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절대주권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긍휼을 믿음으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갖고 구원역사를 이루신다고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은 우리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믿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깨닫고 함께 구원의 은혜 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1)
지금 사도바울은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얻기를 원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가 예수님에게서 끊어져 지옥에 가도 원하는 바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사도바울이 원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받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나거나 거룩해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축복을 맘껏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잘 차려놓은 밥상과 같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고 영접하면 배부르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무식한 열심을 가진 이스라엘)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좆은 것이 아니라.”(2)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세 번 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켰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빼먹지 않고 드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손과 발을 부지런히 씻은 다음에 먹었습니다. 이 정도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에서 열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열심히 복음역사에 헌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열심 있는 신앙생활을 권면하였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로마서 12장 11절) 열심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열심은 옳지 못합니다. 그들이 바른 지식을 따라서 열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바른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열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 무식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무식한 열심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열심은 자기 의를 세우고 남을 판단하는 교만을 만듭니다. 이들은 율법주의의 열심입니다.
(자기 의에 기초한 신앙생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3)
죄에도 진짜 죄와 가짜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가짜 죄는 진짜 죄가 아닌데도 우리들로 하여금 죄로 여기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가짜 죄를 만드는 데 선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잘하였습니다. “뭐라구?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았다구? 아니! 소감을 쓰지 않고 금요철야기도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구? 아니! 어떻게 저렇게 헌금을 조금 낼 수가 있는가?” 하며 사람들에게 계속 죄책감을 심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로 행위중심적인 자기 의를 세우려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도 없게 하고 구원에도 이르지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도 행위를 앞세우기 쉽습니다. 행위로 선을 주장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의를 말합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신앙생활하다가 낙망하고 지쳐 쓰러지기 쉽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행위로 열심을 좇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날마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먹습니다. 양들도 먹이고 양육합니다. 공동생활 모임에서 궂은일을 도맡아서 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런 것이 나쁜 것이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슨 힘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심에 무엇을 두고 이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열심을 내고 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절대적인 성령의 도우심으로 은혜 속에서 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일을 하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은 자신도 힘이 듭니다. 자기 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정죄합니다. 판단합니다. 교만합니다. 자기 불의에 잘 빠집니다. 이런 류의 사람은 불신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하다가 어려움에 빠집니다.
크고 넓은 태평양바다가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몸을 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체격도 좋고 건강해 보입니다. 아주 태평양을 잘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매우 왜소하고 허약해 보입니다. 아마 처음부터 겁을 먹고 포기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금세 이 두 사람은 동시에 태평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건장한 사람은 보란 듯이 바다를 힘차게 헤엄쳐 나갔습니다. 건강해 보이는 자는 자기의 강한 몸과 의지를 굳세게 믿고 빠른 속도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몸을 낙담하지 않고 포기치 않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보니 배가 태평양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 배는 예수님이 배입니다. 그는 이내 예수님의 배로 올라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방향대로 때로는 열심히 노를 젓고 때로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때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구름과 별들을 맘껏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와 함께하시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생명조차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반면에 건장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열심히 잘나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몸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졌습니다. 의지도 약해지고 두려움도 임했습니다. 결국 그는 더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결국 수영을 하다가 태평양 바다에 빠져죽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배로 갈아탄 왜소한 자는 휘파람을 부르며 즐겁게 이 항해를 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건장하고 육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기초한 신앙생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험난한 우리의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럽고 추하디 추한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매순간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살아 계시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감당할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중심을 드리는 자는 얼굴에서 드러납니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얼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율법의 마침표가 되시는 예수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4,5)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쫓아 행했습니다. 밤낮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달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행위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모세가 말한 것과 같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율법을 다 지켜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음란, 탐욕, 도둑질, 속임수, 홀기는 눈, 교만, 훼방, 살인, 광패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열심을 내었지만 그들의 속은 까맣게 썩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합니다. 그들은 결국 구원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신앙인이 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써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해도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힘든 율법의 멍에를 다 지시고 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신 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고 믿을 때 이제 은혜로 율법을 지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고 딱딱하고 지겨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의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을 행할 힘과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제 율법주의자보다 더 율법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주님께 물질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큰 특권이요 은혜로 생각됩니다.
