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복과 저주를 결정한다.
모세는 너희 어릴 때의 기억과 보지 못한 일들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옛적 일들을 상기시킵니다(1~7). 지금의 어린 세대(너희 자녀들)는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일들이지만, 지금의 성인들은 어릴 때 보았던 일들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해야 했고 다음 세대에도 일러주어야 합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온갖 이적을 통해서, 광야에서 40년간 인도하여 주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의 사건들을 또한 그들은 기억하고 말해주어야 합니다.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 사건을 하나님께서 땅을 열어 삼키게 하심으로 처리하신 일이 그 중에 있습니다. 이 사건은 대대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전형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모세는 이어서 말합니다(8~12; 13~17).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중적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9)이면서도, 동시에 비가 오면 그 비를 바로 흡수해버리는 천수답입니다(11). 애굽에서는 채소밭에 물 대듯이 쉽게 물을 대었는데,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12절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는 땅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땅입니다. 인간의 열심이 결실을 맺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보심과 동행하심이 있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땅입니다. 이러한 땅은 좋은 땅일까요?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책임입니다(18~20). 이것은 상황과 여건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과 저주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21절이 ‘그리하면’으로 시작하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리하면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이 땅에서 그들은 평안한 날들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강대한 나라들을 쫓아내실 것이고 이스라엘을 당할 자가 없게 하실 것입니다(21~25).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여부가 복과 저주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신 말씀을 백성에게 전합니다.
매 문단의 첫 절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1,8,13,18,27).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우리 인생의 성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은 천수답의 삶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사는 삶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 시대의 우상숭배를 보면서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했을 때(약5:17), 아마 본문의 16~17절을 읽고 이 말씀에 의지하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은 우리로 힘 있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기도하게 합니다.
또한 부모는 말씀교육과 훈련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흘러내려가도록 가정에서 힘써야 합니다. 최근에는 주일학교에 모든 것을 떠넘기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사들의 수고가 헛된 것은 아니더라도, 가정에서의 부모로부터의 신앙 교육은 없이 주일학교에 위탁만 했을 경우, 결코 올바른 신앙의 교육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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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1-7)
10장은 애굽으로 향할 때 이스라엘의 조상이 불과 일흔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수효를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셨다는 고백으로 끝났습니다. 11장은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이제 그들의 제일 과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의 우선순위는 땅을 정복함도 아니고, 그 땅을 정결하게 함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일을 앞두고 있을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존재로 성숙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적 삼고 바라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인 의미가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책무, 법도, 규례, 명령을 지키는 일과 연결됩니다. 책무라는 단어는 개역한글과 새번역에 직임이라고 번역되었는데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 또는 당부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세 단어, 즉 법도, 규례, 명령을 포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도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행하고 바라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지만 그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결과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은혜와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지만, 율법이 은혜와 사랑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고 자발적으로 따르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이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얹어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신뢰한다면, 우리의 삶에 그 말씀을 얹는 일은 전혀 어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 순종하고 있는지, 순종을 통해 사랑과 혜택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2-5)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너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과 그의 위엄과 그의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호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를 뒤쫓을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 곳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
2절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주 하나님의 위엄과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해야 할 사람은, 당신들의 자녀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입니다. 당신들의 자녀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하신 일과 내리신 명령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강조점은 오늘 너희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믿음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내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먼저 자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선포됩니다. 내가 오늘 기억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여호와의 교훈입니다, 교훈은 징계 또는 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강한 손과 편 팔로 강력하게 붙잡아 인도해 주신 모든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강한 손과 편 팔이라는 구절은 어떤 세력이나 권세도 능히 무찌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능력과 더불어 자신이 택하신 백성의 모든 일에 개입하시며 간섭하사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인화한 성경의 문학적 표현입니다. 우리 모두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것과 동일한 역사로 각자의 애굽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강력한 죄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처지였는데, 하나님께서 강력한 손으로 우리를 붙잡아 진창에서 끌어올려 주시고 펴신 팔로 모든 위험으로부터 막아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4절과 5절에서는 오늘까지 이른 것과 이 곳에 이르기까지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사실을 망각하고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내가 잘해서 지금까지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펴신 팔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사실을 잊고 방자하게 되어 죄악을 저질렀던 일도 기억하라고 명합니다.
