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1.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의 때가 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1a,3). 그러나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2).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발을 닦아 주셨는데(1~17), 이것은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을 보여줍니다(1b).
2. 발을 씻는 일은 집에서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4~5). 베드로가 거부하자 주님께서 씻겨주지 않으면 주님과 관계가 없다고 하시자(비록 그 말씀의 영적 의미를 다 깨닫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는 몸까지 씻겨달라고 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고 알아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아멘할 수 있고 그 말씀에 우리 생명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닦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10). 목욕했다는 것이 중생과 칭의를 가리킨다면, 발을 씻는 행위는 성도의 삶 속에서 날마다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성화를 가리킵니다.
3. 비록 제자들이 온 몸이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10). 주님은 여기서 당신의 죽으심이 속죄의 죽으심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이것은 주님께서 본을 보이심으로 주님의 제자들이 할 바를 가르치신 것입니다(12~17). 그 섬김의 핵심에는 복음이 있고 구원의 도리가 있습니다.
4.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룟 유다의 배신입니다(18~30). 주님은 열 한 명의 택함을 받은 제자들과 가룟 유다를 구분하십니다(11,18). 주님은 배신이 있을 것을 시편을 인용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18; 시 41:9).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모든 이야기의 의도는 제자들이 나중에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9). 비록 제자들은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말입니다(28). 주님께서 떡 조각을 유다에게 주시자 사탄이 곧 유다에게 들어갔습니다(27). 모든 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유다가 자리를 떠나 나갔을 때가 밤이라는 말은, 그가 빛이 아닌 어두움을 선택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30; 3:19).
5.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기 위해서 나간 것을 보시고,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습니다(31). 십자가는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께 영광의 사건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영광은 함께 합니다(32). 주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당부하십니다(34~35).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제자됨의 증거이고 선교명령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없이 교회는 설 수 없습니다. 교회의 자기 증명은 말이 아니라 새 계명의 순종으로 됩니다. 이 말씀 후에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도 예언하십니다(36~38). 베드로는 새 계명보다 그 전에 주님이 하신 말씀(33절)에 주목하여 어디로 가시는지 묻습니다(36). 주님은 베드로가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그 밤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6.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의 발도 종처럼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면 십자가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피로 모든 제자들을 깨끗이 씻겨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그대로 닮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제자됨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표지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
13장부터 진행되는 요한복음 후반부의 핵심은 가장 위대한 표적인 십자가를 통한 계시입니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표적들을 통해 예수님께로 나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목적은 제자들을 훈련하시기 위함이었고, 이제 후반부의 가르침과 고별 설교 역시 제자들을 양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요한복음 13장은 후반부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세족식을 통한 예수님의 겸손한 사랑이야기는 이어지는 유다의 배신 이야기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계명에 대한 이야기는 베드로의 부인 예고와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심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잠시 후면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음에도 사랑해 주셨고, 그들을 믿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역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거나 멀어졌던 모든 순간과 행동을 잘 아심에도 그런 우리를 향해 사랑을 베푸시며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십니다. 주님의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을 배신할 제자도 있었습니다.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는 생각 속에서 역사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생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루터의 유명한 말처럼,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탐심과 욕망이 생각을 사로잡을 때 사단은 우리를 이용합니다. 자칫 그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순간 사단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을 배신하여 팔 제자가 섞여 있었지만, 주님은 그를 포함하여 중심으로부터 올라오는 사랑을 표현해 주시는 세족식을 거행하십니다.
(3-5)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실습은 교육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방법입니다. 직접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제자훈련을 거의 이러한 방법으로 진행하셨는데, 곧 모델링 교육입니다. 당시 발을 씻어주는 사람은 이방인 노예이거나, 아내 또는 자녀 중에서 남자의 발을 씻을 경우가 있었지만 남자가 씻어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 행동은 파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 순간 아마 주님은 당신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 주었던 마리아를 떠올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섬김의 표현을 했던 마리아처럼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친히 섬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일렬 아니면 식탁을 중심으로 ㄷ 자 모양으로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순서대로 제자 한 명 한 명의 발을 친히 씻어 주셨습니다. 발을 내밀기에 너무도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었겠지만, 주님의 그 행동에 제자들은 거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 한 사람씩 발을 만지시며 물로 씻어주시고, 이어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직접 닦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중간이었는지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속으로 가장 당황해했던 것 같습니다.
