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행하시며 매일 말씀하시는 하나님.
1. 이백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질서 있게 이동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 나팔 둘을 만들도록 지시하셨고 여러 가지 나팔 신호를 알리셨습니다. 부는 방법에 따라 백성 전체를 소집할 수도 있었고(3절), 지휘관들을 회집할 수도 있었으며(4절), 진을 이동할 때나(5-6절), 전쟁 때(9절), 거룩한 절기 때(10절)에도 나팔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울리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권위와 임재를 상징하였고, 나팔이 울릴 때마다 하나님의 주관하심과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질서 있는 이스라엘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오늘날에도 성도를 위한 나팔은 울리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약의 이스라엘의 귀에 들려주셨던 것처럼, 영광스럽고 자상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특별한 부르심으로 세운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이 행할 일들을 세심하게 알려 주십니다. 성도들이 귀에 할례를 받기만 한다면,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매일 들을 수 있습니다.
3.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보면서 여호와의 임재를 확신하고, 은 나팔 소리를 통하여 여호와의 음성을 듣는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을 향한 행진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졌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한지 제 2년 2월 20일에(11절), 드디어 구름기둥이 떠오르고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최전방에서 앞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려 삼일 길을 말입니다(33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보호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연약한 언약백성을 인도하시는 선봉장이 되셔서 앞서서 나가시며, 은혜로 그 백성을 이끄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믿음의 행진을 하며 살아가는 신약의 성도들도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성도의 앞길로 가셔서 인도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4. 처음으로 인도하신 곳이 바란 광야라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함께 하고, 나팔소리로 인도하시며,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결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신자의 삶도 비록 광야와 같지만, 오늘도 성령님께서 함께 동행 하시며, 세밀한 음성으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한다면, 비록 그곳이 광야와 같을지라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니 찬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5. 모세는 이동을 시작하여 법궤가 떠날 때와 진을 멈추어 법궤가 쉴 때마다 기도를 드렸습니다(35~36). 궤가 떠날 때에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고(35),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36). 백성의 대표자로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이러한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가나안까지 평안히 도착할 수 있는 비결이며, 백성의 대표자로 마땅한 자세입니다.
6.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행할 때(아침에) 도우심을 구하고, 쉴 때(밤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신자의 삶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 있는 성도와 공동체를 위하여 마땅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함께 하심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책임 있는 성도는 그 기도의 자리를 분명하게 지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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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은 나팔을 부는 규례들(10:1-10)과 이스라엘이 시내산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여 진행할 때 진의 배치(10:11-29) 그리고 시내산을 떠나 첫 번째로 진을 치기까지의 여정을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 나팔 둘을 만들어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고 진을 진행 시키는데 사용할 것을 명하셨다. 두 나팔 모두를 불 때에는 이스라엘 온 회중으로 하여금 회막 문 앞에 모이도록 했고, 하나만 불 때에는 천부장들 즉 족장들로 하여금 모세에게 모이도록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나팔을 울려 불 때에는 동편 진들이 진행하도록 했고 제 이차로 불 때에는 남편 진들이 진행하도록 했다. 나팔은 전쟁 시(時)에도 불어야 했고 축제의 날에도 불어야 했다. 이스라엘이 대적들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어야 했다.
나팔 규례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백성들을 소집하고 진행시기는 기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영적 기능이었다. 9,10절은 나팔의 영적 기능에 대하여 이처럼 말해 주고 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 “그리하면” “그로 말미암아”로 이어지는 절은 규례대로 나팔을 불 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즉 전쟁을 알리는 나팔을 불 때 하나님은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저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믿는 이스라엘은 전쟁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그들의 마음에 승리를 확신하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동일한 영적 원리가 절기에도 적용되었다. 이스라엘은 절기를 알리는 나팔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기억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나팔 부는 규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삶에 실제적인 유익을 가져다주는 수단과 영적으로 각성하게 해 주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즉 한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나팔을 바르게 부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바르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이년 이월 이십일 동안 머무른 후에 약속의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마쳤을 때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나가도록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필요한 것을 말씀해 주시고 또한 앞으로 진행해야 할 때와 머물러야할 때를 아시고 그 때를 말씀해 주신다. 특별히 우리가 서둘러 앞으로 나가고자 할 때,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곳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렇게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진행하라고 말씀하시면 진행하고, 머무르라고 말씀하시면 머무를 것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성막 위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진행하였고, 또한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질서에 따라 진행하였다. 남편에 속한 진들이 먼저 출발하였고, 다음은 레위에 속한 자들이 출발하였고, 마지막으로 북편에 속한 진들이 출발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순서다. 특별히 각 지파들은 자신의 지파를 나타내는 진기를 앞에 두었고, 족장으로 하여금 진을 인도하도록 했다. 이런 방법으로 진행했을 때 이백만 이상이 되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공동체 안에서 연합을 이루며 동시에 자기 지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자들인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진행할 때 자신의 장인의 아들 호밥에게 자신들과 함께 가기를 청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모세는 처남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 인도하심을 보다 더 잘 따르기 위해 광야에서 살아가기 위한 실제적인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처남은 광야 생활에 익숙한 자였다. 그래서 모세는 그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모세의 이와 같은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람의 지혜가 어떻게 믿음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지 말해 준다. 물론 모세의 호밥은 모세의 청을 거절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의 도움이 없었어도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약속의 땅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사람의 지혜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 때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들 앞에서 행하였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그들을 인도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진행하고 머무를 때마다 이스라엘 회중을 향하여 이와 같이 말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10:35,36)” 모세는 이렇게 말함으로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하였고 또한 이스라엘 회중에게는 이 선언의 말을 들음으로 인하여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했다.
