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접치재에서 시작된다. 김해화
1. 피투성이의 거리를 발 적시며 도망 나온 처녀와 이름을 숨긴 사내가 만나
10월 19일 저녁 8시 무렵, 여수 신월동에 자리한 국군 14연대에서 지창수 상사의 주도하에 좌익 군인들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4․3항쟁 진압을 위한 제주도출동거부와 미군철수 등을 내세우며 봉기군은 10월 20일 새벽, 여수를 완전히 장악하고 오후 3시 무렵, 순천을 점령했다. 10월 21일 정오 무렵에는 여수, 순천, 보성, 광양의 거의 모든 지역을 봉기군과 봉기군에게 동조하는 주민들이 장악했다.(현대사연구회편, 『해방 후 무장투쟁연구』제4장 여순항쟁)
10월 22일, 진압군이 봉기군과 대치하던 순천의 학구리를 점령하고 순천으로 진격함으로서 여순 봉기에 대한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현대사연구회편『해방 후 무장투쟁연구』제4장 여순항쟁)
며칠 전 말을 타고 늠름하게 읍내 거리를 행진하던 기마경찰들이 봉기군에게 전멸 당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1) 경찰들에게 빼앗은 말을 타고 다니는 군인(봉기군)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순천에서 수많은 경찰들이 죽었다고 했다. 경찰복을 벗어 던지고 때 묻은 한복으로 변장을 한 이웃집 순사는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드문드문 들리던 총소리가 갑자기 요란해졌다. 하루 종일 콩 볶듯이 읍내를 뒤흔들던 총소리가 저녁이 되면서 잦아지더니 드문드문 멀어지면서 밤이 깊어갔다.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날이 밝았다. 끼니도 거른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소리까지 죽여가면서 방에 숨어있던 처녀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눈이 부시게 파란 가을하늘에서 햇살이 고요한 세상에 쏟아지고 있었다. 바깥이 잠잠해지자 부엌에서 끼니를 준비하던 어머니가 처녀에게 한 소리를 했다. “아이, 배깥에 나가지 마라. 다 큰 가시내가 난리 통에 뭔일 당헐지 모른께 방구석에 가맨히 쳐백혀있어.” “알았당께라.”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갑자기 왜 이렇게 세상이 고요해진 걸까? 궁금증을 못 이겨 처녀는 대문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골목을 살펴봤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이 골목에는 담장 밖으로 뻗은 감나무가지에서 감잎이 한 잎 포르르 떨어지고 있었다. 언뜻 골목에서 이어진 큰길로 군인 하나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처녀는 깜짝 놀라 얼른 대문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다시 고요해졌다.
거리에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은 신음을 하며 물을 달라고 애원을 하다가 더러는 그냥 고개를 떨어뜨리고 숨이 지기도 했다. 빨간 십자 완장을 찬 군인이 물수건이 가득 담긴 물통을 들고 다니며 물을 찾는 다친 사람들의 입에 하나씩 물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그 물수건을 입에 물고 물을 빨아 마시다가 곧 숨이 끊어지고는 했다.
거리는 피바다였다. 처녀는 천천히 그 거리로 걸어 나갔다. 고여 어린 피가 발등까지 차올랐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끈한 거리에서 처녀는 멍하니 죽어있는 사람들과 살아있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야야, 이 가시내야, 난리 아직 안 끝났다. 느그 집에 빨리 들어가그라.” 총을 멘 군인이 길 건너에서 처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처녀는 질겁을해서 골목으로 뛰어 들어왔다. 행여 군인이 쫓아오지 않을까 뒤를 돌아보면서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와 대문을 걸어 잠갔다. 처녀가 집 밖으로 나간 것을 뒤늦게 알고 놀라 처녀를 찾으러 나갈 셈으로 마당에 나와 있던 어머니는 처녀 머리채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미친년이 죽을라고 환장을 했그만, 지금이 어떤 시절이라고 함부로 바깥으로 기어나가? 이 미친 년, 발에 피칠갑을 해갖고 요것이 뭔 짓이여? 이년아.”
10월 24일 오후 2시 보성, 25일 오후 10시 벌교, 10월 26일 오후 7시 광양, 27일 오후 2시 구례, 28일 오전 8시 여수에서 경찰이 업무를 재개했다.(『제1회 국회 속기록』 743~745쪽)
이른 밤, 반군을 가득 태운 10여대의 군용트럭이 요란한 소음을 울리며 순천을 출발했다. 순천에 남아있던 사백 명에 사방으로 진출했다가 진압군에 밀려들어온 이백 여명 이었다. 나머지 반군은 아직 여수에 남아있거나 사방의 군읍에 흩어져 있었다. 이미 많은 숫자는 진압군에 잡히거나 사살되었고 달아난 병사도 많았다. 여수에 남아 저항하던 병력의 일부는 순천과 반대쪽인 조계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안재성 지음, 『이현상 평전』260쪽)
말을 타고 들이닥친 반란군들이 밥을 해달라고 해서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밥을 해 줬재. 말들이 민폐를 끼친다고 동네 바깥에다 말들을 뒀는디 앞 들판이 누랬그만. 토벌대가 들이닥친다고 헌께 구구산으로 올라감시로 그 말들을 다 내불고 갔다드만 그 많은 말들이 다 어디로 갔능가 몰라.(어릴 때 들었던 말)
그 말들이 달려온 길을 따라 처녀네 집은 구구산 아래 동네로 피난을 왔다. 구구산으로 토벌대를 피해 들어간 사람들이 백아산의 빨치산이 되어 밤이 되면 다시 돌아오던 무렵이었다. 날이 밝으면 경찰들이 이미 산으로 돌아가버린 빨치산들을 잡기 위해 마을로 와서 산이 아니라 마을을 뒤지고 다녔다. 애먼 사람들이 끌려 나가 당산나무 아래서 총을 맞아 죽기도 했다. 어떤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마을에 있는 굿물들을 들고 메굿판을 벌이기도 했다. 소고를 치면서 노는 그 여자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그 여자는 자주 처녀와 눈을 맞췄다. 그럴 때마다 여자가 가만히 웃었다. 굿판이 끝나고 소고를 놓고 다시 총을 들고 산으로 돌아가면서 여자가 처녀의 손을 잡았다. 처녀는 고개를 숙이면서 슬그머니 손을 뿌리쳤다. “산사람들이 처녀들을 다 끌고 간단다. 너를 산에다 뺏기기 전에 시집을 보내부러야야겄다.” 산 너머 동네 착한 청년과 서둘러 혼인을 했다.
낙안면 내운 출신인 김용길이 주암면 오산으로 이주해오면서 주암면의 좌익 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용길은 오산회의를 통해 사상학습과 교육, 좌익 활동 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또한 주암면 인민위원장과 여순사건 발발 후에 전라남도 유격대 부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좌익의 거물로 지목되어 주암면 전체 주민들은 좌익가담 여부와 무관하게 희생되어야 했다. 김용길은 송광면 이읍 출신인 이형우를 통해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김기수(6․25 전쟁 때 서면 인민위원장)와 정동화(곡성 인민위원장)로부터 곡성 태안사에서 약 6개월 정도의 사상교육을 받았다. 의혈청년이었기에 청년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좌익조직을 확대하였으며 송래성(대광출신, 부인민위원장)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주암면장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경찰이었던 이연권이었다. 여순사건 당시 각 마을 청년들이 오산리에서 수시로 모임을 가졌는데 주암지서 황영환(별명이 황몽댕이)주임은 각 마을 주민들을 오산회의에 참석했다거나 가족이 참여했다고 하여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김용길은 이후에도 10년 정도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6․25 후 곡성경찰서에 자수하였다. 법정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아 수원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한 후 출감하여 순천에서 살았다고 한다.(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68~69쪽)
“어이 용길이 얼른 집에 가세.” 면소재지 광천에 닷새마다 한번 씩 장이 서는 날이었다. “누가 용길이요?” 순경이 동네 사람에게 물었다. “저그 저 사람이 용길인디 왜 그러요?” 동네 사람이 남편을 가리키자 순경은 다짜고짜 남편에게 총을 겨누었다. “너 성이 뭐야?” “김가요.” “김용길이? 너 이 빨갱이새끼, 니가 김용길이 맞재? 손들어.”