(천국과 지옥에 가는 이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6,7)
신앙은 내가 나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고 나의 죄로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선을 행했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고 내가 율법을 다 지켜 행했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너무도 부족해서 내가 죄와 허물이 너무도 많아서 또 내가 연약하여 실수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음부에 내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 의로 하나님께 가고자 하였습니다. 불교는 바벨탑처럼 탑을 쌓아서 하늘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탑은 하나님 나라에까지 가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가신 분은 예수님이요.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지옥에 내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과 음부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올라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지옥에 내려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첫째도 예수님을 믿고 둘째도 예수님을 믿고 셋째도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올라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내려갑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입과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감정과 느낌이 아니라 말씀에 뿌리를 둔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을 바라고 계십니다. 구원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음부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고 입에 있습니다. 말씀이 항상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말씀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매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과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자신에 목매달지 마십시오. 과거의 죄를 묻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죄의 삯인 사망권세까지 다 없애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흥청망청 구입했습니다. 결재 일을 생각지 않고 원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구입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러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결재 날이 되자 결재대금청구서가 어김없이 날아왔습니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한쪽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쪽 눈으로 청구서를 한참 만에 보았습니다. 근데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청구서에 결재금액이 0원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물건 값을 대신 갚아 준 이가 있었다고 카드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뛰고, 기쁨이 물밀 듯이 올라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건 값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그 피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빚을 갚아 주신 것을 청구서에 기초하여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낭비하지 말고 검소 근면하게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자기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주의 역사를 섬기는 데에 뒤로 물러서는 성도가 있습니다. 또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큰 연약함과 허물이 있지만 진실하게 그 모든 것을 들고 나오는 자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제 나의 모든 빚을 갚아 주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다시 흥청망청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이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도우십니다. 거룩하게 살게 하십니다. 구원의 길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삶)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우리의 주님이요 왕이요 구원자가 되게 하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삶의 주인 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마음으로 굳세게 믿고 입으로까지 날마다 시인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믿는데 입은 시인하지 않으면 구원과 멀어집니다. 또 입으로 열심히 시인하면서 마음으로 부정하면 구원과 멀어집니다. 마음과 입이 하나가 되어 믿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어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원치 않으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진심으로 하나된 중심을 기뻐 받으십니다.
구원은 거창하거나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마음과 입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살아 계신 주님이 친히 일하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한 사람은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른 사람을 순종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의 미래, 우리의 가정, 직장, 우리 학과공부, 우리 사명의 주인이 되십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우리는 근본이 악하고 타락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죄는 우리 안에서 생깁니다. 형제는 자매를 보고 연애감정이 생깁니다. 자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움이 생기고, 적대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시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는 너무도 교만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죄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오셔서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우리가 애통할 문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왕으로 사는 것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주로 모셔 들이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안에서 살아 계셔서 선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마가복음 7장 6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지만 마음은 돈에 있었고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입술로 시인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전하는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소외시키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정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높여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율법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합니다.
(쉬운 구원의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이 고3처럼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공부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심히 절대적으로 기도하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리고 1:1 말씀 공부와 소감을 빼먹지 않고 행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다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길은 마음으로 예수를 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비밀입니다.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유대인에게 구원의 길을 말했습니다. 구원의 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믿는 자가 얻는 영광)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
우리가 예수님 앞에 우리의 추한 죄를 모두 들고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니 모든 것이 O.K.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을 때 가정과 직장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끄러움은 주님을 무시하고 주님을 배신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구원의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은 말씀하십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통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우리 삶의 모통이 돌 되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반드시 영화롭게 하여 주십니다.
