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의 탄생 (외 2편)
―가장자리
하린
헌책들이 쌓여 있는 가게
이것을 세상의 모든 가장자리라고 해 두자
무너질 것처럼 쌓여 있으니
가장자리가 가장자리에게 보내는 위안이라고 해 두자
결과는 기록이 되고 기록은 전진한다
가장 가장자리다운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왜 그렇게 문장들은 치열했던 것일까, 후회한다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가장자리의 특권이지만
소멸보다는 자멸에 가깝다
기록은 불현듯 속도를 잊는다
겨울에 문을 닫고
여름에도 문을 닫는 중고 서점
주인은 지금 새 주인을 찾는 중이다
책을 살 사람이 아니라
책과 함께 늙어 갈 사람이다
책방 임대 중이
책방 정리 중으로 바뀌고
다시 책 가져갈 사람 찾아요로 바뀌는 동안
가장자리는 니힐리스트가 된다
일 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쯧쯧 혀를 차며 지나갔지만
그 시절 마스크는 흔한 연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악플
입을 열두 개나 가진 악담은
오늘 아침에도 따분했다
자음과 모음을 우적우적 씹어 먹고
서로의 생각을 파먹으며 과장되게 몸짓만을 부풀렸다
은밀한 건 좋지만 내밀한 건 싫다고 토로했다
매번 불구의 날들을 확인하고도 명랑하다니
누군가 자신을 추궁하는 건 용서했지만
모른 척하는 건 못 견뎌 했다
악담이 번식시킨 레퀴엠의 시간
가시를 잔뜩 품은 다짐이 목구멍을 관통할 때,
타인과 타인 사이
도피와 회피의 차이가 분명해졌다
어둠의 결심보다 빛의 변심이 흔해졌고
말들은 스스로 질식하는 꿈을 꾸곤 했다
어느 순간 음지에서 피는 꽃이 진실을 토했다
그런데도 악담은 고압선 위 까마귀처럼 무탈했다
독주를 마신 이야기 속 주인공이
별들과 서러움을 교환하며 비굴을 감행했다
악담은 껄껄껄 웃었다
이제 막 떨어지고 있는 눈물의 온도를 재빨리 회수했다
셀럽
떨어지기 좋은 알맞은 높이를 증명하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어요
큐, 사인이 오면 난 대본 속 사내보다
더 실감 나는 캐릭터
전성기를 향해 가는 건 어려웠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어요
인정해야 했어요
해골을 닮은 뻔한 질문이 쏟아졌어요
무서워해야 하는데 무덤덤했어요
마지막인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어요
이것도 욕망이었을까요
화려하게
황홀하게
낭만적으로
목을 꺾는 꽃처럼
줄을 매달 장소가 필요했어요
욕실이 편할까
무럭무럭이 한창인 숲이 좋을까
고민을 하다 한나절을 더 보냈어요
TV를 켰어요
유튜브를 봤어요
검색을 했어요
난 과거형이 되어 있었어요
신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나의 유일한 신이었던 알약
다 털어 넣고 눈을 감았어요
감은 눈 속으로 별들이 쏟아졌어요
죽기 직전
검색 순위 1위가 된 내가 보였어요
*셀럽; celebrity, 인지도가 높은 유명 인사
―시집 『기분의 탄생』 2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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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 시인, 문학평론가. 1998년 〈광주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 『기분의 탄생』을 발간.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 시 창작 안내서 『시클』, 시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시조 창작 제안서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시조를 쓸 수 있다』, 평론집 『담화 구조적 측면에서의 친일시 연구』 등.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