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기범 선배님에 대해서…. 창희 씨는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
서지은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 놓고도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회사 옥상 위 - 나는 분홍색 선물 상자를 손에 든 채 멀뚱하게 서지은을 쳐다보았다. 윤은선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비밀을 지켜 준 감사 표시로 그녀가 선물한 넥타이였다. 한데 아침 나절 그녀는 그 물건을 두고 최기범과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는 그 일에 관해 영문을 물었다가 의외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대신해 내가 입을 열었다.
“알 것 같아요. 최기범 선배가 우리 부서로 자리를 옮긴 건 지은 씨 때문인가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범 선배가 지은 씨를 좋아하는 거죠?”
좋아한다, 라는 단어에 흠칫거린 서지은은 쑥스럽다는 양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대충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녀가 몰래 준비해 온 넥타이 선물을, 기범 선배가 우연히 목격한 뒤 꼬치꼬치 캐물었으리라. 그러다 당사자인 내가 등장하자 서로 곤란해진 것일 테고.
“사실 이번에 은선 선배를 만났을 때, 지은 씨 얘기를 들었거든요.”
“제 얘기를요…?”
“네. 은선 선배가 누가 자기 후임이 됐냐고 묻길래 기범 선배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럴 줄 알았다면서, 자세한 건 지은 씨한테 직접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그랬다. 최기범은 본디 상품기획1팀 소속이었으나 퇴사한 윤은선 대신 자진해서 우리 2팀으로 온 사람이다.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주에 우리가 오늘처럼 이렇게 옥상 흡연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기범 선배가 불쑥 나타나 서지은과 함께 있는 나한테 공연히 시비를 건 적이 있다. 나는 어색함을 피하려고 멋쩍게 웃었다.
“저도 대충 눈치는 챘어요. 기범 선배가 회식 자리에서도 일부러 지은 씨 옆에만 골라 앉고…. 혹시 두 분이 정식으로 사귀시는 거예요?”
그러자 서지은이 화들짝 정색을 해 댔다.
“아, 아뇨. 오래 전에 고백을 받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사이는 전혀 아니에요.”
“그럼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가령 기범 선배 마음은 알지만 지은 씨는 싫다거나요.”
“그, 그렇진 않지만….”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사귀지는 않는데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라니.
“왜요? 최기범 선배는 일솜씨도 꼼꼼하고, 사무실에서는 다들 엘리트로 인정하는 분이잖아요?”
게다가 그는 S 대 출신으로 학벌까지 좋다. 그러나 서지은은 이마를 찡그린 채 씁쓸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우리 회사 건물이 비교적 나지막한 탓에, 강남역 주변의 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장면이 바라다보였다. 그녀가 뭔가를 결심한 듯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그래서예요. 만약 원래대로라면, 저 같은 애는 대영그룹에 들어온다는 건 꿈도 못 꿨을 테니까요.”
“꿈도 못 꾸다니, 무슨 소리죠?”
“저는 지방에서 학교를 졸업했거든요. 그것도 야간으로요. 정식으로 입사하려고 했다면 서류전형도 통과하지 못했을…. 그런 제가 어떻게 대영섬유에, 로자미아코리아에 다니게 됐는지 아세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군인이셨어요. 부사관으로 근무하셨는데 몇 해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저는 국가유공자 자녀 특례로 취직이 된 거예요. 저희 집에는 어머니밖에 안 계시고, 제 밑으로는 아직도 학생인 동생들이 둘이나 있구요.”
나는 멍하니 말문을 잃었다. 우리 부서 정직원들 중의 막내인 서지은은 나보다 2년이나 먼저 입사했지만, 나이로 따지면 거꾸로 내가 두 살 위였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정말로 나를 오빠뻘로 여긴 것일까. 기왕 남모를 비밀까지 공유했으니 그녀는 나한테만은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듯했다.
그제야 윤은선이 나에게 한 부탁을 상기했다 - 지은 씨는 사연이 많은 친구니까 다치지 않게 해 줘.
“기범 선배님은 아직 그런 제 사정을 잘 모르세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괜한 콤플렉스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저는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별 볼일 없는 여자 애인 걸요.”
“자, 잠깐만요. 그래서 그동안 최기범 선배한테도 아무 말도 못했다는 거예요, 지은 씨?”
서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옳지 않아요. 지은 씨는 예뻐요. 제가 보기엔 분명 여자로서의 매력도 많구요.”
해 놓고 보니 마치 여동생을 애써 달래는 듯한 말투 같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귀밑을 붉힌 그녀가 한참 만에야 대꾸했다.
“고….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단순히 외모만 본다면 서지은은 주근깨 난 얼굴에 여린 눈망울을 지닌, 평범한 체구와 몸매의 아가씨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용하고 여자다운 성격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 진심이 제삼자에게 오해를 받게 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은 또 있었다.
다음날 오후에 나는 신명숙 이사의 호출을 받았다. 이사실에서 일개 인턴 따위를 부르다니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갔을 때 신명숙 이사는 책상에 앉아 결재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녀가 로자미아코리아 사업부 총괄이사 신명숙, 이라고 적힌 명판 너머에서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커다란 소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거의 10분쯤은 그렇게 부동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다 행여 나라는 놈을 까먹은 게 아닐까 슬슬 의구심이 들 무렵에, 신명숙 이사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여직원이 차를 내왔다.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 알아, 한창희 씨?”