(6-9)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상관이 있다'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함께 받을 유산, 함께 할 몫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아들과 함께 영원한 유업을 상속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발 씻기를 거절했던 베드로는 이제 자신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옆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한 번 당황하고, 베드로 때문에 한 번 더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주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족식 자체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며 서로 섬기는 삶을 살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질문에 답하실 때는 세족과 목욕을 연결하여서 세족에 회개의 의미를 포함시키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영적으로 죄를 씻어주시는 행위이자, 또한 섬김의 모습임을 동시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의 발을 모두 씻으시고 다시 앉으셔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섬김에 대해 가르치심(12-20)
(13-14)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며, 그 사람에게 있어서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지라도 기꺼이 도와주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필두로 자기가 서로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또한 예수님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습니다.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따르기 원하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로 인해 옆에 있는 다른 제자 동료, 동역자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나 혼자 열심히 주님을 믿고 따르며 최고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며, 동료와 동역자들을 챙기고, 그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 먼저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달은 때는 성령을 받은 이후일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이 가르침이 생각나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먼저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대접을 받고 아랫사람을 하대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특권을 누리지만, 너희들은 앞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지도자가 될 터인데, 그리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너희는 겸손하거라. 그리고 섬기는 자가 되거라. 가질 수 있는 권리, 특권을 내려 놓거라.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거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보거라.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찾아서 먼저 하거라. 대접받기 원하지 말거라. 인정받기 위해 섬기지 말거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 되어 먼저 제자들을 섬겨주신 예수님처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지금 섬겨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가정에서 어떤 섬김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있는 학교나 직장에서 내가 섬겨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 구역 안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섬김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포함하여 따뜻한 격려의 말 한마디, 힘이 되는 작은 선물 하나, 그리고 그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중보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것 모두가 포함될 것입니다. 그러한 섬김이 있는 공동체가 진정한 주님의 제자공동체일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알고 행하는 것, 곧 섬김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5-17)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복이 되는 겸손은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 많은 선교사님들이 이 땅을 찾아 섬김의 삶을 사셨습니다.
서서평, 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님의 일대기는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줍니다. 1912년 32세 나이에 독일계 미국인 간호사로 한국에 온 서서평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한복을 입고 된장찌개를 먹으며 한국인으로,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전라도 궁핍한 지역의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 등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입양하여 키운 고아가 열 네 명, 오갈 곳 없는 과부를 가족처럼 품어 집에서 같이 지낸 사람이 서른여덟 명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을 위해 많은 헌신과 섬김을 베풀다 54세 나이에 영양실조로 삶을 마감한 그녀는 자신의 몸마저 의학연구용 시신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녀가 떠난 남루한 방에 남은 것은 낡은 옷가지 몇 개와 반쪽이 된 담요, 동전 일곱 전, 강냉이 두 홉, 그리고 그의 좌우명이 적힌 메모지 한 장이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그녀는 우리를 섬겨 주신 주님을 본받아 그 길을 걸었으며 그 삶은 참으로 복된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성공을 위한 길인지 섬김의 길인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세족식 교훈 말미에 주님은 다시금 가룟 유다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시편 41편 9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여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십니다. 구약시대부터 식탁 교제는 아주 친밀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식탁 교제를 한 이후에 배신을 한 행위는 특별히 더 악한 행위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찔림이 있었겠지만, 그는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의 길로 향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주신 말씀이 성취되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주님을 믿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9-20)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곧 하나님을 영접한 것이고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허락됩니다. 그리고 그분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주님이 보여주셨던 섬김을 본받고 닮아가며,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섬김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형제의 이야기는 마치 예수님을 떠올리게 하는 겸손한 섬김의 삶이었던 것을 봅니다. 안수현 형제에 대해 소개하는 글이 있습니다.