장에 갔던 남편이 지서에 끌려갔다. 남편 이름과 같은 이름의 빨치산 대장이 있는데 같이 장에 간 동네 사람이 남편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지서 순경이 남편을 그 빨치산 대장인 줄 알고 잡아간 것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없이 남편은 꼼짝 못하고 죽은 목숨이었다. 실재 김용길이 거물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단순한 좌익가담자나 빨치산 대원이었더라면 남편은 곧 바로 총살되었을지도 모른다. 김용길이 전남유격대부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거물 빨치산이었기 때문에 잡아온 김용길이 진짜 그 김용길인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가 필요했다. 남편 소식이 동네에 전해졌다. 좌익이나 우익이건 간에 큰 희생 없이 지내던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일본 강점기에 면장을 지내고 해방 후에는 명예지서주임을 지내고 있어서 사람들이 면장님이라고 부르던 마을 유지가 서둘러 면소재지로 달려 나갔다. “어이, 이놈은 오산 김용길이가 아니어. 내 집에서 머슴을 사는 놈이란 말이시. 얼마나 착실헌 놈인디 이런가? 얼른 풀어주소.” “아따, 면장님 말씀만 듣고 빨갱이 용의자를 그냥 풀어줄 수는 없재라. 더군다나 전남 유격대 부사령관인디- 확인을 해봐야지라.” “내가 그래도 명색이 명예 지서주임인디 내가 거짓말을 허겄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동네에 빨갱이가 한 놈이라도 있는가? 이놈은 우리 동네 사람이라 이거여.” “그러믄, 면장님이 책임을 지시오. 뒤에라도 이놈이 빨갱이 김용길이거나 쪼끔이라도 꾸정물이 튀었으면 면장님도 무사허지 못헐 것잉께.” “알았네. 내가 보증을 설것인께 얼른 풀어주소.” 남편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남편 김용길은 죽고 새로운 사람 김기만이 태어났다. 그날 장터에서 끌려간 김용길은 죽었다. “니가 용길이라는 이름으로 살믄 평생을 두고 이런 봉변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따라 오니라.” 지서에서 풀려난 남편을 데리고 나온 면장은 면사무소로 갔다. 그런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문서에서 김용길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편은 김기만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남편은 더 이상 김용길 때문에 위험에 처하는 일이 없어졌다. 새로운 이름으로 군대에 가고 제대를 했다.
남편이 군대에서 돌아온 이듬해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 무렵 남편의 생명의 은인인 면장 집에서도 첫 손자가 태어났는데 젖이 부족했다. 그 아이의 유모가 되어 아들보다 그 아이에게 더 먼저 젖을 물리면서 두 아이를 키웠다. 남편은 목숨을 구해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머슴살이와 소작을 하다가 산지기가 되었다. 벌거숭이 황토산에서 소나무를 지키고 오리나무를 지키고 아까시나무를 지키면서 여기저기 묘지의 벌초를 하고 틈나는 대로 산골짜기를 개간하여 밭을 늘여 나갔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주암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밤 광천 구시장통에서 기쁜영화사가 상영해드릴 영화는 오발탄입니다.” 자전거 뒤에 확성기를 싣고 가설극장 영화선전을 하고 다니는 사람 뒤를 숨이 턱에 닿아 뛰어 쫓아다니더니 “아 아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쩌고저쩌고 하는 흉내를 내면서 아들은 귀엽고 예쁘게 자랐다. 공부도 잘해서 학교에서 주는 상이란 상은 도맡아 타왔지만 살림이 어려워서 중학교에도 보내지 못하고 말았다.
2. 아장골에서 애기나리가 울었다
“역마살이 단단히 끼여부렀그만이라. 지 운명인께 냅둬야재 어쩌겄소. 별도 달도 없는 캄캄한디로나 빠지지마라고 해야재라. 길 끊어지지 마라고 다리나 많이 놔주시오.” 어쩌다 동네에 들른 봉사점쟁이가 소년에게 역마살이 끼였다고 사주를 봐줬다. 부모는 여기저기 다리를 놓고 다녔다. 징검다리의 노둣돌을 손보기도 하고 물 흐르는 도랑 위에 나무를 걸쳐 다리를 놓기도 했다. 아주 조그만 물길만 봐도 물 가운데 돌 하나 쯤 놓아두고는 했다. 그것만으로도 다리 놓는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큰절에 소년의 이름을 올리고 부처님에게 소년을 팔았다고 했다.
소년은 들로 산으로 나가 풀을 베어오고 나무를 해 날랐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그러면서 낫질이 늘고 지게질이 늘고 힘 센 농사꾼이 되어갔다. 저녁이면 동네 사랑방으로 가서 머슴이며 일꾼들과 어울리고 술을 마시고 구레나룻 수염이 검어지면서 어른이 되어갔다. “아따 그놈, 술 한 통개 짊어지고 오라믄 못 지고와도 속에다 담아갖고 오라믄 담아 올 놈이여.” 큰사랑방 상머슴 박씨가 소년의 주량에 놀라 우스갯소리를 해도 소년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소년은 사랑방에서 나와 방죽두덩에 섰다. 동네 안에 있는 방죽인데 물구멍이 없어서 거의 마른 채로 있다가 비가 오면 잠시 물이 고이는 곳이었다. 방죽을 에워싸고 마을길들이 이어지고 건너 편 울타리집 시암가에서는 이 무렵이면 정숙이가 늦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정숙이는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일을 거드는 동갑네기 여자아이였다. 소년이 갓 배운 휘파람을 불었지만 정숙이는 그냥 하던 일만 계속했다. 느을 그랬다. 바로 이 방죽두덩에서 강동양반이 총을 쏘았다고 했다. 영천댁에 들러 동네에 치안대가 없다는 말을 믿고 경계하는 마음 없이 오던 빨치산들 중 한 사람이 총을 맞은 곳은 사랑방 사립문 앞쯤이었을 것이다. 그는 치명상을 입었다. 동료들이 그를 부축하고 서둘러 동네를 빠져나갔지만 낮은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 숨이 끊어지자 한동고개에 그를 버려두고 갔다.
