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자아 치유기 -왕린의 《그녀의 알리바이》
方 旻
1. 누군가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만의 방식을 기록한 것이다. 수필은 세상을 살아내면서 다양한 것을 겪고, 그 반응을 쓴 글이다. 그것엔 세상은 어떠하다는 걸 이해한 걸 담기 마련이다. 특히 과거 체험을 주 대상으로 삼는 만큼 한 작가의 글은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에 대한 정리된 이해의 총체다. 누군가 세상을 이해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이해 주체가 세상 객체와 교류하면서 형성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가 써 보여준 세상 이해는 자신의 내면까지 드러내 비추는 거울의 역할까지 하나 더 맡는다. 글이란 세상과 자아의 상호 이해를 드러내는 과정이고, 작가가 포착한 세계인 동시에 자기 정체성의 확인이다. 즉 한 인간의 내면 풍경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동기부터 세상살이를 꼼꼼하게 기록해온 한 여자를 보자. 일기쓰기 방식으로 꼼꼼히 세상과 교류를 축적하였고, 그 연장선에서 수필가로 등단하여 활동하면서 드디어 그 집적의 결과물을 세상에 내보였다. 그것은 작가가 살아온 역사의 기록이며 한 인간의 존재를 역으로 증명하는 <알리바이(부재증명)>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녀가 밟아온 지난 삶의 보고서를 펼쳐 그녀가 부딪힌 세상과 자신의 존재 양상을 하나씩 만나보겠다. 수필집 소개란에서 보자면, 그녀는 전라도 정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서울에서 살았으며 오랫동안 서예를 공부했는데 2010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하여 현재는 수필과 연애중이다. 그녀의 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목할 특이 사항은 없다. 대개 여류 수필가에서 발견하는 공통적 요소이며 수필의 제재가 작가의 일상 체험을 근간으로 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보편적 사연이다.
2. 왕린, 그녀는 세상을 즐겨 관망한다. 친구끼리 야외에서 식사한 뒤에 일명 고추 서리를 하는 밭에 함께 끼어들고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나온다. 나온 뒤 고추 서리를 지켜보면서 조바심이 나고 가슴은 두방망이질까지 쳤을 정도다. 그녀는 이처럼 이곳저곳에서 자주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관망한다. 하여 당연히 따라오는 아쉬움이 뒤를 잇는다. 행동으로 동참하지 못한 일종의 후유증인가. 그 후 그 여자는 음식점 테이블에 남은 고추를 “싹쓸이하여 가방에 넣는” <고추 훔치는 여자>가 된다. 이러한 세상 관망하기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건너편 쇼핑센터 옷 매장에서 맘에 드는 옷을 보기만 하다 결국 놓치고 안타까워한다. <하늘을 놓치다>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놓친 게 어디 원피스 하나뿐인가.”하고 뒤늦게 탄식한다.
바라보고 망설이는 건 유년 시절부터 비롯한 아주 오랜 그녀 세상살이의 특징적 습성이다. <그 남자의 꽃잎>에서도 우체부가 동명이인인 줄 모르고 잘못 전달한 편지인데 제대로 편지 주인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애만 태운다. 막연한 호기심으로 읽어보곤 어린 가슴에 “얼굴은 달아오르고 가슴은 콩닥거렸다.”고 했으나, 결국엔 그 뒤에도 반갑게 받아서 일기에까지 베껴놓았으나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고, “편지 봉투가 낡을 때까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도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녀가 바라보기에만 능숙한 것은 <눈독>에서도 마찬가지다. 신혼집마저도 “전망이 꽤 좋은 2층 양옥”을 구했는데 아주 관망하기 제격인 곳이다. 이 집에서 어쩌면 신혼 생활의 자잘한 다툼도 관망하며 해소가 가능했을 것이다. 바라보이는 복숭아밭에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복숭아를 그 아이와 일체가 되어 따 먹는 동일한 감정이 전이되어 함께 그 자리에 있는 듯 “나는 그제야 내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다. 아이처럼 복숭아를 따고 싶었을 뿐 역시 행동하지 못하고 “퇴근해 온 남편”을 “졸랐다.” 깊은 밤을 기다리던 남편이 잠들어 허사가 되었고 결국 복숭아는 “눈독”만 들이다가 복숭아밭 주인의 호의로만 맛볼 수 있었다. 만일 그런 선의가 없었다면 그걸 따서 먹었을지 궁금하나 아마도 그렇지 못하고 발만 구르다 시장에서 사먹었으리라. 그녀에게 행동은 이다지도 어렵다. 아니 그녀에겐 관망하는 게 그녀답다. 왜 그녀는 세상을 한발 비켜서 바라보기만 할까?
