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9장 김대건 신부의 활동과 순교
09.1 출생과 그의 가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은 1821년 충청도 솔뫼(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과 고(高) 우르술라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이었다. 그의 출생일은 8월 21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은 피숑(L. Pichon, 宋世興, 1893~1945) 신부의 저서인 《조선성교사료》(朝鮮聖敎史料, Pro Corea Documenta, 1938)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생일을 8월 21일이라 단언하기는 어렵다.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기 전까지 김대건이 어떻게 성장하였는지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집안은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靑坡, 지금의 서울 용산구 청파동)로 이주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시 경기도 용인(龍仁)의 한덕동(寒德洞,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4리)을 거쳐 골배마실(지금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는 점이 확인된다. 이처럼 여러 곳을 전전하였고, 김제준이 농사로 생계를 이어 갔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김대건1)은 그리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1)김대건 신부의 출생지: 최근에는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가 솔뫼가 아니라 용인 굴암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집안은 솔뫼에서 서울 청파동을 거쳐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기 전에 굴암으로 옮겼으며, 1839년 김제준이 순교한 후에 골배마실로 이사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하성래, <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교회사연구》23,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김대건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집안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종조부(從祖父)인 김종현(金淙鉉)이었다. 그의 선교로 동생들인 김택현(金澤鉉)·김종한(金宗漢, 즉 漢鉉, 안드레아, ?~)·김희현(金僖鉉 , 루도비코)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8~1814)는 천주교 신앙을 외면하다가 아들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자 그도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렇게 김대건의 집안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인근 지역에 살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2~1801)의 선교를 통해서였다. 여기에 조부인 김택현이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와 혼인함으로써 김대건 집안의 신앙은 더욱 깊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집안의 신앙은 김대건의 아버지인 김제준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큰아버지인 김종현의 가르침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한때 신앙생활을 멀리한 적도 있었지만, 정하상의 인도로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있는 정하상의 집에 찾아가 모방 신부를 만난 뒤 세례를 받았다.
김대건의 집안은 이처럼 신앙이 깊었던 만큼 큰 시련도 겪어야 했다. 먼저 증조부인 김진후가 1814년 10월 20일(음) 해미에서 옥사(獄死)하였다. 종조부인 김종한은 솔뫼에서 경상도 영양의 우련밭(지금의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피해 살다가 그곳에서 1815년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다음해 11월 8일(음) 대구 감영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또한 아버지인 김제준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8월 19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당고모인 김 데레사(김종한의 딸)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2월 5일(음) 포도청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김대건 자신도 신부가 된 이듬해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이후에도 당숙인 김명집(金明集, 루도비코)과 재당숙 김제교(金濟敎)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사촌인 김 베드로는 1867년에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김 베드로의 동생인 김 프란치스코도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김대건 집안에서는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이러한 집안의 신앙과 순교 전통은 김대건이 사제가 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09.2 신학생 선발과 마카오 유학
1) 신학생 선발
성가정 안에서 신앙을 키워 나가던 김대건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은 1836년의 일이었다. 그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 축일을 지내고, 경기도와 충청도의 교우촌 16~17곳을 방문하는 등 사목 활동에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처럼 사목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신학생을 선발하고자 지도층 신자들에게 신학생이 될 소양을 갖춘 소년들을 추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골배마실에 있는 김제준의 집을 방문한 모방 신부는 그의 아들 김대건을 본 뒤 신학생으로 선발하였다. 김대건은 7월 11일 서울에 있는 모방 신부의 거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앞서 선발된 2명의 소년들이 있었는데, 2월 6일 도착한 최양업과 3월 14일에 도착한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20?~1837)였다. 그들을 모방 신부로부터 라틴어를 배웠고, 한 달이 지나면서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뒤늦게 선발된 김대건은 그들보다 4개월 혹은 5개월 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다.
