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 알레고리 (외 1편)
박상봉 나를 눈뜨게 한 사건은 모두 다락방에서 일어났네 기관차의 객실처럼 칸칸 연결된 키 작은 다락방에 알레고리가 살고 있네 아홉 살 명절날 어른들이 남긴 백화 반 잔 겁도 없이 벌컥 마시고 다락방으로 숨어든 그 날, 아버지가 매일 술 마시는 이유가 분명해졌네 내가 사는 지구별이 둥글게 자전한다는 걸 알게 된 곳도 다름 아닌 다락방이었네 살과 뼈가 부딪히는 몽정과 몽상 사이 귀먹고 눈멀어 살아온 어제가 번쩍, 눈 뜨고 일어나 천둥소리 처음 듣는 그 저녁 검붉은 빛이 격벽(隔壁)을 뚫고 유리창 문 두들길 때, 다락방에 꽃무릇 가득 피어나고 온몸에 불길이 치솟았네 나는 느닷없이 성장을 멈춘 아이 다락방이 너무 편해 키가 자라지 않았네 키 작은 기관차는 더 이상 기적을 울리지 않네 태어난 걸 후회하지 않아도 되었네
물에 잠긴다는 것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 물에 빠져 귀를 잃고 사람의 말귀 알아듣지 못한 채 그냥 살았어 물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가 겨우 구조된 아이는 반 귀머거리가 되어 말도 잊어버리고 바다 깊은 물속에 두고 온 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데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 2023.11 ----------------------- 박상봉 / 1958년 경북 청도 출생. 1981년 「국시」 동인(박기영, 안도현, 장정일, 박상봉)으로 문단 활동 시작. 1995년 《문학정신》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 활동 재개. 시집 『카페 물땡땡』 『불탄 나무의 속삭임』 『물속에 두고 온 귀』 등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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