관망하는 사람은 외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대신 내면으로 욕구를 돌리기 마련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내면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욕망은 어떠한 형태로든 충족하지 못하면 심신의 병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런 병은 고통이 따라오고 그것은 불행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 욕망 충족은 방향을 바꿔 내면 합리화나 자기 긍정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전환된 욕망이 가는 길은 자기만족이 지향점인데, 그것은 간혹 자기만의 나르시스트적 도취와 만난다. 그렇게라도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혹은 해소하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이 지점에 그녀의 수필쓰기가 등장한다. 글쓰기 또한 이런 나르시스트적 행위의 일종이다. 문학 원론에서 작가 중심의 표현론적 관점이 이를 대표하는 데서 보편적이다. 욕망 실현이 어려운 세상과 달리 글 안에서는 얼마든지 자신을 합리화하고 만족시킬 수 있으며 외부 세계에서 충족하지 못해 다소 상처를 받은 자아가 그것을 해소하고 간혹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 이 훼손된 자아에겐 글쓰기가 좋은 치유가 된다. 그로써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자아 정체성을 회복하고 세상과 화합을 이루며 다시 삶의 길에 한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도취>에서 작가는 친구가 찍어준 사진이 무척 맘에 든다. “아무리 뜯어 봐도 잘 나왔다. 정면을 살짝 비켜 콧대를 살려 찍힌 것도 마음에 든다.” 이 작품 결미에선 그녀의 속생각을 꽤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기 나름의 삶의 방식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가감 없이 토설한다. “이제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산다.” 세상에 대한 자기 삶의 처세관 선언이다. 선포한 대로 내 방식으로 보고 주관대로 믿고 살겠다는 공개 다짐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녀를 지금껏 소외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데~ ‘아직은 괜찮네.’ 하고 위안을 받는다면~ 내 흥에 취해 산들 뭐가 대수이랴.” 그녀가 세상을 바라만 보다가 이처럼 당차게 선언하기까지 어떤 경로를 거쳐 왔는지 내심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글을 더 읽어봐야 하는 이유다.
3. 유년의 눈다래끼 사건이 흥미롭다. “어쩌다 손이라도 닿으면 기겁을 하면서도 짜는 것이 두려워~”피해 다니다 아버지한테 붙들려서 “문설주에 걸망태가 걸린 게딱지만 한 집으로” 갔고, 고름을 짜다가 뛰쳐나와 도망쳤다. 세상은 그녀에게 애초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다. 믿었던 아버지마저도 그녀를 져버렸다. “얼마 가지 못해서 아버지 손에 잡히고 말았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저버린 세상의 “아버지 품에 안겨 끝없이 울고 또 울”따름이었다. 그녀는 고작 “카스텔라를 아껴 먹으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울음 끝이 긴 아이”일 뿐이었다. 이처럼 그녀가 세상에 대고 저항할 수 있는 것의 전부가 이 만큼이다. 더 이상 그녀는 이후 세상과의 대적과 적응을 시도하는 대신에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길을 찾아 나선다. “양글게 생겨 갖고 징그락게 말도 안 들은” 그녀는 일찍 세상의 이치를 나름으로 깨우쳤고, 세상과의 불화와 받은 상처를 서리서리 담아두는 길을 찾았는데, 그네에겐 일기쓰기였고 발전한 결과가 수필쓰기일 터이다. 이를 좀 더 확인해 보자.
그녀가 유일하게 잘 통하는 사람 역시 세상과 불화하여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경자 언니>다. 유유상종인 이 교류는 작가의 이후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 동네 여자들과 격리하다시피 살고 있는 경자 언니는 “동네 또래들과 분위기부터 달랐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여자였다.” 다른 부녀자들과 그녀는 어린 작가의 눈에도 많은 것이 달라보였고, 동네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녀와 교류하는 사람은 어린 그였다. 그녀 역시 마을에서 자의건 타의건 소외되어 부적응의 삶을 살고 있다. 경자 언니의 연애 사건으로 헤어진 뒤에 작가는 “언니가 사라진 후 나는 말을 잃었다. 언니의 울음소리와 뭉텅뭉텅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떠오르면 서글프고 혼란스러웠다.” 어릴 때 무척 아프고 격한 성장 통을 겪은 작가는 이어진 후유증이 적잖은데 다음의 고백은 그걸 증언한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해서 생긴 오해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럴수록 빗장을 더 단단하게 걸고 내 안에 갇혀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사람한테는 한없이 풀어져 잠재된 아픔까지 치유되는 걸 느꼈다. 예전에 경자 언니가 그랬듯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가 건 빗장을 여는 방법까지 터득해갔다.” 이 자백은 이 작가가 서예에 전념하다가 왜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 세상과 불화를 겪으며 성장통의 내면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며 문화적 해소책을 찾게 되었는지를 증언한다. 눈다래끼가 난 일이 없었다면, 경자 언니를 알지 못하고 자랐다면 그녀는 일기도 안 썼을 수도 있고,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양글게” 세상을 인지하고 그에 맞게 다른 삶을 살았을 수도 있다. 섣부른 가정이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추정이 아닐까. 이것을 더 확실하게 할 증거를 또 찾아보기로 하자.
