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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기호학과 자유로운 바람의 동질성
-조신권 시인의 시적 대응과 따뜻한 영성(靈性)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편집고문)
1. 서정양식으로의 그 심원(深遠)함
모름지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가 『하디스』에서 “학자의 잉크는 순교자의 피보다 더 신성하다.”라는 지적은 미래가 불확실한 시간대에 있어 뜻깊은 삶의 일깨움이다. 까닭에 특정한 시인의 푸른 생명적 기호와 맞물린 상징성과 고뇌로 응축된 결과물에 해당하는 한 편의 ‘시 읽기와 감상’은 못내 지혜로운 삶의 잠언(箴言)이다. 일단 「창조적 기호학과 자유로운 바람의 동질성-조신권 시인의 시적 대응과 따뜻한 영성」에 관한 기술은 침묵과 단절의 계절에 또 하나의 반증으로 「서정양식으로의 그 심원함」에 맞물린 논의에 해당되기에 보다 각별하다. 여기서 깊은 사유(思惟)의 현상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힘의 연계선상에서 피를 말리는 힘겨운 작위(作爲)는 지극히 성스러운 정신노동의 결과이다.
차제에 시인식의 전환이 한층 바람직한 현재성에서 ‘지금(now)’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강물처럼 무모하게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가치와 의미로 채워가야 하기’에 온전한 정신작업의 종사자인 조신권시인의 세계고(世界苦)를 극복하는 지난(至難)한 일념에는 비장감이 묻어있다. 특히 지난 2018년에 이 시대의 원로영문학자인 조신권 시인은 삶의 양상을 가식 없이 그려내어 그 자신을 노목(老木)에 견준 시집『노목의 연가』로 제35회 한국크리스천문학상을 수상한 존재감의 실체이다.
한편 그의 시편 중 절창(絶唱)에 해당되는 <노목의 연가-어느 노목 아래서>에서 “어떤 미련도 없이 이제껏 맺어온 이음매를 푼다."고 존엄한 삶의 현재성을 확증한 것도 그렇지만 “멀리서 빛으로 다가오는/당신을 위해/다소곳한 자세로/백조의 연가를 부른다고 노래해”를 나직이 읊조리며 ‘영원 자존자인 엘로힘(Elohim)’ 앞에서 투명한 영혼을 응시하는 개아적 집념은 경이롭다. 까닭에 시적 연계성이 잇닿은 시편 <노목처럼>에서 “어차피 우리 벌거숭이로/흙 속에 널브러질 터/차라리 햇살만 입고 가련다.”는 시적 형상화에서 ‘무욕적 삶의 경지를 보여주는 시 심리의 발현(發現)은 합리적인 해법의 당위성을 지니는 반면에, 자아와 동질성을 지닌 행위를 그 자신의 신앙적 성숙성에 비춰 구도적으로 처리한 회화적 기법은 보다 역동성을 지닌다.
각론하고 조신권 시인의 ‘동심원 모양의 띠인 나이테’인 그 경력은 모교인 연세대학교에서 국내 최초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다량의 번역시와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특히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수많은 제자와 후학육성에 전념하면서 창작과 집필에도 열정을 쏟아왔다. 그의 저서에는 『존 밀턴의 문학과 사상』을 포함하여 번역서인 『T. S. 엘리엇 시집』외에도 창작집 『세월의 향기』, 『인생의 등마루에 서서』 외 다수가 있으며, 앞서 주요작품 일체를 묶어 총 40권의 『운암(雲岩) 조신권 교수전집』을 포함한 수십 권의 저작물을 세상에 묶어냈다. 어디까지나 한편의 시는 ‘창조주께 드려지는 맑은 영혼의 기도’이기에, 그만의 시론에서 화자(persona)의 시적 해법은 “학문과 창작을 통한 하늘나라 확장”에 잇닿아 있다. 한 사람의 독실한 신앙인이며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으로서 한결같은 믿음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라.”는 삶의 잠언이기에, 충직한 독자라면 오래 기억에 배경지식(schema)으로 담아둘 일이다. 그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삶의 여적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탐구한 문학연구전집 간행은 물론 일관성을 지닌 ‘신앙과 생명, 그리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담은 문학연구’에서 그 존재감은 뜻깊다.