1836년 12월, 모방 신부는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르그레즈와(P.L. Legregeois, 1801~1866) 신부와 이전에 약속한 대로 신학생들을 극동 대표부로 보내려 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는 박해의 위험으로 신학교를 설립하여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에 입국하기에 앞서 브뤼기에르(B. Bruguiere, 1792~1835) 주교와 의논하여 조선과 가까운 요동(遼東)에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구상하였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모방 신부는 신학생들을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고,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적절한 장소에 신학교를 세워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모방 신부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공부를 시작한 지 갓 5개월밖에 되지 않은 김대건을 보낼 것인가의 여부였다. 하지만 앞으로 보낼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김대건을 다른 2명과 함께 마카오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1836년 12월 2일 김대건을 포함한 세 명의 신학생들은 조선 선교지의 장상들에게 순명하고 복종할 것과, 조선 선교지의 장상에게 신청하여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수도회나 선교회에 들어가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그렇게 한 후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 파치피코(宗恒德, 1795~1854) 신부와, 안내자들인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조신철·이광렬(李光烈, 요한, 1795~1839) 등의 인도를 받으며 떠났다. 변문에 도착한 후, 안내자들은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 신부를 맞이하여 서울로 돌아왔고,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변문까지 안내한 중국인들을 따라 마카오로 떠났다. 그들은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2) 신학교 생활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는 조선의 신학생들을 동양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페낭 신학교로 보내지 않고, 대표부 내에 신학교를 임시로 세워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는 페낭 신학교 안에 파벌과 교만과 비판 정신이 유행하고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떠나 조선 입국로를 탐색할 때까지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신학생들의 교육은 대표부에 머물고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하였다. 신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 신부들로는 르그레즈와·칼르리(J.M. Callery, 1810~1862)·리브와(N. Libois, 1805~1872)·데플레슈(E.J.C. Desfleches, 1814~1887)·메스트르(J.A. Maistre, 李, 1808~1857)·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1814~1866) 신부 등이었다. 신학생들은 스승 신부들로부터 라틴어·성가·교리·프랑스어·철학 등을 배웠다. 이들 가운데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는 차례로 극동 대표부 대표를 맡았고, 칼르리 신부는 신학교 교장 신부였으며, 메스트르 신부와 베르뇌 신부는 이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여러 선교사들이 수시로 바뀌면서 교육을 맡게 됨으로써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또한 신학생들은 대표부의 지하실과 주방의 일을 하고, 매일 경리 장부를 작성하는 등 여러 잡일까지 맡아 신학 공부에 지장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도 김대건을 비롯한 세 명의 신학생들은 신학교 생활에 충실하였는데, 칼르리 신부의 서한에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금년에 모방 신부가 이곳으로 보냈고, 르그레즈와 신부가 그 교육을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3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겸손·면학심·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데 위로를 주고 그 수고를 보상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나는 벌써 조선말을 좀 합니다. 얼마 안 가서 모든 것이 잘될 것으로 기대합니다(<칼르리 신부가 트송 신부에게 보낸 1837년 10월 6일자 서한>).
신학생들 가운데서도 스승 신부들로부터 가장 촉망을 받았던 신학생은 최방제였다. 그는 믿음과 신심이 가장 깊어 주위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라틴어 공부도 스승 신부가 만족해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방제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할지 6개월도 되기 전에 위열병(胃熱病)에 걸려 1837년 11월 27일에 사망하고 말았다. 가장 기대를 받던 최방제의 죽음은 스승 신부들을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최방제가 사제의 꿈을 펴 보지도 못하고 사망하였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1839년 광동과 마카오에서 아편 거래 문제로 소요가 일어나 안전이 위협받게 되자, 르그레즈와 신부는 신학생들과 선교사들에게 필리핀으로 피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김대건은 최양업·리브와·칼르리·테플레슈 신부 등과 함께 4월 6일 마카오를 떠나 4월 19일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5월 3일에는 도미니코 수도회 참사회의 호의로 롤롬보이(Lolomboy)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 생활하게 되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 수도원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조선의 밀사 유진길과 조신철이 북경에서 보낸 1839년 3월 10일자(혹은 3월 11일자) 서한 1통을 받아 조선교회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롤롬보이 수도원에서 선교사들과 최양업은 잘 지냈지만, 김대건만은 예외였다. 김대건은 여러 질병에 시달려 스승 신부들의 근심을 샀다. 이미 마카오에 있을 때부터 복통·두통·요통에 시달렸던 김대건은 머리카락이 회색과 흰색으로 바뀔 정도로 병약해졌다. 이는 최양업이 건강하여 장차 조선 교회를 위해 유익한 몸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던 것과 대비되었다. 게다가 김대건은 판단이 늘 좋지는 않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로 인해 데플레슈 신부는 난처해하였고, 리브와 신부는 김대건과 최양업 사이에 도무지 균형이 없다고 푸념하였다. 김대건은 1839년 9월경에 이르러서는 건강이 좀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마카오에서의 소요가 진정됨에 따라 김대건과 최양업은 1839년 11월에 마카오로 귀환하였다.
09.3 조선 입국로의 개척
1) 에리곤 호 승선과 조선 입국 시도
김대건과 최양업은 마카오에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여 1841년 11월경 철학 과정을 이수하고 신학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42년 2월 프랑스 극동함대의 세실(Jean-Baptiste Thomas Medee Cecille, 1787~1873) 함장이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로 찾아와, 조선으로 가서 조선 국왕에게 교역을 제의할 것이라고 하면서 통역을 위해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극동 대표부에서는 1839년부터 몇 년째 소식이 끊긴 조선 선교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수집하고, 비밀리에 선교사를 입국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메스트르 신부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메스트르 신부가 동행할 신학생으로 김대건을 지목함에 따라 김대건은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세실 함장이 이끄는 에리곤(L’Erigon) 호에 승선하였다. 이로써 김대건의 신학교 생활은 끝났고, 최양업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에리곤 호에 승선한 후에 에리곤 호의 의사로부터 치료를 받아 건강이 크게 호전되었다.