세상은 여전히 그녀와 불통이다. <목요일 오후 1시면 공중전화를 한다>는 글은 이 수필집에서 가장 긴 작품 제목이다. 반면에 분량은 아주 상대적으로 짧다. 말하자면 이 제목으로 글의 주제를 모두 말한 셈. 분량이 짧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특정 시간인 “목요일 오후 1시”는 그녀가 문학 강의를 받으러 세상에 나오는 날이다. 세상으로 나왔으나 소통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세상 역시 그를 반겨주지 않는다. 수신인도 없는 공중전화에 대고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 내용은 “점심 맛있게 먹었어?”나 “세상이 꽃으로 환해”, “감기 조심해” 따위다. 중요 정보도 아니고 긴박한 사연도 아니다. 소위 친교적 기능의 언어일 뿐이다. 그녀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어 시도하는 중이다. 다시 말해 세상과 소통을 원하는 거다. 번번이 그것은 시도로 그칠 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목요일 오후 1시면 길음역으로 가서 공중전화를 한다.” 그녀의 바람은 세상과 소통하고 순응하여 살려는 욕망인데 이의 성취가 쉽지 않고 또 한 그 열망도 식지 않고 지속되기 때문에 시도가 이어진다. 이 지속된 삶의 열정이 문학을 만나면서 길을 찾아 나선 것으로 보인다. 왜 그녀가 소통의 부재를 힘들어하면서 선택한 방식이 문학이었을까? 그것의 답은 <경자 언니>에 있다. “나는 그 시절의 언니처럼 음악을 좋아한다. 잠에 방해될 정도로 커피를 즐겨 마신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꿈도 꾼다. 언니를 못 본지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지금, 나는 경자 언니를 글 속에서 만난다.” 왕린 작가의 음악 취향과 커피 애호는 물론이고 좋은 글에 대한 욕망까지도 ‘경자 언니’의 잠복적 레이더 사정권 안에 있다. 지나치게 말하자면 왕 작가는 ‘경자 언니’의 아바타라 불러도 될 정도다. 한 여자의 성장 과정과 그 후의 인생에 이처럼 큰 영향을 기친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두 여자의 만남은 일종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분명 ‘경자 언니’는 왕린 수필 문학을 이해하는 아주 유용하고 확실한 코드임에 틀림없다.
4. 작가가 세상에 맞서는 일은 그녀가 택한 삶의 방식이다. 세상에 맞추어 화해를 시도하거나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식으로 맞서나간다. 세상과 타협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지만 섣불리 도전할 생각도 아예 없다. 일찍이 언명한 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산다.”(<자아도취>)라고 만인에게 선포하였으니, <통굽녀>를 고수하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다. 다만 이 글에서 주목할 바는 욕망의 몇 알을 살짝 드러내고 있는 내면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몇을 집어내자면, 그녀는 “다리맵시를 살려 주는 하이힐을 신고~여성스러움을 한껏 뽐내고도 싶”고, “내 키가 5㎝만 더 컸더라면” 바라기도 하고, “‘러블리 우먼’의 환상을”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욕망은 내면의 저류底流일뿐이다. 결코 세상으로 햇살처럼 외현화外顯化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편해서”고, “키가 커 보이려고 굽 높은 구두를 신”고 “할인해 주”었고, “걷기 좋아하는 나에게 통굽은 두루딱딱이 구원투수”이기도 하여, “세상 어디까지 나를 데리고 갈 에너지를 충전”해 주기도 하니 “꿋꿋하게 통굽에 올인하”게 된다. 다분히 미관보다는 실용적 기능에 충실한 선택이다. 세상 시선보다는 자신의 주관과 가치관을 앞세워 똘똘 뭉쳐 불화한 세상과 주관적 실효성으로 대적한다. 통굽은 그녀에겐 실제 세상과 한 판 싸울 수 있는 전투화와 다르지 않다. 그걸 신고 당당하게 싸우는 건 그녀가 택한 세상살이 방식이다.
