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페스트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오미숙
2000년 우리는 코로나19 위기와 마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거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등 난관을 겪었다. 더운 여름 아이들까지 종일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2023년 코로나가 종식되고 감기 정도로 앓게 되었으니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러나 시련은 반복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죽음과 고통으로 사는, 난민 신세로 떠돌며 살아야 할 비참한 사람들. 이 난국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페스트는 없다 할 수 있을까? 온갖 벌레들과 쥐들로 악취 나는 거리, 폐허가 된 지저분하고 어수선함이 전쟁의 실상이다. 전쟁의 참사는 모든 것을 휩쓸고 한 마을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사람이 살수 없다는 것, 어디에 정착을 하며 전쟁은 언제 종전될 것인가?
페스트가 처음 시작 되었을 때 '도시는 선을 그어 놓은 듯 만에 면해 있다' 라는 글에서 오랑에 페스트가 퍼져 다른 도시와는 고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신문기자 랑베르가 오랑으로 들어왔다 폐쇠된 도시를 떠나 부인을 만나기 위해 리유를 찾아가 호소하며 '이 도시와 아무 상관없다' 고 도시를 떠날 방법을 강구했지만 결국 랑베르는 알게 된다. " 나는 이 도시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제 볼대로 다보고 나니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곳 사람이고 모두에게 관련된 일입니다.” 라며 랑베르는 혼자 살겠다고 나가는 일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결국 남아 계속 일을 하게 된다. 카뮈는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임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의 전쟁을 보며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참담한 죽음과 전장 속의 병원은 다친 사람들로 가득차고 식량이 모자라 굶는 어린이들이 있어도 무기 파는 일 외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 인류애는 어디로 증발했을까? 인류애가 있기는 있다는 걸까?
의사로써의 의무감과 헌신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는 리유, 요양원으로 보낸 아내가 숨졌다는 전갈을 받고 슬프지만 환자를 돌본다. 리유의 헌신은 오랑 시를 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았을 것이고 시민들도 그에게 희생적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리유는 그런 거창한 마음 아닌 일상의 부조리에 단절된 삶의 희망에 잔잔한 마음만 갖고 환자를 돌보았을 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파놀루 신부는 '여러분은 불행을 겪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불행을 겪어 마땅합니다. 페스트에 관여된 것은 반성할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람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악한 사람들이 떠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가진 기독교적 이념은 죄와 벌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오통판사의 아들 죽음을 보며 고통과 절망을 느끼며 '이 애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고 신에게 분노한다. 그의 신념을 흔들어 놓은 것은 정신적인 페스트다. 사람들은 저마다 페스트를 안고 있다. 자신의 신념을 잃는다면 페스트에 굴복한 것이다. 아이가 가진 죄없음의 벌! 그것이 까뮈가 말하고 싶은 부조리인 것이다. 오통 판사도 아이 잃고 나서 본분을 잊지 않고 보건대에서 일한다.
타루 또한 말한다. “사람은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또 자신은 페스트와 싸우며 끊임없이 페스트를 앓고 있으며 죽음에 이르도록 한 행동과 원칙을 선이라고 인정하므로 죽음을 야기했음을 고백한다. 타루도 전염병을 막기 위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타루가 리유에게 '신을 믿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까지 헌신적이냐' 고 묻는 말에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신에게 병을 맡겨버리겠지만 누구도 신을 믿지 않으므로 포기하는 사람도 없고 자신도 창조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거부하고 투쟁함으로 진리의 길을 걸어간다” 고 리유는 답한다. 타루도 결국 전염병으로 죽어간다.
시의 문장을 끊임없이 고치고 또 고치며 열심히 싸우는 또다른 등장인물 그랑, 페스트에 걸려 기적처럼 살아난다. 카스텔이 만든 혈청이 그를 낫게 했으며 오통 판사의 아들 외 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결국은 혈청으로 페스트는 종결된다. 그러나 파놀루 신부는 십자가를 손에 쥐고 죽음을 맞는다.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고생하며 싸우는 우리를 하느님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라며 신이라도 페스트는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페스트는 퇴치되었다.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몇 주 앞당겨서 기차가 끝없이 긴 철로로 소리 내며 지나가고 선박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바다를 가르고 나아간다. 생존자들은 만재한 채 전진을 시작할 것이다.' 페스트는 종결되고 전염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한다. 카뮈는 '집요한 전쟁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한다. 공포스런 전쟁터에서 작으나마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손을 맞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애만이 종전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은 의외의 힘을 발휘하므로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힘으로 인류의 불행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오래 지속될수록 흥미를 잃어간다. 전쟁하는 나라의 사람은 가족과의 이별, 견디기 어려운 것도 견뎌내면서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이별을 고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죽음과 마주하는 고통은 자신의 몫 죽음을 책임지지 않는 부조리한 죽음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무책임과 무관심을 카뮈는 부조리라 생각할까? 인간의 존엄성마저 잃어버린 인류는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간다. 코로나 이후 무의미하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한 결과 부조리한 일에도 싸우려 들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페스트를 앓고 있다. 전쟁의 페스트, 이기주의 페스트, 도덕심의 페스트, 질서와 안녕을 책임지지 않는 페스트, 피해를 입지 않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세기말적인 페스트... ...그 이기심만 간직한 채 죽음마저도 전염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 안일함으로 21세기의 위기는 만연될 수 있다. 우리에게 다시 또 들이닥친 페스트의 해결책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