여기서 2021년 6월 한국기독교학술원의 제10회 학술상을 수상한 조신권 연세대 명예교수는, 영국청교도시대의 섬세한 표현과 압도적인 상상력의 생산물인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의 연구업적이 극명함은 새삼 감사할 일이다. 모처럼 한결같은 집념에 기인(起因)한 ‘보람과 감사, 감동을 안겨주는 매개의 작동’인 시적 행보(行步)는 지극선의 심성이 드러나는 편이다. 그 같은 연유로 잘 다듬어진 목관악기에서 쏟아내는 투명한 음계는 시적 치유의 가능성을 수용한 실재성에 견주어 이채로운 그만의 시사(詩史)는 <처음과 끝, 그 심원함이여>에서 다양한 시학의 예술성이 혼재된 창조물에 의해 새삼 극명하게 확증되는 편이다.까닭에 인간심리의 잠재적 가능성의 결과는 짐짓 원형(archetype)의 관점에서 ‘바람 재 넘으며 하나 더 늘어나는 나이테’의 이미지는 무의식이 지배하는 깊음의 공간에서 창조의 질서가 맞물린 장소성(Sense of Place)으로 해석된다. 그것은 에드워드 호퍼(Eward Hopper)의 시선이 닿은 모든 대상과 공간이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듯 무미건조한 사각형에 익숙한 현대도시 위로 햇빛이 쏟아지는 ‘사각형 유리창 너머에 앉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잠시 관망할 과제이다. 따라서 가시적인 대상과 관련한 정보를 수리화,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공간(Space, 外境)은 물리적 또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또 하나 문화적인 인간의 눈과 마음, 태도와 가치를 통해 나타나는 공감각적(共感覺的)이고 현상적 공간인 장소(Place, 感應)의 상이점은 조신권 시인의 ‘시 읽기와 감상’에서 응당 유념할 상황이다.
2. 천상의 층계 오르기와 바람의 영혼
차제에 시적 상상력을 종종 확장할 수 있듯이 환경론의 선구자 레이첼 캇슨이 그 자신의 저서인 『침묵의 봄』에서 ‘새가 사라진 거대한 숲의 침묵을 상상하여 볼 때’, 한순간 우리를 엄습하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공포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시작(詩作)의 분할에 접근하여 잠시 영혼의 잠식에 머무는 생명적인 행위는 지극히 합목적적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조신권 시인의 경우, 시적 골격을 유지하는 특이성은 생명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회귀(回歸)임에 틀림없다.
해마다 인각(印刻)되는/나무의 나이테/동심원 모양의 띠/기후 변화 따라/생기는 모양도 다양한데/그 시작과 끝은
봄가을여름 아닌/겨울, 참으로 심오하고 심원하 여라/
-<처음과 끝, 그 심원함이여>에서
위에 인용한 시편에서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 자인 알파(α)와 끝 자인 오메가(ω)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광대함과 스스로의 존재하는 모든 것의 포괄성을 뜻한다.’ 신약성서에서 창조주와 그리스도의 표징임은 주지할 바다. 한편 어휘의 다시읽기에서 ‘받아’가 때로는 ‘바다’로 변형되듯이 문자적 개념 파악에서 ‘심원(深源)함’이 ‘물의 행로’와 잇닿은 연계층위로 파악됨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모처럼 의식의 심층에 내재된 신앙적인 기원은 점차 생의 불꽃이 꺼져가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겨울, 참으로 심오하고 심원하여라.”라는 영탄적인 기법(craft)은 ‘비록 단절과 침묵의 계절인 겨울’일지라도 ‘부활의 확고한 믿음을 지닌’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지극한 확신은 지적인 세계를 뛰어 넘은 놀라움으로 확장된 양상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기대만큼 열린 공간, 즉 천상을 향한 남다른 열정과 투명한 주제성이야말로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울림을 명증하는 ‘몽상(夢想)의 시학’인 지난한 몸부림이다. 까닭에 프랑스의 신비주의자인 기욤 드 생티에리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바로 자기 안에 그 모습을 비추는 자의 찬란함에 정복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듯 그의 시적 충동은 아득한 무채색 수묵화로 정체성을 지니기에 “해마다 새겨지는/인생의 나이테/육체의 주름살인가/모진 풍상 겪은 영혼의 흔적인가(처음과 끝,그 심원함이여)”에서 새삼 입증되듯 ‘모진 풍상 겪은 영혼의 흔적’은 절제된 감정에 의한 담백한 시격(詩格)으로 일관되게 처리되는 편이다.
