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보냄을 받은 선교
III. 성육신의 선교
IV. 교회의 사명
V. 보편적인 선교
VI. 성령의 선교
VII. 지상 명령에서의 선교
VIII. 분산화와 확산으로서의 선교
IX. 타문화로서의 선교
X. 사랑의 기초인 선교
XI. 선교의 근거인 고난
XII. 복음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
XIII. 복음의 독특성과 배타성
XIV. 하나님 나라의 선교
XV.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음
XVI. 바울의 선교
XVII. 일반 서신서에서의 선교
XVIII. 신약 성경의 결론
I. 서론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어떤 삶도 선교의 사명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빌터 프라이다크. 1961)
초기 기독교 선교의 결과는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선교 명령 때문이다. 이 선교 명령으로 1세기 말에 로마의 도미시안 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하기 위하여 모든 공권력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죽음의 위험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로마의 모든 도시마다 늘어났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축복으로 이해하였다. 이 이해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어려움 속에서라도 목숨까지 바쳐서 살게 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먼저 복음이 모든 백성에게 전파되어야 세상의 마지막이 온다는 신약성경의 선교적 이해를 믿고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고 살았다(마 24:14).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막 13:10). 이 말씀이 종말을 지혜롭게 준비하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성도는 종말을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종말이 아닌 현세의 복만을 누리고 살기를 원하는가?
II. 보냄을 받은 선교
1. 보냄을 받은 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고 이해하셨다. 선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그 근거를 둔다(박창현 2001).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5).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2. 제자 파송의 근거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자기 이해는 신약 성경에서 제자들을 선택하고 선교의 사명을 주어 파송하는 근거가 된다. 예수님도 선교를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파송하신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마 10: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막 6:7). 이 보내심에는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라는 전제가 있다.
3. 사도의 권위의 근거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도의 권위와 전제가 예수님의 보내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5).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요 20:19-22)과 승천하신 날(행 1:6-8)에 이 보내심을 선교의 근거로 하여 제자들을 선교의 현장으로 보내셨다.
4. 구약의 보냄을 받은 자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전권을 받아 사명을 받은 자로 자처하였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보내심을 받은 자로 택하여 주기를 바랐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교 명령이 그의 사역의 유일한 근거임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렘 1:7). 이 말씀은 단순히 ‘보내다’라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닌 특별한 사명을 주어 보낸다는 의미이다.
선지서에서는 보내신 분인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은 자인 선지자와 일치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이 그에게 자신의 전권을 주어 그가 보낸 자의 위치와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내가 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하며 마치 하나님 자신이 그 자리에서 말하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다. 구약의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의 일치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치는 보내시는 예수님과 보냄을 받은 제자들과의 일치를 말한다. 제자들이 선교할 때 예수 안에서, 사도들 안에서, 계속되는 선교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자들 안에서 하나님이 직접 역사함을 뜻하고 있다. 신약 선교 이해는 하나님의 선교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보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5. 보냄을 받은 선교에 대한 적용
선교는 선교사 자신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보내심을 받아 가는 것이다. 선교는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선교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선교사가 될 때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선교할 때도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인 것처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선교사의 ‘파송’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선교사의 파송은 선교사 자신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에 응답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다면 선교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나 선교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선교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선교는 어려운 짐이나 책임이 아니다. 선교는 고생이나 힘든 일도 아니다. 어느 교회에서 고등부 목사가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해 가르쳤다. 한 학생이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 학생의 부모가 목사에게 찾아왔다. “목사님! 우리 아이가 목사님의 가르침으로 선교사가 된다고 하네요. 우리 아이의 인생을 망치려 하십니까?” 그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이다. 하나님의 보내심에 쓰임 받기 때문이다. 교회가 선교에 참여할 때 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사를 보낼 때 교회의 재정이 손해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보내심에 택함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선교에 쓰임 받기에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보내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보냄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한을 받고 보냄을 받는다. 또한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하나님의 권세는 보내심을 받아 그분의 선교를 실행할 때 나타난다. 하나님의 권세의 특권은 보내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거부하며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사도들을 보내시고, 선교사들을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자녀들을 보내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내고 계신다. 그러기에 보냄을 받는 자들은 가면 된다. 그러나 지금도 가지 않고 중간에 다른 데로 가고 있다. 요나처럼 보내시는 자의 뜻을 거부하고 중간에 다른 데로 가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 왜 다른 데로 가는가? 왜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치 못하면 두려움이 찾아온다. 보내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보내실 때 평강으로 함께 하신다(요 20:21).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일어난다. 주님은 평강을 주신다고 하셨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하나님의 보내시는 뜻에 순종하고 있는가?
보내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보냄을 받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 세상 끝날 까지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한즉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함이라”(마 1:23). 보냄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그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가장 큰 은혜다. 그 은혜는 보냄을 받아 순종하는 자들에게 오늘도 임한다.
보내시는 자를 알면 보내는 곳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어디로 갈 것인가가 문제가 안 된다. 돈을 어디서 날까, 후원을 어디서 받을까도 문제가 안 된다. 보내시는 자를 알기만 하면 된다. 다른 것을 몰라도 된다. 보내시는 자가 누구인가를 알면 된다. 보내시는 자와의 관계만 잘 맺으면 된다.
III. 성육신의 선교
예수님의 성육신은 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박창현. 200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성육신화된 선교 사역을 통하여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간의 동일화(하나 됨)되는 것에서 신약의 선교 이해를 찾을 수 있다. 성육신 자체가 예수의 선교사 신분과 사역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0-12). 이 땅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선교사로 인간과 같은 모양으로, 인간들이 사는 곳 가운데로 친히 오셨다. 이 성육신의 원리는 오늘날 선교에서도 결코 빠질 수 없는 선교의 기본 원칙이다.
선교는 지배하는 선교가 아니라 함께 하는 선교라는 것을 성육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서구 선교는 복음을 듣는 상대를 선교사와는 다른 열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로 단정하였다. “내가 너를 도와 나의 수준까지 도달하게 하겠다”는 교만한 마음과 우월주의 선교가 있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도움을 주는 자와 받는 자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신약의 선교는 성육신의 선교였다. 예수님은 이방인으로 계시지 않았고, 누구만을 위하여 계시지 않았고, 사람들 가운데, 그들과 더불어, 그들 중의 하나로, 그들의 친구로, 완전한 인간으로 계셨다. 선교는 선교지 사람들이 불쌍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존중해서 가는 것이다. 고유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고, 원래 목적대로 살 수 있도록 존중해서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기의 가족으로 고백하셨다(막 3:33-35).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셨다(눅 12:4, 요 11:11, 15:14, 15).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예수님을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 구별하지 않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로 이해하였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특별히 구별되게 옷 입거나 행동하지 않았기에 잡히시던 밤에도 가룟 유다가 입을 맞추어 그를 알려 주어야 했다(막 14:4).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잠을 자며, 그들 가운데 하나로서 생활하였음을 중요한 사실로 전한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 가운데 하나로 살며 선교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의 선교는 신인 예수가 그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인간이 되었기에 가능하였고 그러기에 선교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벽을 뛰어 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기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 2:5-7). 예수님은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목자 잃은 양처럼 보시고(마 9:36), 그들을 불쌍히 보시며 병을 고치시고, 음식을 주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다(마 14:14, 15:32, 막 5:19, 6:34, 눅 7:13). 고난당하는 민중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때론 침을 뱉어서(막 8:24), 때론 귀에 손가락까지 넣어가며(막 7:33) 병을 고쳐 주셨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는 함께 배우며 함께 나누고 결국은 함께 축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축제의 음식을 함께 나누고 춤을 추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준비하는 축제의 선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함께 먹고 마시는 가운데서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문자가 삶이 된 것이다. 선교는 복음의 문자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다. 단순히 복음의 사실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까지 포함한다.
성육신의 선교에서 선교의 적용점이 있다. 교회들이 선교의 효율성을 따질 때, 보내는 선교, 가는 선교, 성육신의 선교를 약화시킨다. 예를 들면 현지에 돈을 보내 구제하거나 현지인 사역자들에게 직접 돈을 보내는 것을 효율성이 있는 선교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도 포함하지만 선교는 몸으로 직접 가서 함께 사는 것이 초점이다.
서구 선교나 한국 선교는 센터 중심의 선교를 종종 하였다. 선교센터의 장막이나 교회의 장막을 높이고 ‘와서 배우라’는 배타적인 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선교는 ‘와라’가 아니라 ‘가라’이다. 과거 제국주의 선교사들은 자기들만의 음식을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입었다. 자기들의 문화와 말을 고집하였고 자기 모국어로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 통역하는 사람을 세워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마을과 각 가정으로 직접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선교가 예수님의 성육신적 선교다. 선교는 삶과 언어로 전하는 자와 받는 자가 하나로 이해하게 될 때 구원하는 복음의 역사가 진정으로 일어난다.
