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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 포지션 투수 (좌투좌타)
■ 체격 186cm / 90kg
■ 생년월일 1976년 3월 1일 (실제 생일은 음력 1975년 11월 26일)
■ 출신학교 수영초등학교 - 부산중학교 - 부산고등학교
■ 수상경력
<아마> - 1992년 제26회 대통령배 최우수투수상 - 1992년 제44회 화랑대기 최우수투수상 - 1993년 제23회 봉황대기 최우수투수상
<프로> - 1995년 플레이오프 MVP, 월간3상 9월수훈상(일간) - 1996년 최다승(18승), 최다탈삼진(221),구단선정 MVP 수상 - 1999년 9/7~9/17 방콕 아시아 선수권 및 올림픽 예선 드림팀2 국가대표(우승)
■ 특이사항
- 1994년 4/19 최연소 완투승(18세 1개월 18일, 對한화戰) - 1994년 6/8 최연소 완봉승(18세 11개월 14일, 對삼성戰) - 1996년 홈경기 연승(15) 신기록 수립(95/8/11 사직 태평양전~96/8/8 사직OB戰) - 1996년 전구단 상대 승리투수 - 1996년 3년 연속10승대, 100탈삼진 기록 - 1999년 5/10(사직) 통산17번째 800탈삼진 기록 - 1999년 8/8(사직) 통산 15번째 900 탈삼진 기록 - 1999년 다승 11위, 방어율 7위, 탈삼진 3위 - 2000년 6/15(사직) 두산戰 통산12번째 1000K 달성(최연소) - 2000년 4/26 마산 해태전 선발타자 전원 탈삼진(통산 13번째) - 2000년 방어율 8위
- 1994,95,96,98년 올스타전 참가 - 1995, 1999년 한·일 슈퍼게임 참가
■ 계약금,연봉 9200만원 / 8000만원
■ 투구폼 전성기 시절의 투구폼이나 사진을 떠올려 보면 오버핸드에 가까운 쓰리쿼터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올 시즌의 투구폼은 100% 회복된 컨디션이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비해 팔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평균 구속, 구종 및 제구
주형광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컨트롤러이다. 그의 직구 최고 구속은 145km(물론 부상 이전의 이야기이다), 평균이 138km 정도였지만, 부상 후에는 140km를 찍는 것도 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묵직한 볼끝과 스트라이크존 안팎을 넘나드는 완벽한 제구력 때문인지 타자들이 치기에 그리 쉽지만은 않다. 올 시즌 100% 회복된 컨디션이 아니었고 볼 스피드 역시 예전 같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상 재발 때문에 2군에 강등되기 직전까지- 꽤 괜찮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 역시도, 그가 강속구 투수가 아니라 변화구와 제구력을 바탕으로 한 투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성기 때 그의 주무기는 직구와 커브, 슬라이더였는데, 그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 받는 구질은 뭐니뭐니 해도 슬라이더였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기로 유명하던 그의 슬라이더는 국내에서도 수준급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직구와 큰 차이가 없는 스피드(120km대 후반)와 큰 각도 때문에 투 스트라익 이후에 스트라익을 잡는데 쓰였고, 1996년 그가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된 구질이다.
올 시즌에는 예년에는 간간히 던지던 커브 역시 마음먹은 코스로 꽂아넣을 수 있을 정도로 연마했고, 타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간혹 서클 체인지업이나 반포크볼을 구사하기도 했다. 부상 이후 직구 구속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실전에서 던지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커버할 수는 있었다고 본다.
빠른 구위보다는 컨트롤 위주의 투구를 하다 보니, 제구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날에는 안타를 많이 맞는 편이고 홈런 허용률도 꽤 높은 편이다. 볼넷이 적고 삼진이 많은 것 역시 그의 투구 스타일이 갖는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 수비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부분인데, 어떻게 보면 수비 때문에 특별히 걱정할 일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견제 능력이나 수비에 있어 별다른 문제점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수비 감각도 꽤 있고 타구에 대한 반응도 빠른 편이라, 투수 앞 강습 타구 처리나 병살 유도에 있어서도 노련한 모습을 보인다.