(6-7)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에게 하신 일 곧 땅이 입을 벌려서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그들의 장막과 그들을 따르는 온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삼키게 하신 일이라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들은 다단과 아비람이 고라 일당과 함께 모세에게 거역한 일 역시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땅에서는 그러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구원의 감격을 지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큰 어려움을 겪었던 뼈저린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우리의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심을 증명하시고 하나님을 바르게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곧 잊고 죄악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삶을 얹는 태도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지난 과거에서 기억해야 할 점을 명시하고 이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명합니다.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8-17)
(8-9)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그 땅에서 강성할 것이요. 차지할 것이요, 장구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약속으로 받은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풍성한 목초지 위에서 수많은 소 떼와 양 떼가 젖을 내고, 오곡백과와 화초가 만발하여 벌들이 꿀을 풍부히 생산할 수 있는 풍요로움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강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곳을 차지하고, 날이 장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으로 유약했을 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감히 그 땅을 차지하겠다고 마음 먹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40년의 광야 훈련 생활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광야 생활을 통해 애굽의 가치관과 생활 습관을 버린 이스라엘 세대는 영적으로 강해져 그 좋은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장구히 누릴 준비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아무리 좋을지라도 우리가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곳을 차지하고 영구히 누리려는 시도도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명령을 지켜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작정한다면 우리는 담대히 그곳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늘 나아가야 할 땅, 차지해야 할 땅이 있다면 말씀에 의지하여 용감히 나아갑시다.
(10-12)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지만 그들이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애굽 땅과 같지 않았습니다. 물론 애굽 땅도 비옥했고, 가나안 땅도 풍요로웠습니다. 하지만 이 두 땅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해야 하는 땅이었음에 비해,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애굽처럼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대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일찍부터 젖줄인 나일 강을 중심으로 관개 시설을 이용하여 농업용수를 넉넉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나일 강과 연결되는 여러 운하를 팠으며,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 강의 물을 가둬두기 위해 인공적으로 저수지를 만들어 두기도 했습니다. 발로 물을 댄다는 말은, 항상 흐르는 나일 강물을 퍼올리는 수차를 이용하여 물을 스스로 공급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관용적 표현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은 근본적으로 다른 곳이었습니다. 애굽은 파라오 즉 바로가 주인인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각종 물자가 풍부해도 결국은 노예 상태, 즉 발로 물 대기를 멈출 수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 종노릇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자유인이란 자신의 목숨줄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쥐고 있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자유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버리겠다는 강력한 의식이 없으면 이 자유를 향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노예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도 끝까지 애굽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비록 강력한 제국과 바로의 살인 위협에 굴복한 종이었지만, 거기에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음식과 맛있는 고기도 먹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거대한 사람과 조직 아래 거하는 편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광야를 통과해 손에 잡히지 않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보다는 쉬웠습니다.
하지만 이제 들어갈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 자유인으로서 자기가 주인 되었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경작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고백해야 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만의 구원 방법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시스템과 물질에 구원이 있다고 믿습니다. 돈이 있으면 다 된다는 생각이 정말 팽배합니다. 그래서 발로 물 대는 노동을 멈출 수 없습니다. 자신이 노력해야 죽지 않고 연명이라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어 올린 물은 어떠합니까? 흙탕물입니다. 그곳에서 살아가지만, 그 물은 더러운 물이요 영혼을 판 대가로 얻는 목숨입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그렇지 않습니다. 관개수로를 만들고, 수차를 만들어 돌리는 나의 노력이나 계획과 상관없이 하늘에서 내리는 깨끗한 비를 바라봐야 하는 곳입니다. 말 그대로 눈을 들어야만 살 수 있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광야에서 그렇게 연습을 한 것도 결국, 하나님께서 연초부터 연말까지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우리를 향하기에 우리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의 물을 바랄 때 하나님의 눈도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닫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깨끗한 빗물을 통하여 인간의 노력과 상관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이 가나안 땅으로 자신을 옮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사회에서 더러운 물을 길어 올려야만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그 노예로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노력이라도 해야만 내가 가치가 있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가나안 땅이 약속하는 하늘의 물을 기다리며 살아가기가 너무 두렵고 힘이 듭니까? 광야생활은 그렇게 절대적 무능력을 고백하는 절대적 의존만이 진정한 삶의 동력이자 삶의 목적임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틀을 깨시고 새로운 세계관과 세상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그러한 구원받은 존재로서 우리 역시 이 땅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땅의 제도에 기반하여 살아가고 있지만 거기에 뿌리 내리지 않고 나그네처럼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우리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시기에 가능합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유혹을 끊어내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임을 고백하기 소원합니다.