이처럼 10장에서 말해 주고 있는 나팔 규례나 진의 진행과 머무를 때의 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수록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해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여러 가지 의식들과 규례들을 살펴볼 때 많은 부분이 그들로 하여금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생활의 출발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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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나팔을 신호로 사용하도록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전체 인구가 2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200만의 많은 인구가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행진하기 위해서 나팔을 신호로 사용하도록 하십니다.
나팔을 만들라(1-4)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팔을 신호로 사용하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나 지도자들이 고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행할 모든 것을 일거수일투족 다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소하지만 직접 말씀으로 지시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나팔을 만들어 몇 번 불 때 무엇을 하고, 크게 불고 작게 불 때 무엇을 하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소한 방법에 대한 것 같지만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족속이 가나안을 향해 함께 가기 위해서 효과적인 의사전달 방법이 필요합니다. 신속하며 명확하게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집단적 의사전달에 실패하면, 진영은 흩어지고 사분오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위해, 그 효과적인 의사전달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을 하나님 앞에서 다양하면서도 통일되게 행하게 하시기 위해, 그 방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또한 다양하게 인도하시며, 뿐만 아니라 동일한 한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통일되게 하신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법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9-10)”
(2-4)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하나님께서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나팔은 은을 펴서 만드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모양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길이가 한 규빗 즉 45cm 정도의 피리 모양의 관 악기라고 합니다.
레위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일곱째달 나팔절에 나팔을 불어서 기념하라고 하시는데, 그때 그 나팔은 숫양의 뿔로 만든 양각 나팔인 쇼파르입니다. 쇼파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강림하실 때, 울렸던 소리였습니다. 쇼파르는 이같이 주로 상징적인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은 나팔은 원어로 ‘하초체라’라고 하며,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이 됩니다.
이 은 나팔은 회중을 소집하거나, 진영을 출발하게 할 때 신호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두 개를 함께 불면 모든 회중이 회막으로 모이고, 하나만 불면 지도자들이 모이는 신호입니다. 그래서 나팔 소리가 하나의 나팔 소리인지 두 개의 나팔 소리인지 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두 소리는 명확하게 구분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두 나팔은 음색이나 음정을 다르게 내는 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소리로 듣고 같은 의미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른 소리로 듣고 다르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모두에게 동일한 매세지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도하시지만, 또한 모든 믿는 사람을 하나의 동일한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아래의 본문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불 때에 행진하라(5-8)
(5-6)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나팔 소리를 크게 불 것이며
나팔을 크게 불면 동쪽에 있는 진영들이 행진을 시작합니다. 동쪽에는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잇사갈 스불론 지파의 진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크게 불 때, 남쪽 진영의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행진을 시작합니다. 본문에는 두 그룹의 지파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민수기 2장에 그 다음은 레위 지파가 따르며 그 다음은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따르고, 제일 후미에 단 납달리 아셀 지파가 따릅니다.
이스라엘 진영의 행진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출발의 신호로 성막 위에 머물던 구름을 떠오르게 하시면, 각 진영은 떠날 채비를 갖춥니다. 만약에 구름이 떠올라 먼저 이동을 하면 이스라엘 족속은 허둥지둥 구름을 쫓으며 진영이 흐트러지고 낙오자도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족속은 떠날 채비를 갖추고 대제사장이 나팔을 불어 순차적으로 행진하도록 합니다. 마지막 지파가 행진을 하기 까지 나팔소리에 따라 질서 있게 행진했을 것입니다.
200만이 넘는 인구가 광야에서 함께 흐트러지지 않고 거주하는 것도 쉬운 것이 아니지만, 함께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장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이 행진에는 건장한 남성으로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라,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여성은 물론 임산부와 연로한 사람들까지 모두 함께 있습니다. 출발할 때 어떤 집은 출산 중일 수 있고, 어떤 집은 장례 중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개인적인 일로 출발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 있습니다.