세상살이는 누구에게나 경쟁의 연속이다. 세상 속으로 한 발 내딛는 것은 경쟁 세계로 진입하는 일과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이다. 세상 이치가 이러한데 그녀는 이런 경쟁에 나설 생각이 없다.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경쟁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한다. 그녀가 택한 세상사는 방식이다. 결혼 전에 그녀는 경쟁 세계에 속해 있었다. 결혼과 함께 이 경쟁 세계에서 물러나 주부로만 살았다. 그녀가 세상과 접한 활동은 서예 활동이었고, 독서논술지도 활동에 얼마간 종사했다. 세상에서 가장 경쟁의 강도가 약한 것이 교육이다. 논술 교사로서 얼마간 경험은 세상 경쟁과는 사실 거리가 있다. 그러기에 그가 중독이라 판정하는 ‘쌤쌤마트’는 “누구와 경쟁하지 않으면서 혼자 즐길 수 있어서다.” 그녀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즐겨 관망하기를 선택한다고, 그녀의 습성이라고 앞에서 진작 지적한 바 있다. 그녀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아니 못하는 것은 경쟁하기가 맘에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행동도 경쟁의 속성을 가진다. 경쟁이 본질인 인간 행동이 그에게는 버겁고 원치 않는 바다. 남이 경쟁하며 행동하는 것을 지켜보지 그 경쟁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녀라고 애초부터 경쟁을 피한 건 아니다. 그녀는 일찍이 경쟁을 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봄 소풍 때” “나는 짝한테 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짝꿍과 벌인 쑥 뜯기 경쟁은 그들을 찾아 나선 선생님께 “꿀밤을 먹”고 싱겁게 끝났다. 아마 그 이후에도 자잘한 경쟁은 그녀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니 말이다. 그녀도 피할 수 없는 이런 경쟁은 수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 중독>에서처럼 하고 싶지 않은 경쟁이었고, 그걸 피하고 싶었다. 결혼이 그녀에겐 원치 않는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기에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남자와 결혼”(<통굽녀>)도 한다. 경쟁이 없거나 거의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인 서예와 걷기, 특히 산행에 자주 나서는 것은 바로 경쟁을 기피하는 심리에서 비롯한다. 산행은 자기만의 페이스로 걸어야 안전하다. 산악 마라톤 경주가 아닌 한 산행은 자기와의 싸움이고 자기만의 보조에 맞추어 걸어도 되는 일. 타인과의 경쟁은 없거나 할 필요가 없는 행위가 바로 산행이다. 그녀의 수필집에서 유독히 많은 산행 체험기는 바로 이런 삶의 기록이다. 그녀가 발표한 총 44 편 중 8편으로 적잖은 비율이다. 산행 체험을 다룬 여러 편에서 보여주는 자잘한 에피소드들, 고인이 된 산행 친구를 회고하는 <바람의 노래>, 금지한 샛길을 가게 된 변명인 <산불 탓이다>, 산과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게 된 사람과의 모임 체험인 <흔들리는 밤>, 한라산 일출 산행기인 <해가 뜬다>, 산행 길에 떠올린 지인의 죽음을 회상한 <장갑 한 짝>, 산에 오르다가 선행을 베풀고 오해받은 이야기인 <덤터기>, 산행을 권유하는 <초대합니다>, 산행 길에서 사색한 기록인 <안개 속에서> 등이다. 한편으론 가정생활을 책임진 주부로서 이모저모를 보여주는 체험 기록이 그 다음으로 많은데 꼽아보자면, 깨를 볶으며 상상의 날개를 펼친 <튀어봤자 깨알>, 지나온 가정의 역사를 서술하는 <옷걸이>, 요리 도구인 그릇에 대한 상념을 서술하며 작가가 살아가는 삶의 굴곡을 감정이입하여 동화시킨 <꼬마 뚝배기>, 빨래를 통해서 드러난 주부의 심정을 그린 <빨래를 널며>, 남편의 취미 생활을 관찰자 시선으로 바라본 <남편, 바람나다>, 딸과의 화해를 그린 <화해>, 남편으로 빙의하여 자신을 바라본 <그 여자>, 아파트 층간 소음의 일화인 <소리 유감>, 집안 가구인 의자를 의인화 수법으로 길어낸 <왕이 아니로소이다>의 모두 9편이다. 결국 그녀는 주부로서 생활에 충실하면서 틈을 내어 자주 산에 오르내리면서 살아간다. 그것을 이 수필집의 중요한 제재로 선정했다. 주부 수필가들에게 발견하는 매우 공통적인 현상이고 이 땅의 여류 수필가의 다수가 이러하다. 간혹 수필을 폄하하는 용어인 ‘신변잡기’의 환경적 태생적 한계가 아닐 수 없다. 이 ‘신변잡기’와 본격 문학수필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놀음처럼 늘 긴장의 자장 안에 놓여 있어 수필가 모두에게 넘어서야 할 험하고 큰 고개다.