(13-15)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그래서 모세는 말합니다. 너희 힘으로 살아가려는 그 모든 부질 없는 가련한 욕망을 버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다 주신다는 굳건한 약속입니다. 두렵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 하나님의 진리를 한 번 경험하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두려움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 요구하는 삶의 수준과 잣대로 살아가지 못할까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죽을까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방식으로, 이 세상의 생각대로 살지 않아도 족하다고 선포하십니다. 내가 물을 끌어오기 위해 애쓰는 삶과 하나님이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받아 누리는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기반한 노예 근성을 버리고 사랑에 기반한 자유인으로 살기로 작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고 적당한 때에 베푸시는 은혜로 배부르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16-17)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하지만 모세는 경고합니다. 스스로 삼가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에 미혹을 당하고 돌이키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에 무릎을 꿇고 그것에 절하며 섬기는 모습처럼 비참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이 닫히고 땅이 쇠잔하여 그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 종 노릇을 끊어내면 우리는 가나안 땅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속박의 집으로부터 구원받아 약속의 땅에서 자유로운 새 삶을 얻기 원하는 자는 이 절대적 자기 의존의 굴레를 끊고 자기 포기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이 땅의 생명을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이 땅의 생명을 포기하기란 두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한복음 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의 삶을 얹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 2세대에게 말씀을 전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 11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32)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오늘 본문에는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11장은 이렇게 시작(절) 되었습니다.
(1)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1) ‘...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32) ’...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누가 봐도 시작과 끝에 담긴 메시지가 동일합니다. 이와 같은 수미쌍관(首尾雙關) 형태로 구성된 본문의 메시지는 선명하고 분명합니다.
(8 상반절)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모세는 출애굽 2세대로 하여금 거듭 반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잘지켜 행할 것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순종을 위한 구체적 방안 제시(18-21)
(18-20)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출애굽 2세대는 그의 부모 세대와는 달리, 애굽과 광야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곧 약속의 땅에서 들어가 보게 될 것은 이미 잘 세워진 이방 성읍이었습니다. 눈앞의 기름진 땅을 바탕으로 한 이방 문화는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를 두고 부모를 통해 전해들은 하나님께 눈을 들리 만무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의 손목과 미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매고 붙여 기호와 표로 삼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장차 그들이 그 땅에서 손으로 행하게 될 일과 눈으로 보게 될 것에 있어, 무엇을 중심으로 삼아 할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이처럼 기호와 표로 삼은 말씀은 그들이 집에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잠자리에 들 때나, 아침에 일어날 때나 수시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했습니다.
또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도 말씀을 적어 둘 것을 전했는데, 이 역시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이 말씀을 중심으로 삼아야 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지켜나갈 때 다음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전했습니다.
(21)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모세는 출애굽 2세대와 그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면, 천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은 약속의 땅에서 길이길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을 전했습니다.
모세는 이번에는 약속의 내용에 좀 더 비중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할 것을 전했습니다.
순종에 따라 성취될 약속의 내용(22-25)
(22)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 전했습니다.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할 것’,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 ‘그의 모든 도를 행할 것’, ‘그를 의지할 것’
우리는 과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가 ?