선교는 현지인과 같이 사는 것이고 고통과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것이다. 현지인 친구를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부르셨다. 친구는 누구인가? “또 다른 나, 편안한 사람, 비밀을 아는 사람,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 등에 짐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 문제 해결사, 멀리 있어도 가까운 사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 친구 따라 아프리카 가는 사람, 같이 노는 사람, 울어줄 수 있는 사람, 등을 기댈 수 있는 사람, 돈을 같이 쓸 수 있는 사람, 아는 것을 공유하는 사람, 진실한 사이, 기도하는 사람,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친구와는 회의會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책임져주는 사이다. 하늘의 모든 것을 나누었으니 친구다. 친구끼리 비밀을 나눈다. 부모와는 비밀이 있어도 친구와는 비밀을 말한다. 중국의 친구개념은 빚을 대신 갚아주는 사람이다. 성경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친구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는 것이 친구관계다. 예수님은 내 말을 지키면 너희도 친구라고 하셨다. 이러한 관계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나를 충성되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충성스럽지 못하지만 충성스럽게 여기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조그마한 변화에도 잘했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근엄한 목소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변화에 격려해주시는 사랑의 주인으로 찾아오신다. 주님은 나를 귀하게 여기신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를 다 흘리셨다면 조금 잘못했다고 삐질 하나님이 아니시다. 주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기시기에, 친구라고 여기시기에 우리는 그를 위해 헌신한다. ‘나를 받으시옵소서’ 라고 헌신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나를 충성되다’고 여기셔서 헌신하는 것이다. 친구의 개념에서 나쁜 친구는 무례하다. 좋은 친구는 상대방을 배려해준다. 친구가 편안하기에 배려해주는 것이다. 상대를 자신처럼 여기는 것이다.
과거에 위에서 내려가는 선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지의 기득권층을 먼저 복음화 시키면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믿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복음화 되어졌다. 복음은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까지 올라갈 때(기독교의 로마 국교) 기독교는 타락이 시작되었다. 선교는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올라가는 것이다.
IV. 교회의 사명
선교는 구원사적으로 이미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의 중간 시대의 교회의 사명이다(박창현. 2001). 마태에 의하면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마 11:29), 또 배운 것을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다(마 28:18)고 한다. 마가는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막 8:31, 9:2) 알고 그에게 순종하여야 하며(막 9:7), 이것을 모든 세상에 전해야 한다(막 13:10, 14:9)고 말한다. 누가에 의하면 복음이 어떻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로마로 전파되어 나갔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유대인 선교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을 경계로 성령을 통하여 전 세계적인 복음으로 되었는가를 바울과 베드로의 선교 사역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자기 이해에 근거하여 교회의 선교 이해의 기본 구조를 설명해 준다. 이 모든 신약 성경의 선교 이해는 그 근저에 선교를 위해 이미 오신 예수님과 재림하실 예수님 사이의 교회의 사명으로 정한다(막 13:10, 마 28:18-20, 눅 24:44-49, 요 20:21-23, 막 16:9-14, 15, 20).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은 구속사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아담의 타락 후 바벨탑을 지어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징이다.
구속사는 역사 속에서 점진적 축소와 점진적 확대의 두 과정을 거친다. 점진적 축소의 구속사란 아브라함을 상징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또 이스라엘을 상징으로 전 인류를 구원하려 하신 하나님의 구속사가 그 진행 과정 속에서 소수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남은 자’의 역사로 축소된다는 것이다. 이 축소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함으로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는 구원사로 축소되는 과정의 역사를 말한다. 점진적 확대의 구속사는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부터 그가 선택한 12제자에게로, 그리고 그들의 선교를 통한 오늘날의 교회를 통해 점진적으로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증가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점진적 축소의 마지막이며 점진적 확대의 시작이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역사이다. 완전히 이루어질 재림 때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나아갈 것이다. 잔치로 비유된 하나님 나라는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 이미 초대는 받았지만 아직 잔치는 베풀어지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천국 잔치를 향하여 이미 순례의 길을 떠났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과도 같다(눅 14:24). 그러므로 교회는 이 그리스도의 잔치에 사람을 인도하는 사명을 인식하고(막 1:17) 이 기간을 선교를 위한 시기로 알고(요 9:4)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도 점진적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은 성장의 과정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성장의 과정을 선교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지금의 성장이 완성을 위한 과정이다. 그러기에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결과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지금은 그 과정이기에 과정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이다. ‘오늘’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이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다(마 6:34). 오늘 하루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것이다(마 6:33). 오늘 하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선교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늘 사는 것은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내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만족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선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평범한 오늘 하루에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그 일이 대부분은 큰 일이 아닐 수 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래도 그 평범한 일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대부분의 하루의 일상은 잠자고 먹고 밥하고 설거지 하고 직장 가서 일하는 것이다. 이런 평범한 일들을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인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런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만족하며 감당하는 것이다.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며, 오늘 하루를 선교적인 삶으로 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자녀들과 대화하는 시간이라면 자녀와 눈을 마주보고 모든 생각과 태도를 자녀를 향하여 대화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라면 설거지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해야 한다. 그 설거지가 자신의 직장인 식당에서 하는 것이라면 그곳에서 내 그릇을 씻는 것처럼 깨끗하게 씻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 쉬는 시간이라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일에 대한 부담을 다 내려놓고, 충분히. 그리고 편하게 쉬어야 한다. 우리는 때로 염려 때문에 편하게 쉬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잘 쉴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과 같다.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다면 커피 향을 즐기면서 편안함을 누리는 것도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지금 산책을 한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을 보면서, 들 꽃 하나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누리고 하나님께 감탄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해외 단기 선교 여행을 많이 간다. 교회마다 팀을 이루어 간다. 그곳에서 우물물을 파고 교회당을 건축한다. 그것이 선교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평범한 하루 동안에 옆집 화장실 배수관을 고쳐주는 일도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일이며, 선교이다. 옆집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잘 도와주는 것이 가난한 나라에 가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보다 더 작은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뭔가 획기적인 혁명을 원한다. 획기적인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선교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원하지 않는 설거지나 계단 청소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바로 설거지나 계단 청소하는 것이 혁명적인 일이며 이 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 조그만 일상의 평범한 일은 대충하면서 하나님 일을 한다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선교여행을 떠나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주님은 우리가 설교할 때나 예배를 드릴 때만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만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평범한 일을 할 때, 평범한 오늘 하루를 귀하게 생각하여 감사하며 만족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은 받으신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V. 보편적인 선교
선교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박창현 2001).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선교가 세상의 끝까지 확장되는 하나님의 선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난한 자와 부자를 분류할 뿐 어느 한 쪽을 제외시키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이방 여인과의 대화(막 7:24-30, 마 15:21-28)는 유대인만을 위한 복음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복음이 되었는가를 소개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을 위하여 이방인을 개로 취급하신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입장을 대변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막 15:24)는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유대교의 배타적인 입장에서 한 이방 여인의 믿음과 경계를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배타적 사상을 자신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이방 여인의 믿음을 부각시켜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의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사역의 실행에서는 구약에서부터 제사장적 직분을 수행하며 오랜 수련기간을 겪어 준비되어진 이스라엘에게 먼저 직접적 호소가 이루어지고 그들이 이 사명을 거절하자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에게 이 사명을 주어서 모든 민족에게 나아가도록 하는 계획으로 본다. 결국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는 것을 칭찬하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의 큰 기쁨의 소식이며, 평화의 복음이다. 소외된 지역의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방인의 소외된 지역을 선교하였고(막 3:7-8, 요 4:39-42, 막 5:1-20),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셨고(막 2:17, 눅 17:11-19, 마 8:10, 15:28), 소외시키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막 16:15, 마 28:19).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보편적, 우주적 선교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셨다.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전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유대인이고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제자들의 배반한 이야기와 그 전까지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했던 무리인 이방인 군인 백부장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마 27:54)를 소개한다. 예수님의 직접적 관심 밖에 있던 부자이며 지도층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룬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내포하는 선교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배반한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배척했다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사람 모두를 선교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부활은 이들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주고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는 사건이 된다. 죽임을 당한 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부활은 복음이다. 십자가에 못 박은 당사자일지라도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용서가 되고 선생을 외면한 제자들도 약속대로 살아나신 부활의 예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새로운 일을 감당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계층과 민족을 초월한 선교적 근거가 된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막 10:45),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막 14:25)로 표현하는 것은 바로 선교의 근거를 말한다.
