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결 같은 질감, 그리고 넉넉한 푼주의 세계
ㅡ내가 본 신경균과 그의 도예
유 홍 준<미술사가/전 문화재청장>
1. 그와의 첫 만남
4년 전인가 5년 전인가,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고 있을 때 전라남도 고흥반도의 안동이라는 곳에서 고분 발굴이 있었다. 현장 확인 차 내려간 김에 나는 운대리의 고인돌과 분청사기 가마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둘러보았다. 솔밭 속에 무리지어 있는 운대리의 고인돌은 여전히 예스러운 풍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분청사기 가마터에 도착하였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년 쯤 전에 당시 전남대 교수였던 이태호와 이곳에 왔을 때는 논둑이 온통 분청사기 도편으로 되어 있었다. 주로 깨진 백토분청 대접으로 이른바 일본인들이 상찬해 마지않는 ‘호세이 고비끼(寶城 粉引)’ 다완(茶碗) 도편도 보였다. 16세기에 이곳 운대리에서 제작된 백토분청사기는 보성에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일대가 중요한 미술사 유적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엔 사금파리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군청 문화재 담당자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으니 10여 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도요지탐방이라는 테마관광으로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는가. 하도 허망하여 빈 하늘만 처다 보고 있는데 웬 사내가 나타나 짙은 경상도 사투리로 “저 산속엔 아직 사람 손 타지 않은 도편이 층층이 묻혀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 “저는 신경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릇을 굽고 있습니다.”라며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안내를 받아 도편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가 산비탈 얼마만큼 가서 손으로 흙을 파헤치니 분청 도편들이 켜켜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놀랍고 반가와 이런 곳이 얼마나 되냐고 묻자 그는 이 산 곳곳에 펴져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도예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담당자도 알지 못하는 것을 한 도예가가 문화재 지표조사까지 대신해준 셈이었다. 산에서 내려와 차를 타려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가 제 가마입니다”라며 은근히 방문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한번 들려볼까 잠시 생각했지만 나중에 기회 있으면 들려보겠다고 사양했다. ㅡ이제 와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신경균이 누구인지 몰랐고, 혹 내가 방문했다는 것을 가마 선전에 이용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이 있었다. 그 대신 예의상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어쩌다 경상도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그릇을 굽습니까?”
“여기 흙이 조아예(좋아요).”
“주로 분청 작업을 합니까?”
“분청도 해고 백자도 해고, 해고 싶은 대로 헙니더.”
“그러면 주로 다완을 만듭니까?”
“다완도 해고 자배기도 만들고, 해고 싶은 대로 헙니다.”
대답이 범상치 않았다. 나의 상투적인 질문이 못마땅한 것이 분명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선 참으로 개성 있는 도예가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타려는데 그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더하는 것이었다.
“청장님예, 도예가 신정희(申正熙 ) 선생을 아능교?”
“아다마다. 뵌 일은 없지만 다완에서 일인자라고들 하지요.”
“제가 그 분의 셋째 (아들)입니다.”
“아, 그렇군요.”
지금 와 생각하니 그는 내가 한동안 미술평론을 했기 때문에 혹 신경균이라는 도예가의 이름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고, 전혀 모르는 것 같으니까 마지못해 아버지 이름을 대고 자신을 기억시켜 주었던 것 같다. 사실 그 때 나는 이 가마터를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을까에만 신경이 곤두섰을 뿐 그 도예가의 작업에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다. 차에 타자마자 나는 곧바로 사적국장에게 지시해서 운대리 가마터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는 작업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운대리 가마터는 땅 주인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여 곧바로 지정하지는 못하고, 그 대신 이듬해부터 국가가 토지를 매입해 사적으로 지정하는 방침을 세웠는데 지금도 잘 진행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2. 작가와 평론의 관계
이후 내가 신경균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05년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 때였다. 각국 정상들을 초대한 만찬에 그의 그릇을 사용하고, 회담장 한쪽에 40여 점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마 장안요에서 정상 영부인들의 도자체험도 열렸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 것이었다. 나는 그 때 청와대의 의전이 이렇게 발전했다고 속으로 무척 기뻐했다. 평소 문화외교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몇 해 전 덴마크 여왕이 방한했을 때 하이얏트 호텔에서 열린 만찬에서 사용한 그릇은 전부 로얄 코펜하겐을 본국에서 수송해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정작 신경균의 도예작품을 처음으로 본 것은 2006년 서울 갤러리현대 두가헌에서 열린 그의 초대전 때였다. 특별히 신경 써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색깔의 생활자기와 큼직한 푼주에서는 현대적인 멋도 있고, 특히 질감이 따듯하여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전시장에서 갤러리현대 박명자 사장과 얘기를 나누게 되어 내 소감을 말하자, 박사장은 “진짜로 장작 가마로 구어서 이런 맛이 나와요.”라며 그의 그릇 하나를 매만져 보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신경균의 이력을 보니 그는 이미 다섯 차례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도예계의 어엿한 중견작가였다. 그는 작업의 본거지인 부산에서만 3번, 대구와 서울에서도 한차례씩 초대를 받았으니 도예가로서 나름대로 위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안요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그의 도예작품과 생활 자기들을 좋아하는 애호가도 적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도예에 대한 세평과는 달리 신경균의 도예 세계를 말해주는 본격적인 평론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은 의아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장안요의 신경균은 알아도 그의 도예 세계가 갖고 있는 예술적 특징과 가치를 명확하게 집어서 말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균 자신이 스스로의 도예에 대한 술회한 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기꺼워하지 않는 듯했고, 어쩌다 등장한 경우에도 자신의 도자기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도예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곤 했다. 그것도 “예술은 단순한 것 아니겠냐”느니, “예술은 인생 그 자체”라느니, “나는 그저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라는 등 선문답 같은 얘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사실 예술적 특질을 말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평론가의 일이다.