출애굽 2세대가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할 때 주어질 약속의 구체적 내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23-25)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을 너희 앞에서 다 쫓아내실 것이라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크고 강한 민족을 다 쫓아내고, 그 땅을 이스라엘로 차지하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 이스라엘이 밟는 곳은 다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이며, 그 경계가 남쪽으로 광야에서부터 북쪽으로 레바논까지, 동쪽으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쪽으로 서해(지중해)까지 이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이스라엘은 그 땅의 모든 민족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 어느 민족도 대적할 수 없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한결같이 다른 민족의 땅을 얻기 위해, 그 지경을 넓히기 위해, 다른 민족의 우러름을 얻기 위해 병마와 병사를 훈련하는 일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만은 이를 위해서는 오롯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매진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주지시킵니다.
복과 저주의 선택권(26-28)
(26-28)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원어 성경에는 주의를 끄는 표현 ראה(레에)로 시작되는데,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었습니다. 반면 새번역 성경에는 이를 반영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26) 보십시오, 내가 오늘 당신들 앞에 복과 저주를 내놓습니다.
모세는 ‘보십시오’ 로 번역된 주의를 끄는 표현을 종종 그의 말(설교)의 절정을 표하거나, 백성들의 환기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백성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에 이어진 내용은, 그들의 앞에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복과 저주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복과 저주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백성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보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복이 되고’ 라는 표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는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분명 어떻게 하면 복이 되고,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는지 그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복이 된다’ 는 표현은 역사 속의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합니다.
(창 12: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복을 받는다’ 가 아니라 ‘복이 된다’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민족의 조상 아브람에게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약속이 오늘 출애굽 2세대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남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단지 복을 받는 것이 아닌 복이 되는 것에 지향점이 있음을 명료히 드러내셨습니다.
끝으로 모세는 출애굽 2세대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요청되는 순종(29-32)
(29-3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이 두 산은 요단 강 저쪽 곧 해지는 쪽으로 가는 길 뒤 길갈 맞은편 모레 상수리나무 곁의 아라바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의 땅에 있지 아니하냐
모세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2세대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그들로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할 것을 전하면서, 두 산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매우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요단강 서쪽, 모레 상수리나무 곁, 길갈 맞은쪽,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얼마만큼 들어간, 요단 계곡 아라바에 살던 가나안 사람의 영토에 속함.
학자들은 그리심산에는 축복을 에발산에 저주를 선포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합니다. 그중 하나는 두 산의 지형적 이유를 원인으로 제시합니다. 축복의 산 그리심은 남쪽에 위치해 햇볕이 잘 들어 나무가 울창하지만, 저주의 산 에발은 북쪽에 위치해 나무가 울창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산을 놓고 축복과 저주를 구분지었던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낯선 약속의 땅에 들어선 출애굽 2세대에게 우뚝 솟은 두 개의 산은 무엇보다 그들의 눈에 잘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 땅에 나란히 위치한 두 산을 바라보며 그들은 매일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그들 앞에 놓아 두셨음을 자연스레 곱씹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신명기답게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31-3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려 하나니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할지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
(새번역 31-32) "당신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자리를 잡거든, 당신들은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준 모든 규례와 법규를 성심껏 지키십시오.
아버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의 자녀 된 이스라엘에게 그의 명령(말씀)을 지켜 행할 것을 이토록 반복하면서 강조하신 이유 역시 분명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이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복이 될지니라)을 출애굽 2세대에게 거듭(복이 될 것이라) 주신 것은 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신명기를 통해 하나님은 .. 거듭 반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킬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출애굽 2세대와 같이 오늘 저희 역시 복이 될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는 선택해야합니다. 우리의 삶의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진단해 보고 싶으시다면 22절에 기록된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할 것’,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할 것’, ‘그의 모든 도를 행할 것’, ‘그를 의지할 것’을 물음표로 바꾸어 스스로 자문자답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고 있는가?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있는가?