5. 그녀가 일찍 유년기에 입은 상처는 세상과 불화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훼손된 자아의 존엄성은 자기만의 내면 동굴로 숨어들어 나름의 세계를 찾아 그 안에서 세상과의 고단한 경쟁과 불우를 씻어내고자 한다. 그러하기에 젊은 날 친구의 다락방은 그녀에겐 이상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친구의 다락방은 쉽게 “우리 둘만의 아지트”로 “거기에 있으면 우리는 동화 속 신데렐라”를 거쳐서 “영화 속 비련의 주인공”도 되었다가 “현실감 없는 이야기도 무지갯빛으로 피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다락방에서 꿈은 꿀 수 있을지언정 삶을 가꾸기에는 “가난이 더께처럼 붙어 있는 그 골목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현실”인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폐쇄적 공간에서 작가는 “일본계 회사에 취직”하면서 현실의 경쟁 세계로 편입한다. 얼마 안가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자던 약속을 언제 했냐 싶게 결혼도 했다.” 애초에 ‘꿈꾸는 다락방’은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 공간에선 결혼하지 말자던 비현실적 약속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다락방을 나온 뒤의 현실은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 생각인지 바로 이어진 결혼이 증명한다. 이렇게 생활이 변했다 해서 훼손된 자아의 상처받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왼쪽 눈두덩에는 마른 생선 가시 같은 작은 흉터”(<비는 내리고>)가 그대로 남아있듯, 다락방에서 꿈꾸던 “그 시절은 아득한 과거로 밀려나 있”거나, “기억들이 그리움이 되어 빗물로 넘치고 있을 뿐”일지라도, 작가의 의식 어느 구석에 내면화 되어 잠복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그것은 싹을 내밀고 자랐을 것이다.
그녀는 세상에서 소외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웃에 남보다 관심을 많이 보인다. 작가의 천성이 착하고 인정미가 넘쳐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사람들한테서 자신의 상처입고 아파했던 훼손된 자화상과 조우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을 감싸고 동정을 베풀며 따스한 마음을 펼치는 건 자신에게 내면화된 무의식적 상처의 어루만짐이고 치유의 한 의식이다. 그러면서 비로소 작가는 유년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위무 받고 평정심을 찾을 수 있다. 이런 사회에 대한 인정스런 행위의 연장선상에 그녀의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가 작가에게 치유의 한 과정이고 표현 방식이듯, 이들에게 향한 손씀은 그들에게 향한 행동 표현의 다른 방식이다. 이것은 바라보기만 하던 관망의 자세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작지만 행동의 길로 나선 것이고 세상과의 대적에서 적응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그녀는 보면서 망설이기만 하는 건 아니고 다가서서 행동한다. <숨은 사랑을 드릴 게요>에서 친구에게 받은 생일 꽃다발을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남편 생일로 일찍 들어가는 “실내복이나 양말 등속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선뜻 내민다. 이뿐이 아니다. <덤터기>에선 산행 길에 나섰다가 비를 만나고 비설거지에 바쁜 길가 노점상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잘 도와주고도 나중에 오해를 받아서 뒷맛이 개운치 않지만 그녀는 여기서도 바라보지만 않고 나서서 행동했다. 행동에 나선 그녀에게 세상은 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자주적으로 다가선 변화를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합니다>에서 산행을 초대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목욕탕에선 할머니에게 다가가 등도 밀어드리고(<목욕탕에서 나를 만나다>) 하면서, <채소 가게 순옥씨>와의 만남과 사귐까지도 이와 동궤에 있다. 순옥 씨는 “처음 봤을 때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장사를 하나 싶”을 만큼 어설펐다. “다른 곳에는 다 팔린 물건도 그곳에 가면 쌓여 있을 정도로 장사 수완이 없어 보였다.” 그런 순옥 씨에게 왜 작가는 다가섰을까? 그녀에게 끌린 이유는 “값만 물어보고 돌아서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 그녀가 편해서였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왜 왕린 작가에게 그것이 편하게 다가왔을까? 순옥 씨 그녀는 “시장판에서 마늘을 까다 말고 잠이 들어버린 그녀가 내 눈에는 아름답게 보였다. 삶이라는 세찬 바다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사람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진지함 때문”이었고, 그것은 시장 통에서 발견한 또 다른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와의 일체감은 작가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구겨진 세탁물을 “탈탈 털어 주름을 펴고 중심을 맞춰서”널 듯 살아온 덕이다(<빨래를 널며>). “삶에 지친 남편한테 기를 불어넣듯 셔츠의 깃을 세워주고, 딸아이가 늘 웃고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옷 주름을 펴는 데 공을 들”여 세상을 살아냈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에 열중하다 보면 세상은 어느 새 화해의 손을 내밀기 마련이다. 