주암면 한곡리의 000(?)는 주암지서 황영환 주임이 지휘하는 치안대에게 마을에서 총살되었다.(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89쪽)
밤이면 출몰하는 빨치산들이 무서워 순경들은 마을 청년들에게 총과 탄약을 지급하여 치안대를 조직하고 밤마다 마을에서 보초를 서게 하였다. 그날 밤 치안대는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연천댁 사랑방에 모여 숨죽이고 있었다. 빨치산이 무서운 것은 치안대로 불려나온 청년들도 모두 알고 있어서 그들은 동네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아따 나 오줌 좀 누고 와야겄네.” 강동양반이 총을 들고 일어섰다. “오줌 누러 감스로 멀라고 총을 들고 간데?” “무서운디 총이라도 들고 가야재 자네가 항꾸네 가줄것이여?” “나는 오줌 안내려운께 자네나 갖다 와. 쌀가지가 꼬치 따묵는디 조심허고…” 강동양반은 울타리 가에다 소변을 보고나서 그냥 동네나 한 바퀴 돌아 볼 생각으로 골목을 걸어 내려왔다. 방죽두덩에서 골목은 네 갈래로 갈라졌다. 오른 쪽에서 나는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를 먼저 들은 것이 강동양반이었다. 이 시각에 바깥을 돌아다닐 남자들은 빨치산들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었다.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강동양반은 빨치산이 오고 있는 방향으로 총을 쏘았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지만 울리는 총소리가 너무 커서 놀란 강동양반은 죽어라고 뒤돌아서 도망을 쳤다. 갑작스럽게 총격을 당한 빨치산들도 마찬가지였고 사랑방에 숨어있던 다른 청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방을 뛰쳐나와 뿔뿔이 흩어져서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쳤다. 이튿날 한동고개에서 총에 맞아 죽은 빨치산 시체가 한 구 발견되었다.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동료를 부축하여 가다가 숨이 지자 치안대의 추격이 두려워 땅에 묻어 주지도 못하고 그냥 버려두고 간 것이었다. 그 시체는 동네 당산나무 아래로 끌려와 동네사람들에게 전시되었다. 황영환 주임이 그 시체를 발로 마구 짓밟았다. 칼로 살점을 저몄다는 말도 있었다. “주머니에서 돈도 나오고 그러드라. 순사가 발로 밟을 때마다 총맞은 디서 피가 울컥울컥 나왔어. 그 순사놈 참 징헌 놈이어야.”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치를 떨었다. 치안대를 아버지는 잠복대라고 했다. 그날 밤 아버지도 그 사랑방에서 잠복을 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울리자 방에서 뛰쳐나가 북바구재를 넘어 북바구시암 위 산에까지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숨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숨이 턱에 닿아 나타나서 총을 겨눴더니 강동양반이더라고 했다. “하여튼 자네만 보여서 자네만 죽어라고 따라왔어.” 날이 밝을 때까지 숨어있다가 동네로 슬그머니 돌아왔다고 아버지는 멋쩍게 웃으며 그날 밤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강동양반이 총을 쏜 바로 그 담벼락에 기대어 소년은 날마다 휘파람을 불었다. 소년의 휘파람은 날로 익숙해져갔지만 정숙이는 대답이 없었다. 소년은 정숙이에게 너를 좋아한다고 길고 긴 편지를 썼다. 답장이 왔다. 「너네 집과 우리 집이 어떤 사인지 아니? 너네 집은 우리 집안의 산지기야. 하인이라고, 어떻게 하인하고 양반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니. 주제파악을 해라 야. 한번만 더 이따위 편지 보내면 오빠들에게 일러서 가만두지 않을꺼야. 그리고 듣기 싫으니까 밤에 휘파람 불지마. 도깨비 나올 것 같아서 무섭고 싫어.」 소년은 갈기갈기 편지를 찢었다. 치를 떨면서 밤새 막걸리를 마셨지만 술에 취하지 않았다. 소주를 댓병으로 반병 넘어 마시고서야 술에 취해 죽은 듯이 쓰러졌다. 이틀을 꼬박 앓고 일어난 소년은 두 번 다시 휘파람을 불지 않았다.
한동고개는 높고 험한 고갯길은 아니었지만 앞 뒤 어느 마을도 보이지 않고 숲이 우거져서 으슥하고 왠지 소름이 끼치는 곳이었다. 남자에게 버림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웃 마을 처녀를 처녀귀신이 되어 떠돌아다날까봐 고갯길 길바닥 어딘가에 몰래 묻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도깨비나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쩌면 여순 때 총 맞아 죽은 빨치산 귀신도 한동고개를 떠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죽은 갓난아이를 독에 담아 묻어버리는 지하골 골짝이 바로 재 넘어 였다. 사람들은 사시사철 습기 차고 그늘 진 그 곳을 아장골이라고 불렀다. 날이 궂은 날이면 응애, 응애,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환한 대낮인데도 두런거리는 사내들 목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깨진 사금파리며 항아리조각들이 굴러다니는 아장골은 느을 축축해서 퀴퀴하고 불쾌한 냄새가 떠나지 않았지만 철마다 꽃들이 지천이었다. 소년은 그 꽃천지를 쏘다니며 양반들이 사랑하지 않는 꽃들을 사랑했다. 참꽃이며 개꽃, 원추리, 비비추, 윤판나물, 은방울꽃, 애기나리, 중나리, 참나리, 둥굴레. 보춘화, 용담, 자귀나무, 아까시, 땅비싸리들이었다.
봄 깊어지라고 종일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날, 유난히도 구성지게 아장이 울었다. “아따 누구집 애기간디 저렇게 애간장 녹이게 울어싼다냐.” “애기는 누구 애기여? 아장골에서 그래쌓그만.” “누가 모르요?” 큰방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도란도란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소년은 깨진 유리병이며 항아리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아장골을 떠올렸다. “애기 삐따구는 커녕 기저귀 조각도 없드만 아장골에서 뭔놈의 아장이 운다는 것이여? 가본께 한나도 무섭도 않드만 무섭다고 빌빌댐스로 들어가보도 않고 아장이 우네 마네, 참 나 말도 안 되는 소리들만.” 소년은 실상 처음 들어보는 아장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아장이 운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아마 동네 어디선가 갓난아이가 울고 있을 것이었다. 다음 날 비가 그친 아장골을 찾아간 소년은 골짜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어제 빗속에서 울어대던 아장의 흔적을 찾아봤지만 깨진 항아리 조각이며 유리병들뿐이었다. 그런데 깨진 항아리 조각 근처에 새로 핀 꽃들이 보였다. 애기나리였다. 이 꽃들이 운 것이여? ‘거시랑치가 울어쌓는것 본께 비가 더 올랑갑다’ 라던가 ‘저 산 고동 우는 것 들어봐라, 저 고동 안에서 우렁각시가 나온단다. 니도 우렁각시 같은 색시를 만나야 헐것인디’ 같은 할머니 말씀대로라면 지렁이도 울고 산고동도 우는데 꽃이라고 울지 말란 법 없지 않은가? 소년은 스스로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다가 언젠가 언덕 너머에서 사내들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뛰어 올라갔더니 사람 흔적은 없고 참꽃 무더기만 환하게 피어있던 일이 떠올랐다. 그해 처음 만난 참꽃이었다. 어쩌면 애기나리가 울었는지도 몰라, 그때 두런거리는 소리는 참꽃들이 두런거린 것이고, 내 귀에만 들리는 것일까? 아장 우는 소리는 어머니 아버지도 들었고 동네 사람들도 다 들었다는데, 사람들이 한낮에 사내들이 두런두런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 것도 꽃들이 내는 소리였을 거야. 소년은 갑자기 모든 것들이 새삼스러워져서 사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나무며 풀, 심지어는 바위와 흙까지도 무슨 소린가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3. 그때 주암면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시작되었던 접치 저수지 공사가 해방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었다. 공사 일을 하기위해 근처 마을 사람들은 물론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도 저수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빨치산들이 통신두절을 목적으로 공사장 주변의 전신주를 절단하고 전선을 끊어가버리는 일이 생겼다. 주암 지서주임 황영환은 공사 인부 중 함바에서 숙식을 하던 사람들을 지서로 끌고가서 취조를 하였다 황영환 주임은 공사장 인부들의 눈을 가리게 한 뒤, 저수지 공사장 인부들에게 노임을 지불하는 책임자인 주암면 재무계장에게 아는 사람들을 지목하게 하여 그 사람들은 석방하였으나 재무계장과 안면이 없는 사람은 빨치산으로 몰아 접치재에서 총살하였다. 25세의 한익수와 그의 28세 된 형이 그러했다. 23세의 장 아무개도 여수에서 저수지 공사장 일을 하기 위해 왔다가 재무계장과 안면이 없어서 빨치산으로 몰려 총살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아마 일을 하고 첫 노임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노임을 지불하는 책임자인 재무계장이 그를 알아볼 수 없었겠지.