나팔소리는 이런 진영을 낙오자 없이 행진을 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진영의 행진이 다 시작된 후에 두 번째 나팔 신호를 불었을 것입니다. 힘이 남아 있다고 해서 더 빨리 더 오래 행진을 해서도 안 되고, 지친다고 해서 먼저 행진을 멈추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기준은 나팔 소리입니다. 나팔 소리에 맞추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팔소리는 이스라엘 족속을 한 공동체로 유지되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대일로 하시는 말씀과 통일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모두 들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느낌과 생각을 가치 있게 여기는 상대주의적 문화가 지배적인 이때일수록 더욱 이 부분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합니다.
(7-8)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하나님께서 나팔을 두 개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두 개를 만들되 두들겨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두들겨서 만드는 것을 은을 얇게 펴서 만든다는 것으로, 투박할 수 있지만 동일한 복제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 나팔은 유일한 나팔이 됩니다. 또한 이 나팔을 부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그때 제사장은 아론과 그의 남은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나팔을 여러 개 만들어서 여러 사람이 불 수 있다면,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여러 명의 제사장이 많은 나팔을 불었다고 다른 본문에 기록되어있지만,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광야를 행진할 때는 두 개의 나팔을 불도록 하셨습니다. 두 나팔을 부는 제사장은 단 한 명인 대제사장의 지휘 아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팔을 부는 역할은 단 한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의 근원은 단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 말씀을 통해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그것입니다(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팔을 불라 기억하시리라(9-10)
(9-10)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또한 나팔은 백성을 모으거나 행진하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도 쓰였습니다. 전쟁 때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희락의 날과 절기와 초하루에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희락의 날은 전쟁에서 이기거나 특별히 기쁜 사건이 있는 날을 가리킵니다. 또 절기는 율법의 절기들을 가리킵니다. 이때 부는 나팔은 앞서 부는 나팔 소리와 달리 하나님을 향해 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회집과 행진을 위해 부는 나팔은 이스라엘 족속이 듣지만,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기억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특징은, 전적인 헌신을 뜻하는 번제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의미하는 화목제물과 함께 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번제와 화목제물과 함께 그들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방적으로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족속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나팔을 불 때 기억하신다는 것은, 평상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뢰할 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를 나타내시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십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도시의 소음이 없었을 것이기에 나팔 소리가 더 멀리까지 들렸을 것입니다. 이 나팔 소리가 들리는 곳은 하나님의 통치의 반경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내신 진리의 말씀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눈을 들고 주님을 목적삼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출발하는 이스라엘(11-13절)
이스라엘은 마침내 약 1년정도의 시내산 생활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을 향한 행군을 시작합니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은 애굽을 탈출한 초라한 노예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가는 군대로 변모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이런 이스라엘이 어떻게 큰 규모의 군대로서 질서있게 이동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1-12)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한글 성경에서는 구름으로 쓰여있지만, 원문에서는 정관사가 앞에 붙어 있어 ‘그 구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11절의 구름이 민수기 속에서 이미 등장한 구름이며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바로 그 구름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거나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졌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앞서가는 구름을 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름은 항상 이스라엘 보다 앞서 갔으며 이스라엘은 구름보다 앞서가지 않았습니다. 이를통해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로 안전하게 광야를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시내 광야를 출발했던 구름은 바란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바란 광야는 신명기 1장 1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고 두려운 광야로 여겨졌습니다. 대부분 낮고 험한 언덕이 가로지르고 있고 메마른 모래 고원으로 되어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바란 광야는 이스라엘의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에 가까이 다가 왔다는 것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순종하기만 하면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순적하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13)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 행진하기를 시작하였는데
민수기에서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따라’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구름으로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로부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의 은총을 받아 누렸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움직이는 가시적인 구름이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한 현상을 보여주기까지 가만히 있겠다는 생각도 바람직한 신앙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맞는 이 시대의 ‘그 구름’이 있습니다. 바로 기록된 계시인 성경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십시다. 하나님 밖에 있으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려는 믿음으로 오늘도 은혜를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의 행군 순서(14-28절)
14절부터 28절은 본격적인 이스라엘 군대의 이동 순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대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이동을 할 때는 무질서하게 전진한 것이 아니라 마치 군대처럼 정해진 약속대로 대열을 갖춰 이동을 했습니다. 장정만 무려 60만이 넘는 무리였기에 이들이 원활하게 이동하기 위해서는 명령 체계가 확실한 군대조직이 필요 했습니다. 또한 이동하면서 생길 수 있는 수 많은 변수들을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군대와 같은 힘있는 조직이 필요 했을 것입니다. 크게 네개의 진과 그 사이에 성막에서 일하는 레위 사람들이 섞여 대열을 구성했었습니다. 물론 이들보다 항상 앞서 나아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궤였습니다. 이 법궤가 먼저 나아가면 그 뒤로 이스라엘 군대가 대열을 갖춰 이동했던 것 입니다.