평론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예술적 평가를 내리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또 다른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작가와 관객의 중간에서 한편으로는 작가의 예술세계를 대변해 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관객 입장에서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예술적 방향에 대해 주문하기도 하는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의 예술가에게는 좋은 평론가가 가까이 있어 그 작업의 처음과 끝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신경균 주위에는 그런 평론가가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아내 임계화 씨가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그 역할을 여기서 수행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신경균의 도예에 관한 한 한 사람의 관객일 뿐이다. 두가헌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를 한차례 본 적이 있고,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장안요를 잠시 둘러본 것이 전부이다. 지금은 평론가로 살아가고 있다는 의식도 없고, 도예평론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신경균의 도예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은 관객은 관객이로되 한 때 미술비평을 해온 안목에서 내가 느낀 바를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써 혹 작가와 관객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촉매 역할은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3. 전통기법의 현대적 발전
우리 도예계는 오랫동안 이른바 ‘전승도예’와 ‘현대도예’로 나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우리 도예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 이분법적인 분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른바 전승도예란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분청사기와 백자를 재현하듯이 제작하는 것을 말하고, 현대도예란 현대미술로서 도자예술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대개 미술대학 도예과 교수들이 자신들의 작업이 갖고 있는 예술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개념이라는 혐의가 있다. 심지어 전승도예가는 도예가가 아니라 도공으로 부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승도예가 이렇게 폄하된 데에는 전승도예 측의 잘못도 없지 않다. 도예란 다른 모든 공예와 마찬가지로 기술과 예술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도자기를 굽는 기술 그것만 강조한다면 도공일 뿐이다. 백자의 김익영이나 분청의 윤광조처럼 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적 도예를 지향했다면 그런 폄하는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신경균의 도예는 전승도예인가, 현대도예인가. 그가 추구하는 기법은 백자와 분청사기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나타난 형태는 이른바 현대도예의 모습이다. 그는 나이 15살 때부터 선친 신정희로부터 전승도예의 기법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으면서 현대도예의 훈련을 쌓았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전승이니 현대니 하는 분류가 필요 없는 도예의 길을 걸은 셈이다. 이것이 그의 큰 강점인 것이다.
신경균은 이처럼 전통에서 출발하였지만 지향하는 것은 현대도예이다. 백자라도 조선시대 백자와는 다른 우리 시대의 백자, 분청이라도 우리 시대의 분청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백자는 기본적으로 고령토(高嶺土;kaolin)이라는 백토(白土)로 만든다. 백토에는 철분(Fe)이 없다. 만약에 철분이 0.1%라도 있으면 흰색이 나오지 않는다. 철분이 불에 녹으면 화학반응을 일으켜 황색으로 녹색으로 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이른바 산화제2철(Fe2O3)의 산화염에서는 노랗게 되는 황변(黃變)현상이 일어나고, 산화제1철(FeO)의 환원염에서는 초록색으로 변하는 녹변(綠變)현상이 일어난다. 신경균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는 백토를 사용하여 노란빛이 감돌거나 은은한 연두빛이 감도는 백자를 만들어내곤 한다. 전승도예가들은 철저하게 철분이 빠진 백토를 사용할 때 신강균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백자의 진폭을 넓히며 현대 백자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분청의 경우, 우리 도자사(陶磁史)는 상감분청, 박지분청, 조화분청, 귀얄분청, 철화분청, 분장분청 등 문양을 나타낸 기법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분청사기 바탕의 색감을 보면 녹색, 갈색, 검정색, 회색 등 갖가지로 나타난다. 그것은 분청의 태토로 사용하는 점토의 성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경균은 또 이 점을 이용하여 여러 다양한 점토를 시험하면서 그가 즐겨 만들어내는 초록빛, 겨자빛, 올리브빛, 카키빛, 쵸콜릿 빛 등 여러 색깔의 도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는 현대도예에서 이른바 색도(色陶)라고 하는 것에서 추구하는 색상을 모두 다 구사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기재료학이라고 하는 요업공학에서 나온 화공약품을 사용하여 그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통도자의 유약 제작 방식으로 천연 유약을 만들어 쓰고 있다는 점이다. 때로는 도자기 유약처럼 장석(長石)과 나무재를 사용하고, 때로는 옹기 질그릇 유약처럼 약토와 나무재로 유약을 만들어 쓰고 있다. 나무재도 소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지푸라기 등 다양하다. 이런 식으로 신경균은 전통 기법에 기반을 두면서 현대도예로서의 표현력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4. 신경균 도예의 매력; 따뜻한 질감과 자연의 빛깔
도예는 기본적으로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다. 신경균이 전통 기법에 기초한 새로운 표현 기술을 체득했다는 것은 어떤 예술적인 지향점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필요조건의 충족일 뿐이다. 그러면 신경균은 자신이 체득한 기법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고 있는가, 이것이 그의 도예가 지닌 특징과 매력의 요체인 것이다.
