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제자들.
1. 주님은 유대인의 공회에서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겨지셨습니다(1). 공회는 사형 판결과 집행을 위해, 예수님에게 정치반란의 죄목을 씌워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였습니다(2). 그래서 빌라도가 주님께 물은 말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물음에 긍정으로 답하신 후, 모든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5). 이것은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사 53:7).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유대인 지도자들의 시기심 때문에 고발을 당했다는 사실을 간파할 만큼 영리한 정치인이었습니다(10).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고, 다만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15).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언도하였고, 군사들은 주님께 채찍질과 조롱을 한 뒤 십자가의 가로대를 지고 처형장소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2. 이때 한 특이한 인물이 소개됩니다. 주님은 너무나 심한 채찍질을 받아서 십자가의 가로대를 짊어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로마군의 권한으로 길을 가던 사람을 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21). 알렉산더와 루포는 초대교회에 알려진 신자들이었기에 마가는 이렇게 그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는데, 루포는 시몬의 아들일 것입니다(롬 16:13).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겠지만,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문자적으로 순종한 첫 인물이 되었습니다. 때론 ‘억지로’가 은혜일 때가 많습니다.
3. 주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새겨졌습니다. 이것은 조롱의 의미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사실이었고, 주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온 세상의 왕이셨습니다. 아침 9시(삼시)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25),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는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33). 마가복음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중 한 가지만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주님의 외침은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보여주는 외마디입니다. 십자가 죽으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4. 또 한 사람의 뜻밖의 증인이 소개됩니다. 그가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 담당했고, 주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로마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39). 이것은 초대교회 신앙고백의 핵심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가장 가까이서 모든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엉뚱한 곳에서 주님의 제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5.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곁에서 끝까지 지킨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습니다(40~41). 주님이 귀신을 쫓아주신 막달라 마리아,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작은 야고보(주님의 제자 중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인일 것이다)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소개됩니다. 이 여인들 외에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다른 여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장사된 후에도 무덤을 지킨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47). 남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주님을 따르던 여인들이 마지막 그 무서운 순간에 주님의 곁을 지킨 참 제자들이었습니다.
6.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의외의 인물입니다(43). 그는 부자로(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이었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43) 선하고 의로운 사람으로서, 공회원들이 주님을 처형하는 판결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눅 23:50~51). 그의 이름은 여기 처음 등장하는데,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그는 분명한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위험한 순간에 자신의 신앙을 용기 있게 드러냈습니다. 빌라도를 찾아가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인 주님의 시신을 요구한 것은, 위험에도 불과하고 매우 용기 있는 행동이었고, 자신의 묘실에 주님을 장사 지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7. 평상시에는 쉽게 나타나지 않으며, 믿음과 충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도 않지만, 위기의 순간에 주님의 제자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빈 수레가 요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섬기는 자리가 시끄러운 경우도 많습니다. 목회자나, 많은 봉사를 하는 경우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제자는 위기의 순간에, 핍박의 순간에, 고통의 순간에 도도하게 드러나고는 합니다. 이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합니다.
♤♤♤♤♤♤♤♤♤♠︎♤♤♤♤♤♤♤♤♠︎
빌라도의 질문(1-5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받는 것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5절은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새벽, 날이 새자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고 증거합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간단하게 되어 있지만, 사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님의 재판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①안나스의 집 :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부하들이 예수님을 잡아 데리고 간 곳은 안나스의 집이었었습니다. 안나스는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그 어떤 죄목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요 18:12-24 참조).
②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 예수님이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구름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시자, 대제사장 가야바와 종교지도자들은 신성 모독을 이유로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막 14:53-65).
③빌라도 총독의 법정(1차 심문) :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사형을 선고했을지라도, 당시 식민지의 사법체계에서는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에게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총독이 1차 심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범죄 사실을 찾지 못했습니다(마 27:11-14; 눅 23:1-5; 요 18:28-38).