이런 것을 일러 성실한 삶의 결실이라 부를 만하다. 성실한 주부로서 가족의 편안하고 정갈한 삶을 가꾸어 내는 일은 세상과의 고단한 경쟁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빨래를 잘 너는 일이고 깨를 잘 볶는 일이며 옷걸이에 옷을 잘 거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의 유일한 애창곡인 <사랑밖엔 난 몰라> 역시 성실한 그녀에게 맞춤한 곡이다. 자아도취에 빠져 “무대를 혼자 누비”며 불러대는 “그~으~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라고 “애절한 눈빛, 간드러진 목소리, 낭창낭창해진 몸은 리듬을 타며 흔들리고, 절규하듯 내지르는 목소리에 딸려 나온 애간장은 온몸을 감고 돌고, 사랑에 목숨 건 여자, 노래 속에서 절절하다.” 이러한 자기 몰입과 자아도취는 그녀가 선택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자아도취가 있기에 몰입이 가능하다. 몰입하는 순간은 그녀가 세상과 화합하는 순간이다.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상처가 아물고 훼손된 자아가 자존감을 회복하는 순간, 그녀 삶에서 절정의 산마루다. 그녀가 “유일하게 박자를 놓치지 않는 노래”, “남들보다 못하는 노래에 한이 있는” 그녀가 “ 언제 노래하지 않으려 몸 사렸나 싶게 전주가 나오는 순간 감정에 폭죽이 터진다.” 그뿐이 아니다. “누군가 옆으로 나오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완전 몰입과 자아도취의 최고조 순간이다. 이런 자아도취와 몰입의 상태는 <집착한다, 나는>에서 자기만의 스타일에 그야말로 집착한다. 주관적이고 개성적 스타일의 자기 취향에 충실하다. 자기 세계의 완전한 구축이다. 이것은 ‘통굽’이나 ‘모자’(<모자와 나>)에서도 그대로 자기만의 스타일에 집착하는 몰입으로 드러난다. 이런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성실한 삶이 어찌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6. 그녀의 성실한 삶의 면면을 더 들여다보자. <옷걸이>는 사물을 화자로 설정하여 그녀 가정사의 지난한 세월을 서술한다. 여기에서 동원한 기법은 사물의 의인화이고, 서술자아 혼자서 불특정 상대에게 향하는 독백의 방식이다. 이것은 자기의 심리적 관점을 투시할 수 있고 상상을 넘어 허구에 상응하는 서술의 폭과 깊이를 확보할 수 있다. 서술의 객관성에 대한 독자의 의문에 대응할 수 있는 이 방법은 주객의 거리두기를 성취한다. 이 거리두기는 서술 대상인 작가 주체를 타자화 하여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객관적 시각을 획득하게 한다. 이 수법의 수필적 효과는 주체가 객체를 통하여 간접으로 드러내는 속말의 신뢰성 확보이고 주체의 자기 합리화에 퍽 유용하다. 즉 독자는 작가의 언술에 일정 부분의 신뢰를 보낸다. 이 신뢰 담보에서 주체의 객체화는 작가의 삶을 들려주는 형식을 갖게 하면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객관적 타자성도 얻어내게 한다. 이 타자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언급에서 필지하는 주관적 시선의 함정을 건너뛰고 타인을 대하듯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 신뢰성을 낚을 수 있다. <꼬마 뚝배기>는 역시 독백체인데 뚝배기로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역시 여기서도 서술 주체는 ‘뚝배기’라는 상관 사물을 사용한다. 이 뚝배기는 자기 이미지를 투사한 물체이고 달리 말하자면 수필적 은유의 수법이다. 즉 ‘서술 자아(작가)=뚝배기’의 관계는 작가의 분신인 셈이다. <집착한다, 나는>도 마찬가지의 독백체다. 자기 취향의 고백인데, 설명 서술의 평어체 문장이 아니라 이야기체 사용은 친근감을 주며 서술 대상과의 거리감을 소멸시켜 솔직성을 보상으로 돌려받는다. 파생한 덤으로 독자한테 신뢰까지 받기 쉽다. 작가가 노리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한발 더 나가면 경어체 사용이다. 보기로는 <초대합니다>와 <그 여자>가 있다. 전자가 외부 지향의 글이라면 후자는 남편으로 분장하여 자신의 얘기를 들려준다. 소설에서 일반화된 허구 기법의 수필적 차용인데 상상력의 적극적 확장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 보지만, 허구의 늪에 빠질까 아슬아슬하다. 그건 독자의 신뢰성을 잃는 일이기에 그렇다. 수필의 진실성에 자칫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렵다. 이건 일어난 게 아니라 작가가 허구로 꾸며낸 것이란 의심을 품으면 수필의 장르적 테두리를 벗어나서 위태롭다. 폭넓게 보아서 일종의 가면을 착용한 서술 화자의 등장은 작가의 합리적 변명에 유용하다. 가면이란 언제든지 벗길 수도 있고, 작가도 쉽게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왕이 아니로소이다>에서도 의자가 등장한다. 의자를 통해 본 작가의 가정 풍경, 작가는 ‘우리는 이렇게 삽니다’를 경어체로 야유하고 풍자하며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자기 희화화하기에 좋다. 주객의 일정한 거리 확보는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하는 것일 것이다. 주관 문학인 수필에서 보다 진실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런 기법의 선택이다. 내 얘기를 남 얘기처럼 분리하고 거리를 두어서 독자에게 신뢰를 주고, 진실한 어떤 것으로 수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한다. 수필의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선 훌륭하지만 작품성을 갖추려면 과연 그 선택한 대상이 객관적 진실성을 담고 있는가이다. 