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온전함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1. 13~14장은 신체 생활의 정결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13장에는 피부병과 곰팡이에 대한 진단과 격리가, 14장에는 각 경우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핵심은 질병과 부패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부합할 수 없다는 것이고(13장), 하나님께서는 더러움의 제거와 속죄의 피를 통해서 다시 성결하게 구별하여 치유와 회복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14장). 13장은 진단과(1~44) 격리(45~46)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서 부패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47~59). 어떤 오염이나 부패도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더럽히거나 그 안에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뿐 아니라, 백성들이 겪는 모든 일상적 문제들을 다루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백성의 죄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연약과 질병의 문제들까지도 포함했습니다. 다만 본문에 나타나는 나병을 죄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가 아닙니다. 물론 미리암이나 웃시야 왕은 죄로 인하여 나병이 발하였습니다(민 12:10~12; 대하 26:19~21). 그러나 성경은 나병을 포함하여 모든 질병이 직접적인 죄로 인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요 9:2).
3. 중요하게 여길 것은 모든 질병은 세상이 부패한 증거이고 타락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질병과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백성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병이 발발한 사람이 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성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4. 질병은 우리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연약함입니다. 성경은 비록 이런 육신의 연약함이 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지만, 그 자체를 죄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정상적이고 온전한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하며 하나님의 임재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가 피부병이 발하여 진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해도, 그는 심령으로 계속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실질적 차원에서 성소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5. 성경은 우리 인간의 몸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신자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고전 3:16).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질병이 고침을 받고 건강이 회복되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며(고전 6:12~20; 약 5:13~16), 주님께서는 많은 연약한 자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질병들의 부정을 씻기 위해서나, 하나님의 임재에 나아가기 위해서, 정결규례나 제사의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와 슬픔과 질병과 질고를 다 자기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의롭고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일어나 영광중에 그분의 임재에 들어갈 것을 보장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연약함을 가지고 이 땅에서의 삶을 살면서 모든 치유와 온전함의 회복은 우리가 입을 영광의 예고편으로 여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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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ṣāraʿaṯ 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사실 한센병만을 지칭하는 단어라기보다 살이 벗겨지는 악성 피부병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나병’으로 번역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ṣāraʿaṯ이라는 단어를 lepra 라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했고, 이는 한센병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leprosy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1-2)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피부에 한센병 증상이 나타나면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 정한지 부정한지를 결정합니다.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갔다는 것은 처음부터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에서 한센병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어디에도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본문은 한센병 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것과 그 병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초반에 나와있는 사람을 정하게 만드는 제사들이나14장에 나오는 예식 등도 한센병 환자의 증상이 사라졌을 때 드리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부병 증상이 나타나면 한센병이 아니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한센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기에 자신의 죄나 조상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통해 한센병을 정하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센병의 원인이 죄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신약의 시각장애인 이야기인데, 제자들이 시각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센병의 목적도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도 내가 저주받은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나만 겪는 것 같은 불행과 고난 때문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었을까 고민하신 적이 다들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나로 상정하여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내가 치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나라는 착각에서 온 허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대가를 우리에게 직접 짊어지게 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즉시 전부다 지옥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죄의 대가가 아닌,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돈이 선입니까? 명예, 건강이 선입니까? 심지어 가족 사랑도 절대적 선은 아닙니다. 절대적 선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고 심지어 나의 실수나 죄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도의 삶에서는 모든 것들은 결국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고난과 역경이 있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 한센병자임이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나의 가능성은 점점 삭제되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희망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멋들어지게 행함으로서 십자가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날 때 주님께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피부병(3-8)
(3-8)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본문을 보면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피부에 생긴 증상에 털이 하얘지고 상처 부위가 파여있으면 나병일 수 있지만 증상 주위 털이 희어지지 않고 상처 부위가 파여 있지 않으면 7일동안 격리한 후에 다시 경과를 보며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피부보다 우묵하다’는 원어로 보면 피부보다 더 깊게, 영어로는 ‘deeper than the skin’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증상이 단순히 피부 위에만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피부 안으로 침투되어 있는 상태인지를 분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센병(9-17)