④헤롯 안티파스 :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범죄 사실을 찾지 못하자,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므로,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안티파스)에게로 보내어 심문을 받게 했습니다(눅 23:6-12). 하지만 헤롯도 독자적으로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빌라도에게로 보냈습니다.
⑤빌라도 총독의 법정(2차 심문) : 빌라도는 예수님을 2차 심문했습니다(마 27:16-26; 눅 23:13-25; 요 18:39-19:16).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안나스의 집→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총독 빌라도의 법정→ 헤롯 안티파스→ 총독 빌라도의 법정 등 5번 심문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재판과정이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집으로 간 것과 헤롯(안티파스)의 집으로 간 것은 생략했고,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2번 간 것도 또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형이 확증되는 또렷한 두 사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의 심문과 총독 빌라도의 최종판결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26년에 로마 제국의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카이사르(Tiberius Caesar)에 의해 이스라엘의 중부와 남부지방, 사마리아와 유대, 이두매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과도하게 행사하다가, 10년 만에 파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내의 지혜로운 조언을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 때문에 무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이름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는데, 누가복음에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백성들을 미혹하고, 로마 카이사르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을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고쳐주셨습니다. 또 벳새다 들녘에서 말씀을 듣다가 주린 사람들에게 제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서 먹게 하자고 제안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니 가슴이 저며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자, 예수님은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즉 “알면서 왜 물으십니까?”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왕’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서는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왕인 것은 맞지만, 정치적인 왕이나 세상의 왕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만왕의 왕이심을 천명하셨습니다.
(3-5)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어떤 죄도 찾지 못했노라고 유대인들에게 전했습니다(요 18:38).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또 다른 것들로 예수님을 고발했습니다. ‘고발하다’의 문자적인 뜻은 ‘적대적으로 말하다’입니다. 즉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적대적으로 말했고, 예수님이 틀렸다고 말했습니다.
상황이 그러함에도 빌라도 총독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놀랍게 여겼던 것은 예수님께서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즉 빌라도 총독이 생각해도 대제사장들의 말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예수님은 아무것도 반론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처럼 때로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강력한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답변하면 그 말을 가지고 또 시비를 걸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어떤 왕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다음에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vs. 바라바(6-15절)
6-15절은 유월절 특별사면으로, 누구를 풀어줄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우리나라에서도 삼일절, 광복절 등 법정공휴일이나 기념일에 죄수에 대해서 형 집행을 면제하는 ‘특별사면’을 시행하곤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도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때는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최고 통치자의 특별사면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바라바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 자식들이 배고프다고 울고, 음식을 살 돈은 없고 해서 가게의 물건을 가져오거나, 다른 집의 담을 뛰어넘은 생계형 범죄자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해서 떼를 지어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탈취하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범죄자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바라바를 한 단어로 설명하는데, ‘강도’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약탈자’, ‘도적’이라는 뜻입니다. 강도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사는 인생’입니다. 자기가 좀 더 편하고, 좀 더 즐기고, 좀 더 쾌락에 빠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어렵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심지어 죽게까지 하는 것이 강도질입니다. 그가 그런 강도질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마태복음에서는 그를 ‘유명한 죄수’라고 합니다.
(8-10)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전통 관례대로 죄수 한 명을 풀어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때 빌라도 총독은 “내가 유대인의 왕_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렇게 물었던 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것을 빌라도 총독도 알고, 유대인들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심문(재판)을 받는 것은 ‘대제사장들의 시기심’, 즉 종교적인 문제이지, 사법적인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인 것을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생각에는 바라바와 나사렛 예수를 같은 선상에 올리면, 유대인들은 당연하게 나사렛 예수를 풀어달라고 할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빌라도 총독의 착각이었습니다.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달라 하게 하니
유대인들은 대제사장들에게 충동 당하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했습니다. ‘충동하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지진과 같은 진동으로 뒤흔들다’입니다. 대제사장들이 유대인들을 이렇게 뒤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 해야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이 복수심이나 자기감정에 사로잡히면,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같습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흉기(凶器)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 선고를 내리게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요구에 허가 찔린 빌라도는 되물었습니다.
