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성도의 본질적 차이.
1.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주님은 떠나실 것이며,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
2. 14장은 크게 두 개의 주제, 주님의 떠나심(2)과 다시 오심(3)을 다루고 있습니다. 4~17절에서 떠나심에 대한 가르침이, 18~24절에서 다시 오심의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떠나가시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입니다(2). 이제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이 아버지 집에 들어가 거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처소를 예비하시면 다시 오셔서 그들을 영접하실 것입니다(3). 주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들이 알 것이라고 하시자 도마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당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심을 선언하십니다(6). 그렇습니다. 주님이 길입니다. 주님을 아는 자는 그 길을 아는 자입니다. 또한 주님을 안다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3. 이 대목에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 것은, 아직도 그들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한 연합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9~11). 이 연합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 안에서도 동일하게 경험될 것인데,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것을 입증합니다(20).
4. 주님께서는 믿는 자들이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이 말은 사도 시대 이후에 일어날 광범위한 복음화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13).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대신하여 이 땅을 살아가고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은 그들에게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14).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기도를 가르치십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도와 그 응답은, 자기의 모든 필요를 구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믿음이 부족하여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모든 영역 속에서 믿음으로 살기를 구할 때, 그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는 보장입니다.
5.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15,21,23,24). 주님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십니다(16~17). 이 약속은 기도 응답의 보장임과 동시에, 주님이 떠나가셔도 제자들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17). 그분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진리를 깨닫게 하고 가르치실 것입니다(26). 보혜사 성령님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고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16). 주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성령 안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물론 부활 후에 제자들이 주님을 다시 보게 되겠지만, 이 말씀은 성령으로써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을 암시합니다(18~20). 보혜사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하시는 일은 주님을 계속 사랑하게 하고, 그 계명을 지키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주님의 두 번의 언급(16~17절과 26절) 사이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6.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심으로써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려 하십니다(27). 주님께서 떠나신다고 제자들이 두려워하거나 근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들을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믿게 하시고(29), 세상으로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31).
7. 우리는 오늘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모든 믿는 자의 심령에 오셔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살도록 능력을 주시고, 주님의 모든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됩니다. 매일 매 순간 성령님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의 신비이며 성화의 비밀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17). 이것이 세상과 성도의 차이입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신비로움입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심으로 경험하게 되는 그 신비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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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사역의 마지막, 곧 죽음으로 나서는 길목에서 전하시는 예수님의 고별메시지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4장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요약하면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됨을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은 다른 사복음서에서는 병행구절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록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메시지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곧 주의 만찬에서 이뤄졌다는데에 지지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이 만찬에 대한 아무런 명시 없이, 예수님의 떠나심(1-14)과 다시 오심(15-31)에 대한 설교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슬픔에 젖어 낙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임을 전달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충격과 절망으로 빠져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고자 이 고별메시지를 전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서언(1-3절)
요한복음 13장 36-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부정적인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모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근심에 싸여 있을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한글 성경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명령문으로 번역했으나, 일부 변역본에는 평서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나를 믿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헬라어는 평서문과 명령문의 형태가 같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해석은 가능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한글 성경과 같이 명령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을 일으키는 것은 임박해오는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떠나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이 땅에 자신들만이 남아 있다고 불안해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떠나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어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할 곳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네’는 통상적으로 대저택, 맨션(mansion)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흠정역이라 불리는 KJV(킹제임스버전)도 이를 맨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영어에서 맨션은 수수한 가옥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더구나 ‘모네'는 요한복음에서 ‘거주하다’, ‘머무르다’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동사인 ‘메네인’의 명사형으로써, 장소적인 '거처'나 '자리' 혹은 '지위'로 해석되는 것이 매끄럽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네’를 장소적인 의미보다는 ‘메네인’ 동사의 행동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거함’으로 보는 것과 이를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거할 곳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하늘에 대궐과 같은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해석은 적어도 이 본문을 예로 들어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로 해석된 헬라어 ‘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 곧 하늘의 거처, 천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이해로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저자들의 사고가 하나님의 거처로 불리는 성전은 교회 공동체와 일치할 뿐 아니라, 하늘의 거처, 곧 천국과도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구절의 의미는 성전의 성취인 교회 공동체와 성전의 원형인 하늘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많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절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신다’는 말에 의미 또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가신다’는 말씀은 이후에 ‘다시 와서 영접하여 데리고 갈 것이다’는 말씀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데에 큰 이견은 없으나, ‘다시 오심’에 대한 해석은 나뉩니다. 