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는 일찍부터 두 언어로 전승되어 왔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된 그리스어역 구약, 일명 칠십인역(LXX)이다.
칠십인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70 또는 72명의 번역자가 번역했다는 전설 때문인데, 실제로는 여러 번역자들이 100년 이상 걸려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 이스라엘 본토를 떠나 그리스 문화권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른다)을 위해 쓰여진 성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칠십인역에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에는 없는 몇 권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교에서는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 '얌니아'라는 지방에 있던 예쉬바(Yeshiva)라고 불리는 유대인 랍비들의 아카데미에서 구약성경의 정경을 결정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요한난 벤 자카이라는 랍비가 주도한 이 아카데미는 어떤 책들을 '거룩한 책'에 포함시킬 것인가로 의논한 끝에 히브리어로 씌어진 39권의 책만을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공식 선포하였고, 이후 유대인들은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초기 기독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보다는 그리스어 구약성서(칠십인역)를 경전으로 받아들였는데, 거기에는 히브리어 구약성서에는 없는 소위 외경이라고 하는 책들이 더 편집되어 있었고 그것이 그대로 가톨릭의 경전이 되었다. 가톨릭에서는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그리스어 외경을 히브리어 성경에 들어있는 39권 책과 동일하게 영감 받은 권위 있는 제2의 경전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종교개혁 당시부터 외경의 경전성 문제가 논의되다가 끝내 경전에는 들어올 수 없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2경전(외경)에 들어가는 책은 역사적으로 변천되어 왔다. 또 편집 형태에 따라 책의 권수도 일정하지 않다. 1977년에 나온 우리나라의 신?구교가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 보면 제2경전은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다니엘서,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이상 9권이다.
신약 성경의 정경화는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문서로 기록된 권위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구약성서를 그들의 성서로 받아들였다. 이는 예수가 구약성서를 권위 있는 글로 인용했다고 기억되었으며, 복음서 저자들도 또한 예수의 사역을 해석할 때 구약성서를 이용하였다. 그들은 예수가 유대교 성서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성취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2세기에 유스티누스(Justinus)는 사복음서들이 유대교 성서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했다.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 리옹의 감독이었던 이레네우스(Irenaeus)는 사복음서 뿐만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 베드로전서와 요한일서도 높이 평가하였다. 비록 약간 축약된 목록이지만 우리가 ‘신약성서’ 로 알고 있는 성서의 수집록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1)로부터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4세기 초 가이사라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는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저작”은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는 자신이 확정한 22권의 승인된 책들 외에 논의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5권(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의 책들도 목록에 추가하였다. 현재의 신약성서 27권의 목록이 최종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367년이 되어서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367년에 쓴 그의 부활절 기념 서신에서 우리의 27권의 책들을 ‘구원의 근원들’로 제시하고 있으며, ‘정경’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 시기에 기독교 정경의 개념이 충분히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교회에서 거룩한 성경으로 읽혀져야 한다”는 정경의 원리를 명시하며 신약 27권의 목록을 확인하였고, 종교 개혁자들이 제기한 정경 문제에 대해 1546년 트렌트공의회에서 27권의 정경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신약 정경의 형성은 기독교 공동체의 처음 300년 동안 회람되던 많은 문서들 가운데 선택되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 의해 결정된 후 정경으로 읽혀진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 가운데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공동체는 그 책들을 사용하면서 다른 것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기독교 신앙을 일으키고 풍성하게하고 바로잡는 데서 그 책들이 드러낸 능력을 존중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약 정경은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나 회의에 의해 위로부터 부과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는 수 세기 동안 그 공동체의 전체적인 경험과 이해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번역의 역사
1. 1600년까지
존 위클리프가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기 이전에는 부분적인 영어 성경 번역이 존재했습니다. 7세기에 캐드먼(Caedmon)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일부, 그리고 다니엘을, 비드(Bede)는 요한복음을 비롯한 성경의 일부분을, 알드헬름(Aldhelm)은 시편을 비롯한 성경의 일부분을 고대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11세기에는 구약의 대부분이 수도원장 앨프릭(Ælfric)에 의해 고대 영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로마 카톨릭의 영향 하에서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Vulgate) 역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성경 말씀은 일부 종교인들과 지도층만이 접근할 수 있으며 이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앵글로 색슨 어라고도 불리는 고대 영어는 현재의 영어와는 매우 다른 언어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어의 영향을 받아 영어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한 중세 영어 시기에 이르러서야 영국에서 처음으로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번역 작업의 중심에 있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이름을 본따 위클리프 성경(1382)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 성경은 라틴어 불가타(Vulgate) 역을 영어로 번역한 것으로, 성경 말씀으로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성경이었습니다.
존 위클리프는 당시 카톨릭의 교리와 관습을 말씀에 비추어 비판하며 성경 말씀을 전하다가 평안하게 생애를 마감했지만, 사후 40여 년이 지난 후 교황의 지시에 의해 그 무덤이 파헤쳐져 강물에 버려지는 등 탄압을 당해야 했습니다. 위클리프 성경은 성직자에게 국한되어 있던 성경을 읽을 권리를 일반 대중에게 확대한 성경으로, 필사본으로 대중에게 전해졌습니다.