■ 연도별 성적
연도 |
소속 |
방어율 |
경기 |
완투 |
완봉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삼진 |
실점 |
자책 |
94 |
롯데 |
3.04 |
28 |
4 |
1 |
11 |
5 |
1 |
0 |
186 2/3 |
147 |
15 |
60 |
6 |
142 |
75 |
63 |
95 |
롯데 |
3.05 |
30 |
5 |
0 |
10 |
7 |
0 |
0 |
200 1/3 |
170 |
18 |
49 |
7 |
152 |
73 |
68 |
96 |
롯데 |
3.36 |
30 |
10 |
1 |
18 |
7 |
1 |
0 |
216 2/3 |
196 |
20 |
38 |
9 |
221 |
86 |
81 |
97 |
롯데 |
5.88 |
32 |
3 |
0 |
6 |
13 |
3 |
0 |
131 2/3 |
138 |
25 |
61 |
2 |
84 |
91 |
86 |
98 |
롯데 |
3.63 |
31 |
6 |
1 |
11 |
7 |
1 |
0 |
183 1/3 |
179 |
17 |
43 |
7 |
148 |
90 |
74 |
99 |
롯데 |
3.98 |
31 |
4 |
0 |
13 |
12 |
1 |
0 |
190 |
190 |
25 |
45 |
2 |
177 |
88 |
84 |
00 |
롯데 |
3.49 |
26 |
1 |
0 |
8 |
6 |
0 |
0 |
149 2/3 |
136 |
18 |
49 |
3 |
127 |
60 |
58 |
01 |
롯데 |
15.00 |
2 |
0 |
0 |
0 |
1 |
0 |
0 |
3 |
6 |
3 |
4 |
0 |
2 |
6 |
5 |
02 |
롯데 |
16.20 |
7 |
0 |
0 |
0 |
1 |
0 |
1 |
1 2/3 |
3 |
0 |
0 |
0 |
1 |
3 |
3 |
03 |
롯데 |
4.58 |
62 |
0 |
0 |
0 |
9 |
1 |
13 |
74 2/3 |
85 |
13 |
21 |
8 |
49 |
42 |
38 |
04 |
롯데 |
3.41 |
11 |
0 |
0 |
4 |
4 |
0 |
0 |
63 1/3 |
53 |
8 |
21 |
2 |
45 |
26 |
24 |
Total |
3.75 |
290 |
33 |
3 |
81 |
72 |
8 |
14 |
1401 |
1303 |
162 |
391 |
46 |
1148 |
640 |
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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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PORT
롯데 자이언츠 어린이 회원이었고, 남들처럼 프로야구 선수들을 동경했던 아이. 어렸을 때부터 무슨 운동에든 소질을 보였고 좋아했던 아이는 우연한 기회에 야구부 감독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날로 야구부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외야수로 시작했지만, 수영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좌완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끔씩 마운드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진정한 팀의 에이스로 거듭나기 시작한 것은 부산고 2학년 때이던 1992년부터였다. 92년 4월 대통령배 전국 고교야구 대회, 부산고와 경북고의 1차전. 당시 부산고의 선발 투수는 에이스였던 손민한이었다. 하지만 손민한이 1회 첫 타자의 타구에 맞아 실려 나가게 되면서 부산고는 초반부터 위기를 맞는 듯 보였고, 그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바로 그 아이, 주형광이었다.