(9-17)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1절부터 8절까지는 단순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지었다면 이제 9절부터 17절까지는 한센병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생살이 생겼으면 오래동안 병을 앓았던 것임으로 부정은 하지만 격리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고, 12절에서는 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즉, 환자의 몸이 다 희어졌으면 정하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병이 펴져 있으면 한센병이 가장 심한 상태인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센병의 유무로 정하고 부정하고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세세하고 특이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본문에 나열된 기준은 사실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에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본문을 읽은 시카고 대학 저널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본문은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을 수 없으며 이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 즉 신학적 관점으로만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한센병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센병을 통해 성도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로 움직이고 계신 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본문은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가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눈길이 정한 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자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제사장에게 유심히 관찰하게 하십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를 나누고 그 경계에서 부정한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 부정함 속에서 다시 정함을 찾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입니다. 정한 자들은 진 안, 즉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남을 수 있고, 부정한 자들은 진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성도가 돼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면 왜 내가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인지는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 들어갔는데, 이미 나의 현실이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었는데 과거가 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 없는 곳에 복 없고, 부정함을 경유해야만 정해집니다. 제사장이 한센병 자들의 부정함을 자세히 관찰하듯이 우리 또한 왜 내가 부정한 자임을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정하게 만든 은혜의 십자가이기 전에 내가 부정한 자, 하나님 살해범이라고 증거하는 심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한센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피부가 벗겨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살이 벗겨지고 속이 드러나는, 즉 겉을 썩게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 썩어가는 것은 보기에 혐오스럽습니다. 세상은 모두 외모가 번지르하고 눈에 보기 좋은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외모란 단순 생김새가 아닌,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받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신앙생활에 전념하란 이야기구나 하고 혹시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열심히 종교생활 하면 우리를 혐오합니까? 말씀대로 살면 미워하나요?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지키면서도 우리는 외모를 위해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훨씬 더 교묘하고 깊게 우리 안에 침투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우리 외모를 위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모를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센병자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센병자가 되는 것이 외모가, 즉 겉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려는 사람이 없듯이 인간은 절대 스스로 자신의 외모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열심히 나의 외모를, 나의 겉사람을 죽이겠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겉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재해석 하시며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만하던 유대인들에게 형제를 노하게만 해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인간은 절대 지킬 수 없는 수준의 율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웠을 만큼, 안식일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하나님 말씀을 열심으로 지켰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은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마태복음 7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인간들에게 제시 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신 일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율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 즉 저주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접촉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됐고 그들은 진 밖에 살면서 자신은 절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입에 달고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숨 바쳐 하나님 말씀 지키던 바리새인들에겐 오히려 율법의 정죄함이 더해지고, 율법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던 한센병자에게는 거저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 뜻은 구원이란 “나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율법 지켰어요” 라는 고백이 아니라 “난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자입니다”라는 고백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항상 저주 속에, 정함은 항상 부정함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나병과 어루러기 진단
레위기 13장은 신체 증상에 따른 나병의 진단 규례와 나병으로 확진된 경우 격리해야 하는 규례에 대한 내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전염이 강한 질병으로 판정되는 경우 공동체에서 떨어져 격리해야 하는 일은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시대마다 행해지고 있는 일입니다.
13장에서 다루는 질병은 히브리어로 ‘차라트’입니다. 전통적으로 ‘문둥병, 나병’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염성 피부병, 해를 끼치는 곰팡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병인 한센병은 피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뼈까지 변형하며 신체의 감각을 마비시켜 결국에는 비참한 죽음을 맞게 하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병의 증상은 피부 표면의 색이 변하거나 사람 또는 물체의 형체를 변형하거나 표면보다 깊이 내려가 반응속도가 빠르게 확산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증상들, 즉 원형에서 형체가 변형되었다고 하는 것은 창조의 온전성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기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피부병에 대해 설명하는 13장은 반복되는 설명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증세가 소개되고, 제사장이 그것을 진찰한 후, 구체적인 증상이 밝혀지면 마지막으로 제사장의 진단과 조치가 소개됩니다.