(12-13)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결코 모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한과 법으로 공정하게 재판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법과 양심의 소리보다 유대인들의 소리 지름에 판결을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드리는 짐승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잡았습니다.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를 빼고, 각을 뜨는 것은 전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각 뜬 제물을 불로 태우는 일만 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제물을 준비하고 있는데,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서 그 피를 제물로 드릴 짐승의 피와 섞어버릴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그런 빌라도 총독이 유대인들의 소리 지름을 이기지 못했던 것은, 마태복음에 의하면, 그들을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 때 민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게 되면, 통치력에 문제가 있다고 로마 제국에 알려질 것이고, 그러면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빤한 일이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 총독이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반복해서 물었던 것은,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십자가형에 처할 만한 죄를 범했다면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합당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고, 오직 소리 지름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은 닷새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_구원하소서’라고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바르게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른 이성에서 바른 믿음이 나옵니다.
빌라도 총독이 내린 판결이 이러하였습니다.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 총독은 ‘예수는 무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판결은 십자가형을 내림으로, 자신을 속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판결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판결이었고, 그 결과로 이제는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드릴 때마다, 그 자신이 치욕스럽게 판결 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넘어뜨릴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영원히 넘어지게 됩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심고,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 자신을 세우고, 다른 사람도 세우는 은총의 한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침묵하시는 예수님 (16-20절)
예수님을 심문했던 빌라도는 어떠한 죄도 찾을 수 없었지만 이스라엘 무리들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줍니다. 오늘 본문 16-20절은 빌라도의 관저에서 희롱 당하시는 예수님, 21-32절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자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였고, 빌라도의 관저 브라이도리온의 뜰 안으로 끌고 간 후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17-19)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자색옷을 입혀 마치 왕족처럼 보이게 하였고, 면류관이 아닌 가시관을 만들어 예수님께 씌우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경례하고, 꿇어 절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치욕스러운 상황에서도 반응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앞서 빌라도가 심문할 때도 침묵하셨고, 자신을 희롱하는 군인들 앞에서도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침묵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받으시는 것은 이미 성경을 통해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대응할 힘이 없기에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야 함을 아시기에 고난 속에서도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침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에 익숙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매일 분주한 일상과 모임, 끊임없는 잡담과 밤낮을 가리지 않는 우리의 일상은 소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절 기간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피를 흘려주심을 침묵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삶 속에서 분주하게 지내고 있으시다면 잠시 멈추어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침묵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희롱을 끝낸 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나갑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한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만왕의 왕 예수님 (21-32절)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지고 끌려 나가셨고, 가로 기둥의 무게는 약 45킬로그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인들의 채찍질과 희롱으로 인해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자칫 모여 있는 무리들의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기에 군인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끌고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도록 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에 대해서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시몬은 뜻하지 않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갔는데, 그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묵상해 봅니다. 시몬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구경을 갔다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그저 억울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다면 함께 지고 간 십자가는 그저 45킬로그램이 나가는 무거운 나무일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지고 가신 십자가라고 인식 한다면 그 십자가는 나무가 아니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34절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십자가는 다른 형태로 다가옵니다. 누군가에게는 질병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물질일 수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삶 가운데 주어진 십자가가 견디기 힘들고, 모든 것을 다 잃는 것 같더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십자가라면 우리는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함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로 향하십니다.
(22-24)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예수님은 골고다에 도착하신 후 고통을 경감시키도록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건네 받았지만 거절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을 회피하거나 경감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면하십니다. 그 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는데 이는 시편 22편 18절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는다”는 말씀이 성취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제삼시로 오전 9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죄인들에게는 죄패에 죄명을 기록하여 오고가는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예수님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강도 둘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다보면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을 원했던 사람들이 문득 떠오르게 됩니다.
(마가복음 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여 다른 제자들을 분노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간다는 것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 할 때 평안함도 있지만 반드시 고난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사람들의 조롱은 끝나지 않습니다.
