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 어
- 심인숙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다닥다닥 붙어사는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한다. 청상과부 선아 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이다.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던 여인들.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고 있다.
빨랫줄에 걸린 이불호청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 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 2006년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시집 『파랑도에 빠지다』(푸른사상, 2011)
* 심인숙 : 1957년 인천 출생.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및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06년 <전북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숭어'가 당선, 2006년 <문학사상>에 '파랑도에 빠지다' 외 4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파랑도에 빠지다』가 있다.
<전북중앙신문 2006년 신춘문예 시 심사평>
삶의 단편 생생한 이미지로 형상화
287편의 응모시 중 여덟 분의 작품이, 72편의 시조 중 일곱 분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모든 작품들이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어 이들 중 한 작품만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신문사측에서 당선작을 뽑아 통보할 때까지 응모자의 이름은 물론 성별, 직업, 나이 등 어떠한 정보도 일체 제공하지 않아 작가와 작품세계와의 최소한의 상관관계 조차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다.
문학이 상상력의 소산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특히 시에 있어서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녹아들기 마련인지라 과연 소중한 작품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방침이 그러한지라 오직 응모된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작품의 구조, 시적 형상화, 어휘 구사력 등 작품의 철저한 해부와 분석에 치중하게 되었다. 작가에 대한 이해는 없었으나 어떠한 예단이나 선입견 없이 작품에만 매달렸음으로 오히려 개운한 느낌도 든다.
이미 말한 것처럼 예심을 거쳐 온 모든 작품들이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어 장고를 거듭해야만 했다. 시조 부문에서 정행년씨의 ‘바다, 숨 고르다’와 송필국씨의 ‘현애’ 등은 오래 시선을 머물게 한 작품이었으며 김자연·황호정·박선양씨의 작품들도 기성작가 못지않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바다, 숨 고르다’에서 “지난 밤 그 상머리 기름진 언어들도/ 월포리 산자락 끝에 변명처럼 스러진다”는 절창이었다.
시 부문에서는 ‘숭어’·‘달의 각’ 등을 응모한 심인숙씨, ‘덕지덕지’·‘청개구리’ 등을 응모한 임상훈씨, ‘염전여자’·‘숯 굽는 마을’ 등을 응모한 김민규씨, ‘가면의 표정’·‘산티아고의 바다’ 등을 응모한 이현수씨, ‘농경’·‘패랭이꽃’ 등을 응모한 한인숙씨 등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빼어난 시적 직관력과 상상력을 전개하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숭어’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숭어’는 한마디로 읽히는 작품이다. 어떠한 이념의 색깔이 칠해지지 않은 싱싱하고 질박한 삶의 단편이 선명한 이미지로 생명감 넘치게 재현되고 있다.
시 구조도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어 시적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한 구체적 순간을 예민한 감각과 관찰로 포착하여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작가의 능력에 기인한다. 비록 신산한 삶이지만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의 담을 넘는 웃음소리는 우리에게 건강한 관능과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여인들을 비유하는 '숭어'는 물론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 여러 비유들도 능숙한 솜씨다. 작가의 다른 작품 ‘달의 각’도 만만치 않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부대낄 수밖에 없는 삶이지만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 속에서 존재의 가치를 캐내는 역동적인 시를 계속 기대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기회를 놓친 분들께는 격려를 보낸다.
호병탁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정순량 시조시인·우석대 대학원장
김영 시인·호원대 겸임교수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면 심인숙 시인의 '숭어'라는 시가 재미있게 읽힐 것이다.
어려운 낱말 없이 자연스럽게 써내려간 시의 흐름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곱게 채색을 하듯 그려낸 문장들이 한층 시의 맛을 돋운다. "한밤, 봉숭아꽃 가득한 마당에서 숭어들이 튄다." 는 표현도 기발하지만 3연의 "빨랫줄에 걸린 이불호청 사이로 달빛이 든다.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다. 좁은 수돗가에서 미끈한 숭어들이 비늘을 떼고 있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저절로 한숨 같은 비음이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깔깔,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고 있다."는 표현도 아주 뛰어나다. 시골마을에선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남자들은 모여서 가까운 강으로 고기를 잡으러 가는데 펄쩍펄쩍 뛰는 매끈한 잉어나 붕어, 가물치 등을 잡아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숭어는 바다에서 살지만 떼로 몰려다니는 걸 잡아본 사람들은 흰비늘 반짝이는 매끈한 모양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숭어로 표현된 그 사람들은 서민들이다. 날품팔이 하는 사람들이다. 농촌이 지금처럼 쓸쓸해지기 전엔 여름이면 일부러 찬물을 맞으러 가기도 하고 집안에 샘이 없어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샘에 가서 물을 끼얹기도 했다. 남자들은 아무데서나 등목을 하는 편이었지만 여자들은 남정네들 눈을 피해 밤에 이집 저집 서로 불러내 동네 샘으로 가서 서로 물을 끼얹거나 가까운 계곡으로 가서 물을 끼얹기도 했다. 더위를 견디는 방법이기도 하고 목욕탕이 없어 몸을 정갈하게 씻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는 마을 사랑방에 모인 장난끼 많은 남정네들이 소리없이 샘 근처로 다가가 구경도 하고 깜짝 놀라게 하려고 등목하는 사람들 근처에 나무막대기나 작은 돌멩이를 던지기도 놀라게 하는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러다 이를 알아챈 등목하는 여자들은 대야며 바가지로 물을 퍼서 근처 남정네들 숨어 있을만한 곳을 향해 물폭탄을 퍼붓기도 했다. 시골 사람들만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 마을을 일기장 넘기듯 그려보았다.