32세의 오종호는 농부인데 접치재에서 황영환 지서주임에게 총살되었다. 30세의 하상수는 농부인데 접치재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27세의 이종석은 농부인데 오산회의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접치재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31세의 김영철은 농부인데 빨치산에게 협조하였다고 하여 접치재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45세의 박관옥은 농부인데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접치재에서 경찰에게 총살되었다. 36세의 정보선은 농부인데 빨치산 심부름을 했다고 하여 황영환 지서주임에게 총살되었다.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79~89쪽)
접치재는 주암면과 쌍암면 사이에 있는 해발 270m의 고갯길이다. 이 접치재를 경계로 조계산과 오성산이 나뉘는데 여순사건 당시 경찰이 수시로 사람들을 트럭에 싣고 와서 총살 한 후 묻어버린 곳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어느 곳에 묻혔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호남고속도로 공사 중에 일부가 훼손된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위의 사례들은 접치재 근처 마을에 살던 주민들로 신원이 확실하게 밝혀진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주암면은 순천의 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의 형태는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광주로부터 남동쪽으로 50Km, 순천 시내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약 30Km지점에 있으며 서쪽에 운월산(雲月山:618m), 밤실산(598m), 서남쪽에 모후산(918m), 남쪽에 시루산(542m)·옥녀산(400m)· 동남쪽에 조계산(884m), 동쪽에 오성산(608m), 유치산(530m), 아미산(583m), 북쪽에 구산(九山:426m), 한동산 (648m)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한 가운데 보성강이 북향으로 흐르는 분지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주암면은 여순사건 때, 산과 인접한 마을들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군경 토벌대는 빨치산들의 보급투쟁을 차단하기 위하여 산간마을 사람들을 소개시키고 마을에 불을 질러 파괴하는 행위를 수없이 저질렀는데 주암면에서도 그 당시에 주암리 상주마을과 오원리 휘형마을이 폐촌이 되었다. 봉기군들이 경찰들에게 빼앗은 상당한 수의 말을 타고 와서 밥을 먹고 한동산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순봉기를 주도했던 봉기군 중 일부가 국도를 이용하여 주암면으로 퇴각한 뒤, 구산과 한동산을 이용해 백아산 방향으로 입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에도 이 길은 백아산에 근거를 둔 빨치산들의 주요 보급투쟁로였다.
문길리(당시에는 풍교리)는 옥녀봉 아래 마을이다. 맞은편에는 빨치산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조계산이 이어져 있어서 군경과 빨치산 양 편에 의한 희생이 많았다. 조일환은 입산하였다가 진압군경에게 총살당하였다. 조동길 사촌형 되는 이도 입산하였다가 조계산에서 진압군경에게 총살당하였는데 조일환의 누이동생이 입산한 조일환에게 밥을 갖다 주다가 경찰에게 총살되기도 했다. 조규조, 송귀병, 조달옥, 조학섭, 한인수도 오산회의에 참석하거나 좌익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총살당하였다. 70세인 조한식은 농부인데 빨치산 기지를 경찰에 알려 줘 빨치산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빨치산들이 그 보복으로 마을에 쳐들어와 아들인 45세의 조형준, 22세의 조형관과 함께 3부자를 조계산에서 총살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군경의 편에서 활동을 하다 빨치산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 밖에도 여럿 있다. 19세인 조동철과 20세인 김석규, 19세의 조연해(또는 조연오)가 그들이다.
요곡리는 문길리와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진압군경에 의한 희생자가 많았다. 이호두 이호진은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출신으로 입산 후 조계산에서 진압군경에게 총살 되었다. 정동균, 이경옥, 정병남 역시 입산 후 진압군경에게 총살 되었으며 정귀남은 경찰들에게 끌려간 후 행방불명되었다. 빨치산으로 활동을 한 사람이 있으면 다른 가족들이 무사하지 못했던 다른 마을의 예에서 보듯이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복다리는 조계산 바로 아래 위치한 마을로 용촌, 월평, 복다, 이렇게 3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촌 마을은 오산회의에 참석한 손일권이 좌익 활동을 왕성하게 하여 그 일가족 중 4형제가 피해를 당했으며 주민 중 상당수가 경찰의 탄압에 못 이겨 입산하게 되고 진압군경에게 많은 희생을 당했다. 복다리는 당시 지서주임 황영환이 빨치산에 가담하지도 않은 가족들을 사살하여 땅에 묻거나 음식물을 제공하였다고 하여 처벌하였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6.25전쟁 중에 우익활동을 한 22명의 주민들이 빨치산들에게 총살되기도 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가족이 함께 피해를 입은 사례가 특히 많다. 다른 마을에서도 똑 같은 일들이 일어났겠지만 자료가 없는데 이 마을만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자료수집에 크게 도움을 준 듯하다. 정사수꾸리는 큰아들인 정덕모가 빨치산과 함께 다닌다고 하여 일가족 5명이 집단으로 총살을 당하였다. 그 중에는 12세의 아들과 14세의 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용촌마을의 손일권은 오산회의에 참석한 좌익 활동가인데 세 동생 손일문, 손일두, 손주환과 함께 지서로 끌려가서 총살당하였다. 김치범은 입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입산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부모와 세 동생과 함께 6명의 가족이 경찰에게 총살당하였다. 지역 좌익세력의 핵심으로 입산하였다가 조계산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한 이정희 때문에 그의 어머니와 할아버지 이승복도 경찰에게 총살당하였다.
선산리는 당시 63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조동식이 오산회의에 참석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허권, 박인석, 조동식, 정병래, 조연식 등 5명을 주암지서로 끌고 가 7~8일 정도 고문을 가한 뒤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 당산나무 아래서 조동식을 총살하였다.
접치마을은 접치고개에 위치하여 빨치산들을 도와준다는 이유로 피해가 컸으며 1948년 11월경 마을 전부를 창촌리롤 소개하여 1년 정도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행정마을은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없는데도 동네 사람들이 빨치산과 접촉하였다고 하여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며 좌우익 양 편에게 식량과 가축을 빼앗기는 등 피해가 컸다. 경찰에게 접치재에서 5~6명 정도 희생이 되었고, 빨치산의 짐을 지고 가서 행방불명이 된 사람도 여럿이었다.
오원마을은 1924년 설촌하여 烏院(가막안)이라 칭하였으며 마을에서 동쪽으로 500m쯤 되는 휘형머리고개에 20호 정도의 휘형마을이 있었는데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하여 마을 전체를 오원마을로 소개시켰다. 휘형마을은 이후로 폐촌 되었다. 이 마을은 동네 앞에 야경막을 설치하여 동네 사람들이 순번제로 경계근무를 서야했다. 양철동이 등을 두들겨서 서로 연락을 하였는데 경계근무 중에 빨치산의 출현을 보고하던 여중훈은 현장에서 빨치산에게 총살되었다. 그 후, 김숙현, 장순현, 여수암, 오재술, 김정현 등은 지서로 끌려가서 1~2달 정도를 구금되어 자백을 강요당했다. 좌익세력에 동조했다는 자백을 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으며 기절을 하면 다시 깨워 고춧가루 물을 먹이는 등의 심한 고문을 가했다. 장순현은 사형을 당할 뻔 했으나 지서경찰 박찬형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오산마을은 여순사건 이후 전남유격대 부사령관을 지낸 김용길의 처가동네였으며 각 마을의 좌익 활동가들이 모여서 회의(오산회의)하는 곳이었다. 이에 진압군경이 혈안이 되어 김용길을 체포하려고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황영환 주임은 김용길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전 주민들을 당산나무 아래와 방죽에 집결시킨 후에 조금이라도 김용길과 친하다거나 김용길 처가와 친척이라면 현장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결국 오산리에는 과부가 69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진압군경 2000명 정도가 이 마을에서 주둔하기도 해서 이들의 식사제공을 위해 주민들의 고초가 컸다.