선교는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신약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신약 성경을 통해 분명히 보편성을 인정하셨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위한 보편적인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죄가 들어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을 거부하고 구분하고 차별하고 당을 짓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한 인간 자체를 가장 귀한 존재로 여기시지 나와 관계된 민족, 족속, 나라, 형통만을 귀중히 여기지 않으셨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무너뜨리고 사람을 구분 짓는 것이다. 보편성을 인정하는 선교야 말로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와 그리고 나와 관계된 사람만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셨다.
VI. 성령의 선교
신약의 선교는 성령의 능력의 역사로 이해된다(박창현. 2001).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막 3:14-15)와 또 전도여행을 보내시며(막 6:7) 당부하신 말씀 속에서 선교는 말만이 아니라 능력임을 말씀하셨다. 선교가 일어나는 곳에는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며,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나타난다. 예수님의 선교는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는 선교였고(마 4:23),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선교였다(눅 4:18). 즉 예수님의 선교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고 이것을 해결하는 능력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들의 선교사역의 효과를 ‘능력’으로 시험을 받았다(막 9:14-29). 신약 성경은 이러한 선교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소로서 성령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셨고 그 능력으로 일을 계속하셨다(마 3:16, 눅 4:18, 행 10:38). 성령은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였다. 초대교회의 능력의 선교는 성령의 역사 때문이다(행 1:8).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다(고전 4:20). 자신은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선교한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4). 성경은 어떻게 복음이 성령의 능력을 받은 이들에 의하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또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로, 그리고 전 세계적인 복음으로 성장되었는가의 선교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선교 기록서이며, 동시에 선교 지침서이다.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의 주도권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님이시다. 빌립으로 하여금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게 한 것도 성령이고(행 8:29), 베드로로 하여금 가이사랴의 고넬료 집을 방문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도 성령이시다(행 10:19-20). 안디옥 교회가 사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케 한 것도 성령님이시고(행 13:2), 바울로 하여금 더 이상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유럽으로 건너가 복음을 전파하게 한 것도 성령님이시다(행 16:6-7).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시기에 사도행전을 성령의 행전이라 할 수 있다(김득중. 2012).
선교사는 성령의 능력을 위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시간을 가져야 한다. 열매는 성령이 맺으시는 것이고 선교사는 사역을 할 뿐이다. 선교사역의 과정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그 열매는 성령께서 맺으시는 것이다. 과정이 옳지 못해도 당장 열매가 잘 나타날 수도 있고 과정이 바르다고 해도 열매가 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기에 성령을 의지하고 사역하는 것이 필요한 과정이 열매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과정 중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 자신만의 세계, 개종의 세계, 경험, 성화, 방언, 예언, 그리고 기적의 세계를 창조하신다. 교회를 양육하고 인도하는 세계를 만드신다. 성령은 사역자들을 임명하신다. 성령은 조직하시고, 조명하시고, 영감을 주시고, 그리고 보존하신다. 성령은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그들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깊은 것 까지 아신다.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성령은 세상을 압도하신다. 성령은 앞으로 되어 질 것들을 말씀하신다.
VII. 지상 명령에서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예수님의 지상위임명령을 통해서 성경의 핵심을 볼 수 있다(박창현. 2001).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최고 절정기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후에 제자들과 짧은 재회 기간 동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준 마지막 말씀들에는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나타난다. 이는 모든 족속을 복음화 하라는 선교명령이다. 이 선교명령을 지상위임명령이라고 부른다(마 28:19-23, 막 16:15, 눅 24:46-49, 요 20: 19-23, 행 1:8).
이 위임 명령들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들이 완수하여야 할 명령이었다. 이 지상 위임령은 예수님 자신이 공생에 동안에 목적하고 행하셨던 사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구절이며 그 사역을 이제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도록 위임하는 부분이다. 이 지상위임 명령의 내용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의 생애와 사역의 목표가 선교적인 사명이었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제자들과 그 뒤를 잇는 교회에게 주어진 사명이 선교적 사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상명령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부터 일관되게 제시되어진 하나님의 선교적 의도가 다시 재 언급 되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제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사명으로 재확인시켜 주신 것이며 그 내용 중 구약과는 다르게 그 성취방법론이 바뀐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구약의 선교방법론은 구심적 방법으로 ‘와서 보라’였다면 신약은 원심적 방법으로 ‘가서 전하라’라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와 율법을 주어, 와서 발견하도록 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임재 대신에 성령의 내재를 허락하시고 율법 대신에 복음을 주시고 제자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직접 모든 족속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1. 마태복음
마태복음의 지상명령은 복음서 시작과 연관되어 이해되어져야 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포함된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우주적인 의도를 가진 어느 특별한 사람들을 통한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역의 시작이었다. 마태는 모든 나라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으로 마태복음서의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배타적인 구속의 사역은 복음이 나라들에게 전파되는 우주적인 의도를 성취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배타적인 구속의 사역은 복음이 나라들에게 전파되는 우주적인 의도를 성취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제 1장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과 제 28장에서 모든 나라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 복음서의 처음과 끝을 이루고,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을 형성한다. 즉, 마태복음 28장 18-19절은 마태복음의 전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로 시작한다. 우주적인 하나님은 우주적인 사명을 주신다. 이 말씀은 인자에 대한 다니엘 선지자의 말을 회상시킨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는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4)
사명의 핵심에는 ‘제자를 만들라’는 명령이 있다. 문법적으로 이것은 명령형의 본동사이다. ‘가라’, ‘세례를 주다’, ‘가르치다’와 같은 말들은 ‘제자를 삼으라’는 본 명령 동사형과 연결된 구속력을 가진 분사들이다. 지상명령은 단순히 선포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가다’는 그 일은 의도적으로 나라들에게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와 믿음에 수반되는 세례는 어떤 사람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공개적으로 가입하는 수단이다. 예수님이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은 명목적으로 신조를 따르는 것이나 또는 종교적인 조직에서 피상적인 일원이 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가르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제자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확실히 제자를 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을 그의 주권에 복종하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구약성경의 구심적인 선교에서 ‘가다’는 나라들에 대한 선교의 원심적인 선교로 바뀌었다. 그 명령은 단순히 개별적인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들(종족들)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그 명령을 내린 부활한 예수님의 권위와 약속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충격적인 제안이다.
지상명령과 마태복음 자체는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겠다는 위로와 장래의 약속으로 끝난다(28:20). 모든 권세를 받은 동일한 예수님이 이 어려운 선교과업에 제자들과 동행하기로 약속하신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들 혼자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권세, 모든 나라들, 예수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상명령의 기간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지상명령과 연결된 약속은 ‘세상 끝날 까지’이다. 이것은 분명이 그 명령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약속은 제 1 세대 제자들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선교 명령도 마찬가지다. 지상명령은 구원사의 완성을 안내하면서 초림의 그리스도와 재림의 그리스도 사이에 계속해서 존재한다. 복음이 모든 나라에 전파될 때 끝날 것이다(마 24:14).
2.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지상명령의 중대성을 강조한다. 지상명령의 표현은 16장 9-20절의 온전함에 의해서 완성된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절)고 하셨다. 믿음과 세례는 구원의 조건들이지만 거절하면 정죄를 받는다.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은 영원한 결과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 마가의 지상명령은 마가복음의 시작과 평행을 이룬다.
1:14: 예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갈릴리로 갔다. | 16:15: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16:16: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
1:23-28: 축귀 | 16:17하: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다. |
1:29-34: 치유 | 16:18하: 그들이 병든 자에게 손을 얹으면 그들이 치유될 것이다. |
1:38: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 | 16:20: 제자들이 나가서 모든 곳에서 전파했다. |
이러한 병행구는 예수님이 채택한 선교와 부활한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위탁한 선교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3. 누가복음
지상명령의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다. 누가복음의 지상명령은 부활하신 후에 말씀하신 구절이다.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이 어떻게 자신을 증거 하는가를 설명함으로써 복음 전파를 구원사와 연결시킨다(44절).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그의 구원 사역과 모든 나라들에게 전파하는 것이 성경의 계시의 연장선에 있는 것임을 가리키신다. 지상명령에 대한 이 구절을 ‘그러므로 기록되었으되’(48절상)라는 말씀으로 인도한다.
지상명령의 메시지가 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46하-47절) 라고 말씀하신다. 이전에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눅 10:9)는 것을 전파하도록 위임되었지만 지금은 죄의 용서함이 메시지의 핵심이다. 구원의 사역이 완성되었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제자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설명된 사도들의 선포에서 입증될 수 있다(2:38, 5:31, 10:43, 13:38, 26:18).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것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보여주듯이 구심성에서 원심성으로 선교 운동이 바뀐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러한 일들의 증인이다”(눅 24:48)라는 말을 추가시키는데 이 말은 또한 증인으로서의 제자들의 역할이 회복되는 누가의 두 번째 책의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한다(행 1:8).
