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고향이 무엇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고향은 향수로 다가온다. 나의 경우 그 향수의 중심에는 항상 덕천강이 자리 잡고 있다. 덕천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하여 산청군 시천면, 하동군 옥종면, 진양군 수곡면, 사천군 곤명면을 거쳐 진양호에서 경호강과 합류하여 남강이 된다.
나의 유년시절을 되돌아보면 그 강에서 멱을 감고, 수박을 따서 던져 놓았다가 먹기도 하고, 고기를 잡고, 다슬기도 잡고, 고무신도 떠내려 보내기도 했다.
여름철이 되면 동네 청년들이 어른들을 모셔 놓고 회식을 시켜 드리기 위해 눈부시게 빛나는 모래밭 옆 버드나무 그늘아래 솥단지를 걸어 한쪽에서는 밥을 짓고, 다른 한 쪽에서는 강에서 잡아온 고기로 회를 뜨고, 매운탕도 끓여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 공경의 마음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했다.
고기를 많이 잡기 위해서 오리모양을 본 뜬 긴 그물 양쪽을 잡고 강을 가로 질러 고기를 한쪽으로 몰면 투망을 던져 고기를 잡았는데 그물을 한번 칠 때마다 고기가 그물에 가득하곤 했다. 잡히는 고기 종류도 다양했다. 꺾지, 누치, 쏘가리, 잉어, 붕어, 모래 무지, 은어, 동사리, 납자루, 메기가 주로 잡혔다. 우리 큰 형님은 정말로 고기를 잘 잡았다. 투망질은 말할 것도 없고, 반두로 강바닥이나 돌에 몸을 숨긴 고기도 잘 찾아내 잡았다. 메기와 장어는 주로 큰 돌을 지렛대로 움직여 탈출할 길목에 반두를 대어 놓고 들어오는 순간 잽싸게 들어 올려 잡았다. 큰 민물장어의 힘은 대단했다. 그 당시만 해도 고기를 잡으면 주로 동네 어른들에게 선물을 많이 했다.
두인 보 밑은 고기잡이의 보고였다. 여름철 비가 온 뒤에 은어가 뛰어 오르는 습성을 이용하여 쪽대를 만들어 바쳐 두면 은어가 보위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뛰어 오르다가 그 속에 담긴다. 힘들이지 않고 고급 어종을 쉽게 잡았다. 또 보 밑의 평평한 지점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모여 노닐었다. 반두를 물길 따라 앞쪽으로 밀고가면 고기가 잡힌다, 그렇게 잡은 고기는 비교적 씨알이 작았다. 요즈음 잣대로 보면 귀한 어종이지만 그때만 해도 흔했기에 작은 고기는 닭 모이로도 사용했다. 큰 비가 내려 물이 흙탕물로 변하면 물고기는 유속이 느린 강의 가장자리로 몰리게 되는 습성을 이용하여 반두를 이용하여 잡았다. 이때 잡힌 고기는 비교적 씨알이 굵다.
남명 조식 선생님이 지으신 '頭流山歌'란 시조가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와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이야 무릉이 어딘가 하니 그가 옌가 하노라
두류산은 지리산이고 양단수는 지리산 중산리에서 흐르는 물과 대원사 계곡에서 흐른 물이 덕산에서 합쳐져 덕천강을 만든다는 의미다.
덕천강 유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객지로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덕천강은 역시 모성의 탯줄과 같다. 그때의 강변 모습은 남강댐 담수로 인하여 찾을 수 없어도 강에 대한 정겨움은 그대로다.
강물은 늙지도 않고 말수도 없다. 모든 삶의 아픈 역사를 품고 유유히 그대로 흐르고 있다. 다만 강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만 바뀔 뿐이다.
앞으로도 이 강물은 과거와 현재를 가로 질러 수수천년 미래로 흘러가면서 역사를 만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