(29-32)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고,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냐며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조롱 속에서도 침묵하십니다. 예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사람들의 조롱이 말씀 안에서 성취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골고다는 죽음을 상징하지만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해골의 곳은 생명의 근원지가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예수님에게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라고 조롱합니다. 예수님 자신의 육신이 헐리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고난당하셔야 했습니까? 이사야 53장 5절이 증거합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이 사실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구원받은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가 고통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근심과 걱정이 아닌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선한 영향력을 받아 영원에 소망을 두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큰 소리를 지시고 숨지시니라(33-37절)
(33-36)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태양이 가장 밝아야 했던 정오(제 육시)부터 오후 3시(제 구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한 사람이 언덕 위 나무에 매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광고하듯 사람을 높이 올려 죽이려고 창조하신 언덕이 아닙니다. 사람을 짓누르다 매달아버리기 위해 심긴 나무가 아닙니다. 미소와 기쁨은 비웃음과 살인의 쾌감으로 변질되고, 달콤하던 포도는 신맛을 내는 포도주가 되며,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주신 군인의 힘이 고문과 폭력으로, 따르라고 부르셨던 제자들은 도망침으로, 말씀을 가장 잘 들을 것 같은 위치에 있던 자들은 ‘엘리’(나의 하나님)라는 말을 ‘엘리야’로 잘못 알아듣고 있습니다. 모두 자기 자리를 잃은 채 표류하는 중입니다. 결국 태양도 눈을 감은 듯 빛을 잃어버립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던 분은 예수님 뿐이셨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계시기 위해 세상에 내려오셨으며, 이 순간을 위해 사역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그곳은 비명과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비틀어진 폭력의 시대 상징이던 십자가에 매달려 소리 지르셨습니다. 죽음으로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악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악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숨지시기까지 허락된 자리에서 주어진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가감 없이 하나님께 고백하고 소통하셨습니다. ‘엘리 엘리...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그분에게 이 고백은 막연한 정보나 관념뿐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계셨고 끝까지 이를 붙잡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괜찮은 척, 있어 보이는 척, 멋진 척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가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답을 얻기를 중요히 여기셨습니다.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침묵과 어두움 속에서도 여전히 ‘나의 하나님’을 외치던 모습. 그것이 예수님이 머무르셔야 했던 ‘인간의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38-39, 42-45)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가장 인간다웠던 예수의 모습을 바라보던 백부장이 한숨을 내뱉듯 고백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수없이 그 언덕을 오르내리며 많은 죄수의 비명을 들었고, 매번 뿜어대며 흩뿌려지던 선혈을 목격해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날, 아무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나무를 번쩍 들어 사람들에게 던지셨던 것도 아닙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신을 조롱하던 자들에게 번개를 내리치던 것도 아닌, 그저 힘없이 죽음의 자리에서 휘청거리다 소리 지르며 숨을 거둔 예수를 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마가복음이 시작되며 선언되었고, 사역 초입의 세례 장면과(1:11) 사역 절정기의 변화산에서(9:7) 하나님에 의해 선언되었던 마가복음의 주제어입니다. 그런데 이를 처음 고백한 사람이 바로 백부장입니다(3:11과 5:7에서 사탄은 귀신들린 사람들의 입술을 통해 이를 폭로하려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막으셨습니다). 마가복음은 그가 이토록 위대한 고백을 할 수 있던 이유에 대해 어떠한 첨언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 속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에 모든 것을 맡겼던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 고백을 듣고 바뀐 사람으로만 묘사할 뿐입니다.
(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9: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고 따를 때, 비록 우리 또한 폭력의 세계 중심에서 짓이겨진다 해도,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가고 죽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멋진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장 인간다웠던 죽음의 열매로 가장 거룩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십자가의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38-39)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42-45)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고백과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사장 중 일부는 손쉽게 찢을 수 없던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것을 보며(38절)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회심해 초대교회의 일부가 됩니다.