면담자 :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을 때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술자 : 여순반란사건 때는 논 사지 말라니까 논 사면 죄고. 돈 갈라 묵어야 할 것인디 혼자만 갖고 있으면 죄고. 부자들하고는 어울리지 못했지. 논도 갈른다, 오만 것들도 모두 갈라 먹은다고 공산주의를 만들어. 그렇지만 공산주의가 된가, 민주주의가 되지. 면담자 : 여순반란사건 일어날 때 농사지었어요. 구술자 : 농사지었지. 면담자 : 여순반란사건이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구술자 : 공산주의 맨들라고. 뻘갱이들이 안 일어났는가, 이북 놈들이. 공산주의 맨들라고. 면담자 : 당시에 군인들과 경찰관과의 사이가 안 좋았다면서요? 구술자 : 안 좋았지. 경찰들은 다 말리고, 군인들은 빨갱이 안 돌아 부렀는가. 그래가지고 여수반란이 일어나 부렀지. 면담자 : 사이가 안 좋은 이유가 무엇이었어요. 구술자 : 안 좋아. 경찰하고는. 면담자 : 일반 사람들도 경찰을 안 좋아했어요. 구술자 : 경찰이 안 좋아, 경찰은 많이 안 좋아. 면담자 : 사람들은 왜 경찰을 안 좋아했을까요? 구술자 : 여기서 죄지은 사람은 뻘갱이라고 경찰이 잡아다가 두드려서 사람을 병신을 만들고 죽이고 안 그랬는가. 면담자 : 일제시대 때 경찰은 나쁜 짓을 많이 했죠. 구술자 : 일제시대에 경찰은, 그 사람들은 어른이지. 죽으라면 죽고 사라면 살고. 면담자 : 오산마을에 좌익, 우익으로 나뉘어 서로 싸웠죠? 구술자 : 오산은 좌익이 해 가지고. 동네가 가난하네. 좌익으로 거지 다 나서 부렀지. 오산 청년들이 머리가 좋아가꼬. 김용길이 그 사람하고, 조준섭이 하고 그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갔고, 그 사람들이 일을 맡겨가꼬. 뭣도 모르고 논 갈라 준다 한께 좋다고 모도 다니다가 모두 죽었네. 면담자 : 마을 사람들이 좌익으로 많이 쏠렸어요? 구술자 : 암, 좌익으로. 하루에 70명이 죽었어. 낮에 70명. 면담자 : 마을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구술자 : 그 때는 법이 법이 아니여. 즈그 아버지를 죽이고. 즈그 어머니를, 대소가(大小家)를 죽여야 지가 산께. 말 안 들으면 그렇게 죽여. 좌익들이 우익이라고 하면 죽여. 아이고, 그런 얘기를 하면 소름이 끼치네. 좌우간 이야기 할 필요가 없네. 면담자 : 좌우익 세력 중에서 어느 쪽이 많이 죽였습니까? 구술자 : 여수 반란이 나가꼬. 그 먼쯤부터서 밤에 공산주의 한다고 쏙닥거리고 다니다가, 여수 반란이 나니께 옳다 됐구나, 그래가꼬 전부가 나서 부렀제. 면담자 : 좌익으로 몇 사람이나 죽었나요. 구술자 : 좌익은 농사짓고, 모도 없이 사는 사람들은 좌익이 되고, 우익은 경찰이나 하고, 면서기 하고, 구반장들 하고, 그런 사람들은 우익이라고 해서 미움을 주었제. 그때 시상은 말할 것이 있것는가. 세상이 아니고 법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여. 길에 다닌 거시랭이 만도 못한디. 면담자 : 마을에서 어떤 피해를 봤는가요? 구술자 : 말할 것이 없단께. 즈그 부모도 모르고, 즈그 대소가도 모른 법인디. 부모도 이딴디를 불대불지. 사람 산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여 면담자 : 그때 사람들이 왜 좌익을 좋아했나요? 구술자 : 공껏들 좋아한께 그런단께. 이북 놈들 갈라먹고. 그런께 공으로 준다니께 좋아했지. 논도 좋은 놈 차지하고. 부자 집 논문서를 갖다가 가르고, 밤에 다닌 사람들이. 그런 것 들맥일 것 없어. 면담자 : 그때 희생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죽이던 가요. 구술자 : 총으로 지져부렀지. 시방까지도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면, 밤에 다닌 사람들 식구들이 들으면 덜 좋다고 하네. 나는 없이 살아도 우리 삼촌이 이장을 하기 때문에, 내가 미움을 받고. 논 사지마라 니께, 논마지기나 사가지고 미움을 받아가꼬. 나를 죽일라고 발광을 하고. 우리 집 앞에다 삐라장을 수북하니 던져놓고. 너는 언제 죽인다 그래도 시방까지 살았어. 마음이 곧은께. 반란군들이 끌고 다니다가 어찌나 문대고 밟았던지 코가 요만이나 되어부렀어. 그래 수술했소. 그런 것 물어보지 마시오. 당최 소름이 찌끌고. 면담자 : 그래서 어르신의 코가 이렇게 상처가. 구술자 : 여기를 그때 M1으로 찍어 부러서, 밤에 다닌 놈들이 총부리로 찍어가꼬는 코가 절단 나불고 그랬구만.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가꼬. 면담자 :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시죠? 구술자 : 그 사람들 모아가꼬, 웃머리가 쏙닥쏙닥하다가, 여수반란이 나니까 전부가 기다. 그래서 나서다가 사람이 많이 죽었지. 면담자 : 어떻게 했습니까? 구술자 : 몰아내. 집집이 쫗아다니면서 끄집어 내. 정자나무 밑으로, 경찰들이 그랬고. 낮으로는 경찰, 전라북도 경찰, 군인들이 전부 와 그랬지. 저녁에로 잠을 못 자. 면담자 : 군산에서 온 12연대 말이죠. 구술자 : 오산은 난리를 누가 쳤냐하면, 다 주임들이 와 가지고, 그래도 오산이 모스크바라고 해도 그러지 마라고 주의만 시키고, 때리고 그런 것만 봤지, 총으로 쏴서 죽인 것은 안 봤어. 그랬든만 황가라고 황몽둥이라고, (지서)주임이라고, 그때 그 사람이 와가꼬 몰아내가꼬는 총부리로 일곱을 딱 세워놓고, M1으로 쏴 부러. 그 뒤로부터는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그 지랄이여. 당췌 들맥이지 말소. 속이 떨려 시방. 우리는 어찌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던지. 그 사람들이 와서 그럴 때는 저 까끔에 가서 살았어. 면담자 : 왜 여기를 모스크바라고 했어요? 구술자 : 반란군들이 여기를 서울을 삼아. 시방 대통령이 서울 안 있소. 오산을 서울로 삼아. 면담자 : 김용길 씨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시죠. 구술자 : 못해. 더러와서 못해. 잊어부러. 이름이 났네. 그러니까 황가가 와서 보드만 쬐깐한 동네 이까짓 것 잡아 분다고 그랬구만. 황몽뎅이가 와서 동네에다가 불대불고 사람들 죽이고.3) 면담자 : 남기고 싶은 얘기는? 구술자 : 남길 것도 없고. 누구한테 이야기도 못하고, 나를 죽일라고 다닌 놈들이 먼저 죽데. 시방까지 살았은께 괜찮애. 그 놈들은 어디서 디진 지도 몰라. 그만 하시오. 그런 소리하면 몸서리가 나네. 시방 산 것이 산 것이 아니네, 그런 것을 들먹이면. 면담자 : 김용길씨나 조준섭씨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시죠. 구술자2 : 준섭이는 어디가 디진지도 모르고. 용길이는 머리가 좋아가꼬 자수를 했어. 자수를 해서 7년 징역을 살아. 그것은 내가 알제. 이 양반은 밖으로 다닌께 모르지만. 순천 노인정에서 살아가꼬 작년 그러께 죽었다요. 즈그 딸이 저그 나주서 살아, 딸 하나. 김용길이란 사람은 대가리가 큰 놈이라, 사람을 막 죽이고 찌르고 그러고 다니진 않았어. 그리 못하게 해도 그 밑에 부하들이 그랬지. 그 사람은 하나라도 살릴라고 했제. 그랬는디 나이가 많은께 세상을 떴다요. 즈그 마누라만 살았지. 면담자 : 조준섭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구술자2 : 가족이 몰살을 해부렀지. 그 사람도 나갔어. 즈그 어머니도 얻어먹다 얻어먹다 배가 고파서 언덕 밑에서 죽고. 즈그 동생도 순천에서 하나 산디. 다리를 맞아가꼬 병신이 되어가꼬, 시계방한다고 순천서 살더니만 죽었는가 살았는가 그것은 모르고. 면담자 : 조준섭씨도 좌익 활동을 많이 했어요? 구술자 : 저기 곡성 목사동가서 공부하고 그랬어, 서당골 가서. 준섭이는 그때 잡혀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나가서 사방대서 죽어논께 어디서 죽은지 몰라. 저기 석곡 괴목나무 많은데서 많이 죽었지. 때려죽이고 지져서 죽이고 볶아서 죽이고. 면담자 : 공산당, 좌익 운동 한 사람들을. 면담자 : 이 마을에서 70명이나 죽었다고요. 구술자 : 전부를 세면 70명. 군인에 가서 죽고, 밤사람에게 죽고, 잡혀가서 죽고. 차로 몇 차를 싣고 갔어. 몇 번 그렇게 해논게. 우리층이 몇 사람 없네. 다 죽어 불고. 10월 달엔가 9월 달인가 몇 집 (제사를) 지낼 것이여. 그런 것을 조사할려고 하고, 다 알려고 하면 다 욕해. 요렇게 갈쳐줄라고 하면 안 들을라고 그래. 그 가족들이 살고 있고 그런께, 안 들을라고 하고. 요련 것은 잊어부러야 해. 면담자 : 기록해놓고 잊어버려야죠. 구술자 : 어디 가서 죽고, 잡혀가서 죽고, 전부 죽어부렀는데. 면담자 : 옛날에 어르신 기억을 잘 하시더니만 말씀을 안 하셔부네. 구술자2 : 해마다 안 달라져부요. 면담자 : 진압경찰이나 군인들한테 죽은 것이 대부분이죠. 구술자 : 그때는 경찰도 별반 없고. 면담자 : 반란군이나 지방폭도들이 죽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구술자 : 기억하들 못해, 일일이. 오산 동네가 140호인가 되었는데, 동네가 요렇게 쪼그라들었는데. 누가 그것을 챙기겄소. 그 사람들이 모두 살고 있으니까 기네, 아니네 할 것도 없는 것이고. 법이라고 써먹은 것이여, 정치라고 써먹은 것이여, 다 잊어버려야지. 면담자 : 마을 사람들을 소개시킨 것은 없었습니까? 구술자 : 그런 것 없어. 어저께 한 일도 잊어 불고. 귀가 먹어 불고. 금방 잊어 부러. 개비에 넣은 것도 금방 잊어부러. 면담자 : 너무 피곤하시죠. 다음에 하시죠. (이 증언은 2006년 여순사건순천시민연대의 진상규명위원회 소속 선휘성씨와 당시 오산리에 거주하던 조연석 씨와 이재남 씨의 면담 채록 중 일부를 발췌했다.)