(14-16) 선두로 유다 자손의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유다 군대는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 이끌었고 잇사갈 자손 지파의 군대는 수알의 아들 느다넬이 이끌었고 스불론 자손 지파의 군대는 헬론의 아들 엘리압이 이끌었더라
가장 먼저 앞에서 나아갔던 사람들은 유다와 잇사갈과 스블론 자손들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유다 자손들이 깃발을 들고 가장 앞에서 전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창세기 49장 10절에 등장하는 야곱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강력한 지파로 성장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대적을 비롯한 각종 위기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자리, 그리고 그것들을 이스라엘 중에서 누구보다 먼저 극복해야하는 자리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17) 이에 성막을 걷으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출발하였으며
든든한 유다 자손들의 군대 뒤로 레위 자손, 그 중에서도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메고 따랐습니다. 여기서 성막 자재들은 크고 무거웠기에 실제로 어깨에 짊어지기보다는 민수기 7장 6-9절에서 나온 것처럼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였습니다. 이들은 비록 전투능력은 없었지만 강력한 다른 지파들의 보호 덕분에 성막을 잘 관리하며 이동하는 임무를 잘 수행 할 수 있었습니다.
(18-21) 다음으로 르우벤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출발하였으니 르우벤의 군대는 스데울의 아들 엘리술이 이끌었고 시므온 자손 지파의 군대는 수리삿대의 아들 슬루미엘이 이끌었고 갓 자손 지파의 군대는 드우엘의 아들 엘리아삽이 이끌었더라 고핫인은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고 그들이 이르기 전에 성막을 세웠으며
두번째 진은 르우벤과 시므온, 그리고 갓 자손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을 이끄는 족장들은 1차 인구조사때 모세를 도왔던 적이 있었으며 대열이 이동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지파의 군대를 통솔하였습니다. 또한 유다지파가 속한 첫번째 군대처럼 이들 뒤에도 고핫인들이 성물을 메고 행진하였습니다. 앞서 17절에 등장한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이 성막을 담당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성막안의 성물들을 책임지고 운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레나 소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어깨에 성물을 메고 운반했습니다. 성막과 성물을 이동하는 사람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이동하였던 이유는 유사시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앞에서는 하나님의 법궤가 나아가고 있으면 그 뒤에 이스라엘의 군대가 뒤따랐고 그들 중심에 성막와 성물들이 있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22-24) 다음으로 에브라임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에브라임 군대는 암미훗의 아들 엘리사마가 이끌었고 므낫세 자손 지파의 군대는 브다술의 아들 가말리엘이 이끌었고 베냐민 자손 지파의 군대는 기드오니의 아들 아비단이 이끌었더라
세번째 진은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 자손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도 앞 뒤에 위치한 동족들을 보호하고 대열이 끊어지지 않게 힘씀으로써 이스라엘 진영의 중간 허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
(25-27) 다음으로 단 자손 진영의 군기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진영별로 행진하였으니 이 군대는 모든 진영의 마지막 진영이었더라 단 군대는 암미삿대의 아들 아히에셀이 이끌었고 아셀 자손 지파의 군대는 오그란의 아들 바기엘이 이끌었고 납달리 자손 지파의 군대는 에난의 아들 아히라가 이끌었더라
마지막 네번째 진은 단과 아셀과 납달리 자손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홍미롭게도 기자는 이들이 모든 진영의 마지막 진영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행군을 해보면 가장 힘든 사람이 바로 제일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입니다. 이동속도가 느려져도 힘들고 빨라지면 더 힘듭니다. 게다가 이들은 후방을 경계하였으며 흩어진 전열을 재정비하며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쓰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이 맡겨진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기에 이스라엘 전체 군대가 무리 없이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28)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할 때에 이와 같이 그들의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
여기서 ‘군대를 따라’ 나아갔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맡겨진 임무와 정해진 약속을 따라 질서있고 충성되게 전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모임인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각자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사회적 지위도 다 다르지만, 주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임무를 주님이 주신 임무인 줄 알고 충성되게 감당하고 자리를 지키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는 존귀한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우리가 맡은 모든 자리는 하나님 나라에 꼭 필요한 섬김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다. 오늘 하루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교회와 교우님들을 위해 기쁨으로 섬기는 일꾼이 되시길,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동행 요청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며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민수기 10장은 200만 명이 넘는 백성을 소집하며, 진영을 움직일 때 사용할 나팔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진을 향해 울리는 나팔 소리를 듣고 지파별로 행진하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 길을 행진하며 필요한 길 안내인이 되어 달라며 모세가 처남에게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29절입니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모세가 미디안 사람인 처남 호밥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자고 요청하였습니다.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며 그들의 길 안내자가 되어준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내리실 때, 호밥에게도 보답하겠다며 그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모세가 호밥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31절입니다.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
아버지 르우엘이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광야에서 낮선 사람들과 지내는 것보다 그리운 가족과 친척들이 살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처남 호밥이 동행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모세는 호밥에게 호밥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어떻게 진을 칠 수 있는지를 안다고 설득했습니다. ‘알다’는 히브리어 단어 ‘야다’는 단순히 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을 통해 경험적으로 얻은 다양한 지식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호밥은 미디안 사람으로 주로 유목 생활을 하였습니다. 유목 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시내 반도와 가나안 주변의 지형과 정세에 눈이 밝았을 것입니다. 또한 광야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처남 호밥이 광야에서 경험한 지혜가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따라가되 호밥의 경험을 통하여 어디에, 어떻게 진을 쳐야하는지 조언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사사시대에 호밥 후손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모세의 간청을 거절했던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한 호밥은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 구체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우물과 샘이 있는 곳을 알았을 것이고, 땔감이 있는 곳도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찰하고,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미디안 족속과 싸울 때에도 호밥은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주역임에도 모세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였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꺼이 요청하였습니다. 모세는 권위나 자존심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지도자로 그가 선택한 것은 동역이었습니다. 함께 동역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것이 귀하다는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34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며, 이스라엘 백성이 미지의 땅을 향해 나아갈 때 제일 앞서 나아갔습니다. 제사장이 어깨에 맨 언약궤가 선두에서 나아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지시하심을 받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며 하나님과 친교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산은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호와의 산은 언약의 산인 시내산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산을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라는 것은 언약궤가 도보로 3일 정도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내산에서 출발하여 도착지인 기브롯 핫다아와까지의 3일 여정 동안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선두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광야 40여 년 동안 언약궤는 이스라엘 행군을 주도했습니다.