틴데일 성경(1525-1535)은 히브리 어, 헬라 어 원문을 기초로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에 의해 번역된 영어 성경으로, 구약 일부(창세기에서 역대하까지 윌리엄 틴데일이 사형에 처해지기 전까지 진행된 작업)와 신약이 번역, 인쇄되어 영어 성경의 대중화에 기여한 성경입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된 이후 독일에서 촉발된 원문 성경 번역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윌리엄 틴데일은 독일로 도피하여 루터의 영향력 하에서 영어 성경 번역을 시작하여, 번역된 성경책을 짐짝과 밀 부대 속에 숨겨 영국으로 들여와 보급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언어로 백성들이 성경을 소유하고 성경 말씀을 읽게 되면 교회의 권력과 재정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여긴 성직자들은 영어 성경을 가진 사람들을 핍박하였고, 윌리엄 틴데일은 화형을 당하였습니다. 화형대에서 윌리엄 틴데일이 남긴 마지막 말은 “주여, 영국 국왕의 눈이 뜨여지게 하소서”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대성경(1539)과 킹제임스 성경(1611)의 번역을 통해 놀랍게 이루셨습니다. 틴데일 성경의 본문은 이후 출간된 매튜 성경(1537)에 포함되었으며, 킹제임스 성경(1611)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버데일 성경(1535)은 최초로 전문 인쇄된 영어 성경입니다. 윌리엄 틴데일의 동료였던 마일스 카버데일(Miles Coverdale)은 틴데일의 죽음 이후 성경 번역 사업을 계속 진행하여 신구약 전체를 영어로 출판하였습니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역본과 라틴어 역본을 참고로 하여 번역된 이 성경은 후에 매튜 성경(1537)에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시편 부분은 대성경(1539)에 그대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마일즈 카버데일(Miles Coverdale)은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요청을 받아 캔터베리 대주교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의 후원으로 1539년 매튜 성경의 개정판을 출간합니다. 이 성경은 공식적인 예배에서 사용되기 위해 공인된 최초의 영어 성경이며, 모든 영국 교회에 한 권씩 비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윌리엄 틴데일의 순교 후 3년 만에 이루어진 응답이었습니다.
국왕의 명령에 의해 영어 성경 번역이 활발해졌던 1540년대가 지나고 로마 카톨릭을 따르던 매리 여왕이 즉위하게 되자, 영어 성경 번역은 다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매튜 성경(1537)의 번역자인 존 로저스와 대성경(1539)의 후원자인 토마스 크랜머가 1555년 화형을 당하게 되며, 수백여 명의 개신교도들이 이교도로 몰려 화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영국을 탈출하여 난민이 되었고, 마일즈 카버데일을 비롯한 칼빈주의 성경 번역가들은 스위스의 제네바 교회에서 재회하게 됩니다. 이들은 피난민 생활 동안 그들의 가정들을 교육할 성경을 번역하기로 하고 존 칼빈과 존 녹스의 보호 아래 성경을 번역하는데, 이때 번역된 성경이 제네바 성경(1557-1560)입니다.
카톨릭 측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 집권 이후 유럽 대륙으로 피신한 카톨릭 교도들을 중심으로 영어 성경 번역의 움직임이 시작되어, 라임스와 두웨이에서 각각 신약과 구약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이를 라임스 두웨이 성경(Rheims and Douai Bible, 1582-1609)이라고 합니다. 당시 카톨릭에서 “오직 라틴어”라는 기치 하에 유일한 성경으로 인정했던 라틴어 불가타(Vulgate) 역을 영어로 번역한 성경으로 이후 카톨릭 영어 성경의 기초가 되어 개정을 거듭하며 20세기까지 읽혀진 성경입니다.
2. 1600년부터 1950년까지
1. 킹제임스 성경(King James Version, 1611)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은 제임스 1세는 당시에 사용되는 성경은 오역이 많아 원문의 의미를 바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교회 지도자들의 진언을 받아들여, 표준역 성경을 제작하도록 명령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교회에서는 대성경(1539)과 비숍 성경(1568)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제네바 성경(1560)이 널리 애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 일치하도록 번역하며 , 단어의 뜻을 밝히는 주석 이외의 신학적 해설적 성격을 지닌 난외주를 배제한다는 원칙 하에 54명의 번역자들이 5년 동안 번역한 성경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1611)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당시 얻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본을 기본으로,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성경 역본들과, 기존에 번역된 영어 역본(비숍 성경, 틴데일 성경, 매튜 성경, 대성경, 제네바 성경, 라임즈 신약)들을을 참조하여 번역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된 이후 제네바 성경의 인기를 넘어서는 데는 40년의 긴 시간이 걸렸지만, 17세기 이래로 현재까지 “하나님의 책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한다”는 번역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영어 성경 번역본이 되었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읽기에는 현재 사용되지 않는 생경한 어법과 어휘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지만, 킹제임스 성경은 시간을 초월하는 소중한 번역 성경임이 틀림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대표적인 문자적 번역본으로 원문의 어순, 문법, 문체, 용어, 표현, 수사법을 그대로 살린 채 번역된 성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