누가복음에서 지상명령의 권세를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하나님 아버지가 제자들을 능력으로 입혀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라는 지시이다(24:49). 지상명령은 즉각적인 진격 지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제자들은 성령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들이 권능을 받은 후에야 성령의 시대가 완전히 시작되고 모든 나라들에 대한 복음의 전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은 중요한 주제가 된다. 성령의 권능의 약속이 반복되어 있고(행1:8), 오순절에 성령을 받는 것은 신약 성경의 선교를 시작하는 것이며(행 2장), 나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성령의 운동에 의해서 계속해서 추진되는 것이다. 능력의 성령을 받음으로써 선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24장 44절- 48절은 구약의 말씀을 요약하고 있다. 44절에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에 기록된 것’을 말한다. 이 말씀들은 구약 성경을 말한다. 즉,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핵심을 요약해서 말씀한다. 성경의 핵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45절에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성경 해석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성경을 구속사적 관점, 언약적 관점, 성전의 관점,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다. 예수님의 구약의 해석 방법은 선교적 관점이다. 성경을 볼 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은 선교를 명령하기 위해 구약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44절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이다’고 하셨다. 여기서 ‘나’는 예수님이시다. 성경의 주제와 핵심이 ‘나’ 곧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46,47절에서 ‘나’ 인 예수를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한다. 46절과 47절에서 나타난다. 46절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라고 말씀한다. 이 구절을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경을 가장 핵심적으로 요약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이라고 한다. 성경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46절 끝에서 ‘것’과 그리고 또 하나가 더 있다고 말씀한다. 46절은 성경 전체의 요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의 내용이 있다고 설명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또 하나의 주제는 47절에서 말씀한다. 47절은 “또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서 전파 될 것”이라고 한다. 끝 부분의 ‘것’은 46절의 ‘것’과 동등한 또 하나의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46절을 요약해서 표현하면 ‘세계 선교’이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주제(신약 성경도 동일 한 주제임)를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또 하나 세계 선교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전부가 아니다. 또 다른 주제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 선교’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셨고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원을 완성하신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구원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선교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구속의 사역의 시작은 예수님이 했지만 선교의 사역을 통한 이 세상에 대한 구원의 완성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완성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위임된 일을 그의 제자들이 순종하여 실행할 때 이 세상의 구원은 완성되는 것이다. 48절에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 위임을 받았다. 세계 구원 역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선교 활동을 통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4. 요한복음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라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듯이, 이것은 또한 선교적인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선교는 예수님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처럼 세상에 보내지는 것이다. 지상명령에 대한 요한의 설명은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 20:21)라는 말로써 권한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들의 표현이 선포를 강조한 반면, 요한의 표현은 더 광범위하고 어떤 면에서는 더 근본적이다.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발견되는데, 예수님은 명백하게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의 기도는 원래의 제자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서 믿을 사람들도 위한 것이다(17:20). 그들의 일치(연합)를 통해 예수님이 아버지에 의해서 보내졌다는 것을 세상으로 믿도록 설득해야 한다(17:21).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떠난 후에 그들은 자기보다 더 큰 일들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12).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예수님이 완성한 구원의 일의 결과인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사에서 그들의 위치로 보아서 제자들은 선포할 더 큰 메시지를 가질 것이고 그 메시지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보다 더 멀리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무장된 제자들은 세상에 예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내지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지상명령에서 중재로서의 선교를 볼 수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 누가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할 것을 나타낸다. 이 말씀은 교회사에서 많은 논란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 이러한 용서를 중재하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와 사역을 계속하는 제자들과 교회가 될 것이다.
모든 경우에 그리스도 자신이 지상명령을 주셨다. 선교 명령은 그의 사역과 그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지상 명령은 모든 나라들이나 모든 피조물들이 있는 세상으로 보내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선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마 10:6)을 뛰어 넘어 예루살렘으로부터 밖으로 나간다. 교회의 선교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과 나라와 족속에게로 확장하는 것이 세상 안에서와 세상으로서의 선교이다.
지상명령의 선교는 모든 선교는 부활한 후에 주님이 나타났을 때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님이 무덤 속에 머물러 있었다면, 선포할 복음이 없었을 것이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대한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써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고 성령의 시대가 곧 시작될 수 있었다.
선교는 그리스도 자신이 각각의 표현의 중심에 있다. 선교는 그의 파송이며(요한복음), 그의 권세, 가르침과 임재이며(마태복음), 구속과 용서의 일이며(누가복음), 또는 표적이 행해지는 그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마가복음). 지상명령의 메시지와 사역은 그리스도 자신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든 선교의 표현에 있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작한 사역을 계속한다. 그들은 죄에 대한 대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골고다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독특한 사역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새롭고 더 신비로운 방법으로 이러한 구원의 중재자들이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파해서 모든 나라들을 제자로 삼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지상에서 행했던 것들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권능을 가지고 구원과 용서의 완성을 사역을 선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과 명령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은 그 선교 명령이 교회가 해야 할 많은 좋은 일들 중의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는 불가피한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것은 교회의 모든 소명의 통합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이 없다면 어떤 좋은 일도 선교라고 간주될 수 없다. 이 지상 명령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절정이고, 그의 구속사적인 사역의 논리적인 결론이며, 교회에 대한 진격 명령이며, 구원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할 때의 작별인사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그의 지상 사역을 멈춘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기쁘고도 엄숙한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 용서와 하나님의 나라의 변화의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선교 명령에 대한 그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동시에 깊은 경이감을 갖게 되고 큰 특권 의식을 불러일으키며, 절박감을 전달받는다.
VIII. 분산화와 확산으로서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신약성경 선교는 분산화와 확산으로 나타난다. 야곱의 우물 곁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여자는 예배의 올바른 장소에 대하여 묻는다(요 4:20).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는 지리적으로 예루살렘도 아니고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 4:21-24).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탈 예루살렘화와 탈 지역화를 시킨다. 그러므로 선교는 지금 있는 곳에서의 예배가 온 세상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선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예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배는 선교의 동력원이자 목표다. 선교를 할 때 열방이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려면 먼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시 67:3-4)
선교사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로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시 104:34) 라고 즐겁게 노래해야 한다. 그렇게 노래하지 못한다면 결코 “열방이 기뻐하게 하라”고 외치지 못할 것이다. 선교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끝난다(존 파이프. 2011).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헌정되지 않은 것을 지적한다(김득중. 2012). 설교의 첫 번째 부분에서 이방 땅에도 계신 하나님(7:1-34)을 볼 수 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첫 부분은 이방 땅에도 계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팔레스타인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이방인 땅에 이방인과 함께 계시는 분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이방 땅 어디에나 현존해 계시며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요, 성지임을 강조한다. 팔레스타인만을 성지로 보는 것을 배격하고 있다. 스데반의 설교는 성지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만 집착하는 다른 초대 기독교인들, 특히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스데반의 이런 열린 사상 때문에 기독교가 유대인 기독교의 편협한 민족주의와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고 또 유대교 내의 종파적인 형태를 벗어나서 세계 종교로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설교의 두 번째 부분에서 성전에 계시지 않는 하나님(7:35-53)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공격하는 내용으로 ‘손으로 만든’ 성전을 ‘손으로 만든’ 우상과 동일시하면서 성전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와 솔로몬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 성전도 ‘손으로 만든’ 것으로 우상이라고 지적한다(7:14).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와 솔로몬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는데 그 성전도 ‘손으로 만든 것’ 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손으로 만든 성전도 우상이라고 지적하며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지 않는 분이라고 역설한다(7:48). 사람의 손으로 만든 작은 건물이 하나님께서 안식할 처소는 되지 못한다(7:49). 왜냐하면 ‘하늘이 그의 보좌요 땅은 그의 발등상’이기 때문이다. 곧 우주와 세계가 모두 하나님의 거처이다. 스데반의 이 같은 비판과 거절은 예루살렘 성전에 집착하는 그 지역 기독교인들 곧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성전관을 배격하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온 우주를 하나님의 집으로 보는 보편주의적 사상이 들어 있다. 스데반이 성전을 비판해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였지만 스데반의 사상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사상이다. 즉 예수님 자신이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막 14:58)고 하신 말씀과 연결된 것이다. 스데반이 갖게 된 탈 팔레스타인, 탈 예루살렘, 탈 성전적인 세계주의적인 보편주의, 혹은 탈 유대적인 이방 지향적 경향 때문에 초대 기독교는 드디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며 성장하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 시대에 여호와의 성전은 어떤 지리적인 위치에 놓여 있든 상관없이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는 이방인들이 포함될 뿐 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어디에 있든 살아있는 성령의 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국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구성원들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그리고 너희도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19-22).