3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한 구름을 ‘여호와의 구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이글거리는 사막의 열기를 피할 수 있도록 구름이 만들어 내는 그늘의 감사함을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크게 느끼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여 년 동안 전능자의 능력이 아니고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초자연적인 구름으로 인해 안전하게 쉴 수 있었고, 평안 가운데 지낼 수 있었습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만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간다 할지라도,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간다 할지라도 평안 가운데 거닐고, 평안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의 일생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의 안락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가며 주님과 동행한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한 여정을 통해 성경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구름 아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35절에서 36절입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보호자되심을 기도합니다. 모세는 호밥에게만 동행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떠나지 마시고 동행해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36절에서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도 돌아오소서’라는 표현에서 ‘돌아오소서’는 ‘구원하소서’, ‘회복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과 회복과 새롭게 되는 은총이 불가능합니다. 전투 경험이 전무한 무리들, 노약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오합지졸 같은 200만 명이 넘는 무리를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모세가 드린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간절했을지 모세의 마음이 전해지는 아침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우리의 삶은 오합지졸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시면 손가락질받았던 세리 같은 삶, 의심 많던 도마의 삶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백성으로 거듭날 때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구름 아래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온 믿음과 온 삶으로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은 아닌가, 매 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 무엇인가, 스스로 질문하며 주님 안에서 답을 찾는 복된 하루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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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하고 홍해를 건넌 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올라 이동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동하고, 구름이 성막에 머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습니다. 출애굽하고 시내 광야에 도착한 후, 약 1년 동안 성막에서 구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하고 1년의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민수기 2장 32절에는 싸움에 나갈만한 장정의 숫자만 603,55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 어린이, 노인을 합치면 약 20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행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데리고 광야를 행진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200만 명을 통제하는 일일 것입니다.
본문에는 광야를 행진하는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 가는 방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방송장비가 전혀 없습니다. 어느 특정 공간에 머물러 있는 인원들을 대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허허벌판 광야입니다. 끝도 없이 펼쳐진 광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끌고 가야하는 일입니다. 절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광야에서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하는 방법은 은나팔 2개입니다. 은나팔을 통해 신호를 보내는 방법은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는 나팔을 낮게 불어서 사람들을 모이는 신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팔 두 개를 낮게 불면 회중들이 모이고, 나팔을 한 개를 낮게 불면 천부장된 지휘관들이 모였습니다. 둘째는 나팔을 크게 불어 사람들을 행진하는 신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나팔을 크게 불면 동쪽 진영이 움직이고, 두 번째 불면 남쪽 진영이 움직이고, 세 번째 네 번째 불면 서쪽과 북쪽 진영이 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팔 2개로 200만 명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200만 명이 나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학교나 군대의 나팔 혹은 호르라기로 통제와 관리가 되듯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팔 2개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뛰어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향해 뛰어가도 좋다는 나팔신호를 기다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광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본향 주님이 계신 하늘나라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호만을 기다리며 그 신호가 주어질 때마다 본향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이 불어야 했습니다. 8절입니다.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하나님은 제사장에게 사인을 보냅니다. 다시말해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인을 보내시는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 종일 구름만 살펴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일도 해야하고 잠도 자야 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만큼은 항상 구름을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늘 깨어서 구름이 언제 뜨는지를 지켜보다가 구름에 변화가 생기면 나팔을 불었습니다. 출발해야 할 때 멈춰야 할 때 모여야 할 때 흩어져야 할 때를 분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베드로전서 2:9절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들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이유는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복음입니다. 아론의 후손인 제사장이 구름이 떠오른 것을 보고 은나팔을 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구원받아 왕 같은 제사장이 된 우리들은 아름다운 덕,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은나팔을 두 개를 통해 신호를 정한 후,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납니다. 11~12절입니다.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이스라엘 자손이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가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무니라”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성막에서 떠올랐습니다. 이를 본 제사장은 나팔을 크게 불었습니다. 큰 나팔 소리는 행진을 의미하는 신호였습니다. 이 신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선봉에 서서 행진한 지파는 유대지파였습니다. 유다지파는 동쪽 진영에 속해 있습니다. 유다지파와 함께 잇사갈 지파, 스불론 지파가 그 뒤를 따라 행진했습니다. 두 번째 나팔이 불자 남쪽 진영에 속한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가 그 뒤를 따라 행진했습니다. 세 번째 나팔이 불자 서쪽 진영에 속한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나민 지파가 그 뒤를 따라 행진했습니다. 네 번째 나팔이 불자 북쪽 진영에 속한 단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가 그 뒤를 따라 행진했습니다. 