“모, 모르겠습니다. 이사님.”
긴장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신명숙 이사는 친근한 말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위엄이나 우아함이 몸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엊그제도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같이 했지만, 그때는 정혜경 과장도 함께 있었다. 신명숙 이사와 독대하는 자리는 신입 인턴 면담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리 회사는 이제부터 한창희 씨와 계약 관계를 끝내기로 했어. 창희 씨는 더 이상 우리 회사 인턴이 아니야.”
내 눈이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인턴사원이 계약직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네? 그, 그렇다면….”
신명숙 이사가 탁상 달력을 흘끔 들여다보더니 말허리를 잘랐다.
“정기 인사 이동 발표는 다음달이라서, 아마 정식 발령 날짜는 며칠 뒤일 거야. 정직원으로 입사하게 된 걸 환영해, 한창희 씨.”
정직원? 나는 두 번째로 휘둥그레졌다.
“물론 원칙대로라면 2년 안에 채용 시험을 통과하는 게 기본 조건이었지. 하지만 지난번에 사내 표창도 받았고, 그래서 내가 본사에 직접 추천했어.”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창희 씨를 정직원으로 뽑기로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야. 하나는 내 앞에서도 입을 다물 만큼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알다시피 이번 일 덕분이지. 사실대로 말할까? 만약 이번에 사업계획서를 회수하지 못했다면, 우리 회사는 엄청나게 곤란해졌을 거야. 어쩌면 라이선스 사업권까지 오락가락했을지도 모르고….”
과연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신명숙 이사의 말을 몇 마디 놓치기까지 했다.
“죄, 죄송합니다. 방금 전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
“뭘 하고 싶으냐고 물었어, 한창희 씨. 정혜경 팀장에게도 얘기해 뒀으니까, 미리 축하할 겸 회식이라도 하겠냐고 말이야.”
시원하게 뚫린 창밖으로 화창한 하늘이 보였다. 나는 정혜경 과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지은도 떠올렸다.
“저, 그렇다면 외람되지만….”
내 얘기를 듣고 난 신명숙 이사가 빙그레 웃었다.
“후후후, 엉뚱하군. 나라면 거하게 먹고 마실 생각부터 했을 것 같은데. 이것도 한창희 씨의 배짱인가? 좋아. 그동안 다들 고생했으니 야유회라면 기분 전환도 될 테고, 허가하도록 하지.”
*******
오동호 대리도 신명숙 이사와 똑같은 말을 했다.
“허…. 이거 아까운 걸. 갈빗집도 있고 횟집도 있고, 이사님이 회식비까지 내신다는데 좀 더 화끈하게 놀아도 되는 거잖아, 미스터 한?”
“왜요? 간만에 바람도 쐬고 좋은데요, 뭘. 그쵸, 팀장님?”
서지은이 정혜경 과장의 팔짱을 붙든 채 재잘거렸다. 그녀의 변호에 오 대리도 마지못해 피식 웃고 말았다.
잠실 한강 둔치였다. 회사 앞에서 그곳까지 택시를 타고 왔어도 시계는 아직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거나한 술자리 대신 신명숙 이사에게 허락을 얻어 낸 것은, 우리 사무실 전원의 조퇴였다.
말하자면 야유회라기보다는 간단한 소풍인 셈이었다. 우리는 한강시민공원 잔디밭의 매점에서 돗자리를 빌렸다. 안주 거리와 맥주 따위는 주문만 하면 매점 직원이 알아서 가져다주었다.
“자, 미스터 한의 정직원 입사를 축하하며!”
오동호 대리의 주창에 캔맥주로 건배를 했다. 서지은이 있어서인지 최기범 선배조차도 밝은 표정이었다. 내 제안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순전히 즉흥적인 발상이었고, 며칠씩 야근을 하던 정혜경 과장의 모습에 그저 하루쯤 이런 날은 어떨까 생각했을 뿐이었다.
“기분이 어때요, 창희 씨?”
고개를 돌렸다. 정혜경 과장이 옆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 운이 좋은 것 같아서….”
“운이 아니에요. 엄연히 창희 씨 능력 덕분이죠.”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문질렀다. 치마 아래로 뽀얗게 드러나 있는 정혜경 과장의 무릎과 종아리가 눈에 띄었다. 서지은은 바지 정장을 입었지만 그녀는 알록달록한 플레어스커트 차림이었다. 강바람이 불어왔다. 하늘거리는 치맛자락 속에서 커피색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윤기가 흐르듯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저, 이걸 덮으세요, 팀장님.”
나는 재킷을 벗어 정혜경 과장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 그녀가 다리를 가리자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그녀에게 묻고 싶은 일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입을 열 수 없었다. 뭐 나중에 천천히 물어봐도 괜찮겠지.
“그나저나 미스터 한, 이사님한테 희망 부서는 말씀 드렸나?”
오 대리였다. 서지은이 물었다.
“희망 부서라뇨?”
“몰라서 그래? 정직원 교육을 받고 나면 경우에 따라선 다른 데로 발령을 받을 수도 있다구. 신명숙 이사님이 그런 건 묻지 않으셨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모아졌다.
“어…. 실은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그냥 있겠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 로자미아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고요.”
나는 무의식중에 정혜경 과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대편에서 최기범 선배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