에리곤 호는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1842년 2월 15일 마카오를 출항하여 2월 20일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주교관에서 묵기도 하고, 라트랑의 성 요한(Saint Jean de Latran) 학교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필요한 물품을 장만하고 출항 준비를 마친 에리곤 호는 4월 20일 북상하여 대만(臺灣)을 거쳐 5월 11일 항주만(杭州灣) 앞바다에 있는 주산도(舟山島)에 입항하여 6월 21일까지 체류하였다. 영국인들이 남경(南京)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자, 에리곤 호도 그들을 따라 주산도를 떠나 양자강(楊子江) 하구를 거쳐 오송구(吳淞口)에 도착하였다. 에리곤 호가 오송구에 정박해 있는 동안, 8월 13일경 세실 함장 일행이 중국 배 한 척을 빌려 남경으로 향하자, 김대건은 통역을 위해 그들과 동행하였다. 이러한 여정으로 김대건은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남경 시가지가 파괴된 모습을 목격하였고, 중국인들이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강화를 요청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남경에 도착한 김대건은 8월 29일 영국과 청나라 간에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는 장면을 참관하였고, 세실 함장 일행이 강화조약에 조인한 중국인 고관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통역관으로 함께 하였다.
에리곤 호로 돌아온 김대건은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la Favorite) 호를 타고 8월 23일 오송구에 도착한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Maxime Brulley de la Bruniere, 寶, 1816~1846) 신부, 최양업 일행과 조우하였다.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1842년 7월 파보리트 호가 요동 해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승선하여 마카오를 떠나 오송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러나 파보리트 호가 당초의 계획대로 요동으로 향하지 않고 진로를 바꿈에 따라 8월 27일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하선해서 메스트르 신부와 합류하였다.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동행한 중국인 신학생 범(范) 요한을 상해에 있는 산동 대목구장이자 남경 교구장인 서리인 베시(L.T. de Besi, 羅類思) 주교에게 보냈다. 그러나 범 요한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9월 10일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김대건 일행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있던 비신자 황세흥(黃世興)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예정대로 에리곤 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신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으로의 항해를 망설였다. 그리고 조선으로 출발하더라도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리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러한 세실 함장의 애매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메스트르 신부는 일단 에리곤 호에 머물기로 하고, 하느님의 섭리와 베시 주교의 안배에 따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9월 11일 에리곤 호가 막 출발하려 할 때 범 요한이 돌아와 소식을 전함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에리곤 호에서 하선하여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 일행이 있는 황세홍의 집으로 갔다.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는 상해로 오라는 베시 주교의 지시에 따라 최양업, 범 요한과 함께 오송구에 정박 중인 영국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베시 주교가 마련해 준 배가 올 때까지 황세홍의 집에 머물다가 9월 16일 오송구를 떠나 9월 1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상해에서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최양업 일행과 다시 만났고, 베시 주교의 환대를 받았다. 그들을 1842년 10월 12일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 일행과 함께 베시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 신자의 배를 타고 22일에 요동 반도의 남단인 태장하(太莊河, 지금의 요녕성 장하시)에 도착하였고, 25일에는 백가점(白家店) 교우촌의 두(杜) 요셉 회장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그러다가 11월 3일 브륄리 드 라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개주(蓋州)의 양관(陽關, 지금의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에 있는 교우촌으로 떠났다. 김대건은 백가점에 머물면서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는 한편,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렸다.
2) 의주 변문을 통한 입국 시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백가점에서 머무는 동안 만주 대목구장 베롤(E.J.F. Verrolles, 1805~1878) 주교가 변문에 파견한 연락원을 통해 알아낸 조선교회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은 기해박해가 있어나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1842년 12월 20일에 조선 입국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락원들이 무모하고 위험한 일이라면서 반대하였고, 베롤 주교도 그러한 계획이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여 승인하지 않음에 따라 실행하지 못하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계획을 수정하여 일단 김대건을 변문으로 보내 조선의 상황을 정탐하고 입국 가능성을 타진하도록 하였다.