이렇게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질서있게 행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 순서는 제일 앞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고 그 뒤에 유다 지파를 비롯한 12지파 순으로 나아갔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언약의 증표인 십계명 두 돌판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말씀이 담긴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의 증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보호하시는 인생입니다. 작열하는 정오의 태양이 내리 쪼일지라도, 여호와의 구름이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혹한의 추위와 짐승의 위협에 노출되었을지라도, 여호와의 불기둥이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인생에 찾아오는 숫한 실패의 쓴잔이, 경제적인 어려움이, 육체적 질병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시련이 우리를 연단하고 결국은 정금처럼 정화시켜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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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를 읽다보면 사건이 전개되는 시점에서 거의 어김없이 발견되는 한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문장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그의 뜻을 전달할 지도자인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 뜻을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은 어떠한지를 수시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v.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은 나팔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모으기도 하고 진영을 갖춰 행진할 때 그 나팔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은나팔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리고 그들이 여호와의 뜻대로 순종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던 도구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은나팔은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 통치하심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을 규정하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 보입니다.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봉사의 일을 잘하고 있다면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해줍니다. 이러한 외적 증거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외형적 증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내적 상태입니다. 외형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진정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됨을 드러내는 내적인 증거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한 인생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의 은나팔 소리를 듣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그 다스림에 반응하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기를 즐겨하는 자들입니다. 설령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어리석고 미련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의 통치하심 안에서 만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풍요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1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예수님께서 당신을 목자라고 비유하시면서 자신의 양은 목자인 자신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앎의 정도가 엄청납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알고,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아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아는 것이 명확하고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은나팔 소리에 반응하는 자들입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을 인식하고 그 음성에 기꺼이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갈 때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 받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 9절-10절에서는 어느 때 나팔을 불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대적을 치러 나갈 때, 희락의 날, 정한 절기의 날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입니다. 여러 다른 상황 속에서 은나팔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떠한 환경과 상황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통치하심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다스림은 단지 삶의 한 영역에서만 혹은 한 때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영역과 모든 때에 주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중 주일만 주님의 통치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6일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육신의 삶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한 영역에서만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합니다. 자녀의 일 앞에서는, 이성적 사랑 앞에서는, 나의 자아가 높아지는 곳에서는 주님의 은나팔 소리에 귀를 닫아 버립니다.
만약 한 사람이 다른 모든 삶의 영역에서는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데, 돈을 버는 일 앞에서는, 또는 성적 욕망을 채우는 일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 인생은 실제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은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거룩하게 살아가는데 나머지 6일만은 세상에서 섞여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은 주일마저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님이 맞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함을 받는 사람들은 전체적 삶의 영역에서 그 다스림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시내산을 떠나 바란 광야로 행진하는 모습과 행진할 때 각 지파들의 위치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v.33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이 말씀은 언약궤가 이스라엘 행렬보다 삼일 앞서 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삼일간의 시간동안 언약궤가 행렬의 맨 앞에 위치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행진할 때 맨 앞에 섰던 것은 항시 여호와의 연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무엇입니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영광중에 하나님께부터 받았던 율법이 담겨져 있는 궤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서 바울은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의 통치자 되시는 주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세워질 수 있는지를 드러나게 합니다.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의 진두에 서게 한 것은 율법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어떤 대적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하심이었습니다. 우리의 힘 되시고 능력되신 주님을 앞세워 그 분을 의지하는 인생은 주님의 일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새해에는 우리의 인생의 행렬 맨 앞자리에 언약의 궤, 하나님의 말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앞세워 주님의 나라를 이뤄가는 우리 모두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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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0장은 이스라엘의 시내산을 출발해서 바란광야로 이동하는 것이다. 출애굽 한지 첫 달에 성막이 세워지고 한 달 후에 시내산에서 북쪽 가나안으로 행군을 시작한다. 실질적인 날짜는 20일 후에 시작하는데, 출애굽 후 2년 째 된던 해의 두번째 달 20일에 시작된다(민 10:11-12). 시내산에서 근 일년을 머문 후의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막 위에 구름이 떠오르면 제사장이 나팔을 울리고, 그것을 신호로 출발했다. 이스라엘의 행군 대열 앞에는 주님의 언약궤가 앞서 행했다.