먼저, ‘다시오심’은 ‘부활'을 지칭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의 영접함은 부활 이후 교회에서 경험될 예수님과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상호 내주하시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시각은 ‘다시 오심’이 ‘성령의 오심’을 지칭한다는 의견입니다. 또한 이는 14장의 문맥 가운데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23절의 삼위일체의 내주에 대한 약속, 26절의 보혜사와 예수님과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의 교제를 하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의미한다는 3절 후반부의 약속도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다시 오심’은 ‘재림’을 지칭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종합하여, ‘다시 오심’이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오심, 재림을 종합적으로 지칭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록물들 안에서 한 단어를 이중적 혹은 다중적으로 자주 사용을 해왔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마지막 입장은 수용가능해 보이며, 학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전역을 함께 거닐었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과 숱한 식사를 함께 하며 교제하고, 예수님 사역의 현장에서는 신기한 이적들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기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행복을 주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고 싶지 않았던 주님의 손을 이제 놓으라고 주님꼐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만한 절망과 공허함은 이 세상에서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손을 놓아야만 더 큰 주님의 뜻이 펼쳐진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떠나가는 자리가 공허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더 큰 것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고별메시지를 통해 더 큰 소망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감으로써, 부가 더해지고 건강이 더해짐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는 이것이 다 빠진 공허함의 자리에서도 “나와의 교통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겠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리가 이 질문에도 “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신다면, 기꺼이 오늘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빠진 공허함의 자리를 하늘 소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4-14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도마는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고 묻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도 모를 뿐더러, 그곳에 가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었으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한 길이고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전체의 신학을 아우르는 가장 훌륭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 진리, 생명, 이 세 개의 용어들 중에서 강조점은 길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예비히신 곳으로 인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이요 계시자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와 비교가 안될만큼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곧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창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로써, 곧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 되었으며, 예수님을 본 것 또한 아버지를 본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를 자신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말씀한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의 모세도 하나님을 보고 싶었지만, 거절받아 제한적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출 33:18-23). 그런데 사실 빌립은 성육신하신 완전한 하나님을 이미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육신 하신 하니님, 곧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아주 단호한 어조로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 말씀해주셨습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직선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기독론, 곧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유능하고 똑똑한 랍비나 좋은 길로 인도해주는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으로써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10-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중첩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궁극적인 연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정당하게 권위를 부여받은 대사는 그를 보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와 같은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해석은 한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된 인격으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는 완전한 연합의 상태임을 암시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향한 위로에서 출발된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상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이제 제자들이 이어가라고 격려하며 말씀하십니다.
(12-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 안에서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는 제자들 안에서도 그 능력을 행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이라고 할 때, 신유나 축귀와 같은 기적을 생각하지만, 이는 그 의미를 축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행해 오셨던 일은 기적 뿐 아니라, 겸손, 섬김, 사랑까지도 행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것보다도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큰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 거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고 시작되는 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빠지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빠진 자리를 성령님께서 채워주시면 제자들의 사역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그들의 삶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 그들의 구함, 곧 기도 옆에서 그들과 함께 큰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신앙에 더하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뺄 것을 빼야 하고, 놓아야 할 것을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도 주님께서 놓으라는 타이밍에는 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을 요구하고, 어마어마한 용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버겁다고 느껴질 때에는 예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가 한가지 부족한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자 힘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이전과는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작은 변화를 통해 그보다 더 큰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가 더욱 새롭게 세워져가게 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에 대한 약속(15-26절)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준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만찬의 자리에서 하신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몇 시간 앞두고 온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주셨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 만찬의 현장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글로된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원칙은 문맥을 따라서 해석하는 것과 한 단어가 하나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과’는 ‘과일’을 뜻하기도 하지만,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 ‘눈’은 ‘보는 역할을 하는 신체 감각 기관’을 뜻하기도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얼음 결정체’를 뜻하기도 합니다.