(행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리고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고백합니다(39절).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마자 크게 소리 내어 설교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장면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고백했으며, 그 장면과 고백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던 중 변화되어, 결국은 초대교회 안에서 그의 고백이 십자가의 증거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었음에도 ‘당돌히’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42절).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별세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그날에 장사해야 한다는 신명기 말씀을 따르면서(신21:22-23) 해 질 무렵에 시작될 안식일 전에 매장하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빌라도를 찾아가 물 흐르듯 장례 절차를 마무리합니다(46절). 예수의 죽음 앞에서 그가 받던 존경과 공회원의 지위는 중요하지 않았음을 거침없이 당돌했던 모습으로 드러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자기 손으로 예수의 십자가형을 판결했음에도 여전히 호기심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44절). 그 지점에서만 보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드러나게 되는 비겁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십자가는 마주 선 모두에게 열린 창문이 되어 각자의 속내를 드러냅니다. 우리도 그 앞에 서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매해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통해 십자가를 묵상하고 스스로 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수 둔 곳을 보더라(40-41, 46-47)
(40-41)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
(46-47)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여인들은 연약하고 두려웠기 때문에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지켜보던 그 마음을 십자가의 죽음과 빈 무덤의 부활의 연결 고리로 사용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두려움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끝까지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내로라하는 제자들이 예수를 부인하거나 도망쳤고, 수많은 대중이 그를 조롱했지만, 당시 사회적 약자이던 여인들은 끝까지 마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라고 주신 세상이 아닙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며, 마스크를 사재기해서 비싸게 팔고, 걱정 속에서 약국 앞에 줄지어 기다리며, 두려움 가운데 서로 거리를 둬야 하고, 아플 때 옆에 이어주지 못하는 현실. 우리 또한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십자가 앞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서 보는 것. 드러난 자기 정체성을 직면하는 것. 죽음을 그리며 준비하는 것. 그리고 부활을 소망하는 것. 가장 인간적이었던 예수의 비명과 죽음을 배워야 할 때가 왔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셨고, 탄식과 비명을 들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보다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다 숨지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말씀을 보고 또 보며, 되뇌어 읊조리고, 지키고, 즐거워하며, 사모함으로, 인생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를 소망하고 결단하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비틀어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지금도 계셔야 할 곳에서 자기 사람들을 이해하고 변호하시며 사랑과 기도를 이어가고 계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
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을 꼽는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내린 사형 판결이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 서기관들이 모인 공회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종교적인 죄로 사형에 해당한다고 결정했지만 실제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대제사장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고발을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고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보다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5절을 보면 아무런 대답도 하시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가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어 폭동을 일으킬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빌라도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머리회전이 빠른 사람이었기에,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로마에 반역을 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항상 로마에 반역을 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로마의 반역자로 붙잡아 고발할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설날이나 추석을 맞이하여 특별사면을 해주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때는 유월절 명절기간이었기에 당시 예루살렘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으므로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 것도 필요했습니다. 빌라도는 몰려든 많은 유대 백성들이 석방해 달라는 죄인을 예수님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9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백성들에게 대답을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였기에 엉뚱한 죄로 고발하고 자기에게 넘겨준 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몰려든 유대인들이 그저 단순히 재판을 구경하러 왔거나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온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풀어주면 백성들이 박수치며 좋아할 줄로 생각했고 덩달아 자기 인기도 유대인들에게 높이 올라갈 줄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로 대제사장들의 충동질에 넘어간 무리들이 바라바라는 사람을 풀어 달라고 하자 빌라도는 당황을 하게 됩니다. 이 바라바야말로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12절을 보면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말을 하는 것이죠.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무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빌라도 자신에게 있는 것인데도 무리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끌려가는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빌라도의 법정 앞에 모인 유대 군중들은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자 14절을 보면 빌라도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인 군중들은 더욱 크게 소리 지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한 것이 있기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의 선동에 의해 분별력을 잃은 군중들은 더욱 강하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마치 불길을 향해 달려가는 불나방 떼처럼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크게 소리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무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이미 대제사장들에게 매수를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에게 매수를 당해 예수님을 배신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제사장들에게 매수를 당해 동원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불과 일주일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을 