여름날 떠올릴 수 있는 좋은 풍경의 시다. 벌써 올 여름도 폭염과 폭우 속에 다 가고 가을이라고 방에 들어온 귀뚜라미며 창문 너머 언덕에서 곤충들 우는 소리가 다정하다. 그 작은 생명들도 가야할 때를 알고 짝을 찾는 구애의 노래를 합창한다. 세월 참 빠르다.
김기홍 시인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심인숙 시인의 시세계는 상상력이 역동적으로 발휘한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이는 기계론과 대비되는 것으로 이 세계와 생명들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부정하기보다 긍정하는 것으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력은 자유와 동의어가 된다. 정적(靜的)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의 상상력은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지만 삶을 강렬하게 이끄는 힘을 지닌다. 더욱이 시인의 상상력은 여성성을 띠는 의식이기에 주목된다.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시인에게는 자기 인식의 심화가 중요하다. 자기 인식이란 한 인간 존재로서 자신의 운명과 삶의 의미에 열중하는 것이다. 상상력이란 이성과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인식의 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협력하여 삶의 실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상상력의 의미는 자신의 현재 삶을 극복하기 위한 의식이다. 다시 말해 여성에게 요구되는 일생에 갇히지 않기 위한, 스스로 순응하는 여성이 되지 않기 위한 행동의 추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상상력은 어떤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뿌리가 튼튼한 실재의 산물이다.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여성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면을 다음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숭어」 전문 (위 표제시 참조) ―
한밤에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을 선명하게 그린 수작이다. 그 여인들이란 “청상과부 선아엄마, 집 나간 서방을 기다리는 애경엄마, 그냥 이모라 불리던 사투리 걸쭉한 부안댁이다.” 그녀들은 “아침이면 식당이나 병원, 공사판으로 마른 꽃씨처럼 흩어졌다가 밤이 되면” 돌아온다. 따라서 그녀들의 일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어 귀가할 즈음에는 지쳐 있는 상태이다. 그러한데도 시인은 그녀들을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오는 여인들”로, 그녀들의 목욕하는 모습도 “한바탕 얘기꽃을 피우며 한 겹씩 옷을 벗”는다고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시인의 여성 인식을 읽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집안 살림이며 관습에 얽매여 있는 여성의 삶을 극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의식을 통해 그 극복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목표를 “숭어들이 별빛을 따라 밤하늘을 헤엄치”는 상상력으로써 지향하고 있다. 결국 여성성을 사회학적 관점에 국한되지 않는 시인의 관점으로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신춘문예에 유감을 표한다
전북중앙신문이란 지방지가 있는지 몰랐는데 그런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전체 4개 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산문시이면서도 그 나름의 리듬을 타면서 전개된다. 가난한 셋방 여인들이 마당 수돗가에서 목욕을 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을 뿐 별다른 내용은 없다. 그런데 장면 묘사가 진부하지 않게끔 심인숙 씨는 특별한 장치를 했다. 달빛에 드러난 세 여인의 몸을 미끈한 숭어에 비유한 것이 그것이다. 세 여인은 모두 식당과 병원, 공사판에 나가 밥벌이를 해야만 한다. 이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이들의 젊은 나이와 육체적 건강함이다. 그런데 한 명은 청상과부이고 다른 한 명은 서방이 집을 나가버렸다. 찬물을 끼얹을 때마다 이들이 내는 한숨 같은 비음이 암시하는 것은 이들 육체의 건강함과 이성에 대한 성적 갈망일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고 했으니, 제1연과 짝을 이룬 멋진 마무리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밤이 되면 물오른 입을 들고 돌아와 한바탕 얘기꽃을 피운다던가, 보초 세운 어둠이 슬쩍 돌아서 있던가, 또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허공을 질러 담을 넘어간다던가 ?! 求? 표현이 이 시를 잘 살려주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시작하여 시 전체가 메타포로 되어 있는 것도 장점이며, 생활에 찌들지 않은 이들의 밝은 웃음에 내일의 희망을 걸어본 주제의식도 이 시가 갖고 있는 미덕이다. 그런데 기왕 “사투리 걸죽한 부안댁”을 등장시켰으니 그 걸죽한 사투리를 한두 마디 들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 ‘신춘문예에 유감을 표한다’ 부분
임용순의 하욕소성(夏浴笑聲)
첫댓글 이불 호청을 걸어놨으니 담 밖에서는
볼 수가 없을 테고 혹 그냥 소리로만
들을 수 있으려나.
가까운 일상을 통해 삶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읽기 편한 시 같습니다.
몰래 숨어든 달의 이마가
붉게 물들었다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시어를
떠 올릴 수 있을까요.
좋은시를 읽게 해 주신
즈런나모님 감사합니다👍
그 하욕소성(夏浴笑聲)의 '한숨같은 비음'과..
'지느러미처럼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립니까..?
소리뿐이 아니라.. 붉게 물든 '달의 이마'에 곁들여..
나 또한 '몰래 숨어든' 것 같은 착각이 드네요..
ㅋ ~ㅋ 즈런나모님 의 댓글이
일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