김대건은 1842년 12월 23일, 밀사 2명과 함께 출발하여 나흘 후에 변문에 도착하였다. 그는 변문 인근에서 조선에서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김 프란치스코라는 밀사가 있었다. 김대건은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기해박해와 관련된 자세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으며, 부친 김제준과 최양업의 부모가 순교하였고, 모친 고 우르술라가 의탁할 곳이 없어 비참한 몸으로 신자들의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울러 1839년에는 박해로 인해 감히 북경으로 밀사를 보내지 못하였고, 이후에 밀사들을 보냈지만 도중에 객사하였거나 변문에서 중국인 안내자를 만나지 못해 그대로 되돌아갔다는 소식도 들었다. 김대건이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에 대해서 묻자, 김 프란치스코는 비신자들의 의심을 받게 되고 박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면서 다른 신자들과 만반의 준비를 갖출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충고하였다. 김대건은 김 프란치스코로부터 앵베르 주교가 투옥되기 전까지 쓴 보고서2)와 모방 신부의 보고서,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편지를 건네받은 후, 그와 헤어졌다.
2)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 앵베르 주교의 보고서는 <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Relation de la Persecution de Sehoul en Coree en 1839)를 말한다. 앵베르 주교는 여기에 1838년 12월 31일부터 자신이 체포되기 4일전인 1839년 8월 7일까지의 사실을 기록하였다.
김대건은 변문으로 돌아와 하루를 지낸 후, 이튿날 홀로 조선에 입국하는 모함을 감행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이 1년 후에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앞서 2월쯤 먼저 메스트르 신부를 조선으로 인도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국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는 기지를 발휘하여 의주 변문을 통과하였으나 안내자가 없이는 무사히 서울까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후 발길을 돌려 1843년 1월 6일 백가점으로 귀환하였다. 김대건은 2월 말과 3월 초 사이에 페레올 주교가 머물고 있던 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 교우촌으로 가서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음력 3월과 9월경에 메스트르 신부의 지시에 따라 변문으로 가서 재차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에서 보내온 소식을 받았다.
3) 조선 동북방을 통한 입국 시도
변문을 통한 입국이 어렵다는 사실을 확인한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그 대안으로 경원(慶源)을 통한 동북방 입국로에 주목하였다. 당시 경원에서 조선과 청(淸)의 무역이 2년마다 열렸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하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동북방 입국로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선교사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페레올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40년 8월 1일자 서한에서, 앵베르 주교의 1838년 12월 3일자 서한을 보면 조선의 북쪽으로 가서 변문을 통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덜 위험한 연락망에 대해 조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에도 선교사들은 동북방 입국로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선뜻 그 입국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를 하지 못하였다.
동북방 입국로에 대한 조사는 1843년 5월(음) 조선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동북방 입국로가 가기에는 상당히 쉽지만, 국경에서 신자들이 있는 곳까지가 2,000리 길이기 때문에 너무 멀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이 사실을 그해 9월(음) 메스트르 신부에게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조선 신자들은 그해 겨울에 페레올 주교나 다른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동북방 국경 지역으로 사람을 보냈고, 안내자들은 20일을 여행하여 국경에 도착한 후 한 달 동안 기다렸다.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페레올 주교의 반대로 결국 입국할 수 없었다. 페레올 주교가 반대한 이유는 동북방을 통해 선교사를 입국시킬 수 있으나 한두 번에 그칠 것이라는 점, 중국 쪽에서 동북방 국경까지 가려면 맹수밖에 없는 황야를 지나야 하고 밤에는 천막에서 지내야 하며 살림살이를 가지고 다녀야 하는 점 등 때문이었다. 그는 동북방 입국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사가 무사히 동북방 국경까지 갈 수 있는지 중국 쪽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파견하여 동북방 입국로의 중국 쪽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였다. 당시 김대건은 1843년 12월 31일 양관에서 거행된 페레올 주교 서품식에 참석한 후, 소팔가자 교우촌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1844년 2월 5일 중국인 신자 1명과 함께 동북방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훈춘으로 떠났다. 그는 하느님의 섭리를 굳게 믿으면서 한 달 동안 장춘(長春)·길림(吉林)·영고탑(寧古塔) 등을 거쳐 3월 초에 훈춘의 홍시개(Homg-si-kai) 촌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그는 3월 9일(음력 1월 21일)에 교역이 개시되자, 중국인들 틈에 끼어 경원으로 들어가 한씨 성을 가진 사람을 비롯한 4명의 조선 신자들을 만났다. 신자들은 기해박해 이후 조선교회는 비교적 평온하다고 하였고,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동북방으로 선교사를 영입하는 것은 국경을 넘어가는 어려움 이외에 함경도를 통과하여 먼 거리를 가야 하는 어려움도 있음을 알려 주었다. 동북방 입국로의 개척이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김대건은 4월에 무사히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김대건은 소팔가자를 떠나 훈춘으로 가는 여정 동안 직접 관찰하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 얻은 자료를 토대로 한문 서한 형식의 기행문을 작성하여 페레올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동북방 입국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맹수와 도둑들이 가득 찬 500리의 숲을 지나야 하고, 국경을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고, 이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하려는 계획을 단념하였다.