나는 신경균의 도예가 갖고 있는 첫 번째 자랑은 질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경균의 도자에는 사람의 살결 같은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럽고 따뜻한 질감이 있다. 이것은 어쩌면 나의 주관적 평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의 가장 큰 특질이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신경균이 초대받은 바 있는 갤러리현대에서는 신경균전 바로 앞에 재독(在獨) 도예가 이영재 씨의 도예전이 있었다. 이영재 씨는 독일에서도 도예가로 높은 명성을 갖고 있고 그 분이 만들어낸 쑥색, 진갈색, 옥색 등 6가지의 빛깔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현대 디자인적인 색감이라고 칭송할 만한 것이다. 모던하고 세련된 질감이라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질감은 매우 차가운 것이었다.
이에 반해 신경균의 도자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구수하며 언어로 치면 어눌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영재가 유럽풍이라면 신경균은 한국적인 느낌을 준다. 나는 지금 어느 쪽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똑같은 색도(色陶)라도 질감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왜 이런 질감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영재는 가스 가마를 사용하고 신경균은 장작 가마를 이용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한쪽은 기계적이고 한쪽은 자연적인 것이다. 신경균이 장작 가마를 고수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전통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작 가마가 아니면 이렇게 따뜻한 질감을 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따뜻한 질감의 도자, 이것은 사실 우리나라 전통도예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기도 하다.
신경균 도예의 두 번 째 특징은 색감이다. 그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색깔의 도예 작품을 선보였다, 그만큼 표현 기량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 신경균의 빛깔이라고 하면 역시 초록빛과 짙은 갈색이 아닐까 생각된다. 같은 초록이라도 짙고 옅음, 밝고 어두움에 따라 여러 변화가 있어 그것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나는 자연 속의 풀빛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갈색도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자연 속의 흙색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신경균의 초록빛 그릇과 갈색 그릇은 마치 풀과 흙이 어울리듯 좋은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나는 신경균이 이 천연스런 풀 빛깔과 흙 빛깔을 좀 더 진지하게 밀고 가기를 희망한다. 그에게 DIS 칼라 챠트를 놓고 색감을 연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흙색이라도 때로는 기름진 검붉은 흙색, 남도의 주황빛 황토, 강변의 보드라운 모래 빛 같은 흙색이길 바란다. 같은 풀 빛깔의 초록이라도 그가 한 때 가마를 운영했던 경주 황룡계곡의 눈부신 신록 빛이나 한 여름 그가 살고 있는 동네 장안사에서 척판암으로 오르는 산길의 어두운 듯 가라앉은 초록빛 따위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유약을 칠하고 장작불을 지피면 그가 추구하는 자연의 빛깔은 더욱 다양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뉴욕에 있던 수화 김환기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같은 작품에 무수한 점을 찍으면서 실험미술가처럼 캔버스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뻐꾸기 소리, 갯벌소리를 생각하며 점을 찍었다’는 그런 창작 자세 같은 것을 말이다.
신경균 도자의 빛깔은 그것이 풀빛이든 흙빛이든 한 그릇 안에서 색채의 미묘한 변주를 이룬다. 같은 그릇 안에서도 짙고 옅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차갑다거나 팽팽한 긴장을 유발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오직 장작가마에서만 나타낼 수 있는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인 색채의 변화다. 사람에 따라 이런 변주를 좋아할 수도 있고 반대로 단일 톤으로 말끔하게 나타내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따뜻하고 자연스런 변주는 기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생리를 따르는 자만이 나타낼 수 있는 맛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이런 맛을 좋아한다.
