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이라고 오늘 저녁 손녀 최지유 손자 지안이 엄마 아빠가 약국으로 꽃바구니를 보냈습니다. 약국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사위가 카네이숀 꽃바구니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내 어머니는 그냥 그런 줄 알았습니다
어버이 날을 맞이하여 자녀들로 부터 예쁜 카네이숀 꽃바구니를 이렇게 받았습니다.
수 없이 많은 어버이 날들이 흘러 갔지만 오늘 따라 제 옆에 계시지 않는 어머니가 생각나는 것은 나이 탓만은 아닌가 봅니다.
삼십대 후반에 제약회사를 퇴직하고 외국으로 이민도 생각했습니다. 70년대에는 미국 이민이 유행처럼 몰아쳐서 많은 대학 동기들이 떠났습니다.어려운 한국을 벗어나 막연한 외국 생활의 꿈을 가지고 당시의 답답한 조국을 잊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말씀 한 마디에 재차 계획하던 이민의 발길을 접었습니다. " 너 정말 떠나 갈거냐 " 하소연 하시듯 하는 내 어머니의 얼굴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 한 쪽이 빠져 나가는 듯한 저린 느낌은 감당키 힘들었습니다.
갑자기 약국을 개업하기로 마음을 잡았으나 수중에는 무일푼이다 싶이 막연할 뿐이었습니다.
누님의 도움으로 약국을 경영하느라 아내와 둘이서 새벽부터 밤 열 두시까지 약국에 매달렸습니다.
다섯평 남짓한 약국 다락에서 잠을 자면서 하루의 모든 생활이 약국에서 이루워졋습니다.
그 때 나이가 두살 네살 어린 아들 딸은 어머니가 도맡아서 기르시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토요일 밤 늦은 시각에 집으로 들어 가면 잠든 애기들을 잠시 쳐다 볼 뿐입니다. 일요일은 피곤한 몸으로 애기들과 놀아 주는 시간은 거의 불가능 했었습니다. 오랜만에 같이 놀아 달라고 아빠에게 떼쓰는 애기들을 아빠는 피곤하다며 부둥켜 안고 달래주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강동구에서 살던 집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청계천 약국에서 가까운 퇴계로에 전셋집을 얻고 나왔으나 어머니의 생활은 두 손주 녀석들에게 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빠인 손자 놈은 업으시고 동생 손녀는 손 잡고 걸도록 하며 나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한 마디씩 했답니다.
며느리는 어데 가고 큰 애기를 업어주고 동생 두 살 짜리는 걷게 하시냐고 했답니다.
이처럼 손주들 사랑 특히 손자 사랑은 끔찍이도 온 정성과 힘을 쏟았던 것입니다.
밤 늦게 까지 약국하느라고 자식들 먹여 살리겠다고 고생하는 아들 며느리가 애처로워 한 마디 어머니의 불평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칠십이 넘으신 어머니이지만 그냥 그렇게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모처럼의 기회에 어머니와 장모님 외숙모님이 내가 광주 출장소 소장으로 근무 할 때 제주도 여행을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태워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사코 마다하시기에 그냥 그런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아픈데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먹고 싶은것, 보고 싶은것, 갖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애기들보시느라 힘든 것 , 짜증 나는 것, 며느리에게 아들 한데 하시고 싶은 말씀 . 부탁 하고픈 것등 용돈도 전혀 필요치 않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아무 것도 필요 없는 내 어머니는 그냥 그렇게 사시는 분인줄로만 알았습니다.
항상 아무 병도 없으시고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내 자식이자 어머니의 손주들을 길러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어머니는 힘도 안드시며 그것이 큰 기쁨이며 더 없는 삶의 낙인줄 알았습니다.