누가 감히 생각했겠는가. 그 때의 불운한 상황이 또 한 명의 에이스를 탄생시킬 줄.. 하지만 주형광은 그 경기에서 9이닝 동안 5안타, 3실점에 8개의 탈삼진을 뽑아내며 호투하였다. 뿐만 아니라 16강전부터 결승전까지 4게임 45이닝을 연속으로 완투하고 5게임에서 승리투수가 되면서 부산고의 대통령배 우승, 그 주역이 되었다. '손민한' 이라는 에이스의 공백을 훌륭히 메꾸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에이스의 면모를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 것 역시도 바로 그 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1년 후인 1993년, 제 23회 봉황대기. 이 대회에서 주형광은 6게임에 연속 등판해 5승을 거두며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하였고, 7년만에 부산고의 품에 초록 봉황을 안겨 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안고 동국대행을 결정하고 가등록까지 마치게 된다. 하지만 좌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롯데의 입장에서는 몇 년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대형 좌완투수를 놓칠 수가 없었고, 부산고 출신인 선배(염종석, 박동희 등)에 감독까지 동원해가며 그에게 끈질긴 러브콜을 보냈다. 결국 그는 1994년, 당시로서는 고졸 신인 최대의 계약금이었던 9200만원에 롯데 유니폼을 입게 된다.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는 OB를 상대로 3이닝 동안 5실점의 호된 신고식을 치렀지만, 이후 그는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마운드에 올라 프로야구의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하였다. 1994년 4월 19일 한화전에서는 최연소 완투승(18세 1개월 18일), 1994년 6월 8일 삼성전에서는 최연소 완봉승(18세 11개월 14일)을 거두며, 당시 태평양의 안병원이 가지고 있던 최연소 기록들을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바꿔 놓은 것이다. 그 해, 프로 마운드에 선 주형광은 무늬만 신인이었을 뿐, 마운드에서는 루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자로 잰 듯한 제구력, 우타자 몸쪽으로 정면 승부를 서슴치 않는 대담성을 앞세워 데뷔 첫 해 11승을 거두며 당당히 10승 투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남들에게 다 있는 2년차 징크스도 주형광에게는 해당사항 없는 이야기였다. 시즌 초반의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0승을 거두며 1995년 롯데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일등공신으로 활약하였으며, 포스트 시즌에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특히 플레이오프 6차전 경기는 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에, 내 개인적으로도 참 의미가 있고 잊을 수가 없다. LG 타선을 상대로 1안타 무사사구 완봉승을 거두며 표효하던 모습이란.. 어쨌든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로 그 해 신설된 초대 플레이오프 MVP로 등극하게 되었고, 롯데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6년. 팀 성적은 부진했지만 주형광 개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시간들이었다. 우선 그는 자신의 개인 통산 최다승인 18승을 기록하며 다승왕 타이틀을 획득하게 된다. 또 22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역대 최다 탈삼진 기록인 최동원의 223 탈삼진에 가장 근접하는 선수가 되어 "닥터K" 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96년 시즌의 활약으로 주형광은 롯데 마운드의 에이스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국내 프로야구 최고의 좌완이라는 입지를 완벽하게 굳히게 된다. 남들은 평생 걸려도 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일들을, 그는 단 세 시즌만에 해치운 것이다.
하지만 "호사다마" 라고 했던가. 그에게도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96년 말 군입대를 하였으나, 1997년 시즌 초 의가사 제대를 하고 마운드에 복귀한 주형광. 하지만 동계훈련의 부족으로 인해 6승 13패라는 데뷔 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다. 그 후 1998, 1999년에는 11승, 13승을 거두며 일본 진출까지 생각하게 되지만, 2000년 8승 6패의 다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2001년 캠프 때도 팔꿈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지난 해 부진했으니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에 피칭을 계속했고, 결국은 왼쪽 팔꿈치의 인대가 파열되기에 이르렀다. 그 해 10월, 일본 미나미 공제병원에서 팔목 인대의 일부를 떼내 팔꿈치에 붙이는, 일명 "토미 존 서저리" 로 불리는 수술을 받은 주형광은 그 때부터 재기를 위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한 신인시절을 보냈던 그였기에 2001년부터 2003년 까지의 시즌은 더더욱 힘든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2군에서의 생활, 재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재활 프로그램..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밤낮으로 재활에 매달렸고, 다시 정상에 서리라는 다짐 역시 잊지 않았다. 2003 시즌, 그는 다시 1군 무대에서 뛰게 되지만 그 땐 선발이 아닌 중간 계투의 자리였다. 전성기 시절의 구위를 회복한다는 건 쉽지 않음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다시 마운드에 선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2004년.. 사실 시즌 직전에는 선발 보직조차 확실하지 않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스피드는 예전 같지 않지만 칼날 같은 제구력과 코너웍은 전성기 때의 그 것과 같다는 평가였다. 꽤 좋은 투구 내용으로 시즌 초반 4승을 거둘 때까지 그의 부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지난 6월 6일 현대전에서 갑작스런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던 주형광은 지금까지도 올라오질 못하고 있다. "언제 다시 올라가게 될 지 나도 모르겠다" 며 씁쓸하게 웃던 주선수의 목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리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올 시즌 오프라는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는 걸 보니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 모양이다. 이 쯤 되니 "이제 힘들지 않겠느냐" 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가끔씩 보이긴 하지만..