영어단어에서도 ‘right’는 ‘왼쪽의 반대편인 오른쪽’을 뜻하기도 하고, ‘옳음’을 뜻하기도 하며, ‘권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ball’은 ‘공’을 뜻하기도 하지만, ‘무도회’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증거합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2:15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니 세상을 사랑해도 괜찮고, 사람은 피조물이니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의미이겠습니까? 둘 다 ‘세상(코스모스)’으로 같은 단어이지만, 요한복음의 ‘세상’은 ‘피조 세계’ 특히 ‘사람’을 가리킨다면, 요한일서는 ‘세속적 가치관’을 뜻합니다.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7:9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고 증거합니다. 하지만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계명(엔톨레)’이지만, 로마서의 계명은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의 계명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나 구절을 하나의 뜻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편협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계명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21절도 이렇게 증거합니다.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주님을 믿는다는 것,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바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감정의 변화나 화려한 말 잔치가 아니라 말씀을 따르는 행함으로 드러납니다. 즉 믿음은 혀끝에 있지 않고 손끝에 있습니다. 행함으로, 삶으로 믿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24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자녀가 부모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부모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것이 진실로 들리겠습니까? 자신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 가정이 변화되는 것, 사회가 이전과 달라지는 것은 오직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펼쳐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성령님)’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며, 그 보혜사를 통해서 영원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를 써서,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스승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 영어 성경에서는 ‘Counselor_상담자’, ‘Comforter_위로자’, ‘Helper_돕는분’ 등으로 번역합니다. ‘보혜사’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인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곁에서 위로하시고 돕는 분’입니다. 찬송가 가사로 말씀드리면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됩니다(292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보혜사’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청소기를 사러 상가에 갔다면, 어떤 청소기를 보고서, 또 보고 싶을 때, “다른 것도 좀 보여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때 ‘다른 것’ 역시, ‘청소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 말씀하심은 예수님도 ‘보혜사’이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가 어떤 분이신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또 2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우리 속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채우시고,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주님의 말씀 지킴을 통해서 주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우리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20)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이자,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이 정확하게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등극하시면 한자리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그들을 진리로 인도해 주셨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들이 주님 안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그들을 이전부터 주님께서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투옥하고, 고통을 주는데 선봉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뒤,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의 고백처럼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주님께서 자기를 품고 계셨으며, 또 에베소서 1장에서의 고백처럼 창세 전부터 주님께서 자기를 품고 계셨으며, 자기 속에 와 계셨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주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겼을 때 주님께서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으니, 어떻게 그 인생이 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품는 사람이 되고, 이 시간에 이렇게 주님의 존전에서 주님을 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이전에 이미 주님께서 당신 안에 우리를 있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평안 약속(27-31절)
27-31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안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을 헬라어로는 ‘에이레네(ει̕ρήνη)’라고 하는데, ‘평안’, ‘평화’, ‘화평’, ‘평강’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 평안을 가리켜, 평안인 것 같으나 결코 참된 평안일 수가 없는 세상의 평안과 구별하여 ‘나의 평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만이 참되고 영원한 평안이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평안, 세상의 평안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덧없는지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지고, 더 높은 자리에 앉고, 더 많이 누리면 평안할 것이며, 그 평안이 오래 갈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것 때문에 흔들리게 되며, “내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살았단 말인가?”하고 깊은 한숨이 쉬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평안’,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평안’만 영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그분의 말씀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여기에서 ‘갔다가 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본래 성자 하나님의 자리로 가시는 것임으로 제자들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안에 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말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0-31)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후로는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을 밝히셨습니다. 왜이었겠습니까? 계속 말씀만 하시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물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그동안 하신 모든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만약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라는 구체적인 삶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허언(虛言)되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은 남아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은 28절의 말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라는 말씀을 늘 신뢰하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만, 사람으로 계실 때는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하게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영원히 크시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땅보다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로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삶을 몇 시간 남겨 놓지 않으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라고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보혜사 성령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있으며,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은총은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보다 나를 더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그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보다, 그것 안에 있으면 나를 더 돋보이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주님의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며,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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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를 끝내신 후, 이제 예수님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근심하는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면서, 오늘 말씀 1절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마음속에 근심이 여전히 있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만 동시에 근심을 우리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근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2절과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과 지난 3년 동안 함께 동고동락 하시며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기에,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의심이 많았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그 목적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가시는 그 길을 어찌 알수있느냐고 대답을 합니다. 도마의 이러한 대답에 주님께서는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상대주의 또는 다원주의입니다. 즉,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며 상대방이 나와 다를 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고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물론 나와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하지만 진리와 생명이 걸린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떠나서 우리는 도무지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낯선 곳에 가서 길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 물어 본다고 해서 그 목적지를 한 번에 찾아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 두 번, 세 번 이상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못 찾는 경우도 있지요. 그렇게 헤매면서 어떤 사람에게 또 물어볼 때 그 사람이 “나를 따라 오세요.”라고 말하면 어떻습니까? 그냥 그 사람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우리 인생의 길과 진리와 생명에 있어서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과 진리와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저 예수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 자체이시고 진리 자체이시고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빌립은 예수님께 하나님을 한 번 보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하기에 아버지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은 동등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 되고, 아들이 행하는 것은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주님의 일이 우리의 일이 되고 우리의 행하는 일들이 주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도 하며 더 큰 일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도 역시 주님을 믿는 자들을 통해 행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유일하신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의탁할 때만 우리의 인생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영적인 시력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믿는 자들이 되기에,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어, 주님이 행하시는 일의 통로가 되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언제까지나 함께 계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제자들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모습이 영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말을 허투로 듣지 않고 그 말을 들어주고 시행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고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어떤 요구를 한다 해도, 어떤 허물이 있다 해도, 그 요구가 힘들거나, 어렵거나, 밉지 않습니다.