당시 140여 집이 모여 살던 마을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가 69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극심했던 오산리에서 밝혀진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순섭, 조경섭, 조정열, 조이조, 조기섭, 조종문, 조양섭 부부, 김용주, 김일권, 노동원은 동네 당산나무 아래서 경찰에게 집단으로 총살되었다. 그 중에서 김용주는 김용길의 동생이었다. 조창조, 조규환, 조영래, 조동춘, 조맹섭, 조성태, 김윤길, 조연덕, 조억섭, 조성진, 조삼영은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 된 후 집단 총살되었다. 조준섭, 조준조, 김용신,조동열, 조동철, 정명순, 조연임, 조외순, 조연백, 정정봉, 서병기, 김옥수, 조길섭, 조계환, 조옥섭, 조병진, 조만호, 유봉춘은 입산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조병량, 조수섭, 조귀만, 조동출, 조동하, 조영환, 조필용, 조정모, 조영섭은 지방좌익들에게 총살되었다.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피해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4. 길은 접치재에서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장골 애기나리 울음소리를 들은 뒤로 산으로부터, 강으로부터, 들판으로부터 꽃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날은 울음소리로 불렀다. 어느 날은 웃음소리로 불렀다. 어느 날은 가만히 속삭이는 소리로 부르다가는 어느 날은 귀청이 터질 듯 한 고함소리로 불렀다. 낮다가 높다가 잔잔하다가 거칠다가 부드럽다가 사납기도 했다. 산에서 부르면 산으로 가고 강에서 부르면 강으로 가고 들판에서 부르면 들판으로 갔다. 아무래도 그 소리는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산울음 소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났다. 처녀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나고 정숙이도 떠났다. 완행열차를 타고 나도 서울로 떠났다. 전기공사를 하는 가게에 들어가 전기 일을 배우며 겨울을 넘겨 몇 달을 보냈다. 봄이 오자 다시 산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근처 어느 산으로 가서 하루를 지내고 돌아와 일자리를 잃었다. 사진관을 하는 친척 형의 가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지내며 며칠, 가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그치지 않는 산울음 소리를 좇아 완행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곡성역에서 내리지 않고 순천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차에서 내려 아침 버스를 타고 선암사에 도착한 나는 처음으로 조계산을 넘었다. 산을 넘다가 훈련하던 군인들에게 조사를 받았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아주 드물던 시절이었다. 일요일도 아닌 날 환한 대낮에 등산가방도 아닌 가방을 멘 사내가 산을 넘는 것이 수상해보였을 것이다. 총을 들이대고 몸을 뒤지고 가방을 뒤졌다. “간첩들이나 이런 날 산에 다니는 거야.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젊은 놈들이 열심히 일해야 할 좋은 날에 산이나 다녀? 조심해.”
1952년 3월 16일, 조계산 수색, 완전 무장공비 50명과 교전(2명 사살, 아침 5명 사살, 노획품 다수)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여순사건 순천지역 피해실태 조사보고서』,17쪽)
송광사로 내려가지 않고 길을 바꾸어 접치재로 내려왔다. 작은 흰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노루귀라는 꽃이름은 나중에야 알았다. 수색훈련을 하는 군인들은 이 꽃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1952년에 군인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사살된 7명 말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그들을 ‘산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무장공비보다도 빨치산보다도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살아있는 사람들도 되고, 산에 있는 사람들도 되고, 산의 사람들도 되었던 그 산사람들은 분명히 무사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쯤 산이 되거나 나무가 되거나 바위가 되거나 꽃이 되어서 산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벌써 바람이 되고 물이 되어서 산을 떠났을지도 모르지. 어떤 남자와 여자가 두런거리는 소리를 따라 어느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처음 보는 노란 꽃들이 환했다. 그럴 거라고 이미 짐작을 했다. 그 꽃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복수초였다. 그날 나는 날이 다 저물어서야 길을 찾아 접치재 마루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막차가 끊긴 20리 길을 걸어서 한밤중에 고향집에 도착했다.