때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즉, 한 때는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한때는 자기 겉옷을 벗어 길에 펴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참 지도자가 누군 인줄도 모르고 분별력 없이 군중심리에 휩싸여 살아가는 무리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줄 알면서도 군중들의 압력에 못 이겨, 아우성치는 소리 때문에, 자기 자리를 지키고 출세를 위해, 양심을 포기하는 빌라도의 지극히 계산적인 모습이 우리 안에 숨겨 있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앞에 모인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 같아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결국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날 자신의 이 선택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아니 역사에 있어 그토록 치욕적인 선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에서처럼, 빌라도라는 그 이름은 주님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최종적으로 판결한 불의한 권력자로서 인류 역사에 있어 영원히 치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훗날 빌라도는 로마로 소환을 당하게 되고 자살로 그 생을 마치게 됩니다. 빌라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그의 일생 뿐만 아니라 그 이름 역시 치욕적인 이름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빌라도처럼 어떤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얼 먹고 무엇을 고르는 것처럼 사소한 선택이 있기도 하지만, 어떤 학교에 가며,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떤 교회를 다닐 것인지와 같은 인생의 방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이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선택일수록 거기에는 그 사람의 평소에 생각하는 방식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말이 되면 직장생활이나 여러 가지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등산을 가고 여행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우님들은 주일날에 예배당으로 나와 말씀을 듣고 함께 신앙의 교제를 나눕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여행을 가는 대신에 교회 예배당으로 나오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하고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주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15절을 보면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나게 되고, 폭동이 일어나게 되면 빌라도는 유대의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출세를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성난 군중들을 달래는 것이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유리하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분명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거짓으로 고발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몰려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자, 무슨 악한 일을 하였기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느냐고 말한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출세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자신의 양심에 반대되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빌라도의 그 선택은 자신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간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과연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선택을 하며, 누구를 기쁘게 하는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더 얻기 위해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누구를 중심으로 누구를 위해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나의 이익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주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선택을 하며 우리 인생의 방향을 정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 되어주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우리의 영원하신 목자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나치독재의 시절, 하나님께 붙들려 귀히 쓰임 받았던 신학자요 목회자인 본회퍼라는 분은 예수님의 명령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그것은 바로,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요약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살펴보니 정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제자로 쓰시고자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며 명령하셨습니다. 참 간결하지만 분명한 요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명령 후에 제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에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냥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묵상합니다. 그 묵상도 참 귀합니다. 그런데 나아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을 때 다 알았던, 그럼에도 오늘날의 사람들이 자주 망각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오직 죽음을 앞둔 사형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그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서 꽂은 후, 거기에 자신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주시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시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이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 끌고 나갑니다. 그런데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거의 탈진된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주님. 그런데 이미 너무 많은 피를 흘려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군인들은 그곳에서 마침 예수님의 모습을 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은 비록 잠시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예수님과 함께 그 죽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군병들은 제비를 뽑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합니다. 그리고 욕합니다. 이 광경은 이미 시편 22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부터 18절의 말씀을 읽어 올리겠습니다. 14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몸의 모든 수분이 물같이 쏟아져, 혀가 입천장에 붙으신 주님, 손과 발이 찔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그 벗은 몸을 주목하여 보고 조롱하고, 모욕하고, 희롱하며, 욕하는 가운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당하실 모든 구약의 예수님을 향한 말씀이, 오늘 말씀 가운데 그대로 온전히 이루어 진 것입니다. 고난 당하시는 종, 우리를 위해 수족을 찔려 죽임 당하실, 참으로 말씀의 성취가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엉겁결에 지느라 예수님을 곁에서 보게 된 구레네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길을 안내 받거나 짐을 운반하는 일에 현지 주민들을 아무 때나 강제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1절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라고 하셨던 말씀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침 하필이면 그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그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제로 억지로 잠시 지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 루포의 아버지 시몬.