18~23절은 피부에 난 종기로 인한 나병 진단 규례입니다. 24~28절은 화상으로 인한 나병 진단 내용입니다. 29~37절은 모발이나 수염 부분에 발생한 나병 진단 규례입니다. 38~39절은 나병과 혼돈해서는 안 되는 어루러기 진단 규례입니다. 피부 색점이 부유스름하면 이것은 어루러기입니다. 어루러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병과 혼돈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어루러기는 ‘무해한 피부 발진’으로 표준새번역 성경은 어루러기를 발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40~44절은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생긴 나병 진단 규례입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누구나 피부와 모발, 수염이나 머리, 이마에 전염성 질병이 발생하면 즉시 제사장에게 진찰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초기에 정확히 질병을 진단하지 못한 경우에 피부병으로 의심되는 환자는 일주일 동안 격리되었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진찰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일단 부정하다고 선언하면 그 환자는 제사장의 처방대로 따라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환자의 피부를 살펴보고 정함과 부정함을 판정하고 선포하는 일에 조금의 지체나 착오가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심각한 전염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큰 소리로 외쳐야 했습니다. ‘나는 부정하니 내게 가까이 오지 마세요’라고 스스로 외쳐야했습니다. 부지중에 타인이 자신과 접촉하여 전염병이 옮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46절입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구약 시대에 공동체로부터 떨어져나와 고립되어 홀로 진 밖에서 산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불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 밖은 진영에서 추방된 죄인과 부정한 자들이 거주하거나 율법을 어긴 자들이 처형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밖에서 산다는 것은 언약의 은총에서 끊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백성에서 단절된 삶으로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과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가족을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혼자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하는 환자는 오직 하나님의 치료만을 고대하고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위생 상태가 청결하지 못했을 고대 사회에서 나병은 다양한 경로로 감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이나 각종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항상 청결을 유지하며, 신경을 쓰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현재 확진자 수가 다시 늘어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개인 위생에 신경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의학의 발달로 고대 사회보다 치료받을 수 있는 좋은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염병은 우리의 삶을 모든 일상으로부터 잠시동안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정결하게 지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것이 육체의 질병이든 죄에 물드는 것이든 자신을 병들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나병이 쉽게 전염시키듯 죄도 빠르게 전염시키는 속성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나병환자를 고치신 후에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며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답게 정결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죄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가두고 격리시키고,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2절에서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 있을 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온전히 해방될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미 온전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미 온전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하나님 나라의 자녀답게 하루를 정결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주님처럼 긴 호흡의 기도와 깊은 호흡의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 우리 스스로를 정결하게 유지할 새 힘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레위기 13장 1-46절까지는 신체 증상에 따른 한센병의 진단 규례와 한센병으로 확진된 경우 격리해야 하는 규례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종 피부병이 발생하면 먼저 제사장에게 보여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들을 세심하게 살펴서 필요한 조치를 하고 이스라엘 진중을 늘 정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의복이나 가죽에 핀 곰팡이에 관한 규례의 내용을 다룹니다. 의복과 가죽 등에 생긴 곰팡이도 사람의 피부 질환과 똑같이 철저하게 다루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뿐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까지도 정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센병 판정을 받은 자의 행동 지침(45-46절)
(45-46)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당시 한센병으로 확진된 환자의 조치는 즉각적이고 단호합니다. 우선 한센병 환자는 본인의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 헤침으로 슬픔과 비통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거듭 외쳐야 합니다. 본인에게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 전염을 막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한센병 환자는 즉각 격리되어 진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렇게 진 밖으로 추방되었다가 완치되는 경우에만 다시 진영 내로 복귀가 가능했습니다.
의복과 가죽에 발생하는 곰팡이의 진단과 처리(47-55절)
(47-49) 만일 의복에 나병 색점이 발생하여 털옷에나 베옷에나 베나 털의 날에나 씨에나 혹 가죽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있으되 그 의복에나 가죽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병색이 푸르거나 붉으면 이는 나병의 색점이라 제사장에게 보일 것이요
고대 사회에서 곰팡이의 발생은 매우 주의해야 하는 상황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곰팡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순식간에 곰팡이가 번져서 물건을 망가뜨리고 건물을 크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기에 당시 이러한 곰팡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다루어졌습니다.