누가 뭐래도 주형광은 롯데 최고의 좌완투수였다. 그리고 팀에서 필요로 할 때나, 팀이 힘들 때나, 언제나 혼자 고군분투하며 롯데 마운드를 지켜낸 에이스였다. 부상으로 인한 공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롯데팬들이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가 곧 마운드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켜 본 그는 야구 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야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고, 야구에 대한 열정만은 항상 변함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이 끝은 아니라고, 힘들지만 좌절 같은 건 하지 말자고 자기 자신을 다그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모든 사실들을 화려했던 과거의 추억으로만 묻어두기에, 그는 아직 너무 젊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이 자리에서, 나의 영원한 에이스 주형광을 기다리고 있다.
■ 작성자 롯데자얀츠매냐
■ 작성일 2004년 8월 10일 |
첫댓글 정말 좋은글입니다... ^^ 메이저리거님 꼬옥 칼럼란에 올려주세요..
기록이 참... 박찬호스럽습니다... ㅎㅁㅎ;;; 다른팀팬들은 주선수를 완전 끝난선수로 취급하죠. 하긴 전성기는 기록으로 봐도 5년이 지났으니, 반박은 못하지만, 롯데 팬이라면 다들 알 수 있죠. 주형광선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ㅎㅁㅎ
초량중학교 아니고 부산중학교임...ㅎㅎㅎ 그리고 올해 주형광이 써클체인지업을 장착하면서 작년의 투구패턴에서 탈피를 한것이 올시즌 부상전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예리하시네여... ㅋㄷ ㅋㄷ ㅋㄷ... 참 대단한 글에 대단한 댓글입니다. ㅎㅁㅎ;;;
정말 맘에 와닿는 좋은글입니다..주형광 선수 올해광주에서 3년6개월만에 선발첫승으로 눈물까지 흘렸었는데....ㅠㅠ.야구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볼수있었죠..올시즌은 어차피 물건너간거 무리안했으면 합니다..올해 안나와도 좋으니 그져~ 재활훈련에만 신경쓰셔서 부상에서 완젼이 벗어나기만을 빌뿐입니다..
정말 좋은글입니다~
수정했습니다.. 근데 예전 신문인가 잡지에서 인터뷰 한 거에 초량중학교로 봤던 게 너무 마음 깊이 남아 있어서;;;(원래 어릴 때 기억이 오래가죠;;;) 잘못된 거였군요.. ㅡ.ㅡ;;;
정말 좋은 글입니다.. 내년 시즌엔 부상없이 좋은 활약보여주시길~
주형광 정말 좋아하는데.
우타자 몸쪽 꽉찬공이라고 하니 허구연인가 하일성인가 하던말이 생각나네요..."저건 쳐도 파울이에요!!" 칼날 제구력 또 보고 싶습니다!!!
주형광 없는 년도 롯데 가 꼴지 한 년도랑 같네요...,,ㅡㅡ;;
주형광의 장점은 바깥쪽1인치..그리고 과감한 몸쪽승부..현재 회장님이 보여주는 그런투구내용이죠..
여기서 읽은 최고의 글 입니다. 형광인 정말 대단합니다.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95년 LG에 1안타 완봉 후 형광이의 귀여운 세르머니.. 한국 야구사 최고의 피칭을 한 경기 일껍니다. 누가 녹화 한 거 없나요??? 그날 LG에 미친 놈이랑 같이 봤는데 이놈 한 일주일을 멍하니 다녔습니다. 한국의 왼손 매덕스라고 했었는데..
그경기에 비견될만한 경기가 하나더있었습니다..한화의 정민철이 무안타 무사사구 노히트노런..패스트볼로 출루한번허용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