그를 의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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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숨 고르기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숨을 고른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큰 의미입니다. 새로운 전환을 위해 숨 고르기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앞에 둔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 인생의 숨 고르기 하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1-7절은 출애굽후 이스라엘이 보았던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항거한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일을 자녀들에게 가르칠 것을 명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람들의 불순종으로 역사는 직조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를 잊고, 새로운 출발만 서두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과거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자칫,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만 집착하여 자신들의 과오를 잊을 경우, 다시금 불순종의 역사가 반복될까 하나님은 고라당 사건을 보지 못한 자녀들에게 직접 가르칠 것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르칠 수 있지만, 사건을 함께 경험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과오를 직접 자녀에게 가르치라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증인, 마르튀스입니다. 증인은 본 것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의 자녀에게 직접 신앙전통을 공유하고, 같은 실수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모 중에는 신앙교육을 교회에 위탁하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신앙의 가문은 교회공동체가 세워줄 수 없습니다. 신앙은 부모가 자녀에게 대물림하므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가 장성하여 고라와 다단, 아비람처럼 하나님 앞에 맞설 때, 과연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방법은 부모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가정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것입니다. 이때, 세상에 숨 가빴던 우리 가정이 비로소 주님 안에 비로소 숨 고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 8-25절은 가나안 땅의 경계와 농업을 하는 방법을 담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하나님의 부요를 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이루어주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삶의 터전인 마음과 몸, 그리고 집과 일터, 관계, 그리고 자녀에게도 말씀을 기록하고 널리 알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환을 막기 위해 말씀을 부적처럼 쓰거나, 복을 빌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삶의 길라잡이 삼고, 백그라운드 삼아 살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백그라운드 삼으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25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밟는 모든 땅 사람들에게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게 하시리니 너희를 능히 당할 사람이 없으리라”
말씀으로 숨 고르기 된 사람은 어떤 상황에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사방으로 압박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청문회장 앞에서 두려운 기색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던 것처럼, 말씀을 백그라운드 삼아 살아가는 사람에게, 두려움은 다스릴 수 있는 장애물입니다.
셋째, 26-32절은 저주와 축복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신명기 27장 이하에 에발산의 저주와 그리심산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본문은 이를 요약해두었습니다. 이후에 다루겠지만, 방위를 나타낼 때, 현대는 북쪽을 기준으로 삼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해가 뜨는 동쪽이 방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쪽을 기준으로 부정한 왼쪽에 에발산(현재 북쪽)이 있습니다. 민둥산인 에발산은 저주의 상징물입니다. 동쪽을 기준으로 오른쪽 그리심산(현재 남쪽)은 녹음이 우거진 축복의 상징물입니다. 하나님은 에발산에 올라 저주를, 그리심산에 올라 축복을 가르치라 명령합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시청각 교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우리에게 그리심산의 풍요가 아닌 생명력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 비록 화려해 보일지 모르나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에발산처럼 민둥산으로 마감합니다. 위용을 자랑했던 고관대작들은 에발산처럼 생명이 없이 메말라 있었고, 비루한 몰골이었으나 바울은 그리심산과 같은 주의 생명이 역동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르면 복을 내리고, 뜻에 어긋나면 가차 없이 파괴하는 괴팍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축복과 저주를 보여주시고 우리의 선택을 믿고 맡겨주시는 넉넉한 분입니다. 우리가 잘못하여 저주의 길로 심판의 길로 달려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역사 속에 뛰어들어와 온몸으로 십자가에서 죽음과 저주, 수치를 막아내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믿고, 십자가 아래의 우리의 세상에서 가빴던 숨을 고르십시다. 새로운 호흡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살아가는 귀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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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10장 첫머리는 모세가 돌판을 두 번째 만들어 호렙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10장 2절 전반부입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삼은 자에게 다시금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백성들은 처음부터 다시 자신을 죄 된 모습에서 구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옵니다.