특히 옷이나 가죽 제품은 곰팡이 감염에 상당히 취약합니다. 한센병이나 피부 질환은 환자가 입던 옷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옷은 몸에서 떼려 해도 뗄 수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신경 써서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 곰팡이가 악성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푸른색 얼룩이나 붉은색 얼룩의 발생 여부입니다. 물건에 이러한 곰팡이가 발견되면, 즉시 제사장에게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색깔을 띤 증상은 매우 유해한 푸른 곰팡이와 붉은 곰팡이로 의심되었기 때문입니다.
(50-52) 제사장은 그 색점을 진찰하고 그것을 이레 동안 간직하였다가 이레 만에 그 색점을 살필지니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에나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졌으면 이는 악성 나병이라 그것이 부정하므로 그는 그 색점 있는 의복이나 털이나 베의 날이나 씨나 모든 가죽으로 만든 것을 불사를지니 이는 악성 나병인즉 그것을 불사를지니라
당시에 의복과 가죽제품은 상당히 값비싼 물건입니다. 그래서 색점이 생겼을 때, 제사장은 바로 판단하지 않고 일주일이나 더 기다렸다가 신중하게 판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색점이 표면에 번져서 악성 곰팡이로 최종 판정을 받으면 미련 없이 그 물건을 불에 태워 없애야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53-55) 그러나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모든 가죽으로 만든 것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은 명령하여 그 색점 있는 것을 빨게 하고 또 이레 동안 간직하였다가 그 빤 곳을 볼지니 그 색점의 빛이 변하지 아니하고 그 색점이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부정하니 너는 그것을 불사르라 이는 거죽에 있든지 속에 있든지 악성 나병이니라
만약 일주일 동안 관찰했는데 그 물건에 더 이상 색점이 퍼지지 않으면, 색점이 생긴 물건을 물로 씻은 다음에 다시 일주일을 더 지켜보았습니다. 총 14일을 지켜보는 겁니다. 만약 14일이 지나고 나서도 색점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악성 곰팡이로 최종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 때도 마찬가지로 의복이나 가죽 제품은 즉시 불살랐습니다.
확산 없을 경우의 진단과 처리(56-59절)
(56-59) 빤 후에 제사장이 보기에 그 색점이 엷으면 그 의복에서나 가죽에서나 그 날에서나 씨에서나 그 색점을 찢어 버릴 것이요 그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색점이 여전히 보이면 재발하는 것이니 너는 그 색점 있는 것을 불사를지니라 네가 빤 의복의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그 색점이 벗겨졌으면 그것을 다시 빨아야 정하리라 이는 털옷에나 베옷에나 그 날에나 씨에나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에 발생한 나병 색점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진단하는 규례니라
물건을 세탁한 뒤에 색점이 엷어졌으면 그 색점 부위만을 뜯어낸 뒤 수선해서 물건을 재사용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탁 후에 색점이 아예 없어졌다면, 그 물건을 다시 한 번 세탁하는 것으로 정결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색점이 그대로라면 증상이 재발된 것이므로 통째로 불사르고 조금도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고대에서 옷은 분명 귀하고 값진 것이지만, 없애야 할 때는 없애야 했습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아껴 두다가는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씻어 내고 바로 잡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근처에도 가지 말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21에는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로는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확실하게 찍어 내버리고 뽑아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집 안에 습기가 있는 곳을 조금만 관리를 잘 못해주면, 곰팡이가 쉽게 생깁니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조금만 깨어있지 못하고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마음 속에 죄의 곰팡이가 쉽게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 속에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죄의 곰팡이들을 닦아 내야만 합니다.