흩어진 회집(분산모임) 사상이 베드로 전서 2장 5절에 분명히 나타난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제사장, 희생제물, 성전과 같은 구약성경의 제의적 용어들이 디아스포라 교회에 적용되어 신자들의 공동체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가 된다. 하나님의 임재가 분산화 되는 것처럼 선교운동도 또한 완전히 탈 예루살렘으로 분산화 된다. 사도행전 1장 8절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동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이 여전히 중심에 있는 원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선교는 여러 개의 중심지들을 갖는 것으로 발전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선교를 위해 보내는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예루살렘을 대체한다. 그는 나라들이 모이는 중심점이다(Blauw. 1962).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실체를 파악하는 데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한동안 초대교회의 권위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실 성령의 선교적인 운동은 이미 선교를 분산시켰다.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선교의 파송과 보고의 중심지가 되었다(행 13:1-3, 14:26-28). 에베소는 후에 골로새와 리커스 계곡에 복음이 확산되는 새로운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세기 동안 복음은 다양한 선교중심지로부터 확산되었다. 로마, 아일랜드, 런던, 시카고, 나이로비, 서울,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퍼졌다. 초대교회에서도 복음은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만 확산되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두로와 시돈 출신이었다(행 12:20). 선교는 지금도 분산과 확산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IX. 타문화로서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신약 성경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의 타 문화화(transculturalization)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성경의 선교의 분산과 성령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재구성함에 따라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교회의 타문화화가 이루어진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될 때, 그들은 단순히 유대교의 개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논쟁거리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는 그런 개종의 합법성에 대해서 계속 의심했다. 결국 초대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교의 개종자가 되는 것에 관계없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 완전히 포함되는 것을 허락했다(행 15장).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옛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외인이었던 이방인들(11-12절)은 평등하게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 둘로 새로운 하나의 백성을 만들었다(13-14절 상)고 한다. 그리스도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을 허물었다(14절하). 골고다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각각의 구원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화목의 일을 완성했다(13, 16절). 새로운 영적인 성전과 하나님이 거할 장소는 이러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다(엡 2:19-22).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8-29). “너희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자니라 여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다이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0-11). 비 헬라인에 대한 일반적인 단어인 야만인들도 포함된다. 스구디아인이 특별이 언급되어 있다. 스구디아인은 야만인들 중에서도 가장 야만인으로서 유대인들이나 헬라인들 모두에게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거의 모든 경계의 벽을 넘어서게 된다. 즉 종교적 배경, 사회적 지위, 민족 유산, 성, 경제적 신분,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 결정적이고도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신의 정체감을 기억하며 행동해야 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일어나고, 이들은 유대인의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움직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문화는 어떤 종류의 새로운 통합된 기독교 문화로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교회는 타문화화 된다. 이슬람교는 획일적인 사회질서와 문화를 상세히 규정하는 꾸란에 근거한 이슬람교의 획일 문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추구한다. 꾸란 그 자체는 엄밀히 말해서 방언으로 번역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슬람과 다르다.
신약 성경은 문화적 획일화가 아닌 포용주의 측면에서 교회의 문화적 세계화에 대해서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표현은 복음을 실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도의 더 넓은 일치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다.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에 대한 열심과 성전 제의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유대교의 양식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표현했다(행 21:20-26). 그러나 이방인들은 구약 성경의 윤리기준을 유지하면서 유대교의 의식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에 대해서 자유로웠다. 이것이 바로 토착원리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시민권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에 있다(빌 3:20). 베드로는 교회를 하나님이 택하시고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벧전 1:1).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은 당대에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신약은 선교의 다원문화주의(Multiculturalization)를 반대하고 타 문화화(transculturalization)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몇몇의 구절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의 본래 언어인 아람 언어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복음의 메시지는 번역이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그 자체가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번역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가 번역될 때 그것은 새로운 원동력을 획득한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의 문화도, 예수의 언어와 문화도, 초대교회의 문화도 절대화될 수 없고 모든 곳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효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구세주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기록된 증거인 신약성경의 권위 있는 메시지는 이미 상황화된 메시지다.
X. 사랑의 기초인 선교(데이빗 보쉬. 2000)
예수님의 선교의 기초는 사랑이다. 사랑은 신약성경의 메시지의 본질이고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렇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이방인들에 대해 별로 언급한 것이 없고 그들과의 접촉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교회의 선교에 난처한 것이 될 때도 있다.
예수님의 선교의 진정한 기초는 경계선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당시 종파들, 즉 바리새파, 사두개파, 혁명당, 그리고 엣세네파와 구별해 주었다. 바리새파도 이방인 선교를 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이 개종자 한 사람을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는 열성을 보인다고 말씀한다(마 23:15). 예수님의 선교가 그 당시 다른 종파와 다른 것은 이방인에 대한 개념이 아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예수님은 다른 교사들과 달리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을 모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라’고 하기 위해 부르셨다. 예수님은 전통적인 유대 가치관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점들에 도전하셨다. 즉 그는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유대 가치관에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이 윤리적 요구사항에 있어 사랑의 계명,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부각시킴으로써 근본적 개혁을 하셨다. 예수님의 기적 행위의 관심은 인간적 궁핍의 모든 면에 관여해서였다. 곧 가난, 질병, 굶주림, 죄, 그리고 마귀적 착취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가난한 자들, 눈먼 자들, 절름발이, 나병환자, 굶주린 자들, 통곡하는 자들, 병든 자들, 보잘 것 없는 자들, 과부들, 갇힌 자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 종교적 의무를 다하느라고 지치고 피곤한 자들, 갇힌 자들, 잃어버린 양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예수님의 경계선을 초월하는 사랑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같은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을 ‘죄인들’과 ‘율법을 모르는 바보들’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관심은 유대 사회에서 변두리에 몰린 자들과 제외되기까지 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사마리아 사람, 여성, 아이들, 나병환자. 세리들과 윤락여성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자들의 집을 드나들었다. 예수님은 탕자의 비류를 들어 행위와 성취의 오만으로 인한 인간 스스로의 의롭다함에 대해 뿌리를 잘라버렸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유대 민족적인 모든 독선과 혈통의 자만심을 폭로하였다.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겠는가? 율법사는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눅 10:36-37)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 비유에서 표명된 가장 과격하고 혁명적인 요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5:44, 눅 6:27-29).
예수님의 선교가 사랑이라는 것은 그의 활동이 비록 이방인 중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제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나가서 선교한 것 보다 더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선교사의 원형이었다. 단순히 선교는 동정하는 것 이상이다. 하나님은 변두리의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사랑이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
XI. 선교의 근거인 고난(데이빗 보쉬. 2000)
예수님의 선교의 근거는 고난이다. 승리가 아니라 고난에 있다. 예수님은 ‘주의 종’으로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되어 있다.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입술을 통한 말의 증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말 없는 고난도 암시되어 있다. 이사야 53장은 구약에서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선교의 차원을 제시한다.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그래서 많은 민족 가운데 제사장 직분을 맡은 소명을 받았다. 제사장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다. 이사야 53장은 이런 봉사가 때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죄 없는 고난의 형식을 취하게 되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제사장은 스스로 자기가 제단 위에 바쳐져야 할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이 민족들 가운데서 존경을 받고 경외를 받으며 강력한 때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강력하게 되면 될수록 이스라엘 존재 의미에 주어진 선교적 차원의 표시는 약해졌다. 오히려 그럴 때 민족들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모든 세상적 권세와 영광에서부터 벌거벗기면 벗길수록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존재의 선교적 차원을 더욱더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이스라엘은 민족들 간에 제사장의 존재로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수치스런 실패를 맛보는 시기에 이스라엘은 이 땅의 멸시와 모든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자 그리고 관원들의 종이 되었다(사 49:7).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에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때에 왕과 왕자들이 와서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를 택한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라”(사 49:7)고 한 것 때문이다.
신약에서도 가장 높고 가장 깊은 선교 관념은 인자의 고통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삶을 내어준 골고다(막 10:45)에서 절정에 달한다. 멸망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승리의 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은 나사렛 예수의 원형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한 성공적인 선교로 인해서가 아니고 또한 그의 기적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감격스런 긍정적 반응에 따라서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예수님은 가장 신실한 선교사였다.
나사렛 랍비,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그의 지도하에 앉아서 율법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눈에 띄는 성공과 승리주의의 범주 안에서 선교를 정의하는 수다스런 사람들의 행동을 거부한다(고후 2:17). 반대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붙잡힌 바 된 자로(2:14), 약한 데서 기뻐한다(12:9). 약함, 역경, 고통은 바울의 서신에서 중요한 개념이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기들 스스로 내세운 ‘지극히 큰 사도들’(11:5, 12:11)보다 부족함이 없는 자기의 사도직을 두둔한다. 선교는 강함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함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바울은 이 보배를 질그릇에 받았는데 이 사실에 대해 그의 고통이 넘치도록 증거해 준다(고후 6:4-10, 23-28). 더욱이 고통과 역경은 사도 바울의 삶에서는 보편적 경험이지만 성공의 범주 안에서 생각하는 자들에게 이런 것들은 걸림돌로 남는다. 바울 선교와 고린도에 있던 그의 대적자들의 선교와는 차이는 십자가이다. 고린도후서는 명백하게 선교를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것도)와 동일시하여 보여준다. 골로새서를 통해 볼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에 채우면서 고난 가운데 기뻐한다(골 1:24).