나는 몇 가지 예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아무리 압력솥이 뛰어나도 장작불로 무쇠 솥에서 해낸 밥맛을 따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예가 너무 옛날 식 비유라 이해하기 어렵다면 전자 랜지로 찌어낸 고구마가 드럼통을 개조하여 장작으로 구어낸 군고구마 맛을 당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공한 우유가 아니라 무균질(無均質) 우유가 더 고소하고 맛있는 것과 같다.
5. 넉넉하고 듬직한 푼주
신경균의 도예 세계를 논하려면 아직도 문양(紋樣)과 기형(器形)의 문제가 남아 있다. 도예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빛깔, 질감, 문양, 기형 등 4가지로 요약된다. 그중 신경균 도예에서 문양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지금껏 신경균은 성심으로 여기에 마음 쓴 것 같지도 않다. 그는 색감의 미묘한 변화를 자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무늬가 오히려 방해될 수 있어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무늬를 넣지 않는 무지(無地)가 그의 무늬 개념일 수 있다.
그의 기형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경균은 못 만드는 기형도 없고, 안 만들어 본 기형도 없다. 그러나 신경균 도예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푼주, 그의 말로 자배기일 것이다. 넓적하고 푸짐하고, 듬직하고, 넉넉한 맛을 주는 푼주는 그의 따뜻한 질감, 풀빛과 흙빛의 색감과도 잘 어울린다. 더욱이 푼주라는 기형은 신경균의 성격이나 기질, 그리고 예술적 창작 자세와도 너무나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신경균 도예의 특성을 푼주에서 보고 있다.
신경균의 푼주는 다른 도예가의 그것과 달리 면 처리에 변화가 많다. 그의 도자 색깔에 변주가 많듯이 면 처리에 미묘한 굴곡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억지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다는 것이 큰 매력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기계 물레가 아니라 나무 물레를 사용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이 효과를 위하여 그는 불편한 나무물레를 고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한 도예연구가(지금 그 이름을 잊었다)가 우리나라 도자기의 천연스러움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연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적이 있다. 그가 시골 어느 가마에 가서 물레를 돌리는 사람에게 주인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그 도공은 물레를 쉬지 않고 돌리면서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나무 물레가 뒤뚱거리며 돌아가는데 그 리듬에 맞추어 돌리는 것을 보고 “바로 저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좌우 균형을 맞추어 성형해 놓고 자연스런 맛을 내기 위해 변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스러움에 내맞기는 마음에서 천연스럽고 편안함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것이 한국 도자의 비밀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경균의 나무 물레는 유약에서 장작 가마 효과와 같은 것이다.
신경균의 푼주는 그의 다른 기형과도 잘 어울린다. 푼주 옆에는 병이 있어도 좋고, 주전자가 있어도 좋고 추상적인 오브제가 있어도 좋다. 그것은 푼주라는 기형이 갖고 있는 특성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마치 우리 정원에 소나무가 한 그루 있으면 다른 꽃나무들이 잘 어울리는 것과 같고, 백자의 세계에서 달항아리가 다른 기형을 품어 주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백자 달항아리의 넉넉함은 잘 알아도 푼주의 그 멋과 맛은 깊이 인식하지 못해온 점이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릇의 기본은 발(鉢), 이른바 대접이다. 이 대접이 있어야 생활용기가 충족된다. 이 대접이 크고, 작고, 둥글게, 네모나게 변형되면서 여러 기형으로 발전하는데 그것이 가장 크고 듬직하게 발전한 형태가 바로 푼주인 것이다. 많은 도예가 들이 이 푼주를 만들었지만 신경균은 어느 누구와도 다르고, 어느 누구 못지않은 자기만의 푼주를 다양한 색감으로 표현하고 있으니 그는 푼주의 도예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의 푼주는 백색이든 풀빛이든 흙빛이든 형태는 넉넉하고 듬직하며 질감은 따뜻하다. 그래서 누가 내게 그의 도예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따뜻한 질감, 그리고 넉넉한 푼주의 세계’라고 답할 것이다.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논하려면 그의 성장과 교육과정 그리고 예술적 이력에 대 한 언급이 있어야 하지만 나는 지금 평론이 아니라 관객으로서의 인상을 말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두를 생략했다. 아마도 이 팜플렛에 실릴 작가 연보로 대신 해 줄 수 있으리라 믿고 양해를 구한다.
첫댓글 문화의 융성은 국력과도 관계가 깊지만.....국가의 지도자도 누구냐에 따라 품격이 달라진다고 생각 합니다.한류 열풍을 말 하지만......김대중 대통형의 일본을 향한 개방이 없었다면......있을 수 없었다고 생각 합니다.
심도깊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즐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나라의 보물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