마음 속의 곰팡이들을 닦아 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필요하겠습니까? 집 안에 화장실이나 장판 아래나 이러한 습한 곳의 곰팡이들을 닦아내기 위해서는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이 훨씬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 속의 곰팡이들을 잘 들여다보고 닦아 내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지켜봐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 오픈하고 서로 간에 세워주는 섬김을 통해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더 성장할 수 있기에 교회의 구역모임이 참 중요하며,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며 성장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곰팡이를 잘 닦아 내기 위해서는 곰팡이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스프레이, 곰팡이를 긁어내는 끌개, 걸레 등 여러 도구들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도구들은 말씀, 찬양, 기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 집중하고 찬양하고 기도할 때, 우리 안에 있는 곰팡이들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으며 우리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곰팡이를 걷어내는 작업은 때로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곰팡이는 너무 뿌리가 깊어서 잘 걷어지지도 않습니다. 곰팡이 특유의 지독한 냄새를 맡아야 하며 손에 온갖 더러운 것도 묻혀야 합니다. 참 힘이 들고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밀한 내면 속에 있는 죄의 곰팡이들을 걷어내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드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몸부림쳐야 하며 고통도 필요합니다. 많은 눈물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수치스러움도 경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참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우리는 언제든 자랄 수 있는 죄의 곰팡이를 닦아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곰팡이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곰팡이를 다 닦아내고 나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기를 시키고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곰팡이는 그늘을 좋아하고 습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곰팡이가 빛 가운데 온전히 드러날 때 곰팡이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늘 빛 가운데로 드러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요일 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만 어두운 생각들을 하고 어두운 쪽으로만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밝은 곳으로 빛 가운데로 가려고 노력하고 우리의 마음을 자꾸만 빛 가운데로 드러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온갖 더러운 곰팡이로 얼룩지고 더러운 모습 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정결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빛 가운데서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긴 호흡의 기도와 깊은 호흡의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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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은 나병입니다. 나병 관련 단어가 83회나 등장합니다. 성경에서 나병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모세는 거부합니다. 그 불순종으로 모세의 손은 나병에 걸립니다. 그러나 그 즉시 하나님은 나병에 걸린 모세의 손을 치유하심으로 나병 같은 불치병도 고칠 수 있는 전능자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대리자였던 모세가 구스 여자와 결혼한 것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문둥병에 걸렸다가 치유받은 나아만 장군에게 보상금을 요구했다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역대기하 26장에는 블레셋을 정복하고 교만해진 웃시야 왕이 제사장의 규례를 어기고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는 범죄를 저지름으로 인해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권위와 경륜과 주신 규례에 대한 불순종이 있을 때, 형벌로 주어진 병이 나병입니다. 모든 병이 그렇지만 특히 나병이 더욱 더 부정한 질병으로 해당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오늘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단어, ‘차라아트’는 악성피부병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피부질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의 ‘나병’에 1)이 있는데 아래를 보면, ‘넓은 의미로 악성피부병을 뜻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병은 한센씨병, 또는 한센병이라 부릅니다. 나병을 한센병이라 부르는 이유는 1873년 노르웨이의 세균학자이자 의학자인 아우메우에르 게하르트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1841-1912)이 나병 바이러스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나병 치료를 위한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1941년에 'DDS (Diamino-Diphenyl Sulfone)'라는 특효약이 발명되어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나병이란 말이 역사적으로 질병보다는 멸시, 격리, 차별, 편견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나병이라 하지 않고 한센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센병에 대한 설명이라기 보다는 악성피부병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 2~42절까지는 주로 오늘날의 마른 버짐이나 기계충, 피부손상과 관련이 있고, 47~59절은 곰팡이 세균과 관련된 증상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은 곰팡이나 일반 세균이 아닌 특정 쪽팡이 세균과 관련이 있는 질병입니다. 따라서 나병, 즉 한센병으로 번역되어 있는 오늘 본문의 단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악성피부병입니다. 하지만 당시 고대 사회에서는 악성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피부에 생긴 단순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센병으로 불렀습니다.