예수님이 가끔 사용한 누룩, 빛 그리고 소금의 비유적 표현은 경계선을 넘는 것과 퍼져 스며들어 가는 개념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가 다 제용도에 쓰이지 않고 그냥 보관되면 그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각각 가진 본질은 과감하게 소모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으로 찾으시는 가장 깊은 의미는 약한 증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힘없는 대변자가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다. 인도를 받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항상 복음의 증인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
XII. 복음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정흥호. 2014)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복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후 5:19, 행 9:20, 고전 2:2, 고후 4:5, 행 2:24, 4:2, 33, 8:35). 선교는 이 복음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으며”(딤전 1:5), 그의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고 하셨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자이신 독특한 인격을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이 가르치는 윤리적인 교훈에 불과하게 된다(마 22:42, 요 8:23-24). 타 종교와의 대화에서 다 양보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양보해서는 안 된다. 오직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완전하게 갖추신 분이시다. ‘예수’는 인성을 가리키며 ‘그리스도’는 신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롬 1:3-4)분이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빌 2:6-7)고 말씀하는데 이처럼 겸손과 섬김의 모델을 보여주신 분이다.
가장 단순한 기독교의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빌 2:11)를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주인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주님이심을 믿고 또 그런 분임을 선포해야 한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더불어 십자가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십자가의 사건이 없다면 복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살고 일하고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벧전 2:24)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벧전 3:18) 하셨다. 그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롬 6:4)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히 7:16)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주님이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마 28:20),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예언된 분이시다. ‘여자의 후손’(창 3:15)은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갈 4:4).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히 그 나라를 굳게 세우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보전하실 것임(사 9:7)을 말씀하셨고, 혈통적으로도 그렇게 오신 분이시다. 그 분은 인간의 육신적인 관계로 말미암아 잉태된 분이 아니며 ‘하나님이 함께 하는 분’(임마누엘)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였다(사 7:14).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 1:18). 신약의 그 분의 세계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6). 베들레헴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며 그분은 본래 태초부터 있었던 분임을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다(미 5:2). 실제로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마 2:1, 눅 2:4).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고난과 고통을 받게 됨(사 53;4)을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온갖 조롱과 모욕과 고통과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이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이었다(요 19:30). 그 분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난 부활의 주님이시다(시 16:10, 마 28장, 눅 24장).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그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28:20).
XIII. 복음의 독특성과 배타성
신약은 복음의 독특성과 배타성을 말한다. 복음의 중심에는 자기부정의 개념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자기 부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다(빌 2:5-8).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완전한 결실을 맺으셨다(요 12:24). 성육신은 섬김의 도를 보여준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셨다(요 13:14). 제자들 중에 누가 더 큰 자인가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났을 때, 큰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3:11). 선교지에서 섬김의 도를 보여주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우월의식에 빠져버리고 자민족 혹은 자문화중심주의에 빠지게 된다.
복음에는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배타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임을 말씀하고 있다(요 14:6). 하나님은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이시며(살전 1:9), 다른 신들은 모두 말도 하지 못하는 우상에 불과하다(고전 12:2).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 된 인류 사이를 중보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딤전 2:5).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며(요 6:63),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마 24:35), 그를 저버리고 그의 말씀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을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것(요 12:48)이라고 선언하셨다. 주님은 죄를 용서해주시고(막 2:1), 영생을 주며(요 17:2),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다(마 28:18).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요 11:25). 이것이 복음의 독특성임과 동시에 배타성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이 복음의 말씀은 양보도 할 수 없고 타협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또한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열방 나라들에서의 선교를 볼 수 있다(크레익 오트. 2012).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시작부터 열방의 나라들이 보인다.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소개하는 시므온의 기도는 이사야 49장 6절을 인용해서 이방인들과 관련한 그의 메시야적인 역할을 암시한다. 즉,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 세례 요한은 이사야 40장 3-5절을 인용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선언한다(눅 3:6).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자기 자신을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소망의 성취라고 하면서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다(눅 4:18-20). 마태는 예수님이 이사야 42장 1-4절을 인용한 것을 언급함으로써 그가 이방인들에게 정의와 소망을 주는 종이라는 것을 주장한다(마 12:18-21).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도래는 나라들에 대한 선교를 예언한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서 분명히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지상 사역에서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왔고 이방인들에 대한 사역은 2차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마 15:24, 막 7:2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시작하고 이스라엘을 통한 복이라는 구약 성경의 비전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는 것도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집에 한정되었다(마 10:5-6).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사역을 완성한 후에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완전히 시작될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빼놓지 않은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요 11:11). 이와 대조적으로 이방인들은 종종 예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였다.
① 동방 박사들의 경배(마 2:1-11)
② 로마의 백부장(마 8:1-13)
③ 수로보니게 여인(마 15:22-28)
④ 야곱의 우물에서의 사마리아 여인(요 4:7-29)
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십자가 현장에서의 또 다른 로마 백부장(막 15:39)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제자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불렀는데(마 5:13-16) 이것은 열방 나라들에 대한 빛이라는 이사야의 종에 대한 반응이다(사 42:6, 49:6).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시킬 때, “기록 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라들이 시온에 와서 예배드리는 종말론적 비전인 이사야 56장 7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이방인을 포함하고 복음을 나라와 열방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미래에 둔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무리 밖의 사람들이 하나의 무리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될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동과 서로부터 와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들어올 날을 고대한다(마 8:11).
예수님은 감람산 강화에서 마지막 날들에 대해 말씀한다. “이 천국 복음의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이 말씀은 선교의 운동이 바뀔 것이며, 복음의 나라들에게 전파될 것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이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재림과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이전에 성취될 조건이다. 이와 동일한 생각이 마태복음 26장 13절에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의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마 26:13).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가르침과 그의 제자들의 처음의 사역은 주로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춘 구약성경의 국가 아래에서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또한 열방 나라들에 대한 장래의 의도적인 선교를 예상한 것이었다. 이방인들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긍정적인 반응과 그의 가르침은 구속의 완성과 성령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될 선교를 예시하는 것이다.
XIV. 하나님 나라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신약의 선교에서 열방 나라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영적인 차원을 취하고 더 이상 지역이나 민족을 중요시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서 중요한 하나님 나라가 선교와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1. 세상 가치를 뒤엎는 나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구성하는 가치는 외적인 형태로부터 내적인 변화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대조가 된다. 온유함과 겸손의 청지기관과 복수하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들의 특징을 이룬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사람과의 관계이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세상이 지켜야 할 방식으로부터 이러한 가치들을 만들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2. 하나님 나라의 징표
예수님이 하셨던 기적, 치유,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축귀들은 그의 청중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표적이었다(마 12:28). 이러한 행위들은 악의 세력, 속박과 고통이 이러한 메시야적 왕에게 굴복한다는 것을 담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마귀의 권세는 하나님과 그의 통치를 직접 반대하는 것들이다. 질병, 무지와 죽음은 마귀 권세의 결과들이다. 이런 권세들은 극적으로 파괴되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표적으로서 같은 일을 하라고 임명하셨다(눅 10:8-11).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 있지만 예수님은 미래의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라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생애에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했지만 완성한 것이 아니며 그의 재림 이전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예상한 것도 아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말씀을 수용하는 것은 때로 사단의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확산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산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18-23절). 알곡와 가라지 비유는 이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선과 악이 공존하며(24-30절), 이 시대의 마지막에 가서야 최종적인 분리와 심판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36-43절). 하나님 나라는 선과 악을 모두 끌어올리는 그물과 같아서 마지막 날에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분리되고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는다(47-50절). 이러한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는 비록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시작되었지만 마지막 날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을 알려준다.
겨자씨의 비유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시작을 훨씬 초과해서 성장할 것을 보여준다(31-32절). 누룩의 비유는 거의 감지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33절).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며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44-46절). 이러한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산과 실현은 심판의 날을 향해 움직이는 과정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그날까지 선과 악이 공존할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확산은 악의 세력이 갑작스럽거나 아니면 폭력적인 전복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영향력과 확산은 감지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할 것이다. 성장의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발전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역사임을 묵시적으로 알려준다(고전 3:6-7).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는 것은 기꺼이 지불할 대가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는 악인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고 의인들이 보상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실현될 완성의 날이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지역적, 혈통적, 세상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선과 악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사람 자체의 됨됨이지 어떤 지역이나 학력이나 권력, 재산의 구분이 아니다. 믿음은 그것을 뛰어넘고 초월하는 것이다.