(믿는 자에게 부요하신 주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
하나님은 주를 부르는 자마다 풍요롭게 하십니다. 주를 높이는 자마다 축복을 주십니다. 잠언 4장 8절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품어 보세요. 그를 높여 보세요. 그가 당신을 높여 주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연약하여 실수도 많았지만 끝까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감사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럴 때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영적인 축복을 다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풍성하고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왕 중의 왕으로 섬김으로 복의 근원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누구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병든 자든지, 왕따를 당하는 자이든지, 대통령이든지, 경비원이든지 꼴찌든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부르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마음은 멀리 있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사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기적을 만나게 됩니다. 죽은 후에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우리는 예수님을 불러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말씀을 들어야 생깁니다. 말씀 공부를 해야 생깁니다.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누군가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누군가 전도자를 파송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은 생명을 살리는 향기로운 발입니다. 조금 냄새가 나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발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를 많이 양성하여 개척과 세계선교에 파송해야 합니다. 캠퍼스에 나가서 힘써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믿은 자들에게는 계속하여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씨를 뿌려야만 수확을 기대하듯이 영적인 말씀의 씨를 캠퍼스 곳곳에 뿌리면 영적인 열매가 맺힙니다.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시며 말씀을 전하라는 최고의 명령을 하셨습니다.
(믿지 않은 유대인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16-1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우리의 전한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신 말씀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믿음 없는 곳을 떠나서 믿음이 있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믿음이 없는 자에서 믿는 자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면 믿는 이방인들을 통해서라도 구원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9)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이 믿음으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고 하나님은 심히 괴로워하십니다.
그 옛날 모세 시대에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21절에서 나도 내 백성이 아닌 흉한 족속을 사랑하여 그들의 질투심을 일으켜 놓고 그들의 속을 썩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침략으로 유대가 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 백성을 화나게 하시고 분노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신하자 이방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먼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질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우십니다. 마치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세상의 여자들이 남편을 존경하게 하여서 아내가 남편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20)
이사야가 대담하게 일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와주려고 항상 기다리고 있었으나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호소하는 이스라엘 사람이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구하지도 않고 문의하지도 않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손을 뻗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결국은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방인 구원역사를 이루고자하시는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21)
하나님께서는 손을 벌렸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깐 벌리지 않으십니다. 온종일, 힘을 다해 손을 벌리십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비유가 생각납니다. 첫째 아들은 유대인이요. 둘째 아들은 이방인입니다. 둘째 아들인 이방인이 하나님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이야기가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 속편입니다. 첫째 아들인 유대인이 자기 의로 다시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동일하게 첫째 아들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집나간 첫째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이 아프도록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를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버지의 마음으로 힘써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자는 빨리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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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가장 먼저 그 수신자들을 향해 형제들이라며 친근하게 부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서신의 중간에 표현을 달리해서 수신자들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자칫 분산된 또는 분산될 수 있는 수신자들의 집중(환기, 전환)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의 시선을 모은 후, 자신의 속마음을 표했습니다.
바울의 마음(1-10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가장 먼저 바울은 형제로 여기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하나님께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또렷이 밝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 여기서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은 율법의 준행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을 수 있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박해했던 심지어 살해하려 했던, 그리고 살해하려는 동족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구원을 얻기를 마음으로 소원하고, 실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이런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형상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마음과는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너무도 멀어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이어질 자신의 말을‘증언’이라는 법정 용어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기술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열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열심이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그는 그릇된 지식을 기반으로 한 그들의 열심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앞서 바울은 그들이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따르지 않던 올바른 지식의 실체는‘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셨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서 그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의는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의가 어린 양과 같이 오실 메시야를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 의에 대해서 모른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서‘모르고’로 번역된 원어 ἀγνοοῦντες아그노운테스는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을 언급할 뿐만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아니하여 모르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듣지 못해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는 불순종했던 것이었습니다.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님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자신의 의가 아닌 모든 믿는 사람들이 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믿음을 통한 의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친히 율법을 모두 성취하심으로 율법의 완성이 되어 주셨습니다.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모든 믿는 사람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족했습니다. 결코 특정 민족이나 신분, 계층 등에 차별이나 예외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시선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형태의 선민의식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의 의와 믿음의 의를 비교하며, 무엇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바울은 율법의 의를 설명하면서 레위기의 말씀(레 18:5)을 인용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도 이 율법의 의를 현실에서 온전히 행할 수 없다는 것에 그 문제가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 율법을 모두 준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율법 중 하나에 거치면 모두를 범한 자가 되기에, 율법의 의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곧장 믿음의 의에 대해 전했습니다.