그 날도 손주들을 데리고 옥수동에 있는 누님댁을 버스를 타시고 가셨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은 그 곳에 있는 한증막을 며칠간 찜질을 하시곤 했습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시니까 누님이 고기 미역국등을 푸짐하게 대접하였답니다. 저녁을 다 드시고 TV 시청도 하시곤 편히 주무시겠다고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아침에 기척이 없으셔서 방에 들어 가서 보니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아무 말씀도 없이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이토록 떠나시는 순간에도 병원 한번 찾지 않게 하시고 그 순간에도 자식들에게 구차함을 보이시기 싫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00년도 초에 평안도에서 태여나서 얼굴도 못 보고 네살 아래인 풋내기 소년과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을 오셨습니다. 자식을 칠 남매를 낳으셨으나 도중에 두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통한의 아픔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올망 졸망 매달린 자식들을 혼자 감당하기도 힘들었지만, 더구나 참기 어려웠던 것은 매서운 시집 살이에 끼니마다 굶으시는 적이 많으셨다고 했습니다. 쌀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쌀을 넣어 두는 쌀광에는 가을에 추수한 입쌀이 가득 쌓여 있었답니다. 그러나 시어머니이며 나에겐 친 할머니가 항상 쌀을 모자라게 꺼내어 갖다 주는 바람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답니다. 낮에는 밭일을 하노라 허리 필 날이 없었으며 밤이면 길쌈을 하느라 애기에게 젖을 물리는 시간이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가슴이 조여드는 정신적인 고통과 연일 계속되는 농사일과 집안 일로 어떻게 하루 해가 뜨고 지는 것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어머니 얼굴 제대로 한번 쳐다보지 못 하고 불만이나 불평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4 후퇴로 피난을 나온 후에는 북에 두고 오신 시어머니의 생사를 알지 못하지만 명절 때마다 정성스레 차레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이토록 자신을 버리시고 오로지 자식들을 위하여 온갖 역경을 마다 않고 희생만이 삶의 전부였던 어머니입니다. 평소에도 어머니는 저희 자식들에게 야단을 치시거나 큰 소리 한번 없으셨으며 안된다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칠십사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신 어머니로서는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시고 싶으셨는지 모릅니다. 내 나이도 어머니 연세와 비슷한 요즘에야 조금은 아주 조금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손주들을 돌보느라 힘이 들었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멍해집니다. 그리고 살아 생전에 용돈 한번 드리지 못했고 비행기는 고사하고 여행도 제대로 못 보내 드린 것이 맏 아들로서 자식인 나에겐 평생 씻을 수 없는 멍애로 남아 있습니다. 남의 집에 전세살이가 아닌 나의 집을 장만하여 떳떳이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것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돌아 보며는 우리 자식들에게는 어머니는 못 하시는게 없는 분으로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마냥 옆을 지켜 주시리라고만 생각 했습니다. 지금 오늘 이 순간 어버이날을 맞아서 자식들에게 카네이숀 꽃바구니를 받으니, 나는 지금 자녀들 손주들에게 어떠한 부모로서 할아버지로 보일런지 답답할 뿐이니다 , 그 때 어머니날에는 내가 자식으로서 어머니에게 무엇을 해드렸는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내 자식만 생각했으며 어머니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는 그냥 어머니라고만 믿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 죄송합니다" "어머니 정말 보고 싶습니다" 이 말 뿐으로 대신 할것이 없습니다
어버이날에 불효자 맏아들
![엉엉](http://i1.daumcdn.net/mimg/mypeople/sticker/edit/23.png)
* 이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저며 왔지만 이 날 밤은 수 없이 자다 깨기를 반복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샜습니다. 어머니의 사진 모습이 계속 망막에 남아 뇌리에서 떠나지 않음에 처절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벼개닢은 밤새 흥건히 젖어 버리고 소리 없는 가슴앓이로 몸은 허공에 떠 버립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18A736554C98112E)
돌을 막 지난 손자 내 아들 녀석을 달래시면서도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1974년도 여름이었으니 어머니는 68세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도 2월 25일 74세에 별세하셨습니다
돌아 가시기 며칠 전에도 메주를 써서 장 담거야 할 때라고 며느리에게 일러 주셨답니다
이 사진을 오늘 옛 앨범을 한참 뒤져서 찾아 낸 사진으로 내가 제일 보고 싶은 추억의 사진입니다
그런데 울던 갓난 애기는 결혼하여 이란성 쌍둥이를 낳아 내 품에 안겨 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네 삶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어 어 어 하다가 벌써 황혼역에 도착하게 되나 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433E3E554D586E1D)
어머니! 아버지! 내 자식들 당신의 손주들이 보내준 꽃바구니를 두 분의 영전에 삼가 바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늘걷회 EVERWALK늘걷는 전공노(電空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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