09.4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과 사제 수품
1) 선교사 영입을 위한 노력
김대건은 훈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1844년 12월 10일경 부제품을 받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이미 변문과 조선의 동북방 지역을 통한 입국로 개척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대건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고자 했다. 준비를 갖춘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으로 가서 약속한 장소에서 조선의 밀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밀사들이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는 데에 여러 가지 난관이 많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을 먼저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정세를 살피고, 자신의 입국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김대건은 밀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박해의 위험을 막기 위해 자신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자 몇 명 이외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한 채 선교사들을 영입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입국하는 과정이 고되었던 까닭에 몸이 심하게 아파 의원의 치료를 받으면서 보름 넘게 앓아 누워 지내야 하였다. 병은 나았으나 몸이 허약하여 글씨를 쓸 수도 없었고, 다른 일도 원하는 대로 할 수 없었지만, 페레올 주교와 선교사들을 영입할 준비를 차질 없이 진행하였다. 그는 서울 석정동(石井洞, 돌우물골)에 선교사들이 거주할 집을 마련하였고, 상해에 있는 자신을 맞이하러 오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배 한척도 구입하였다.
이와 함께 김대건은 선교사들이 해로로 입국할 때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1845년 <조선전도>(朝鮮全圖)를 작성하였다. 이 지도에는 선교사들이 알아 두어야 할 관부(官府)의 위치와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 즉 만주의 봉황성에서 의주 변문까지의 도로와 한강 하류를 포함한 서해안 일대의 해로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김대건은 이 지도를 여덟 폭의 병풍과 신부들의 유해가 들어 있는 주머니 3개 등과 함께 리브와 신부에게 보냈다. 1846년 2월 밀사들은 변문에서 메스트르 신부를 만나 지도와 물품을 넘겨주었고, 메스트르 신부는 상해로 가서 이것들을 리브와 신부에게 전달하였다. 그는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준비 이외에 14세가 된 학생 두 명을 가르쳤고, 최영수·현석문·이재의(李在誼, 토마스, 1785~1868) 등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조선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행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순교자들의 행적에는 앵베르 주교 이하 34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약전과 함께 형벌에 대한 설명 및 삽화도 수록되어 있다.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김대건은 1845년 4월 30일(음력 3월 24일) 현석문·이재의·최형·임치화(任致化)·노원익(盧元益)·임성실(林聖實)·김인원(金仁元) 등 11명과 함께 제물포에서 상해를 향해 출발하였다. 김대건과 동행한 이들 가운데 4명만이 사공이었고, 그 외는 바다를 구경조차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는 도중 김대건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침몰할 위기를 맞았고, 굶어 극도로 탈진한 상태에 이르는 등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행히 중국 강남성 해안에 도달하였고, 5월 28일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오송구와 상해에서 중국 관리들이 그들을 조사하려 하였으나, 김대건이 영국 주둔군의 장교들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하며 그들과 친밀함을 과시하였고, 또한 페레올 주교의 부탁을 받은 영국 영사가 도와준 결과 조사를 면하게 되었다. 상해에 도착하자, 강남 대목구 소속 예수회 선교사인 고틀랑(C. Gotteland, 1803~1856) 신부가 김대건 일행을 찾아와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도 봉헌하였다.
2) 사제 수품
김대건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선교사를 영입하기 위해 배를 타고 상해로 왔다는 소식은 선교사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주었다. 페레올 주교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김대건 일행에게 가서 주교 강복을 주었고, 김대건에게 사제품을 주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김대건은 마침내 1854년 8월 17일 상해 푸동 지역에 있는 김가항(金家巷) 성당3)에서 신부들과 조선 신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3) 김가항 성당: 명(明) 숭정제(崇禎帝, 1628~1644) 연간에 김씨 성을 가진 신자들이 처음 세웠다. 1840년대 초에는 남경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강남 지역의 복음화에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2001년 3월 30일 상해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되었으나 상해 교구와 한국 신자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이 세워졌다. 2004년에는 성당에 ‘성 김대건 신부 기념 경당’이 건립되었다.
우리는 며칠 후 큰 위안을 가졌습니다. 주교(페레올 주교)는 안드레아에게 사제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식은 상해에서 20~30리 떨어진 교우촌 김가항 성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4명의 서양 신부, 1명의 중국인 신부가 참석하였고, 또 거기에 신자들이 무리를 지어 참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능한 한 성대함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첫 사제를 볼 때 우리의 기쁨이 어떠하였는지 당신(바랑 신부)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다블뤼 신부가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8월 28일자 서한>).