(6-8)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바울은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신 30:12-14)을 인용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인화하여, 그 의가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음부에서 썩지 않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이미 부활시키셨기에, 음부(:죽은 자들의 세계)로 내려갈 필요도 없음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구원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닌, 이미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나아가 말씀이 늘 그들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구원 받는 이의 특징을 입과 마음으로 구분해 설명했습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먼저 바울은 구원을 받는 이는 입으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시인하며’ 로 번역된 원어 ὁμολογήσῃς호몰로게세스는 법적 용어로서 서약이나 약속, 고백 등에 사용된 어휘였습니다. 70인역은 이를 ‘서원하다’는 의미와 ‘맹세하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의 역어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구원받은 사람은 공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당시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이들에게 이 고백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숭배에 심취해있던 로마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로마 황제가 아닌 다른 이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도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은 여전히 유효할지 함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어 바울은 구원을 받는 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된 믿음의 내용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앞선 신앙고백의 근거가 되어 줍니다. 바울은 이를 보다 간결하게 정리했습니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9절의 내용을 앞뒤 순서를 바꾸어 요약한 이 문장은 로마서의 전체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자체로 결코 율법의 행위나 혈통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반증합니다. 바울은 이제 차별이 없는 은혜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차별 없는 은혜(11-13)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구약의 말씀(사 28:16)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9장에서는 이 말씀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인용된 부분의 하반절만 떼어, 11절과 함께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롬 9:33 하) ...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1)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바울은 9장과 달리 11절에서는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넘어, 이것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됨을 강조했습니다. 계속해서 이를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갑니다.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방인)을 명시하며, 주님께는 혈통에 따른 어떤 차별도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배타적 선민의식으로 가득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목의 가시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이를 모를 리 없었지만, 바울은 그들의 왜곡된 신념을 바로 잡는 것과 진리를 전하는 일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다는 것은 베드로 역시 교훈한 내용이었습니다.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끝으로 바울은 구원의 보편성을 한마디로 정리했습니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역시 구약 성경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요엘 2:32 상)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당시에나 지금이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부른다’는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앞서 살펴 본 ‘시인하다’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같이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구원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하다는 사실입니다.
서두에 로마서의 수신자들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왜 이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을 적어 보냈을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생각을 돕기 위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로 그 사랑을 기억하게 하고, 그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로마라는 므나를 맡긴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물질이라는 므나, 가족과 일터라는 므나, 재능과 섬김이라는 므나 등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는 므나를 맡기셨습니다. 므나가 맡겨진 자로서 이에 충성하고 있는지 함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더욱이 오늘 말씀이 허락된 므나에 충성하는 일에 있어 촉매가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오신 것과 다시 오실 것을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분명합니다. 맡겨진 므나(가정과 일터)에 그 므나(재능과 섬김)를 통해,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믿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복음의 순종(14-21절)
14-15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4-15)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를 쉽게 설명하면 ‘믿는 자를 부르시고, 듣게 하시고, 전파하게 하시고, 보내심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를 믿는 자들이 맡은 역할입니다. 바울은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이사야 52:7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영혼들에게 말을 걸고 다가서는 모습,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의 이름 자체가 아름답고, 주의 이름으로 전하는 복음이 생명을 낳게 하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또 본문의 발걸음이란, 우리의 모든 언행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보내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보내심을 받은 자의 일은 보내신 자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도록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과 행동으로 전해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전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오직 보내신 분이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즉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받은 메신저입니다. 메신저의 삶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메신저가 메시지를 악용할 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메신저가 메시지로 분을 풀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힘을 모으려고 합니다. 이익을 취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합니다. 