은나팔(1-10)
민수기 10장에서 은나팔 2개를 가지고 신호규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회중을 소집하고 진영을 출발하게 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인구조사로 계수된 60만의 인구(실제는 200-250만명)를 회집하고 질서있게 행군하고 적들과 싸움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었다. 10절에는 여호와의 절기를 지킬때도 나팔을 불도록 하였다.
나팔은 두 개였고, 제사장만 불도록 되어 있다. 백성 전체를 소집시에는 나팔 두 개를 동시에 불되 소리를 울려 불지 않았다. 각 족장들을 모이게 할 때는 나팔을 하나만 불었고, 전시에는 나팔을 울려 불었다. 거룩한 절기(백성의 희락의 날과 정한 절기, 월삭 때)에는 나팔을 제물위에 불었다.
시내 광야에서 바란광야로 행진(11-1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자 시내 광야에서 출발하여 자기 길을 행하더니 바란 광야에 구름이 머물렀다.
이스라엘의 행군 순서(13-28절)
구름이 떠 오르자 그들은 이스라엘은 앞으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행군의 순서는 이스라엘이 행군할 때는 구름기둥이 앞서서 인도하고, 그 다음에는 법궤(언약궤)가 따르고 유다 지파와 잇사갈 지파와 스블론 지파가 앞서고, 그 뒤에는 성막을 담당한 게르솜과 므라리 자손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가 따르고, 그 다음에는 성물과 성막기구를 담당한 고핫 자손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따르고, 그 다음으로는 단지파, 아셀지파, 납달이 지파가 따랐다.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 할 때 그들의 군대를 따라 나아갔다(민 10: 26).
여호와의 궤가 삼일길을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는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었다.
그들이 발행한 순서는 민수기 7장에서 예물을 드린 순서, 민수기 2장에서의 이스라엘 진편성과 동일하다. 행군에 제일 먼저 참여한 지파는 유다지파였고, 그 다음은 잇사갈 지파, 스블론 지파,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냐민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였다. 총 4대로 나누어졌는데, 제 1대는 유다지파, 잇사갈 지파, 스블론 지파이고, 제 2대는 르우벤 지파, 시므온 지파, 갓 지파이고, 제 3대는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베냐민 지파이고 제 4대는 단 지파, 아셀 지파, 납달리 지파였다.
성막운반을 맡은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은 제 1대의 후미 지파인 스블론 지파 뒤를 따랐고, 고핫 자손들은 성막 기구들을 메고 제 2대의 후미지파 인 갓 지파 다음에 위치해서 출발했다.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은 고핫 자손들이 도착하기 전에 성막을 세워야 했다(21절).
각 지파의 족장들은 나손(유다지파), 느다넬(잇사갈 지파), 엘리압(스블론 지파), 엘리술(르우벤 지파), 슬로미엘(시므온 지파), 엘리아삽(갓 지파), 엘리사마(에브라임 지파), 가말리엘(므낫세 지파), 아비단(베냐민 지파), 아히에셀(단 지파), 바기엘(아셀 지파), 아히라(납달리 지파)였다.
저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할 때에 이와 같이 그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28절)고 말함으로 이스라엘이 각 부대별로 정렬해서 행군순서를 따라 행군했음을 말하고 있다. 33절에는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고 말하고 있는데, 여호와 언약궤가 그들의 앞을 인도했음을 알 수 있다.
모세가 호밥에게 동행을 권면(29-32절)
모세는 미디안에 거주하는 호밥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마한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함께 동행할 것과 선대할 것을 부탁한다. 호밥은 자신의 고향 친턱에게 가야한다고 거절했지만 모세가 다시 간청했다. 모세는 호밥이 광야 어디에 진을 쳐야 할지 호밥이 잘 알기 때문에 길잡이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함께 동행했을 때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무엇이든지 함께 나눌 것을 약속한다.
모세의 기도(법궤의 이동과 머뭄, 33-36절)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일 길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일 길에 앞서 행하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그들이 행진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그들은 마침내 여호와의 산(시내산)을 떠나 사흘길을 언약궤를 앞세우고 출발했고, 그들은 길을 가면서 쉴 곳을 찾았다. 여기서 삼일길이라는 것은 시내산에서 출발해서 기브롯 핫다아(민11:34)까지 이르는 삼일간의 행군을 말한다.