이와 같이 김대건 신부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게 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조선교회와의 연락망을 복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함으로써 조선교회에 큰 봉사를 하였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김대건 신부는 8월 24일 다블뤼(M.N.A. Daveluy, 1818~1866) 신부를 복사로 횡당(橫堂) 신학교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조선으로의 귀환을 위해 타고 온 배를 수리한 다음, 배의 이름을 여행자의 수호성인인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라파엘(Raphael) 호’라고 불렀다. 8월 31일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등은 라파엘 호를 타고 출항하였으나 비가 자주 오고 맞바람이 세찬 까닭에 양자강 하구에 있는 숭명도(崇明島)에 정박하여 순풍을 기다린 후 9월 8일 조선으로의 항해를 다시 시작하였다. 조선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폭풍우를 만나 키가 부러지고 돛이 찢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었고, 강항 역풍을 만나 9월 28일 제주도의 용수포구에 표착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잠시 머문 후 출발하여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의 황산포구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조선에 맞아들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09.5 병오박해와 순교
김대건 신부는 서울에 도착한 후, 서울과 용인 일대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다. 첫 사목 활동은 석정동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 복사인 이의창(李宜昌, 베난시오)의 도움을 받았다. 그의 주선으로 여러 신자들을 만났고, 미나리골 김 회장의 집, 무쇠막(즉 서강의 수철막) 심사민(沈士民)의 집, 서빙고, 쪽우물골(남대문로 남정동) 등지를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또한 용인의 은이·터골 등지도 방문하였다. 1846년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은이 공소에서 봉헌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대건 신부에게 서해를 통한 선교사 입국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5월 13일(음력 4월 18일) 김대건 신부는 복사 이인창과 사공 및 일꾼 노언익·엄수(嚴秀)·김성서(金性西, 요아킴)·안순명(安順命)·박성철(朴性哲, 베드로) 등과 함께 임성룡(林成龍, 베드로)의 배를 타고 마포를 출발하여 백령도로 향하였다. 그는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연안의 지도를 작성하였으나 강화도(江華島) 앞바다에 이르러 회오리바람 때문에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강화도에서부터 지나는 곳마다 지도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연평도(延坪島)·순위도(巡威島) 등을 거친 후, 백령도 근처에서 닻을 내렸다. 그는 중국 어선들이 해마다 음력 3월 초에 고기잡이를 위해 이곳으로 모였다가 5월 말경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중국 어선들의 중개를 이용한다면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고 편지를 전달하는 것이 매우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판단하에 김대건 신부는 밤중에 중국 배를 찾아가 배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페레올 주교의 편지와 자신이 베르뇌·메스트르·리브와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 및 중국 신자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아울러 황해 해안의 섬들과 바위와 그밖에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조선지도 두 장을 첨부해 보냈다. 이 당시 김대건 신부가 중국 배를 통해 전하려 했던 편지의 구체적인 내역은 이후 임성룡의 문초 기록 등을 통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는 5월 28일(음력 5월 4일) 옹진(甕津) 마합포(馬蛤浦)에서, 다음 날인 29일에는 장연(長淵) 목동(牧洞)에서 중국 배에 편지를 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진술에 따라 관원들이 중국 배에서 편지를 압수하였는데, 옹진 마합포에서 전달했던 편지는 상해로 보내는 것으로, 지도 1장과 라틴어 편지 6장이었다. 그리고 장연에서 전달했던 편지는 상해와 백가점으로 보내는 것으로 모두 3통이었다. 상해로 보내는 1통에는 지도 1장, 한문 편지 2장, 라틴어 편지 2장이 들어 있었고, 백가점으로 보내는 편지는 2통이었는데, 하나는 지도 1장, 한문 편지 1장, 라틴어 편지 1장이 들어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한문 편지 2장이 들어 있었다.
중국 배와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 등을 전한 김대건 신부는 6월 1일(음력 5월 8일) 순위도 등산진(登山鎭)으로 귀환하였다. 그런데 6월 5일(음력 5월 12일) 그곳 진장(鎭將)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김대건 신부가 타던 배로 와서 중국 배들을 물리치기 위해 배를 징발하겠다고 하자, 김대건 신부가 반대하였다. 이 문제로 시비가 발생하였고, 김대건 신부를 수상히 여긴 등산첨사(登山僉使)가 김대건 신부와 임성룡·엄수를 잡아 가두었다. 김대건 신부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서 이의창과 노언익은 시비가 발생하기 전에 등산진을 떠나 상경하였고, 김성서·안순명·박성철은 김대건 신부 등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피신하였다. 관원들은 김대건 신부의 소지품에서 한글로 된 작은 천주교 서적 1권, 성모와 아기 예수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과 예수성심상이 그려진 비단 조각이 들어 있는 붉은 비단 주머니 1개, 남색 명주 한 조각과 반이 삭았으나 길지 않았던 흔적이 있는 두발 등을 발견하고 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소지품 중에 중국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중국인으로 오해하였다. 등산첨사는 이와 같이 조사한 내용을 황해감사(黃海監司)에게 알렸고, 이에 6월 10일 김대건 신부 일행은 해주 감영(海州監營)으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의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조정은 외국인이 국경을 넘어 와서 변방의 진영에서 체포되었다는 점과 천주교를 믿는다는 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리고 그가 입국하여 활동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에 김대건 신부가 중국 배에 전한 편지와 지도를 색출해 올리도록 황해감사에게 지시하고, 임성룡과 엄수의 문초에서 거론된 사람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林致百, 요셉, 1803~1846)과 김성서의 부친 김중수(金重秀)가 추가로 체포되었다.