메신저가 메시지를 가지고 살 생각보다는, 메신저가 메시지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얻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뒤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선지자와 제사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꿈과 환상, 기적과 계시, 직접적인 음성과 대면 등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그들에게 수없이 많이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16절입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바울은 이사야 53:1을 인용하며, 그들이 실패한 것은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순종의 원어적 의미는 <권위자의 명령을 겸손히 청종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또 그 말씀에 합당하게 순종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영적으로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7-18)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바울은 17절에 “그러므로”라는 결론적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이 <경청>이며, 그만큼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 있지만, 상담가들은 말하길 <경청>이 소멸되는 순간 시작된다고 합니다. 말을 잘하기 위한 기술을 알려주는 스피치 학원을 등록하면,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이 <경청>입니다. 솔로몬도 열왕기상 3장에서 하나님께 구한 것은, 다름 아닌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 이전에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경청>이며 그것이 지혜인 것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또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먼저 말씀하시기 보다는, 가시는 곳마다 모든 사람들의 말에 먼저 <경청>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른 경청을 위한 조건이 4가지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공감, 인정, 말의 절제, 이해>라고 합니다. 경청에서 ‘들을 청(聽)’의 한자를 분석하니, ‘임금 왕, 귀 이, 열 십, 눈 목, 날 일, 마음 심',이 있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왕이 귀를 열어 듣는 것처럼, 열 개의 눈과 한 마음으로 그 사람의 말을 최대한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경청>이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온몸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또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머무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들음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믿음이 생성됩니다. 그 믿는다는 것은 내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완전한 나라에 거하기 위해 내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다는 것은, 따르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주님이 따라오시도록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에 내가 따라 살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질 때 곤고한 삶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들음을 통한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19-21)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19-21절은 '신명기 32:21, 이사야 65:1, 이사야 65:2'를 근거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에 믿음이 생기지 않았고, 불순종의 결과, 복음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불순종이 아닌 순종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른 순종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온 몸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른 순종은, 나의 유익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슬러’는 ‘반항하고 반대하여 말하다’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반대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보다 더 나아가 직접적인 반항하고 반대하는 말을 표현하여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끝까지 품으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셨습니다. “...백성에게 내가 종일 손을 벌렸노라” 이 말은 마치 손에 닿지 않는 물건을 잡기 위해 몸을 최대한 기울여, 손을 뻗치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거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으로, 자비를 베푸셨는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거슬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렀던 적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오. 하나님을 거슬렀던 죄 많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종일 내 손을 (너에게) 벌렸노라”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우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여러 므나를 허락하신 주님은, 우리가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손을 벌려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힘겨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은 그 손을 종일 벌리십니다. 내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시기 위해, 주님은 종일 그 손을 벌리십니다.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은 종일 손을 벌려 우리를 안아주시고, 이 위기에서 건져내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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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구원 받지 못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가?
첫째로, 한마디로 말해서 잘못된 열심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2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열심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열심이 없이 하나님을 절대로 섬길수가 없습니다.
열심없는 신앙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열심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열심은 열심히 할수록 더욱 큰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장로의 유전인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날이면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꼭 올려야 될 경우에는 유대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사서 올리게 한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노릇입니까!
그 정도로 율법을 완전히 지키겠다고 하는 나름대로의 열심을 가지고 극성을 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기의 의를 들어내기 위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악법을 지켜 의로워 질 줄 알고 거기에 매달렸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율법 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이 옛날에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이 다 그 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처럼 이 유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사정없이 비판하고 이간질 했습니다. 더 나가가서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당당했습니다.
두 번째로, 지식을 쫓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식한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3절에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 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어 놓으신 하나님의 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대신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자기는 죄가 없으면서도 율법 아래 갖혀 그 율법을 우리 대신 다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꼭 받아야 할 율법의 형벌을 그가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요, 율법을 완성시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어졌습니다. 율법 아래에서 떨어야 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의롭게 되는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의 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그의 의 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받아 주는 의 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입니다.