“고려대 의대를 나온 안수현 형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환자들에게는 친절한 의사였습니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로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을 했을 때, 그는 병원에 홀로 남아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환자들을 두고 병원을 떠날 수 없어서였습니다. 며칠 밤을 새우고, 하루 한 끼 먹을 시간도 없이 격무에 시달렸지만, 자신의 소명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를 따라 병원을 지켰습니다. 돌보던 환자들의 병실을 밤마다 몰래 찾아가 조용히 낫기를 기도해 주던 그였습니다. 환자가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 찾아가 유족을 위로하던 참 이상한 의사였지요.
그는 선물을 주는 의사였습니다. 암투병을 하는 환자에게는 찬송가테이프를,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에게는 책을 선물했습니다. 환자들만 아니라 병원에 근무하는 동료 의사, 간호사, 물리치료사, 방사선기사, 환자들의 침대를 옮기는 분들, 구두 닦는 아저씨와 매점 아주머니에게까지 그 청년은 겸손하고 따뜻한 선물을 나누었습니다. 돈이 없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납해 주고, 백혈병이 걸린 소녀에게는 집까지 찾아가 생일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청년을 자기 차에 태워 콘서트장까지 동행해 주는 깜짝 선물을 하기도 했고, 집에만 누워 있는 어린 환자를 찾아가 책을 읽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를 당연히 살려 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2006년 1월 5일, 그 청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3세, 아주 짧은 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귀한 흔적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의 삶, 사랑을 실천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길은 분명 쉬운 길은 아닐 것이며 하루아침에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어느새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누군가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내려놓고 중심으로 주님을 따를 때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리고 앞으로 남은 우리 인생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섬김을 받은 자로, 이제 우리도 누군가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간교한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은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너희가 어디에 있느냐?“며 그들을 찾으시자,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시고 그들을 찾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으신 이유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왜 숨었는지, 즉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위해서 였습니다.
가인은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한 범죄를 모르셨을까요? 아닙니다. 시치미를 떼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과의 대화를 통해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여리고성을 정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쳐야할 재물을 훔쳐서 숨겼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여리고성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아이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한 사람의 죄로 인해 이같은 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제비를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지파의 우두머리가 모여 제비를 뽑자, 아간이 속한 유다 지파가 뽑혔습니다. 그 지파의 족속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세라 족속이 뽑혔습니다. 세라 족속 중 집안의 가장을 모아 제비를 뽑자, 아간의 아버지 삽디가 뽑혔습니다. 삽디의 가족 중 남자들을 모아 제비를 뽑자 아간이 뽑혔습니다. 아간이 범죄했음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아간을 지목하지 않으시고 복잡하게 네 번에 걸쳐 제비를 뽑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아간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네 번이나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회개할 기회를 스스로 버렸습니다.
13장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후 성경은 주님을 배신할 인물로 가룟 유다를 지목했습니다(2). 죽음을 앞둔 주님은 제자들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발은 물론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는 베드로에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첫 번째 언질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다 씻겨주신 후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의미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압살롬 반란 때 동참했던 충복들의 반역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한 다윗의 시편 41:9절 말씀을 인용하셔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라”(18b)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두 번째 언질이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가룟 유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괴로운 마음을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시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21)고 폭탄 발언을 하셨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를 향해 “지금이라도 돌이키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세 번째 말씀이셨습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서로를 돌아보면서 예수께서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서 웅성거렸지만, 당사자인 가룟 유다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요한에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이신지 물어보라”(24)고 고개 짓 했습니다. 요한이 묻자, 주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면서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26). 세 번째까지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네 번째에는 가룟 유다에게 직접 떡을 떼어주셨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떡을 적셔 떼어주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셨을까요?
유다야! 제발 너의 잘못된 생각을 지금이라도 돌이키렴!