이에 조정에서 엄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6월 21일(음력 5월 29일) 김대건 신부 일행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김대건 신부는 6월 23일부터 7월 19일(음력 윤5월 26일)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의 문초를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 문초에서는 중국 광동 출신인 우대건(于大建)이라고 하다가 여섯 번째 문초 때 외국인이 아니라 용인 태생 김대건이며, 신학 공부를 위해 동료들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한 사실을 실토하였다. 하지만 김대건 신부는 혹독한 고문에도 '하느님을 위해서 죽겠다'라고 하면서 신자들과 조선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함께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임치백에게 세례를 주었다. 7월 30일(음력 6월 8일)과 8월 26일에는 페레올 주교와 스승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고, 작성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선 신자들에게 보내는 회유문(廻諭文)도 남겼다. 또한 대신들의 지시에 따라 영국의 세계지도 1장을 번역하여 채색된 2장의 사본을 만들었고, 작은 지리개설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편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다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병오박해(丙午迫害)이다. 임성룡과 엄수의 진술로 김대건 신부의 석정동 집이 알려졌고, 남경문(南景文, 베드로, 1796~1846)·현석문·이재의·김순여(金順汝)·구순오(具順五) 등이 고발되었다. 조정에서는 주요 신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이천·양지·은이, 그리고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포졸들을 보냈다. 신자들 가운데 남경문이 먼저 체포되었고, 5월(음)에는 한이형(韓履亨, 라우렌시오, 1799~1846)이 은이 마을에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석정동의 김대건 신부 거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 뒤 그곳에 있던 여성 신자들을 장동(壯洞, 지금의 종로구 효자동·창성동·통의동에 걸쳐 있는 지역)에 있는 이간난(李干蘭, 아가타, 1814~1846)의 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사포서동(司圃署洞, 지금의 종로구 통인동)에 새로 매입한 김임이(金任伊, 데레사, 1811~1846)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간난의 집을 찾아내 우술임(禹述任, 수산나, 1803~ 1846)을 체포하였고, 7월 15일(음력 윤5월 22일)에는 그녀를 앞세워 사포서동으로 와서 현석문·김임이·이간난·정철염(鄭鐵艶, 가타리나, 1814~1847) 등을 모두 붙잡아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체포된 신자들 대부분은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인 8월 9일(음력 6월 18일) 중국에 있던 세실 함정이 이끄는 클레오파트르(Cleopatre) 호·빅토리외즈(Victorieuse) 호·사빈느(Sabine) 호 등 군함 3척이 충청도의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나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가들이 살해된 것에 대해 조선 정부에 항의하는 서한을 전하고 떠났다. 조정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을 비롯한 대신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 군함을 불러들였다고 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신자들을 역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헌종이 이를 받아들여 김대건 신부를 효수경중(梟首警衆)4)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김대건 신부는 9월 16일(음력 7월 26일) 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만 25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9월 19일 현석문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9월 20일에는 임치백·남경문·김임이·정철염 등도 순교하였다. 이로써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부터 시작된 병오박해가 끝을 맺었다.
4)효수경중: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아 뭇사람을 경계하던 일.
순교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여러 신자들에 의해 와서(瓦署, 지금의 서울 용산구 용산동 4~6가)에 안장되었다가 서 야고보·박 바오로(박순집의 부친)·한경선·나창문·신치관·이 사도 요한·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등에 의해 미리내로 이장되었다. 그 후 1886년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조사를 할 때, 교구 재판 판사인 프와넬(V.L.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주가 미리내에 있던 봉분 중앙을 헤치고 횡대(橫帶, 관을 묻은 뒤에 구덩이 위에 덮는 널조각)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1901년 5월 21일에는 시복 재판 판사 프와넬 신부와 기록 서기인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1875~1938) 신주가 안성 본당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1875~1950) 신부, 미리내 본당의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1863~1929) 신부, 그리고 신자 30여 명이 참관한 가운데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런 다음 횡대는 무덤 안에 다시 넣고 원상대로 봉분을 쌓았고, 발굴된 유해는 강도영 신부의 사제관에 안치하였다가 5월 23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후 유해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 성당으로 옮겨졌다가 1951년에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로, 1960년 7월 5일 혜화동 대신학교로 옮겨졌다. 이때 유해 일부가 미리내, 절두산 순교성지 등에 분리·안치되었고, 이후에는 각 본당 및 단체에도 분해되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병오박해 순교자 9명은 1925년 7월 5일 복자가 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09.6 김대건 신부의 영성
김대건 신부는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와 신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첫 번째 한국인 사제라는 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사제로서의 사명에 충실하였고, 혹독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굳은 믿음과 성덕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인간 삶의 의미와 목적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고, 이에 대한 깊은 믿음을 보였다. 그는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임자’라고 표현하였다. 즉 그는 하느님을 인간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자, 아버지로 이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지 못하다면 태어난 보람이 없다고 보았고, 그 자신 역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태도를 보였다. 김대건 신부는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보호해 주시고, 안배(按排)해 주신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온갖 난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상 온갖 일이 막비주명(莫非主命)이요, 막비주상주벌(莫非主賞主罰)이라. 고로 이런 군란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는 감수 인내하여 위주(爲主)하고 오직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려다(<마지막 회유문>).