일을 하다가도 실패하면 영락없이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노예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자기 백성을 친자식처럼 여기고 다시금 일어서도록 도와주시던 그 수천 년 전의 하나님이야말로, 바로 지금의 하나님이요 여전히 우리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말씀은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아나온 내용을 상당 부분 다루고 있는 성경말씀이라면 신명기는 그 1세대 때 일어난 일들을 다시금 회고함으로써 이것을 통해 2세대에게 훈육의 관점으로 들려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아 두 성경 간에 비슷한 내용을 여러 군데서 같이 다룰지라도 1차적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 그 본문은 단순히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도 하고, 때로는 다음 세대, 즉 자녀들을 위한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훈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는 '너희의 자녀', 즉 1세대 자녀라는 말이 세 군데(2, 19, 21절)에서 사용되고 있는 바, 본문이 2세대 자녀들을 위한 말씀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말하더라도 ‘아멘’ 그러면서 순순히 말 잘 듣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학교 예배시간에 보면 아이들은 잠시를 참지 못하고 몰래 휴대폰으로 문자보내기 바쁘고 종이에 낙서하거나 딴전을 피우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왜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설교 말씀에 식상해하고 잘 들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까? 그 말씀이 나와 무관하게 여겨지고 그저 학교 도덕시간에 듣는 정도의 얘기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는 엄격함이 있고 명령적인 요소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하나님 말씀 중의 ‘하라, 하지 말라’라는 표현들은 우리 각자에게서 인격적인 감화를 거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니까 손목과 이마에다 붙이고 집에서나 길에서나 누워 있을 때도, 심지어 집 문에까지 두게 한다 해서 우리 속에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공부는 최소 한 학기 일찍 공부하는 선행 학습에다가, 컴퓨터나 매스컴을 통해 배우는 지식 습득 또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많은 양을 접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의 말씀은 결코 활자화되어 있는 글처럼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글 속에 담긴 레마의 말씀이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와 닿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18절 말씀 상반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게 되면 그때는 하나님을 소중한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부모님의 가르침처럼 내게 사랑의 묘약으로 받아들여질 때면 아무리 엄격한 말씀이라도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절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하나님을 친근히 우리에게 두게 되면 친근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지키고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말씀 또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 가장 힘든 점이 있다면 모범을 보이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함께 생활하는데 한두 번 잘해서 아이들이 따라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 애들은 공부하니까 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직장에서 필요한 대로 요령껏 거짓말하면서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에게만큼은 절대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부모 자신은 잘 지키지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는 무조건 도덕 선생님처럼 말씀대로 살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아이들 신앙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부모님 자신이 현재 만나고 있는 하나님 얘기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너희의 눈으로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1세대 부모가 2세대 자녀에게 해주었던 얘기는 2세대들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하나님에 대한 만남과 기적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경제가 어렵고 병마에 시달리고 가정형편이 어려울 때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손길이 임한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인해 늘 고통스러워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좀 성숙해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기초적인 의식주 문제만 어려워져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만하면 스스로 극복했다 했는데 어느 정도에 가서는 금방 좌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우리들 자신인 것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그 누구든 인간의 수준이기에 단언할 수 없으며 자만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6절 말씀부터는 성경을 기록한 기자가 매우 단오한 투로 하나님 말씀을 우리들에게 던지듯 선언합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길은 두 가지 갈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 그런데 누가 저주의 길을 선택하며 일부러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문제의 초점은 저주의 길이 아니라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이 무언가 급히 순서를 정하거나 선택하기 위해 종이에다 금새 그려서 사다리타기를 합니다. 사다리타기를 그리는 사람도 모두가 보는 눈앞에서 그리지만 그 자신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를 정도로 사다리타기 게임은 헷갈리고 복잡합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도 마찬가지로 느껴지게 됩니다. 축복의 길을 인도해달라 하지만 매사가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중요한 착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걸린 문제가 하나님의 길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이 원하는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실은 우리 자신이 강력히 원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뜻을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접근해본다면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문제에서 우리의 선택권을 포기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단순성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두 가지 길은 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그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결정할 수 있다면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고, 그 일은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것입니다. 비록 방법적으로 그 길이 돌아가는 길이라도, 그래도 하나님은 그 길을 끝까지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두 갈래 길은 단 한번 잘 결정하면 천국 티켓을 손에 거머쥐는 길이 아닙니다. 한번 가고 한번 선택했다고 성공하고 마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에 있어 앞으로도 여러 번 우리 앞에 선택의 길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처럼 그 길은 헷갈리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마음먹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근히 교제한다면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하루도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고 순종의 기쁨을 누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