방식만 객관성을 갖추었다 해서 그 실체가 저절로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작가의 주체를 객관화한다는 것이 의도하는 만큼 용이한가. 비유하자면 이는 거울을 보지 않고 내 뒷면을 보는 일이고, 내시경을 사용하지 않고서 뱃속을 보는 일과 같다. 다면 입체 거울을 사용한다 해도 필시 허구와 상상의 줄다리기를 건너뛰기 어렵다. 마치 수필을 쓰면서 수필의 옷을 벗어버리려는 시도이다. <그 여자>에서는 작가의 분신이었던 <꼬마 뚝배기>나 <옷걸이>처럼 사물이 아니라 인물인 남편으로 분장해 그의 시각으로 서술하는데, 이것은 당연히 실제가 아니라(영화에서처럼 몸이 바뀌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에)작가가 설정한 가상 상황이다. 실체가 없기에 이를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그녀(작가)는 아내이지 결코 남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인척 가장하지만 실상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서술 방식을 택하는 것은 다른 강한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건 자화상에 대한 욕망이다. 타자인 남편의 입을 빌려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런데 왜 남편의 입을 빌려야만 할까? 직접 하기 어려운 말을 인형극에서 인형의 입으로 말하듯, 여기에서 남편은 인형과 마찬가지일 뿐이다. 실상은 남편의 인형(탈)을 쓴 아내의 말이다. 그렇게 변장해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하소연인가, 푸념인가, 항의인가, 고백인가, 말을 할 수 없는 사물이나 동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남편이기에 이런 의문이 들고, 그는 자기가 처한 입장을 얼마든지 말할 수가 있기에, 대변하는 것도 아닌 이런 방식은 낯설고 특이하다.
이런 식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냥 작가가 주체가 되어서 말할 수 없는 곤란한 무엇인가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왕린 작가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이 드러난다. 그녀는 당연하지만 한 남편의 아내다. 남편의 상대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그녀의 실체는 모호하다. 아내로서 한 여자의 삶, 한 남자의 짝으로서 그녀의 정체, 주부는 그녀를 규정하는 핵심이다. 이것을 제거하면 그녀의 자리는 없거나 실체가 희미하다. 이 정체성의 자리가 주부이며 아내이므로 근거지, 그녀 삶의 현재 출발지이지 정착지인 이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욕구다. 다만 이것을 상대적 정체성 입장에서 여자로서의 삶, 아내와 주부로서의 삶의 확인, 즉 자화상을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왕린 작가는 딸도 있지만, 어머니로서 정체성은 2차적이다. 남편을 상정하지 않는 그녀의 삶은 의미가 많이 축소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녀 남편에 대한 수필적 사랑 고백, 부부애의 천명과 다름없다. 남편을 통해서만, 남편의 기초 위에서만 그녀는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이런 방식의 서술, 수필의 문학적 한계마저 위태롭게 하면서 선택한 근본 이유는 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에서 남편의 입을 빌어 진정 자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험을 감내하며 가상의 화자를 내새워 밝힌 그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 여자>를 보자. 왜 이 수필집을 통관하는 대주제가 <그녀의 알리바이>인지 우리는 새삼 확인한다. 그럼 작가가 남편 분장으로 토설한 자화상의 실체를 확인하자. 그녀는 남편한테 잔소리하는 여자다. “샴푸를 잘 헹구라”, “두툼한 코트를 입으라고 합디다.”에서 안다. 이건 대한민국 주부의 공통분모라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그냥 쓰잘데기 없는 잔소리꾼이 아니란다, 그녀는. “잔소리꾼이긴 해도 그 여자는 제 안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제 몸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내지요.”에서 알 수 있듯 자찬이지만 요리솜씨도 좋은 여자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라는 표현, 그 여자의 첫 느낌이 딱 그랬지요. 체구가 제 반만이나 했을까요.” 체구가 작은 그녀지만, “그 여자, 참 야무진 줄 알았습니다.”처럼 야무지게 보이기도 하나, “함께 살아 보니 그게 아닙디다.”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고 솔직하게 자인한다. “당직 다음 날 퇴근해 가면 그 하룻밤 새 몸이 아파 있기 일쑤고, 연탄이나 쌀이 떨어지면 가게에 시킬 생각은 않고 친정으로 달려가더라고요.”에서 그녀 자신의 허점까지도 자백한다. 그러면서 “살림은 뒷전이고 책이나 읽고 음악이나 듣는, 망상과 공상에 빠져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는 철부지 만년 소녀”로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그녀는 삼십 중반에 남편의 암과 만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낸다. 가정의 최대 위기가 너무 일찍 그녀에게 다가선 셈이다. 이 위기를 25년의 지난한 시간을 지나 극복한다. 다행스럽게 건강을 찾아 인생 최대 위기를 벗어나기까지 그녀는 “제 건강 외에는 뵈는 게 없는 여자”가 되어 남편을 살렸으나, 그만 위기에서 벗어나고 나서 그녀의 거의 모든 것이 변했다. “목숨 줄 겨우 잡았지만, 삶의 의욕을 잃고 입을 봉해버리자 그 여자가 무섭게 변했어요.”