4. 이방인들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될 날을 내다보았는데(마 8:11-12, 눅 13:29), 이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포함될 것이라는 틀림없는 언급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민족적 배경에 관계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로 구성될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만찬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15절)라고 말한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큰 잔치의 비유를 말해줌으로써 이에 응답한다. 초대받은 모든 손님들은 오지 않을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의 종들을 거리로 보내어 다른 사람들을 오게 했다. 이것은 의심 없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들에게 향하는 선교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로 끝맺는다.
XV.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음(크레익 오트. 2012)
사도행전에서 나라들과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새 피조물들에 대한 복음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의 종말론적인 비전은 열방과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을 보인 반면에 누가는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라와 열방에게 나가는 것을 묘사한다. 복음의 확산과 과정이 사도행전의 전체윤곽이라 할 수 있다.
(1) 1-7장: 예루살렘에서의 복음
(2) 8-9장: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복음
(3) 10-28장: 땅 끝까지
사도행전 전체에는 문화화에 대한 교리가 산재해 있다. 그 모든 책은 복음의 메시지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그러나 계속해서 처음에는 유대인의 문화적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1-12장, 15장), 후에는 이방인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는 것(13-14장, 16-28장)에 관한 것이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자들의 기대는 그들이 “주여,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입니까?”(행 1:6) 라고 물었을 때 드러난다. 그들의 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때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가 어느 날 올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아니다. 그것은 다른 시대에 올 것이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 8).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는 선교는 인간에 의한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한 권능의 선교가 될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없이는 제자들이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가지고 못하며, 이방인 신자들을 얻지도 못하고, 어떤 사람도 설득하지 못했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과 교회의 선교는 사실 그들을 통해서 그리고 때로는 그들에 반해서 실현된 하나님의 선교임을 보여준다.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그의 백성으로 부르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나라들에게 복음의 증거를 시작하고, 동기 부여를 하고, 권세를 주고, 완성시킨 분은 바로 성령의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이시다.
‘증인’이라는 헬라어 ‘martus’는 사도행전에 39번 등장하는데 비해서 누가복음에는 단지 3번만 등장한다. 법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은 변호사, 판사 배임원의 역할이 아니라 증인의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인 증인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다. 증인은 권세는 없지만 그가 증거 하는 진리에 대한 설득력이 있다. 증인들은 변호사들처럼 수사학적인 연설의 능력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증거로 제출하기에 합당한 진실에 대한 증언을 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세상의 진리에 대한 적합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삶과 심지어 죽음을 포함하는 산 증인이어야만 한다. 제자들은 추상적인 교리나,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정치적인 운동의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활에 대한 진정한 목격자들이다(행 4:33). 사도행전에 기록된 설교들은 일관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상). 성령은 제자들의 증언에 권능을 줄 뿐만 아니라 성령 자신이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행 5:32, 요 15:26).
사도행전 1장 8절의 ‘증인’은 이스라엘의 역할과 후에 이방인들에 대한 빛으로서의 메시야의 종에 관한 구약 성경의 이사야의 말을 반복한 것이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하셨으니라”(행 13:47, 사 45:22, 49:6). 이 말은 또한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하늘의 증거를 가르치는 구약 성경을 생각나게 한다(시 19:4).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은 겸손한 증인이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6절에서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온 세상을 소동케 했다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말을 기록한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제국의 권세보다 조금 더 강력하거나 더 성공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증거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통치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날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할 때 올 것이다. 제자들은 오순절의 기적을 통해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복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탄생과 성령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바벨탑의 저주가 극복될 것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유대의 오순절 순례자들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나 라틴어를 알았기 때문에 언어의 기적은 이러한 청중들에게 불가피하게 동질감을 갖게 한다. 방언의 기적은 더 큰 어떤 것을 암시한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나라들에게 복을 줄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이제 더 이상 유대인의 말을 배울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는 곧 그들 자신의 말로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것이다.
열방에 대한 선교의 점진적인 시작: 초대 교회의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느리게 점진적으로 되어졌다.
(1) 오순절: AD 30년
(2) 사마리아 선교: AD 31-32년
(3) 아라비아의 바울: AD 32-33년
(4) 길리기아와 수리아에서 바울의 선교: AD 33-42년
(5) 해안 지역(룻다, 사론, 욥바)에서 베드로의 선교: AD 34년
(6) 고넬료의 회심: AD 37-41년
(7) 안디옥에서 첫 번째 이방인 교회의 탄생으로 이끈 박해와 디아스포라 : AD 41년
(8)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열 두 사도들의 가능한 출발: AD 41-42년
(9)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여행: AD 45-47년
(10) 예루살렘 공회 : AD 48년
신앙의 초창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연장이며, 이방인들이 그 공동체에 들어오려면 개종자가 되어야만 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 조건적으로 편입을 허용하였다. 오직 할례와 율법의 완전한 준수를 받아들이는 것, 즉 개종자가 되는 것과 유대인으로 귀화하는 것만을 통해서 이방인이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개종을 주장하지 않는가? 우리 교회, 우리 교단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신자로 보지는 않는가? 선교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진정한 사명이 되기 위해서는 개종자나 유대인 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문화 가운데서 건져내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복음을 예루살렘 밖으로 전파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신다. 스데반의 박해 후에 “사도 외에는 모든 사람이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행 8:1). 복음은 헬라 유대인인 빌립을 통해서 사마리아로 들어간다(8:4-8). 사도행전 8장 후반부에서 최초의 아프리카 그리스도인이 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설명한 사람은 빌립이었다(8:26-40). 이방인의 사도는 처음의 12사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전에 교회의 박해자였던 다소의 사울이다(9:15). 베드로는 초자연적인 황상이 세 번 되풀이된 후에야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기꺼이 들어간다(10:9-11:18). 다른 사람들은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하고(11:1-2), 베드로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후에야 “그러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었다”(11:18)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분명히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이방인 선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서 멀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11:9절하). 그러나 유대 출신이 아닌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자신들도 모른 채 첫 번째의 이방인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11:20-21).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는 이방인 교회의 발전에 대해서 회의적이어서 바나바를 보내 그 운동의 정체를 조사하게 했다(11:22-23). 안디옥의 이방인 교회는 이방인 세계에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보낸 첫 번째 교회가 되고 중요한 선교사 파송 기지로 남아 있다(13:1-3, 14:26-28, 15:35). AD 48년에 예루살렘 공회는 교회에서 구약 성경의 율법의 위치를 결정하고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 사이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소집된다(행 15장). 이 공회에서 교회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공식적으로 거절된다. 이방인들은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도행전 15장은 때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해방 선언’이라고 불린다. 복음의 진보는 모세의 율법에서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문화로부터도 해방인 것이다.
열방에 대한 선교는 초대교회에서 시간을 두고 발전하였고 의심과 반대가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때로는 예상치 못한 극적인 방식으로 개입해서 교회가 선교적인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동원하고 이방인들을 그의 새로운 백성으로 포함시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질은 있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승리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국 그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 16:18). 이것이 선교를 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
누가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확산되고(행 6:7, 13:49) 계속해서 ‘자라고 증가하며’, ‘강력하게 자라고 승리하는가’(눅 19:20) 라는 문구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역동적이어서 제자들의 사역을 거의 부수적인 것으로 만든다. 선교는 완전히 하나님의 선교다. 결국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내가 헌신한 것이 아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나를 사용하시면서 실패도 하시고 성공도 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내가 실패하고 내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선교다.
XVI. 바울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바울은 선교사의 생애를 산 사람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와 하나님의 보내심을 생애가운데 보여준 선교사다.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회심과 소명은 바울의 사역에서 거듭 반복되어 나오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의 사역의 근거인 것으로 제시된다.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한다(딤후 1:11). 아나니아를 통해서 주님은 바울에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롬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고후 1:1)이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으니라(갈 2:8).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살전 2:4).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딤전 2:7)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교의 동기는 선교지의 다양한 필요와 궁핍이 아니라 주님이 택하셔서 내게 이 일을 하도록 하시는 부르심이 되어야 한다.
바울의 사역에서 거듭되는 중심내용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친히 역사하신다는 체험이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돌아볼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일이 이루어짐을 언급하였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후 12:10). 여기서 주어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골4:3).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한다”(딤후 2:25)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신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 이루어짐을 알고 있었다. 오늘날도 나의 사역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라는 고백만이 있어야 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파송의 의미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은 자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롬 1:5, 갈 2:8). 자신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것은 바울에게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바울의 선교신학의 출발점은 인간의 문제이다. 인간의 실존적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떠난 죄이며 이 죄의 보편성, 즉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이 죄의 문제로 인하여 심판의 대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롬 1-3장). 선교의 근거는 인종과 언어와 지역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 없는 분이시며 그를 통해서만이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진다는 것이다(롬 3-8장)(이현모. 2003).