주님의 언약궤가 떠날 때 모세는 기도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궤가 떠날 때에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자가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말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 오소서"(민 10: 35-36)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행군에 일어나서 앞서 가시고 또한 주님의 대적들을 흩으시리라는 언약적인 믿음과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보호자와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들 앞에는 평탄한 대로가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전쟁이 도사리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나라는 순적하겠지만, 그렇지 않는 나라는 주님의 군대의 대적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전쟁의 승리를 위한 기도였고,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과 안식을 바라는 간구이다.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모든 섬세한 사역들과 명령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실질적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를 묵상하게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모든 진로와 또한 모든 승리의 조건과 행복의 조건을 아시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죄악과 연약함의 간격을 메꾸셔서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이 만나게 하신다.
잠언 3:6은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참된 인정은 인생의 모든 삶과 영역, 그리고 행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를 받게 된다. 인간의 연약한 지혜와 세상의 헛된 지혜에 자신을 의탁하지 않고, 참된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은 거대한 인생의 지혜에 속한다. 이 세상의 삶은 광야와 같은 삶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과 같은 생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위로와 평안과 승리가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의 필수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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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은 이스라엘 온 백성의 진행과 소집을 위하여 은나팔 둘을 만들라고 지시하신다(2). 은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게 되어 있다(8). 두 나팔을 불 때 회중이 성막 문으로 모이고, 한 나팔만 불면 이스라엘 천부장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나오고, 둘을 크게 불 때에는 동편 진이 출발을 시작하고 두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편 진들이 진행하게 된다. 회중을 모을 때에는 크게 불지 않는다(3~7). 또 전쟁을 할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게 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대적에게서 구원하실 것이다(9). 이것은 백성들을 향한 나팔 소리라기 보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나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희락의 날(절기)과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과 화목 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해주실 것이다(10).
2.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거의 1년을 머물렀던 시내산에서 출발을 하게 된다. 그날은 제2년 2월 20일이었다. 시내산에 머무는 거의 1년의 기간 동안 그들은 광야 생활뿐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간 뒤의 삶에 대한 모든 오리엔테이션을 마쳤다. 그들은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고 출발하였다. 이 여정은 바란 광야까지였다. 바란광야에서 구름이 멈추었기 때문이다(12). 진행 순서와 방식이 설명된다(13~28). 동편 진영인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 선두로 출발하였고(14~16), 이어 성막을 걷어서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이 메고 출발하였다(17). 그 다음에는 르우벤 진의 기에 속한 남편 진영, 르우벤, 시므온, 갓 지파가 출발하였고(18~20) 이어서 고핫 자손이 성물을 메고 진행하였다(21). 진을 멈추게 될 때에는, 고핫 자손이 도착할 때 즈음에는 이미 앞서 가던 므라리와 게르손 자손이 성막을 만들어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법궤의 위치는 행진할 때에도 일상적으로 중간에 있었으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앞장을 섰던 것 같다(수 3:3; 6:8~9). 그 다음에는 에브라임 자손 진기에 속한 서편 진영,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지파의 군대가 출발하였고(22~24) 이어서 단 지파의 진기에 속한 북편 진영, 단, 아셀, 납달리 지파가 따랐다(25~27), 이 진행방식은 군대적 질서였다.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28).”
3. 이 여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여정이었다(33~34). 바란까지는 삼 일이 걸렸고 백성들은 삼 일을 걸어야 했을 것이다(33). 얼마나 고단했겠는가? 그들이 자기들의 입장만을 생각한다면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여정은 철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들은 실제로 자기 계획과 자기 의지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했다.
4. 본문은 모세의 처남 호밥 이야기를 기록한다(29~32). 호밥은 아마도 모세의 장인 르우엘(이드로)과 함께 시내산에 있는 모세에게 왔다가 르우엘이 돌아갈 때 돌아가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었다(호밥의 신원에 대해서는 그가 르우엘의 아들, 모세의 처남으로 정리한다). 모세는 광야 길에 익숙한 호밥이 자신과 동행해 주기를 바랬다(29~32).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31).” 본문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세의 부탁 자체가 그의 불신앙을 드러낸다고 판단할 근거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호밥이 모세를 떠나게 하심으로써 이 모든 인간적 의지를 제거하신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말이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5. 모세는 이동을 시작하여 법궤가 떠날 때와 법궤가 쉴 때마다 기도를 드렸다(35~36). 궤가 떠날 때에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했고(34),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기도했다(35). 이것은 모세가 법궤 자체를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6.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나팔 소리는 분명해야 한다. 나팔을 부는 것은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었다. 비록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지만, 지도자로서 제사장들에게 주신 책임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백성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나팔소리는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메시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고전 14:8).”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하는 방언의 은사가 교회 전체에 유익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군대인 교회를 향해서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는 메시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말씀이 분명해야 하나님의 교회와 그 백성들은 바른 길을 바라보고 따라갈 수 있다. 신자와 교회 공동체는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법궤를 중심으로 하는 구약 광야교회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바다. 또 궤가 떠날 때와 쉴 때마다 기도를 했던 모세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한 기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