는 남편과 그녀가 합동하여 건강을 회복하여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 다가온 변화인데, 그것은 한편으로 삶에 대한 근본적 의문에 빠지게 한다. 위기일 때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시련이고 이런 심중의 변화에 그녀는 당황한다. 넘기 힘들었던 사선의 어려움을 이겨냈는데, 오히려 생의 의욕에 상처가 났으니 말이다. 이런 역설에서 그녀는 정말로 맘이 아프다. 그에 대해 “본인 스스로만 느끼는 아무것도 아닌 삶, 그 삶의 알·리·바·이·가 필요해서 아프다고” 자가 진단을 내리고 동시에 “우리가 부부로 함께 사는 것만큼 각자 인생의 확실한 알리바이가 또 있을까 싶은데요.”라고 깨달으며 역시 현명하게 자기 치유책도 찾아낸다. “삶의 아름다움은 종결어미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에서 이 모순된 이중의 심리적 복합성이 모두 드러난다. 이것을 화자는 심리적 자기 분석을 거치고, 그간 살아온 인생에 대한 이유 있는 해명을 찾고 반성적 변명을 구하면서 합리화를 시도한다. 여기에 은근한 자랑일 수 있는 작가의 남편 건강을 회복시킨 자신의 공도 드러낸다. 아니 그걸 강조하여 표출하고 싶은 속마음을 보여준다. 1인칭 관찰 화자를 내세워 자기 내면 분석도 하면서 관찰자 시점으로 3인칭화한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헤치는 양자의 시각을 들이댄다. 일인칭 독백과 삼인칭 관찰을 동원하는 것은 종내는 전지적 시점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결과다. 이것은 남편이야기도 곁들여 가며 자신의 입장을 내세워 자랑도 했다가 반성적 비판의 양면을 오가며 추정과 상상으로 남의 일 얘기하듯 자기 얘기를 하는 식이다. 주부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제 자랑하기는, 남편의 병구완을 한 수고 등을 말하기는 실상 낯 뜨거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작가는 남편으로부터 정말 수고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썼다는 말을 진정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마도 남편은 그것을 알고는 있겠지만 드러내서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여자는 그 공에 대해서 치하 받고 싶은 속마음이 엄청 크다. 하지만 실제 작가의 남편은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대개의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녀 남편이 암 수술한 이후 25년 동안 그녀가 겪은 고통과 수고는 필설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에 관해서 여자가 흡족할 만한 치하의 말과 행동이 없어서 이렇게라도 자화자찬하지 않고는 인생 알리바이를 확인할 바 없다고 생각한다. 아쉽긴 해도 그녀도 이제는“건강의 푸른 신호만으로도 이미 입증된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하지만 감정으로는 미흡하게 생각한다. 그 섭섭함과 자신의 존재적 정체성을 이렇게 토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말하자면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지 않고는 현재의 삶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치유의 글이 그녀에겐 필요했다. 현재진행인 지금 그녀에겐 인생의 중간 정산이 필요한 시점이다. 산다는 게 시시하고 시름시름하다. 딱히 꼬집을 순 없지만 울적하고 막연히 불안하고, 방황과 자학의 기로에 선 지금에 필요한 인생 정산, 이미 그녀는 이걸 끝냈다. 이 수필집이 그 정산서다. 엎드려 절받기지만, 절을 받기는 받은 것이다. 이 절받는 일,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수필을 쓴다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엎드려 절받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타인이 인정하고 이해해주는 삶이라기보다 작가 스스로의 삶을 평가하고 이해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다름 아닌 수필쓰기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절하는 행위인 수필 쓰기는 그래서 인생의 허무가 찾아오기 시작하는 갱년기의 여성과 사회에서 은퇴한 남성들에게 적합한 문학이라고 거칠게 정의해도 될 것이다. 그 한 보기가 바로 이 수필집이다. 여기에는 적나라한 인생 고백과 자기 이해의 현장과 가꾸어온 삶의 자평이 그득하다. 이 수필집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한 여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어내며 쌓인 아픔과 상처를 확인하고 그것을 어루만지며 닦아내면서 훼손된 자아가 이 세계와 하합하려는 치열한 시도이자 고투의 흔적이다. 어느 누구도 자아가 훼손당하지 않고 모태속처럼 안온하고 완전한 생명체로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떤 자아도 훼손당하면서 산다. 이 훼손 자체가 삶의 이력이고 삶의 존재 증명인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이 경로에서 발견한 한 여자의 정체성은 그래서 진솔하고 신뢰가 가며 한 자아의 현재 진행형 삶이어서 아름답게 보인다. 어떠한 생명체도 그 삶의 치열함을 성실하게 증명할 때 존재 가치가 있다. 이런 삶을 확인하는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살만한 아름다움으로 차 있다는 말과 동의어다.(2017.12.2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