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봄날
뒷산 신접살림 꾀꼬리 소리
귀가 간지럽다. 연신 엉덩방아 찧던 아이
하늘을 당겨보지만, 쉽사리 당겨질 것 같지 않고
대숲 너머 밭매러 가신 엄마 쉬이 올 리 없다
주렴을 들추던 바람
배가 고팠는지 가죽나무 그림자 입에 물고 질겅댄다
사립문 목탁 소리, 까까 중 시주 오셨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조곤조곤 조아려 보지만, 잠든 척, 삽살개
어림 반푼도 없는 불심(佛心)
허기진 우물 안 집, 아장 대던 아이
붉게 익은 앵두 알은 손이 닿지 않았네
이때쯤 엄마는 산딸기 바구니
머리에 이고 오셔야 하는데
해 넘기 전에 오셔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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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않은 말
빗줄기가 후두둑 굵어진다
선풍기 바람에 책갈피를 넘기고 있는데
마늘을 까던 아내가 말을 꺼낸다
용이네가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갔대
한 열흘 실컷 돌아다니다 돌아왔대
실컷 돌아다닌 데가 글쎄 어딘 줄 알아?
왜 돌아온 줄 알아
그게 말이여...
(듣다 듣다 버럭) 그만 혀!
(넉살 좋게) 그래도 들어 봐
(초등학교 1학년) 용이가 전화를 했대
엄마 보고 싶다고, 울면서.
용이 핑계 대고 돌아와선 용이 아버지 끌어안고 울었대
보고 싶었다고.
홱 돌아보는 내게 넌지시
나도 집 한 번 나갈까?
마늘이나 다 까놓고 나가
비 그치면. 한 스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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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마지막 여름
그해 여름은 무던히 길었다
평생 보신탕을 못 드시는 어머니를 위해
보신탕을 끓였다
이가 빠진 어머니는 오물거리며
잘게 썬 고기와 국물을 남김없이 드셨다
무슨 국물이냐? 물으시는데 형수님이
수입해 온 소고기 국물이라고 둘러댔다
이렇게 맛있는 국물맛은 처음이다. 시며
며느리 두 손을 꼭 잡아 주셨다, 그 후로도
여름 나기 국물을 여러 번 맛있게 드신 어머니
몸보신 효험도 없이
어느 날 마지막 길, 문지방을 넘으셨다
그해 여름은 무던히도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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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걷는 일
1.
외길을 따라 달빛을 베어 물고 걷는데
누군가 자꾸만 따라오고 있었네
오래도록 모른 체 앞장세워 걸었네
그가 달을 더 좋아할 줄이야
달이 내 반쪽 그림자만 사랑했나 봐
2.
아무나 쳐다보는 하늘 한번 보고 싶어
물고기는 수면을 박차고 뛰어올라야 하고
그때마다 물속에 퐁당 빠져야 하네
바람 아닌 것에 흔들리며 걷는 길
돌부리에 걸려 웅덩이에 여러 번 빠지기도 했네
3.
허공을 버린 지상의 꽃잎
이슬의 눈물까지 삼키는 풀잎
허물어짐을 견디기 위해
그들도 중심을 지탱할 뼈마디를 움켜쥐었을까
내 신발의 뒤축은 자꾸만 닳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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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의 희망
1.
어린 새끼가 날짐승이 될 때까지
어미 새는 먹이만 물어오는 게 아니다
새끼들이 쉴 나무들의 키를 키우고
하늘을 둥글게 펴
달과 별을 촘촘히 색실로 감아 두었다
2.
새들은 밤마다
심오한 우주의 자장가로 잠이 들 것이다
3.
평화가 눈뜨는 아침
공들인 발자국마다 햇빛이 고이고
햇빛을 물고 수직으로 오르는 세떼
4.
광대무변의 수 틀을 채울 활공하는
군무를 보게 되리라
촘촘하다는 것은쯤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