주님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가룟 유다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네 번에 걸쳐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본문은 증거합니까?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a)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떡을 주셨기 때문에 유다에게 사탄이 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이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천사의 모습을 한 자신과 사탄의 모습을 한 자신이 서로 싸우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영화나 만화의 장면을 보셨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선택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선을 택하면 주님의 도구가 되지만, 악을 택하면 악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즉 가룟 유다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절함으로 결국 사탄이 그를 지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돈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았다고 합니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대가로 받은 은30은 약 120 데나리온으로 당시 노동자의 넉 달 품삯이니 적지 않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유다가 돈궤를 맡았다”고 증거하는 것(29)으로 미루어 보면, 재정을 담당했던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의 액수는 손쉽게 착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자들 중에 현실 감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이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게 될 수난에 대해 몇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예루살렘 입성을 마치 앞으로 자신들이 꿈꾸고 있는 메시아의 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상에서 서로 영의정, 좌의정을 하겠다고 다투는 추태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 일행을 반기는 무리들의 환호에 그들의 가슴에는 핑크빛 미래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미래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꿈꾸었던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과거 찬란했던 이스라엘의 역사가 도래하지 않을 것임을 그는 인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핵심 지도 세력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작정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수난의 길이 펼쳐질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앞에서 갈등했을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있었던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어쩌면 그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 모릅니다.
현실 감각이 뛰어났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전혀 들어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던 이중 인격자였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돌이키지 않는 유다를 향해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b)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28-29)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제자들 중 아무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은 물론 자신들도 배신할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신의 속내를 철저하게 숨기고 살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겉으로는 동료들조차도 인정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속으로는 계산적이며 스승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그였습니다. 그는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을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일 교회의 여러 가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만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에 열심히 붙어있지 않는 사람”
주중에 그리스인답지 않게 사는 크리스천을 뜻하는, 즉 겉과 속이 다른 크리스천을 칭하는 용어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 역시 본문의 가룟 유다가 다를 바가 없지 않나요?
본문을 그림으로 해석한 대표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1495년 다빈치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당시 수도원의 요청을 받고 대식당 벽에 최후의 만찬 벽화를 템페라(Tempera) 형식으로 2년 9개월 동안 작업을 해서 완성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배신’입니다. 그런데 다빈치가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도, 동시대에도 그리고 이후에도 같은 주제로 많은 화가들이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유명한 것은 그의 예술성 때문입니다.
그가 최후의 만찬 벽화를 그리면서 사용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구도와 기술적인 기법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폭탄발언에 대해 반응하는 제자들의 각기 다른 표정이 압권입니다. 제자들의 심적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다빈치가 사전에 그린 습작의 양도 상당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예술성은 단순히 구도, 원근법, 색채 등과 같은 기술적인 기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입니다.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을 화폭에 어떻게 묘사했는가를 통해 작가의 예술성이 드러납니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작품들 대부분은 배신자 유다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배치했습니다. 예를 들면 유다를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식탁의 반대편에 따로 배치시키거나, 예수님과 제자들 머리 주변에는 이콘(icon)을 그렸지만 유다의 머리 주변에는 이콘이 없는 것으로 차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제를 다룬 작품들 중에는 배신자 유다를 주 화면에서 아예 제외시키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유다를 따로 배치하지 않고, 제자들 사이에 섞여있게 그렸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 어쩌면 성경을 안다고 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누가 가룟 유다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림 속에서 유다는 제자들 사이에서 등을 구부린 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의 논쟁을 태연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좌측에서 다섯 번째 인물의 오른손은 주머니를 쥐고 있는데 바로 그가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의 오른 팔 앞에는 넘어진 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 통은 소금이 들어있는 소금 통입니다.
유다 좌측에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보려고 예수님 쪽을 향해 일어서면서 유다를 밀었고, 밀린 유다는 앞에 있던 소금 통을 팔로 쳐서 소금 통이 엎어졌습니다. 다빈치는 유다의 손에 쥐고 있는 주머니와 유다의 팔에 걸려 식탁에 쏟아진 소금을 유다의 배신을 알리는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주머니는 예수님을 팔고 받은 은30을 넣은 동전주머니이니 배신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식탁에 쏟아진 소금은 배신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는 소금 언약으로 묘사됩니다.