복음은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은 이방인에 대한”(1:6)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회당에서 전도하고 거절을 당하면 이방인에로 전도하러 가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관행 속에 문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를 지었고 빛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다. 따라서 저들 모두가 동일하게 죄인이며 그리스도 안에 명백하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얻어야 한다(롬 1-3장).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셨다(롬 9:23-2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12-13)
바울은 선교의 긴급성을 말한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 10:14-15절). 이 말씀은 거부할 수 없는 말씀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보냄을 받을 때 사람들은 주님을 부르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것처럼 선교사가 파송되어져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를 끝낼 때는 그의 소명과 선교에 대한 주제로 돌아간다. 로마서 15장 14-21절에서 이방인 사도로서의 바울의 자기 인식은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 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제사장의 사역과 제물이라는 용어로 말하기 때문에 나라들에 대한 선교 그 자체는 제사의 행위로 여겨진다. 선교는 순종해야 할 의무 그 이상이다. 과거에는 멀리 있었지만 가까이 나아와 어린 양의 피로 거룩하게 된다(엡 2:13). 또한 하나님의 예배자가 된 사람들보다 신자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 이상의 더 큰 예배의 선물이나 더 고상한 재물이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통해서 성령이 역사했기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파했다”(롬 15:19)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롬 15:19). 바울은 모든 도시나 마을에서 전도하지 않았다. 하물며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들은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 복음을 완전히 전했다고 했다.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핵심 도시들에 교회를 세운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의 교두보를 세운 것이라는 뜻이다. 즉, 새로 개척된 교회들이 성장해서 그 전 지역을 복음화 시킬 것을 확신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개척 사역은 완성된 것이다.
바울은 모든 경우에 어느 지역의 중심지에 복음을 전하는 것에 만족했고 그 메시지가 거기에서 퍼져 나갈 것을 신뢰했다. 이것은 비시디아 안디옥, 데살로니가와 에베소와 같은 교회로부터 복음의 전 지역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사실상 충분한 사례가 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회심이나 개별적인 교회를 세우는 것만이 바울 선교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보다 신자들을 재생산 하는 것이 완성되었을 때에만 어느 지역에서의 자신의 사역이 완성되었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라고 말한다. 그는 그 시대에 세상의 끝인 스페인까지 가기를 기대한다. 바울의 개척적인 목표는 아직 가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계속해서 가서 성장하는 교회들을 더 세우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전략이 바로 선교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9-23절에서 그의 선교 수단과 삶의 방식에 있어서 융통성과 적응성을 보여준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얻는 것이다. 그들을 얻는 것은 단순한 회심만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완전히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해 개인적인 권리를 포기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오직 그렇게 할 때만이 가장 높은 상을 받을 것이다(고전 9:24-27).
바울의 지상명령을 볼 수 있다. 복음서에는 나라들을 복음화 시키고 제자 화시키라는 명백한 사명과 명령이 주어있고 바울 자신의 삶과 사역에는 분명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지만 바울 서신에서 복음화 시키거나 선교를 감당하라는 어떤 명시적인 권면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로마서 15장 19절에서 이미 세워진 교회들의 예상되는 성장은 교회들이 사실상 신앙의 전파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추정한다. 교회들은 선교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이해했다. 로마서 10장 14-15절은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전달자들의 필요성을 명시적으로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화목의 사역에 대한 그의 논의의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의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화목의 사역자들이 되고자 원하는 신자들을 간접적으로 포함한다. 바울은 자신을 신자들의 모델로 소개한다. 이것은 자연히 복음화와 선교에 대한 그의 관심을 포함하는 것이다(고전 4:16, 11:1). 빌립보서 1장 14-18절에 바울은 자신의 투옥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용기 있고 두려움 없이 전하게 된’(14절) 익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비록 어떤 사람들은 나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 빌립보인들이 복음에 참여하는 것(빌 1:5)과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것(빌 1:27, 30)과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빌 2:16)은 복음의 적극적인 선포를 포함하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7절에서 영적인 전쟁에 대해서 논의할 때,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취하라고 말한다. 15절은 “네 발이 신을 신을 때, 무엇이든지 너로 하여금 평안의 복음을 전하도록 준비시킬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 복음은 단순 방어 자세가 아니라 공격 자세다. 신자는 복음을 담대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전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골로새서 4장 5-6절에서 바울은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세운 교회들은 단순히 사도적 선교의 수혜자들일뿐만 아니라 바울의 선교에서 그들이 지원하는 동역자들을 보냄으로써 그 일에 적극적인 동역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회들이 이런 식으로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바울의 관심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반영하는 공동체로 성장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들이 닮을 수 있고 닮아야 하는 것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런 공동체들을 통해서 복음은 땅 끝까지 구현되고 전파될 것이다.
XVII. 일반 서신서에서의 선교(크레익 오트. 2012)
일반 서신들에서도 선교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베드로 전서는 세상에서 교회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진 뚜렷한 차이가 나는 공동체인 사회 속에서 그 존재를 다루는 선교 문서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박해를 직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복음에 대한 반대가 있어서 복음 증거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고난과 비방에 직면해서 베드로는 극빈자들에게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4-15상)고 권면한다. 교회의 삶의 방식은 교회의 증거에 신뢰성을 준다. 말로써 증거와 설명이 수반되어야 하다.
베드로 전서 2장 1-11절은 선교에 대한 중요한 문구이다. 이 구절은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연속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5절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는 거룩한 제사장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적인 제물을 바치는 영적인 집이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를 영접하는 것과 거절하는 것은 사람들을 두 개의 그룹으로 구분한다. 멸망할 사람들과 영적인 집의 모퉁이 돌이 될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출애굽기 9장 5-6절, 이사야 43장 21절과 호세아 1장 9절, 2장 23절을 인용해서 교회를 설명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소명과 선교에 대해서 명확하게 기술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교회의 소명과 선교는 출애굽기 19장 5-6절에는 있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적 소명과 연속성 상에 있지만 그것은 더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실현된다.
① 택하신 족속: 인류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종족이나 인종적 집단 또는 경쟁자들로 구분되지 않는다. 구속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의 새로운 족속, 즉 하나님이 선택하고 창조한 족속만이 있다.
②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에서는 인류는 제사장들과 비제사장들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적인 집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의무를 갖는다. 그 공동체는 전체로서 이러한 제사장적인 방식으로 기능한다.
③ 거룩한 나라: 이 용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모든 나라들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④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이 백성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은 특권뿐만 아니라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봉사의 위치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회복을 기술하고 있는 구절인 이사야 43장 21절을 인용한다. ‘선포하다’(evangeilete)에 사용된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되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로운 행위를, ‘멀리, 그리고 널리 선포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이러한 소명을 실행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의 살아있는 증인이 된다. 이 의도를 놓치는 것은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이나 교회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특권으로의 부르심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이것이 또한 나라들에게 복이 되기 위한 아브라함의 축복의 약속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는 선교의 기초가 된다. 우리가 받은 자비는 선포의 동기이자 내용이 된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그의 청중들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집은 이 타락한 세상의 가치 체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들의 궁극적인 시민권과 충성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XVIII. 신약 성경의 결론(크레익 오트. 2012)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타락한 인간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그의 통치 아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의도는 개별적인 사람들과 백성들의 특별한 부르심을 통해서 펼쳐졌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나라들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복의 중재자들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선교는 더 구심적이어서, 나라들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그들을 하나의 예배자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미래에 나라들을 자기 백성으로 포함시키고, 어느 날 가장 먼 곳까지 사자들을 보내어 모든 나라의 백성들을 시온에 있는 자신에게로 모을 것이 계시하셨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종으로 실패했다. 그러나 메시야는 나라들에게 빛으로 올 것이고 구속을 완성할 것이다.
신약에서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언약된 메시야일 뿐 아니라, 선교의 방향을 바꾸어 자기 백성을 땅 끝까지 보내고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성령의 운동으로 시작했다. 이것은 모든 라라 출신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가 선택한 새로운 백성이 되는 방식이다. 그의 백성들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보여주는 성령의 거주하는 곳이 영적인 성전이 될 것이다. 교회는 여호와의 참된 종이자 나라들에 대한 빛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부르심과의 연속성 상에서 계속되었다. 박해와 영적인 반대에 직면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복음의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될 때까지 그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승리를 거두고 돌아와 모든 악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내리고, 세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그에게 예배할 자기 백성들을 모든 나라들로부터 모을 것이다. 그 종말론적인 비전은 실현될 것이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