들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의 특징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고, 사랑하면서, 또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사랑의 의미와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 깊이를 알게 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 주님의 그 사랑, 그 깊이를 아직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되고 엎드리게 됩니다.
주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내어주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우리에게 예수님을 사랑하면 주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당부하신 예수님의 계명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내가 주님의 제자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하고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래서 그의 계명을 지켜서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6절 말씀대로, 다른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게 하시고, 그분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른 보혜사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령 하나님이시지요. 여기서 “다른”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그런 뜻입니다. 지금까지 보혜사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던 예수님이 이제 제자들을 떠나시게 됩니다.
이제 지금까지 제자들을 지켜주셨던 예수님은
체포당해야 하고, 십자가에 달려야 하고, 무덤에 들어가야 하고,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해야 합니다. 이제 잠시 후면 제자들이 지금까지처럼 주님과 함께 있을 수는 없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렇게 하시는 예수님도 마음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아직 너무나 믿음이 어리고 약한 믿음뿐인 제자들을 그냥 두고 떠나기가 너무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탁하시기를, 성령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로서 세상에 오셔서, 제자들과,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계시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오시는 성령님은 예수님처럼 제자들을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성령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볼 수도, 알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고, 귀 기울여 들으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생각을 속속들이 아시고, 나 자신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나의 생각, 나의 염려, 나의 불안, 나의 소망까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체적으로 도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성령님은 알고 계시고 인도하십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일이 있을 때 깨우쳐 주시고, 잘하고 있을 때 끊임없이 격려해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교만해지고 우리의 영이 죄로 인해 무뎌져서
성령님의 음성,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고 내 멋대로 하려고 해서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성령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상담자, 돕는 자,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때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며,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주시고 힘을 주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이신 것입니다.
에베소서5장18-21절에 보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과 술 취한 것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술 취한 것과 성령 충만한 것을 비교하는 이유는, 얼핏 보면 그 모습이 비슷합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흥분되고, 없었던 용기가 생기고, 말이 많아지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되고, 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평소의 내 모습과 전혀 다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를 하니까 어떤 사람들이 베드로가 술에 취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술 취한 것과 성령 충만한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자기를 잃어버립니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이 나가고, 그래서 다음 날에 자기가 뭘 했는지 기억도 못합니다.
하지만 성령 충만해지면, 자기 아닌 다른 것이 다 사라지고 온전하고 순결한 자기 자신을 회복하게 됩니다.
술 취해서 노래하면 가사도 꼬여서 지금 무슨 노래 부르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지만,
성령 충만해서 부르는 노래는 아주 맑은 정신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 지 분명히 알뿐만 아니라, 지극히 인격적이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지극히 명철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하게 되었다고 해서 나 자신이 사라지고, 내 마음과 내 뜻은 다 사라지고, 성령이 나를 조종해서, 내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움직이고,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나도 모르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나 자신, 원래의 나를 회복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성령께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시지 않고, 우리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게하시고, 우리가 정말 되고 싶은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보좌에 계시지만,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이 한 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20절 말씀처럼,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보는 것보다 더 기쁘고 가슴 설레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에 앞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원수를 사랑하라’ 거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내 옆에,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내 형제, 내 자매, 내 이웃이 나와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고 ,돌보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죽을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사랑의 은혜와 평안이 우리의 평생 살 동안, 우리 삶 가운데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