역대하 13장은 남 유다 2대왕인 아비야 때,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과 전투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 유다의 군사는 40만 명으로 북이스라엘 병력 80만 명에 비해 열세였고, 전술상으로도 적군에게 후방이 포위되는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열세에 몰렸지만, 남 유다 아비야 왕은 북이스라엘 진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에 소금 언약은 부패하거나 침식되지 않은 언약, 즉 영원불변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다빈치는 가룟 유다의 팔 앞에 쓰러진 소금통과 쏟아진 소금을 그려서 그가 예수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다빈치는 유다가 겉으로는 태연하게 제자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예수님을 배신해서 팔아넘길 것이라는 사실을 손에 움켜쥔 돈 주머니와 쓰러져있는 소금 통을 통해 묘사했습니다.
앞서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향해 네 번에 걸쳐 마음을 돌이킬 것을 말씀하고 계신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부하고 끝까지 태연하게 무리 속에 섞여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가룟 유다가 가증스럽기 보다는 안쓰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예수님을 배신한 대가로 은30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에 들게 되지만,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소금 언약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영원히 저버렸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현실을 택한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과 차이점이 있나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두려움에 휩싸여 도망쳤습니다. 심지어 자신만은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다 못해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들 모두 똑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결코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제자들이야 말로 주님을 두 번 배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와 다른 제자들은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주님과의 영원한 소금 언약을 저버렸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계신 주님과 눈이 마주쳤고 심히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주님의 눈을 통해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는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은 우리를 하루아침에 사탄의 도구가 되버린 가룟 유다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내가 지닌 이상과 지식과 경륜도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점은 오직 주님의 말씀입니다. 신앙인으로 내려놓아야 될 것을 내려놓지 않거나,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가 가룟 유다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도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가룟 유다를 지배한 사탄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이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어긴 아담과 하와 부부를 그리고 동생을 살해한 가인조차도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들과 영원히 변치 않는 소금언약을 하셨습니다. 자신을 팔아넘길 것을 계획하고 있는 가룟 유다도 조차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그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세 번이나 자신을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영광을 받으셨도다(31-32)
본문은 ‘그가 나간 후에’라는 시간적 묘사로 시작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작정하고 식사 자리를 떠납니다. 그는 곧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하수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올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담화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에 이어 일어날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영광스러운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31-32)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주님은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헬라어는 부정 과거형으로 기록하여 이미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음을 드러내었습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으로 곧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임에도 앞으로 일어날 배신과 고난이 오히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과정이며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제자들로 확신케 하셨습니다. ‘인자’라는 표현은 다니엘을 통해 약속하신 구원자(단7:13)를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고난 받는 종(막8:31)으로 오신 주님의 사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도 없기에 구원을 이루기 위한 고난은 영광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주님께서 어떻게 사역하셨는지 ‘비하(卑下·Humiliation)’와 ‘승귀(昇貴·Exaltation)’의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영광이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무언가 잘 되거나 높아지는 모양과 연결 짓지만, 주님의 모든 사역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떤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백성으로 살아가는 영광스러운 삶은 크고 작은 어려움으로 인해 그 영광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 것이 연결 되어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표현하신 것처럼 주님의 모든 사역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심을(요10:30)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33-35)
주님은 이미 영광 가운데 구원 사역에 온전히 헌신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영광의 성격과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작은 자들아.’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갈 길을 제시하십니다.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작은 자들아로 번역 된 헬라어는 ‘아이’를 뜻하는 단어의 지소사 형태로 부르는 사람의 애정이 담긴 표현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나의 자녀들아’(NIV)로 번역하기도 하고 루터는 ‘사랑하는 자녀들아.’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지만 이제 곧 그들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유대인들은 물론(요7:34; 8:21) 제자들도 함께할 수 없음은 주님의 떠남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대속적 죽음으로써의 십자가의 길을 의미했으며 거룩하신 성부 하나님 곁으로 가시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새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 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새로운 삶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담고 있습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헬라어에서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는데 먼저는 ‘시간적으로 가장 최신의 것’이라는 의미의 ‘네오스’가 있습니다. 