열심히 지켜서 얻는 의가 아니라, 믿어서 얻는 의를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오셨지 우리가 오라고 한 것이 아니었고,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 나신 것도 하나님이 살리셨지, 우리가 가서 빌고 애원한다고 살아난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 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수고하지 아니한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를 값없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8절에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면 끝나는 것이지 그것이 멀리 있는 것처럼 돌아다니지 말라하는 이야깁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두 가지 구비해야 할 조건을 9절부터 말합니다.
1. 예수를 나의 주로 시인해야 합니다.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했습니다.
나의 왕이요, 내가 절대로 복종해야 할 분이심을 시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생사화복을 완전히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2.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죽으신 후 3일 만에 나를 위하여 부활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뿐 만 아니라, 그 믿음은 마음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10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겉으로 사람 보기에 듣기 좋은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뿌리를 두고 진실하게 고백하는 믿음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고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공적으로 사람 앞에서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고 입으로 시인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와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가리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구원을 주십니다. 의롭다함을 주십니다.
그것이 11절-13절 말씀입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 주변을 한번 살펴 보십시오.
유대인처럼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극성을 피우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두 사람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종교와 사상이 잘못된 것일수록 거기에 심취한 신자들은 더 열심을 내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신앙, 잘못된 사상은 그 사이비성을 감추기 위해서 추종자들에게 극단적인 열심을 강요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오늘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열심을 누가 쫓아 갈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는 열심!
그 분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전부를 드리는 열심은 절대로 나무랄 수 없는 열심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끝으로 우리는 바울에게서 한 가지 더 배울 것이 있습니다.
잘 못된 열심에 빠져서 바울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자기 동족을 향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에서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이들을 놓고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바울의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
‘주여, 저는 그들을 위해서 날마다 가슴 아파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복음 전파와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한 말씀입니다. 14-15절입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4절은 먼저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그런즉’은 ‘그러한즉’의 줄임말로 앞뒤의 내용을 이어주는 부사로 사도는 ‘그런즉’ 복음은 끊임없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곧 오늘 본문 앞의 내용과 연결해 사도는 반어법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끊임없이 전해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구약성경 이사야52장7절의 하반절의 말씀인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를 인용해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의 범죄와 타락 이후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로 초대하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행동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으로, 궁극적으로 사람 몸을 입으신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자리로 부르셨고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 전파가 중단된 적은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셨던 그 긴 침묵으로도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된 것은 누군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믿음을 들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의 과정에서, 역사를 통해 사람이든 책이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준 자가 있었고, 우리를 믿음의 자리로 초대해 준 이가 있었습니다. 그 말씀과 초대와 부르심이 씨앗이 되고 계기가 되어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늘 겸손과 감사로 복음에 빚 진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6절의 ‘그들’ 또한 14절의 ‘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입니다. 확장하면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은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곧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핏 16,17절 말씀의 연결성이 조금 떨어져 보입니다. 16절은 말씀이 전해졌는데 17절이 다시 말씀이 전해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18절 역시 하나님의 말씀은 땅 끝까지 전해졌음에도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18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이 말씀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대로 유대인을 비롯한 말씀에 불순종한 이들은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닫고 말씀을 부정한 것입니다. 실은 말씀을 듣긴 들었지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말씀은 중단 없이 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해져야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며 지혜이며 결정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같은 자리에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이는 예화만 듣고, 어떤 이는 주변이야기만 듣고, 어떤 이는 좋은 강연으로 듣는데 어떤 이는 구원의 복음을 듣습니다. 말씀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영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보고, 구원에 이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고 어떤 이는 말씀을 좋은 윤리적 교훈정도로만 이해하고 복음적 삶을 율법적 행위로 왜곡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며 기회이며 선물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복이며 약속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끝이 있고 인생도 마지막이 있으며 그 이후에는 변경불가의 하나님의 영원한 판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말씀에 응답하고 반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입니다.
19절에서 21절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있는 최고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입니다. 가끔 파괴된 가족관계 뉴스를 듣기도 하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사람의 본능 중의 본능입니다. 혹 부부 사이는 불편해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주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그 이상입니다.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런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이사야49:15절에서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날마다 밤새 문간에서 집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기다림이며 눈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