문제는 한센병을 부정한 병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센병에 걸린 사람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말은 단지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방지 차원에서 격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 저주받은 자로 취급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인해 한센병에 걸렸다고 판단된 사람은 의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격리, 종교적 격리, 비인격적 격리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오늘 내 실존에 비추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율법적으로 볼 때, 한센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입니다. 부정한 사람은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정한 사람이요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절대로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습니다. 본래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율법으로는 우리가 바로 한센병 걸린 자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본문 45~46절입니다.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반복하면서 혼자서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정결한 존재가 되었으며, 더 이상 격리되어 혼자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 한 가지 사실이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우연히 만난 열 명은 소리높여 자신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외쳤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이 깨끗케 되었음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로 열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한센병이 치료되었음을 확증받았습니다. 그 가운데 9명은 각자 자신의 길로 가버렸으나 1명만이 다시 주님께 돌아와 치유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17~1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한센병에서 고침 받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사람과 감사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은 이 한 사람뿐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감사를 표현한 것을 믿음으로 보셨으며,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는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감사는 곧 믿음이요 감사는 곧 구원받은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하고 돌이켜 주님을 핍박하던 자에서 주님을 위한 사명자로 살아갈 때, 그는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편한 세상길을 포기하고 남들 가지 않는 험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기에, 나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한센병에 걸린 자와 같은 나를 고치시고 구원해 주신 주님께 삶으로 감사를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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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은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고도 하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주로 한센병이라 지칭합니다. 나병을 한센병으로 고쳐 부르고자 하는 데는, 나병이라는 말에 들어있는 아픈 기억들 때문일 것입니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전염병입니다. 감염율이 아주 낮은 질병이지만 치료법이 없을 때는 감염될 경우 치명적이었기에 한센병 환자들은 강제로 격리․수용되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록도가 한센병 환자들이 격리․수용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한센병에 걸리는 순간 그 사람은 환자가 아닌 죄인으로, 이방인으로, 위험인물로 낙인찍혀 소록도로 보내져야만 했습니다. 이는 의료적 격리가 아닌 사회적 격리였고, 비인격적 배제였습니다. 고 이청준 작가의 「당신들의 천국」을 보면, 사회로부터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외로움과 단절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야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한센병 환자를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모든 피부병이 한센병인지는 단정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나병으로 번역된 ‘짜라아트’가 “마른버짐(2-17절), 황선(29-37절), 백색 피부병(38-40절), 끓는 물(18-23절)이나 불에 데어 생긴 상처(24-28)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센병으로 제사장이 진단을 내린 경우 그 환자는 부정한 자로 낙인 찍혀 진영 밖으로 나가 살아야 했습니다. 감염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종교적 부정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룩한 예배에 부정한 자가 참여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부정한 자가 거룩한 자들과 접촉하여 부정을 확산시키는 것은 더욱 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한 인격이 단절되어야 하는 고통은 공동체의 정결을 위해 무시되어야 했습니다.
헤아려보니 우리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부정함을 말하자면 한센병 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돈, 성, 권력, 인간관계 등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부정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에 만져서도 안 되는 부정한 것을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참 신앙은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신앙공동체의 부정은 곧 나의 부정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아는 자, 그가 곧 신앙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한 한센병 환자가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외치며 주님의 접근을 막아야 했을 사람이 오히려 주님 앞에 나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의 말은 급하고 강렬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8:2) 그러나 군중의 눈은 매몰차 한센병 환자의 간절함을 더럽고 부정하며 무례한 것으로 바꾸어놓고 있었습니다. 무력감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만큼은 한센병 환자의 눈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날카로움이 한센병 환자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는 순간, 손이, 주님의 손이 그의 몸에 가 닿았습니다. 군중의 눈이 가 닿지 못하고, 율법의 눈이 가 닿지 못하던 몸에 주님의 눈이/주님의 손이 가 닿았습니다. 주님은 그를 부정의 대상이 아닌 회복되어야 할 인격으로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3)
율법에 갇힌 눈은 오직 타인의 부정만을 봅니다. 내 부정을 보지 못하여 타인의 부정 속에서 내 옳음만을 찾습니다. 주님의 손이 언제나 가 닿는 곳은 영혼의 인격인데, 내 눈이 가 닿는 곳은 영혼의 부정입니다. 이를 어찌 은혜의 삶이라,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영적 한센병 환자의 삶일 뿐입니다.
사랑은, 은혜는 부정함조차도 품습니다. 주님의 손이 환자의 몸에 가 닿았을 때, 놀람과 고마움으로 눈물을 흘렸을 한센병 환자를 떠올려보십시오. 주님께서 만진 것은 그의 처참한 몸만이 아닌 외로움으로 죽어가던 인격이었습니다. 그 주님이 나의 인격도 만져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럴진대 주님의 손이 가 닿은 곳에 나의 삶도 가 닿아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손이 가 닿은 곳에 주님의 손도 함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하루이기를 소망합니다. “제사장은 그를 정하다 할지니라.”(레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