여름 동안 산으로 일을 다녔다. 모후산 중턱에 오동나무를 심은 어느 회사가 나무 밑에 자란 풀을 베기 위해 일당을 주고 사람들을 동원했다. 새벽에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먼 길을 걸어 산에 올라서 하루 종일 풀을 베다가 저녁이면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이 왔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일을 하느라 얼굴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날도 그렇게 날이 저물었다.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저 만큼 앞서가던 여자들 중의 하나가 수건을 떨어뜨리고 갔다. 수건을 주워 들고 빠른 걸음으로 그 여자들을 따라 잡아 수건을 건네주었더니 밀짚모자를 쓰고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처녀가 고맙다며 수건을 받았다. 여자들 일행 속에 여자 동창이 있어 함께 걸어 내려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여자들은 모후산 바로 아래 동네 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낮은 소리로 웃고,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써 고개 들지 않던 그 처녀가 왠지 낯익었다. 그 목소리가, 그 웃음소리가 아주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사람처럼 낯이 익었다. 밤새 꽃이 환하게 핀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그 처녀와 쫓고 쫓기는 꿈을 꾸었다. “야, 현희가 니 좋아헌갑드라. 그 가시내 영 착해야, 만내 볼래?” 다음날 일 끝나고 내려오는 길에 중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 동창이 나를 부르더니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고개만 숙였다. “낼 한번 만내 봐라. 그래가꼬 잘해 봐.” 힐끗힐끗 뒤를 돌아보며 앞서가는 내 일행들의 뒤에서 한참 떨어져 같이 걸어 내려오며 우리는 그냥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여자 동창 동네 다 와서 헤어졌다. 내가 사는 동네는 그곳에서도 10리는 더 가야했다. “아따, 그 가시내허고 연애 허냐? 보기 좋드라야.” 일부러 걸음을 늦춰 기다린 일행들이 나를 놀렸다. 그 다음날 나는 일부러 일행들보다 한참을 뒤쳐져 내려왔다. 일행들도 무슨 눈치를 챘는지 한참 뒤에 쳐진 나를 부르거나 기다리지 않고 그냥 멀어져갔다. 중간에 있는 큰 나무 그늘에 여자동창과 현희라는 그 처녀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일어나더니 현희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도 그냥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내가 소개 허께. 여그는 내 친구 철수고, 야, 니 성이 뭐냐? 아, 김철수재, 여그는 내 후배 송현희라고 해. 우리보다 2년 후배고- 우리같이 중학교는 안 갔어.” 여자동창 덕분에 우리는 서먹서먹함 없이 그냥 편안하게 눈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얼른 갈랑께 둘이서 잘해봐.” 우리들이 눈웃음으로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자 동창은 달리듯이 걸음을 빨리해서 앞서 가버렸다. 그날은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길 이쪽과 저쪽으로 떨어져 나란히 그 길을 걸어 내려와 현희의 동네에서 고개 숙여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 다음날부터는 현희가 혼자서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졌고 며칠 후에는 손을 잡고 걸었다. 현희는 모후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어느 골짜기에는 어떤 산나물이 있고 어떤 꽃들이 피는지, 어디에 샘이 있고 그 샘가에 있는 어떤 나무에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어떤 짐승들이 있고 새들이 있고 길이 있는지를 모후산에 대한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줬다. 그러데 이상하게 현희를 만난 뒤로는 산이나 들이나 강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희와 내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을 다니는 사람들이 여러 마을 사람들이어서 소문은 넓게 퍼졌다. 일은 한 달쯤 이어지다가 먼 동네 사람들은 그만 쓰고 가까운 동네 사람들만 쓴다고 하여 나는 더 이상 일을 나갈 수 없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일을 나간 날,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현희는 헤어지면서 편지를 하겠다고 했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편지는 오지 않았다.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내가 먼저 편지를 쓸 수도 찾아갈 수도 없었다. 편지를 쓰기 위해 편지지 앞에 앉으면 정숙이의 답장이 떠오르고 그 편지 위에 현희 이름이 겹쳐지고는 했다. 한 달쯤 지날 무렵 갑자기 산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날 저녁 때, 오토바이를 탄 청년이 동네로 찾아와 나를 찾더니 무조건 오토바이 뒤에 타라고 했다. 청년은 소재지 다방에서 커피를 시켰다. “자네는 나를 몰라도 나는 자네를 잘 아네. 자네는 술을 잘 마신단디 나는 술을 못 마셔서 그냥 다방으로 왔응께 이해 허소. 나는 송현호라고 허고, 현희가 내 동생이네. 내가 2년 선배 될 것이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네허고 현희 사이도 잘 알고, 그래서 자네헌티 나쁜 말을 헐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여. 자네를 생각해서 왔그만. 우리 현희도 생각허고.”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실은 우리 집안은 빨간 줄이 끄시거진 집안이여, 그래서 형제간들이 아무 행세도 못 허네. 현희도 그래서 중학교를 안 보냈고, 현희가 시집가믄 현희 자식들도 마찬가지재. 그래서 송씨들 허고는 사둔을 맺지 마라고 안 허든가? 내가 현희 한티 이야기 했네. 니는 그냥 똑 같은 운명을 타고 난 사람한티 시집가야재 다른 사람들 피멍들게 허믄 안된다고, 그렁께 자네랑 헤어지라고 했네.” 동의할 수 없었다. “나도 상놈 자식입니다. 그것이 뭔 상관 있다요?” “요새 세상에 양반 상놈이 어디 있당가? 뻘 소리 말고 현희 잊어뿔소. 글고 존 여자 만나가꼬 자식들 나아서 출세 시키믄 그것이 양반인거여.” 그는 편지 한 통을 전해 주었다. “미안허네, 현희가 쓴 편지여. 그냥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했는디 자네헌티 직접 줄라네. 현희 미워허든 말소.” “죄송합니다. 내 주제파악도 못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동안 함께 걸어온 길에 대한 추억은 제가 살아가는 동안에 영원히 아름답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현희 올림” 현희의 편지는 짧았다. 그 편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방에서 나온 나는 기억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셨다.
서울 노량진에 있는 럭키제과 공장에서 딸기제리를 만들며 몇 달을 지냈다. 봄이 오자 산울음 소리를 따라 또 고향으로 돌아왔다. 현희가 일러주었던 모후산 골짜기들을 떠돌았다. “모구산에는 피 흘리는 꽃이 있어요. 산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싹 다 피를 흘리고 죽었데요. 총에 맞고 칼에 맞고 죽창에 찔려서- 그 사람들이 꽃이 되었능갑서요. 눈물이 날 만큼 노란 꽃이 피는디 쪼끔이라도 다치믄 피를 흘려요. 꽃도, 잎삭도, 그래서 피너물이라고 헌데요. 이름에는 너물이 붙었어도 못 묵어요. 피흘리는 너물을 어찌게 묵는데요. 사람들 피 흘리데끼 피를 흘리는디.” 모후산 골짜기는 피나물 꽃이 환하게 피어 봄이 다 가도록 환했다. 그 꽃들을 따라 용바위를 지나 칼바위를 지나 산봉우리를 넘고 넘어 운흘치까지 하루 걸려 모후산을 넘기도 했다. 피-. 그랬다. 주암 산천 어디에고 피 어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봄이면 매우리 강변에 달래나물이 지천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곳에서 나는 달래를 먹지 않았다. 피를 먹은 달래라고 했다. 사람들이 수 없이 피를 흘리며 죽은 곳이라고 했다. 그 강변에는 패랭이꽃도 지천이었다. 유난히도 꽃빛이 붉었는데 그도 피를 먹은 꽃이라서 그런다고 했다.
산울음 소리가 끊기면 고향을 떠났다. 그러다가 산울음 소리가 시작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귀를 막아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 산울음 소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조계산, 모후산, 백아산, 어디든 소리가 들려오는 산으로 가야만 그쳤다. 그 때문에 어느 한 곳에 오래 자리 잡지 못하고 부산, 울산, 동두천, 같은 지방을 떠돌았다. “저 놈이 왜 저렇게 재를 못 잡고 댕기까? 큰일이네.”6)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끼였다고 안 헙디여? ” 여름이 다 갈 무렵 공사장 사람들을 따라 다시 고향을 떠났다. 쇠 부딪히는 소리가 좋아 철근 일을 배우고 철근쟁이가 되었다. 다리를 놓는 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다. 길이 끊겨 다리를 놓아야 하는 나라 안 방방곡곡을 공사장과 함께 떠돌았다. 오랫동안 산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반대로 산에 대한 그리움이 애타게 솟아오르고는 했다. 비오는 날이거나 일이 없어 공치는 날에 산으로 달려가고는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그리움으로 시를 쓰고 시인이 되었다.