또한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서는 돈독한 성모 신심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하심을 의지하는 자는 아무도 버림을 받지 않는다고 확신하였다. 그래서 고난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성모 신심에 의탁하면서 극복해 나갔다. 이러한 모습은 1845년 4월 페레올 주교를 조선에 입국시키기 위해 신자들과 함께 상해로 가는 과정에서 폭풍우를 만나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을 때 여실히 드러난다.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에 온 바다의 별을 상징하는 상본(바다의 별이신 성모 마리아 상본) 한 장을 바다의 위험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 가지고 배에 탔습니다. …선장이 된 부제(김대건)는 곧 하늘의 특별한 보호에 대한 영웅적인 신뢰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폭풍우가 경험이 없는 우리 항해자들을 고역하고 그들 배의 돛과 키를 부수었습니다. 배는 파도치는 대로 거의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더 잘 만들어진 배들도 많이 침몰되었습니다. 위험에 처하자 선원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모두의 시선이 안드레아에게로 향했습니다. 용감한 이 젊은이는 같이 겁을 내면 그들이 더욱 두려워할 것을 알고 확신적인 태도와 이러한 말로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성모님의 상본을 보이며 “여기에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우리는 상해에 도착할 것이고 우리 주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1845년 7월 8일자 서한>).
이처럼 김대건 신부는 성모 마리아께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특별히 돌보신다고 굳게 믿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이와 같이 성모 신심은 김대건 신부가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주지하듯이 김대건 신부는 사목 활동 기간이 약 6개월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서한 곳곳에서 조선 백성에 대한 선교 의지와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1842년 12월에 김 프란치스코를 통해 기해박해와 관련된 소식을 듣고 조선의 신자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 떼처럼 탄식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였고, 날마다 조선에 입국할 날을 고대하였다. 1845년 1월 조선에 입국한 후에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오히려 증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진리를 듣고자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선교만 하면 천주교를 믿을 사람은 무수히 많을 것이라고 하면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조속히 조선에 목자들을 보내시어 흩어진 양들을 모으시고, 한 목자 아래 한 양 우리를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감옥에 갇힌 후에도 함께 갇혀 있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로 신앙을 북돋아 주었고, 임치백 등에게는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온몸이 묶여 있는 괴로운 상황에서도 주위 사람들에게 천주교의 도리를 설명하였다. 이처럼 김대건 신부는 선교에 대한 의지와 열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김대건 신부의 영성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순교는 스승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순교가 하느님 앞에 참으로 영광스럽고 가치 있는 일임을 굳게 믿었다. 그는 “우리 주 예수 세상에 내려,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조차 성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박해의 고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본받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혹독한 문초를 당하면서도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관장이) 저를 고문하게 하였습니다. 관장이 “배교를 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쳐죽이게 하겠소”하고 다시 말하였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절대로 내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 보시오. 내가 공경하는 하느님은 천지 신인 만물의 조물주이시고 상선 벌악하시는 분이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공경을 드려야 하오. 관장님,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게 해 준 데 대해 감사하오. 그리고 내 하느님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그 은혜를 갚아 주기를 기원하오”(라고 하였습니다)(<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1846년 8월 26일자 서한>).
김대건 신부는 배교를 강요하는 관장의 위협에 “임금 위에 하느님이 계신데 그분이 자신을 공경하도록 명하시므로 그분을 배반하는 것은 임금의 명령이 정당화시킬 수 없는 범죄요”라면서 거부하였고, 동시에 당당하게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하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고백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원하였다. 이처럼 복음의 증거자로서의 그의 모습은 새남터에서 순교를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김 안드레아는 크게 소리쳤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시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샤를르 달레 :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하, 1996, 119쪽).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후 페레올 주교는 “그가 사제직을 몇 년 동안만 더 하였더라면 지극히 유능한 신부가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페레올 주교의 평가처럼 김대건 신부는 ‘열렬한 신앙심과 솔직하고 진실한 신심’을 가진 사제로서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