐났던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다재다능한 두뇌와 성품을 가진 분이셨다. 규암 김약연 선생이 개척한 명동촌을 중심으로 한 한인 더불어 삶 생활신앙 공동체 안에서, 동기동창인 죽마고우 윤동주와 우정을 나누던 늦봄은 시인될 감수성, 인간의 언어성과 음악적 예술성을 가지고 있었다. 존엄한 인간성을 옥죄이는 온갖 형태의 국가 폭력성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춘 구약학자였다. 민족 통일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뛰어들기 전까지, 문익환 목사는 한국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성서학자가 공동으로 참여한 《우리말 성경공동번역》 위원장이었다. 찬송가의 가사와 노랫가락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찬송은 이중구조의 예술이다. 시로서의 예술이요, 음악으로서 예술이다”라고 갈파한다. “진정한 번역이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쓰인 원텍스트를 한글 사전을 가지고 정확하게 옮기는 작업이라기보다 원텍스트가 전하려는 얼을 되살려내는 재창조에 가깝다”고 갈파하신 분이다.
구약성경 공동번역과 찬송가 가사와 가락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구약학자로서 전심전력하던 늦봄 문익환 목사가 한국 사회 정치 현실 한복판 속으로 뛰어들게 한 것은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과 장준하의 의문사 사건이 그에게 준 충격이었다. 전태일과 장준하의 죽음은 그의 영혼 속에 깊이 잠자고 있던 민족애, 예언자 정신, 자유혼, 저항정신에 불을 붙이는 사건으로 다가왔다. 197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죽임과 고문으로 희생이 된 젊은 청년들의 절규와 고통과 호소가 그의 피부에 직접 와닿고 심장을 뛰게 추동하였다. 서재와 신학교 연구실의 교수가 일약 현실 한복판의 투사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시인이요 성서학자인 문익환 목사가 ‘현실’ 한복판으로 스스로 작심하고 뛰어든 첫 번째 사건이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이다.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의 유신헌법 독재정치는 ‘긴급조치’를 연속 남발하면서 이 땅의 언론, 양심, 인권, 자유, 평등을 강요된 침묵 속에 가두어 놓았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월 1일, 삼일절 57주년 명동성당 기념미사 후에 발표한 ‘3.1 민주구국선언문’ 초안 작성자이었다. 윤보선, 함석헌, 정일형, 김대중, 안병무, 함세웅, 이우정 등 제야인사 18명의 찬성 지지 사인을 받아 그 사건을 온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일으키게 한 ‘행동하는 양심’의 선두 주자였다. 주목할 일은, ‘3.1 민주구국선언’ 관련 피고인 18명이 모두 크리스챤들이었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협동으로 이루어졌고, 폭력적이 아닌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3. 왜 민족통일운동에로 문익환 목사의 관심과 촛점이 바뀌게 되었나?
늦봄 목사 서거 30주기를 맞이하는 오늘날, 강산도 3번이나 변하여 늦봄 목사의 삶과 운동의 진의가 점점 그 본래적 의미는 왜곡되거나 폄훼당하여 재야 운동계의 선동가 정도로 치부하는 자칭 점잖은 인사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되었다. 기득권 세력과 보수 언론계의 평가절하가 특히 극성을 부려온 결과로서 일반인 마음에 각인된 문 목사 이미지는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폭력적 반정부 선동가, 죄경화된 투쟁가, 감상적인 통일론자 등등으로 폄훼되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문익환 목사는 과격한 폭력적 정치 선동가도 아니고 더욱이나 좌경한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도 아니다. 그는 다만 순수한 예수의 평화정신과 한국 배달 민족의 본래 심성으로 되돌아가 함께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유롭게 상부상조하는 사람 얼굴답게 살자는 인간 중심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인권운동, 노동자 권익운동, 민주 질서 회복운동을 하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좌절되고 옥에 갇히고 검찰과 경찰력에 의해 제압당하는 근본 이유가 ‘국가보안법’을 절대시하는 민족 분단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남쪽과 북쪽의 독재정치가들과 기득권 세력의 불법한 통치권력행사 정당성 주장 근거도 민족 분단을 빌미로 삼은 ‘적과의 동침’ 전략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늦봄은 일반인들이 으레 분단 현실에서 당연시하는 남북 민간교류 금지 및 통제 법령, 남북한 방문은 반국가 이적행위라는 금지된 터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래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주어야 할 서부극에서 ‘보안관’ 역활을 담당해야 할 국가권력이, 이제는 주인이 되어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독점하고 양심 활동을 완전 몰수하는 국가 폭력성을 인정할 수 없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는 어리석은 바보 목사가 아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만 깨친다는 물리적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평양을 방문하고 김일성을 만나고 오면 반드시 감옥에 집어넣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그러한 말도 안 되는 터부시 되어 있는 ‘국가보안법과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 정치사회에서 거의 신격화된 김일성 주석을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활짝 펴고 조금도 어려움 없이 끌어안고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가장 놀란 군중은 북한 인민들이었을 것이다. 둘째 놀란 집단은 남한의 보수적 반공 기독교 집단이었을 것이고, 셋째 놀란 집단은 국가보안법에 기대어 권세와 부귀 영화를 누리는 기득권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목사가 북한 수령 김일성을 자유롭게 껴안지 않으면 감히 누가 껴안을 것이냐?”고 반문했던 사람은 그를 낳고 젖 먹여 키운 늦봄의 노모 김신묵 권사이셨다.
늦봄 문익환 목사 30주기를 맞는 이주간,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인민공화국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 김정은이 “북남 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일 뿐이다”라는 ‘김정은 선언’을 내뱉고 대한민국 윤 대통령은 강대강 선언으로 응수하는 형국이 되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한민족으로서 가냘픈 유대감을 놓지 않았던, 김일성과 박정희가 공동 선언한 <7.4 공동선언: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 원칙>의 폐가를 공개적으로 온 세계에 선언한 자금 사태가 우리 민족의 민낯 현실이다.
김정은 권력 집단이 미국이나 세계 강국들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동족을 향해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위험한 전면전 생각은 남과 북 어느 쪽도 살아남는 승산 없는 그야말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는 공멸이 있을 뿐이다. 현실을 모르고 “머리가 이상하게 조금 돌아버린 사람”이 문익환인지, 김정은인지, 윤석렬인지, 한국 극우파 반공 기독교 목사들인지, 총선을 앞두고 죽기 살기로 이합집산하는 정치모리배들인지 훗날 역사의 하느님은 분명하게 판정해 줄 것이다. 우리를 옥죄이는 터부를 깨트려 버린 문익환 목사의 자유·정의·평화정신, 선생님 목소리가 몹시 그립다.
김경재 명예교수(한신대) soombat194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