그런데 이후 바울은 로마서 16장 13절에서 루포와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오늘 잠시 십자가를 지게 된 시몬의 아내와 아들을 언급합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바울이 로마서를 마치면서 소중한 주님 안의 동역자들에게 일꾼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런데 그 이름에 루포와 그의 어머니를 언급합니다. 얼마나 주 안에서 가깝고 친밀한 사이인지,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고까지 말합니다.
마침 그곳에 있어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지만 구레네 사람 시몬은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의아내가 또 그 아들이 로마교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잠시 졌기에 그는 주님을 깊이 알고 교회의 일원이 되며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뿐 아니라 그 가정이 아들이 교회에서 귀한 일꾼으로 기둥으로, 바울이 어머니와 같이 여기는 소중한 믿음의 여인으로 변화 받은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앞서 지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오늘 나를 따르라 하시며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그 결과는 자기 욕망의 죽음이지만 그 열매는 영원한 생명이요 다른 이 까지도 주님께 인도하는 복된 삶입니다.
마침 그곳에서 주시는 십자가를 혹시 받게 되셨다면, 그곳에서 그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로, 혹은 그 분으로 인해 그 길 가운데 이미 십자가를 지신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도의 십자가, 다른 분께는 영혼 사랑의 십자가, 또 다른 분에게는 봉사의 십자가, 오랜 인내의 기도로 주님을 더 깊이 의지하도록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께서 결코 그것을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우리를 참으로 복된 삶으로 인도하여, 그 십자가가 우리를 겸손케 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제육시가 되었을 때 온 땅이 어둠에 덮이며 제 구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육시는 오늘의 시각으로는 낮 열두시이고 구시는 오후 세 시입니다. 그리고 제구시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마지막 절규를 하신 것입니다.
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모두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가상칠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마가복음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는 네 번째 말씀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절정을 가장 잘 느끼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장46절에도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르짖음 후 예수님을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영혼이 떠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인생을 살며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편안함과 안전함 속에서만 살다 가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큰 산이든 작은 산이든 큰 강이든 작은 강이든 산 너머 산이요 강 건너 강인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고통으로 인해 절망하고 탄식하고,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며, 절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낭만이나 환상이 아닌 것입니다. 상실과 실패와 갈등과 충돌로 인해 상처와 눈물 속에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절규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연하듯, 초연하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신 것이 아닙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피눈물을 쏟으시며 절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가운데 예수님의 극단의 처절함을 느껴볼 필요가 있고, 2천년이란 시간의 거리를 뛰어넘어 어둠 내린 그 공포와 비웃음의 현장에 있는 자신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가 말씀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필요한 방법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한 순간 아들 예수님을 버리신 것은 아들을 버려 우리를 얻기 위함 이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그 한 순간 아들에게서 고개를 돌리신 것은 아들을 외면해 우리를 만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완전한 희생이 있었기에 아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으며 우리의 영혼과 존재가 치유되고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마침내 하나니의 아들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합니다. 이사야서53장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한다면 우린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말씀과 무관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교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고 겸손하지 않을 수 없고, 희생적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실상은 이기적이고 세상적일 때가 더 많고, 교만과 욕심과 정욕에 매여 살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만 주님을 따라 살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본 받아 사는 것은 우리 일생의 숙제이며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믿음의 숙제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 안에서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무엇이고, 영원한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주님 안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42절 이하는 장사되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시간들을 정리해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약 6시간 만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자료에 의하면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들은 보통은 2-3일, 때로는 더 오랫동안 살아있으면서 큰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총독 빌라도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라고 명한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청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준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 굴 무덤에 장사되신 것입니다. 43절에 의하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덤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시작을 위한 짧은 침묵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시신을 모신 어둡고 냄새나는 절망의 굴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출산하기 위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 부활로 다시 사신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여깁니다. 죽음을 모든 상황에 대한 종료라고 여깁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종종 뉴스를 통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죽음을 택한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그런 뉴스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모든 상황에 대한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진정한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유혹과 위험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죽을 용기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죽을 용기로 산다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시작임을 확고히 안다면 믿음 안에서 감사와 순종으로 더 진지한 인생을 살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날인 것이고, 사람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