반면 본문에서 ‘새’라고 번역 된 헬라어 ‘카이노스’는 ‘전혀 사용 되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 계명이라는 표현을 통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은 제자들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놀라운 가르침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의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으며(레19:18) 주님께서 모든 계명을 요약하시며 그 핵심 사항으로 주신 교훈(막12:31)이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핍박 받는 환경 속에서 요한 공동체가 폐쇄적 성격의 새로운 종파(sect)를 이루어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인을 배척하기 위한 내부 규율로써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이 갖은 새로운 성격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로운 것인 이유는 사랑의 정의와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배워야할 감정이며 삼위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그 의미를 정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인해 본래의 영광과 지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4:8) 그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우리와 다시, 영원히 사랑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해서 사랑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사랑이 신이 되기 시작하는 순간, 악마가 되기 시작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유추하고 정의하기 보다는 창조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의 개념을 정립하고 사랑의 감정을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는 왜곡 된 사랑을 하고 있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받고 참 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려는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실 된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으며 성령님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적용 되어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힘 입어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사랑으로 새롭게 되었고 그 사랑으로 사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교훈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제시 된 제자도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힘써 지켜야할 계명입니다. 주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폐기하는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을 온전케하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십계명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위한 삶의 규범으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율법 교사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것처럼(막12:33) 하나님의 백성들은 계명의 목표와 계명을 지키는 동력이 ‘사랑’인 줄은 알았으나 실제 삶 속에서는 위선의 유혹과 자기 중심적인 종교적 열정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더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자기 열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열정으로 쏟은 사랑은 기대했던 반응이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과 불쾌감으로 변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위선의 유혹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새로운 사랑의 방식을 제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직후에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 것처럼 주님의 사람들에게 요구 되는 사랑은 자신을 내어 주되 끝까지, 전부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실 수 있었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자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을 온전케하며 사랑은 계명에 합당한 삶으로 우리를 힘있게 격려합니다. 자기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동력이 예수 그리스도일 때만 온전히, 끝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을 힘으로 삼는 사람들의 사랑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사람들은 새 계명을 지키는 삶을 통해 세상 속에 섞여 살지만 구별되어 살아갑니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표지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좋아하지만, 교회는 좋아하지않는다.’는 인식이 확산 되는 이유가 교회 안에 ‘서로 사랑하는’ 삶의 부재에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복음이 확산 되었던 시대와 배경을 추적해 보면 거기에는 항상 상식을 뛰어 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살아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소리 없는 외침으로 복음의 깊이와 넓이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사랑은 최종적인 변증학’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살아내는 첫 번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을 모범으로 삼아 사랑을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모두 ‘죄인’이었기에 사랑의 시발점이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오롯이 내어주는 새로운 사랑 방식에는 시행착오가 따릅니다.
후에는 따라오리라(36-38)
(36-38)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 베드로의 질문은 주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한 의문과 함께 주님의 떠나심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대답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며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보입니다. 베드로의 열정에 찬 물을 끼얹듯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시발점이 자기 자신인 사람은 자신의 생명이 위협 받는 순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배신합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호소하는 감정과 결단의 고백은 진심이었지만 사랑의 시발점이 자기 자신이었기에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실패하였습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시점이 밤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이 시발점이 된 사랑의 효력이 얼마나 짧고 연약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셨던 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배신과 실패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주님의 길을 걷게 될 것임을 확신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오늘도 새로운 사랑 방식에 시행착오를 겪는 우리는 용기를 얻습니다. 사랑의 시발점은 우리의 감정과 결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어지는 위로부터의 사랑입니다. 위로부터의 사랑으로 우리는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성령님을 통해 그 사랑이 끊임 없이 우리에게 적용 되고 부은바 되어 우리로 포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할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주님께서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할 것을 결단하는 것만으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려는 힘을 빼고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알게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날마다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은 사랑도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