각론하고 그 두렵고 어두운 그림자도 말끔 걷어낸 온전한 믿음은 소망의 빛으로 전이(轉移)되기에 거부감이 없다. 이 같은 현상은 오웬의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인식의 깨어남에 충직하여 감동의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는 관념의 일탈에 견주어 시학교수인 랜섬(J. C. Ransom)의 “시는 자연미의 표현이며, 상상이라는 훌륭한 기능이 시의 작인(作因)이다.”라는 그 역설에 결속된 보기다. 비록 고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진실하듯 “우리가 덧없이 흘려보낸 오늘은 앞서간 어제의 그들이 그렇게 소망하던 내일이었다.”는 소포클레스의 엄숙한 생명외경에 대한 가르침은 새로울 따름이다. 그렇다. 불안감이나 어두운 그림자는 ‘증오, 시기, 불투명’ 등의 부정적 요소인 모순성을 말끔 씻겨내기 위한 시의식의 변주는 간과치 말아야 한다. 짐짓 상징의 숲을 거니는 시인은 사회적 생태론의 창시자 머레이 북친의 지적처럼 생태위기를 벗어나려면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무너트려야 한다. 이처럼 차고 처연하되 담백한 그만의 시격은 고통을 눈뜨게 하는 빛나는 응결체로 작동한다. 모처럼 서정성이 내재된 시편에 수용된 현대인의 불안의식과 감각적 표현에 내면인식의 중량감이 더해지고 눈부심이 주어짐은 목가적 서정성에 연유한 탓이다.
또 한편 ‘지극히 현대적임을 자처했던’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트 벤이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무릇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라는 지적은 분별력으로 가늠될 것이다. 까닭에 화자인 그 자신은 못내 ‘순진무구함을 지켜내기 위한 시적 행위로 상처받고 소외된 이들을 치유하며 실존적 상황과 치열하게 대면하는 시인’으로 평가해도 결코 지나치지 아니하다. 이처럼경계 없이 “해마다 새겨지는/인생의 나이테”에서 해법이 주어지는 시적 상상력의 추이는 따뜻한 감성의 차원을 높여 영성(靈性)으로 관통하는 통로이며 신비로운 삶의 과정이다. 그것은 시의식의 다양성을 허드슨(W.H.Hudson)이 “시는 상상과 감정을 통한 인생의 해석이다.”는 지론에 지극히 부합된 그 자신의 시적 감응은 비교적 짧은 호흡처리로 ‘모진 풍상 겪은 영혼의 흔적인 나이테’ 또한 천재일우의 연(緣)이 닿음은 유념할 바다.
