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樂民 장달수
선비는 뜻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소임은 중대하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선비들은 뜻을 굳세게 가지기 위해 자신의 아호를 ‘굳셀 의(毅)’자를 즐겨 사용했다. 강우지역에도 호를 ‘의’자를 쓰는 선비들이 많다. 모두 뜻을 굳세게 가지려는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어눌하지마는 뜻이 굳센 사람이 되고자 한 것이 선비들의 바람이고 이를 위해 평생 수양을 한 것이다. 의재(毅齋) 송호완(宋鎬完). 한말 합천 병목 출신으로 뜻을 평생 굳세게 가지며 이를 실천으로 옮긴 선비다. 일찍이 합천의 대표 선비인 후산 허유는 “삼가 황매산 북쪽 병목(幷木)은 송씨들이 사는 곳이며 예로부터 문학과 행의를 하는 선비가 많은 마을”이라고 했다. 남명선생 부인인 은진 송씨의 고향이기도 한 병목은 존양재(存養齋) 송정렴(宋挺濂 1612~1684)의 학덕을 기리는 신천서당을 비롯한 많은 재실들이 있어 전통 있는 마을임을 알리고 있다. 존양재는 남명의 수제자라 불리는 덕계 오건을 모신 서계서원과 일두 정여창을 모신 함양의 남계서원, 안의의 용문서원 원장을 맡아 지역 유풍 진작에 앞장선 선비로 의재의 선조다. 이곳 은진 송씨들은 원래 회덕(懷德)에 살았으나 존양재의 고조부인 송세적(宋世勛)이 곽계의(郭繼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병목리(幷木里)로 이주해 행의(行義)를 숭상하고 규범을 삼아 전통 있는 선비 가문을 지금껏 이루고 있다.
의재는 1863년 병목에서 근례(根禮)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생부(生父)는 근배(根培)다. 성품이 온화하고 어릴 때부터 일반 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기보다는 독서에 관심이 많았다. 집안 어른들이 공부를 독려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신하였으며, 집안이 가난해서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는데, 들에 소먹이러 갈대도 반드시 책을 겨드랑이에 끼고 갔을 정도였다. 글자는 모래에 금을 그어 가며 익혔는데, 부모가 이 모습을 보고 애절하게 여겨 학당에 가도록 했다. 1886년 생모(生母) 신창(新昌) 맹씨(孟氏)상을 당해 주자가례에 따라 상을 마치고 이로부터 후산 허유, 노백헌 정재규, 교우 윤주하 등 지역의 석학들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며 일의 내외(內外) 경중(輕重)의 구분을 알았다. 1896년에는 거창으로 면우 곽종석 선생을 찾아 갔다. 이때 면우는 태백산으로부터 남쪽을 내려와 수도산(修道山) 중에서 강학을 하고 있다. 의재는 면우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심학(心學)의 진결(眞訣)과 중용 근사록 등을 익히고 또 춘추 대의에 대한 강론도 들었다.
1898년에는 조상의 묘문(墓文)을 청하러 강좌지역인 고령으로 만구 이종기를 찾아가 선비의 출처(出處) 즉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을 배웠다. 이어 칠곡 석전에 이르러 이계환(李啓煥)을 방문했는데, 이때 병호시비(屛虎是非)로 의견이 분분했다. 병호시비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1573년(선조 6년) 월곡면 도봉리에 호계서원을 세워 이황, 김성일, 류성룡을 배향하였는데 퇴계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즉 풍산 류씨(병산서원파)와 의성김씨(호계서원파) 사이에 조상인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모실 때 두 사람 가운데 누구를 앞세우느냐로 두 가문이 벌인 다툼을 '병호시비'라고 한다. 이 다툼은 우복 정경세에게 판단으로 서애 류성룡을 왼쪽에 모셨는데, 이 논쟁이 한말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때 의재가 말하기를 “지금 중화 문명과 오랑캐 풍습이 뒤섞여 사람과 짐승이 구분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몸을 공손히 하여 마음을 함께 해 안으로 성현의 도를 공부하고 밖으로 오랑캐 풍습을 물리치는 것이 올바른 길인데, 같은 유학의 길을 걸으며 이같이 싸우니 우리 사문의 불행이다”고 하니 좌우에 앉은 사람들이 “공의 말이 옳다. 지금부터 싸우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다시 안동으로 가서 서산 김흥락을 만났다. 서산은 학봉 김성일의 종손으로 퇴계학맥의 종장 역할을 하던 대학자다. 서산에게 허령지각(虛靈知覺)의 뜻을 배웠으며, 예설(禮說)을 물었다. 서산은 퇴도병명(退陶屛銘) 1본을 주었는데, 퇴도병명은 퇴계의 도통을 확인하는 글로 학봉 종가 가보라 할 수 있다. 서산이 퇴계 병명을 의재에게 준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이어 도산서원으로 가서 참배하고 서원에 있는 광명실(光明室), 암서헌(巖棲軒), 역락재(亦樂齋) 등 퇴계선생 숨결이 배인 곳을 거닐며 시를 읊조렸다.
이어 대산 이상정(1710∼1781)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고산서원을 참배하고 구미에 이르러 척암 김도화를 만났는데, 척암은 글 한편을 주어 학문을 장려했다. 녹산으로 가서 사미헌 장복추를 뵙고 물러나와 농산 장승택을 만나 여러 질문을 하고 마지막으로 강재 이승희를 만나고 돌아왔다. 의재가 강좌지역인 고령, 안동으로 가서 만난 선비들인 서산, 사미헌, 척암 등은 당시 퇴계학맥을 주도하던 대표 학자들이다. 의재의 강좌 여행은 자신의 학문 폭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1905년에 일제가 정부를 위협해 강제로 보호조약을 체결하자 선비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궁궐 문 앞에서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재도 통분하며 노백헌 정재규를 따라 노성(魯城)으로 가서 면암 최익현을 만나 의병을 일으키려 했다.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공주로 가서 선조의 묘소도 돌아보고 궐리사도 참배했다.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의재의 의로움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나라를 생각하는 의재의 의로움은 1919년 기미 만세의거 후 일어난 파리장서 사건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파리장서 서명인으로 참여를 한 것이다. 스승인 면우 곽종석을 따라 파리장서에 서명을 하고 합천 옥에 갇히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9년 3·1만세의거 직후 전국의 유림대표 면우 곽종석 등 137명은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서명하여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냈다. 당시 파리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주도하에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짓기 위해 평화 회의가 열리고 있기 때문에 유림대표들이 세계열강에게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탄원서를 보낸 것이다. 이 일은 곧 일제에 의해 발각돼 서명한 유림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이 사건을 ‘파리장서사건’이라고 한다. ‘파리장서사건’은 경상우도 퇴계학맥의 대표 학자인 면우 곽종석과 제자 심산(心山) 김창숙이 주도한 유림계 최대의 광복 의거다. 의재는 “임금은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평소에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나라를 구하는 길에 동참을 하게 한 것이다. 1919년 면우선생이 대구감옥에서 병으로 나와 곧 세상을 떠나자 의재는 이를 조문하고 돌아와 얼마 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향년 57세였다. 산청 법물 선비 김재식(金在植)은 “뜻이 크고 굳세야 하는 것이 군자의 학문이요 효도와 공경은 군자의 덕”이라며 의재를 이 같은 선비라 칭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