가을 모후산
쫓고 쫓기며 한 시대를 보낸 상처 총 칼 맞은 대꼬챙이에 찍힌 세월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흉터에만 단풍드는 산 다리 끌고 산몬당7) 넘어간 사내 피 묻은 발자국처럼 모후산 단풍에서는 비린내가 나네
시인이 되고 나서 아주 먼 길을 돌고 돌아 순천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여순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여순 55주기 추모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추모시를 쓰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가슴도 그냥 잠잠해져서 아무런 감동의 물결도 일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 산울음 소리가 들릴지도 몰라. 그러나 언젠가부터 산울음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가끔 가슴으로부터 알 수 없는 바람이 일어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꽃에게로 이끌어가는 일이 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산과의 소통은 아니었다. 산울음 소리를 기다렸다. 새벽이나 저녁에 선암사나 송광사, 접치재나 용바위를 찾아가 가슴을 열어놓고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아무 느낌도 얻을 수 없는 나날들이 흘러 행사 날이 다가왔다. 갑자기 오래 잊고 있던 현희가 떠올랐다. 차를 몰아 현희가 살던 동네로 달려갔다. 댐이 들어서면서 이미 오래 전에 물속에 잠겨버린 마을, 물이 줄어들어 여기저기 옛 논밭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함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의 흔적도 보였다.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던 그 땅에는 어느새 푸른 풀들이 돋아나 비단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십년도 훨씬 넘는 세월을 물속에 잠겨있으면서도 생명의 꿈을 잃지 않았던 풀씨들이 물 밖으로 잠시 땅이 드러나자 일제히 싹을 틔워 초원을 이루고 있는 놀라운 광경 앞에 서자 갑자기 가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풀들은 서둘러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제 몸 아래 묻을 것이다. 그런데 용바위로 가느라고 이미 지나간 적이 있는 길인데 그때는 왜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을까? 안개가 잦은 곳이니 안개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새벽에 안개는 없었던 것 같다. 아직 세상이 다 밝아오지 않아서였을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눈이 멀어 있었던 것이 더 확실한 이유일 것이다. 무엇인가에 집중을 하면 그 때부터는 그 대상밖에 보지 못하고 다른 것에는 눈이 멀어버리고는 했다. 용바위에 가면 모후산이 어떤 방식으로든 손을 내밀어 줄 것이라는 생각에 나선 길이었으니 물이 줄어 든 호수 바닥에 눈길이 가기나 했겠는가?
그 풀들의 세상에 현희와 함께 걸었던 길이 멀리멀리 이어졌다.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 그 길을 걸어 산으로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산에서 사람들은 제 몸 아래 목숨을 씨앗처럼 묻었을것이다. 그 산, 꽃을 향하여 나무를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더 이상 총을 쏠 필요가 없어져 잠잠해지자 그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서둘러 꽃을 피웠을 것이다. 매미꽃, 얼레지, 노루귀, 복수초, 히어리… 그래서 그 산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출렁이던 가슴이 끓어올라 터질듯했다. 산울음 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그날 밤을 새워 긴 시를 썼다.
아버지의 꽃짐 -어느 여순동이의 입을 빌려 쉰 다섯 해를 노래하다
총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캄캄한 산으로 사라졌습니다 날이 밝자 사라진 이들의 눈빛을 닮은 사내들이 끌려가고 이름이 같은 이들이 불려나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피투성이의 거리를 발 적시며 도망 나온 처녀와 이름을 숨긴 사내가 만나 혼인을 하고 내 어미아비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낮과 밤의 주인이 바뀌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편이 갈리고 밤사람들을 따라간 아버지는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람의 이름을 배워 부르기 시작한 날부터 어머니는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될 이름 하나 내 가슴에 묻어주셨습니다
잘나고 똑똑헌 사람들은 그때 다 산으로 갔지야 세상에 남은 잘난 놈은 암도 없그만 할머니는 밤마다 아랫목에 고봉밥 한 그릇 묻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서른 다섯 해였습니다 할머니의 상여에는 길고 긴 기다림이 함께 실려 나갔습니다 시월 마지막 날 할머니의 제삿날이면 고봉밥 한 그릇이 젯상에 더 올려졌습니다
사돈을 맺지 말라는 집에서 태어나 사랑한 여자 하나 없이 홀로 푸르러지다가 사돈을 맺지 말라는 집에서 태어나 사랑한 남자 하나 없이 홀로 꽃피어 있던 여자를 만나 어미아비가 되어 이제 내 나이 쉰이 넘고 억새꽃처럼 머리 희어졌습니다
해마다 시월이 오면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웅웅웅웅 울려오는 가슴앓이 그 이름을 지닌 사내의 자취를 찾아 바람처럼 반란의 산하를 떠돌았습니다 어머니는 일흔 넘어 스스로 눈을 닫아 세상을 보지 않은 채 선모초 꽃처럼 희디희게 여위어가십니다
또 아침이 오는군요 새벽에 길을 떠나 모후산을 오르다가 돌아보는 땅 밝아오는 세상을 짊어지려는 남도의 언덕들이 엎드려 쓰러진 사내들의 등을 닮았습니다 그 등허리마다 희고 붉고 노랗게 피어오른 가을꽃들 왜 죽창이 아니라 꽃인가요 부르짖으려는데 가슴 속에서 날아오른 이름이 언덕에 핀 꽃잎에 가서 맺힙니다
그곳에 계셨군요 아버지 반란의 땅 남도의 언덕마다 아침을 향하여 지고가야할 세상을 꽃 피워 짊어지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당신이 버리고 간 증오가 내 가슴에만 남아 있었군요 당신이 다 풀어버리고 간 한이 내 삶에만 맺혀져 있었군요 풀어버리라고 풀어버리라고 산으로 오르는 내 발길 꽃피워 붙잡으시는 아버지
그래요 한 번도 입 밖에 내어 부르지 못해 가슴 속에서 꽃씨가 되어버린 당신의 이름 세상에 날려 보내고 이제 당신의 꽃짐을 받아 내가 집니다 한 목발 한 목발 아침세상을 향하여 짊어지고 가서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의 나뭇청에 부리겠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총칼을 겨누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서로 아끼고 섬기는 세상 그런 아침세상을 이루겠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1년 쯤 시를 쓸 수 없었다. 현희에 대한 그리움이 들물 날물처럼 가슴을 채웠다가 비웠다가 하면서 삶을 쓰라리게 했다. 더는 시를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이제 시를 그만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 갈 무렵 뜬금없이 산울음 소리가 들렸다. 일을 나가기 위해 새벽밥을 먹고 마악 집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산울음 소리를 따라 차를 몰아 길을 나섰다. 접치재였다. 길은 접치재에서 시작되었다. 등산로를 따라 조계산으로 오르는데 산울음 소리가 길에서 벗어나 저쪽 골짜기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우거진 숲이었지만 봄이라 길을 내며 가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골짜기 물가에는 큰괭이밥이며 흰털괭이눈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낮은 곳으로 햇살을 끌어 내리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앞을 가로막는 바위 위로 힘들게 기어 올라가자 눈앞에 편평한 골짜기가 펼쳐졌다. 그 골짜기에는 보라색 얼레지들이 무리를 지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산울음 소리가 멎었다. “우리나라 꽃 중에서 잴로 이름이 이쁜 꽃이 뭔지 알아요? 얼레지라는 꽃이어요. 꽃도 이쁘고 잎삭도 이쁘고, 누가 그러데요. 어떤 사람이 총을 맞었는디 그 꽃을 안 다칠라고 애를 씀시로 꽃을 비켜서 넘어지드라네요. 말도 안 돼재라. 죽냐 사냐 허는 판에 꽃이 눈에 들어오기나 허겄어요? 그 사람한티서 나온 피로 꽃이 범벅이 되었는디 그래서 그 꽃 잎삭에는 시방도 핏자국이 있다네요.” 핏자국 선연한 얼레지 꽃밭에서 현희가 들려준 꽃이야기가 떠오르면서 나는 다시 시에게로 돌아왔다.
얼레지
어둠 속에서도 여기까지 꽃을 따라 왔으니 꽃눈을 지니고 있었겠구나 매복한 젊은 토벌군은 낮에 보아둔 꽃을 겨냥하였겠지 꽃길따라 꽃세상 찾아가는 어진 사람의 가슴을 어찌 겨누겠는가
한 쪽 무릎은 꽃 비켜 꿇고 한 손으로 나무 밑둥 짚으며 가만히 쓰러진 사람 마지막 더운 숨 세어나오는 가슴으로 꽃 한 포기 보듬고 말았으리
핏자국 고스란히 올해도 핀 얼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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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글에 사진이 뒤엉켜 읽기 불편해서 한 눈에 들어오게 웹문서로 만들었습니다. 실은 나도 읽기가 불편했거든요.
잘 읽었습니다. 해화형 살아온 이야기와 꽃, 그리고 여순에 대해 냉정하게 거리를 둔 기록문 보고문 등이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꽃이 다시 보입니다. 모후산 피나물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오는 봄날 해화형 갈 때 함 따라가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