특히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정황이라면 2020년 10월 2일자 미디어뉴스의 인터뷰에서 "풍시조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 널리 메아리쳤으면"에서 “어화당(語畵堂) 박진환 시인은 지금까지 60년간을 순수한 시적 열정으로 시창작과 비평 활동을 해오고 있는 원로시인이요, 평론가요, 교수요, 박사이며 풍시조의 창시자이다. 뿐만 아니라 1992년부터 현재까지 월간지『조선문학』을 창간한 후 비정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매달 한 호도 빠짐없이 발행하여 지령 353호를 기록한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다....(줄임)”는 사려 깊은 배려일 것이나 평자와 문단의 조우(遭遇)가 없는 일면에서도 「조신권 교수의 한국기독교문학관 28」에서 <신앙고백인 성찰, 사랑과 평화를 추구한 – 시인 엄창섭」의 시편평설은 문단선배로서 그 넉넉한 헤아림의 실상이다.
3. 영혼의 울림과 눈부신 존재의 꽃
모름지기 사회학·심리학·음악학 등에도 해박한 지성으로 비판이론을 주창하며, 미학의 발전을 역사진화와 진리추구의 중요한 요소임을 주창한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는 시의 본질인 서정시의 죽음을 선언했지만, 질과는 상이하게도 양적 전화라는 측면에서 지금도 서정시는 여전히 시의 모태(母胎)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참으로 기묘하고 심원한 지고/예사로이 세지 말고/영혼 속 갈피갈피에 새겨져/바람 재 넘으며 하나 더 늘어나는/나이테, 그 까칠한 희망을/이 해엔 더 울창케 하리라(처음과 끝,그 심원함이여)”에서 유한적이고 때로는 허망한 삶도 담담히 풀어내고 있지만, 인간은 자기흔적을 남기는 존재이나 끝내「전도서」의 일깨움처럼 ‘허공, 무념, 무상’에 깊이 관계한다.
비록 시의 본질인 서정성과 사상의 자유로운 교감을 거쳐 빚어낸 그의 시편들은, 안식할 처소가 없어 방황하는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해 존재의 뿌리인 ‘삶의 집짓기’라는 엄숙한 현상 앞에서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이처럼 한 편의 시가 상상과 감정을 통한 생명의 재해석임은 명백하지만,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 심리는 특정한 시인의 정신적 생산물의 형성과정에서 내면인식과 결부된 시적 응시와 자아의 변주에서 자연이법을 거스르지 않은 결과이기에 전체적으로 심도 있게 논의한 시편 <처음과 끝,그 심원함이여>는 그 자신이 호흡하는 삶의 일상과 처소에서 절대자에게 드리는 ‘온전한 기도와 느낌, 육성’은 신앙인으로서의 눈물겹도록 ‘느림의 미학’이기에 진리를 밝히는 불(燈)이며, 생명기호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자명한 것은 우리시문학의 밝은 미래는, 정신적으로 고향을 상실하여 자연의 소중함을 망각한 이 땅의 대다수 이들에게 '만남과 조화로움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 자신과 같은 고매한 품격을 지닌 좋은 시인들이 얼마만큼 고뇌하고 노력하는가의 문제와 결부된다.
결론적으로 ‘작은 신의 대행자’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임(고후 2:15)”을 자처한 삶에서 품격을 지닌 시인으로서 불멸의 시혼을 다독이되 시대적 소임을 엄격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모처럼맑은 영혼의 소유자에게 거는 각별한 기대치라면 영감의 비의(祕意)를 매듭짓는 창조자로서의 역할담당이다. 모쪼록 ‘물속에 놓여 있는 돌도 함부로 치우면 물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음’을 자연의 이법에 거역함이 없이 풀어낸 조신권 시인이 비록 격앙된 어조나 번뜩이는 예지로 교시하지 않더라도 혈흔(血痕)같은 절절한 시편에서 시적 감응과 시적 상상력의 확장을 통해 필히 재현할 일체의 집념은 기억 흔적에 오래 각인시킬 창조적 행위다.
* 강릉출생, 「화홍시단」(1965년, 발행인), 「시문학」출신, 한국시문학 학회 회장, 관동대학교 교수(대학원장 및 총장대행)
역임, 현재 사)k 정나눔 이사장, 김동명학회 회장. 월간 『모던포엠』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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