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살, 국내 최장수 상품 브랜드 ‘활명수’ 이야기
글 | 김공필 행복플러스 편집장 사진 | 동화약품 제공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그해 9월 서울 순화동에서 기념비적인 약품이 하나 탄생했다. 활명수(活命水),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약이다.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이후 117년간 단 한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화제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활명수들. 지난 117년간 부채표 상표와 이름 등 본질은 지키면서 시대의 변화에 맞게 제품명과 라벨 디자인을 일부 바꿨다. |
활명수가 탄생할 무렵의 조선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인 을미사변(1895년)과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1896년)을 겪는 등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한편 1885년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설립되는 등 의료 분야에서도 근대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활명수는 궁중의 선전관(지금의 대통령 경호실 간부에 해당하는 무관) 출신의 민병호씨가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창업하고, 궁중의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개발한 액제(液劑) 소화제다. 당시 조선에는 소화기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달여 먹는 탕약에만 의존했다. 이때 전통 한약재에 수입 약재를 배합한 활명수는 먹기 편하고 효과가 빨리 나타나 출시되자마자 신비의 명약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민씨는 활명수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다니던 정동교회 신도 등에게 나눠주면서 입소문을 확산시키고 반응을 살피기도 했다고 한다.
기네스북이 인정한 등록상표·등록상품 1호
활명수가 본격적으로 체계와 규모를 갖춰 생산, 판매된 것은 1910년의 일. 그 해 동화약방은 활명수의 상징이기도 한 부채표와 활명수를 상표 등록했다. 이로써 부채표는 국내 등록상표 1호에, 활명수는 국내 등록상품 1위에 등재됐다. 1966년 한국 기네스북협회는 동화약품을 국내 최고(最古)의 제조회사이자 최고(最古)의 제약회사로, 부채표는 최초의 등록상표, 활명수는 최초의 등록상품으로 공식 인증하기도 했다.
발매 초창기 활명수는 상당한 고가였다. 1910년 활명수 1병의 값은 40전이었다. 1870년부터 1933년까지 64년간 일기를 작성한 농부 ‘심원권의 일기’에 따르면 1910년 전후의 쌀 1되는 약 10전이었으므로 당시 활명수 1병은 쌀 4되와 맞먹는 가격이었다. 이를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2만원으로 놀랄만한 고가다. 활명수 1병의 현 소비자가는 700원 내외다.
활명수는 의약품의 근대화를 넘어서 항일 독립운동에 기여한 족적이 뚜렷하다. 아버지 민병호씨에게서 동화약방 경영을 맡은 민강 초대사장은 제약회사 경영 못잖게 독립운동에도 적극 가담하다가 1919년에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후에도 민강 사장은 서울 연통부를 순화동 동화약방 본사에 설치하고 활명수 판매 수익금의 상당액을 독립자금으로 제공했다. 서울 연통부는 김구 선생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국외 비밀 연락을 위해 설치한 비밀 행정기관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내의 각종 정보와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에 보고,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동화약방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각각 우승, 3위를 달성하자 조선일보(1936년 8월11일자 4면)에 다음과 같은 축하 광고를 큼지막하게 게재하기도 했다.
동화약방은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도 적극 활약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고 남승룡 선수가 3위를 달성하자 동화약방은 8월 11일자 조선일보 4면에 큼지막한 축하 광고를 냈다.(사진=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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